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제4부 벌컨포 문제를 해결하라(2)

기른장 2010. 1. 29. 14:56

09. 최종 결론

 

나는 보다 정확한 데이터를 확보, 미국측에 제시하기 위해

연구진들과 함께 은밀하게 데이터 분석작업에 들어갔다.

 

작업은 풍산금속에서 했다.

혹시 비밀이 새 나갈 것을 염려해

풍산금속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저녁시간이나 주말을 이용했다.

 

수없이 많은 시험을 해 봐도 결론은 같았다.

국산 벌컨탄의 뇌관과 추진제가 바로 범인이었다.

 

나는 최종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김성진 ADD 부소장을 찾아갔다.

 

 그는 나에게 벌컨포 문제를 떠 맡긴 장본인이었기에,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무척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무슨 얘기든 좋으니 어서 말하라' 는 표정을 지었다.

 

 6개월전 국산 벌컨포의 문제점을 해결하라며

 내게 ADD 탄약개발부장을 맏긴 후

 한번도 공식 보고를 받지 못했던지라

 당연히 궁금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간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고했다.

 

 "부소장님,

  국산 벌컨포에 번번히 사고가 생기는 것은

  국산 벌컨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벌컨탄의 뇌관(雷管) 과 추진제(推進劑) 재료가 불량품입니다.

  불량 재료를 제공한 미국 오린사()가 책임져야 합니다."

 

金부소장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마침내 원인을 밝혀냈구나' 하고 안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더우기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벌컨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미국의 기술과 장비.재료 등을 들여와 만든

 국산 벌컨탄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나를 격려했다.

 

 "나는 말이야.

  자네가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았어.

  내가 왜 이 일에 관여했던 사람들을 배제시키고

  자네를 책임자로 임명한 줄 알아?

  설사 그들이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해도

  남들이 그걸 믿어주지 않았을 걸세. "

 

金부소장은 곧바로

나를 ADD 선임 부소장인 현경호 박사에게 데리고 가서 보고했다.

 

이어 심문택 소장 방에 들렀다.

沈소장은 보고를 다 듣고나서

매우 만족스러운듯 껄껄 웃으며 말했다.

 

 "韓박사, 어려운 물리화학 문제를 잘도 풀었구먼.

  즉각 주한 미 군사고문단에 이 사실을 알려주게.

  우리가 미국측으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아내야지.

  그런데 비밀을 잘 지켜야 하네.

  이 사실이 새어 나가면

  미국의 오린社가 어떤 통로로 압력을 가해 올지 모른다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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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만만찮은 저항

 

나는 다음날 ADD에 파견대장으로 나와 있는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지안콜라 중령과 매클로이 상사를 찾아갔다.

 

 이들 역시

 국산 벌컨포가 발사 사고를 일으키는 원인이 뭔지

 조사결과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미국 탄약공급회사인 오린사()가 관계된 일이어서 더욱 그랬다.

 

이들은 나의 갑작스런 방문에 다소 놀라면서도 긴장했다.

나는 이들에게

"풍산금속에 같이 한번 가 보자" 고 제안했다.

당시 풍산금속은 경북 포항 근처에 있었다.

 

내가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직감적으로 '벌컨포 문제 때문' 임을 알았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우리 셋은

미군에서 제공한 승용차를 타고 포항으로 향했다.

1977 12월 말이어서 날씨는 매우 쌀쌀했다.

 

풍산금속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쯤.

도착 즉시 우리는 공장장 방으로 갔다.

 

나는 국산 벌컨포의 문제점에 대해

6개월간 조사한 연구보고서를 꺼냈다.

그리고 차근차근 발사 사고를 일으키는 원인에 대해 설명했다.

 

내가 마침내

'미국 오린사() 가 제공한

 국산 벌컨탄의 뇌관과 추진제 재료가 불량하기 때문' 이라고 결론짓자

순간 세 사람의 표정이 거의 동시에 일그러졌다.

