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제9부 경수로 핵연료 개발(3)

기른장 2010. 2. 3. 18:16

21. 평가 요령

 

내가 이같은 평가 기준을 제시하자 평가위원들은

"어떻게 이 세 가지를 함께 평가할 수 있느냐"

"도저히 불가능하다" 고 난색을 표했다.

 

나는 이들에게

"입학시험처럼 하라" 며 구체적인 방법을 일러 주었다.

 

 "먼저 세 분야를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항목들을 만들어라.

  각 항목별로 담당 평가위원들이 1백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긴 다음

  가중치(加重値) 에 따라 점수를 다시 환산하면 된다.

  마치 입학시험에서 영어 2백점, 사회 1백점, 한문 30점 등

  과목별로 점수 비중을 달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이어 나는

 "이런 식으로 총점을 계산해

  가장 많이 점수를 받은 회사를

  우리의 기술도입선으로 선정하면 된다" 고 말했다.

 

 그제서야 평가위원들은 내 말을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끝으로 평가의 정확성을 위해 한가지 단서를 붙였다.

 "가중치를 정한 사람은 절대 평가위원이 될 수 없다"

 

사실 이같은 방식은 처음 시도하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정부 관련부처와 사업주관 단체 등

기관장들이 모여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히 정치적 입김이나 외교적 압력이 작용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과학기술자들로 구성된 평가단에 전권을 위임했다.

 

나는 그들이 평가에 착수하기 전

"여러분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결정에 따르겠다" 고 약속했다.

 

평가위원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기술도입선을 결정한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듯

자못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까지 연구에만 몰두해 왔지

한번도 경영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려본 적이 없는 그들로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5개 회사가 보내온 기술자료는 산더미처럼 많았다.

기가 질릴 법도 한데도

그들은 오히려 신바람이 나

밤샘 작업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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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밀고 당기기

 

40명의 과학기술자들로 구성된 평가단은

5개 외국 회사들이 제출한

입찰서(入札書) 와 기술자료 등을 꼼꼼히 검토했다.

오랜 기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그들은 내가 제시한 평가 기준에 따라

기술이전, 기술수준, 경제성 등 세 분야에 초점을 맞추었다.

 

각 분야별로 구체적인 항목들을 만들어

1백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긴 후

가중치(加重値) 에 따라 다시 점수를 환산했다.

 

나는 평가단에 전권을 위임했으므로

평가작업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입찰에 응한 외국 회사들의 기술자료를 최대한 확보하려 했다.

이들은 세계적인 원자력회사답게

한결같이 우수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이들이 가진 기술자료만 수중에 넣어도 엄청난 수확이었다.

이같은 생각은 나와 평가단이 마찬가지였다.

이심전심으로 서로 통했던 것이다.

 

평가단은 이들이 제출한 기술자료가 미흡하다고 판단해

1985 1월과 4월 두 차례에 걸쳐

기술자료를 보완하라고 이들 회사에 요구했다.

한마디로 '갖고 있는 기술 자료를 몽땅 다 내놓으라' 는 것이었다.

입찰에 응한 외국 회사들은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이들은

"한국에서 이제까지 이런 전례가 없었다"

"우리의 핵심 기술을 몽땅 가져갈 셈이냐" 고 불평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사업을 따내려고

우리가 요구하는 기술 자료들을 마지 못해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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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웨스팅하우스의 반발

 

그러나 한 회사만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바로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사였다.

 

'원자력의 원조' 이자

세계 제일의 기술을 자랑하는 회사라서 그런지

매우 고자세였다.

 

웨스팅하우스사는

'안전 해석 코드' 를 내놓으라는 우리의 요구를 가장 못마땅해 했다.

 

 안전 해석 코드란

 핵연료를 원자로에서 연소시킬 때 일어날지도 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기술이다.

 

 이 속에는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핵심기술의

  80%가 들어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기술이다.

