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한전 부사장
당시 한전 부사장은
핵연료주식회사 초대 사장을 지낸 김선창 씨였다.
그는 1982년 11월
한전 부사장으로서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에 취임,
약 7개월간 재직했었다.
그의 뒤를 이어
내가 핵연료주식회사 2대 사장에 취임한 것이었다.
나는 朴사장 방에서 나와 金부사장을 만나러 갔다.
그러나 대기실에는 그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족히 10명은 됐다.
나는 비서에게 명함을 건네고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떠나고 나 혼자뿐이었다.
마침내 내 순서가 돼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金부사장은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용건도 물어보지 않고
"그거 말도 안되는 얘기" 라고 쏘아 부쳤다.
나는 잠시 당황했다.
나는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계획안에 대해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도
그는 마치 계획안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게 아닌가.
순간 梁과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불과 두 시간 전
내가 만든 계획안에 대해
'반대한다' 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었다.
틀림없이 내가 朴사장께 계획안을 보고하는 사이
梁과장은 그 내용을 金부사장께 자세히 전달한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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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작전상 후퇴
김선창 한국전력 부사장은
내가 새로 구상한 경수로(輕水爐) 핵연료 국산화 계획안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외국 자본이 50%는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야 기술이 뛰어난 외국의 원자력 기관이
자기 제품을 만든다는 생각을 갖고
품질이 우수한 핵연료를 만들어요.
그렇지 않으면 품질 보장이 안돼요.
만약 우리가 만든 핵연료가 발전소에서 사고라도 일으키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 "
金부사장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얼굴도 약간 상기돼 있는 걸로 봐서 흥분해 있는 게 틀림 없었다.
아무래도 전임자인 자기가 세워놓은 방침을
후임자인 내가 완전히 바꾼 게 몹시 언짢은 모양이었다.
그는 핵연료주식회사를 만든 장본인이자
초대 사장으로 7개월간 재직하다
그 자리를 내게 물려줬던 것이다.
그는 계속 내 계획안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더욱이 핵연료 설계는 외국에 맡겨야 합니다.
핵연료 설계가 얼마나 어려운데 우리 과학기술자들이 맡습니까.
또 한국에 어느 기술을 들여올지도
외국의 원자력기관이 평가해야 합니다.
이걸 우리가 하게 되면 비리가 발생할 소지가 커요."
그는 내가 추진하려는 원자력 기술 자립정책을 영 못미더워 했다.
나는 설계.평가.자본 등을
모두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그는 설계.평가 등은 외국에 맡기고
자본은 50% 외자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의 주장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럴 경우 기술자립은 요원하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金부사장의 태도가 하도 완강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먹혀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나중에 그를 만나 설득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해
나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나도 기분이 몹시 상했다.
내 얘기는 한마디도 들어보지 않은채
내가 만든 계획안을 대충 훑어 본 부하 직원의 말만 듣고
일방적으로 계획안을 반박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나는 곧바로 핵연료주식회사로 돌아와
양창국 한전 원자력담당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에게 따끔한 주의를 주었다.
"자네는 내가 만든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계획안을
5분 정도 보고나서 '반대한다' 고 그랬어.
자네 부사장은 아예 계획안을 보지도 않고 반대해.
머리가 얼마나 좋으면 보지도 않고 반대를 해?
도대체 어떻게 기술 자립을 하려고 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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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를 믿으세요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
그 길로 박정기 한전 사장을 다시 만나러 갔다.
불과 1시간반 전에 그를 만났지만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을 알려줘야만 할 것 같았다.
朴사장은 나를 보더니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한전내에 원자력 기술자립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어
도저히 기술자립은 안되겠습니다"
내 표정이 단호했던지 朴사장은
"절 좀 믿어주십시오" 하며 나에게 사정을 했다.
