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품질까지 보증하라
중수로(重水爐) 핵연료 국산화사업은
이정오(李正五.71) 과기처 장관이 국책사업으로 지정한 상태였고,
연구비도
1981년 8억 6천만원,
1982년 10억 5천만원이 각각 배정됐다는 것이었다.
내가 부임한 1982년도 당시
연구소 예산은 불과 30억원 밖에 안되는데,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사업이 1/3을 차지한 셈이었다.
연구소에서 가장 큰 사업이었다.
사업기간은 1981년부터 2년간으로
이 기간에는 기초연구만 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즉각
"단순히 연구로 끝나는 건 의미가 없으니
양산화 계획까지 검토하라" 며
"양산까지 5단계를 밟으라" 고 지시했다.
내가 말하는 5단계란
"연구개발-> 시제품(試製品) 제조 -> 검증 -> 품질보증 -> 양산"
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뜻했다.
한마디로 원자력발전소에 들어갈 핵연료를 개발하고
품질보증까지 과학자가 완전히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간부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까지 과학자들은 연구실에서 기초연구만 했지
연구를 통해 제품을 개발하고
그 제품의 품질을 보증한다는 것은 아예 생각도 못했다.
그러니 내 지시가 황당하게 들리는 건 당연했다.
그때 남장수(南璋洙.54.) 핵연료국산화담당 차장이
"장관님은 분명히 연구로 끝내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장관님 지시에 어긋나는 게 아닙니까" 하며
李장관의 지시를 환기시켰다.
뒤집어 보면 내 지시가 못마땅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속내를 알아차리고 내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아마 장관께서 여러분이 못미더워 그랬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과학자는 연구만 해서는 안되고
평소 품질보증까지 책임지는 훈련을 해 둬야 한다.
여러분이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를 갖지 않으면
우리는 영영 기술 후진국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 의식을 완전히 바꿔라. "
--------------------------------------------------------------
02. 패배주의 극복하기
간부들은 내 의지가 단호한 줄 알고 더 이상 반대를 못했다.
나는 회의 말미에
"앞으로 중수로 핵연료를 개발하는 데 연구소의 모든 힘을 모으라"
고 간부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특히 서경수(徐庚壽) 핵연료가공연구실장과 南차장에게
빠른 시간내에 중수로 핵연료 양산계획을 세워 보고하게 했더니
며칠후 두 사람이 보고서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왠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알고 보니 보고 내용이 내 지시와 전연 딴판이었다.
그들은 핵연료 양산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이유인즉,
과학기술처가 2년간 기술개발 계획만 승인해 준 상태고
연구소가 책임을 지는 품질보증과 양산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또 경제성이 없다는 것도 또다른 이유였다.
나는 순간 너무 화가 나
"이따위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간부로 앉아 있으니
외부로부터 희망없는 연구소라는 소리를 듣지"
하며 호통을 쳤다.
나는 그래도 분이 가라앉지 않아
"연구소가 엉망인 이유를 알겠다" 고 나무랐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게 연구소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어떻게든 책임질 일은 하지 않으려 하고
연구원 스스로도 자신감이 크게 결여돼 있었다.
정부기관이나 관련 단체들이 연구소를 불신하는 것도
모두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연구원들의 패배주의와 무기력감부터 뜯어 고치는 게 급선무였다.
나는 연구소에 새 바람을 일으키기로 다짐했다.
새 바람이란 다름 아닌 정신혁명이었다.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니라
연구 -> 제품생산 -> 품질보증으로 이어지는
실용적인 연구자세와 책임의식을 갖도록
연구원들의 의식구조를 완전히 뜯어 고칠 생각이었다.
-------------------------------------------------------------
03. 다시 불밝힌 연구소
연구소가 활성화되려면
무엇보다 연구원들이 연구소에 애정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내가 대덕(大德) 공학센터장에 부임할 당시
대다수 연구원들은 이미 연구소에서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
오후 4시 반만 되면 퇴근준비를 하고 5시면 어김없이 퇴근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훌륭한 연구 결과가 나올 리 없었다.