 

 그래서 웨스팅하우스사는 한사코

 안전 해석 코드만큼은 우리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어느날 웨스팅하우스사 한국지부 고위 관계자가 나를 찾아와

 

 "1천억원 밖에 안되는 경수로 핵연료 사업을 하면서

  어떻게 1 7천억원 짜리 발전소에 필요한 자료를 달라고 하느냐"

  며 거세게 항의했다.

 

 이어 그는

 "안전 해석 코드는

  하나의 발전소에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든 발전소에 다 적용되는 기술" 이라며

 

 "앞으로 한국은 적어도 수십기의 발전소를 건설할텐데

  여기에 모두 사용되는 기술을

  조그만 사업을 하면서 내놓으라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간다"고 반발했다.

 

그는 아예 작심하고 나를 찾아온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나는 평가위원들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고 말한 뒤

"그들이 안전 해석 코드를 달라고 요구하면 줘야 한다"

"만일 그것을 내놓지 않으면 입찰에서 떨어진다" 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러면 안전 해석 코드를 줄테니

 그대신 기술 제공비를 달라" 고 요구했다.

 

나는 그 말에는 일체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나간 후 나는 웨스팅하우스사 본사에 공문을 보내

"안전 해석 코드를 줄 수 있는지 여부를

 빠른 시간내에 알려달라" 고 통보했을 뿐이다.

 

우리가 전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웨스팅하우스사도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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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최종 평가 결과와 반격

 

이렇게 오랜 기간의 평가 작업을 거친 1985 8월초,

40명의 과학기술자들로 구성된 우리 평가단은

경수로(輕水爐) 핵연료 국산화사업의 기술도입선으로

독일 지멘스 그룹의 카베유사()를 선정했다.

 

 5개 입찰회사 가운데 최종 결선에 오른 회사는

 독일 카베유사와 미국 웨스팅하우스사()였다.

 

 그러나 웨스팅하우스사가 제시한 입찰조건은

 카베유사 보다 경제성, 기술이전 등에서 뒤졌다.

 

 기술만큼은 웨스팅하우스사를 따라갈 회사가 없었다.

 '원자력 기술의 원조' 답게

 정말 탐날 만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가단은

 단지 기술수준만 본 게 아니라

 기술이전, 경제성 등도 중요한 평가기준으로 삼았다.

 

웨스팅하우스사가 입찰에서 떨어지자 미국측은 즉각 반발했다.

 

 우리가 기술도입선을 발표한지 일주일 후

 전직 주한 미대사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만나고 싶다" 는 뜻을 밝혀왔다.

 그가 누구인지는 세월이 흘러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약속장소인 서울 힐튼호텔 커피숍으로 나갔다.

그는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말했다.

"이번 입찰에서 미국측 회사들을 떨어뜨린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다.

 

당시 입찰한 5개 회사중 3개 회사가 미국 회사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지금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그런 요구를 하느냐" 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지금 미 국무부 고문이자

 웨스팅하우스 고문 자격으로 이 자리에 나와 있다"

 

이어 그는

"이번에 입찰에 응한 미국의 원자력회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한국에 최대한 호의를 베풀었는데

 어떻게 세 회사 모두를 떨어뜨릴 수 있느냐" 며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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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오해와 설명

 

그는 나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그건 아니다" 며 평가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웨스팅하우스가 이제까지 한국에 해 준 것을 C라고 한다면

 이번에는 기가 막히게 잘해 주었다.

 한마디로 A를 줄만하다.

 그러나 독일의 카베유는 그보다 더 잘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 평가위원들은 카베유에 A+를 주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미국 유학시절

미국인에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충분히 설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평가가 얼마나 공정하게 된 것인지를

그에게 차분히 얘기했다.

 

"이번 평가는 전적으로 40명의 과학기술자들이 했다.

 나는 그들에게 전권을 주면서

 그들이 내리는 결정에 나도 따르기로 약속했다.

