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자네가 애국자야
그로부터 보름 후인 1975년 가을 어느날,
박정희 대통령이 홍릉 레이저실을 방문한다는 연락이 왔다.
金총리가 레이저실 방문 직후 청와대에 가서
"국방과학연구소에 '이상한 광선'이 있더라"
고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 연구진은 무척 긴장하면서도
속으론 반갑기 그지 없었다.
앞으로 연구비를 대폭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朴대통령이
오원철(吳源哲.71) 경제2수석 등 비서진을 대동하고
레이저실을 방문했다.
나는 레이저 시범(示範)에 앞서 브리핑부터 했다.
朴대통령이 자주국방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점을 감안,
무기개발 쪽에 초점을 맞췄다.
"레이저는 철저히 군사무기로 활용돼야 합니다.
먼저 휴대용.전차용 레이저 거리측정기를 개발한 다음
레이저 레이더와 유도무기 등을 개발할 작정입니다.
앞으로 전쟁은 밤에 일어난다는 점을 고려,
야시(夜視) 장비도 만들겠습니다. "
朴대통령은 매우 흡족하다는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우리가 자체 개발한
탄산가스(CO2) 레이저의 위력을 보여 줄 차례가 왔다.
우리는 행여 지난번과 같은 해프닝이 벌어질까봐 바짝 긴장했다.
먼저 헬륨가스 배관 스위치가 열려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잠시후 이종민 연구원이
7m 거리에 위치한 벽돌과 철판을 향해 잇달아 레이저를 발사했다.
눈 깜짝할 사이, 레이저 광선을 맞은 벽돌이 녹아 내렸다.
철판 한 복판에도 누구나 알아 볼 수 있을만큼 구멍이 뻥 뚫렸다.
성공이었다.
朴대통령이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수고했어. 자네가 애국자네!"
너무 감격스러웠다.
옆에 있던 吳수석도
"병참물자도 잘 만들더니 레이저 쪽도 문제 없겠어" 하며
한 마디 거들었다.
레이저실장을 맡겨 놓고도 못 미더워 했던 데 대한
일종의 사과의 표시로 들렸다.
이후 레이저 무기 개발사업에
전폭적인 지원이 이뤄졌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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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귀가 번쩍 뜨일 제안
1974년 12월 초순 어느 날,
국방과학연구소(ADD) 에 파견대장으로 나와 있는
주한 美군사고문단 소속의 지안콜라 공군 중령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항공공학 박사인 그를
그 특이한 이름 때문에 '장꼴라' 라고 불렀다.
그는 나와 같은 공군에다 계급도 나와 같아서
개인적으로 평소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레이저 무기를 개발하는지
늘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고,
그러느라 거의 매일 내 방에 들르곤 했다.
그런데 이 날만큼은 평소와는 달랐다.
그는 약간 들떠 있었고 왠지 기분도 좋아 보였다.
"닥터 韓, 좋은 일이 있어요.
방금 전에 '美국방부 고등연구국' (DARPA) 에서 연락이 왔어요.
DARPA 프로젝트에 ADD가 꼭 참가했으면 좋겠데요.
모처럼의 기회이니 놓치지 마세요. "
나는 귀가 번쩍 띄였다.
DARPA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주겠다니 이게 웬 행운이란 말인가.
만약 미국방부에서 연구비를 타낼 수만 있다면
늘 예산부족으로 애를 먹고 있는 레이저실로서는
숨통이 확 트일 것 같았다.
DARPA는
1957년 10월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닉 1호' 발사에 성공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이 긴급 대응책으로 만든 기구였다.
1백명의 최고 과학자들로 구성된 최첨단 연구 기관이었다.
당시 안보에 커다란 위협을 느낀 미국 정부는
이 DARPA를 창설,
새로운 방위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케 했다.
그야말로 미국의 운명이 달린 거국적인 프로젝트였다.
이에 따라 DARPA는
세계 주요 대학과 연구소에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방위할 수 있는 개별 연구를 시켰다.
그때 DARPA가 착수한 프로젝트 이름이 바로
'별들의 전쟁' (SDI) 이었다.
1983년 3월 당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별들의 전쟁' 을 선언했지만
그 준비 작업은 이미 1950년대 말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별들의 전쟁' 이란
바로 인공위성을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모든 전투상황을 신속하게 수집.종합해
인공위성으로 적을 공격하는 첨단 과학전쟁이다.
이때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레이저를 비롯한 광선(光線) 이다.
광선을 통해 인공위성간 통신이 이뤄지고
지상에서의 모든 정보가 미국의 방위사령부로 즉각 보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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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차 심사 통과
당시 DARPA에서는
전 세계를 무대로 소련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를 가상해
유럽의 11개 지역과 동양의 1개 지역을 선정,
지역별 광(光) 통신 상황을 조사할 계획이었다.
