제 1부 수류탄에서 시작하다
<한필순은 누구인가>
그는 1933년 평남 강서 출신으로
처음 공군장교(공사5기)로 출발했으나
나중에는 서울대(물리학), 미 일리노이대, 캘리포니아대 등에서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군출신 과학자이다.
1970년대 당시,
황무지나 다름 없는 한국의 방위산업을
일약 개도국 수준으로 끌어 올린 장본인으로서,
한국형 수류탄, 낙하산, 방탄 헬멧, 발칸포, 각종 레이저 무기 등,
우리의 기본 무기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국산화됐다.
그 무렵의 이야기로서
"한국의 방위산업 사령탑에는 청와대 오원철(吳源哲) 이 있고
그 현장에는 반드시 한필순이 있다" 고 할만큼
두 사람은 방위산업 진흥에 쌍벽을 이뤘다.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혼란기에 접어든 1982년
그는 오랜 군생활을 접고 전역한 다음
에너지연구소 부소장 겸 대덕공학센터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실로 뒤숭숭한 분위기와 침체에 빠진 연구소였지만,
그는 여기서 다시 원자력 분야와 새로운 인연을 맺으면서
중수(重水) 및 경수(輕水)로 핵연료 등을 독자 개발케 하는 등
침체에 빠졌던 당시 원자력기술 분야에 힘을 불어넣는다.
그는 이 어려운 과정에서
그 동안의 군인과 과학자 모습에서 벗어나,
경영자와 전략가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그런 2년 간의 눈부신 업적을 인정받아
1984년부터 에너지연구소(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했고
그 후 7년 동안 최장수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지내면서
드디어 한국형 원자로를 독자 개발하는 과업을 달성한다.
실로 한국 과학사에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1991년 2월
우리나라 과학자로는 유일하게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드뇌르' 를 받은
우리 원자력계의 대부(代父) 이다.
지난 1997년부터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환경정화 기계 제조회사인 (주) 가이아를 설립,
대표이사로 맹활약중이다.
그는 이 글을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의 방위산업 추진과정과
원자력 개발 등에 얽힌 많은 비화(秘話)를
자신의 경험에 입각해 생생하게 들려준다.
01. 수류탄1 - 너무 무거워
1970년 8월,
연구발전사령부를 해체하고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창설되었는데,
당시 나는 현역 공군중령으로
국방과학연구소 병참물자개발실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4개월 후인 1970년 12월 중순,
신응균(申應均.전 국방차관.작고) 연구소장이 급히 나를 찾았다.
"韓박사, 한국군의 체형에 가장 적합한 수류탄을 만들어야겠어.
도대체 미군이 쓰는 것을 그대로 사용하니 잘 맞지가 않아.
고구마형 수류탄은 너무 무겁단 말이야. "
"한국군의 체형에 맞는 수류탄이라…. "
내 방에 돌아와 申소장의 말을 되뇌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申소장의 지시는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
이제는 우리 기술로 국산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지라 어떤 핑계로도 수류탄 개발은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곧바로
서울 노량진에 있는 병참물자개발실 작업실로 향했다.
이 곳은 종전의 연구발전사령부가 무기를 개발하던 곳인데,
국방과학연구소가 창설되면서 이 곳을 인수해 보니,
쓸 만한 장비는 하나도 없어 마치 부도난 공장을 연상케 했다.
그간의 연구 보고서도 남아 있지 않았고
구성원들도 대부분 떠나버린 상태였다.
두 명의 인력을 보강했지만
병참물자개발실 인원은 고작 1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과 머리를 싸 맬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 수학과 출신이자 공사 2년 후배인
정해일(丁海一.62) 소령을 부책임자로 임명,
수류탄 개발 실무를 총괄케 했다.
그러나 쌀 한 가마에 7천5백원 하던 그시절,
수류탄 개발비로 책정된 예산은 고작 50만원에 불과했다.
서울 공대 조교수로 갓 강단에 선 이면우(李冕雨.54) 박사와
서울 사대 체육과 김지학(작고) 교수 등 두 명을 연구원으로 위촉,
외부 자문을 받았다.
'신사고 이론' 으로 유명한 李교수는
당시에도 아이디어가 풍부해
'아이디어 뱅크' 로 불렸고,
金교수는 수류탄 던지기 요령 연구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
몇달 동안은 난상 토론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1971년 7월 중순 일요일 아침,
우리는 워커힐 인근 한강 백사장에 모였다.
