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1월 30일은 히틀러가 국가원수의 자리에 오른지 5년째 되는 해였다. 그는 독일국민에게는 사상 처음보는 평화수호와 국민생활 향상에 전심한 영도자로 생각되었다. 히틀러의 새로운 경제개혁과 문화정책은 6백만의 실직자들에게 일터를 마련했고, 국민문화수준을 향상 시켰으며, 1936년에는 올림픽경기를 통해 평화수호를 위한 독일국민의 단합과 각오를 세계만방에 드높였다. 리하르트·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올림픽찬가로 시작된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은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할렐루야” 합창으로 축전의 막을 내렸다. 1936년 베를린의 범세계적인 행사는 역대의 올림픽 중 드물게 보는 평화롭고도 경건한 분위기였다. ‘힘은 즐거운 삶으로부터 (Kraft Durch Freude)’라는 국민 사기앙양(士氣昻揚)의 사업들은 이 해 1938년 5월 국민앞에 내어놓은 ‘국민의 차(Volkswagen)’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독일 주변의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폴랜드등의 국민들은 히틀러와 같은 지도자를 만난 독일국민을 마냥 부러워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는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로 진군했는데, 이미 사전에 오스트리아의 슈스니끄(Schussnigg)수상은 내려앉았고 그곳의 나치당수인 자이쓰·인쿠바르트(Seyss-Inquart)가 수상자리에 올라 국가병합계약서에 조인했기 때문에 피를 흘리는 전쟁과정은 생겨나지 않았다. 히틀러는 빈(Wien) 근교인 레온딩(Leonding)의 부모님 묘지에 가서 참배하고 다시금 빈으로 향했다. 도심지에 위치한 〈영웅의 광장(Heldenplatz)〉에 도착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독일국민의 영도자요 독일국가의 원수로서 나는 새로 독일국가가 된 나의 고향에 돌아온 것을 준엄한 역사 앞에서 엄중히 선포하는 바 입니다!” 이렇게 서두를 시작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서는 독일본토 보다도 더 한층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그가 이끄는 군인들의 제복은 전투복이 아니라 너무도 멋있게 지어진 사열복이었다. 이때만 해도 히틀러와 그가 이끄는 독일군대가 전쟁을 일으키리라는 것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Sudeten)지방에는 많은 독일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독일어가 통용되는 지역이었다. 히틀러의 야심은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합병한 그러한 방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독일화 하는 것이었다. 이 해 9월에는 히틀러와 영국의 수상 챰벌레인(Arthur Neville Chamberlain) 과 프랑스의 수상 달라디어(Edouard Daladier)와 이탈리아의 통치자 무쏘리니(Mussollini)의 4 거두(巨頭)회담이 뮌헨(Muenchen)에서 열렸다.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를 우려했던 영국과 프랑스가 히틀러의 제안에 선뜻 동의하자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합병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고 10월초에는 독일군인들이 프라하로 진군하게 되었다. 이제 독일의 판도는 중앙유럽 전부를 차지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폴랜드와 헝가리가 다음의 목표가 되었다.
바로 이즈음 파리에서 독일 대사관 공사로 부임되어 온 에른스트 폰·라트(Ernst vom Rath)가 폴랜드 청년 헤르쉘·그린슈판(Herschel Gruenspann)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당시 그린슈판은 17세였다. 이 폴랜드 청년이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나치의 프로파간다 총 책임자인 괴벨스(Goebbels)는 넓혀진 그 당시의 독일판도 전역에 사는 유대인들의 여권이나 신분증명서에다 무조건 〈J〉자의 도장을 찍어 유대인임을 명시토록 지시했다. 그리고는 1938년 11월 9일 “수정(水晶)의 밤” 이라고 하는 대 참사가 독일 전역에 발생했고 이날부터 폴랜드를 침공해야 한다는 함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날 밤 91명의 유대인 유명인사들이 살해되었고, 29개의 유대인 경영 백화점들이 완전히 불에 탔으며, 171개의 유대인소유 호화주택들이 전파(全破)되었고, 267개의 유대인의 회당(會堂 Synagoge)들이 전소(全燒) 내지는 대파(大破)되었으며, 7,500개의 개인사업체들이 몰수(沒收)되었는데 그중에 은행 등 금융기관도 다수 포함되었다. (참고문헌: H.J. Doescher, "Reichskristallnacht". Die November Pogrom 1938. Berlin 1988).
