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제8부 아쉬운 연계핵연료주기(1)

기른장 2010. 2. 3. 17:38

01. 연계핵연료주기

 

이야기는 다시 1983년 초로 되돌아 가서,

내가 대덕(大德) 공학센터장에 취임한지 거의 1년만에

중수로(重水爐) 핵연료와

탱크 파괴무기인 대전차 관통자(對戰車貫通子) 개발에 성공하자,

연구소 분위기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물론 양산(量産) 까지는 몇 년이 더 걸려야 했지만

일단 시제품(試製品) 이라도 독자적으로 개발해 냈다는 사실은

우리 연구원들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불어 넣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중도하차한 사업도 없진 않았다.

그것도 우리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집요한 압력 때문에 중도하차한 것이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982년부터 관심을 가지고 시작한

'연계(탠덤.tandem) 핵연료주기' 기술 개발사업이었다.

 

 '연계핵연료주기'

 경수로(輕水爐) 에서 사용한 핵연료 가운데

 독성이 강한 물질만 제거한 후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분리하지 않은 채

 중수로 핵연료로 재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경수로에서 타고 남은 우라늄과

 타는 과정에서 새로 생겨난 소량의 플루토늄이

 중수로 핵연료로 재활용할 가치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마치 소나 돼지등 가축의 분뇨가

 거름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이처럼 연계 핵연료주기 기술이 개발되면

발전소에서 사용한 핵연료 처리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된다.

재활용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 한번 사용한 우라늄을 계속 다시 사용할 수 있어

우라늄 자원을 보존할 수 있는 이점도 적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의 우라늄 매장량은

고작 발전소 한 기() 30년 정도 운전할 수 있는 정도이니

우라늄 보존 차원에서도 이같은 기술개발은 반드시 필요했다.

 

게다가 우리는 경수로와 중수로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어

이 기술을 활용하기가 매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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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캐나다와 손잡자

 

내가 연계핵연료주기 기술을 개발하기로 결심한 것은

대덕공학센터장에 취임한 직후인 1982 3월말이었다.

 

당시 대덕공학센터 시험평가부장이었던 김병구 박사가

그달초 일본에서 열린 원자력학회에 참석,

일본이 이미 이같은 기술을 개발했노라고 내게 보고했다.

 

 일본은 1975년경부터

 경수로에서 사용한 핵연료에서 독성 물질을 제거한 후

 이를 자체 개발한 '휴겐' (FUGEN) 이라는

 중수로 핵연료로 재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보고를 듣자마자

 '우리도 서둘러야겠다' 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이 주도하던 국제핵연료주기회의(INFCE) 에서도

재처리 대안으로 연계핵연료주기가 제시된 적이 있었다.

 

 재처리는

 사용한 핵연료에서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분리하는 기술로서

 핵무기 제조 원료인 플루토늄 추출이 가능했다.

 

 핵 강국들이 재처리 기술 확산을 철저히 막으려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계핵연료주기는 재처리와 달리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분리하지 않은 채

다시 핵연료로 사용하는 것이므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맞아 떨어지는 기술이었다.

 

당연히 국제적 간섭도 피할 수 있었다.

나는 어느 나라와 기술협력을 할지 간부들과 협의했다.

 

당시 원자력 기술은

미국, 프랑스, 영국, 캐나다 등이 가장 앞서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주로 방위전략 연구에 치중해

기술협력 파트너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캐나다는

우리나라에 월성 중수로를 제공한 상태라

기술을 전수받기가 쉬웠다.

 

게다가 중수로 핵연료 시제품에 대한 성능시험도

헐 값에 해 주기로 하는 등

우리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결국 캐나다와 손잡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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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우호적인 캐나다

 

나는 1982 5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 산하 화이트쉘 연구소를 방문했다.

연계핵연료주기 기술을 공동개발하자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핵연료주기 개발담당 부소장인 윌리엄 행콕스 박사를 만났다.

그는 여느 서양인과는 달리 키가 160㎝도 채 안돼 그런지 호감이 갔다.

 

그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내가 '연계(탠덤.tandem) 핵연료주기' 기술을 공동 개발하자고 제안하자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나에게 "한국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한국과 우리는 협력해야 한다" 고 힘주어 말했다.

 

전혀 뜻밖이었다.

이렇게까지 그가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어 그는 "한국에 줄 수 있는 기술은 모두 주겠다"

"캐나다와 미국은 매우 가깝지만

 캐나다도 약소국임에는 틀림없다" 고 말했다.

 

말 속에 뼈가 있었다.

캐나다 역시 핵문제에 있어서는

미국의 철저한 견제를 받고 있음을 암시하는 얘기였다.

 

그는 나와 헤어질 때 다시 한번

"한국을 적극 돕겠다" 고 말했다.

캐나다 방문은 일단 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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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순조로운 진행

 

나는 귀국 즉시

대덕(大德) 공학센터 핵연료개발부장인 임창생 박사에게

"빠른 시간 내에 캐나다와 공동연구를 추진하라" 고 지시했다.

 

林박사는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1회 졸업생으로

미 매사추세츠 공과대(MIT) 에서

핵공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실력가였다.

 

학위를 받은 후 곧바로 원자력의 원조라고 불리우는

미 웨스팅하우스社에서 핵연료 설계팀장으로

7년간 경수로 핵연료를 설계한 실무 경험도 있었다.

 

그는 그 좋은 환경을 마다하고

경수로 핵연료를 국산화하겠다는 꿈을 안고

19763월 귀국해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적임자라고 판단,

이 사업의 타당성 검토를 포함해 캐나다측과의 협상 책임을 맡겼다.

 

협상은 원만하게 진행됐고,

마침내 1983 1

우리와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

연계 핵연료주기 공동연구 협정을 체결했다.

 

나는 이 사업 책임자로 林박사를,

부책임자에는 핵주기공정연구실장인 박현수 박사를 임명했다.

 

 朴박사는 고려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하웰연구소를 거쳐

 프랑스 에콜 드 스트라스부룩 국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소장 연구원이었다.

 연구 경험이 풍부했고 의욕 또한 대단해

 한번 과제를 맡기면 반드시 해내고야 말았다.

 

1983 6

朴박사는 전관식.유재형 두 연구원과 함께 캐나다로 떠났다.

6개월간 AECL 산하 화이트셸연구소에서 선진기술을 익히는 한편

캐나다 연구진과 연계 핵연료주기에 대한 공동연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행콕스 부소장은 이들을 아낌없이 도와주었다.

朴박사가 나에게 전해준 바에 따르면

그는 우리 연구진에게 핵심 기술을 전수해 주고

연구소의 중요한 자료들을 마음껏 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나에게 한 약속을 철저히 지킨 셈이다.

 

우리 연구진은 모처럼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철저히 기술을 익히고 서둘러 자료들을 복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