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엇을 하고자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정보수집이었지만 이제 이러한 문제는 빠른 속도로 해결되고 있습니다. 특히 인터넷이 생활속에 자리잡은 이후에는 정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보가 보다 정확하고 신뢰성이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같은 정보의 신뢰성 문제는 확실한 입증이 불가능한 정신세계의 경우 훨씬 더 심각하게 다가옵니다.
수행자들 중에는 명상, 참선 혹은 기수련 등 몸수련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독서를 통하여 자신과 우주를 찾아가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이 더 나은지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논란이 지속되어 왔고, 불교에서는 경전을 위주로 하는 교종과 참선을 위주로 하는 선종으로 나뉘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 분명한 것은, 몸으로 하는 수행은 그 진척은 더디지만 체험을 통하여 얻어진 앎이기 때문에 몸에 깊이 각인되는데 반하여, 경전 등의 책을 통해 얻어진 지식은 두뇌의 각성에 그치고 진정한 깨달음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뿐만 아니라 책을 통한 수행을 할 경우 다양한 책에서 제시되는 내용들이 서로 상충될 시에는 어느 것이 진리인지 혼돈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특히 한번 잘못된 정보가 머리에 입력되면 이는 두고두고 수행의 진척을 가로막는 관념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어쩌면 수행자들에게 가장 큰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는 것은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하는 인간 본질에 대한 문제일 것입니다. 1990년대 중반 닐 도날드 월쉬가 쓴 《신과나눈 이야기》가 세계적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모든 사람은 창조주'라는 의식이 크게 확산되었고, 최근 어떤 저자는 '인간은 모두 깨달은 존재'라는 주장도 합니다. 그는 각 개개인이 곧 창조주이고, 인생은 창조주인 개개인이 선택하거나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키고 있고, 일부 사람들은 이를 확대해석하여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창조주라는 이야기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다 (一切唯心造)" 라는 말은 바로 우리가 창조주임을 의미하고, 실제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조정하여 기를 움직이고 무엇을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창조주라는 사상은 지금까지 일부 종교에서 고집해 온 '하느님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극복하고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을 회복하게 하는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수련을 통하여 영혼의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인간은 과연 창조를 위해 태어났는가 혹은 체험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을 곰곰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순수한 우주의 기운인 천지기운과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영'에는 우주의 본성이 깃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들 개개인이 본래 의미의 전지전능한 창조주는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깨달은 존재'라는 주장도 매우 제한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창조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체험하기 위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선택권 혹은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사실 수행자들에게 그리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주인가 혹은 우리가 이번 생에서 얼마만한 창조를 이루어내는가 하는 것은 결코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성장은 우리가 창조를 많이 하느냐 혹은 적게 하느냐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체험을 통하여 새로운 앎이 하나하나 우리 몸에 각인되어 감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진보는 인생이 어떻게 진행이 되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깊은 체험을 하느냐에 달려 있고,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떠한 결과를 얻었느냐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높은 영적 진화를 이룬 분들이 많이 와 있지만, 이들 대부분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수많은 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양의 앎이 몸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느낌을 강하게 받고, 또 이 느낌은 새로운 정보가 입수될 때 그것을 판단하고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그 각인된 앎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쉽게 자신의 의식을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독서나 도담(道談)과 같은 비교적 약한 강도의 자극도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충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기적인 혹은 이따금 씩의 몸 수련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지금까지 비교적 많지 않은 전생을 경험하여 영적 진화가 높지 않은 분들에게는 경전 등의 독서에 의존한 간접체험이 의식수준을 향상시키기에 미흡할 수 있습니다. 몸에 각인된 앎이 제한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가 제공되는 경우 그에 대한 판단이 어려워 혼란이 가중될 수 있고, 또 한번 잘못된 정보가 입력되면 영혼의 성장은 큰 장애를 겪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 종교에 대한 광적인 믿음은 그를 극히 배타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분들에게 절실한 것은 우주를 직접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몸수련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체험하는 존재이고, 체험을 위하여 이 지구에 와 있습니다. 물질로 이루어진 지구에서 이루어지는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하여 우리는 강렬한 체험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앎이 각인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음을 통하여 많은 창조를 이룩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보다 생생한 체험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체험을 함으로써 앎을 축적하고, 이 과정에서 집착과 분별에서 점차 벗어나게 됩니다. 영적 성장의 특별한 경지라고 말할 수 있는 깨달음에 도달하면 우리에게는 큰 자유로움이 주어지고, 또 거기서 더 나아감에 따라 우주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상태로 변화됩니다. 이 과정에서 자기에 대한 인식은 점차 희미해지고 개체성(atman)은 상실되어 드디어는 '자기'라고 하는 존재의 완전한 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인간은 진정한 창조주로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2001년 9월 초
출처 : 장휘용 교수 명상록 - 전체의식 속으로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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