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양-나치독일의 어제와 오늘

나치독일의 어제와 오늘 - 6. 남극의 독일영토 : 노이슈바벤란드(Neuschwabenland)

기른장 2023. 6. 19. 21:17

지금까지 나치독일의 특히 히틀러의 이념은 새로운 세계질서를 건립하겠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바이에른의 일루미나티 그리고 ‘신 세계질서(Novus Ordo Seclorum NOS)’와 같은 비밀지하조직과 연관이 있음을 고찰했다. 그리고 짧은 기간동안에 그렇게도 많은 과학의 발전을 이룩함과 초인간적인 신형무기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을 설명하기 위해 나치는 분명 외계문명과 연관이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전혀 무근한 것은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교황 요한23세는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 편은 사실은 패배자이며, 승리하지 못한 편은 승리자이다!”라고 말했다. 세계대전에 패배한 독일이 사실은 엄청난 과학과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승리한 자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 연구에서 주목해야 할 사건은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인 1922년부터 비행접시를 개발했고 젯트엔진 등을 사용했었다. 이러한 엄청난 에너지를 전쟁에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면 나치독일은 세계전쟁보다는 지하의 왕국 곧 아리안족들과 만나서 우주의 개발로 나아가려는데 더 큰 관심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툴레-게젤샤프트나 브릴-게젤샤프트의 이념에 의하면 이 지상에서의 전쟁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네들에게는 알데바란(Aldebaran)을 오가면서 우주문명에 공헌하는 일 그리고 지하의 아가르타 왕국과 교섭을 갖는 일이 전쟁보다도 더 높은 관심사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독일화 하는 일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거기에서 폴란드를 침공하고 북부유럽을 장악하고자 한 것은 거기를 통하여 지하의 세계의 아리안족들과 왕래하고자 하는 염원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1873년에 독일의 탐험가 에두아르트 달만(Eduard Dallmann)이 ‘그론란드(Gronland)’라고 하는 기선(汽船)을 타고 항해 하면서 광활한 남극대륙을 발견했다. 그 이후 1910년에는 빌헬름 필혀(Wilhelm Filcher)가 ‘도이취란드(Deutschland)’라는 배를 타고 두 차례에 걸친 남극탐험에 나섰고, 1925년에는 툴레-게젤샤프트의 알베르트 메르츠 박사(Dr. Albert Merz)가 '메테오르(Meteor)'라는 배를 타고 남극을 탐험했었다. 특히 메르츠 박사의 남극탐험의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서 지하의 아가르타왕국의 통로를 찾는 일이었다. 1933년 나치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그의 가장 큰 관심사가 남극대륙에 대한 탐사 및 정복이었다. 루프트한자(Lufthansa) 항공회사와 공동으로 1934년에 ‘슈바벤란드(Schwabenland)'라는 거대한 탐사선(이 배의 동력은 디젤엔진이었다)을 보내서 세 차례의 남극대륙 탐사를 마쳤다.

1938년 12월 17일 히틀러는 ’노이슈바벤란드(Neuschwabenland)'라고 하는 거대한 배를 제조하여 거기에 파싸트(Passat)라고 하는 정찰기와 보레아스(Boreas)라고 하는 대형 탐색 비행기를 싣고 다시 남극으로 떠나 보냈다. 함부르크에서 떠난 노이슈바벤란드는 한달 남짓하여 1939년 1월 19일 남극대륙에 도착했다. 카알 차이스(Karl Zeiss)회사로부터는 보레아스에 특수카메라를 장착하여 비행하는 동안에 무려 11,000개의 사진을 찍었다. 동시에 22km의 간격으로 나치독일의 깃발을 투하했다. 이렇게 하여 한반도의 3배나 되는 면적인 약 60만평방 킬로미터를 나치독일의 영토로 지정했다. 그리고는 그 지역을 탐사선의 이름을 따서 ‘노이슈바벤란드(Neuschwabenland)’라고 명명했다.

당시의 탐사선 노이슈바벤란드의 함장은 알프레드 릿쳐(Alfred Ritscher)였다. 그는 보레아스 탐색비행기가 찍은 사진들을 즉석에서 현상하여 주도면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눈과 빙하로 뒤덮힌 남극대륙에서 아주 평온하고 아름다운 호수를 발견한 것이다. 물이 얼지 않는다고 하면 그곳은 온도가 상온일 것이라는 판단 아래 그는 그 호숫가에다 대대적인 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1939년 2월 14일 히틀러 나치정부는 당시 노르웨이의 영토였던 퀸 마우드 란드(Queen Maud Land)를 ‘노이슈바벤란드’라고 고치고 나치독일의 영토로 선포를 하게 된다. 히틀러는 그 해에 남극대륙의 ‘노이슈바벤란드’에다가 신도시를 건설할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그 신도시의 이름을 히틀러는 ‘노이 베를린(Neu-Berlin)’ 즉 ‘신 베를린’이라고 정한다. 그해 9월 1일 마침내 나치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게 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전쟁중에도 계속하여 노이슈바벤란드를 개발하는 일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1940년초 잠수함 여러대에 건축자재들을 남극 노이슈바벤란드로 실어 날랐다. 물리히-호프만 산맥(Muhlig Hoffmann Gebirge)에서 그때에 엄청난 규모의 굴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약 10만년전의 아트란티스나 레무리아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히틀러는 바로 그것이 지하의 아가르타 왕국과 통하는 통로라고 생각하고 그 산 안에다가 비밀기지 211을 건설하게 된다. 전시임으로 신 베를린이라는 이름보다는 211기지라고 명명하여 비밀을 유지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 위장작전으로 211기지를 아르헨티나의 안덴산맥에도 동시에 건설을 시작했다.

대대적인 건축사업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힘믈러는 남극이주민 부서를 만들어서 우크라이나와 벨로러시아의 독일계 사람들을 대량으로 노이슈바벤란드로 이주시켰다. 전쟁중의 일이라서 많은 일들이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므로 정확한 근거는 찾기 어려운데 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한 가지 사건이 있다. 우크라이나의 볼타바(Voltaba)항구에서 1942년 여름 17에서 25세정도 사이의 젊은 청년들 중에서 건장하게 생긴 남녀들이 나치의 유니폼을 입은채 배에 실려서 남극으로 간 사실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 해 한 해 동안에 무려 5십만명의 우크라이나 청춘 남녀들이 강제노동으로 남극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 사무를 맡았던 이르마 기르제(Irma Gierse)는 히틀러의 주치의였던 멩겔레 박사(Dr. Mengele)의 애인으로서 간호사였는데 힘믈러의 신뢰가 두터웠기 때문에 남극으로 보내지는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의 건강상태를 체크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1946년에 기르제는 나치전범들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기르제는 당시 22세로서 힘믈러의 남극이주민 사업에 열심이었음을 사형당하기 전에 증언했다.

브란덴부르그의 아라도와 체코의 프라하에서 개발한 비행접시들은 설계도면과 기술자들과 부품들 일체를 남극의 비밀기지 211로 전부 옮겼다. 거기에서 하우네부 I, II, III을 수십대를 제조했고, 또 Vril 시리즈의 대량생산도 계속했다. 1944년경 남극의 기지로 이민간 우크라이나의 노동자 수는 백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거기에 감시원 내지는 기술자, 연구원 등의 나치독일의 브레인들이 2,500명이 상주했다.

〈참고문헌〉

Paul Meskil, Hitler's Heir, New York, 2002

Henry Stevens, Hitler's Flying Saucer, Ill. 2003

출처 : 나치독일의 어제와 오늘 - 金政陽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