나는 그순간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 있다.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의 주관자는 전두환 대통령이구나'
1983년 4월 全대통령이 대덕(大德) 공학센터를 방문했을 때,
내가 중수로(重水爐) 핵연료 시제품을 독자 개발한 사실을 보고하자
그는 경수로 핵연료도 우리 기술로 개발하라고
강력히 지시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全대통령은 우리 연구소를 방문한 직후 한전 朴사장에게
"韓박사 그 사람, 기술자립 정신이 대단해.
일 한번 맡기면 잘 해 낼 것 같다" 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정기 한국전력 사장은
"저를 좀 믿어달라" 며
"韓박사님께서 경수로(輕水爐) 핵연료 국산화 사업을 추진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 고 거듭 다짐했다.
나는 그가 하도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하길래
'일단 이 분을 믿어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는 내 표정이 다소 밝아지자
"며칠후 이사회를 소집할테니
다른 사람을 보내지 말고
韓박사님께서 직접 나오셔서
이사들에게 사업 설명을 해 달라" 고 요구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노라" 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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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총대 맨 한전사장
며칠후 한전 이사회가 열렸다.
1983년 7월 중순이었다.
대략 7~8명의 이사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선창 한전 부사장이 보이지 않았다.
金부사장은 내 계획안에 분명히 반대한 인물이었다.
나는 계획안을 만들 때
이번 기회에 경수로 핵연료 생산기술을 완전히 익혀
기술자립을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金부사장은
기술자립은 우리나라 여건상 시기상조라고 판단해
핵심 기술인 핵연료 설계와 기술도입에 대한 평가 등은
전적으로 외국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인간적으로는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지만
이처럼 핵연료 생산문제에 관해서만은 나와 의견을 달리했다.
어쨌든 그가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朴사장은 이사회가 시작되자마자
"오늘은 특별히 韓박사님께서 참석하셔서 그런지
회의장 분위기가 밝다" 며
"회의도 순조롭게 풀릴 것 같다" 고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사들은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계획안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이들이 가장 문제를 삼은 것은 핵연료 설계 인력이었다.
내가
"핵연료 설계 기술을 자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백50명의 설계 인력이 필요하다" 고 말하자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설계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데 너무 무모하지 않느냐" 며
이의를 제기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경수로 핵연료를 설계할 수 있는 인력은
고작 3~4명 밖에 안됐다.
그러니 이들이 그같은 우려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또 이들은 '원자력의 원조' 라고 불리우는 미 웨스팅하우스社가
'경수로 핵연료를 설계하는 데 40명의 인력이면 충분하다'
고 자문한 것을 내세워
나를 공격했다.
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미 웨스팅하우스사는
1천명 이상의 핵연료 설계 인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우리더러는 40명이면 충분하다고 얘기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얘기입니다.
이는 우리를 기술적으로 영원히 예속시키려는 속셈입니다.
우리보다 기술이 앞선 선진국들이
왜 수백명씩 설계 인력을 보유하고 있겠습니까. "
그러나 이사들은 내 말에 선뜻 공감하지 않는 눈치였다.
우리 손으로 그 어려운 핵연료를 설계한다는 게
아무래도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실제로 핵연료 설계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했다.
당시 핵연료 설계를 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소련.프랑스.독일 등 10개국도 채 안됐다.
이사들이 그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朴사장이 나섰다.
나를 변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사들에게
"韓박사께서 경수로 핵연료를 국산화하겠다는데
그렇게 비판만 하지 말고 한번 적극 도와주자" 고 설득한 후
"반대하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 모두 박수를 치자" 며
먼저 힘차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이사들도 마지 못해 따라서 박수를 쳤다.
나는 그가 고마웠다.
朴사장은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에 강한 집착을 갖고 있던
전두환 대통령의 심중을 읽고
'총대' 를 맨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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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우리의 현실
내가 한국전력 이사회에 제출한
경수로(輕水爐) 핵연료 국산화 계획안이
막상 이사회에서 통과되자
나는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내가 새로 계획안을 작성하기 전
이미 한전은 1987년 말까지 이 사업을 끝내기로
사업기간을 정해놓은 상태였다.
