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겨울은 유난히도 추운 계절이었다 영하 16도의 기온에 오데르(Oder)와 도나우(Donau)강들은 꽁꽁 얼어붙어 수화물 선박의 육지에로의 진입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알프스 산맥의 정상에는 영하 22도를 기록했다. 이러한 혹독한 추위는 “수정(水晶)의 밤”을 겪어야 했던 유대인들과 독일사람들의 마음의 세계를 한가지로 냉혹하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勃發)을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랜드 침공으로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나치독일의 세계정복야욕이나 “세계의 독일화” 내지는 “범 게르만주의”등의 견지에서 본다면, 〈유대인의 세계화(Weltjudentum)〉에 대해 도전한 때로부터 세계대전은 일어났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1938년 11월 9일 나치독일이 감행한 “수정의 밤” 포그롬이야말로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도전한 선전포고였다 말할 수 있다. “독일의 세계화”에 있어서 가장 큰 거침돌이란 다름아닌 만인이 인정코 있는 학문, 예술, 정치, 문화 전반에 걸친 유대인들의 빼어남이었다. 그래서 능력있는 유대인들을 몰아냈고, 독일판도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은 무기력하게 만들어 절대복종케 하던가 아니면 강제수용소에 집단 감금했다. 유대인들에게 동조하거나 나치정부에 반기를 드는 지성인들도 추방되던가 아니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이렇게하여 독일판도는 다시금 조용해졌다. 순수한 게르만 민족만이 맞이하는 실로 ‘오붓한’ 성탄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베를린의 켐핀스키(Kempinski)와 아들론(Adlon)의 두 호텔에서는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들, 사업가들, 학자들 그리고 예술가들이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예나 다름없이 흥청거리고 떠들석한 분위기를 마련했다. 슈타츠·오퍼(Staatsoper)에서는 폰·카라얀(Von Karajan)의 지휘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Die Zauberfloete)〉가 연주 되었는데 첫날에는 히틀러와 나치의 수뇌들이 관람하고 폰·카라얀을 격려하기도 했다. 카·데·베(Ka De We)를 비롯한 백화점에는 크리스마스의 절기를 맞아 손객들로 붐비고 있었는데, 12월 18일은 일요일이었는데도 백화점과 길가의 점포들이 영업을 계속했다. 그 이틀전인 12월 16일 히틀러는 ‘독일의 어머니’를 위한 특별시상식을 거행하고 자녀를 많이 낳은 순수한 독일여성들에게 (3 내지 8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들에게) 그 공로를 치하하면서 “독일의 빼어난 자녀들이 곧 독일의 어머니인 여러분들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날 독일의 경제력과 기술개발에 대한 대폭적인 선전이 있었다. “루르(Ruhr) 지방에서 캐낸 석탄량은 금년에 무려 436,711톤에 달했으며 헤닝스도르프의 아·에·게(AEG-Henningsdorf) 회사는 전동 기관차를 5,000번째 생산했는데 E19로 명명된 이 초현대식 기관차는 시속 225km의 성능을 내고 있으며, 북부 항구도시인 킬(Kiel)에서는 40대의 전투기들이 이착륙(離着陸)할 수 있는 초대형 항공모함 〈체펠린 공작(Graf Zeppelin)〉이 제작 되었는데 전세계에서 독일이 처음 보유하고 있는 해군함이며....”
훌륭한 자녀들을 낳아 교육시킨 ‘독일의 어머니’의 영광이 앞으로 어떠할 것인가를 스스로 짐작케 하기 위한 선전이었다. 유대인계열의 어머니들에게는 이러한 영광이 해당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직책을 박탈 당한 유대인 교수들과 연구원들은 대학이나 공공시설의 도서관을 일체 사용치 못하며, 신형교통수단의 사용도 금지한다는 내용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날의 ‘독일의 어머니’ 표창의 행사는 끝났다. (참고문헌: P. Auer, Von Dahlem nach Hiroshima, Berlin 1995)
이러한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 베를린 서남부 지역인 달렘(Dahlem)에 위치한 황제-빌헬름-연구소(Kaiser-Wilhelm-Institut)에서는 두명의 독일학자들이 무엇인가 중요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토 한(Otto Hahn)과 슈트라스만(Strassmann)은 바로 이날 우라니움 핵분렬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심상치 않은 ‘달렘(Dahlem)의 섬광(閃光)’이 인류역사에서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는 이 일을 감행한 당사자들인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은 알지 못했다. 물론 이날 ‘독일의 어머니’들을 표창하면서 ‘영광의 어머니’가 되리라고 격려했던 히틀러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의 ‘달렘의 섬광’은 오늘날과 같은 핵에너지 시대를 낳은 ‘독일의 어머니’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핵에너지 내지는 원자력이라고 하는 말은 이미 오래전부터 꿈꾸어 온 전세계의 물리학자들의 이상(理想)이었다. (참고문헌: F. Herneck, Bahnbrecher des Atomzeitalter, Berlin 1984).
