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제10부 한국형 원자로 개발(2)

기른장 2010. 2. 3. 18:34

09. 다시 찾아온 기회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전력그룹협력회의가 열릴 때마다

'계통설계를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가 맡는 게 과연 타당한가'

에 대한 이견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가장 논란이 됐던 점은

원자로 계통(系統) 설계와 원자로 본체 설계를 분리,

따로따로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 과학기술진은

이 두 설계를 분리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워낙 경험이 부족한 탓이었다.

 

 외국의 원자력회사들이

 원전(原電) 의 핵심 기술인 계통설계 기술을 전수해 주지 않아서

 우리 손으로 직접 계통설계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4 9월 전력그룹협력에서

이미 계통설계와 원자로 본체 설계를 분리하기로 결정해 놓고서도

그 이후 1985년 봄까지 이 문제로 거듭 논란을 벌였다.

 

이 와중에 몇몇 외국 원자력회사에 자문을 구해 보니

원자로 계통설계와 원자로 본체 설계를 분리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아예 불가능했다.

 

선진국에서는 그런 전례가 없었다.

결국 계통설계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었다.

 

그렇게 되니까 상황이 달라지게 됐다.

회의 때마다

기술자립과 연구인력 문제가 주요 쟁점이 됐기 때문이다.

 

 이들 문제 만큼은

 우리 에너지연구소(한국원자력연구소 전신) 가 단연 유리했다.

 

 3백여명의 고급 두뇌들이

 중수로.경수로 핵연료 국산화사업을 하면서

 원자로 계통설계와 유사한 기술들을 한창 연구중이었기 때문이다.

 회의가 거듭될수록 우리 연구소의 장점들이 점점 더 부각됐다.

 

마침내 1985 625일 제4차 전력그룹협력회의에서

에너지연구소가 원자로 계통설계를 맡기로 최종 결론이 났다.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가 실행키로 결정됐던 것이

 막판 뒤집어진 것이었다.

 

 순간 나는 너무 감격스러웠다.

 얼마나 가슴이 '' 했던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고였다.

 

 거의 1년 가까이 이 문제에 매달려 지리한 공방을 벌였는데

 이제 그것을 톡톡히 보상받은 셈이었다.

 

 회의 때마다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합리적인 논리를 펼친 것이

 상당히 주효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1985 729일 제214차 원자력위원회는

전력그룹협력회의의 결정사항을 최종 승인했다.

 

 원자로 계통설계를 둘러싼 모든 논란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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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과학자의 역할

 

항간에서는

'연구소가 고상한 연구나 할 것이지

 어쩌자고 장사꾼들이나 하는 사업에 뛰어 들었느냐'

는 비판의 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평소

한국의 과학자는 연구를 위한 연구보다는

국가에 기여하는 실용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비판에는 일체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원자로 계통설계를 맡게 되자

나는 내심 몹시 긴장했다.

아무래도 처음 해보는 사업이라 여간 조심스러운게 아니었다.

 

사업 규모도 적지 않았다.

8년간 약 1천억원이 소요될 예정이었으니

당시로서는 꽤 큰 사업이었다.

연구소가 생긴 이래 단일 사업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무엇보다 나는

이번 기회에

원자로 계통설계 기술을 완전히 우리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계통설계 기술을 익혀야

한국형 경수로를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원자로 계통설계 역시

지난번 경수로 핵연료 설계 때와 마찬가지로

외국의 원자력회사와 '공동설계' 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공동설계란 한마디로

설계 기술을 배우면서 동시에 실제 설계를 해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할 경우 훈련비를 일체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시간과 인력을 엄청나게 절약하는 효과가 있다.

 

또 우리가 직접 계통설계에 참여하므로

영광(靈光) 3.4호기 원자로를 한국형이라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나는 이참에 아예 한국형 경수로 모델을 정해

그 모델에 대해서는 우리가 모든 권한을 행사할 생각이었다.

 

기술 제공자의 동의없이

한국형 경수로를 생산.판매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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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한국형 경수로 첫 발

 

1985 10

우리 에너지연구소(한국원자력연구소 전신)

영광(靈光) 3.4호기 원자로 계통설계 프로젝트에 관한 입찰 안내서를

외국의 원자력회사들에게 발송했다.

 

그 결과

1986 3월 말

3개국 4개 회사가 입찰에 응했다.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등 두 개 회사와

 프랑스의 프라마토므사(),

 그리고 캐나다 원자력공사가 바로 그들이었다.

 

우리의 까다로운 입찰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쟁쟁한 외국 회사들이 입찰에 응한 것은

당시 국제 원자력시장이 워낙 불황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원자력시장은 완전 침체기였다.

 수요는 적고 공급은 넘쳐

 수요자가 원하는 대로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한국형 경수로를 개발하려는 우리나라로서는

 다시 없는 좋은 기회였다.

 

'원자력의 원조' 라 불리는 웨스팅하우스사()

입찰 회사 가운데 가장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엇보다 누가 심사해 최종 결정을 내릴 것인지 궁금해했다.

 

 우리 관계자가

 "지난번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사업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과학기술자들이 심사해 결정을 내린다" 고 알려주자

 웨스팅하우스사측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경수로 핵연료사업 입찰 경쟁에서 고배를 마신 악몽이

 재현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모양이었다.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해 엄밀한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 과학기술자들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서

 입찰을 둘러싼 국내외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이 방법 밖에 없었다.

 

 게다가 심사과정에서

 우리가 원하는 기술자료들을

 외국 회사들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한국전력도 이 방법에 선뜻 동의했다.