 

만약 국산 벌컨탄에 문제가 있다면

풍산금속이 우리 국방부에 40억원의 손해배상을 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풍산금속은 파산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공장장은 바로 이 점이 두려웠던 것이다.

 

내 설명이 끝나자

세 사람은 나를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벌컨포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대우정밀과 통일산업이 원시적 기술로 만든

벌컨포의 성능이 형편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항의가 얼마나 거센지

나도 모르게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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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대반격

 

이들은 집요하게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벌컨포의 문제점을 물고 늘어졌다.

 

예컨대 미국제 벌컨포의 경우

내부 정밀도가 2/1000~3/1000㎜인데 비해

국산 벌컨포는 이보다 한참 뒤떨어진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국산 벌컨포의 기술상의 결함이

발사 사고의 원인이라는 얘기였다.

이들은 내 주장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에 대해 나는

'국산 벌컨포에 미국제 벌컨탄을 넣고 발사하면 문제가 없다.

 이것은 결국 국산 벌컨탄에 문제가 있기 때문' 이라고 반박했다.

 

나는 수없이 반복된 성능시험 결과에서 나타난

구체적인 데이터를 제시해 가며

국산과 미국제 벌컨탄의 차이점을 자세히 설명했다.

 

 특히 풍산금속 시설을 이용해 측정한 자료를 보여줬다.

 그것은 국산과 미제 벌컨탄의 추진력 상태를 비교 분석한 자료였다.

 그러자 이들은 이때부터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게다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의 맹선재 재료시험실장이

 국산과 미국제 벌컨탄의 뇌관(雷管) 재질을 비교해서 찍은

 현미경 사진을 본 후에는

 더 이상 반박을 못했다.

 

 마침내 이들은

 '국산 벌컨탄의 뇌관과 추진제(推進劑) 재료가 불량품' 이라는

 내 주장에 굴복하고 말았다.

 

사실 국산 벌컨포에도 전혀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지난  6개월간

 홍판기 총포개발부장과 황해웅 선임연구원이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문제점을 모두 해결해 놓았다.

 그러니 그 시점에서 남은 과제란 탄약 개선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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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태도 변화

 

시계를 보니 오후 8시였다.

무려 4시간 동안이나 설전(舌戰) 을 벌인 셈이다.

창밖은 완전히 어둠에 휩싸였다.

 

열띤 공방을 벌인 뒤라 갑자기 시장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나머지 세 사람은

저녁 식사를 할 생각도 않고 '' 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이제는 식사나 하러 가자" 고 제안했다.

그제서야 이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식사 자리에서

지안콜라 중령과 매클로이 상사가 내게 보여준 태도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일단 내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자

조금 전까지 거세게 항의하던 자세는 온데간데 없이

아주 깍듯해졌다.

그러더니 "조속히 시정조치를 취하겠다" 며 정중히 사과했다.

 

식사를 마치자 밤이 너무 깊었다.

우리 세 사람은 풍산금속 근처 여관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그런데 통 잠이 오지 않았다.

 

40억원의 손해배상금이 걸린 문제에서 저들이 패했으니

'혹시 밤 사이에 나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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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잘되면 부하功

 

다음날 서울로 올라와

곧바로 이 사실을 김성진 부소장에게 보고했다.

이때가 1977 12월 말이었다.

 

金부소장은

주한 미 군사고문단측과 대화가 잘 됐다는 얘기에 몹시 기뻐했다.

 

그러더니

"자네가 이 모든 일을 책임지고 했으니

 심문택(沈汶澤.1998년 작고) 소장을 모시고

 노재현(盧載鉉.74) 국방장관에게 직접 보고하게" 하는 것이었다.

 

() 을 나에게 돌리겠다는 뜻이었지만,

원래 벌컨포 문제 해결은

金부소장이 국방부로부터 직접 지시받은 사항이었다.

