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투트가르트(Stuttgart) 공과대학에서의 실험들>
1952년에 정부의 수자원관리국에서 빅터의 물에 관한 이론을 검증해 보려고 프란츠 포펠(Franz Popel) 교수에게 몇 가지 실험을 의뢰하였다. 빅터 부자는 이 실험을 위해서 슈투트가르트 공과대학으로 갔는데, 막상 포펠 교수는 탐탁치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실제로 그는 수자원관리국의 쿰프(Kumpf) 국장에게 조언하기를, 빅터의 이야기는 기존 역학법칙들에 어긋나는 것이며 따라서 기술적으로 유익한 결과를 얻지 못할 것 같다고 의견을 피력하였다. 쿰프 국장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어쨌던 실험을 통해서 무엇이 맞는지 검증해달라고 요청하여 공동연구가 시작되었는데, 그들이 첫번째 시도한 것은 물의 흐름을 먼저 고찰해 보는 것이었다.
빅터는 욕조에서 물이 빠져나갈 때의 현상을 본적이 있느냐고 포펠 교수에게 물었다. 욕조 안의 마개를 빼면 물이 깔대기 모양의 소용돌이를 치면서 구멍으로 빠져나가는데, 구멍을 빠져나간 다음에는 물은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포펠 교수는 이내 호기심을 가지게되었으며 그들은 다음을 알아내기 위해 직선형의 파이프와 나선형의 파이프 두 종류를 만들어 실험에 착수하였다.
1) 파이프를 통해 흐르는 물이 ‘다양한 안쪽으로 흐르는 운동’으로 유도될 수 있는가?
2) 파이프의 모양이 이러한 운동의 전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3) 파이프의 재료가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가?
4) 이러한 안쪽으로 흐르는 운동 중에 물에서 분자 구조 변화가 발생하는가?
5) 이러한 안쪽으로 흐르는 움직임이 파이프가 부서지는 것을 방지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가?
장치의 외형은 계란 반쪽모양의 커다란 용기에다 바닥에 구멍을 뚫고 수미터 길이의 유리관을 연결시킨 것인데, 이 바가지모양의 용기 안쪽으로 나선형의 호스를 장착시키고 호스의 안쪽으로 구멍을 뚫어서 이를 통과해 나온 물이 강한 나선형 회전운동을 하면서 용기 밑으로 빠져나가게 만들어졌다. 색깔 있는 물을 사용하면 용기를 빠져나온 물이 유리관의 밑부분까지 소용돌이 형태로 회전하면서 흘러 내려가는 것을 자세히 관측할 수 있는데, 이 때 소용돌이의 중심부일수록 색깔이 진함을 볼 수 있다.
포펠 교수는 흥미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연구에 매달렸다. 그는 보다 정확하게 흐름을 관찰하기 위해, 삼각형의 유리판들을 줄에 죽 매달아 유리관에다 장치하였는데 나선형의 형태로 길다란 프리즘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그들은 모래와 쇳가루 등을 용기내부로 투입시켜보았는데, 놀랍게도 이 물질들은 유리관의 벽쪽으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소용돌이의 안쪽 축방향으로 밀집되어 축과 함께 회전하면서 달걀모양으로 응집되는 것이었다. 이 응고물을 물에서 꺼내어 부셔 보면 그 내부에는 전혀 물기가 없었다.
물의 흐름을 특별히 조절하고 조율시키면 유리관 내부에 계란모양의 움직이지 않는 파동이 형성되고, 이것은 흐름의 세기에 따라 줄에 꿰어진 구슬처럼 위 아래로 이동하였다. 유리관 내부에서는 삼중의 파형이 관찰되었는데, 나선형의 움직임 안에 또 다른 나선형의 파형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측면을 따라 위 아래로 이동하는 파형이 또 겹쳐 있었다. 또한 관 주위로 아주 이상한 발광현상도 관측되었다.
초기실험이 종료되자 포펠 교수는 빅터에 대해 더 이상 부정적이지 않았으며 열정적으로 공동연구를 계속하기를 원하였다. 물이 나선형 형태의 파이프를 통과할 때 무언가 새로운 시각으로 이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되었지만, 빅터가 제안한 입체나선형 구조의 파이프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머뭇거렸다. 사슴의 뿔을 닮은 듯한 이 괴이한 형태의 입체나선형 파이프를 사용하는 것은 조금 우스꽝스럽다고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이내 그는 동의하게 되었다.
위의 나선모양은 슈투트가르트 공과대학에서 실험에 사용된 쿠두 영양의 뿔을 복사한 것입니다.
