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제7부 중수로 핵연료 개발(2)

기른장 2010. 2. 1. 19:29

09. 어림없는 개발비

 

하지만 독자 개발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캐나다가 무려 10억달러나 들었다는 얘기가 정말 실감났다.

1982년 당시 환율로는 약 6천억원이나 되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개발비는 고작 191천만원,

그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먼저

캐나다에서 구입한 중수로 핵연료를 보고 역() 설계를 했다.

다시 말해 실물의 크기를 재고 모양을 본 뜬 다음

재료와 특성 등을 하나하나 분석해 우리식 설계를 한 것이다.

 

일종의 복사본을 만든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복사를 잘 했어도

막상 실물을 만들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첫번째 어려움은

길이 1.5, 직경 1.2㎝ 가량의

작은 원통형 우라늄 덩어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우라늄 덩어리를 '펠릿' 이라 부르는데,

 우라늄 가루를

 1700℃나 되는 고온에서 8시간 구워 펠릿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는 생각보다 고도의 기술을 요구했다.

 연구진은 수없는 실험을 반복한 끝에

 마침내 펠릿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또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르코늄 합금(zircaloy)으로 만든

 길이 50, 직경 1.3㎝짜리의 막대 모양의 봉()에다

 이 펠릿을 채워넣은 다음

 양쪽 끝을 밀봉(密封)하여 연료봉을 만들고

 

 이 연료봉을 37개 모아 한 다발로 묶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접을 해야 하는데

 용접기술이 매우 까다로웠다.

 

 용접을 세게 하면

 연료봉에 구멍이 생겨 우라늄 연료가 손상된다.

 

 반대로 약하게 하면

 연료봉 사이에 끼워놓은 작은 지르코늄 합금조각이 떨어져 나가

 원자로에서 사고를 일으킨다.

 

 용접공들은 너무 긴장한 탓인지 구슬땀을 흘리곤 했다.

 시행착오를 되풀이할 때마다 우리는 맥이 빠졌다.

 그러나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 손으로 해내고야 말겠다는 열의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땀흘린 보람이 나타났다.

 37개 연료봉을 한 다발로 묶는 데 성공한 것이다.

 중수로 핵연료 시제품(試製品) 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이때가 1983 1월이었다.

----------------------------------------------------------------

 

10. 마지막 관문

 

그렇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었다.

마지막 관문인 성능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만약 이 시험에 통과하면 천만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지금까지 우리의 수고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우리가 가장 조마조마하게 생각했던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캐나다에서 들여 온 핵연료를 꼼꼼히 분석해 시제품을 만들긴 했지만

 솔직히 그 성능이 어떨지는 아무도 자신할 수 없었다.

 

통상 중수로 핵연료는

원자로에서 연소되기 전과 1년간 연소된 후의 모양이 똑같아야 한다.

또 원자로에서 탈 때 처음 설계대로 열량이 나와야만 한다.

 

 그러나 핵연료의 성능이 좋지 않을 경우

 원자로에서 타는 동안 모양도 변하고 열량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바로 이같은 결과를 알아보는 것이 성능 시험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에는

핵연료 시제품의 성능을 시험할 수 있는 실험용 원자로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캐나다 초크리버연구소에 있는

 재료시험로(NRU)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재료시험로는

 그 무렵 캐나다가 보유한 원자로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커

 무슨 실험이든 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료시험로를 이용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

 

11. 재료시험로 사용 협상

 

나는 우리 연구진이 한창 연구에 몰두하던 중에

우리가 중수로 핵연료 시제품 개발에 성공할 경우를 대비해서

시제품의 성능을 시험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1982년부터 미리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와 접촉했다.

 

그러자 캐나다측은 실험비로 3백만 캐나다 달러를 요구했다.

1982년 환율로 약 17 8천만원이었다.

우리 2년간 연구개발비와 맞먹는 액수였다.

 

우리에게는 너무 큰 부담이었다.

산 넘어 산이었다.

 

캐나다측의 얘기인즉,

중수로 핵연료를 개발하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고

시제품의 성능을 시험하는 재료시험로(NRU) 가 고가인 점을 감안해

최소한의 실험비는 받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외환사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정오(李正五.71) 과학기술처장관은

'시제품 성능시험은 무료로 해야 한다' 는 입장을 고수했다.

 

캐나다측과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이같은 분위기를 간파,

1982년 여름 우리나라를 찾은

밥 하트 AECL 연구담담 부사장과 다시 접촉해

그를 이렇게 설득했다.

 

"캐나다는 고작 한국에 중수로 한 기() 밖에 못 팔지 않았느냐.

 그것으로 만족할 셈이냐.

