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동일한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지만 인식하는 세상은 각기 다릅니다. 우리 마음의 여과기능으로 인하여, 같은 신문을 읽고 같은 TV를 보아도 자신이 관심을 가진 정보들만 인식됩니다. 평소 관심이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정보는 아예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환경에서 같은 정보를 접한다고 해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견해는 아주 다를 수 있고, 특히 각자의 의식수준에 따라 동일한 사건도 완전히 달리 인식됩니다.
세상이란 이렇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관념 그리고 의식수준에 따라 달리 인식되고 해석되기 마련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의 원인을 물질적인 것에서 찾으려는 것으로서, 자신의 의식이 물질세계에 머물고 있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시각입니다. 이 시각에서 볼 때, 세상에는 많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현상들이 존재하고, 결코 풀릴 수 없는 인생의 근본적인 의문들이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현재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은 평생 부와 명예를 즐기며 살아가는데 왜 자신은 인생을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만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보이지 않는 기(氣) 혹은 에너지 세상을 인식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뉴 에이지 리더들을 포함한 이 시대의 상당수 영적 지도자들이 여기에 속하며, 특히 유체이탈을 경험하였거나 영적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가지고 있는 시각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기(氣)적 감각, 다양한 (신비)체험, 보여지는 영상과 생생한 느낌 그리고 유체여행 경험 등을 근거로 물질세계 너머에 펼쳐져 있는 보다 근원적인 에너지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은 음과 양,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의 에너지가 서로 대립, 충돌하거나 조화롭게 상생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합니다. 우주에는 보이는 물질세계만 평면적으로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여러 다양한 차원의 세상들이 겹겹이 겹쳐진 채 끝없이 전개되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인간이란 물질적인 탄생과 죽음을 넘어서는 존재임을 인식합니다. 물질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뒤에는 에너지가 있고, 그 에너지는 사람의 마음에 의하여 변하고 조절되는 것임을 이해합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인생이란 각자의 마음이 창조하고 선택하는 것이고, 세상은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항상 바른 마음(正心)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각자가 만들어 낸 부정적인 에너지에 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각자가 책임지게 됨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고, 카르마(karma: 業報)를 강조하고 죄와 벌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삶을 에너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물질적 시각에 묶여 있는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생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고, 어떤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들어도 그 가능성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인생의 많은 것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습니다. 분명 인생은 마음을 통해 창조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왜 자신의 삶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전개되지 않는지, 그리고 투시력을 통하여 예측되는 특정인의 미래가 왜 그대로 실현되지 않는지도 의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도대체 창조주는 왜 부정적인 에너지, 어두움의 에너지를 만들어 세상을 이렇게 어지럽게 하는지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세 번째 방식은, 세상은 미리 짜여 진 각본에 따라 펼쳐지는 체험의 장이고, 인간은 각본에 따라 펼쳐지는 무대 위에서 체험하는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오감으로 인지되는 물질세계가 있고 또 그것의 뒷면에는 보다 본질적인 에너지 세상이 펼쳐져 있지만, 그 모든 것이 다양한 수준에서 쓰여진 각본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임을 이해하면서 삶을 바라봅니다. 이 시각은 대체로 오랜 수행 뒤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갖게 되는데, 외견상 자신의 의지나 선택에 의하여 전개되어 온 것처럼 보였던 인생길이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하여 전개되어 왔음을 깨닫게 되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시각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생의 순간 순간을 자신이 만들고 결정해 나간다는 생생한 느낌을 받고 있고, 또 인간의 가치와 자유의지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세 번째 시각을 쉽게 수긍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특정한 때에 예기치 못한 사건 혹은 상황으로 인하여 인생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전환되어 온 것을 돌이켜보면,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은 이미 오래 전에 짜여진 각본에 따라 절묘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에너지가 물질보다 근원적이고 또 우리의 마음이 에너지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인생이란 자신의 의지 혹은 선택에 의하여 전개되는 것은 아님을 확실히 느낍니다. 대다수의 영능력자들과 유체여행자들이 보고 느끼는 에너지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며 그것도 대체로 낮은 차원의 에너지 세상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고, 또 우리의 마음으로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세상도 4차원의 아스트랄(astral) 세계에 국한됨을 이해합니다. 반면 인생의 시나리오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계획된 것으로서 체험하는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물질적, 에너지적 차원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충돌과 대립 또한 체험을 위해 상위 차원에서 미리 계획된 것임을 느낍니다.