단 하루밤이었던 바로 그 “수정(水晶)의 밤”에 히틀러의 특별명령에 의해 체포된 유대인수는 3만 5천명에 달했다. 그중에서 약 1만명 정도는 거액의 보상금을 지불하고 풀려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귀금속 내지는 보석상의 사업을 경영했는데 수백만 마르크(Reichsmark) 상당의 크리스탈 유리잔, 그릇, 화병등과 진열장의 깨어진 유리쪼각들이 이날밤 도처에 널려져 온 세상이 수정의 프리즘 효과로 인해 실로 형언키 어려운 오색 찬란한 달빛으로 빛났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때의 일을 회상 하면서 “박해를 당한 유대인들의 정신은 비록 산산히 쪼개어졌을지 몰라도 수정과 같이 맑게 빛났을 것이라”고 한다.
수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이 “수정(水晶)의 밤” 사건으로 인해 희생되었고 더러는 독일땅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쌓아 올린 정신문화의 금자탑이 산산조각으로 나뉘어져 그 편린(片鱗)이 유럽은 물론 미주와 아시아에까지 확산되었다. 이때에 유대인 학자들이 중국의 상해(上海)로도 망명 했었다. 이러한 정신과학의 편린(片鱗)중 당대 핵물리학자(核物理學者), 방사능(放射能) 연구학자들의 분산이 오늘 전세계의 핵무기(核武器)개발로 인한 긴장조성의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예컨데 빈 출신의 여류(女流) 핵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박사는 이미 1938년 7월 14일 베를린의 황제-빌헬름-연구소(Kaiser-Wilhelm-Institut)를 떠나 코펜하겐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교수에게로 갔는데 그 해 11월 9일 생겨난 “수정(水晶)의 밤” 사건으로 인해 다시는 독일로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히틀러와 나치독일의 핵무기개발에는 결정적인 또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1938년 늦가을 평화수호의 일등국민으로 여겨졌던 독일국민과 나치의 정치이념이 이러한 숙명적인 “수정(水晶)의 밤” 사건으로 인해 뜻밖에도 그 반대의 모습을 들어내어 유럽인들에게는 공포와 전률을 불러 일으키게된 것이다. 히틀러와 나치수뇌들은 줄곧 〈범 게르만주의〉 곧 〈유럽의 독일화〉에 대한 자기네들의 생각이 세계사적인 소명이요 나아가 신(神)의 섭리에 순응하는 일로 여겨져 게르만 민족의 순수성 및 우월성을 국민교육이념으로까지 전개해 갔다.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지고 신형무기 개발과 쏘련침략 계획이 주도면밀히 연구되고 산업체들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은 모든 군사작전 수립에 총동원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히틀러와 나치수뇌들은 “수정(水晶)의 밤” 이후의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훗날 영국, 프랑스, 미국, 쏘련등지에 핵무기개발을 촉진하게 되는 일인줄은 감지하지 못했다.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을 1945년 이후로 미루었던들 나치독일은 제일 처음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가 되어 오늘날까지 ‘범·게르만주의(Pan-Germanism)’로 세계를 다스리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사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희생 되어서라도 세계의 평화가 올바로 수립 되도록 1938년의 사건으로 간섭했다. 그러므로 “수정(水晶)의 밤”은 세계인들에게는 또하나의 “게세마네동산의 밤” 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한편 당대 일본학의 대가 하우스호퍼(Haushofer)를 통하여 유럽의 대 독일판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소상하게 일본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10년 한국합병, 1931년 만주침략, 1937년 중일전쟁등을 통해 일본은 나름대로 대동아(大東亞) 일본제국에 대한 꿈을 실현해가고 있던 차 일본군부의 수뇌들이 이러한 “수정(水晶)의 밤” 에 대한 소식에 접하자 이야말로 자기네들에게는 모든 악독한 생각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새로운 음신(音信)이 아닐 수 없었다. 독일의 유대인 탄압은 곧 조선인 탄압에로 연결되었고, 정신대 구상, 집단 강제노동과 강제징집, 반란자들의 생매장등.... 일본은 더욱 잔인한 탄압방법과 학살을 자행하게 되었다. 1938년도 독일판도내의 “수정(水晶)의 밤”은 마침내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생각하게 했으니 이는 곧 태평양전쟁 전야의 “수정(水晶)의 밤” 이기도 했다.