그들은 직선유리관과 직선구리관 그리고 이상한 형태의 입체나선형의 구리관 세 가지를 가지고 물의 유속 실험을 계속 진행하였다. 실험결과는 포펠 교수와 그의 연구원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매끈하게 생긴 유리관이 구리관보다 물의 흐름에 더 큰 저항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소재가 물의 흐름에 미치는 영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입체나선형 구리관에 대한 결과는 차라리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위의 나선모양은 쿠두 영양의 뿔을 모방한 것이며, 슈튜트가르트 공과대학의 실험에서 사용되었다.)관을 통해 물을 통과시킬 때 어느 시점에서 유속에 대한 저항이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한 순간 저항이 마이너스를 기록하였다. 유속이 증가해 나갈 때 저항이 최소값을 가지는 일종의 공명시점들이 또한 관측되었다. 포펠 교수는 이 특수한 파이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파이프에서는 물이 파이프 내벽에 대한 저항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흔들리면서 파이프를 통해 돌진하는 것 같다. (It seems that in this pipe the pillar of water releases itself from the pipe walls and, freely swinging, rushes forth through the pipe.)”
물의 흐름은 스스로 파동과 회오리를 형성하려는 성질이 있는데, 이러한 자연적 흐름과 보조를 같이하지 않는 직선 파이프에서는 벽과 부딪히며 저항이 발생하지만, 나선형의 파이프에서는 물은 어느 정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으므로 저항이 감소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어쨌던 빅터의 이론은 자연상태를 극히 흉내낼 수밖에 없는 실험실에서의 연구에서도 검증이 되었던 것이다.
슈투트가르트에서의 테스트 그래프 위쪽 곡선은 직선 유리 파이프의 마찰을, 가운데 곡선은 직선 구리 파이프의 마찰을, 아래쪽 곡선은 나선형으로 감긴 구리 파이프의 마찰을 나타냅니다. 실선은 측정값을, 파선은 추정값을 나타냅니다.
<사실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1956년에 오스트리아의 작가이자 신비주의자인 레오폴드 브란드스태터(Lepold Brandstatter)는 빅터와의 긴 인터뷰를 통해 그의 이론을 소개하는 책자를 출간하였다. ‘원심력(Explosion)의 시대에서 구심력(Implosion)의 시대로.’ 라는 제목으로 발행된 이 책을 통하여 저자 브란드스태터는 빅터와 그의 이론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 한편으로 증가일로에 있는 핵위협에 대항하는 여론을 조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원자력을 대체하는 새로운 에너지개발이 이미 완성되었으며 이것은 생명체를 위협하지도 않으며 지극히 평화적인 동력원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브란드스태터는 빅터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해하게된 구심성(Implosion)의 원리와 기기장치들 그리고 빅터의 이론 전체를 작가특유의 문체로 환상적으로 전개시켜 놓고 있다. 비판적인 사람들의 시각을 의식하며 약간은 신비적이고 환상적으로 설명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 감도 없지 않아서, 신비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거대한 기술적 대변혁이 시작되었음을 의심치 않았다.
특히 독일 내에서 이 책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많은 언론들이 대서특필로 다루었고 어떤 사람들은 국제 빅터 협회를 설립해야한다고 주창하였다. 몇몇 다른 작가들도 빅터의 구심성동력장치들이 대량생산체제에 돌입할 것이라고 쓰고 있다. 어쩌면 빅터에게 자금이 충분히 주어졌다면 그 일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전세계의 원심성원리에 입각하는 기존의 모든 발전소와 핵시설들이 문을 닫아야했을 것이고 대변혁이 시작되면서 소위 천년왕국이 목전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대중적인 붐에 대해서 빅터 본인은 막상 조심스러워 했는데, 브란드스태터가 자신과의 인터뷰를 너무 오용하고 있다고 거부감을 보였다. 물론 그는 그의 이론들이 전세계로 퍼져나가기를 열망하여왔지만, 그의 이름을 빌어 설립되는 거대한 협회같은 것은 사양하고 단지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국제적 규모의 연구소 설립을 소망하였다.
그는 생애를 통해 몇 번의 씁쓸한 경험을 한 바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지지하다가 또 기만하여왔다. 또 한편으로는 에너지와 무력을 독점하고 있는 권력의 핵심세력들이 그의 발견을 악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을 빅터는 우려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빅터는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다. 전쟁 때의 노역과 스트레스, 과도한 연구에의 몰두와 필요한 연구자금의 부족 등등으로 하여 그는 계속 쇠약해져갔는데, 심한 천식과 심장기능저하 등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는데, 구심성동력장치 개발은 재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에게 큰 부담을 주었지만 세상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더 큰 고통이었다. 특히 더욱 치열해져가는 핵개발경쟁은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첩경이라고 그는 극히 우려하였으며, 한시라도 빨리 자연적인 기술을 이용하여 세계의 에너지문제를 해결해야하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필요한 자금을 어디에서 확보한단 말인가?