이 수준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사람은, 생생한 감각과 감정을 경험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일어나는 모든 것이 홀로그램 혹은 환상처럼 느껴지는 경우를 심심찮게 경험합니다. 삶을 이런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인생이란 체험을 위한 생생한 연극임이 확연히 느껴지고, 따라서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긴 채 혹은 상위자아가 계획한 인생 프로그램에 맡긴 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무위자연을 이야기한 노자의 삶이요, 최후의 순간에도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대로 해 달라고 기도한 예수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마야(maya: 幻影)라고 한 석가모니의 삶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의 힘을 통하여 무엇이라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 특히 열린 감각과 영적 능력을 이용하여 힐러(healer)로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처음에는 대체로 인생은 자신이 만들어 간다는 두 번째 시각을 갖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 번째 시각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치유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자신의 힐링능력이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위해 주어진 것이며, 자신은 단지 하늘의 도구에 불과함을 깨닫게 됩니다. 미리 계획된 인생의 체험들, 예를 들어 고질적 질환은 당사자가 관련된 체험을 충분히 하기까지는 그 어떤 명의라도 그 병을 낫게 할 수 없으며, 자신이 치유한다고 생각한 사람도 결국 때가 되었기에 낫게 됨을 확실히 느끼게 됩니다. 인생에서 겪게 되는 체험들은 그 영혼에게 꼭 필요해서 미리 계획된 것으로서,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그러한 회피 노력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인생이란 우연의 연속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미리 쓰여진 각본에 따라 전개되는 것임을 눈치 채기 시작한 사람들은, 현재의 삶 속에서 미래에 대한 힌트를 발견하게 됩니다. 소설이나 희곡 혹은 시나리오 속에서 주인공의 미래를 짐작케 하는 복선(伏線)들이 발견되듯, 일상의 삶 속에는 미래에 대한 다양한 힌트들이 주어집니다. 매순간 일어나는 희로애락의 감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한 힌트 혹은 메시지를 발견하기 어렵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 깨어 있는 사람은 일상의 순간들에서 비교적 쉽게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사람에게는 비교적 강한 메시지가 주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그것은 문득 눈에 띄는 간판,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신문기사, TV뉴스 혹은 책의 내용, 일상적이지 않은 특별한 만남, 특이한 꿈, 특별한 체험(예: 전생 퇴행 등), 혹은 특별한 숫자와의 만남 등으로 나타납니다.
제게는 숫자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던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작년(2003년) 10월 초였습니다. 목요일 오후, 갑자기 집에 있는 것이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고 남해안이라도 한 바퀴 둘러보아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전을 지나 대전-진주 고속도로로 접어들었고, 저녁 무렵에는 88고속도로(대구-광주 고속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접근하였습니다. "오늘은 가야산 해인사에서 하룻밤을 묵어야겠다"는 생각에 대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갑자기 “아니지!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지리산을 한번 올라가야지!" 하는 생각에 차를 돌려 지리산 중산리를 향하였습니다.
그 날 저녁은 중산리 산악인의 집에서 민박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지리산 천왕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중산리 코스는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으로 가는 등산로 중 가장 가파른 코스였는데, 평소에 산을 자주 오르는 편이 아닌지라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기에 바빴습니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산행을 계속하기를 약 4시간, 가까스로 천왕봉에 올라 제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는데, 놀랍게도 시계바늘은 10시 10분 그리고 10초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날이 10월 10일이었으니 10이 다섯 개가 겹친 시각에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던 것입니다. 그 숫자가 주는 메시지는 당시 제가 다른 방식으로 전달받았던 메시지들과 일치하는 것이었기에 깊은 공명을 일으켰습니다.