1938년 11월 9일과 10일, 너무나도 아름다운 말로 표현된 이 “수정(水晶)의 밤”.... 이는 이듬해에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오고, 유대인을 육백만명이나 살해하는 엄청난 죄악을 범하고야마는 다시 말하여 인류사에 일찌기 없었던 기구한 “숙명(宿命)의 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날밤 달빛은 유난히도 밝았다. 독일 전역에서 불타고 있는 유대인들의 지성소(至聖所: Synagoge), 거의 하나도 남김없이 파손된 유대인들의 점포, 무차별 발포해대는 무장 독일군인들의 총성(銃聲)소리, 게슈타포(비밀경찰:Gestapo)에 의해 붓들려가는 학자들과 예술가들 그리고 뒤따르는 여인들의 애절한 통곡소리, 홀연히 하룻밤에 고아(孤兒)의 신세가 된 어린애들의 울음소리.... 인간의 마음은 이렇듯 어둡고 비통했는데, 독일전역의 불타고 파손된 길거리에는 즐비하게 널려진 유리조각들이 이날밤따라 화창한 달빛과 함께 수정처럼 오색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순간적인 절망을 이겨내지 못하여 불길에 뛰어든 꽃다운 사춘기의 젊은 남녀들, 길가에 널려진 유리조각을 집어들어 혈관을 절단해 자살한 여인들의 수는 오늘날까지도 집계되지 아니했다. 대 독일의 한때 평화로웠던 땅을 떠나야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 곧 죽음의 길을 택하는 것이었다.
“수정(水晶)의 밤” 사건을 오늘날 독일의 역사학자들은 “포그롬(Pogrom)”이라 부른다. 러시아말로 “포그롬”이란 ‘벼락’이란 뜻이다. 단 하룻밤에 이와같은 벼락치듯한 조직적인 파괴는 미리 치밀하게 계획된 사건이 아니고서는 불가능 했었다. 1938년 11월 12일 나치수뇌 괴링(Goering)은 유대인들에게 외교관 폰·라트 공사(公使) 살해에 대한 보상금으로 10억만 마르크(Eine Milliarde Reichsmark)를 지불할 것을 요청했으며, 유대인들은 정치계, 경제계, 학계등의 일체의 공적지위에서 물러날 것과 “수정의 밤”에 생겨난 파손, 정리 일체를 유대인들은 스스로 해결할 것을 공표했다. 독일 관원 한 사람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생겨난 아무도 예측치 못한 돌발사건인 이 “수정의 밤” 포그롬은 당시 독일 판도내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너무도 큰 손해와 부담을 안겨다 주었다. 앞을 다투어 독일 땅을 떠나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흡사 3,000년전의 ‘출애급 사건’을 방불케 하기도 했다. 독일사람들 중에서 유대인들에게 동정을 표하거나 도와주는 사람들도 유대인과 똑같이 취급당해 집단 강제수용소(Konzentrationslager)로 보내졌다. 그런데 1938년 11월 16일은 참회기도일(Buss- und Bett-tag)이었다. 독일 전역에서 이날에는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비는 특별한 ‘신앙의 날’ 이다. 이날 많은 신부와 목사들이 “수정의 밤” 포그롬에 대해 참회하는 예배를 드리다가 나치의 게슈타포에 의해 붓들려 집단 강제수용소로 끌려 갔으며, 설교원고와 기타의 유인물들이 모두 압수되었다. 그중 슈트트가르트(Stuttgart) 근교 오버레닝겐(Oberlenningen) 교회의 폰 얀(Von Jan)목사의 설교내용 전문을 여기에 소개한다. (참고문헌: W. Mairguenther, Reichskristallnacht. Hitlers Kriegserklaerung. Kiel 1987).
