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불꺼진 연구실
1982년 3월,
나는 12년 가까이 몸담아 왔던 국방과학연구소(ADD) 를 떠나
대덕(大德) 공학센터장에 취임했다.
새로운 일 터인지라 나름대로의 포부와 기대도 컸었다.
그러나 막상 부임해 보니
예상과는 달리 분위기가 축 가라앉아 있었다.
대량감원 바람이 불던 ADD 보다 상황은 훨씬 좋지 않았다.
통폐합 후유증이 생각보다 큰 탓이었다.
대덕공학센터의 전신은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이었다.
朴대통령 시절
이곳은 어느 가장 대접을 받던 곳 중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그런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핵연료개발공단이
한국에너지연구소의 대덕 분소(分所)로 전락되면서
연구원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
예산도 대폭 삭감돼
막대한 경비를 들여 완공한
핵연료 가공 공장과 정련(精鍊) 공장 등을 가동할
운영비조차 없었다.
공장은 완전히 녹슬 판이었다.
그러니 단돈 1천만원짜리라도
신규사업을 벌인다는 것은 아예 생각도 못했다.
상당수 핵심 인력은 이미 연구소를 떠난 상태였다.
남아 있는 연구원들도
연구는 완전히 뒷전으로 미룬 채
틈만 나면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오후 5시만 되면 어김없이 퇴근했다.
'불꺼진 연구실' 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착잡했다.
넓디넓은 20만평의 부지가 더욱 썰렁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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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왕따 당하는 연구소
게다가 센터장 운전기사가 들려준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는 전임 센터장 이한주(李漢周.70)박사 일화를 들려 주었다.
李박사가 본소인 에너지연구소에 갈 때는
정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놓고
아예 걸어서 들어갔다고 한다.
에너지연구소측에서
'왜 센터장이 전용차를 타고 다니냐' 며
시비를 걸곤 했다는 것이다.
대덕공학센터장이면 에너지연구소 부소장이 아닌가.
그런데도 에너지연구소측에서는
마치 대덕공학센터가 에너지연구소에 더부살이를 하는 것으로 취급,
엄청나게 괄시했다는 것이다.
간부회의에서도
으례 李박사만 집중공격의 대상이 되곤 했었다는 것이다.
에너지연구소 뿐만이 아니었다.
과학기술처나 한국전력에서도 홀대는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李박사가 찾아가면 언제나 따돌리곤 했다는 것이다.
요즘말로 '왕따' 를 시킨 셈이다.
李박사는 정말 어처구니 없이 당하는 설움 때문에
차 안에서 혼자 숱하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李박사는 참다 못해 연세대 공대 학장으로 옮기고 말았다.
나는 李박사가 왜 그런 설움을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대덕공학센터는
과거 미국측으로부터 핵 개발 의혹을 받은 기관이었다.
그런지라 새로 집권한 신군부가 미국측을 의식해
이 기관의 존재 자체를 매우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역할을 제한하고 기구와 예산을 대폭 축소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눈치 빠른 사람들이 李박사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만약 내가 이같은 실상을 알았다면
나 역시 李박사 후임으로 가는 것을 당연히 꺼려했을지 모른다.
ADD에서도 죽도록 일만 했는데
기껏 옮긴 곳이
이처럼 힘없고 무시당하는 기관일 줄이야 미처 예상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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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미운 오리새끼
한마디로 모든 게 최악이었다.
나는 부임 다음날부터 전임자가 겪었던 수모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부임 인사차 과기처와 한국전력에 갔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인사를 해도 건성으로 받았다.
나는 속으로 당황했다.
'李박사가 차 안에서 숱하게 눈물을 흘렸다' 는 말이
점점 마음에 와닿기 시작했다.
과기처와 한전은 대덕공학센터의 '돈줄' 이었다.
과기처는 예산 배정권을 쥐고 있었고
한전은 연구 용역비를 제공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니 불쾌해도 전혀 내색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급기야 두 기관의 관계자들 입에서
듣기 거북스런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부임 인사차 만난 과학기술처 고위 공무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에너지연구소는 없어져야 한다" 고 서슴없이 말했다.
이들은 입을 맞춘듯
"도대체 에너지연구소가 그동안 뭘 했느냐" 며
"고작 감자에 방사선을 쪼여
식품 개량이나 한 것 밖에 없지 않느냐" 고 비판했다.
이들은 냉담하다 못해 공격적이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임 인사를 하러 간 사람에게
이렇게 면박을 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대덕공학센터는 완전히 '미운 오리새끼' 였다.
본소인 에너지연구소도
분소(分所)인 대덕공학센터를 서자 취급을 하고
상급 기관인 과기처는
한 술 더 떠 폐지론까지 들먹이니
정말 '설 곳' 이 없었다.
한국전력도 마찬가지였다.
에너지연구소에 연구 용역비를 제공하는 기관이라 그런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시큰둥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만나는 고위 관계자들마다 에너지연구소에 흠집을 내려 들었다.
연구 용역비를 받으면
그에 상응하는 쓸 만한 기술이 나와야 하는데
에너지연구소가 개발한 원자력 기술은
거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임 이한주(李漢周) 박사가
왜 미련없이 대덕공학센터장을 그만두고 연세대로 자리를 옮겼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내외적으로 일할 만한 여건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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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분위기 쇄신
나는 하루 빨리 대덕공학센터의 면모를 새롭게 하지 않으면
기관의 존립 자체가 순탄치 않음을 깨달았다.
나는 곧바로 업무 파악에 나섰다.
간부들로부터 부임 보고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보고 내용이 모두 부정적이었다.
한 마디로 희망이 없다는 투였다.
예산도 없고 상급 기관이 비협조적이라는 게 한결같은 이유였다.
나는 곧바로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부임한지 1주일 후인 1982년 3월 하순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내 소신을 얘기했다.
"이제부터 나에게 부정적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라.
비록 우리 기관이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분명 있을 것이다.
희망을 갖고 나갈 방향을 찾아 보자. "
간부들은 모두 숨을 죽인채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이들의 얼굴에서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나는 이들에게
왜 희망을 가져도 되는지 조목조목 그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에게는 20만평의 땅과 3백여명의 고급 인력,
그리고 좋은 건물들이 있다.
이같은 자산을 새로 확보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갈 것인가.
모든 기초는 닦여져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것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그게 중요하다."
간부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듣고보니 그렇다' 는 눈치였다.
풀죽은 목소리로 업무 보고를 할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제는 방향을 제시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지금은 이것저것 일을 벌이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낼 수 있는
한가지 사업을 찾아보자.
이미 기초작업이 이뤄진 사업 중에서 선택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
나는 그 자리에서 간부들에게 즉석 토론을 시켰다.
모두 진지한 자세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2시간 여만에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다.
당시 상황에서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사업은
'중수로(重水爐.CANDU) 핵연료 국산화사업' 이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 우리나라 원자력발전소는
경수로(輕水爐.PWR)인 '고리 1호기'가 1978년부터 가동중이었다.
또 1979년부터는
중수로인 '월성 1호기' 건설에 착수,
1983년 가동 예정으로 공사가 한창 진행중에 있었다.
간부들의 얘기인즉,
바로 월성 1호기에 필요한 핵연료를
우리 손으로 국산화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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