1904년 10월 4일 카나다의 러더포드(Rutherford)교수가 미국의 센트루이즈(St. Louis)에서 〈라디움에 관하여 (On Radium)〉란 제목으로 강의 했을때에 여기에서 처음으로 원자력에 대한 개념이 언급 되었다. “1 파운드의 라디움에서 방출되는 에너지를 폭발 시킬 경우 무려 10,000마력의 동력에 해당되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 러더포드교수는 인간이 이러한 에너지를 가지고 무기를 만든다든가 또는 실험실에서 단 하나의 경미한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에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되지 아니하는 엄청난 피해가 생겨날 것이 심히 우려 된다고 부언 했었다. 그의 제자인 소디(Frederick Soddy)박사는 1912년에 〈물질과 에너지 (Matter and Energy)〉라는 책자를 펴내면서 원자력이 평화로운데 사용 되는 것보다도 전쟁과 같은 대규모의 파괴수단에 사용될 가능성에 우선적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 했다. 영국의 역사가이며 공상과학소설가인 웰스(H.G. Wells)는 이 두 학자들의 학설에 영향되어 1913년 공상과학소설 〈자유롭게 된 세계(The World Set Free)〉를 썼다. 이 소설에 의하면 1956년 7월 2일 유럽에는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는데 여기에는 핵무기들이 사용된다. 무려 200여개의 유럽의 도시가 핵폭탄으로 인해 파괴되고 피해를 입게되는데, 한 세대가 남짓하여 이 소설에 예언된 바로 그런 처절한 모습들을 우리는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몸소 체험케 되었다.
20세기초엽에는 전세계의 물리학자, 화학자들이 새로운 영역인 그리고 무한한 에너지의 원천인 핵분렬의 원리를 연구해내는 일에 모두들 과열되어 있었다. ‘핵물리학의 뉴톤’이라 일컬어진 러더포드교수는 알파(α), 베타(β)의 두종류의 방사선을 처음 이야기했는데, 그의 설명에 의하면 베타(β)선은 전자(電子)들의 방출인 이른바 음극선(陰極線: Kathodenstrahl)으로서 이때의 전자들의 움직이는 속도는 초속 200,000km이다. 알파(α)선을 이루고 있는 미립자(微粒子)는 전자보다는 무겁기 때문에 초속 15,000 내지는 20,000km로 라디움원자로부터 방출되어 나온다.
신비에 싸인 원자의 핵속에 들어있는 미지의 에너지를 찾아 내려면 이론적인 핵분렬을 우선 현실화 하지 않으면 안된다. 러더포드교수는 비교적 쉬운 방법으로 얻어질 수 있는 알파(α)선을 투입하여 핵분렬을 시도해 보았다. 알파(α)선은 9백만 전자볼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볼트(Elektronenvolt)〉는 통상적인 전압인 볼트(Volt)가 아니다. 억만분의 일 센티메타에 해당하는 원자는 또 이에서 일만분의 일에 해당하는 원자핵을 가지고 있고 그 주변에는 전자들이 돌고 있다. 이러한 미립자의 세계에서의 전압의 단위가 전자볼트이다. 원시적이긴 하지만 결코 적지않은 경비를 투입해 설치한 일종의 양성자 가속장치(Proton Synchrotron)와 유사한 장비들을 가지고 실험했으나 러더포드교수는 결국 9백만 전자볼트의 힘으로는 핵을 분렬시킬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즉 원자핵을 이루고 있는 미립자들의 결합은 그 이상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그의 실험을 통해 분명해진 셈이다. 그러나 러더포드교수는 한개의 양성자로 되어있는 수소의 원자핵을 알파(α)선의 속도로 가속시켜 라디움의 원자핵에 투입하게 되면 핵분렬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했으나 현실적으로 이런 실험은 불가능했다. 초속 20,000km로 수소의 원자핵을 가속 시키기 위하여는 실지로 우리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전기의 수백만 볼트를 발전해 충전하는 기술이 먼저 개발되어 있어야만 했다.
러더포드의 이와같은 가설을 실천에 옮겨보려는 몇명의 젊은 학자들은 1927년초 알프스의 해발 1,700m 고지에 위치한 게네로소(Generoso) 산에다 피뢰침과 기계등을 설치하여 번개칠때의 전압을 가지고 초고압의 전기를 충전하려 시도 했었다. 그중에 특별히 더 모험을 건 젊은 학자 한명이 여기에서 숨졌다고 하는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자 오토 한(Otto Hahn)은 “미래의 에너지인 원자력에 대한 의문”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신문에 발표했다. “원자의 핵을 분렬하여 여기서 방출되는 에너지를 얻겠다고 그보다 더 큰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아직 때가 이르기는 하지만 원자와 같은 미립자의 세계에 통용되는 원리와 그 세계의 에너지를 가지고 핵을 분렬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이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라디움이라는 원소를 발견한지 겨우 30년이 경과 했다. 앞으로 적어도 30년이 지나야 우리의 연구의 꿈은 현실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러더포드교수의 이론은 계속 연구되어 헬리움의 핵이나 중수소의 핵을 가속시켜 알파(α)선의 속도로 라디움 원자핵에 투입하는 방법이 점점 더 구체적으로 모색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와같은 방법의 모색은 핵분렬을 위하여서는 한낮 무모한 수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핵분렬과 여기로부터 방출되는 환상적인 에너지를 얻고 싶은 간절한 소원으로 수많은 학자들이 심혈을 기우리던 중, 현대 핵물리학에 있어서는 드믈게 나타나는 ”축복의 해(Annus Mirabilis)"라고 하는 1932년이 되었다.
