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인원삭감 태풍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은
국방과학연구소(ADD)에 엄청난 회오리를 몰고왔다.
새로 집권한 신군부는
미국을 지나치게 의식,
朴대통령이 애착을 갖고 추진해 왔던 자주국방정책을 대폭 손질했다.
그동안 자주국방정책이 미국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
한미관계를 악화시키는 주원인으로 작용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같은 신군부의 태도는 곧바로 ADD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자주국방 정책을 실천에 옮기는 데
가장 주도적 역할을 한 기관이 다름아닌 ADD였기 때문이다.
ADD의 기구축소는 불을 보듯 뻔했다.
1980년 7월,
8년 반 ADD를 이끌어온 심문택(沈汶澤) 소장이 마침내 사임했다.
그는 자주국방정책이 본격 추진된 시점에 소장으로 취임,
국산무기 개발과 인력확충 등을 통해
그같은 정책이 성공을 거두도록
ADD를 진두 지휘해 온 실무 사령탑이었다.
그의 사임은
ADD 역할이 크게 축소될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후임 소장에는 서정욱(徐廷旭.66) 박사가 취임했다.
徐소장은 20년 넘게 나와 같은 직장에서 일한 절친한 동료였다.
그는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후,
미 텍사스 A&M 대학에서 전기공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나처럼 공사(空士) 출신은 아니었지만
공군 장교(중령 전역)로 나와 함께 공군사관학교 교관을 지내기도 했다.
또 1970년 8월 ADD 창설 멤버로 함께 발탁돼
나는 병참물자개발실장을, 그는 통신개발실장을 각각 맡았다.
질긴 인연이 空士에서 뿐 아니라 ADD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후 그는 부장-부소장을 거치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매사 적극적이고 부지런했다.
그의 소장 취임은 이같은 요인들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그러나 시기가 문제였다.
격변기에 소장에 취임한다는 것은
본의 아니게 여러가지 악역을 맡아야 함을 뜻했다.
ADD 실장급 이상 간부들은
신임 소장에게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
당시 간부는 70~80명이었다.
하지만 徐소장은 대부분 사표를 반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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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대전기계창장
곧이어 단행된 인사에서 나는 대전기계창장에 임명됐다.
그러나 좋아할 일은 결코 아니었다.
ADD 내부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인사 단행후 열린 핵심 간부회의에서
徐소장은 마침내
ADD내에 떠돌던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반 이상을 내 보내야 할 것 같다" 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徐소장의 얼굴에서 고뇌하는 흔적이 엿보였다.
참석자들도 몹시 침울한 표정이었다.
상부에서 어떤 지시를 받았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 역시 심정이 착잡했다.
동고동락해 온 동료나 부하 직원들을 내 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죄(?) 라고 한다면,
상관의 지시를 받고 열심히 일한 죄 밖에 없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유능한 연구원들은 알아서 짐을 챙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마디로 일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임 대전기계창장으로
미사일 개발 책임자였던 이경서(李景瑞.62) 박사나
한홍섭(韓洪燮.59) 박사 등은 미련 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떠나는 사람이나 남는 사람 모두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ADD에는
국내외에서 유치한 과학자와 연구원 등
국내 최대 규모의 연구인력이 집결해 있었다.
이들을 반 이상 줄이라니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내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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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떠나는 사람들
나는 한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어차피 국방과학연구소(ADD) 인력을 절반 이상 줄여야 한다면
유능한 사람들이 남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꼭 남아야 할 인력부터
단계적으로 추려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발언을 하면서도 내 마음은 정말 착잡했다.
함께 일한 동료와 부하 직원들을 우리 손으로 내 보내는 악역을
우리가 맡을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서정욱(徐廷旭.66.과학기술부장관) ADD 소장과 핵심 간부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발언을 계속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핵심 요원을 남도록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만약 인원을 줄이는 문제로 계속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면
우수한 사람들이 먼저 떠날 겁니다. "
고육책(苦肉策) 으로 내놓은 방안이었다.
그러나 나 자신도
이 일을 실천에 옮기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날 핵심 간부회의에서 여러 방안들이 제시됐다.
그러나 최종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어느 방안을 택하든 후유증이 따르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도 내보내지 않고 시간을 끄는 게 최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徐소장을 비롯, 핵심 간부들도 내심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상황은 내가 바라던 방향과는 정반대로 전개됐다.
우수 인력들이 자발적으로 속속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ADD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인력들이었다.
나를 비롯해, 간부들은 이들을 한사코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들은
"일할 맛이 안 나 더 이상 있고 싶지도 않고
마침 갈 곳이 있다" 며 완강히 뿌리쳤다.
1980년 여름 ADD는
'떠나는 사람들' 로 내내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이런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듬해 예산이 대폭 삭감됐다.
빨리 인원을 정리하라는 신호였다.
외부의 압력은 시시각각 조여왔다.
그러나 徐소장과 우리 간부진은
고민만 할 뿐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나 역시 분위기 탓인지 일이 손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됐다.
그러나 정권이 교체되는 과도기라 그런지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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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유도탄 개발단장
게다가 대전기계창장에 임명된지 불과 3개월만인 1980년 10월
유도탄(미사일) 개발단장으로 보직이 바뀌었다.
이것은 또 다른 이유였다.
저번 보직인 대전기계창장은
유도탄.전자 등 ADD의 핵심 분야를 모두 관장했다.
그러나 유도탄개발단장은
직함 그대로 유도탄 개발만 책임졌다.
하지만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유도탄 개발쪽은 朴대통령 사망후 된서리를 맞았기 때문이다.