그러니 시간이 촉박했다.
불과 4년 5개월 안에 사업을 완료해야 했다.
나는 83년 7월초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에 임명돼
중간에 이 사업을 떠맡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사업기간을 변경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 과학기술자들이
경수로 핵연료 설계기술을 익히는 데만 무려 3년이 걸렸다.
더욱이 그 무렵 우리 과학기술자 중에서
경수로 핵연료를 설계할 수 있는 인력은
국내외를 망라해 고작 3~4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경수로 핵연료를 국산화하려면
무려 1백50명 가량의 핵연료 설계 인력이 필요했다.
또 이들을 일정기간 훈련시켜야 했으므로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이들에 대한 훈련비도 자그마치 1백50억원이나 있어야 했다.
1인당 훈련비가 약 1억원 정도 드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훈련비는 전혀 없었고
핵연료 설계비도 제대로 책정돼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시간.인력.예산 등
모든 것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하도 답답해
이틀간 아예 출근도 하지 않은 채
집에 틀어박혀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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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일하면서 배우자
무리수를 두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적은 인원이지만
해외에서 활약하는 우리 과학기술자들을 국내로 불러들여
이들이 중심이 되어
외국의 원자력 회사와 '공동설계' 를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구상한 공동설계란 대략 이런 것이었다.
핵연료 설계는
우리와 손잡을 외국 회사와 우리 과학기술진이
각각 반반씩 수행한다.
단, 책임은 우리한테 설계기술을 제공해 줄 외국 회사가 진다.
또 설계훈련은 설계과정에서 받기로 하고
별도의 훈련기간 없이 곧바로 설계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공동설계이기 때문에
훈련비는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것 등이다.
한마디로 '일하면서 배우자' 는 것이었다.
외국의 원자력 전문가들이 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억지 논리였다.
그래도 나로서는 이 방법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공동설계 개념을 도입할 경우
일단 핵연료 설계기술을 익히는 데 소요되는
3년간의 훈련기간이 필요 없게 되고
설계 훈련비도 일체 지불하지 않아도 돼
시간과 경비를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었다.
또 설계 인력을 반으로 줄일 수 있어
인력부담을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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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인력 총동원
당시 나는
대덕공학센터장과 핵연료주식회사 사장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에
두 군데의 인력을 모두 동원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임창생 대덕(大德) 공학센터 핵연료개발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林박사는
우리나라에서 경수로 핵연료 설계분야의 최고 전문가였고
나는 그에게 경수로 핵연료 설계책임을 맡길 생각이었다.
나는 林박사에게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사업은 공동설계로 가야겠다" 고 말했다.
林박사는 의아스러운듯
"그게 무슨 말씀이냐" 고 물었다.
전문가인 그로서도 처음 들어보는 용어인지라
얼른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먼저 공동설계의 개념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이 개념을 확실히 알아야
앞으로 차질없이 사업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경수로 핵연료 설계는
외국의 원자력회사와 우리 과학기술진이
각각 반반씩 수행하는 거야.
설계 훈련도 별도로 받지 말고
설계 과정에서 외국 기술자들에게 배우면 돼.
그러면 훈련비를 줄 필요가 없고
3년간의 훈련기간도 필요없게 되지.
한마디로 일하면서 배우자는 걸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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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어쩔수 없는 선택
林박사는 지금까지 전혀 관례가 없었던지라 미심쩍어 했다.
나는 그에게 경수로 핵연료 설계 책임을 맡길 생각이었으므로
다시 한번 공동설계의 불가피성을 얘기했다.
"林박사,
현재의 어려운 여건을 다 만족시키는 방법은 공동설계 밖에 없어.
외국에서 원자력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은 과학기술자들을
다 끌어 모으자고.
비록 얼마 되지 않겠지만
이들이 중심이 돼 외국과 곧바로 공동설계에 들어가는 거야.
