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사기 행각 저지를 위해
미국의 최대 원자력연구소인 로렌스 리버모아를 비롯,
로체스터 대학의 레이저 핵융합연구소 등
세계적으로 유수한 연구소들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것을
'마치 개발이 끝난 것' 으로 말하는 게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가 추진하는 레이저 프로젝트를
성사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비단 나 뿐만 아니라
당시 물리학계도 같은 생각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상수(李相洙.74.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 박사였다.
李박사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와
영국 런던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후
원자력연구소 소장과 한국과학원(KAIS) 원장을 지낸
우리나라 레이저 분야의 대부(代父) 였다.
李박사는
레이저 핵융합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는 오네스트 신의 주장에 대해
"턱 없는 소리" 라고 일축했다.
이어 그는
"하버드대 박사라는 간판을 내세워
우리 과학계를 우롱하는 행위를 용납해서는 안된다" 고 분개했다.
그러나 오네스트 신이 추진하고 있는
레이저 프로젝트를 무산(霧散) 시키기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과학계의 실력자인
최형섭(崔亨燮.79.포항산업과학연구원 고문) 과기처 장관이
그의 계획안에 매우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과기처는
그의 계획안을 토대로
레이저 연구 기관의 의견을 모아
거국적인 레이저 프로젝트안을 마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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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과기처와의 충돌
1976년 5월 말
홍릉에 있는 한국과학원(KAIS) 회의실.
내가 몸담고 있는 국방과학연구소(ADD) 를 비롯,
원자력연구소.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등
레이저 연구기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사회를 맡은
과기처의 전상근(全相根.72.전 청도주택 회장) 종합기획실장이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레이저 프로젝트 추진 방향에 대해 설명했다.
"레이저 연구는 거국적 프로젝트로 추진할 예정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초 연구부터 차근차근 해 나가야 합니다.
각 기관에서는 어떤 기초 연구를 할 것인지
빠른 시간내에 계획서를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
全실장의 이같은 발언은 곧 崔장관의 견해이자
오네스트 신이 제시한 레이저 프로젝트의 방향과도 일치했다.
그러나 나는 이 방향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나라와 같이 기술개발이 뒤진 상황에서는
현장에서 바로 써 먹을 수 있는 프로젝트를 단계별로 수행하면서
기초연구를 하나씩 다져나가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것부터 착수해야만 했다.
나는 즉석에서 발언권을 신청했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회의 내내 별다른 반론 없이 순탄하게 진행됐던 터라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 하는 눈치들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내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
"국방과학연구소(ADD) 는
독자적으로 레이저 프로젝트 계획서를 작성해
청와대에 직접 제출하겠습니다.
과학기술처에는 ADD 계획서를 제출할 수 없습니다. "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ADD 대표로 참석한 내가
과기처의 방안에 완강히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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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정하는 과기처
과기처는
레이저 연구기관들로부터
레이저 기초 연구에 대한 개별 계획서를 받아
이를 종합, 청와대에 보고할 예정이었다.
회의 진행을 맡은 과기처의 전상근(全相根) 종합기획실장은
다소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일정이 촉박한데 왜 브레이크를 거느냐는 항의처럼 느껴졌다.
그는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대통령의 지시사항" 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 말에 기가 죽을 내가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응수했다.
"나는 직속 상관으로부터
대통령의 지시 사항이라고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대통령이 ADD 소장에게 지시했다면 군사기밀이 분명할텐데
그렇다면 더욱 기밀을 유지해야 합니다. "
장내가 술렁거렸다.
全실장이 '대통령의 지시사항' 이라고 했음에도
내가 '무조건 따를 수 없다' 고 나오자
회의 참석자들은 다소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내가 봐도 그건 당돌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나는 군사기밀에 속하는 ADD 계획서를
과기처에 무작정 제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번 레이저 프로젝트 건은
대통령의 지시사항이라기보다
오네스트 신의 치밀한 공작에서 나온 게 아닌가.
그 장단에 과기처가 춤추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全실장은 내가 이렇게까지 대차게 나올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 같았다.
당황해 하는 빛이 역력했다.
갑자기 그의 말투가 사정조로 바뀌었다.
"韓박사께서 ADD 계획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종합보고서를 작성할 수가 없습니다.
