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제4부 벌컨포 문제를 해결하라(1)

기른장 2010. 1. 29. 14:50

01. 산 넘어 산

 

1977 6월 초순 어느날,

김성진(金聖鎭.69) 국방과학연구소(ADD) 부소장이 급히 나를 찾았다.

 

늘상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방에 들렀다.

 

그는 육사 11기로

1960년대 초반

미국 일리노이대 대학원에서 함께 물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나와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나이도 나보다 두 살 많아 형제처럼 지냈다.

 

그러나 金부소장은 평소와 달리 왠지 얼굴이 굳어 있었다.

늘 웃는 낯으로 나를 대하곤 했는데

이날 따라 웃음기 마저 찾아볼 수 없었다.

뭔가 고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말 문을 열었다.

 

"韓박사, 탄약개발부장을 좀 맡지."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닌 밤 중에 홍두깨' 라더니

대체 이게 웬 뚱단지 같은 소리란 말인가.

 

지금 '레이저 거리측정기' 와 야시(夜視) 장비 등

각종 레이저 무기들을 개발하느나 눈코 뜰 새가 없는 판국에

느닷없이 엉뚱한 부서를 맡으라니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사정을 몰라 줘도 너무 몰라 주는 것 같아 은근히 화가 났다.

 

나는 단호하게 "못맡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金부소장도 내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듯

평소 그답지 않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자네가 꼭 맡아야 하네.

 지금 국가의 무기체계가 흔들리는 판에 모른체만 할 수 있나.

 자네가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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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무기체계가 흔들려

 

나는 '무기 체계가 흔들린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러자 그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1975년 상반기 국내에서 벌컨포() 20문을 개발,

 해군 쾌속정에 탑재(搭載), 배치했으나

 발사 도중 노리쇠가 파손되는 등 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국가 방위에 커다란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청와대와 국방부는 이 문제로 매우 고심하고 있었다.

벌컨포는 1970년대 우리나라 무기체계 중에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컨포는

  구경(口徑) 20

  유효 사거리 12~18m

  () 당 발사속도 5백회로

  1 6발씩 모두 3천발을 발사할 수 있는 등 방어 능력이 뛰어나서,

 

 음속(音速) 보다 약간 느린 속도로 저공 비행하는 전투기라도

 벌컨포의 유효 사거리내에 들어오면 격추가 가능해

 군 부대나 비행장, 해군 함정 등 중요 군사시설에는

 모두 벌컨포를 배치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벌컨포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결국 청와대와 국방부는 협의 끝에

ADD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金부소장을 불러서

'8천만원의 예산을 줄테니

 빠른 시간내에 문제점을 찾아내라' 고 지시한 것이다.

 

金부소장은 고심끝에 그 해결사로 나를 지목한 셈인데,

하지만 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벌컨포의 문제점을 찾아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독 만든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탄약개발부장을 맡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또 상부에서 그토록 신경을 쓰고 있는 점도 부담스러웠다.

나는 여기에서 엉거주춤하다가는

자칫 덤터기를 쓸 수 있다고 판단해서

계속 버티기로 마음 먹었다.

 

"부소장님,

 아시다시피 저는 이론물리를 전공하지 않았습니까.

 저에게는 레이저 분야가 적격입니다.

 포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게 없습니다.

 이번만은 제 입장을 좀 고려해 주십시오. "

 

그러나 金부소장은 전혀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문제만 해결해 놓고 다시 레이저쪽에 전념하면 되지 않나.

 어디서부터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자네에게 맡기는 걸세.

 명령이니 무조건 맡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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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조건이 있습니다

 

나는 '명령' 이란 말에 깜짝 놀랐다.

그는 직책상 내 직속상관이기는 했지만

단 둘이서 업무 얘기를 할 때는 아무런 스스럼이 없었다.

그런 표현을 쓴다는 것은 이미 결론을 내린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음을 직감했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한 가지 조건을 내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가지 조건이 있다" 고 말했다.

金부소장은 내가 조건부로 탄약개발부장을 맡겠다고 하자

반색을 하며 "무슨 조건이냐" 고 물었다.

 

부장직을 맡느냐 마느냐를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이다가

그 문제가 일단락되니까 분위기는 한층 부드러웠다.

나는 조건을 얘기했다.

 

"앞으로 6개월간

 벌컨포() 문제에 대해 상부에 중간보고를 하지 않겠습니다.

 중간보고를 하면

 이해 당사자들의 간섭 때문에 작업에 방해가 됩니다.

 그러니 상부에서도

 이 기간에는 일체 진행상황을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

 

여기서 '이해 당사자'

바로 국방부와 국산 벌컨탄을 만든 풍산금속,

탄약 공급회사인 미국의 '오린' 社 등을 말했다.

 

당시 풍산금속은

오린社로부터 벌컨탄 제조기술과 장비.재료 등 일체를 들여와

벌컨탄을 만들어 국방부에 납품했다.

 

만약 국산 벌컨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원인이

이 국산 벌컨탄에 있다면

오린社는 풍산금속에 40억원을 물어 줘야만 했다.