사실 영광 3.4호기 원자로 계통설계는 우리 에너지연구소가 담당했지만

원전(原電) 건설사업은 한전이 총괄 지휘했다.

 

 하지만 한전은 심사결정권을 아예 우리 연구소에 넘겨주었다.

 그만큼 우리 과학기술자들을 신뢰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나는 그런 한전이 너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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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과학자 평가단

 

40여명의 과학기술자들로 구성된 평가단은

4개 외국 회사들이 제출한 입찰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평가단이 가장 중시한 대목은

 기술의 우수성, 경제성, 기술전수 조건 등 세가지였다.

 

 평가단은 6개월간 기술자료와 씨름하며 평가작업에 몰두했다.

 밤샘작업도 밥먹듯했다.

 

마침내 1986 9월말

평가단은 미국의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를 기술도입선으로 선정했다.

 

 기술도 뛰어났거니와

 다른 회사들보다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는

 미 애리조나주에 있는 팔로버디 발전소의

 13백 메가와트(MWe) 급 경수로를 참고 모델로 제시했다.

 당시로서는 가장 최신형 경수로였다.

 

 우리는 국내 전력 수요에 맞게

 한국형 경수로는 1천 메가와트급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또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는

 앞으로 이 모델을 우리가 마음대로 개량.생산.판매하는 데 동의했다.

 완전히 한국형 경수로로 인정하겠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우리와 공동설계를 하면서 핵심 기술을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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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독립을 위하여

 

나는 1987 4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와 정식 계약을 체결한 직후

이 사업 책임자로 김병구 박사를 임명했다.

 

 그 무렵 金박사는 영광 3.4호기 사업부장이었다.

 나는 그에게 예산권과 인사권을 통째로 넘겨주었다.

 그가 소신껏 사업을 추진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보다 앞서 1986 1214

공동설계팀 1 44명이 그들의 가족과 함께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가 있는

미 코네티컷주 윈저시() 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나는 출발 직전 이들을 위해 환송연을 베풀었다.

나는 그 환송연 자리에서

"한국형 경수로 탄생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으니

 실패하면 아예 돌아올 생각을 말라" 고 당부했다.

 

하나같이 비장한 표정이었다.

내 목소리도 자연히 떨렸다.

나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나라를 빼앗기면 식민지가 되듯이

 우리가 원자력 기술 자립을 하지 못하면

 밤낮 외국 기술에 의존하는 '기술 식민지' 가 된다.

 우리가 '기술 독립국' 이 되기 위해서는

 기필코 이번에 원자로 계통설계 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

 

나는 연설 말미에

원자로 계통설계 사업책임자인 김병구 박사를 일으켜 세운뒤

그와 함께 '() 설계기술 자립' 이라고 쓴 액자를 들었다.

 

그리고 나서 연구원들에게

"기술 독립을 하겠다는 정신으로

 '만세 삼창' 을 힘차게 외치자" 고 제안했다.

 

연구원들은 순간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먼저 '만세' 하고 외치자

모두 따라서 힘차게 '만세' 를 불렀다.

두번째는 소리가 더욱 우렁찼다.

그리고 '삼창' 때는

정말 가슴이 '' 한듯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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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우리의 저력

 

이렇게 해서 1986 1214

공동설계팀 1 44명은 가족과 함께 윈저로 떠났다.

인솔 책임은 이병령 박사가 맡았다.

 

李박사와 우리 과학기술진은

밤낮 없이 계통설계 기술을 익히는 데 몰두했다.

잠자는 시간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뜻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가 당초 약속을 어기고

우리 과학기술자들에게

핵심 업무 대신 허드렛 일만 맡기는 것이었다.

 

李박사가 거듭 항의를 했지만 번번히 시정되지 않았다.

결국 李박사는 철수를 결심하고

이를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에 통보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는 결국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핵심기술 전수는 물론

우리 과학기술자들이 중요 업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나중에 우리 팀이 기대 이상으로 성과를 내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1988년 윈저에 파견된 과학기술진은 1백명 가까이 늘어났다.

연구소가 생긴 이래 최대 규모의 인력이 해외에 파견된 것이었다.

이들의 피눈물나는 노력끝에 원자로 계통설계는 3년만에 완성되었다.

한국형 경수로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발전소의 각종 설비들이 잇따라 완성됨에 따라

영광(靈光) 3.4호기는 1995년부터 정상 가동되기 시작했다.

 

1997년에는 국내 원전(原電) 중 최우수 발전소로 선정돼

국제 원자력학회로부터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꼭 50년만에

'원자력 독립' 을 이룩한 것이다.

 

 

 

이야기를 마치며

 

연재를 마치며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한국은 자원이 없는 나라다.

석유 등 각종 자원들을 전량 수입하고 있다.

이같은 현실을 타개하는 길은 우수한 두뇌를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한국의 과학자들이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한다.

 

'자원 의존형' 이 아닌

'두뇌 의존형' 국가를 만드는 과학기술 정책을

하루빨리 수립해야 한다.

 

또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에너지 위기에도 신속히 대비해야 한다.

21세기는 준비된 자, 힘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으며

에너지 자립이 돼야 진정한 의미의 국가자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에게 간곡히 당부하고 싶은 말은

부디 원자력분야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유능한 우리 과학기술자들을 결집시킬 만한

국가 주도의 대형 과제를 창출해 달라는 것이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나의 구술(口述) 을 깔끔하게 정리해준

통일문화연구소 이동현(李東炫.정치학 박사) 전문기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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