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제9부 경수로 핵연료 개발(1)

기른장 2010. 2. 3. 17:53

01. 뜻밖의 기회

 

대덕공학센터장으로 부임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1983 4월 초순 어느날 오후,

봄 햇살이 따사로워 온몸이 나른했다.

 

모처럼 창밖을 내다보며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이정오(李正五.71) 과학기술처 장관이었다.

 

"韓박사, 나 장관이요.

 대통령께서 413일 대덕(大德) 공학센터를 방문할 거요.

  20분 정도 머무르실 예정이니

 韓박사가 직접 대통령께 브리핑을 하시오. "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두환(全斗煥.69) 대통령이 연구소를 방문한다는 것이다.

 

내가 대덕공학센터장에 취임한지 1년만에

가장 큰 손님을 맞이하는 셈이었다.

그런데 나더러 브리핑을 하라니 전혀 뜻밖이었다.

 

통상 대통령이 연구소를 방문할 경우

부소장인 나 대신

소장이 직접 브리핑을 하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李장관은

 에너지연구소 부소장이자 대덕공학센터장인 나에게

 브리핑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머뭇거리자

 "원자력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전적으로 韓박사에게 달려 있다"

 "대통령께 원자력의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시키라" 고 당부했다.

 

李장관이 전해 준 바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경제비서관들과 경제기획원측에서

'원자력을 키우지 말자' 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원자력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경제 논리로만 생각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李장관은

 "이번 기회에 이런 분위기를 확 바꿔 놓아야 한다" 고 당부했다.

 

나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새 정권이 들어서고 난 이후

 원자력계가 극도로 위축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은

 우리의 원자력 기술 개발을 철저히 견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우리 연구소를 방문하는 것이므로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열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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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대통령의 방문

 

나는 간부들과 함께

브리핑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 협의했다.

 

 실제 브리핑 시간은 불과 10여분 밖에 안되므로

 핵심 내용만 담아야 했다.

 

 결국 최근 우리 연구진이 독자 개발한 중수로(重水爐) 핵연료와

 탱크 파괴무기인 대전차 관통자(對戰車貫通子) 에 대해서만

 집중 보고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시제품(試製品) 개발에 성공한 단계지만

 순수 우리 기술로 개발했다는 것 자체가 큰 성과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간부들에게 브리핑 자료를 철저히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연구소가 갑자기 분주해졌다.

아무래도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니

구석구석 챙겨야 할 데가 많았다.

 

그러던 차에

평소 가깝게 지내던 청와대 모() 비서관이 내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의 이번 대전 방문은

 김성진(金聖鎭)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위로하는 게 주 목적"

이라고 귀뜸해 주었다.

 

全대통령과 金소장은 같은 육사 11기 동기였다.

 

 당시 金소장은

 안기부 차장에서 국방과학연구소장으로 자리를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안기부 차장 시절

 중앙정보부를 안기부로 개편하는

 어려운 작업을 책임진 장본인이었다.

 

  1981 1

 全대통령과 미 레이건 대통령의 회담을 성사시킨 숨은 공로자였다.

 바로 이같은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全대통령이 대전에 내려 온다는 것이었다.

 

나와 金소장은

국방과학연구소(ADD) 창설 멤버이자

함께 미국에서 공부를 했는지라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그래서 이같은 내막을 알고 있었다.

 

결국 全대통령은

ADD에 가기 전 잠시 대덕공학센터를 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뜻밖의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나는 이 기회에

원자력의 중요성을 대통령께 확실히 인식시켜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1983 413일 오후 4.

全대통령이 드디어 대덕공학센터를 방문했다.

그로서는 첫번째 방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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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대통령의 관심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두환(全斗煥.69)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을 시작했다.

 

"지금 보시는 이것이

 이번에 우리 과학자들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중수로(重水爐) 핵연료 시제품(試製品) 입니다.

 

 캐나다는 이 핵연료를 개발하는 데

 캐나다 달러로 무려 10억달러,

 1982년 환율로 계산하면 약 6천억원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제품을 개발하는 데

 불과 191천만원 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

 

全대통령은 매우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캐나다에 비해 턱없이 적은 액수로 개발했다는 사실이

매우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자신감을 갖고 브리핑을 계속했다.

