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제5부 탱크용 레이저 무기 개발(2)

기른장 2010. 1. 30. 14:32

08. 뒤바뀐 입장

 

휴즈 에어크래프트社는

우리가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 장치를 독자 개발한다는 소문을

어디선가 들은 모양이었다.

 

우리가 이미 개발을 끝낸 사실도 모르고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 가격을 3분의 1로 깍아 줄테니

 한 대당 30만 달러에 사라" 고 내게 전화를 걸어 제안해 왔다.

 

불과 3 4개월 전인 1975 7,

내가 그 회사를 처음 방문했을 때의 조건에 비하면 파격적이었다.

그때는 성능을 보여주는 데만 190만 달러를 요구했었다.

 

나는 당당하게

"우리가 1/10 가격으로 독자 개발했다" 고 대답했다.

 

상대방이 당황해 하는 것을 분명히 감지할 수 있었다.

너무 통쾌했다.

 

예전에 나를 괄시하던 거대 무기회사의 콧대를

이렇게 꺽을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또 기술개발에 성공하니

가격을 엄청나게 깍을 수 있다는 사실도 새삼 확인했다.

 

일주일후 휴즈 에어크래프트社에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1978 11월 말이었다.

 

이번에는 전과 달리 매우 정중했다.

"당신을 미국으로 초청하고 싶으니 꼭 응해 달라" 는 것이었다.

 

나는 이유를 물었더니

"레이저 무기 제조과정을 한 번 보여주고 싶다" 는 것이었다.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그 회사는 미 육군에 레이저무기를 단독 납품하는 회사였다.

그런 세계적 무기회사를 견학할 기회를 얻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열흘후 로스엔젤레스의 휴즈 에어크래프트社를 방문했다.

 

회사의 기술담당 중역이

'통제구역' 이라고 붙은 레이저 무기 제조공장으로 나를 안내했고,

각종 레이저 무기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제조과정을 샅샅이 보여줬다.

 

매우 파격적인 예우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나의 환심을 사려는 게 틀림 없었다.

 

나는 무엇보다 그들의 레이저 거리측정기를 직접 보고 싶었다.

국방과학연구소(ADD) 레이저부 연구원들이

5년간 실패를 거듭한 끝에 어렵사리 개발한 무기였기에

꼭 한번 비교해 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바로 레이저 거리측정기의 핵심 부품인

레이저 발진부(發振部)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우리가 만든 것과 어쩌면 그렇게 똑 같단 말인가.

 

우리 연구원들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앞으로도 동기 부여와 여건만 만들어 주면

어떤 무기라도 만들 수 있다는 자심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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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청와대의 호출

 

귀국한 지 불과 나흘만인 12월 하순 어느날.

탱크의 자동 조준장치를 개발한

한국과학원(KAIS)의 박송배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다음달 과학기술처 연두순시를 할 때,

자동조준장치를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ADD로부터 연구 용역을 받아 개발한 것이므로

 당연히 내게 사전 양해를 구해야 했다.

 

나는 즉시 심문택(沈汶澤.1998년 작고) ADD 소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沈소장은

"ADD가 이 사업을 주관했는데

  KAIS가 대통령께 보고하느냐" 며 완강히 반대했다.

 

그렇지만 朴교수가 3년간 애쓴 점을 감안해서

沈소장을 설득하여 간신히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고는 이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런데 1979 1월 중순 어느날 오후,

오원철(吳源哲.72) 대통령 경제2수석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KAIS에 연구비를 준 적이 있느냐" 고 물었다.

 

나는 무심코 "있다" 고 대답했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짜증섞인 목소리로

"나한테 왜 보고하지 않았느냐" 고 다그쳤다.

 

나는 순간

'필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구나' 하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업무관계로 吳수석을 10년 가까이 상대하다 보니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을 충분히 간파할 수 있었다.

 

나는 차분하게 "전에 간단히 보고드린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吳수석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장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청와대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오원철(吳源哲.72) 수석은 몹시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날 오전 과학기술처 연두순시에서 일어난 해프닝 때문이었다.

그는 불만스런 목소리로 당시 상황을 내게 설명했다.

 

 조순탁(趙淳卓) 한국과학원(KAIS) 원장이 박정희 대통령께

 '국방과학연구소(ADD) 로부터 연구 용역비를 받아

  KAIS가 탱크의 자동조준장치를 개발했노라'

 하고 보고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포병 출신답게

 탱크의 명중률과 목표물과의 거리측정 시간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趙원장을 비롯,

 자동조준장치 개발 책임자인 박송배 교수 등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분위기가 매우 어색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방위산업을 총괄하고 있던 吳수석은

 KAIS가 탱크의 자동조준장치를 개발한 사실조차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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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탱크부대 출장

 

吳수석은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볼멘 목소리로 지시했다.

 

 "韓박사가 말이야,

  일선 탱크부대에 직접 가서

  현재 우리 군이 쓰고 있는 탱크의 성능을 정확하게 조사해 봐.

  그리고 이번에 ADD KAIS가 각각 개발한

  레이저 거리측정기와 자동 조준장치를 탱크에 장착할 경우

  탱크 성능이 얼마나 개선될지도 알려 주게. "

 

吳수석의 얘기인즉,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 개발로 탱크 성능이 얼마나 향상될지

기존 탱크와 비교해 구체적으로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레이저 거리측정기와 자동 조준장치는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의 핵심 부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날 아침,

중부전선에 있는 탱크부대를 찾아갔다.

1979 1월 중순의 전방 날씨가 몹씨 매서웠다.

 

 나는 그 부대에 이틀간 머물며

 기존 탱크의 성능에 관한 정확한 데이터를 수집했다.

 

 직접 탱크 안에 들어가서

 포수(砲手)와 함께 거리측정과 사격실험을 반복했다.

 

마침내 실험 결과가 나왔다.

거리측정에서 자동조준까지 대략 10~15초가 걸렸다.

또 명중률은 3㎞ 떨어진 거리에서는 고작 30~40%에 불과했다.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를 장착할 경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레이저로 목표물과의 거리를 측정하는 데는

 불과 10만분의 1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

 

 또 목표물을 자동조준하는 데 0.1초면 충분했고

 명중률도 80% 수준이었다.

 수없이 반복된 모의실험에서 밝혀낸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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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대통령의 치하

 

나는 지체없이 청와대로 향했다.

吳수석은 이틀만에 조사를 끝마친 데 대해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실험 결과와

 앞으로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를 장착할 경우

 탱크 성능이 얼마나 향상될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내 보고가 끝나자 吳수석은

"미국제 탱크의 명중률은 어느 정도지?" 하고 물었고

 

내가 "90% 정도는 된다" 고 자신있게 대답하자,

", 90%…. 우리 탱크와 별 차이 없겠네"

하며 흐믓해 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우리가 개발한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는

 대당 생산 비용이 얼마나 들 것 같냐?" 고 물었다.

 

내가 "3만 달러 정도" 라고 하자

"미국제는 값이 얼마냐?" 고 재차 물었다.

 

나는 주저없이 "50만 달러" 라고 답변했다.

만족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보름 후 吳수석이 나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한 말을 전해 줬다.

"내가 레이저 탱크사격 통제장치에 대해 대통령께 보고 드렸더니

 아주 기뻐하시더라구.

 그러면서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바로 그런 것을 만들어야지' 하며

 자네 신상에 관해 묻더군. "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겸연쩍었다.

수년간 밤을 지새우며 일한

우리 연구원들의 노력이 어우러져 일궈 낸 결과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