자갈로 수류탄 던지기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앞서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할 겸
먼저 수영을 즐기게 한 다음
불고기 점심으로 모처럼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오후 2시.
실험을 위해 먼저 주변에 있는 자갈을 전부 한 곳에 모은 다음
그 무게를 일일이 저울에 달고 그 위에 무게를 표시했다.
金교수 설명 요령에 따라 연구위원 열 명이 자갈을 던졌다.
한국형 수류탄 개발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개발 지시를 받은지 7월이 지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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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수류탄2 - 미군 자료를 가져와
자갈 던지기 실험은 오후 내내 계속됐다.
어느덧 한강 백사장에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던지고 또 던졌다.
나중에는 어깨가 뻐근할 지경이었다.
최종 측정 결과
3백80g짜리 자갈이 가장 멀리 나간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어 3백80g 무게의 모의 수류탄을 만들었다.
모양은 기존의 고구마형을 비롯, 사과형 등 다양하게 했다.
수류탄 속에는 납이나 모래를 채워 넣었다.
그후 육군하사관학교 훈련생들을 동원,
수류탄 투척(投擲) 실험을 계속해 본 결과,
사과형 모의 수류탄이 가장 멀리 나갔다.
미군이 쓰고 있는 고구마형 보다 5~10미터가 더 멀리 나갔다.
우리로서는 소중한 발견이었다.
전장에서 수류탄의 투척 거리는 생사를 좌우하곤 했다.
적보다 수류탄을 5~10미터 더 멀리 던질 수 있다면
그만큼 안전하다는 얘기다.
이런 연구결과를 종합해서
3백80g짜리 사과형 수류탄을 만들었다.
고구마형 보다 120g이나 가벼웠다.
야구공 보다 조금 작아 손에 잡히는 감촉도 좋았다.
신응균(申應均) 국방과학연구소장이 지시한지 8개월만이었다.
1971년 8월말 申소장에게 그 결과를 보고했더니
의외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韓박사,
사과형 수류탄이 그렇게 좋다면 왜 미군이 쓰지 않을까?"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마치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답변을 못하자 申소장은 이렇게 지시했다.
"왜 미군이 사과형 수류탄을 사용하지 않는지 자료를 찾아오라"
그러나 아무리 수소문 해 봐도 그런 자료는 구할 수가 없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기울였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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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수류탄3 - 미군 수류탄과 같네
그로부터 3개월후
오원철(吳源哲.71) 대통령 경제2수석이 申소장에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라며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기본 화기를 국산화할 수 있느냐' 고 물어왔다.
기본화기라면 수류탄, 기관총, 박격포 등을 말했다.
이에 따라 申소장은
대학교수, 산업계 인사 등 관계자들을 만나 자문을 구했지만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朴대통령이 申소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申소장,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해
국산 무기를 개발하라고 국방과학연구소를 만든 것 아닙니까.
이미 미군은 철수를 시작했어요.
전쟁이 나면 우린 모두 죽습니다.
국가 위기상황에서 '된다' '안된다' 따질 수 없어요.
무조건 만드세요. "
朴대통령은 申소장이 못 미더웠던지
吳수석에게 방위산업을 총괄토록 했다.
吳수석은 즉시 기본화기 분과위원회를 구성하고
곧바로 기본화기 국산화 사업에 착수했다.
암호명은 '번개사업' 으로 명명됐다.
이에 따라
수류탄 분과위, 기관총 분과위, 박격포 분과위 등이 만들어졌고,
나는 수류탄 분과위 간사를 맡았다.
당시 수류탄 분과위는
미군부대 소속 한국계 소령,
금속공학과 교수,
관련 업체 사장 등 모두 10명으로 구성됐다.
첫 모임에서 吳수석이 나에게
그간의 연구결과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사과형 3백80g짜리 수류탄을 만들게 된
전 과정을 상세히 보고했다.
그러자 미군부대 소속 한국계 소령이 깜짝 놀라며
"미군이 이제 막 개발해 보급하기 시작한 수류탄이
지금 말한 것과 같이 꼭 그렇게 생겼다" 며
"韓박사가 만든 것을 가져 와 보라" 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다음 회의 때 그걸 가져다가 비교해 봤더니
모양과 성능이 똑같았다.
나는 이 사실을 곧바로 申소장에게 보고했다.
申소장은 실물을 비교하더니 그제서야 뛸듯이 기뻐했다.
처음에는 이렇다 할 반응도 없이 자료만 요구,
실무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더니
이번에는 전혀 달랐다.
