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생관으로 설명하자면 삶과 죽음은 그렇게 복잡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우리가 이승에서 살아 있는 것은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 있을 때를 말하고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을 죽는다고 말할 뿐이다. 영혼과 육체가 함께 있을 때를 사람이라고 하지 영혼이 분리된 육체는 시신에 다름 아니다.
좀더 과격하게 말한다면 육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입고 있는 옷에 불과하다. 계속되는 윤회의 연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한 우리는 다시 태어날 때마다 각기 다른 옷을 입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인간의 삶이 끊임없는 윤회의 굴레에 묶여 있다고 해서 이승의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승에서 도(道)를 조금이라도 알지 못하고 심지어 공덕도 쌓지 못한 사람이 죽어서 뭔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은가? 어림도 없는 소리이다.
이승의 삶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승은 육신을 빌어 잠시 왔다가는 껍데기뿐인 삶이 결코 아닌 것이다. 언젠가 TV에서 티벳의 불교에 대해 방영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그걸 보면서 거의 절망했다. 이승에서의 삶의 중요함을 티끌처럼 가볍게 여기는 그 곳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할 말을 잃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승을 살다간 사람들은 내세에 그들이 누릴 영화가 보장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나는 <불멸>이란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서점에서 무심코 신간서적들을 살펴보다가 “삶의 전장으로 나아가라. 그리고 네 자신을 끝까지 긍정하라!”는 표지의 광고문구가 너무 마음에 들어 4권 전부를 사 와서는 이틀을 꼬박 읽었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충무공 이순신의 애기라서 처음엔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한 번 손들자 좀처럼 놓을 수가 없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줄로만 알았던 이순신이라는 사람도 인생의 고비마다 죽음의 그림자를 그렇게 두려워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지만, 치열하다고밖에는 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적인 고뇌가 나로 하여금 이틀밤을 뜬눈으로 지새게 했다. 그가 얼마나 주어진 현실에 충실했는지가 내 몸을 절절 끓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사람에게도 현재는 중요하다. 현재를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이 미래에 어떻게 열심히 살 수 있단 말인가.
종교란 현재의 나를 위해서 믿는 것이고 현재의 내 생활을 좀더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믿고 의존하는 것이지 신에 얽매여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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