 평가위원들은 기술이전, 기술수준, 경제성 등

 세 분야에 초점을 맞추어 점수를 매겼다.

 그결과 카베유는 A+, 웨스팅하우스는 A를 맞았다.

 그래서 웨스팅하우스가 떨어진 것이다."

 

그는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나도 한국에서 대사로 있을 때 그런 원칙으로 일했다"

이해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제 곧 영광 3.4호기를 발주할텐데

 그것도 같은 방식으로 할 거냐" 고 질문했다.

 

나는 그에 대해

"핵연료 관계는

 내가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이므로 내 책임하에서 했지만

 원자력발전소는

 전적으로 한국전력 사장의 권한" 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이번에 핵연료주식회사가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거대한 프로젝트 역시

 똑같은 방식을 적용할 것으로 본다" 고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앞으로 미국도 한국의 원자력 기술자립에 협력해야 한다"

"그것이 두 나라 모두에 유익할 것" 이라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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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서슬 퍼런 미국

 

그러나 미국측의 반발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미국의 세 회사 모두 경쟁에서 탈락하자

미국측은 심하게 반발했다.

 

1985 8월 하순 앨런 세섬 미 국무부 핵() 감시국장이

한국에너지연구소(한국원자력연구소 전신)

급히 나를 만나러 온 것이다.

6명의 핵전문가까지 대동했다.

 

전직 주한미대사가 나를 찾아와 항의한지

불과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한마디로 이들은 서슬이 시퍼랬다.

마치 범죄수사를 하러 온 조사관 같았다.

 

왜 세계 최고의 원자력 기술을 보유한 미국 회사들을 떨어뜨리고

굳이 독일의 카베유사를 기술도입선으로 선정했는지

그 이유를 캐물으러 온 게 분명했다.

 

특히 세섬 국장은

예전부터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 개발을 견제한 장본인으로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비록 흑인이지만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대에서 핵물리학 교수를 지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그는 우리와 캐나다의 합작 사업을 무산시킨 적도 있고,

  내가 에너지연구소장이 된다고 예측하기도 했는데

  그의 말대로 나는 에너지연구소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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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의심스러운 눈총

 

그는 나를 보자마자

"에너지연구소가 도대체 무엇을 하길래

 미국의 일류대학 출신 박사들이 그렇게 많으냐" 며 따졌다.

 

그의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나는 가급적 맞대응을 자제했다.

 

대신 우스개 소리로

"인간의 3대 기본 욕구중 첫번째가 무엇인지 아느냐" 고 물어보았다.

 

내가 슬쩍 예봉을 피하며 엉뚱한 질문을 하자

그는 어깨를 치켜들며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순간적으로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프리덤(자유) " 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즉시 "당신은 대학교수 출신이지만 낙제" 라고 말했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그러면 뭐냐?" 고 되물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하고 싶은 말을 쏟아 놓았다.

 

"인간의 첫번째 기본 욕구는 먹고 사는 거야.

 의식주란 말이야.

 이 문제가 먼저 해결되야 그다음 자유에 대해 논할 수가 있어.

 

 그런데 에너지는 의식주에 절대적으로 중요해.

 예컨대 밥을 지어 먹으려면 불이 있어야 해.

 또 전기가 없으면 생활하기가 너무 불편해.

 이처럼 의식주와 에너지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가 없어."

 

내가 기탄없이 소신을 얘기하자

세섬 국장도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나라는 에너지 자원이 하나도 없는 나라야.

 석유 한 방울 안 나와.

 석탄도 저질탄 밖에 못 써.

 

 이런 상황이니

 우리로서는 어떻게든 에너지 자원을 확보해야 해.

 에너지는 우리의 생존권과 관계된 거야.

 

 생존권이 걸려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것은 당연하지."

 

세섬 국장은 내 설명을 듣더니 이해가 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미국 회사들을 모두 떨어뜨린 것은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

내가 알아듣게 설명했음에도 여전히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그를 비롯한 미국의 핵전문가들은

에너지연구소와 핵연료주식회사 시설들을 샅샅이 둘러보면서

"뭐 하는 데 쓰는 거냐" 며 꼬치꼬치 캐 물었다.