 

"현재 이 시제품은

 캐나다 초크리버연구소에 있는 재료시험로(NRU) 에서

 성능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1년이 지나야 최종결과가 나오지만

 저희 연구진은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확신합니다. "

 

全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 했다.

솔직히 全대통령 집권 초기만 하더라도

과학자들 사이에서

'우리 원자력은 이제 끝장난 게 아니냐'

우려섞인 얘기들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만큼 5공의 원자력정책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全대통령은 뜻밖에도 내 보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나는 저윽이 안도했다.

나는 계속 탱크 파괴무기인

대전차 관통자(對戰車貫通子) 에 대해 설명했다.

 

"이것은 금속우라늄을 합금해 만든 대전차 관통자입니다.

 어떤 탱크라도 능히 뚫을 수 있고

 그 순간 화염이 발생해

 순식간에 탱크를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미국도 최근에야 이 무기를 개발했을 정도로 최신예 무기입니다.

 우리는 불과 1년만에 시제품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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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全대통령의 의지

 

내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全대통령은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거 뭐지.

 고리에 있는 원자로, 그게 경수로 아닌가?

 우리 원자력 발전소는 대부분이 경수로인데

 거기서 사용할 핵연료는 왜 개발하지 않지?

 우리 입장에서는

 중수로 핵연료보다 경수로 핵연료가 더 중요하지 않나?"

 

전혀 뜻밖이었다.

사실 나는 全대통령이 그 정도까지 파악하고 있는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그 사업은 당시 한국전력에서 추진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全대통령은 다시 물었다.

"그걸 왜 한전에서 하지?"

 

나는 차분하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현재 우리 기술로는

 경수로 핵연료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외국 기술을 도입해야 합니다.

 한전이 그 사업을 맡은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

 

全대통령은 내 설명을 듣더니

"한전이 외국 회사에 사업을 맡기면

 우리는 영영 기술을 소유할 수 없잖아.

 힘들어도 우리 과학자들이 개발해야 우리 기술이 되지"

하며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또 다시

우리 과학자들이 경수로 핵연료를 개발하지 못하는 이유를 물었다.

나는 조금 전과 똑같이

'기술 수준이 뒤떨어지기 때문' 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全대통령은

"어떻게든 우리 과학자들이 핵연료를 개발해야 우리 기술이 되지

 외국 기술만 들여와서는 우리 기술이 될 수 없다"

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나는 全대통령이 원자력 기술 자립에

매우 강한 집착을 갖고 있음을 처음 발견하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질의 응답이 계속되다 보니

대통령의 방문 시간은 예정보다 30분이나 초과됐다.

무려 50분 가까이 대덕공학센터에 머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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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새로운 시작

 

그로부터 3개월후인 1983 7월초

나는 나도 모르게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에 임명됐다.

대덕공학센터장과 사장직을 겸하게 된 것이다.

 

1983 6월말,

당시 나는 미국 출장중이었는데,

내가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에 임명되었다면서,

대덕(大德) 공학센터에서 이를 긴급히 팩스로 알려 주었다.

 

중수로 핵연료를 개발한 데 대한 포상이자

원자력 기술 자립을 적극 추진하라는

全대통령의 무언(無言)의 지시였다.

 

 핵연료주식회사는 한전(韓電) 산하기관이므로

 당연히 임명권자는 한전 사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임명 사실을 통보받기 전까지

 당시 박정기(朴正基.65) 한전 사장을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결국 朴사장 윗선에서 나를 사장에 임명하게 한 것이 틀림없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1983 4월 전두환 대통령이 대덕공학센터를 방문한 게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대통령 자신은 미국을 의식해서

 원자력 분야를 최대한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과학자들이 중수로 핵연료 시제품을 독자 개발한 사실에

 매우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대덕공학센터장 겸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에 임명된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음지에서 애쓴 우리 연구원들이 받아야 할 포상을

 내가 대표로 받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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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기술 자립의 의미

 

나는 7월초 귀국하자마자 한전 朴사장을 만났다.