예컨대 날씨가 좋으면 광통신이 원활하지만,
눈·비가 오거나 안개가 낄 경우는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날씨 변화에 따른 광통신 상태를 정확히 측정하는 게
DARPA 프로젝트 가운데 포함돼 있었다.
나는 지안콜라 ADD 파견대장으로부터 이같은 얘기를 전해 듣고
곧바로 레이저실 연구원들을 소집했다.
이들에게 DARPA 프로젝트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예산 문제로 번번이 국방부와 씨름할 게 아니라
아예 나라 밖에서 연구비를 확보하자.
그래야만 우리 레이저실이 살 수 있다. "
내 설명을 들은 연구원들은
마치 먹이를 발견한 사자처럼 눈에서 빛이 났다.
나는 그날 저녁부터 연구원들과 함께
DARPA에 제출할 연구 계획서 작성에 몰두했다.
겨울밤 살을 에이는 바람이 허름한 창문 틈새로 파고 들어와
방안에 한기가 가득했지만 우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연구비를 타 내려는 우리의 집념은 그만큼 강했다.
정확히 두 달 후,
우리는 '광선' 에 관한 3개의 연구 계획서를 완성했다.
ADD에서는
우리 것(레이저실)을 포함,
총 1백개 과제에 대한 연구비를 신청했다.
마침내 1975년 5월, 1차 심사 결과가 나왔다.
ADD가 제출한 1백개 과제 중 20개만 선정됐지만
레이저실에서 제출한 3개의 연구 과제는 모두 채택됐다.
너무 기뻤다.
그러나 최종심사가 남아 있는 상태인지라
아직 마음을 놓을 단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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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막강 레이저연구실
1975년 11월 하순,
美국방부 고등연구국(DARPA) 은
내가 몸 담고 있는 국방과학연구소(ADD)에
연구비 지원 결과를 최종 통보했다.
놀랍게도
1차 심사에 통과된 20개의 ADD 연구과제 가운데
레이저실에서 제출한 3개의 과제만 선정됐다.
정말이지 꿈만 같았다.
DARPA는
레이저실의 3개 과제를 하나로 묶을 것을 요청해서
우리는 이 연구과제를
'대기(大氣)의 광학(光學)적 특성에 관한 연구'로 최종 이름지었다.
연구비 지원액은 총 20만 달러로
1976~1981년까지 모두 5개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였다.
그런 가운데 국방부도
우리 프로젝트에 1백만 달러를 연구비로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전례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연구비는 총 1백20만 달러,
그러니까 1976년 당시 환율로
2억 8천 8백만원이라는 엄청난 거액이 됐다.
1973년 5월 레이저실 신설 당시
연간 예산이 고작 5천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그것도 단일 연구과제에 그런 거액이 배정됐으니
우리들로서는 모든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DARPA로부터 최종 통보를 받은 날 저녁,
심문택(沈汶澤.1998년 작고) 국방과학연구소장은
'술 한잔 사겠다' 며 레이저실 연구원들을 소집했다.
시쳇말로 '기분이 째지게' 좋았던 것 같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沈소장은 내 어깨를 감싸 안고
내가 당혹감을 느낄 정도로 칭찬했다.
"난 당신 처음부터 알아 봤어. 정말 대단해!
우리 앞으로 잘 해 보자구. "
처음 레이저실 실장에 임명하고서도 못 미더워 하던 태도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이날 모처럼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말없이 수고해 준 우리 연구원들이 너무 고마왔다.
바로 이들이 아니었던들
DARPA로부터 연구비를 따 내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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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본격 연구
1976년 1월 초,
우리는 DARPA 프로젝트에 본격 시동을 걸었다.
말 그대로 '새해, 새 각오'로 '새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특정 지역에서 날씨 변화에 따라 광(光) 통신이 제대로 이뤄지는지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직경 2㎞, 폭 1㎞의
평평한 지역을 찾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레이저나 적외선 등 광선(光線)의 직진성 때문이었다.
또 광선의 변화를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서는
도시처럼 조명이 너무 밝은 지역은 적합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장소를 찾아 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우리는 공군의 도움을 얻어 군용 헬리콥터로 전국을 샅샅이 뒤졌다.
무려 10여 차례나 전국을 순회했다.
비행 도중 위험한 경우도 여러번 있었다.
갑자기 폭설(暴雪)이 쏟아지거나 세차게 바람이 몰아칠 때면
긴급히 비상 착륙을 해야 했다.
해가 진 다음에도 궂은 날씨가 계속될 때면 정말 막막했다.
이런 날은 하는 수 없이
인근 마을을 찾아 하룻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이같은 우여곡절 끝에 거의 한달만인 1월 말경,
마침내 우리가 원하는 장소를 찾아냈다.
안성군(현 안성시) 공도면 '한독목장' 이 바로 그곳이었다.
60여만평의 넓다란 평원은
우리가 실험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마치 우리를 위해 마련해 둔 '약속의 땅' 처럼 느껴졌다.