그러니 그가 최종 보고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나도 완강히 거절했다.

이 문제를 놓고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김성진 부소장은 한사코 내가 보고해야 한다고 우겼다.

부하의 공() 을 절대 가로채지 않겠다는 배려였다.

내가 거듭 거절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나는 부하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씨가 너무 고마웠다.

 

1978 1월초 어느날.

나는 심문택 소장을 모시고 노재현 국방장관을 만나러 갔다.

국산 벌컨포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간의 연구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盧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인지라

내 보고를 무척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盧장관은 내 보고를 받고 아주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격려했다.

 

"밝혀 내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누가 잘못 했는지 명확하게 드러났군.

 이렇게 명쾌한 보고는 처음이야. "

 

그러더니 그는

"풍산금속이 우리 국방부에 40억원의 손해배상을 하고

 그대신 풍산은 오린社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아내야겠지"

하고 지적했다.

 

나는 "그렇다" 고 대답했다.

盧장관을 비롯,

장관실에 모여 있던 국방부 관계자들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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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생각지 못한 행운

 

그날 저녁 국방부에서는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는 파티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이범준 국방부 방위산업차관보가 내게 다가 오더니

盧장관이 한 말을 전해줬다.

 

"韓박사,

 아침에 자네가 장관실에서 나간 다음

 장관께서 내게 묻더군.

 '저 사람이 민간이니냐 군인이냐' 고 말이야.

 

 그런데 내가 자네를 그때 처음 봤잖아.

 그래서 내가 얼떨결에 군인이라고 대답했지.

 그랬더니 장관께서

 '저런 군인은 절대 군에서 내 보내면 안 돼.

  꼭 진급을 시켜 붙잡아 두라구' 하시더군. "

 

사실 나는 1970년에 공군 중령으로 진급,

1978 6월이 계급 정년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앞으로 6개월 안에 대령이 못되면

'무능군인' 으로 낙인 찍혀 군복을 벗어야 할 참이었다.

 

그런데 당시 야전(野戰) 조종사들도

자리가 없어 진급을 못하는 판이었다.

그러니 군복도 입지 않은 군 과학자가

대령으로 진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국산 벌컨포 문제를 해결한 덕에

계급 정년기한을 넘긴 1978 7월에

다시 친정인 레이더실로 돌아가 계속 근무했고

운좋게 다음해인 1979 1월 대령으로 진급했다.

 

盧장관의 특별 배려로

계급정년이 지났음에도 6개월간 군 생활을 계속 한 셈이었고,

그리고 대령으로 진급했던 것이다.

 

당시 ADD에는 대령 진급 자리가 할당되지 않았었다.

그러니 그런 나를 두고 ADD에서는

'공군 대령' 이라고 부르지 않고

'벌컨 대령' '국방부 대령' 이라고 부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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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뒷처리

 

한편 주한 미 군사고문단에서는

국산 벌컨포 사고 책임이 오린社에 있음이 분명해지자

조속한 문제해결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특히 매클로이 육군 상사가 해결사로 나섰다.

 

나중에 그는

오린社와 전화 통화한 녹음 테이프를 나에게 건네줬다.

들어보니 그는 무려 두 시간이나 오린社 관계자들을 다그쳤다.

전적으로 오린社에 책임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육군 상사를 가장한

미 정보기관의 실력자임에 틀림없었다.

그와 여러번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런 심증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누구나 그를 '맥 장군' 이라 불렀다.

가는 곳마다 그는 귀빈 대접을 받았고 아는 것도 많았다.

나는 그의 탁월한 실력에 번번히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1978년 봄,

유찬우(柳纘佑.1999년 작고) 풍산금속 사장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오린社를 상대로 국제소송을 제기해

 손해배상은 물론

 벌컨탄을 동남아로 판매할 수 있는 권리까지 확보했다"

내게 거듭 감사를 표시했다.

 

일년도 채 안 돼서

국산 벌컨포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