기술도입선을 독일로 결정한 데 대한 일종의 보복이었다.

 

당시 나는

에너지연구소장과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그같은 그들의 행동은 나에 대한 경고이자 시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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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미운정 고운정

 

그들은 3일간 감사 아닌 감사를 했다.

나는 세섬 국장에게

"당신이나 나나 물리학자인데

 같은 학문을 한 사람으로서

 우리 학자로 돌아가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그와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나는 왜 우리가 원자력을 통해 에너지 자립을 이룩하려는지

우리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얘기했다.

변화의 낌새가 보였다.

 

그는 나와 토론을 벌이면서

왜 한국이 원자력을 통해 에너지 자립을 이룩하려고 애쓰는지

충분히 이해한 것 같았다.

 

 시설들을 샅샅이 둘러보며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일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3일간 그와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틈 날 때마다 우리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게 주효했다.

 

그는 모든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나에게

"미 국무부가 한국을 잘 몰라 오해하고 있는 게 너무 많다"

"미국에 가서 당신이 추구하고 있는 원자력 기술자립이

 정말로 평화적 목적을 위한 정책임을 그대로 전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그동안 우리가 추진했던 원자력 기술개발이

미국의 오해로 번번이 좌절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기에

그의 말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정말 고맙다" 고 얘기했다.

그는 나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미국인은 한국인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왜 그렇게 모를까…"

라며 혼자 되뇌이더니

"내가 돌아가서 미국인들의 생각을 바꿔 놓겠다" 고 자신했다.

 

실제로 그는 미국에 돌아가자마자

한국에 대한 원자력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등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그뿐 아니라

미국의 대표적 원자력연구소 가운데 하나인 샌디아연구소로 하여금

곧바로 나를 초청토록 해

주요 시설들을 모두 견학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솔직히 나는 1985년 가을

샌디아연구소로부터 초청장을 받았을 때 깜짝 놀랐다.

 

그곳은 수소폭탄 제조와 핵무기 실험 등을 전담하는 연구소이므로

좀처럼 방문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그곳에 갔더니 핵무기 담당 부소장이 나를 안내하며

"당신이 한국인으로서는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 이라고 했다.

 

나도 얼떨결에 그곳을 방문했는지라

"왜 나를 초청했느냐" 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국무부의 지시" 라고 대답했다.

 

순간 세섬 국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지난번 한국방문을 계기로 완전히 태도가 달라져

 만날 때마다 나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또 국무부 내에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 옹호하는 대변자 역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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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국익을 위한 배려

 

이 기회를 빌어 밝혀야 할 게 또 한가지 있다.

 

 내가 40명의 과학기술자들로 구성된 평가단에게 전권을 부여해

 경수로(輕水爐) 핵연료사업의 기술도입선을 결정하도록

 단안을 내리는 데 큰 힘을 실어준 사람이

 바로 김성진(金聖鎭) 당시 과기처 장관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기술도입선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하루는 조경목 과기처차관이 나를 불러서

 

"아무래도 韓소장이 기술도입선을 혼자 결정하면

 나중에 뒤탈이 날 우려가 있다"

"과기처장.차관, 동자부장.차관, 대통령경제수석, 경제기획원차관,

 한전 사장 등을 한 자리에 모아

 이들이 결정하도록 하라" 고 충고했다.

 

듣고보니 그럴듯해 나는 먼저 金장관을 찾아가

"趙차관이 이런 얘길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고 의견을 구했다.

그러자 金장관은 갑자기 안색을 바꾸더니

 

 "어느 나라 회사를 기술도입선으로 선정하든

  나는 일체 관계하지 않겠다"

 

 "아무 소리 하지 말고

  韓소장이 소신껏 결정하고 혼자 책임지라"

 단호하게 얘기했다.