그무렵 申소장은
무기개발 문제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치아가 모두 흔들릴 정도였다.
그는 뇌관만 제거한 우리 사과형 수류탄을 들고
즉시 청와대로 올라갔다.
朴대통령은 보고를 받자마자
"빠른 시간내에 신형 수류탄으로 모두 바꾸라" 고 지시했다.
한국형 수류탄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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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방탄헬멧1 - 아내의 지원금 20만원
1971년 3월초,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한 장교가
'급전' (急傳) 이라고 찍힌 누런 봉투가 들고
급히 내 사무실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봉투를 뜯어본즉,
이스라엘제 방탄 헬멧에 관한 3장 짜리 팜플렛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뒷 면에는
미국의 유명한 무기실험연구소('화이트') 가
이 헬멧이 기존의 철모와 맞먹는 성능을 가졌음을 보증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주재 한국 무관이 긴급 입수, 합참에 보낸 것이다.
팜플렛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방탄 헬멧이라면 한국군도 꼭 필요한 장비였다.
이스라엘이 만들었다면 우리도 만들 수 있다는 오기가 생겼다.
연구비가 문제였는데,
아내(姜正愛.62)가 20만원을 선뜻 지원해 주었다.
당시 내 월급(4만원)의 다섯 배나 되는 꽤 큰 돈이었다.
만약 실패하면 그 돈은 고스란히 날리는 셈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술 담배도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나를 믿고 선뜻 돈을 내 줬다.
실험에 성공하면 정식으로 예산을 신청할 생각이었다.
그만큼 방탄 헬멧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즉각 노량진 병참물자개발실에서 방탄 헬멧 개발에 착수했다.
연구원들은 나와 함께 밤 샘을 밥먹듯 했지만 불평 한마디 없었다.
팜플렛 내용을 철저히 분석한 후
우리는 난상토론을 벌이곤 했다.
그러나 최대 걸림돌은 재질이었다.
팜플렛을 달달 외울 정도로 읽어 봤지만
그 재질이 뭔지는 알아 낼 수가 없었다.
관련 자료와 문헌들도 전부 조사했다.
천신만고 끝에 나일론이 방탄소재로 쓰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김은영 화공연구실장이
접착재료와 나일론 가공기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방탄력을 실험할 장비가 없는 게 또다른 고민거리였다.
궁리 끝에 작업실에 있는 고물 장비들을 이리저리 뜯어내
낙추(落墜) 시험기를 만들었다.
쇠 막대에 총알처럼 생긴 10kg 짜리 쇠뭉치를 매달아 놓고
아래로 떨어뜨려 방탄력을 시험해 보는 장비였는데,
쇠뭉치를 떨어뜨릴 때는
총알 처럼 뽀족하게 생긴 부분이 먼저 바닥에 닿도록 했고,
바닥에는 나무판을 깔고
나일론 천 여러 겹을 접착제로 붙여서 올려놓으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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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방탄헬멧2 - 서광이 보인다
1971년 6월초 어느날 저녁,
작업실에는 유난히 긴장감이 감돌았다.
방탄력을 시험한지 1천번째가 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시험기를 조작하는 연구원의 손끝이 떨렸다.
'실시!' 하는 구령에 맞춰
1m30㎝ 위에 매달려 있는 쇠뭉치가 밑으로 떨어졌다.
'탕!' 하고 튀는 소리가 우리의 귓전을 울렸다.
모든 시선이 바닥에 놓여 있는 여덟겹 짜리 나일론으로 쏠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쇠뭉치를 맞고도 어느 한 곳 뚫리기는 커녕 그대로 있는게 아닌가.
순간 작업실은 '와!' 하는 함성으로 가득찼다.
짜릿한 전율이 내 몸을 스쳤다.
이 실험에서 우리 연구진은
나일론을 일곱 겹 붙이면 방탄력이 철모와 비슷하고
여덟 겹이면 그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작업 착수 3개월만의 쾌거였다.
비용도 고작 5만원 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또다른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탄 헬멧은 승인사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산이 한푼도 책정돼 있지 않아서
8겹 나일론 방탄헬멧 제작에 필요한
금형(金型) 제작비 2백만원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당시 내가 살던 은평동의 16평 단독주택 가격이 2백만원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세 겹 나일론 방탄 헬멧을 시험삼아 만들어 봤다.
망치로 쳐도 끄떡 없을만큼 방탄력은 우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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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방탄헬멧3 - 트럭에도 멀쩡
하루는 송흥빈(宋興彬) 국방부 방위산업과장(당시 공군대령)이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 작업실을 방문했다.