첫 인상이 매우 좋았다.

 

 군출신(육사 14) 답게

 다부져 보이면서도 왠지 넉넉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가 全대통령의 측근이며

 한국중공업 사장을 지냈다는 정도 외에는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아무튼 그는 첫 대면임에도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악수를 청하며

"韓박사님에 대해 얘기는 많이 들었다"

"도대체 韓박사님이 주장하는

 기술 자립 정신이 무엇인지 듣고 싶다" 고 말했다.

 

나는 평소의 생각을 기탄없이 얘기했다.

"우리는 한마디로 원자력 설계 능력이 없어

 밤낮 외국 기술을 들여오기 바쁩니다.

 이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니 우리 입맛에 맞는 발전소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마치 배를 설계할 줄 알아야

 상선이든 군함이든 원하는 배를 마음대로 만들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배도 만들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

 

그는 중간중간 내 주장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계속 내 소신을 얘기했다.

 

"우리 과학자들은 매우 우수합니다.

 제대로 훈련만 시킨다면 얼마든지 설계능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또 설계 기술이야말로

 뛰어난 인력 외에 별다른 자원을 갖고 있지 않은 우리나라가

 개발하기에 아주 안성맞춤입니다.

 

 하루 빨리 설계 기술을 익히지 못하면

 원자력 기술자립은 요원합니다. "

 

朴사장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나도 같은 생각' 이라고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지금 말한 것을 좀더 자세히 정리해서

 일주일 안에 보고서로 제출해 달라" 고 했다.

 

나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앞으로 사업을 해 나가려면

한전측 지원과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朴사장이 나와 뜻을 같이 한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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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핵연료주식회사

 

나는 핵연료주식회사로 돌아와

먼저 업무 파악에 나섰다.

 

 원래 이 회사는 1982 11월에 한전이 설립,

 김선창(金善昶) 당시 한전 부사장이

 초대 사장으로 잠시 재직했었다.

 

 그러다가 불과 7개월만에

 내가 2대 사장에 취임한 것이었다.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 같았다.

 

기존의 회사 방침을 검토해 보니

내가 추진하려는 원자력 기술자립 방향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특히 다음과 같은 세가지 점이 그랬다.

 

 첫째, 핵연료 설계는 외국에 맡긴다.

 둘째, 한국이 어느 기술을 도입해야 할지는 

          외국의 원자력기관이 결정한다.

 셋째, 핵연료 생산을 위해

          외국 자본을 50% 유치한다는 등이 그것이었다.

 

물론 이같은 방침은 전적으로 관례에 따른 것이었지만

기술 자립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이를 모두 백지화하고 새 틀을 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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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기술자립 밑그림

 

나는 박정기 한국전력 사장과의 첫 대면을 끝낸 후

곧바로 경수로(輕水爐) 핵연료 국산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朴사장이 일주일 안에 보고서 제출을 원했기 때문이다.

핵연료주식회사는 한전의 자() 회사이므로

朴사장이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에 갓 취임한 나에게

그같은 요구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먼저 내가 취임하기 전에 이미 마련해 놓은

기존의 방안을 전부 뜯어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기술자립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중수로(重水爐) 핵연료 국산화사업의 성공 경험을 토대로

보고서를 새로 만들었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첫째,

 

 경수로 핵연료 설계는

 반드시 우리 과학기술자가 책임지고 수행한다.

 핵연료 설계는 원자력 기술의 핵심이므로

 기술자립을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기필코 우리 손으로 해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둘째,

 

 경수로 핵연료 생산과 관계되는 기술 가운데

 어떤 기술을 외국에서 들여올지는

 전적으로 우리 과학기술진이 결정한다.

 

 당시 한전은 우리가 기술 도입에 관여할 경우

 리베이트 제공과 같은 부정이 개입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이 문제를 완전히 외국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선진 기술을 보유한 외국측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기술이나 핵심 기술을

 전혀 제공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이런 점을 우려해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도입은

 당연히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는 문구를 삽입했다.