<미국과의 관계, 그리고 빅터 샤우버거의 사망>
여전히 상황이 어려웠던 1957년의 늦은 겨울에 두명의 미국인이 빅터를 방문하였다. 이들과의 만남은 빅터 국제 협회를 설립하고자 노력하고 있던 한 신문사에 의해 주선되었다. 그해 겨울동안 빅터의 건강상태는 상당히 악화되어있었는데 가끔씩 그는 이제 자기가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고 주위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휴식도 없이 계속 구심성에너지동력장치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몇가지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전념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당시의 정황을 그의 오랜 동료이자 독일 생명기술연구소의 소장인 알로이스 코칼리(Aloys Kokaly)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작년에 독일남부와 오스트리아를 순회강연 중이던 나는 당시 바드 이쉴(Bad Ischl)에 살고 있던 빅터에게 들렀는데, 그의 집에는 두명의 미국인이 와 있었다. 그 중 한사람은 바바리안 억양이 섞인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하였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나는 빅터와 잠깐 안부인사만 나누었는데, 칼 게르샤이머(Karl Gerscheimer)씨가 나에게 극비사항이라고 말하면서 조만간 빅터 부자가 미국을 방문하게 될 것이라고 귀뜸해 주었다. 빅터의 위대한 발견을 미국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쪽에서는 모든 기술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할 준비가 완료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쪽에서는 삼개월 정도의 체류일정을 계획해 놓고 그 사이에 모든 연구가 일사천리로 진행되기를 원하고 있는 반면에, 빅터는 삼개월 안에는 초기적인 도움 밖에는 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빅터 부자는 미국 텍사스로 날아갔다. 실험에 관련된 모든 자료와 모형, 장비 및 부품들이 함께 미국으로 보내졌다. 6월부터 9월까지 한여름의 텍사스는 한 낮이면 섭씨 36도와 41도를 오르내릴 정도로 혹독하다. 레드강 부근의 텍사스 사막의 어느 외진 곳에서 빅터 부자는 거의 내팽겨쳐졌다. 외부세계와 철저히 단절된 속에서 우편물은 검열을 거쳐야 했다. 언제 연구를 시작할 것이냐는 물음에 그들은 오히려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다고 늦장을 부리면서, 빅터 부자에게 모든 발견들을 기록으로 제출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림도안을 포함한 이 보고서는 미국내의 핵기술 전문가에게 보내져 분석되었다. 9월이 되었을 때 이 전문가는 텍사스에 나타나 사흘동안 토론에 참석한 뒤 그의 종합적인 결론을 제시하였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샤우버거가 자신의 논문과 모델에서 보여준 길은 미래의 생명공학적인 길입니다. 샤우버거가 제안하고 말하고 주장하는 것이 옳습니다. 4년 안에 이 모든 것이 확인될 것입니다.(The path which Mr Schauberger in his treatise and with his models has followed, is the biotechnical path of the future. What Schauberger proposes and says and asserts is correct In four years, all this will be confirmed.)’ 라고 결론 내렸다.
삼개월이 지났으므로 빅터 부자는 유럽으로 돌아가고자 원했다. 하지만 미국측에서는 이들을 회유하고자 하였다. “현재의 결론은 극히 만족스러운 것이므로 당신 부자는 이곳에 더 머물러야 한다. 이러한 혁신적인 일에는 당연히 희생이 따르는 게 아닌가? 수년이내로 당신들에게 아리조나 사막일대에 연구소를 만들어 줄 것이다.” 빅터 부자가 이 제안을 거절하자, 그들은 영어로 진행되는 어떤 회의과정에 빅터가-그는 전혀 영어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혼자 참석한다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격렬한 언쟁 끝에 빅터는 이 제안에 동의하였다. 협박아래에서 그는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다. 빅터의 아들 발터 샤우버거는 어떤 서약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받았다. 그는 미국 방문객으로서 현행법을 따라야 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할 수 있었다.
그 서약서에는 ‘빅터 샤우버거는 과거, 현재 및 미래의 모든 연구지식을 R.D씨(Robert Donner)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다.’ 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튼 이 ‘텍사스 협약(Texas Agreement)’에 따르면, R.D씨가 빅터의 연구결과에 연관된 모든 권리를 가지며 이 중의 부분 혹은 전체를 다른 단체에 팔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고 되어 있었다.
빅터와 그의 아들 발터는 19시간동안 비행기를 타고서 오스트리아로 되돌아왔다. 빅터는 자신에게 벌어진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여력이 없었으며 마치 그의 정신마저도 R.D씨에게 빼앗긴 양 식물인간처럼 되었다. 린츠의 집으로 돌아온 닷새 후, 1958년 9월 25일에 73세의 나이로 빅터 샤우버거는 타계하였다.
닷새동안 그는 오로지 절망스럽게 다음과 같이 절규하였다.
“그들은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내 자신마저도 나의 것이 아니다.(They took everything from me, everything. I don't even own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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