거의 예산이 배정되지 않았다.
전략무기 개발은 아예 포기하라는 대내외 압력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러니 유도탄이 목표물을 끝까지 추적하게끔 하는
관성항법장치(INS) 개발은
더 이상 진척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아군 지역에 접근한 적의 전투기나 군함 등을 격추시키는
전술유도무기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함대함(艦對艦) 유도무기'
'무(無) 유도 다연장 로켓' 등을 개발하는 데에 역점을 둔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 덕분에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진로문제를 곰곰히 생각해 봤다.
1953년 공사 입교후 군에 몸담은지 벌써 28년.
강산이 변해도 세 번은 변했을 긴 세월이 흐른 것이다.
군복을 벗어도 아무런 미련이 없을 것 같았다.
후배들에게 진급 기회를 제공하고도 싶었다.
당시 ADD내에서
육.해군 출신은 대령 진급이 잘됐지만
유독 공군만은 대부분 중령에서 예편했다.
그만큼 결원(缺員)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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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전역
나는 고심끝에 군복을 벗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 전에 해결할 일이 한가지 있어서
윤자중(尹子重.71.전 교통부장관) 공군참모총장을 찾아갔다.
윤자중(尹子重.71) 공군참모총장은
나의 갑작스런 방문에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총장님, 저는 전역(轉役) 을 결심했습니다.
군복을 벗기 전에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
尹총장은 의외라는 듯 만류했다.
"아니, 韓대령
안나가도 되는데 왜 굳이 전역하려고 하나. 그대로 있게"
나는 내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저는 벌컨포 문제를 해결한 공로로
국방과학연구소(ADD) 에 결원(缺員) 이 없음에도
국방부의 특별 배려로 대령에 진급했습니다.
제 자리를 ADD 공군 출신 연구원들이 승계하도록 배려해 주십시오.
육국이나 해군 출신과는 달리
공군 연구원들은 거의 중령에서 예편해야 합니다. "
尹총장은 내 말 뜻을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먼.
후배들이 승진할 수 있는 길을 터주려고 전역을 결심했구먼"
이렇게 해서 尹총장은 1981년 1월초
ADD의 정해일(丁海一.63.한국전광 감사) 공군 중령을 대령으로 승진시켰다.
丁중령은 ADD 창설멤버로
나와 함께 병참물자개발실.레이저실에서 10년 가까이 손발을 맞춰 온
나의 충실한 부하였다.
그리고 그달말 나는 마침내 군복을 벗었다.
공사 입교후 28년만에 민간인 신분으로 바뀐 것이다.
나로서는 큰 변화였다.
시원섭섭했다.
하지만 그후에도 유도탄개발단장직은 계속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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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원자력과의 인연
그러다가 1982년 3월
또다른 큰 변화가 내게 닥쳐왔다.
갑작스레 대덕(大德) 공학센터장에 임명된 것이다.
대덕공학센터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핵연료개발공단' 이라 불렀다.
한국이 행여 핵 개발을 하지 않을까 하고
미국이 가장 주시하던 곳이었다.
신군부는 미국의 이같은 시선을 의식,
1981년 1월 핵연료개발공단을 원자력연구소와 통합한 다음,
'원자력연구소'를 '에너지연구소' 로 이름을 바꾸고,
'핵연료개발공단'은 '대덕공학센터'로 이름을 바꾸어 버렸다.
'핵' 이나 '원자력' 이란 용어를
아예 공식기관에서 사용치 않음으로써
미국의 의혹을 완전히 불식시키려 한 것이다.
그래서 대덕공학센터는 에너지연구소의 분소(分所)가 되었고,
센터장은 에너지연구소의 부소장이 겸임하고 있었다.
오늘날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이나 마찬가지이니.
나로서는 영전(榮轉)인 셈이었다.
그러나 막상 12년간 몸 담았던 ADD를 떠나려니 무척 아쉬웠다.
ADD를 떠나기 전날,
사무실 소파에 깊숙히 몸을 파묻고 혼자 조용히 지난 날을 회상했다.
감회가 새로왔다.
ADD는 나의 40대를 아낌없이 불태운 곳이었다.
창설멤버로 ADD에 들어올 때 나이가 37세.
한창 일할 나이었다.
연구원들과 함께 숱한 밤을 지새우며 정말이지 여한없이 일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대 자주국방을 기치로 내걸고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것도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
수류탄, 방탄헬멧 등 병참물자에서부터
벌컨포, 레이저 탱크사격통제장치 등 중요한 무기들을
내 손으로 개발하고 떠난다는 게 제일 큰 보람이었다.
함께 땀 흘린 연구원들이 너무 고마왔다.
이들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없었던들
이같은 무기개발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감원태풍이 거세게 부는 상황에서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남은 인력들은 모두 나의 동료이자 내가 아끼던 부하들이었다.
그들만 사지(死地)에 남겨두고 떠나는 것 같아 왠지 미안했다.
(결국 ADD 감원 문제는 徐장관이 계속 미루는 바람에
그가 소장으로 있는 동안에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분위기가 워낙 좋지 않아 스스로 알아서 사표를 내거나
핵심 인사들만 ADD를 떠났을 뿐이다.
그러다가 1982년 11월
후임 소장으로 김성진(金聖鎭.69) 박사가 취임한 직후,
대량 감원이 이뤄졌다.
항간에는 金소장이 자발적으로 한 것처럼 오해하고 있으나
사실은 나라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당한 국가적 수모일 것이다.
나는 그 역시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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