 앞으로 캐나다가 한국에 중수로를 많이 팔려면

 한국이 중수로 핵연료를 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니 이번 성능 시험을 공짜로 하게 해달라. "

 

그러나 밥 하트 부사장은 전혀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하도 조르니까 "얼마까지 줄 수 있느냐" 고 물었다.

나는 "40만달러(캐나다 달러) 까지는 줄 수 있다" 고 대답했다.

이 액수도 내가 임의로 정한 것이었다.

 

그랬더니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협상은 또 결렬됐다.

-------------------------------------------------------

 

12. 재협상 기회

 

그러던 중에 재협상의 기회가 왔다.

1982년 가을

캐나다에서 한-캐나다 원자력 상설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던 것이다.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는 회의였다.

 

당시 우리측 대표로는

과기처 원자력상임위원 이병휘(李炳暉) 박사가 내정됐다.

나는 옵서버로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李박사는 나보다 앞서 미국으로 출발했다.

캐나다와 원자력회의를 하기 전에

먼저 미 국무부와 의견 조율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미국은 원자력문제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원자력 문제 만큼은

우리가 어떤 나라와 협력하든

사전에 미국에 알리도록 한.미간에 양해가 이루어져 있었다.

 

과기처장관은 대표단 李박사가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핵연료 시제품에 대한 성능 시험을 무료로 할 수 있도록

 캐나다측을 잘 설득하라" 고 특별히 지시했다.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자꾸 불안했다.

우리가 무료로 성능 시험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에도 李장관을 비롯, 과기처 관계자들은

계속 '무료' 만 고집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캐나다로 출발하기 직전 李장관을 찾아갔다.

李장관을 설득, 절충점을 찾기 위해서였다.

 

"장관님,

 무료로 핵연료 성능 시험을 해 달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입니다.

 제가 AECL측에 40만달러만 받으라고 제안한 적이 있으니

 이 정도는 장관님께서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어떻게든 캐나다측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

 

李장관은 내가 하도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하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외환 사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적지 않은 외화를 지불해야 한다는 게

몹시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재차 李장관에게 재촉했다.

"이 정도는 보장해 주셔야 일을 성사시킬 수 있습니다"

 

李장관은 마침내 결심이 선듯 "그렇게 하라" 고 허락했다.

그는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을 지시한 장본인이었기에

누구보다 이 사업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고심끝에 결단을 내린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결단이 너무 고마웠다.

 

이제 공은 나에게 넘어온 셈이었다.

캐나다측을 설득해서 40만달러 선에서 매듭을 지어야 했다.

李장관은 그 자리에서 '40만달러 승낙서' 를 내게 써 주었다.

--------------------------------------------------------

 

13. 결렬된 협상

 

나는 이 서한을 갖고

미국에 먼저 가 있는 李박사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워싱턴으로 떠났다.

 

나는 李박사를 만나 협상전략을 논의한 후

둘이서 함께 캐나다로 갔다.

그러나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 측도 만만치 않았다.

 

3일 동안 밀고당기며 협상을 계속했지만

전혀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AECL측은 "한국측의 요구는 말도 되지 않는 얘기" 라며

"최소 3백만 캐나다 달러는 줘야 한다" 고 완강히 버텼다.

 

모든 공식 일정이 끝나

우리가 캐나다를 떠날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하지만 캐나다측은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음 출장지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결국 협상이 결렬됐다고 판단,

나는 예정대로 북유럽으로 떠나기 위해

오타와에서 자동차를 타고 몬트리올 공항으로 향했다.

 

기분이 착잡했다.

40만달러 선에서 설득할 자신이 있다고 李장관에게 큰 소리를 쳤건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양보도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몬트리올 공항에 도착하니 약 2시간 가량 여유가 있었다.

앞으로 이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공항대합실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골치가 아팠다.

----------------------------------------------------------

 

14. 뜻하지 않은 반전

 

그런데 느닷없이 나를 찾는 방송이 들렸다.

너무 뜻밖이었다.

나는 서둘러 방송실로 갔다.

 

놀랍게도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 에서 전화가 걸려 와 있었다.

상대방은 내 신분을 확인하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밥 하트 AECL 연구담당 부사장이

 당신과 계약을 체결하러

  1시간 전에 몬트리올 공항으로 출발했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지난 3일간 그렇게 통 사정을 했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가

직접 차를 몰고 이리로 달려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었다.

 

30분쯤 지났을까.

정말 검정색 양복에 금발 머리를 휘날리며

밥 하트 부사장이 허겁지겁 대합실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시 내가 비행기를 탔으면 어쩌나 초조해 하며 달려온 것이다.

 

그는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조금 전 우리 정부가

 40만달러에 계약을 체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고 말했다.

 

순간 나는 그를 부둥켜 안았다.