그는 방위산업의 예산권을 쥐고 있는 실세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앞 마당에 시험용 방탄헬멧을 엎어 놓고
우리 연구원이 망치로 내리 쳤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짚차를 동원, 헬멧 위를 달리게 했다.
모두 숨을 죽였다.
마침내 짚차가 방탄 헬멧 위를 사정없이 지나갔다.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쏠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방탄 헬멧은 끄떡없이 처음 그대로였다.
순간 우리는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신나게 박수를 쳤다.
가슴이 뿌듯했다.
방탄 헬멧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송과장은 그래도 미심쩍은듯
이번에는 일반 군용 트럭으로 시험을 해 보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생겼다.
宋과장의 운전병이
트럭을 몰고 방탄헬멧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됐다.
육중한 트럭 바퀴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손을 불끈 쥐었다.
긴장한 탓인지 금새 손에 땀이 촉촉히 배었다.
트럭 앞 바퀴가 막 헬멧에 닿으려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2~3초가 지났을까.
터질듯한 환호성이 들려 왔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서로 얼싸안고 야단들이었다.
방탄 헬멧은 멀쩡했다.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宋과장을 쳐다봤다.
그도 흥분한 탓인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즉각 오원철(吳源哲.71) 대통령 경제2수석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보고하는 그의 목소리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통화를 마친 후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韓박사, 수고했어.
돈도 들이지 않고 이렇게 중요한 것을 개발해 내다니
앞으로 정말 기대가 커!" 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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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방탄헬멧4 - 망치들고 청와대로
이틀 후 吳수석이 전화를 했다.
"韓박사, '괴상한 것' 개발했다며?
당장 방탄 헬멧과 망치를 갖고 청와대로 들어 와 봐!"
나는 宋과장과 함께 서둘러 청와대로 향했다.
1971년 6월 중순 오후였다.
청와대 정문을 지키던 경비가
놀란 표정으로 우리 일행을 제지했다.
"아니, 망치를 들고 청와대에 들어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망치는 두고 가십시오. "
吳수석의 지시라고 얘기해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전화로 확인하더니 그제야 우리를 들여 보냈다.
吳수석과 함께 청와대 뒤뜰로 갔다.
吳수석은 건장한 경비 한 사람을 불르더니
망치를 건네주며 지시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저 헬멧을 내리 쳐 보게"
경비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온 힘을 다해 방탄 헬멧을 내리쳤다.
순간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방탄 헬멧이 푹 꺼져 버린 게 아닌가.
내 눈을 의심했다.
아니, 트럭에 깔려도 끄덕않던 게 이럴 수가….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1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吳수석이 나를 쳐다보며
"저것 좀 봐!" 하며 소리를 질렀다.
놀랍게도 푹 들어갔던 방탄 헬멧이
본래 모양대로 돌아 와 있었다.
吳수석이 계속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정말 대단하구먼. 대단해. "
그러더니 그자리에서
"한 달 안으로 3백개를 만들어 내!" 하며 지시를 내렸다.
여기에 필요한 경비는 宋과장이 지원했다.
나는 철모보다 방탄력이 뛰어난
나일론 여덟 겹 짜리 방탄 헬멧을
기한내에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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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방탄헬멧5 - 대량생산
그랬더니 吳수석은
"이걸 두 업체에 맡겨 대량생산을 하자" 고 제안했다.
플라스틱 생산업체인 ㈜오리엔탈과 낚싯대 제조사인 ㈜은성사였다.
나는 당시 은성사 조용준(趙容俊.68.한국화이바 회장) 전무를 만나
제조 기술을 넘겨줬다.
그후 趙회장은 대량생산 기술을 개발,
방탄 헬멧 제조의 꽃을 피웠다.
시간당 한 개 밖에 못 만들던 것을 10개씩 만들어 냈다.
그러나 방탄 헬멧에 대한 오해도 적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방탄헬멧을 전군에 보급하라고 지시했더니
일선 부대에서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이유인즉,
전투시에 '철모'로는 밥을 해 먹을 수 있지만
방탄 헬멧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방탄 헬멧은 쇠가 아닌 나일론으로 만들어져
열 전도(傳導) 가 안 될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불에 강했고 열 전도도 매우 잘 됐다.
이 방탄헬멧은 1970년대말 중동 국가에 수백만개가 수출돼
달러를 벌어 들이는 효자 상품으로 큰 몫을 했다.
자주국방은 물론 국가 경제에도 크게 기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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