오토 한(Otto Hahn)과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는 1932년 5월 16일에서 19일 사이에 독일의 뮌스터(Muenster)에서 19세기의 열물리학자 로버트 분젠(Bunsen)을 기념하는 학술제에 러더포드와 그의 제자 채드위크(Chadwick) 그리고 덴마크 핵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등을 초청했다. 같은 원소에서 원자핵의 질량이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경우와 동위원소의 출현등에 대한 의문이 이 학술제에서 풀리게 되었다. 이것은 중성자(中性子)에 대한 발견이다. 핵분렬과 핵연쇄반응(Kettenreaktion)을 가능케 하는 중성자(Neutron)에 대한 발견이 핵물리학에 있어서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 . ‘축복의 해’에서 또하나의 특기할 사항은 바로 이 해에 리제 마이트너에 의해 알려진 내용으로서 우주선(宇宙線: Kosmische Hoehenstrahlung)안에는 양전자(陽電子:Positron 또는 Anti-Elektron)가 들어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 발견은 후에 반양자(反陽子:Anti-Proton), 반원자(反原子:Anti-Atom) 또 나아가 반물질(反物質:Anti-Materie)등 미래의 핵물리학에 있어서 새로운 장(章)을 여는 개념들을 입증하게 되었다. 최근 1996년 1월 15일 유럽의 핵물리학연구쎈타(CERN-Geneve)에서 반물질의 초보단계인 반수소원자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면 수소원자의 물질과 반물질의 융합과정에서 100%의 핵에너지를 얻어낼 수 있을뿐만 아니라 이 원리에 의하면 부산물은 전혀 발생하지 않게 된다. 이때의 핵에너지는 현재 중수소의 핵융합과정에서 방출되는 것의 250배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Der Spiegel am 15. Januar 1996)
오래전부터의 숙원이었던 핵분렬은 무전하(無電荷) 상태인 중성자(中性子:Neutron) 하나로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성자로 모든 원자핵을 분렬 시킬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미립자 가속기인 싸이클로트론(Cyclotron)이 개발 되었는데 예컨데 로렌스(Lawrence)의 입자 가속기는 메가(Mega)에서 기가(Giga) 전자볼트까지 올릴수 있게 되어 핵에너지 개발에 큰 공헌을 이룩했다. 그에 의하면 약 100그램의 리티움(Lithium)을 가지고 최근 개발된 싸이클로트론으로 핵분렬을 시키게 되면 비행기와 무기와 군인들을 실은 항공모함이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게 된다고 했다. 이와같은 ‘축복의 해’에는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상과학소설책들이 쏟아져 나와 천년뒤에나 실현될 이상향(理想鄕)이 곧바로 이듬해로 다가 온 것 같은 설레이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1933년의 유럽의 역사는 정반대의 길로 나갔다.
1933년 1월 30일 독일에는 나치정권이 들어서고 그해 4월부터는 바이마르(Weimar) 공화국이 14년만에 세계사의 무대에서 막을 내린만큼 히틀러는 마음놓고 독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은 오토 한(Otto Hahn)과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의 혁혁한 공헌으로 인해 핵물리학의 요람지(搖籃地)로 알려지고 점차 학문의 중심지가 되면서 이곳에서 발표되는 학적인 논문들은 그대로 세계사의 방향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황제-빌헬름-연구소가 있는 달렘(Dahlem)은 ‘독일의 옥스포드’로 불려졌다. 전세계에 알려진 오토 한(Otto Hahn)과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의 명성으로 인해 벨지움, 홀랜드, 이탈리아, 영국, 카나다, 스웨덴, 쏘련, 미국 그리고 일본에서 젊은 학자들이 이 ‘독일의 옥스포드’로 유학을 오고 있었다. 1930년대에 ‘일본의 오토 한’이라 불려진 아사다 박사가 이곳에서 공부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방사능과학은 물론 핵무기개발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또 이미 닐스 보어 밑에서 유학하고 동경으로 돌아가 핵물리학을 강의했던 니시나박사도 일본의 전쟁성 사업의 일환으로 핵무기개발에 참여 했었다. 그해 3월에 나치독일의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고위관직과 법조계 인사들의 해금조치에서 눈에 들어나게 되자 젊은 유대인 물리학자 두명이 핵물리학에 있어서는 희망의 도시였던 베를린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은 아인슈타인(Einstein)과 헝가리 태생의 스칠라드(Szilard)였다.