나는 연구원들이 늦게까지 연구실에 남도록 분위기 조성에 힘썼다.
먼저 전 연구원을 소집해 정신교육을 시켰다.
"우리는 미국 과학자들 보다 서너배 더 노력해야 한다.
그래도 그들의 기술을 따라잡기 어렵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 연구소는 오후 5시면 불이 꺼진다.
이래서야 어떻게 24시간 불켜져 있는 미국과 경쟁할 수 있겠는가."
모두 숙연한 표정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연구원들을 연구실에 붙들어 매기 위해
오후 8시부터 세 차례 더 통근버스를 운행하겠다고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대덕은 오지(奧地) 라 마땅한 대중교통 수단이 없었다.
통근버스를 운행하지 않으면 대전 시내까지 나가기 불편했다.
나는 저녁 늦게 연구실을 돌며 남아 있는 연구원들을 격려했다.
그러나 실제로 늦게까지 남아 있는 연구원들은 별로 없었다.
오랜 타성을 고치기가 쉽지 않은 탓이었다.
할 수 없이 경비원들에게
"야근자를 매일 점검하라" 고 지시했다.
연말에는 통계를 내 이들 중 10명을 특진시켰다.
그러자 당장 효과가 나타났다.
상당수 연구원들이 늦게까지 남아 연구에 몰두했다.
또 퇴근할 때는 꼭 경비원에게 '눈 도장'을 찍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나는 연구원들의 체력단련을 위해서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테니스장.축구장.배구장.탁구장 등을 하나하나 만들어 나갔다.
또 1982년 당시로서는
다른 연구소가 감히 상상도 못할 골프연습장 건설 계획도 세웠다.
차후 예산이 확보되면 곧바로 진행시킬 생각이었다.
연구환경 조성을 위해
쓰레기장을 방불케 한 뒷편 공터와 연구소 내부도 깨끗히 정비했다.
그랬더니 근무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이제 할 일은
빠른 시간내에 괄목할만한 연구 성과를 거두는 것이었다.
부임 직후 간부들에게 지시한
중수로(重水爐.CANDU) 핵연료를 국산화하는 데에
온 연구소가 총력을 기울였다.
--------------------------------------------------------------
04. 바닥난 공장 운영비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부임한지 한달만에
핵연료 정련.변환공장 운영비가 없어
아예 가동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들 공장은 화공약품을 쓰는 화공공장인지라
6개월만 운전을 중지하면
기계가 녹슬어 공장 가동이 불가능했다.
정말 난감했다.
대덕공학센터는 정부 산하기관이라
예산회기 중간에 추가예산을 신청할 수도 없었다.
고심끝에 친정인 국방과학연구소(ADD) 를 찾아갔다.
명색이 ADD 창설멤버였고 12년간 몸 담았던 곳인데
설마 홀대야 하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더우기 당시 ADD 소장.부소장은
나와 같은 창설멤버이자 절친한 사이였다.
서정욱(徐廷旭.66) 소장은 20년 지기(知己) 였고
홍판기(洪判基.66) 부소장은
국산 벌컨포를 개발할 때 한 팀으로 일한 동료였다.
나는 徐소장과 洪부소장에게 구걸 아닌 구걸을 했다.
"그래도 내가 ADD 창설 멤버인데
나를 대덕공학센터에 시집 보냈으면
지참금이라도 좀 줘서 보내야 할 것 아니냐.
지금 공장 운영비가 없어 공장들이 다 녹슬 판이야.
단돈 천만원이라도 좋으니 연구비 좀 지원해 주게."
내가 하도 떼를 쓰니까 두 사람은
"지원해 주고 싶어도 무슨 명분이 있어야 할 게 아니냐" 며
"뭔가 그럴 듯한 명분을 한 번 생각해 보라" 고 말했다.
-------------------------------------------------------------------------------
05. 누이좋고 매부좋고
나는 연구소에 돌아와
국방과학연구소(ADD)의 연구비를 타 낼 명분을 찾느라
대덕(大德)공학센터 간부들과 협의를 거듭한 끝에
`대전차관통자` (對戰車貫通子)를 개발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대전차관통자란
한마디로 전차(탱크)를 파괴하는 무기다.