그토록 내 속을 태우던 중수로 핵연료 시제품에 대한 성능시험 문제가

마침내 해결된 게 너무 기뻤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항 대합실에서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때가 1982 10 5일이었다.

------------------------------------------------------------

 

15. 국산핵연료 실험

 

이렇게 사전 정지 작업까지 끝내고 기다리던 중에

드디어 다음해 1983 1월에

우리 손으로 중수로 핵연료 시제품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1983 2월말

대덕(大德) 공학센터의 서경수.김병구 박사가

우리가 만든 중수로 핵연료 시제품 3다발을 갖고

성능시험을 하기 위해 캐나다로 떠났다.

 

나는 마치 맏딸을 시집 보내는 기분이었다.

徐박사는 출발 직전 나에게

"만약 성능시험에 실패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모두 비장한 심정이었다.

 

성능시험은 1983 3월말 실시됐다.

결과는 1년이 지나야 알 수 있다.

 

나는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열악한 환경에서 밤을 지새며 땀흘려 개발한 것이기에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간절히 원했다.

 

서경수.김병구 박사팀이 나에게 중간보고를 해 오곤 했다.

그것만 갖고는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지만

왠지 느낌은 좋았다.

 

7개월후 마침내 연소(燃燒) 시험이 끝났다.

핵연료 시제품을 원자로에서 태우는 시험이 끝난 것이다.

 

金박사는

"원자로에서 꺼낸 시제품을 확인해 봤더니

 색깔만 검게 변한 채 모양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고 알려왔다.

 

나는 일단 마음이 놓였다.

성능이 좋은 핵연료의 경우

원자로에서 연소되기 전과 연소된 후의 모양이 똑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확한 결과는

조사후(照射後) 시험을 해 봐야만 알 수 있었다.

 

 '조사후 시험' 이란

 핵연료가 원자로에서 어느 정도 연소됐는지를 알아보는 시험이었다.

 연소도가 높을수록 많은 열량을 낼 수 있어 품질이 그만큼 우수했다.

 

 바로 이 시험에서 만족한 결과가 나와야만

 우리가 개발한 핵연료를 국제적으로 공인받을 수 있었다.

-----------------------------------------------------------

 

16. 최종 결과

 

1984 6월 최종결과가 나왔다.

캐나다 기술진은 그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 시제품의 연소도가

캐나다 핵연료의 그것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徐박사는 내게 전화를 걸어

"우리가 기어이 해냈습니다" 라고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너무 기뻤다.

내가 노고를 치하하자 그는

"성능시험에 실패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으려 했는데

 이제 그럴 기회 마저 뺏겼다" 며 너스레를 떨었다.

 

중수로 기술의 창시자인 캐나다가

우리가 독자 개발한 중수로 핵연료의 성능을 공식 인정하자

그동안 국산 핵연료를 못 미더워하던 한국전력도

완전히 태도가 돌변했다.

 

한전은 성능시험 결과가 나오기 전만 하더라도

"우리 과학자들이 만든 핵연료는 못 믿겠다"

"만약 1조원이나 되는 발전소에

 국산 핵연료를 사용해 사고가 날 경우

 누가 책임질 거냐" 며 우리를 완전히 불신했었다.

 

그럼에도 내가

"품질 걱정은 하지 말라" 며 자신있게 얘기하자

 

"그렇게 자신 있으면

 동자부장관과 과기처장관의 추천서를 받아오라"

한전측은 내게 무리한 요구를 했었다.

 

 동자부는 한전의 상부 기관이고

 과기처는 대덕공학센터의 감독기관인데

 이 두 곳에서  책임지면 허락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거절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핵연료 성능시험에서 무난히 통과하자

한전측은 주저없이

월성 원자력발전소에 시험 장전(裝塡)하도록 허락했다.

직접 발전소에 넣고 성능시험을 하게 배려한 것이다.

 

이때가 1984 9월이었는데,

1년후 나온 시험 결과를 봤더니

캐나다에서 시험할 때와 마찬가지로

품질이 매우 뛰어나다는 판정이 나왔다.

 

이때부터 한전은

국산 핵연료를 양산할 수 있도록 본격 지원에 나섰다.

'돈줄' 과 기술이 완전히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

 

17. 쾌거와 손실

 

1981년 중수로 핵연료 개발에 착수해

1986년 양산 준비를 완료하기까지

개발비는 총 89 5천만원이 들었다.

 

캐나다가 개발비로 투자한 6천억원과 비교하면

엄청난 절약이자 쾌거였다.

 

그러나 뼈아픈 손실도 있었다.

 

 중수로 핵연료 개발에 핵심 역할을 한 서경수 박사가

 과로 등으로 인해 위암에 걸려

 1988 10월에

 51세의 젊은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연구에만 몰두했던

 한국이 낳은 진정한 '원자력 영웅'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