아인슈타인에게는 미국여행에서 다시 독일로 돌아올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는 그가 1933년초 새로 들어선 나치정부와 히틀러에 대해 이미 초창기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서적들이 훔볼트대학 앞에서 불에 태워졌으며 당시의 ‘베를리너 로칼 안차이거(Berliner Lokal Anzeiger)’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에 관한 희소식 - 그가 독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의 상대성원리는 우리에게는 필요치 않다. 한 국민의 빼어남과 애국심에 대해 항상 비판했던 아인슈타인씨와는 정반대 되는 이념이 지금 독일에는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씨의 장래문제는 이곳에서는 매우 어둡다.” 이와 동시에 그의 집과 연구소가 몰수 되었고, 심지어는 은행구좌도 압수되었다. (참고문헌: W.R. Clark, Albert Einstein, Leben und Werk, Muenchen 1986).
스칠라드의 경우는 그의 불길한 예감 때문에 일단 베를린을 떠나 빈(Wien)으로 여행 갔다가 그곳에서 영국으로 이민간 것이다. 폰 라우에(Max von Laue)교수와 리제 마이트너박사 밑에서 박사학위를 방금 끝낸 그는 빈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자기 선생인 마이트너여사께로 보냈다. “베를린 정부청사 라이히스탁(Reichstag)의 방화사건이 있은 2월달 저는 독일을 떠날 결심을 가졌습니다. 얼마나 신속히 세상이 바뀌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도착한 4월 1일 기차가 텅텅 비어 있었는데 사흘이 지난 오늘 독일로부터 이곳으로 오는 기차들은 만원이 되고 있지요. 승객들은 거의가 다 독일 땅을 떠나려는 유대인들 입니다. 모두들 나치관원들에 의해 엄중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벌써 이곳에서도 몇명의 유대인 교수들이 강압된 사직원을 대학에 제출했습니다. 지금은 한 두명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앞으로 이 사건이 어떻게 발전될지 심히 우려 됩니다. 저는 곧 이곳을 떠나려고 합니다.” (참고문헌: L. Szilard, The Voice of the Dolphins. New York 1961) 이러한 일들이 독일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동안 오토 한(Otto Hahn)은 미국의 저명한 대학들을 두루 방문코 수개월동안의 순회강연을 마치고 4월말이 되어서야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제2의 ‘큐리부인’이라 불려진 리제 마이트너여사는 유대인의 신분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독일의 옥스포드’인 달렘에 남아 있을 것을 오토 한(Otto Hahn)에게 확실히 했다.
리제 마이트너의 영향 아래에서 경시할 수 없는 젊은 핵물리학자 두명이 생겨났는데, 한사람은 자기의 조카인 오토 프리쉬(Otto Frisch)였고 또 한사람은 델브뤼크(Ludwig Delbrueck)였다. 프리쉬는 함부르그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중 미국의 록펠러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로마대학의 유명한 핵물리학자인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에게로 갔다. 그도 역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로마에서의 중대한 연구를 마친 후 독일로 돌아오지 않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델브뤼크는 마이트너여사 밑에서 스칠라드와 함께 박사학위를 받고는 계속하여 달렘 연구소에 남았다. 1934년 그는 마이트너여사의 지도를 받아 〈원자핵의 구조(Aufbau der Atomkerne)〉라는 책을 저술 했는데 여기에서 당대의 원자핵물리학의 제반 이론들을 총정리 하고나서 엔리코 페르미가 그의 실험에서 발견했다고 하는 ‘원소 93’ 일명 “우라니움주변원소(Transuran: 그당시의 원소주기표에는 가장 무거운 원소로서 92번째의 우라니움이 제일 마지막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원소 93’은 이러한 우라니움 다음에 위치하므로 우라니움주변원소(Transuran)라 불렀다)”에 대하여 많은 회의를 품고 있다고 서술했다. 델브뤼크도 나치정부를 비난 하다가 달렘의 연구소에 사직원을 내고 베를린을 떠나게 되었다.
1918년 12월 10일 물리학분야에서는 플랑크(Max Planck)에게, 화학분야에서는 하버(Fritz Haber)에게 각기 노벨상이 수여되었다. 이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 때에는 전 독일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황제-빌헬름-연구소의 운영을 플랑크가 맡았고 베를린 달렘의 황제-빌헬름-연구소는 하버가 소장직을 맡고 있었다. 하버박사가 유대인이었음으로 하여 달렘의 연구소에는 오토 한(Otto Hahn)과 몇명의 젊은 조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유대인 학자들로 연구팀이 구성되어 있었다. 1933년 나치정부에서는 강압적으로 하버박사의 퇴임을 요청했다. 리제 마이트너와 오토 한은 당시 이탈리아로 요양차 여행 갔던 플랑크박사를 급히 베를린으로 돌아 오도록 편지로 권유했다. 하버의 문제를 위해 플랑크는 직접 히틀러와 만나서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히틀러는 플랑크에게 자신은 유대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하버 박사를 해고 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은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위험스럽게 여기는 것 뿐이라고 답했다. 자고로 독일문화에 크게 공헌한 학자들은 대다수가 유대인 가정에서 비롯 되었으니 이를 고려하여 하버와 같은 우수한 학자는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특별 우대해 주기를 바란다고 또 한번 플랑크는 히틀러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히틀러는 바로 이때에 큰소리를 지르며 일어나서는 “유대인은 유대인 입니다. 모든 여건을 유대인들은 자기네들끼리만 엮어 갑니다. 보십시요! 유대인들에게는 다른 민족들이 모두 열등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러한 유대인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후로부터는 플랑크는 유대인에 관련된 문제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함구무언 할 수 밖에는 없었다. (참고문헌: M. Planck, Wissenschaftliche Selbstbiographie, Leipzig 1948).