1938년 11월 16일 오전 10시 참회일 특별예배때에 폰 얀 목사는 구약성서의 예레미아서 22장 전부를 낭독했다. 거의 마지막 29절에 기록된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라는 구절은 반복해 낭독되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며칠 사이에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는 하나의 심각한 물음이 생겨났습니다. ‘독일에는 예언자가 지금 어디 있는가? 왕의 집에 가서 감히 여호와의 말씀을 전할 그러한 예언자는 없는가?’ 진정 예레미아와 같이 여호와의 이름과 그의 공의로움을 부르짖는 한 젊은 청년은 없는 것입니까?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자를 그 압박하는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러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할 용감한 예언자는 없는 것입니까? 분명코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 독일 땅에 이러한 의인들을 보내셨을 겁니다.
그러나 모두들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공의로움을 증거 하다가 강제수용소로 끌려 가던가 아니면 입을 열지 못하도록 압제를 받게 된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 이 시간도 예레미아의 생시와 마찬가지로 귀족들에게 아첨해 영화를 누리는 그러므로써 승리의 월계관을 쓰는 거짓선지자들이 범람코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 앞에서 영화를 누리는 말을 하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는 아닙니다. ‘오직 잠시동안 교회의 지도자로 머물수 밖에 없는’ 의로운 목사님들과 신부님 감독님들 중 거의 전부가 강제수용소로 연행되어 갔다고 하는 신문기사를 여러분들도 읽으셨을 겁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선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배도중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과 공의로움을 외면하는 것은 큰 죄악이라고 실랄히 비판했을 겁니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죄없는 사람들을 억압해 피를 흘리게 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이러한 과오를 보면서 회개해야 한다고 외치지 못하는 성직자들이 또한 같은 범죄자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침묵을 지키거나 마땅히 관심을 두어야 할 일에 무관심한 태도를 가졌다면 오늘 우리는 이 참회의 날에 기필코 뉘우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죄와 우리국민 전체의 죄를 지금 뉘우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최근 파리에서 일어난 일은 분명코 범죄행위 였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경륜을 어긴 살인자는 단연코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범죄행위로 인하여 희생된 폰·라트씨의 고귀한 생명에 대해 우리 모두 이 시간 마음 깊은데서 애도를 표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 한사람의 단 하나의 범죄가 파리에서 일어난 후 독일 전역에 그렇게도 헤아릴길 없는 엄청난 규모의 보복행위, 살인행위, 범죄행위들이 잇따라 생겨나야 한다는 것을 어느 누가 감히 예측 했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나고 그리스도를 배신한데 대한 너무나도 극심한 죄악의 증서(Quittung)가 지금 우리들 손에 쥐어져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주도면밀히 계획된 그리고 조직적인 적 그리스도의 행위가 벌어진 것입니다. 삶에 대한 열망이 저지 되었고, 하나님의 계명이 무시되었으며, 하나님의 집이 완전히 불에 타고 말았습니다. 이방인들의 것이라고 하여 집과 재물들을 모두 파괴하고 또 몰수했습니다. 우리 독일국민을 충실히 섬기고 양심적으로 의무를 수행한 훌륭한 사람들을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마구 붓잡아 지금 강제수용소로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롭지 못한 사건에 대해 하늘 위로부터의 심판이 분명코 내려질 것입니다. 또 국민감정이 아직도 건전하다고 하면 이에 대해 함구무언 할 수 만은 없을 겁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독일국민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를 행했으며 이에 대한 하나님으로 부터의 심판이 독일위에 곧 임할 것임을 예언하는 바 입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을 잊지 마십시다. ‘너희는 오해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시 당하시는 분이 아니니 심은 그대로 반드시 거두리라!’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너무나도 소름끼치는 증오의 씨앗이 지금 독일의 땅에 뿌려진 것입니다. 이제 얼마나 엄청난 악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겁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독일국민 위에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 한 이 결실을 물리칠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독일국민 전체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한다고 외치면 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말하면 이는 당장에 금지되고 저지되는 현실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압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러분께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적어도 나 한사람만이라도 이처럼 엄청난 죄악의 멍에를 벗겨야 한다고 용감히 외치는 바 입니다.