나로서는 이 사실을 장관님께 보고드릴 수 없으니
韓박사께서 직접 장관님께 말씀 드려 주십시오. "
회의가 끝나서도 全실장은 나를 붙잡고 통사정을 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노라' 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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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군사기밀입니다
다음날 아침,
나는 全실장과 함께 최형섭 과기처장관을 만나러 갔다.
1976년 6월 초순이었다.
당시 崔장관의 파워는 막강했다.
그는 1960년대 원자력연구소장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소장 등을 거쳐
1971~1978년까지 무려 7년여간 과기처 장관을 지낸
과학계의 대부(代父) 였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도 상당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말발' 이 먹히는
과학계의 몇 안되는 인사였다.
그러니 함부로 崔장관의 의견에 반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도 단단히 마음 먹고 崔장관 방에 들어갔다.
崔장관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소리를 질렀다.
"자네 소장과 다 얘기 해서
레이저 프로젝트를 거국적 프로젝트로 추진하기로 했는데
자네가 뭔데 반대 해!"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 보았다.
어제 회의내용을 상세히 보고받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각오한 이상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장관님, 국가비밀은 함부로 공개할 수 없습니다.
특히 군사비밀은 더욱 그렇습니다.
ADD 계획은 중요한 군사비밀에 속합니다.
어떻게 군사비밀을 과기처에 제출할 수 있습니까. "
崔장관의 얼굴에 갑자기 노기(怒氣) 가 서렸다.
일개 공군 중령이
감히 장관인 자기에게 정면으로 맞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큰 崔장관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건 대통령 지시사항이야.
심문택(沈汶澤) 소장과도 다 얘기가 됐어.
도대체 자네가 뭐야. "
나는 조금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군사비밀은
아무리 장관님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내 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崔장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옆에 서 있던 全실장은 안절부절 못했다.
방안에는 崔장관의 거친 숨 소리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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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ADD는 빼버려
최형섭 과기처장관은 몹시 화가 난 얼굴로
옆에 서 있던 전상근 과기처 종합기획실장을 쳐다봤다.
순간 全실장은 불똥이 자기에게 튀는 줄 알고 잔뜩 긴장했다.
崔장관이 "청와대 보고는 언제까진가?" 라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나에 대한 격한 감정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全실장은 얼떨결에 부동자세를 취한 채
"내일까지입니다" 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崔장관의 불편한 심기가 몹시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崔장관은 나를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는 나를 더 이상 상대 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崔장관은 다시 全실장을 쳐다봤다.
全실장은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계속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崔장관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러면 ADD쪽은 빼고 보고하라" 고 지시했다.
요컨대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할 레이저 프로젝트에
ADD가 참여하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과기처는 ADD를 제외한 나머지 보고서를 종합해서
레이저 프로젝트에 관한 종합계획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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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새옹지마 징조
그로부터 일주일쯤 됐을 무렵,
김병원(金昞源.71) 대통령 과학기술담당 비서관이 내게 전화를 했다.
청와대에 빨리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이때가 1976년 6월 중순경이었다.
나는 ADD 소속이라
방위산업을 담당하고 있던 대통령 경제2 비서관들과만 접촉했지
그와는 전혀 일면식도 없었다.
서둘러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그는 다짜고짜
"韓박사, 레이저 프로젝트에 관한 ADD안을
왜 아직까지 제출하지 않는 겁니까"
하고 내게 다그치듯 묻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께 보고할 종합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ADD안이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金비서관에게
일단 내 생각을 털어 놓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이번 레이저 프로젝트건(件) 은
청와대에서 최종 결정할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는 가급적 차분하게 평소의 소신을 얘기했다.
"레이저 프로젝트가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개발이 가능한 레이저 거리 측정기부터 시작한 다음
개발이 어려운 레이저 무기들을 하나씩 만드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무기는 종합기술의 결정체입니다.
자주국방 측면에서도
당장 써 먹을 수 있는 레이저 무기를 개발하는 게 시급합니다.
이럴 경우 비용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
金비서관의 표정을 살펴 봤더니
매우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 주장에 공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도 한층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목소리를 조금 높여 설명을 계속했다.
"우리나라 경제 여건상
레이저와 관련된 모든 분야를 손 대는 것은 무리입니다.
설령 재원은 국가에서 마련한다 하더라도
현재 레이저 연구를 할만한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또 우리 과학계에서
거의 다 알고 있는 기초 연구부터 시작한다면
밤낮 기초 연구만 하다가 끝날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까지 얘기한 다음 잠시 말을 멈췄다.