1933년 10월 23일 달렘의 황제-빌헬름-연구소소장인 프릿츠 하버(Fritz Haber)박사가 사표를 내고 직원들에게 고별의 인사를 했다. 나의 주선으로 레오폴드 코펠(Leopold-Koppel) 재단은 황실의 건축가인 이네(Ihne)씨의 설계와 함께 이 아름다운 황제-빌헬름-연구소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지금까지 22년을 소장으로 일해 왔습니다. 평화로운 때에는 인류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그리고 전쟁시에는 독일을 지키기 위해 나는 한결같은 충성을 바쳐왔습니다. 내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현재의 관인사법에 저촉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동료들이 예외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한 것은 지극히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로서 스스로 이 연구소를 떠날 것을 결심했음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지금까지 성공리에 연구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여러 동료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아낌없는 창의력의 발동이었다고 생각하고 감사를 드리는 바 입니다. 새로 부임되는 소장님을 모시고 계속하여 훌륭한 연구업적을 쌓아 가시기 바랍니다.” (참고문헌: 50 Jahre Kaiser-Wilhelm-Gesellschaft und Max-Planck-Gesellschaft zur Foerderung der Wissenschaften 1911-1961, Goettingen 1961).
그후 1934년초 독일을 떠나 스위스를 경유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서 정신적인 쇼크로 인해 하버박사는 운명하게 된다. 이러한 일이 생겨난 직후 마이트너여사에게 독일내에서의 교수직이 박탈 당하게 되자 연구소의 젊은 유대인학자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달렘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베를린에서 있었던 하버박사의 추모식에는 부인들과 소수의 학자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히 거행되었다. 이미 사전에 유명인사들의 참석은 나치독일당국으로부터 암암리에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독일내에서 활약했던 유대인 내지는 유대인계열의 핵물리학자들의 대다수가 영국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고 순수한 아리안 혈통의 독일인으로 인정된 학자들만이 연구소에 남을 수 밖에는 없이 되었다.
한편 오토 프리쉬의 연구를 지도한 함부르그대학의 하르테크(Paul Harteck)교수는 이러한 와중에서도 영국 캠브리지로 건너가 러더포드교수를 찾아갔다. 이때에 러더포드는 영국의 황실로부터 귀족으로 추앙을 받아 ‘로드(Lord)'라는 칭호와 함께 캠브리지대학의 카벤디쉬(Cavendish) 연구소를 도맡아 영국에서는 핵물리학의 독보적인 지위를 이룩하고 있었다. 올리판트(Oliphant), 하르테크(Harteck), 러더포드(Rutherford) 세사람의 이름으로 발표된 1934년의 논문 “중수소를 가지고 고찰한 원소의 변환효과에 관하여 (On Transmutation Effects Observed With Heavy Hydrogen)”는 이른바 핵융합(Kernfusion)의 원리에 대한 세심한 고찰로서 훗날 수소폭탄설계의 기초가 되었다. 하르테크교수는 이와같은 지식을 가지고 다시금 함부르그로 돌아왔다.
이제 핵반응으로부터 환상적인 에너지를 얻어내는 원리는 중성자 또는 가속된 양성자에 의한 핵분렬과 중수소에서 생겨나는 핵융합과정에서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온 세상의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물질(Materie)과 반물질(Antimaterie)의 융합과정에서 생겨나게 되는 엄청난 차원의 에너지와 여기로부터 방출되는 감마선 효과에 대해서는 그 당대의 학자들은 알지 못했다. 다만 어떻게 핵을 분렬시키는가 또는 어떤 방법으로 핵을 융합시키는가 하는 기술적인 문제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때에 오토 한과 마이트너여사는 쏘련의 과학원으로부터 주최하는 국제학술제에 초대되어 레닌그라드의 라디움 연구소와 모스코바의 학술원에서 특별강의를 맡게 되었다. (참고문헌: K. Hoffmann, Otto Hahn, Schuld und Verantwortung, Berlin 1993).
유대인들에게는 일체의 특권이 허락되지 아니했던 나치정부 산하에서 마이트너여사는 정상적인 쏘련으로의 여행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때에 렌트겐 전문 간호원으로 자원하여 오스트리아의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해 전선에서 근무 했다는 조건을 가지고 오토 한은 정부로부터 예외적인 여행허가를 얻어 낼 수 있었다. 1934년의 쏘련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마이트너여사는 제자인 슈트라스만과 함께 페르미의 연구업적과 졸리오-큐리부부(Joliot-Curie: 이들은 유명한 마리 큐리부인의 딸과 사위이다)의 그간의 논문발표한 것들을 독어로 번역하여 분석했다. 1935-37년의 2년동안에 한-마이트너-슈트라스만(Hahn-Meitner-Strassmann)등 세사람의 연구팀이 쌓은 연구업적은 실로 눈부신 공헌이었다. 발표된 많은 논문들 중에서 핵반응과 동위원소에 관한 여덟개의 논문들은 전 세계의 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목을 다시금 달렘 곧 ‘독일의 옥스포드’에 집중 시키게 했다. 그런데 이른바 ‘독일의 옥스포드’는 이름뿐 나치독일의 유대인들에 대한 추방으로 인하여 확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였다.