서둘러 실험실을 만들었는데 기껏해야 50평 짜리였다.
이어 광선을 쏠 수 있는 송신발진기(送信發振器) 와
수신 안테나 등 각종 장비를 설치했다.
레이저실의 이덕훈(李德勳.60. 전 ADD 통신전자본부장) 박사와
오성남(吳成男.51.기상연구소 응용기상연구실장) .
김영준(金英俊.50.광주과학기술원 환경공학과 교수) 연구원 등
6명을 이곳에 배치했다.
당시만 해도 외딴 곳으로만 여겼던 안성에서
장기간 머문다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아무런 불평없이 내 결정에 따랐다.
한참 연구의욕이 넘쳐 있던 그들로서는
절호의 기회를 만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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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힘들지만 보람찬 시간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결코 쉽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레이저나 적외선 등 광선이
날씨에 따라 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측정해 본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나 유럽에는
광선의 특성만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도 수두룩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는 그런 전문가들이 거의 없었다.
할 수 없이 관련 외국 서적들을 구입,
하나하나 실험을 해가며 기술을 터득할 수밖에 없었다.
시행착오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러나 새 기술을 익힐 때마다 느끼는 짜릿한 전율은
어디에도 견줄 수 없었다.
젊은 연구원들의 열기는 대단했다.
겨울밤 차가운 실험실의 냉기(冷氣) 를 녹이기에 충분했다.
밤낮이 따로 없었다.
연구와 실험에 몰두하는 시간이 낮이고
잠자는 시간이 곧 밤이었다.
여기에 인력부족은 또다른 어려움이었다.
고작 6명으로 이 프로젝트를 감당해 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인력을 투입할 수도 없었다.
그무렵 레이저팀은
이 프로젝트 말고도 다른 주요 업무들을 추진하고 있었다.
휴대용.전차용 레이저 거리측정기와
야시장비 개발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적은 인력으로 여러 사업을 하자니
연구원들의 작업강도가 그만큼 셀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서울-대전-안성을 오가며
레이저실 업무를 관장하느라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서울에서는 야시(夜視) 장비를,
대전 기계창에서는 레이저 무기를 개발중이었고,
안성에서는 DARPA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먼저 서울에서 업무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대전에 내려가는 길엔 안성을 들러 DARPA 프로젝트를 챙겼다.
혼자서 세 살림을 하는 꼴이었다.
어느 때는 너무 과로한 나머지
이동중에 코 피를 쏟은 적도 몇 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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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미래 전쟁의 형태
1976년 여름,
그런 각고(刻苦) 의 노력 끝에
DARPA 프로젝트는 마침내 본 궤도에 오르게 됐다.
기상 상태와 이에 따른 광선의 변화를 측정,
여기서 나온 데이터를 자동 수집하는 최첨단 시스템을
국내 최초로 구축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기상청이 전국에 기상자동측정망(AWS) 을 구축한 것은
그로부터 10년 후의 일이었다.
나는 수집된 데이터를 분석.종합해
매년 가을 DARPA에 가서 중간 보고를 했다.
보고서의 분량은 16절지 2장을 넘지 못하게 했다.
'핵심만 정리하되 문제점 위주로 보고하라' 는 것이,
DARPA의 주문 사항이었다.
우리와는 너무 달랐다.
우리의 경우
보고서 작성 그 자체가 또 다른 업무이자 부담이었다.
토의 내용도 미래 지향적인 것으로
'프로젝트 추진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과 그 해결방안이 무엇인지'
에 대한 논의가 주류를 이뤘다.
하루만에 모든 보고와 토의가 끝났다.
이처럼 실용적이고 능률적인 토의 방식도
사실인즉 내가 그동안 DARPA로부터 배운 노하우 가운데 하나였다.
프로젝트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80년 가을,
미국 DARPA를 방문했더니
그곳 책임자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폭우가 쏟아질 때 인공위성에 전파를 보내는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느냐"
이 프로젝트를 계속 할 수 있을지 여부를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우리 기술로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당시 우리 기술로는
기상 상태에 따라 광선이 어떻게 변하는지
데이터를 수집.분석하는 작업도 벅찼다.
결국 우리는 5년간의 데이터를 종합해 이를 넘겨주고
1981년 이 프로젝트를 끝냈다.
나는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앞으로 전쟁은 밤에 일어날 것임을 확신했다.
당시 미 육군전자사령부는
각종 야시장비들을 개발하고 있었다.
또 DARPA는
야간이나 최악의 기상조건 하에서도
인공위성을 통해 지상 정보를 샅샅이 수집하는
새로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프로젝트가 끝난 지 10년 후 내 예감은 적중했다.
1991년 1월, 걸프전이 터진 것은 바로 새벽 2시였다.
'밤의 전쟁' 시대를 예고하는 신호탄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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