평소 하고 싶은 얘기를 한꺼번에 쏟아 놓느라
나도 모르게 흥분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金비서관은 내게 "계속 말씀 하시라" 고 요구했다.
내 말에 흥미를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는 결론을 얘기했다.
"학문의 기초를 하나씩 다져 나가기 위해서도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프로젝트를 선정해서
단계별로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술자립도 가능합니다.
제가 '개발 가능한 레이저 무기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
속이 다 후련했다.
우연찮게 청와대 담당자에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도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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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깨끗한 뒤집기
그는 내가 제시한 레이저 프로젝트 방안이
매우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내 주장에 공감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았다.
"사실 레이저 프로젝트에 관해
오네스트 신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출한 것과
과학기술처가 종합해 올린 보고서를 모두 다 받아 봤어요.
그런데 두 보고서 모두 너무 실현 가능성이 없더라구요. "
처음 만난 내게 이런 얘기까지 한다는 것은
나와 의견을 같이 한다는 뜻이었다.
시쳇말로 '왕따' 를 당하던 나는
뜻밖의 우군(友軍) 을 만난 셈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상으로 가더니 차트 하나를 가져왔다.
"이게 바로 오네스트 신이 朴대통령께 브리핑한 보고서입니다"
하며 건네줬다.
모두 5장짜리였는데,
'레이저 핵융합을 통해
당시 우리나라의 현안인 에너지 문제 등을 해결할 자신이 있다'
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는 내게
"오네스트 신의 보고서가 실현 가능성이 있느냐" 고 물었다.
나는 한 마디로 "가능성이 없다" 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그 역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며 동감을 표시했다.
金비서관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국방과학연구소(ADD) 안은
비용도 별로 안 들 것 같고 현실성이 있다" 며
"아무래도 레이저 프로젝트의 최종안으로
ADD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고 말했다.
그토록 말썽 많던 레이저 프로젝트의 큰 가닥이 잡히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1976년 6월 하순 어느날.
金비서관이 "레이저 프로젝트 최종안으로 ADD안이 채택됐다"
고 전화로 알려 왔다.
비용은 가장 적게 들면서
실현 가능성이 큰 점이 높게 평가됐다는 것이었다.
하버드대 박사 출신인 오네스트 신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넉 달 동안이나 계속됐던 지리한 싸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되고 보니 허탈하기도 했다.
이번 싸움은
대다수 과학계 실력자들까지도
오네스트 신의 편을 들던 상황이었기에
나로서는 너무도 버겁고 외로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청와대 金비서관이
그토록 불리하던 상황을 완전히 역전(逆轉) 시켜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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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소동의 원인
이 사건이 일단락된 지 얼마 후 오네스트 신은
그동안 자신을 적극 옹호했던 인사들에게 아무 말도 없이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렸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짐은 원자력연구소에 두고 몸만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후 몇달이 지나
심문택(沈汶澤.1998년 작고) ADD소장이 미국을 다녀와서
오네스트 신에 관한 소문을 내게 들려줬다.
"한인 과학자들 사이에서 그에 관한 평판이 좋지 않더구만.
박사학위 논문의 독창성이 아주 떨어진다는 얘기가 파다해.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 인물이었던 것 같아.
내가 사람을 잘못 봤지. "
그는 처음
오네스트 신이 제시한 레이저 프로젝트를
내가 반대하는 바람에
ADD가 이를 주관하지 못하게 되자 나를 크게 원망했었다.
그런 저간의 사정 때문인지
그의 말 속에는 나에 대한 사과의 뜻이 묻어 있었다.
이 사건 말고도
당시 과학계에는
정치인들을 등에 업고 한탕 해먹으려는 사기극들이 빈발(頻發) 했다.
1975년 여름,
청와대 등 주요 공공기관에 적외선 감시장치를 설치하면
물샐틈 없는 경호가 가능하다고 속여
朴대통령의 결재까지 받아낸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다.
한 업자가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
수십대의 일본제 적외선 감시장치를 팔아 먹으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정욱(徐廷旭.66.과학기술부장관) ADD 전자무기개발부장과 내가
딱 한 대만 들여오게 한 다음
1년간 기후 변화에 따른 성능시험을 해봤다.
그 결과 엉터리임이 밝혀졌다.
그런가 하면
인천 앞 바닷물을 기름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결국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한 정치인들의 무지(無知) 가
이같은 소동이 일어나도록 한몫 거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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