1917년 부터 오토 한(Otto Hahn)과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의 공동연구에서 대두된 ‘방사선화학(Radiochemie)’이란 개념은 1932년 중성자의 발견 이후로는 ‘원자핵화학(Kernchemie)’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제일 처음으로 우라니움 원자핵(U238)에다 중성자를 충돌시킨 이탈리아의 핵물리학자 페르미(Fermi)가 주장한 ‘인공동위원소’ 또는 ‘우라니움주변원소(Transuran)’라고 하는 것은 그때 당시의 원소주기표에는 없는 원소로서 양자(陽子:Proton)가 하나 더 많은 우라니움의 동위원소(93)이다. 연금술(鍊金術)자들에게서나 있을 법한 일련의 해괴망칙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하여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는데, 세계의 곳곳에서 페르미의 실험과 같은 것이 반복되었고 이로부터 얻어낸 나름대로의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논문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나타나고 있었다. 한-마이트너-슈트라스만 연구팀은 이러한 핵반응으로부터 새로 탄생되는 원소들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각기 에카-레늄(Eka-Rhenium), 에카-오스뮴(Eks-Osmium), 에카-이리듐(Eka-Irridium), 에카-플라틴(Eka-Platin) 등으로 명명했다. 그중에서 에카-레늄은 오늘날 넵투늄(Neptunium Np)으로 불려지며 에카-오스미움은 플루토늄(Plutonium Pu)으로 불려지고 있다.
결국 우라니움 핵분렬에 성공치 못한 페르미(Fermi)는 중성자를 저속으로 하여 핵에 충돌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빠른 속도의 중성자의 충돌은 핵을 분렬시킬 여유가 없이 오히려 핵안으로 들어가 예기치 아니한 반응을 일으켜 동위원소들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연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페르미는 우라니움을 파라핀액 속에서 중성자와 충돌시킴으로써 중성자의 속도를 줄일 수 있음을 알아냈다. 이것은 파라핀액 속에 들어있는 수소원자들이 중성자의 움직임에 제동을 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페르미의 이와같은 연구결과로 인해 중성자의 속도는 수소원자를 가지고 조절할 수 있다는 새로운 원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중수(重水: Deuterium)에 의한 원자로(原子爐: Kernreaktor)설계가 핵에너지를 얻기 위한 전초작업임이 만천하에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연적인 우라니움광석 속에 들어있는 우라니움원자(U238)만으로는 아무리 중성자의 속도를 조절하여 핵에 충돌 시켜도 핵이 분렬되지 않는다는 것은 1938년 ‘달렘의 섬광’이 생겨난 이후에야 알려진 사실이다. (참고문헌: R. Rhodes, The Making of the Atomic Bombe, New York 1986)
1933년 영국으로 건너간 스칠라드(Szilard)는 그때 당시의 모든 연구결과를 토대로하여 핵폭탄을 제작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중성자에 의한 핵분렬이 성공만 할 수 있다면 이때에 생겨나는 에너지와 함께 새롭게 방출되는 중성자로 인해 자동으로 또다른 원자핵들이 분렬 되면서 기하급수로 중성자의 수가 늘게 된다는 이른바 핵분렬에 있어서의 연쇄반응에 대한 가설을 내어 세웠다. 이 생각과 함께 스칠라드가 가장 근심했던 사실은 자기의 선생인 폰 라우에(Max von Laue)와 마이트너여사 그리고 오토 한, 하르테크, 하이젠베르그 등의 핵물리학의 거성(巨星)들이 아직 독일판도에 남아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거기에 나치독일은 단순한 유대인 탄압만이 아니라 세계정복의 꿈을 이룰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핵폭탄을 만들게 될 것이 틀림 없으리라고 그에게는 여겨졌다. 그래서 스칠라드는 영국정부에 핵폭탄을 만드는 일에 주력하여 독일보다 먼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서신과 함께 연구계획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에서도 러더포드와 채드위크등의 대학자와 그의 제자들이 있어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한 이름모를 유대인 청년이 망명한 신분으로 찾아와 도움이 필요하여 초조하게 서둘러대는 정도로만 해석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응은 실로 냉담했다.
1935년도 미국에서는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Niels Bohr)교수가 초청되어 뉴욕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이즈음 핵분렬에 대한 제반 이론이 대두될때에 그의 원자핵에 대한 고찰 중 또 한가지의 새로운 원리가 알려졌다 원자핵의 표면은 마치도 수면(水面)과 같아 표면장력(表面張力)의 효과와 비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방울이 장해물과 마주치면 갈라지듯이 원자핵도 그 성격만 잘 이해하면 중성자를 가지고 쉽게 분렬시킬 수 있다고 하는 이론이다. 원자력을 얻기 위한 핵분렬의 원리와 방법론 등이 이처럼 무르익어 가고 있던 1938년 아직 아무도 핵분렬에 성공했다고 하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론이나 원리가 실현되기 위한 반드시 필요한 그 무엇이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인가?
