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휘용/장휘용 교수 명상록-전체의식 속으로

31.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기른장 2021. 12. 27. 20:34

사람들은 흔히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동시에 보아야 함을 이야기하지만, 일상에 붙잡힌 채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 경구(警句)는 그냥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일 뿐입니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자신의 인식이 확장되기 시작하면 그 의미가 마음에 와 닿기 시작합니다. 온통 자신에게만 쏠려 있던 의식이 이웃으로 사회로 전 인류로 확대되기 시작하면서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숲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알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알 수도 없었던 많은 현상들과 사건들의 의미가 자연스레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우주 속의 자신의 모습이 느껴지기 시작하고 3차원 물질세계를 넘어선 다차원의 세상이 인식되기 시작하면, 몸과 마음은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모든 것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확장된 의식에서는 이 세상이 철저한 계획과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음이 느껴집니다. 복잡하고 전혀 질서가 없어 보이는 현상도 일정한 규칙에 의하여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물리학의 카오스(chaos)이론을 알지 못해도, 세상의 모든 움직임과 변화에는 원리와 원칙이 있고 방향성이 있음을 인지합니다. 각자의 인생은 인생대로, 각 민족은 민족대로 그리고 인류는 인류 전체 차원에서 미리 정해진 방향으로 나아감이 느껴집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세상의 모든 변화들은 필연적이며,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숨은 뜻이 있음이 느껴집니다.

 

요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예수의 수난)〉 라는 영화가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루 동안의 고난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영화는 불과 몇 달 만에 수천 만 명의 미국 관객들을 감동시키고, 이제는 한국에 상륙하여 기독교,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 많은 일반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의 차원상승을 받아들이는 수행자들에게는 왜 하필이면 지금 이 시기에 그 영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지 의아하게 여겨집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 오랜 기간 동안 서서히 냉각되어 온 예수에 대한 열기가 그 영화를 계기로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지구대변혁의 관점에서 볼 때, 지금 국내외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되어 온 물질문명을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영향력이 가장 큰 매체 중 하나인 영화는 집단적 해원(解寃), 의식의 전환, 관념의 파괴 등을 보이지 않게 아주 효과적으로 해내고 있는데, 지난 수 년간 흥행한 영화들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매트릭스(Matrix)〉 는 사람들에게 인생이란 미리 짜여진 것임을 은연중에 느끼게 해 주었고, 〈해리포트(Harry Potter)〉 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상과 실제라는 절대적 구분을 허물어 줌으로써 다가오는 시대 즉 진정한 마법 시대로의 진입을 용이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은 새 시대가 도래하기 전 인류가 겪게 될 시련 그리고 과거와 같은 선악의 대결구도가 아니라 조화와 상생의 통일왕국이 전개될 것을 암시해 주었고, 〈인디펜던스 데이(Independence Day)〉, 〈딥 임팩(Deep Impact)〉, 〈아마겟돈(Armageddon)〉 등 지구의 재난을 다룬 많은 영화들은 지구 정화작용에 따라 경험할 수 있는 대재앙들을 미리 경고해 주었습니다.

 