 

 그러더니

 "다시는 이 문제로 나를 찾아오지 말라" 고 주의를 주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 차렸다.

이눈치 저눈치 보지 말고

국가이익에 가장 도움이 되는 쪽으로 알아서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나중에 보니 그의 판단은 정말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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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어려움을 극복하고

 

경수로(輕水爐) 핵연료 국산화사업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1985 8월말

독일 카베유사() 와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하고난 뒤부터였다.

 

계약 직후 우리 과학기술진 30여명은

카베유사 기술진과 함께 공동설계를 하기 위해

독일 에어랑겐으로 떠났다.

 

 최소한 70여명의 핵연료 설계인력이 필요했지만

 당시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은 고작 이 정도 밖에 안 됐다.

 하지만 소수 정예답게 우리팀의 실력은 쟁쟁했다.

 대부분 미국 유명 대학의 박사출신들이었던 것이다.

 

우리팀은 먼저

카베유사 기술진으로부터 핵연료 설계기술을 배우는 데 몰두했다.

 

 당시 우리팀 가운데 불과 3~4명을 제외하고는

 핵연료를 설계한 경험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설계를 배우면서, 동시에 설계를 해 나가는

 공동설계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배우면서 일한다' 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우리 과학기술자들이

 난생 처음 핵연료 설계를 해보는지라

 작업 초기에 겪어야 했던 어려움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언어와 관습의 장벽이었다.

우리 인력은 거의 다 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영어는 그런대로 잘 했지만 독일어는 매우 서툴렀다.

 

 설사 쌍방이 영어로 얘기한다 하더라도

 의사소통이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전문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원자력 분야인지라

 그런 불편함은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관습의 차이도 또 다른 장애물이었다.

 

 카베유사 기술진은 오후 5시만 되면 '칼 같이' 퇴근했다.

 그러나 우리 과학기술진은

 낮에 이들로부터 배운 핵연료 설계기술을

 밤 늦게까지 복습하고

 이를 토대로 실제 설계를 해야 했기 때문에

 퇴근 시간이 매일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밤중 퇴근도 다반사였다.

 

 그런데 당시 카베유사는

 오후 8시부터는 출입문을 전자장치로 아예 통제했다.

 출입문을 통해 나가려면 출입증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정을 잘 몰라

 출입문이 열리지 않으면 무조건 담장을 뛰어넘곤 했다.

 나중에 회사 경비에게 들켜 번번이 주의를 받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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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일취월장

 

어쨌든 우리 과학기술자들이 피나는 노력 끝에

단기간내 핵연료 설계기술을 거의 완벽하게 익히자

독일 기술진들은 깜짝 놀랐다.

 

 이들은 당시 우리측 책임자인

 김시환 에너지연구소 경수로핵연료사업부장에게

 "우리가 오히려 한국 과학자들에게 한 수 배워야겠다"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실제로 이들은 金박사에게

 "핵연료 설계기술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조언해 달라" 고 부탁했다.

 

 그런가 하면

 "핵연료 설계와 관련된 컴퓨터 코드(code, 프로그램)를 보완하려 하니

  한국 과학기술자들의 체재기간을 연장해 달라"

 자진해서 독일 정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팀은

핵연료 설계 이론만큼은 독일 기술진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이론 논쟁만 붙으면 그들은 우리에게 꼼짝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쪽은 모두 이론에 강한 박사들인데 비해,

 그들은 실무에 능한 기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팀이 설계경험까지 익히니

 당해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원래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사업은

1987년 말에 끝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 사업을 맡은 후

이번 기회에 경수로 핵연료 생산기술을

완전히 우리 것으로 만드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는 바람에

사업기간이 2년 더 연장됐다.

 

이 계획은 차질없이 진행되어,

1989년 말 최초로 국산 경수로 핵연료를 생산한 데 이어

이듬해 2월에는 원자로에 첫 장전하는 쾌거를 이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