1937년 7월 14일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여사는 오토 한(Otto Hahn)에게 휴가를 떠난다고 말하고 독일 땅을 떠났다. 그의 후임으로 빈(Wien)대학의 핵물리학자 마타우흐(Josef Mattauch)박사가 베를린의 황제-빌헬름-연구소로 부임되어 왔다. 이즈음 오토 한은 이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한-마이트너-슈트라스만(Hahn-Meitner-Strassmann)의 연구팀은 마이트너여사 없이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 둘이서만 우라니움 원자핵의 분렬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1938년 12월초부터 설레이는 분위기에서 기계들이 책상위에 조립되기 시작했다. 오토 한의 이 실험은 우라니움을 가지고 라디움 동위원소를 만들고저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일이 성공하게 되면 비록 원소들의 미립자의 세계이긴 하지만 인류역사에 있어서의 오랜동안의 숙원인 연금술(鍊金術)의 이상이 실천되는 것이다. 모든 금속에 있어서의 그 원소를 본질에 있어서 변환 시킬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라니움 광석 안에는 대부분이 무거운 원소인 U238 이 들어있고 약 0.7 퍼센트의 가벼운 원소인 U235가 들어있다.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은 페르미(Fermi)와 같은 실패를 하지 않으려면 우선 가벼운 원소를 채취해 내어 이 원자핵(U235)에다 저속중성자를 충돌 시켜야 겠다는 생각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거의 두 주일동안은 극소량의 이 가벼운 원소를 채취해내는 작업에 몰두 했었다. 이 작업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동위원소란 화학적으로는 동질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오직 원자핵의 구조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것이기 때문에 화학적인 방법으로는 분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베릴리움을 혼합한 1 그램의 라디움으로부터 중성자를 채취해 파라핀액 속에서 우라니움 원자핵(U235)에 충돌시켰다. 가이거-뮐러(Geiger-Mueller) 방사능계수기에 방사선이 방출되고 있음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우라니움은 없어지고 바리움(원소기호 56)과 크륍톤(원소기호 36)의 두개의 새로운 동위원소가 생겨났다. 또 동시에 새로운 중성자들이 방출되었다. 즉 U(92) + 1 Neutron = Iso-Ba(56) + Iso-Kr(36) + Neutron. 우라니움 원자핵(U235)이 이러한 결과에 의하면 두개의 핵으로 분렬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에 가이거-뮐러 계기에는 에너지가 방출되고 있음이 나타났다. 물론 육안으로는 작은 모래알 하나가 움직인 정도에 지나지 않아 에너지의 방출이 실험실내에서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우라니움의 원자핵이 분렬된 순간 미립자의 세계에서는 2억만 전자볼트라고 하는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된 것이었다.
그러나 핵에너지의 방출에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성공시킨 이 두 학자들은 새로 생겨난 동위원소에만 관심을 두어 핵이 분렬된 사실도 또 그 순간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한 것도 또 새롭게 중성자가 방출된 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실로 역사적인 실험을 감행한 그리고 스칠라드나 페르미 같은 학자들이 학수고대(鶴首苦待)했던 성공을 거둔 이 순간에 이들의 관심은 다른데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달렘의 섬광’ 이라하여 세세토록 전해지게 된 이 실험에서 얻어진 가장 의미깊은 결과에 대하여는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만 셈이 되었다. 실험전에 오토 한이 원했던 동위원소는 라디움이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동위원소는 화학적인 실험에 의하면 바리움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는 제자인 슈트라스만에게 “바리움의 성격을 가진 라디움이란게 가능한가?”고 물었다. 슈트라스만은 “바리움의 성격을 가진 라디움이 아니라 그대로 바리움이 생겨난게 아닐까요?” 하고 오히려 반문했다. 오토 한은 바로 이날 스웨덴에 가 있는 마이트너여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이러한 불가사이한 연구결과에 대한 해명을 얻기 위해 편지를 발송했다.
리제 마이트너박사가 스웨덴의 괴데부르그근교에서 받은 편지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었다. “오늘 아주 이상스런 실험의 결과가 나타나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이 실험에 함께 하셨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나와 슈트라스만은 지금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우라니움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켰을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아니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 입니다. 새로 생겨난 동위원소들의 반감기(半減期)를 조사하고 또 화학분리방법에 의해 동위원소들의 성격을 규명한 결과 라디움의 동위원소는 바리움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이상스런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또하나의 다른 동위원소는 전혀 예기치 아니했던 마수리움(Masurium: 당시로는 새로 발견된 동위원소였는데 오늘날에는 테크네튬(Technetium)이라 부른다)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의 실험이 잘못된 거나 아닌지요?” 스웨덴에 가 있는 마이트너여사와의 베를린으로부터의 편지교환은 약 한주일 동안의 시차가 있었다.