예산도 없는데 어쩔 수 없잖아. "
솔직히 말해 당시 우리 과학기술자들 중에서
경수로 핵연료 설계 경험이 있는 인력은
국내외를 망라해 3~4명 밖에 안됐다.
공동설계를 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70여명의 설계 인력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이니
결국 설계 기술을 익히면서
동시에 설계를 해 나가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마치 전쟁중 갓 입대한 신병이
곧바로 전쟁터에 투입돼 전투하는 법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시간.인력.예산이 모두 턱없이 부족한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林박사에게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사업에 참여할만한 외국의 원자력회사들에게
이번 사업은 공동설계로 하겠다는 사실을 통보해 주라" 고 지시했다.
나는 林박사와 전화통화를 마치자마자
미국에 있는 김시환.박종균 박사에게 연락했다.
두 사람은 모두
미 랜실레어 폴리테크닉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의 원자력회사인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社) 에서
경수로 핵연료를 설계하고 있었다.
현장 경험이 풍부해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사업에 꼭 필요한 인재들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한국에 와 달라" 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두 사람은 "빠른 시간내에 한국에 돌아가겠다" 고 약속했다.
실제로 金박사는
이듬해인 1984년 7월 귀국해 이 사업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또 미국에서 원자력 분야로 박사학위를 갓 받은
20여명의 젊은 두뇌들을 유치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朴박사도
이 사업이 한창 진행중인 1987년 11월 귀국해 큰 도움을 주었다.
모두 핵연료 국산화사업을 위해
좋은 여건을 마다하고 귀국한 '숨은 애국자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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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울며 겨자 먹기
한편 이 사업에 참여하려는 외국 회사들은 한결같이
"도대체 공동설계가 뭐냐" 고 문의를 해 왔다.
"이같은 용어는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며
"자세히 설명해 달라" 고 요구했다.
당시 우리가 입찰(入札) 안내서를 보낼 때
공동설계를 'joint design' 으로 표현했었다.
내가 새로 만들어낸 용어이므로
이들로서는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관계자들은 이들에게 공동설계 개념에 대해
전화나 팩스 등으로 자세히 설명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며
"직접 한국에 가서 들어야겠다" 고
하나 둘씩 핵연료주식회사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우리 관계자들이
"설계 기술은 설계과정에서 배우고
곧바로 너희 책임하에 공동으로 설계에 착수하되
설계 훈련비는 줄 수 없다" 고 하자
이들 회사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4년 당시 국제 원자력시장은
한국처럼 원자력 기술자립을 추구하는 나라에게는
상당히 유리한 상황이었다.
소위 선진 원자력 기술을 보유한 나라들이
기술을 팔 데가 없어
치열한 판로(販路)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여건이니
미국.프랑스 등 외국의 원자력 회사들은
우리가 제안한 공동설계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외국 회사들은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국제 원자력시장이 워낙 불황이라
'울며 겨자 먹기' 로 우리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나섰다.
1984년 12월
입찰(入札) 에 응한 회사는 3개국 5개 회사였다.
'원자력의 원조' 로 불리우는 웨스팅하우스 등 미국 회사 3개와
독일 지멘스 그룹의 카베유사(社),
프랑스의 프라쥐마사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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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평가 기준
나는 먼저
대덕(大德) 공학센터와 핵연료주식회사 소속의
40명의 과학기술자들로 평가단을 구성해
이들에게 협력회사를 최종 결정하도록 했다.
당시 나는 평가단에 세 가지 평가 기준을 제시했는데,
기술 이전,
기술 수준,
경제성 등에 대한 평가가 바로 그것이었다.
(기술이전)
이번 기회에
경수로 핵연료 생산기술을
완전히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기 때문에
기술 이전을 무척 중시했다.
(기술 수준)
또 기술 이전도 중요하지만
기술 수준이 떨어지면 문제라고 판단해
어떻게든 세계적인 수준의 기술을 확보하려 했다.
(경제성)
이와 함께 예산도 충분치 못했으므로
경제성도 냉정히 따져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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