하나님을 찬송 하리로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공의로움을 부르짖노니, 세상이여! 너는 지금 너의 할 바를 내게 행하라! 우리는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음이라! 하나님은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넘치시리니, 오!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아-멘.
이날 폰 얀 목사님은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집단 강제수용소로 넘겨졌다. 그러나 그의 설교문은 오늘날까지 남겨져 “수정의 밤”에 대한 독일인의 참회의 눈물로 전해지고 있다. 1938년 11월 9일 “수정(水晶)의 밤” 포그롬은 독일역사에 있어서 씻을래야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범한 경우였다. 단순한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었다기 보다는 하룻밤 사이에 독일 판도내에는 도덕적인 가치관과 법의 공정성과 사회적인 유대등이 무너졌다는 비운을 낳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뒷 수습이 불가하다 할 만큼 한 국가의 정치적인 분위기에 크나 큰 회오리바람을 일게 했다. 전쟁, 혁명, 경제적인 공항.... 이런 것들 보다도 훨씬 더 무섭고 걱정스러운 분위기가 1938년 겨울 강추위와 함께 독일사회 전반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수정의 밤” 사건으로 인하여 히틀러의 독일국민에 대한 금석(金石)과도 같은 맹약(盟約)과 나치독일의 제반 빼어난 사업에 관한 선전들이 올바로 받아 드려져서는 안 되겠다는 인상이 독일판도 뿐만 아니라 유럽전역에 번져 나아갔다. 이날의 포그롬은 이를테면 오랜 전통과 함께 이룩된 찬란한 독일문화에 대하여 핵분렬을 이룩한 중성자와의 충돌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기로부터 방출된 나치의 사악(邪惡)한 에너지는 급기야 유럽전역에 어두운 먹구름을 드리우게 했으니 11월 9일은 독일역사에 있어서 운명의 날이 되기도 했다.
1938년 10월 “수정의 밤”이 있기 한달 전의 히틀러의 모습은 유럽전역에 너무도 훌륭한 그리고 인류전체가 오래도록 열망하고 기다려 온 평화수호의 화신(化身)처럼 느껴졌었다. 오스트리아와 첵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독일에 합병시킴으로써 그는 유럽의 중심부에 대 독일제국을 건립했다. 1919년 베르사이유조약이래 어느 누가 감히 이러한 큰 과업을 수행할 생각이나 했겠는가? 독일이 어떤 나라인가? 아직도 제1차 세계대전때의 파괴와 유혈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는 패전국이 아닌가? 한 패전국의 지도자가 전쟁의 도발이 없이 단 5년간의 집무기간중에 이러한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동서고금에 일찌기 없었던 일이었다. 만일에 파리의 한 외교관이 살해 되지 않고 이때에 히틀러가 암살되었더라면 그의 이름은 세계사의 영웅으로 남았을 것이며, 유럽은 그를 기리고 아쉬어 하는 눈물의 골짜기로 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역사를 속였다. 자연의 원리를 거슬리든가 역사의 소명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되면 여기에는 항상 준엄한 심판이 내려진다. 로마제국때의 씨저의 경우가 그랬고, 유럽제국을 꿈꾸었던 나폴레옹의 경우가 그랬다. 이는 자연과 역사의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정의 밤”바로 그 다음날 1938년 11월 10일 히틀러는 뮌헨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자회견을 가졌다. “우리가 다 잘 아는 사실에 대하여는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언급하고저 하는 것은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에게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평화수호를 위하여서 우리는 이제부터는 무장을 해야만 합니다. 경제발전을 위해 나는 벌써 4개년 계획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러한 (무력적인) 방법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이런 계획을 입에 담을 수도 또 실천에 옮길 수 도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방해여건에 지나지 않는 탁상공론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벌써 10여성상동안 평화문제 하나만을 생각해 왔습니다. 독일인들의 평화에 대한 열망! 독일인들의 평화수호에 대한 노력!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독일국민을 위한 평화가 아니겠습니까? 