오토 한의 마음은 한없이 착잡해지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실험이 잘못되지나 아니했나 또는 실험자체가 실패로 끝난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오토 한(Otto Hahn)은 혼자서 아직 기계들이 설치된 채 어수선한 책상위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밝은 식견을 주시며 침착한 자유를 주시옵소서. 그릇된 연구를 냉철하게 또 가차없이 증오하게 하옵소서. 자만하지 말게 하옵시며 또한 낙망으로 도중에서 포기하지 말게 하옵소서. 지금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칭찬 받을 생각도 없이 일했아오니 앞으로도 휴식할 생각은 결코 하지 않겠나이다. 지금까지 연구하고 고찰해온 모든 노력이 진실된 결과로 귀결되게 하소서. 성령의 불꽃으로 (Mit heiligem Feuer) 나의 과오를 태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지금 나에게 힘을 주소서, 눈이 멀어 당신을 맹목적으로 믿지 아니 하도록.... 아 멘- .” 이러한 기도가 있은 후 오토 한은 슈트라스만과 함께 연구결과를 논문의 형식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참고문헌: O. Hahn, Mein Leben, Muenchen 1968).
이때에 마이트너여사는 자기 조카 프리쉬(Frisch)와 함께 스웨덴의 괴데부르그 근교에 있었다. 베를린으로부터 이 역사적인 소식에 접한 마이트너여사는 오토 한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서야 베를린에 도착한 이 편지에는 의문이 풀린 내용은 없었으나 실망한 아들에게 항상 위로와 용기를 주는 어머니와도 같은 음성이 표현되어 있었다. “한(Hahn) 박사님! 실험의 성공에 축하 드립니다. 그러나 라디움 연구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바리움의 성격을 가진 라디움의 동위원소를 얻었다는 것 말입니다. 우라니움의 원자핵이 파손될때에 그런 일이 생겨난다는 것은 포착하기 어려운 일 입니다. 물론 핵물리학의 분야는 우리의 지식보다 넓기 때문에 지금까지 알려진 지식으로 불가능 하다고 생각된다고 하여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또 이해가 안되는 결과를 얻었다고 하여 실험이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요. 아마도 무슨 중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마이트너 박사의 편지는 다시금 오토 한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달렘의 섬광’에서 생겨난 불가사이한 결과는 지상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다. (참고문헌: P. Rife, Lise Meitner. Ein Leben fuer die Wissenschaft. Duesseldorf 1990).
프리쉬 박사는 마이트너여사를 스웨덴에 남겨둔 채 혼자서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교수를 찾아가 오토 한의 편지를 내어 보이며 베를린에서 일어난 사실을 소상히 보고 했다. 한참동안 상념에 잠겨있던 보어교수는 “이 동위원소는 바리움과 크륍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우리들은 무얼하고 있었는가? 이런 중대한 사건이 베를린에서 발생했는데 잠을 자고 있었는가?” 하고 말하고는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의 이 실험은 우라니움의 원자핵분렬에 성공한 것이고, 엄청난 핵에너지가 발생했고, 중성자가 새로 방출되어 또다른 핵분렬이 가능하다고 하는 자연속의 비밀이 입증된 것이라고 매우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1939년초에 보어(Bohr)교수는 미국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그는 강의 도중 우라니움의 핵분렬이 최근 베를린의 오토 한에게서 성공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한참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고조(高潮)되고 있던 12월 22일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은 연구결과를 학술지 〈자연과학(Naturwissenschaft)〉에 발표할 준비를 서둘러 밤을 지새이며 집필을 끝냈다. 이 학술지의 발행인이요 편집인인 로스바우트(Paul Rosbaud)가 이날 핵시대의 서장인 이 원고를 가지고 출판사로 가서 이미 편집이 끝나 인쇄준비에 들어가 있는 잡지의 다른 원고와 바꾸어 1939년 1월호에 출판 해냈다. 닐스 보어교수가 미국에서 ‘달렘의 섬광’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한 때와 거의 동시인 1939년 1월 6일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의 논문이 〈자연과학(Naturwissenschaft)〉지에 발표되었다. “중성자를 우라니움의 원자핵에 충돌 시켰을 때 생겨난 알칼리성금속에 대한 고증 및 그 성질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이 논문이 발표되면서 달렘에서의 핵분렬실험의 소상한 경위가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핵분렬’이나 ‘핵에너지’라는 말은 전혀 표현되지 않았다. ‘핵분렬’과 ‘핵에너지’ 등에 대해서는 러더포드와 함께 ‘핵물리학의 대부’로 알려진 닐스 보어에 의해 공식적으로 언급 되면서 유럽과 미주에 ‘달렘의 섬광’은 곧 핵에너지시대를 여는 관문이 되었다고 만천하에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1938년 12월 22일 ‘달렘의 섬광’이 글로 표현된 바로 그날에는 전례없는 강추위가 몰아쳤다. 핵에너지시대의 위험을 누구나 느끼고 있는 오늘날, 다시 생각해 보면 이날 ‘달렘의 섬광’이 불러온 강추위는 곧 인류역사에 있어서 ‘핵(核)겨울’이 온다는 것을 말해 준 소식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핵(核)겨울’의 어두운 운명에 대하여는 이를 예견하는 사람도 또 우려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아직은 없었다.
출처 : 나치독일의 어제와 오늘 - 金政陽 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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