같은 시각에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역시 새 시대를 준비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이 느껴집니다. 이 영화를 관람한 개개인의 소감은 물론 다르겠지만, 대다수의 관객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뜻에 의하여 움직여 나간다는 예수의 믿음을 상기시켜 주고, 육체적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서 자신의 길을 간 진정한 사명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관객들로 하여금 만약 자신이 그 때 그 장소에 있었다면 과연 예수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인가, 그리고 당시의 유대 사람들과는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었겠는가를 자문하게 만듭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를 통해 다시 부활한 예수는 특히 하느님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과 신뢰를 우리들에게 보여주는데, 이는 현대의 수행자들, 특히 인간이 모두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뉴 에이지 성향의 수행자들에게 큰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최근의 일부 뉴 에이지 지도자들은 채널링 메시지 등을 통해 인간이 단지 신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고 그 자체로서 신 혹은 하느님이며 다만 자각하지 못한 것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은 서로를 신 혹은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속성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상태의 사람들끼리 서로를 추켜올리는 것이 과연 구도자에게 어울리는 것인지, 아니면 영적 오만함을 부추기는 것인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뉴 에이지(New Age)사상은 19세기 후반, 오직 예수와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반발과 동양사상의 유입을 계기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20세기를 거치며 전생과 윤회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기(氣), 에너지에 대한 이해가 확대되면서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신앙적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뉴 에이지 사상에는 일관된 사상적 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전생과 윤회를 인정하고 인간에게 내재된 신성 혹은 불성을 밝힐 것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신이고 창조주라는 주장은 모든 인간이 불성을 가졌다는 석가모니 가르침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달리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이 신이라는 주장은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신 혹은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이는 또 다른 형태의 무신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 혹은 절대자 하느님을 말할 때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특별한 속성을 가진 존재를 일컫는 것인데, 모든 인간을 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 특별한 속성을 지닌 절대적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이 모두 신이라는 주장은 유일신으로서 절대자 하느님의 존재를 확실히 인정하는 예수의 핵심적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들의 주장에 공감하는 것은 성인(聖人)으로서의 예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는 일부 사람들에게 이제 하나의 조롱거리가 된 신, 절대자 하느님의 존재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줍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의 행태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예수의 핵심적 가르침까지 쉽게 무시될 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어쩌면, 인간 그 자체가 바로 부처님 혹은 하느님이라는 생각은 헛된 오만함만 키워 영적 성장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제게는 불교를 포함한 여러 전통적 가르침들 중 수행자들을 오도하는 것이 여럿 느껴집니다. 석가모니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하여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한정된 토픽만을 집중적으로 설법하였지만, 후대로 넘어오면서 승려들과 불교학자들은 석가모니가 설법한 내용에 근거하여 우주의 모든 것을 해석하고자 시도하였고, 그 결과 석가모니의 본래 가르침은 그들에 의하여 왜곡되고 변질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수행자들은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다양한 허상과 환상을 갖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보통 깨달음이라 불리는 것은 깨달음의 체험을 의미하고, 그 체험은 체험자에 따라 아주 은밀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갑작스런 몸과 마음의 변화 그리고 다양한 신비체험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공통적인 것은 그러한 체험과 동시에 자신의 에너지 상태가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의식의 큰 확장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자신의 근본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는데, 자신이 우주의 근원과 연결된 존재이고, 모든 우주 만물은 하나의 기운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실히 느끼게 되면서 거의 절대적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깨달음의 상태는 결코 계속 지속될 수는 없으며, 아주 짧은 순간에 그칠 수도 있고, 몇 시간, 몇 일 혹은 몇 주 동안 지속되기도 합니다.

​이제까지 깨달음을 경험한 수행자들 중 상당수는 그 체험 상태를 지속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온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런데 그 노력은 어쩌면 우주의 이치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여 생긴 새로운 집착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깨달음은 모든 존재가 우주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고 우주만물이 하나임을 각성하는 체험인데, 누구든 그 상태에 계속 머물게 되면 인간으로서의 체험은 더 이상 어렵게 됩니다. 절대적 평안 속에서는 육체적 감각을 통한 생생한 인간적 체험들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고, 따라서 삶의 목적인 체험을 통한 영적 성장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번 생에 깨달음을 체험하는 수행자들은 높은 의식을 타고난 존재들로서 이미 전생에서 깨달음을 체험한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이들이 인간으로의 삶을 다시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사명 즉 지금 일어나고 있는 지구의 차원상승과 관련되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명자들은 자신의 의식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우주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하는 체험 즉 깨달음의 체험을 하지만, 그 체험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준비과정일 뿐입니다. 우주가 그를 보낸 이유는 결코 깨달음의 상태에 계속 머무르게 하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100% 깨달음의 상태에서 3차원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이 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명자들이 깨달음을 경험한 후 다시 현실 의식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깨달음의 체험을 한다는 것은 수행자가 특별한 수준의 의식에 도달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깨달은 자 역시 진화 과정상에 있는 존재입니다. 깨달음의 진정한 의미를 인식하게 되면, 그 체험 이후 현실 속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느끼게 될 감정들을 두려워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만약 깨달음을 경험한 도인이 자신의 평정심이 흩어질까 염려하여 현실을 기피한다면, 이는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이러한 환상을 떨쳐 버린 진정한 사명자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주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부르짖었지만, 예수는 그 순간에도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조금이라도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깨달음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속세를 떠나거나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고자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언제나 자신이 사명자임을 잊지 않았고, 사명을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도 감수하는 위대한 사명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많은 하늘의 일군들이 와 있고, 이들을 통해 우리는 수많은 예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 이외에도, 수행자들은 여러 가지 잘못된 인식과 환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누구나 열심히 수행하면 이번 생에 깨달을 수 있다는 생각은 근기 혹은 의식수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생긴 환상입니다. 반드시 영적으로 특별한 체험을 겪어야만 진정한 각자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잘못된 환상이고, 깨달음이 곧 인간 완성이라는 것도 역시 환상입니다. 깨달음 특히 석가모니와 같은 대각을 경험하면 모든 우주 진리를 한 순간에 알게 된다는 것도 환상이며, 한번 깨달음을 경험한 사람은 항상 그 상태에 머무를 것이라는 것도 환상입니다. 깨달음이란 고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도 환상이며, 깨달으면 탐진치(貪瞋恥) 삼독(三毒)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것이라는 생각도 깨달은 존재 역시 진화선상에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여 생긴 환상입니다.