독일국민을 근심케 하는 모든 여건을 제하여 버리는 것만이 독일의 평화가 이룩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한가지 문제를 해결하고나서 또 다음단계로 나가는데 필요한 철저한 에너지가 없이 이 대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금은 평화를 위한 무력행사가 행해지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때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독일의 평화를 위한 이러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수단이 곧 마련 되리라고 하는 사실을....” (참고문헌: H. von Kotze - H. Krausnick, Es spricht der Fuehrer, Sieben exemplarische Hitler-Reden, Guetersloh 1966).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바로 전야에 히틀러는 또 다음과 같이 독일국민 앞에서 연설을 했다. “나는 6년동안 독일의 군사력을 확보하는 일에 몰두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900억만 마르크를 소요해가며 이 중차대한 일을 준비한 것입니다. 나는 동쪽으로 먼저 진군할 것인가 아니면 서쪽으로 먼저 쳐들어 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군사력을 확보한 것은 공격을 하지 않고 가만 있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은 내 마음속에 항상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참고문헌: M. Domarus, Hitler, Reden und Proklamationen 1932-1945, Bd.I, Wuerzburg 1962)
이와같은 변모 속에서 우리는 히틀러의 위장된 평화에 대한 이념을 확증할 수 있다. 독일의 평화를 위하여서 독일국민은 우선 전쟁부터 치뤄야 하는 운명에 접하게 된 것이었다. 전쟁인가? 평화인가? 히틀러 자신은 한번도 이 두가지의 문제로 고민해 본적은 없었다. 사실 그는 전쟁 하나만을 골돌히 생각 했었다. 심지어는 평화를 거론하는 순간에도 그의 머리와 마음속에는 오로지 전쟁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심지어 평화의 상징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들어내면서도 그는 마음 속으로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의 창문이 얼굴이라고 하는데 이를 철저히 위장할 수 있었던 것이 히틀러만의 천재성이기도 했다.
1939년 10월초 세계대전을 진두 지휘할 지휘관 장성들을 모아놓고 히틀러는 자신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1933년 내가 대권을 장악한 그 시점부터 나는 내 자신과의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내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가치관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나는 제일 먼저 내 자신과 싸워야 했습니다. 붕괴되어 가는 사회상을 바로 잡기 위하여는 우선 독일국민들에게 영웅심리를 불어 넣어 주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국제적인 지위에 있어서 독일의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위축되지 아니하고 세계의 으뜸가는 당당한 독일민족이라는 의식구조를 가지게 하는 일이 수월 하리라 생각 하십니까? 그리고 이와 동시에 나는 군사력을 암암리에 강화 했습니다. 혹 어떤이는 나에게 경고 하면서 또 다시 독일이 억눌리게 된다고 걱정하기까지도 했습니다. 나의 소신을 믿고 용기를 가지고 이 일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적었습니다. 그러한 중에서도 나는 나의 소신을 강력히 피력해 왔습니다. 나의 확신은 지금은 독일국민 전체의 확신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여러분들에게 순간전쟁(Blitzkrieg)을 명령 합니다.” (참고문헌: W. Hofer, Der Nationalsozialismus, Dokumente 1933-1945, Frankfurt/M. 1982)
순간전쟁! 그러면 그가 명령하는 이 새로운 유형의 전쟁이란 어떤 것이었는가? 1938년 11월 “수정의 밤” 사건으로 인하여 세계대전을 도발하려는 히틀러의 참모습은 들어났다고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해석한다. 독일국민의 평화를 방해하는 제일여건인 유대인들을 무력으로 억압 내지 분쇄하고나서 이러한 힘의 과시를 통해 유럽전역을 지배하는 것이 이른바 ‘독일의 평화(Pax Germanica)’를 이룩하는 다음의 단계인 것이다. 이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모든 면에 뛰어나야 하고 전쟁을 하면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독일국민.... 우선 독일군인들은 뛰어난 무기에 뛰어난 작전으로 전쟁을 시작하고 가능하면 빠른 시간내에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 이른바 그의 ‘순간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곧 “포그롬”을 의미했다. 벼락과 같은 방법의 쇼크전쟁을 통해 백전백승하는 원리가 그의 이른바 “순간전쟁”을 의미한다고 하면, 이러한 “포그롬”을 실험해 본 것이 다름아닌 “수정의 밤”이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출처 : 나치독일의 어제와 오늘 - 金政陽 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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