미국에서도 1980년대 초에야 개발을 끝냈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첨단무기에 속했다.
미 과학자들이 우라늄 합금에 성공,
이를 재료로 전차를 뚫는 대전차관통자를 개발해 낸 것이다.
대전차관통자는 길이 50㎝, 폭 22㎜로 끝이 화살촉 처럼 생겨
아무리 두꺼운 전차라도 능히 뚫을 수 있었다.
특히 전차를 뚫는 순간 생겨나는 마찰로 인해
화염이 발생하도록 돼 있었다.
화염성이 강한 우라늄의 성질을 이용한 것이었다.
당시 우리 국방부도 대전차관통자 개발이 시급했다.
소련이 1980년을 전후해
전차 두께가 72㎜나 되는 T-72 고성능 전차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전차가 개발될 경우
북한에 실전 배치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나는 이같은 상황을 간파하고,
대전차관통차를 개발하겠다고 ADD에 제안했다.
ADD로서는 대만족이었다.
결국 서정욱(徐廷旭.66.과학기술부장관)ADD 소장은
개발 비용으로 3천만원을 지원해 주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다.
ADD는 전혀 힘 안들이고 최신형 무기를 개발해서 좋고
대덕공학센터는 핵연료 정련(精鍊).변환 공장을 가동할 수 있는
공장 운영비를 확보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연구비를 받은 즉시
정련.변환공장을 가동하는 한편
대전차관통자 개발에 착수토록 했다.
이때가 1982년 6월경이었다.
대전차관통차 개발은
서인석(徐引錫.63.한국원자력연구소 책임연구원).
국일현(鞠溢鉉.52.한국원자력연구소 단장)박사에게 책임을 맡겼다.
徐박사는 연세대 화학과 출신으로
1961년부터 20년 넘게
원자력 관련 분야만 일관되게 연구해 온
베테랑 연구원이었다.
그사이 영국.프랑스 등 선진국 주요 연구소에서
풍부한 연구경험도 쌓아
어떤 일이든 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鞠박사도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한 후
호주 멜버른대에서 석.박사과정을 마친 소장 연구원으로
한창 연구열에 불 타 있었다.
밤낮 없이 연구에만 몰두하던 그를 보면 언제나 마음이 든든했다.
두 사람은 한 팀이 돼
본격적으로 대전차관통자 개발에 착수했다.
-------------------------------------------------------------------------------
06. 금속우랴늄 제조 기술
그러나 작업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기사 미국도 이제 막 개발이 끝난 상태인지라
우리 연구진이 독자 개발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모험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대전차관통자의 핵심 재료인
금속우라늄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라늄에는 이산화우라늄과 금속우라늄이 있다.
전자는 상업용 발전소에 쓰이는 반면
후자는 무기용이나 재처리용으로 사용된다.
그러니 금속우라늄은
국제원자력기구(IAEA)나 한.미 쌍무협정으로
제조나 사용이 엄격히 제한돼 있었다.
게다가 대전차관통자 개발에 가장 중요한 금속우라늄 합금 기술은
미국의 철저한 보안으로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관련 서적과 논문 등을 토대로
금속우라늄 제조와 합금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천만다행으로
당시 대덕공학센터에는
1978년 프랑스에서 구입한
1백KW 용량의 `진공유도용해로` 가 있었다.
진공유도용해로란
진공속에서 우라늄을 금속으로 녹여 합금하는 시설이다.
그러나 그동안 지하실에 오래동안 방치한 채
거의 사용하지 않아
아예 작동이 안됐다.
부품이 대부분 고장난 것이었다.
우리 연구진은 먼저 이 시설부터 수리했다.
이 시설이 작동돼야만
실험은 물론 금속우라늄 제조와 합금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연구진은 구슬땀을 흘렸다.
늦은 밤 출출한 배를 라면으로 때우며 숱한 밤을 지새웠다.
마침내 폐물처럼 보이던 진공유도용해로가 작동됐다.