또 풍산금속은 그 돈을 우리 국방부에 배상해야 했다.

 

당시 40억원은 엄청나게 큰 액수였다.

그러니 이해 당사자들은

자연히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바로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金부소장은 내가 제시한 조건을 듣더니

흔쾌히 '그렇게 하겠노라' 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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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원점에서 다시 검토

 

1977 6월 초순,

나는 ADD 탄약개발부장에 임명됐다.

 

레이저 및 야시장비 개발실장만 4년간 하다가

갑자기 생소한 분야를 맡은 나로서는 몹시 부담스러웠다.

남들은 내 속도 모르고 승진을 축하해 주었지만

나는 그런 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국산 벌컨포의 문제점을 찾아내기 위해

서둘러 새로운 팀을 구성했다.

역할을 크게 둘로 나눴다.

 

벌컨포와 벌컨탄 중

어느쪽에 문제가 있는지를 정확히 찾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벌컨포쪽은

 홍판기(洪判基.66) ADD 총포 개발부장과

 황해웅(黃海雄.60) 육사 기계과 교수가 책임을 맡았다.

 

 洪부장은 문제의 국산 벌컨포 제작 책임자로서

 '벌컨포의 문제점을 기어이 찾아 내고야 말겠다' 며 자청했다.

 '결자해지' (結者解之) 차원에서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었다.

 포에 관한 한 우리나라 최고 권위자이기도 했다.

 

 또 黃교수는 육사 18기로

 미국 조지아공대와 매사추세츠대에서

 기계공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군 출신 과학자로

 벌컨포 문제 해결을 위해

 특별히 육사에서 ADD 책임연구원으로 스카웃된 인물이었다.

 

 사실 벌컨포는

 포 내부의 정밀도가 2/1000~3/1000㎜ 수준은 돼야 했는데

 당시 국내 기술수준은 1/100㎜의 정밀도를 겨우 달성한 상태였다.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社가

 기술료로 무려 1천만 달러를 요구했기 때문에

 위 두사람은 과감하게 독자 기술개발에 뛰어든 것이었다.

 

벌컨탄 쪽은

 ADD 탄약개발부 선임연구원인

 소광섭(蘇光燮.55.서울대 물리교육과 교수) 박사와

 한경동(在美 거주) 연구원 등이 책임을 맡았다.

 

 蘇박사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캔사스대와 브라운대에서

 물리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이론 물리학자였다.

 

 또 한씨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갓 졸업, ADD 기계과를 지원해

 당당히 수석을 차지했으며 분석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벌컨탄쪽은

 지금까지 국산 벌컨탄 제작에 관여했던 사람들을 모두 제외시켰다.

 

 일체의 선입견이 배제돼야만

 벌컨탄의 문제점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다는

 내 나름대로의 판단 때문이었다.

 

 나는 책임자들에게

 "철저히 원리에 입각해 객관적으로 접근하라" 고 거듭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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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벌컨포와 벌컨탄

 

작업에 본격 착수한 직후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맥클로이 상사(上士) 가 내 방에 찾아왔다.

 

말이 상사지

실제로는 미 정보기관의 상당한 실력자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과학 분야에 너무 박식해 전문가를 뺨칠 정도였다.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닥터 韓,

 벌컨탄은 더 이상 조사할 게 없어요.

 문제는 벌컨포예요.

 

 통일산업이나 대우정밀이

 얼마나 형편없는 벌컨포를 만들었는지 알아요?

 그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

 

풍산금속이 만든 벌컨탄은

미국 회사에서 제조기술, 장비, 재료 등을 제공받아 만든 것이어서,

장소만 한국에서 생산했지 실제는 미국제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맥클로이는

국산 벌컨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주 원인은

벌컨포의 성능이 나쁘기 때문이라며

국방과학연구소(ADD) 탄약개발부장인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나는 맥클로이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랬더니 이 친구는 거의 매일같이 내 방에 들러

"해답은 명확하다"

"공연히 시간 낭비하지 말라" 는 말을 되풀이하곤 했다.

 

또 그는 미 정보기관 요원이라는 소문처럼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날카롭게 살폈다.

 

나는 맥클로이가 뭐라든 개의치 않고

ADD 연구원들에게

국산 벌컨포와 벌컨탄 중

어느 쪽에 문제가 있는지를 철저히 조사토록 했다.

 

특히 벌컨탄의 경우

소광섭(蘇光燮.55) 박사의 책임아래

풍산금속에서 성능시험을 반복했다.

 

이와 함께

맹선재(孟琁在.68)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재료시험실장에게 의뢰해

벌컨탄의 뇌관재질에 문제가 없는지를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가 경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실험을 할 수 있도록

KIST 재료시험실에 5백만원을 맡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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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풀리지 않는 문제

 

본격 작업에 착수한지 일주일 후인 1977 6월 중순,

오원철(吳源哲.72) 대통령 경제2수석으로부터

청와대로 급히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서둘러 청와대로 들어갔다.

 

吳수석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韓박사는

 작업복으로 갈아 입고 풍속금속에 가서 아예 살라구.