 

셋째,

 

 경수로 핵연료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전적으로  국내에서 조달한다.

 이는 외국자본을 일체 들여오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1983년 당시 우리나라에는

 중수로(重水爐) 1, 경수로 8기 등

 도합 9기의 원자력발전소가 있었다.

 

 이중 8기의 경수로 발전소의 핵연료 생산 사업을

 외국 자본과 공동으로 추진한다면

 경제적으로 상당한 손해였다.

 

 또 자본을 투자한 선진국이 사업을 주도하게 돼

 기술자립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우기 경수로 핵연료를 생산 비용은 모두 약 1천억원으로

 원자력발전소 1기 건설비의 약 16분의 1 정도 밖에 안됐다.

 

 이처럼 적은 비용으로 큰 이익을 낼 수 있는 사업이므로

 순수 우리 자본으로 핵연료를 생산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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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엉뚱한 걸림돌

 

내가 한참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계획안을 구상하고 있을 때

양창국 당시 한전 원자력담당 과장이 내게 전화를 걸었다.

 

 梁과장은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출신으로

 미 오리건주립대에서 원자력 분야로 석사학위를 받은

 한전의 원자력 전문가였다.

 

梁과장은 자기 소개를 간단히 하더니

"우리 사장님께 보고하기 전에

 먼저 저에게 보고서를 보여 주실 수 없겠느냐" 고 물었다.

 

이어 그는

"제가 실무자이므로

 한전에서 원자력 분야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반드시 제 손을 거치게 되어 있다"

 

"우리 사장님께 올라가는 보고서는

 곧바로 제가 전부 알게 되어 있으니 미리 좀 보여달라"

 고 거듭 요구했다.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일주일후 朴사장께 보고하기로 돼 있으니

 보고드리러 가기 한 시간 전에 내 사무실로 오라" 고 말했다.

 

일주일 후 나는 梁과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약속시간이 지났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朴사장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거의 다 돼

할 수 없이 한전으로 가기 위해 사무실을 나왔다.

 

내가 막 차에 오르려는 순간 누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바로 梁과장이었다.

그는 약속시간보다 거의 50분이나 늦게 나타났다.

 

그는 허겁지겁 내 차에 타더니

"늦어서 죄송하다"

"우리 사장님께 보고할 계획안을 좀 보여달라" 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약 5분간 보고서를 훑어 보더니 불쑥

"나는 이 계획안에 반대한다" 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고 늦게 나타난 것도 불쾌한데

5분만에 보고서를 대충 읽고 나서

거두절미 하고  '반대한다' 고 한마디 던지다니,

너무 무례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핵연료주식회사와 한전의 아주 가깝게 있어서

차로 불과 5분 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차 안에서 그와 논쟁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려

곧바로 한전 사장실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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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전폭적인 지원

 

朴사장은 두번째 만남인데도

수년간 사귄 것처럼 나를 반겨 주었다.

 

나는 朴사장께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계획안에 대해 보고했다.

요지는 세 가지였다.

 

 첫째, 원자력 기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핵연료 설계는

 반드시 우리 과학기술자가 책임지고 수행한다.

 

 둘째, 경수로 핵연료 생산과 관계되는 기술 중에서

 어느 기술을 외국에서 들여 올지는 전적으로 우리 과학기술진이 결정한다.

 

 셋째, 경수로 핵연료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모두 국내에서 조달한다.

 

朴사장은 내가 보고를 끝내자

"나는 대찬성" 이라며

"韓박사님의 기술자립 정신에 완전히 동감한다" 고 말했다.

조금 전 한전의 원자력 실무책임자인 梁과장의 견해와 정반대였다.

 

나는 일단 안도했다.

朴사장이 내가 만든 계획안을 지지하는 한

큰 장애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이었다.

朴사장은 나와 더 얘기를 주고받은 후

"모든 게 다 좋은데 한가지 하셔야 할 일이 있다"

"부사장을 설득시켜 달라"고 했다.

 

나는 순간 넘어야 할 산이 또하나 버티고 있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