일부 수행자들 중에는 일상의 삶에서 만나는 숫자 하나하나, 예를 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앞차의 번호판, 특정 순간 눈에 띄는 시계판 혹은 전광판의 숫자들을 결코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각 숫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눈에 띄는 모든 숫자에서 메시지를 발견하려는 것은 약간 무모해 보이는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각자의 인생 뿐만 아니라 지구, 태양 그리고 전 우주가 각각 짜여진 프로그램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음을 인지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메시지는 삶 속에서는 끊임없이 전달되고, 특히 중요한 메시지는 다양한 방법으로 반복해서 전달됨을 이해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을 되돌아보거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삶 속에서 메시지를 발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신의 의지로 무엇을 이루고 개척하겠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잘 인식하고 있기에,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대신 초래되는 결과 그 자체가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고, 인생의 진행 방향에 대해 예감하게 됩니다. 또한 순간순간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삶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나게 됩니다. 비록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에는 자신의 감정이 일어나지만, 메시지를 찾는 그 순간부터 감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우주의 모든 것이 나름대로의 계획 속에서 변화되고 있음을 인식하면, 인생은 하나의 재미있는 퍼즐게임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세계는 2001년 가을의 9.11 테러사건을 기점으로 큰 소용돌이 속으로 진입하였고, 한반도는 더욱 심하게 요동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핵심 산업의 급격한 성장과 월드컵 등의 스포츠 경기 그리고 한류열풍 등을 통해 한민족의 경제적, 문화적인 힘은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하였지만, 한반도는 북한 핵무기를 둘러싼 국제적 분쟁의 한 가운데 서 있습니다. 기존의 관념들과 이념들이 급격히 무너지면서 남녀, 노소, 노사, 빈부간의 분쟁과 대립은 날로 심화되고 있고, 특히 보수-혁신 세력간의 논쟁이 이제는 완전한 대결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극도의 물질주의 속에서 자신 혹은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됨에 따라, 사회적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혼란이 더욱 두드러진 것은 아마도 한반도가 시작과 끝이 일어나는 간방(艮方)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극심한 변화와 혼란들은 개인적, 집단적 해원(解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의식하든 않든 과거에 쌓였던 감정적 에너지들이 풀려 나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개인적 차원의 해원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갈등, 번민, 아픔을 느끼고 심한 감정의 기복을 경험하며 이루어지고 있고, 집단적 해원은 정치적 사건이나 스포츠, 영화 등을 관람하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일 월드컵에서의 응원의 물결과 함성 속에서 민족적 열등감이 풀려나갔고, 〈태극기 휘날리며〉 등의 영화를 관람하며 흘리는 눈물을 통하여 과거의 슬픈 기억들이 씻겨 나가고 있습니다. 지구의 차원 상승에 부응해서 우리의 감정체가 정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현재 나타나고 있는 혼란은 당분간 더 심화되어 혼돈의 상태로까지 발전되리라 예상되며, 그러한 가운데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질서가 서서히 정립될 것으로 느낍니다.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어 가는 지금 이 시기에, 지난 몇 년간 자신과 국가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사건과 현상들을 음미해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나에게 혹은 사회적으로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해원의 관점에서 한번 바라볼 수 있고, 또 제가 이야기해 온 지구 대변혁 ‘스토리’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혀 눈치 못 채는 사이에, 하늘이 새로운 세상의 개막을 하나하나 준비해 왔음을 깨닫고 전율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인생을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삶의 방식은 이 특별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갑작스레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현상들과 사건들 속에서 좌절하거나 분노하기보다 그러한 현상 뒤에 숨어있는 시나리오를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우주에서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빨리 하면 할수록, 우리는 모든 것을 담담히 수용할 수 있으며, 의식은 도약할 수 있습니다.
2004년 3월 13일
출처 : 장휘용 교수 명상록 - 전체의식 속으로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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