이때부터 연구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
07. 연구활동의 체계화
이처럼 당시 우리 연구소의 주된 사업은
탱크파괴 무기인 대전차관통자(對戰車貫通子)를 개발하는 것과,
중수로(重水爐)에 사용할 핵연료를 국산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덕(大德) 공학센터가
연구소의 장래를 걸고 모든 연구원들의 힘을 모은 사업은
뭐니 뭐니 해도 후자였다.
그만큼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사업은
연구소 입장에서는 사활이 걸린 중요한 사업이었다.
두 사업은 연구 인력면에서도 큰 차이가 났다.
대전차관통자 개발사업은
서인석.국일현 박사 등 소수 인원이 맡아 진행한 반면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사업은
연구소의 거의 모든 연구원이 참여했다.
개발 비용도 마찬가지였다.
1982년 당시 전자의 경우 불과 3천만원인데 비해
후자는 자그마치 10억5천만원이나 됐다.
이 사업을 시작한 1981년 개발비까지 포함하면
2년간 19억1천만원이 들어가는 셈이었다.
당시로서는 꽤 큰 사업이었다.
그러니 나로서는 무척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진행상황을 일일이 점검하고
오직 연구에만 전념하도록 분위기 조성에 힘썼다.
작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분야별로 책임자를 정했다.
중수로 핵연료 설계는 석호천(石鎬千.55) 박사,
핵연료 성형(成形)과 가공은 서경수(徐庚壽) 박사,
노심(爐心) 관리는 김성년(金聖年) 박사,
노외(爐外) 실증시험은 김병구(金炳九) 박사,
핵연료 변환(變換)은 장인순(張仁順) 박사,
품질관리는 이규암(李揆岩.52) 박사,
사업종합조정은 남장수(南璋洙) 정책실장이 각각 책임을 맡았다.
이들은 모두
미국.캐나다 등 국내외 유명 대학에서
원자력 분야를 전공한 젊은 연구원들로
실력 또한 쟁쟁했다.
현재 이들이 우리나라 원자력계를 이끌고 있는 점만 봐도
그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
08. 용광로 같은 열정
이들은 일단 과제가 주어지자
눈에 불을 켜고 연구에 몰두했다.
밤샘도 밥먹듯 했다.
오후 5시면 거의 모든 연구실에 불이 꺼져 적막감만 감돌던 연구소가
이제 24시간 내내 불이 켜져 있는 곳으로 바뀐 것이다.
연구원들의 열의는 정말 나를 감동시켰다.
특히 김병구 박사는 중수로 핵연료를 기어코 국산화하겠다며
1982년 봄 어렵게 획득한 미국 시민권 마저 미련없이 포기해 버렸다.
그의 부인 역시 남편의 결의가 이처럼 확고하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金박사 내외의 이같은 결단은
많은 연구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남장수 정책실장의 태도변화도
연구소 분위기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南실장은 내가 중수로 핵연료를 국산화할 뿐 아니라
양산(量産) 까지 할 계획이라고 밝히자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아예 연구소를 떠나
한국전력 산하기관으로 자리를 옮기려 했었다.
나는 그의 능력이 아까워 "함께 일하자" 며 그를 다독거렸다.
마침내 그는 내 설득에 못이겨 마음을 돌렸다.
나는 곧바로 그를 정책실장에 임명,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사업의 진행과정을 챙기도록 했다.
그는 앞장서 크고 작은 일을 꼼꼼히 챙쳤다.
또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자 개발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내가 대덕공학센터장에 부임하기 2년여전인 1980년 1월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 는
기술제공 대가로 2천 5백만 캐나다 달러를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 환율로 무려 1백20억원이나 되는 거액이었다.
그러나 우리 연구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어떻게든 독자 개발을 하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8부 아쉬운 연계핵연료주기(1) (0) | 2010.02.03 |
---|---|
제7부 중수로 핵연료 개발(2) (0) | 2010.02.01 |
제6부 혼란기, 원자력과의 새로운 인연(2) (0) | 2010.01.30 |
제6부 혼란기, 원자력과의 새로운 인연(1) (0) | 2010.01.30 |
제5부 탱크용 레이저 무기 개발(2) (0) | 2010.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