 거기서 국산 시험탄을 자꾸 만들어 내는 거야.

 그걸 갖고 일선 부대에 가서 계속 성능실험을 하라구.

 성공할 때까지 말이야. "

 

사실 국산 벌컨포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실무책임은 내가 맡았지만

총괄 지휘는 吳수석이 했다.

방위산업의 총책임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吳수석의 지시대로

풍산금속에 야전용 침대를 갖다 놓고

밤샘을 해가며 현장을 독려했다.

 

당시 근본 문제는

국산 벌컨포에 국산 벌컨탄을 사용하면

() 의 노리쇠가 파손되는 등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현상을 '() 작용' 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국산 벌컨포에 미제 벌컨탄을 사용하거나,

미제 벌컨포에 국산 벌컨탄을 쓰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찾아 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마치 미궁(迷宮) 에 빠진 살인사건을 맡은 것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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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경제비서관의 죽음

 

나는 풍산금속으로 하여금

성능을 달리하는 여러 종류의 시험탄을 만들게 해서

그것을 일선부대로 가져가 실험을 하곤 했다.

 

그러던 1977 7월 하순 어느날,

여느 때와 달리 이석표(李奭杓.작고) 대통령 경제비서관이

포 실험 현장에 나와 있었다.

李비서관은 오원철 경제2수석 밑에서 방위산업을 담당했다.

 

그동안의 진행상황이 궁금해 모처럼 현장을 찾은 것이었으리라.

나는 이날 만큼은 포 실험이 제발 성공해 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윽고 포병들이

국산 벌컨포에 국산 벌컨탄을 장착한 후 '발사' 명령을 기다렸다.

잠시 후 포병장교가 발사명령을 내렸다.

정말이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포탄은 마치 내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중간에서 그만 '!' 하고 서 버리는 것이었다.

 

악작용이 발생하면

포 내부에서 회전하던 포탄이

중간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멈추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李비서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포() 에 바짝 붙어 몸을 꾸부린채,

포 중간에 걸려 있는 벌컨탄을 꺼내는

포병(砲兵)의 동작을 주의깊게 지켜봤다.

 

나는 발사 시험에 실패한 사실이 마음에 걸려

李비서관의 행동에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 하는 소리와 함께

'' 하는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포병이 벌컨탄을 꺼내려는 순간

과열(過熱) 된 벌컨탄이 순식간에 터지면서

탄약 파편이 몽땅 李비서관의 가슴에 박힌 것이었다.

 

그는 가슴을 부둥켜 안은채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붉은 피가 그의 양복을 흥건히 적셨다.

얼굴은 고통에 못이겨 완전히 일그러졌다.

 

벌컨포 시험장은 글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됐다.

군인들이 급히 李비서관을 짚차에 싣고 서울대학 병원으로 갔다.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났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만약 국산 벌컨포 시험이 성공했더라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실을 보고받고

"李비서관을 어떻게든 살려 내라"고 병원 관계자들에게 당부했다.

 

그는 수술을 받고 잠시 회복하는듯 하더니

입원한지 열흘만에 끝내 숨지고 말았다.

나는 자꾸만 그의 죽음이 내 탓으로 느껴져

한동안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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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풀리는 문제들

 

그러나 이 사건은

작업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됐다.

 

그의 사망후,

청와대, 국방부, 국방과학연구소(ADD) 는 완전히 혼연일체가 됐다.

내가 부장으로 있던 ADD 탄약개발부 연구원들도

국산 벌컨포의 문제점을 기어코 밝이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문제의 실마리가 풀린 것은

작업 착수 6개월만인 1977 12월 말이었다.

 

KIST의 맹선재(孟琁在.68.한양대 명예교수) 재료시험실장이

국산 벌컨탄의 뇌관(雷管) 재료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미국의 '오린社' 가 풍산금속에 제공한

 11센트 짜리 벌컨탄 뇌관 재료가 불량품임을 밝혀냈다.

 

 이에 반해 7센트 짜리 미국제 벌컨탄의 뇌관 재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점도 입증했다.

 

 미국제와 국산 벌컨탄의 뇌관 재료를

 꼼꼼히 비교, 실험해서 얻어낸 결론이었다.

 

또 국산 벌컨탄의 성능시험을 반복해온 소광섭 박사팀은

벌컨탄의 추진제(推進劑) 에 결함이 있음을 발견했다.

 

 추진제는 벌컨탄을 일정한 압력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하는데

 국산 벌컨탄에 쓰인 추진제는

 벌컨탄에 갑자기 센 압력을 주었다.

 따라서 발사 도중 탄약이 포 내부에 걸리게 하는 등

 발사 사고를 유발시킨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작업 초기만 하더라도 우리 연구진은

미제와 다름없는 국산 벌컨탄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벌컨포의 내부 정밀도가

미국제 벌컨포 보다 떨어지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면 벌컨포 쪽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추측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문제는 벌컨탄쪽에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만약 이 사실이 미국측에 알려질 경우

어떤 형태로든 압력이 들어올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