​그리고, 대다수 수행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욕심 그 자체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인식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이란 기본적으로 체험을 하고픈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는 곧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그 체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란 모든 존재로 하여금 필요한 체험을 하게 만드는 영적 진화를 위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욕심이 없으면 체험이 일어나지 않고, 거기에 따른 영적 진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욕심의 극단적 좌절을 경험할 때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삶을 중도에서 포기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에게는 욕심을 추구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런 일이고, 그 추구함이 관련 당사자들에 대한 배려 속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은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는 또한 이 특별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 자세에 대하여 살펴보게 합니다. 대다수의 수행자들은 기존지식과 관념에 묶여있는 일반인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지만, 정작 자신은 관념과 지식으로부터 얼마나 자유스러운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리가 다가올 때 우리는 그 진리를 바로 알아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자신에게 남아있는 에고를 만족시키는 주장들만 받아들이고, 에고와 조금이라도 충돌하는 진리는 쉽게 배척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거의 모든 예언서들이 이 시대에 진인(眞人)이 등장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데, 자신은 그 존재를 알아보고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당시의 유대인처럼 자신이 상상한 모습과 다르다고 철저히 배척하지는 않을까요?

 

수행자들은 이 시대에 쏟아져 들어오는 무수한 영적 정보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시시비비를 가릴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은 석가나 예수가 활동하던 때와는 달리 모든 것이 자연히 드러나는 시기이고, 따라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진리와 진실의 빛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올 것이고, 그 빛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꽁꽁 닫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진리의 햇살이 비추어도 결코 그 닫힌 문을 뚫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그의 내면에는 어두움만 가득할 것입니다.

​마음의 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을 허물어뜨리는 과정에서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주입된 관념과 지식 그리고 자신의 편견과 오만함이 한데 섞여 자신만의 단단한 틀이 만들어지고, 그러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그 틀을 통하여 분별되고 판단되며, 그 틀을 벗어난 어떠한 지식이나 정보도 거부됩니다. 따라서 자신이 오랫동안 구축해 온 틀을 허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들과 기존 지식의 문제점 및 한계를 확실히 느껴야 하고, 그리고 자신의 편견과 오만함을 바라보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일부 수행자들은 이미 자신의 존재와 사명에 대하여 확실히 깨닫기 시작하였고,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도구를 통해 누가 지구대변혁의 리더로 와 있는지를 알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으로 이렇게 깨어나 자신과 동료들의 존재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국내외적으로 급격히 늘어나리라 예상됩니다. 따라서 이제까지와 같이 믿음이나 강요에 의한 진리의 왜곡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며, 진리와 진실은 자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모든 수행자들에게 필요한 두 가지 준비물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관념과 지식을 뛰어 넘어 마음을 활짝 여는 것이 그 첫 번째이고, 순간에 집중하며 내면의 느낌을 따라 사는 것이 그 두 번째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하늘이 준비해 두었습니다.

2004년 5월 5일

출처 : 장휘용 교수 명상록 - 전체의식 속으로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