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역사 속에서 특이하고도 감동적인 한 인생역정이 마감되었다. 물과 숲과 대지를 보호하기 위해, 더 나아가 대자연의 완전성과 조화로운 질서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 평생동안 노력하였으나 오히려, 비난받고 고소 당하고 강제수용소에 갇히기도 하면서 결국은 병들고 쇠약해졌지만 그는 끝까지 인류에게 새로운 이정표를 심어주고자 노력하였다. 급기야 마지막의 악몽 같은 경험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토록 공들여서 노력하였던 모든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는 최후의 절망감속에서 그는 죽어갔다. 재물에 눈이 어두운 상업주의자들의 교활한 거짓약속이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비극적 종말의 순간에 그는 자신의 생애를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그는 무엇을 일생의 과업이라고 생각하였을까? 그가 평생동안 현재 과학기술문명을 비판해 온 그 신념과 의지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생애 많은 시간들을 자연 속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인류에게 올바른 문명의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었으며, 전문적인 지식을 쌓은 사람들보다 더 깊은 과학적 통찰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우리는 한사람의 학력과 그 지식정도를 동등시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빅터 샤우버거에게는 비록 내세울만한 학력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지식인이 아니다고 말할 수 없다. 그의 글들과 친구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가 지녔던 지식의 깊이를 엿볼 수 있는데, 과학기술분야뿐 아니라 역사, 문학, 그리고 철학의 분야에서도 상당히 해박하였음을 보여주며 특히 괴테에게서 가장 큰 감명을 받아 자주 그의 문장을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학기술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의 글들은 물리, 화학, 수문학등의 방대한 지식을 담고 있으며 여기에다 그의 실제 경험이 깊게 반영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대자연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극히 세심한 학생이었던 것이다.
그가 보여주었던 독특한 통찰력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언젠가 빅터는 냄새나는 하수도 물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실험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때에 지적수준이 아주 높은 오스트리아 유태인 노인이 그를 방문하였는데. 이 노인이 묻기를, 지금 빅터가 행하고 있는 방법은 고대 유태인들로부터 전하여져 오던 것인데 당대에는 잃어버린 것이라면서 어디에서 이 지식을 배웠느냐고 물어왔다. 빅터는 자신은 어디에서도 배워온 것이 아니며 단지 이것을 통찰해 내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그 노인은 ‘통찰해 내었다’는 의미에 대해 다시 질문하였다.
빅터가 대답하기를, “모든 만물은 역동적인 흐름 속에 있다. 에너지와 빛조차도 그러하며, 물질이라는 비활성적인 에너지도 그러하다. 이것은 혈통이라는 개념에도 적용이 되는데 혈통이란 옛 세대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의 세대로 에너지를 운반하는 물질화된 힘의 흐름이다. 비록 한 개인은 죽을지라도 이 흐름은 깨어지지 않고 후대로 전달이 된다. 그러나 이 에너지 흐름은 그릇된 기술과 문화 등에 의해 방해받을 수 있다. 그 결과로 수천년을 걸쳐 축적되어온 정신적 유산이 개인들에게서 소멸되어진다. 그러나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혈통의 흐름 속에서 잠들어 있는 이 지식의 보따리를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빅터 자신은 스스로 이러한 재능을 가졌다고 믿었으며, 그 모든 것들을 증명해 보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는 대자연에서 대개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보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일어남직한 사건들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이었다. 현실적인 어려움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가 실제로 본 것을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고, 문명세계에서 물질적으로 재현시키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과업이었다. 깊은 통찰에 기반한 자신감과 의지를 가지고 그는 과학과 기술, 정치 등을 일관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구약성경 속의 선지자와 같은 그 무엇이 있다. 그는 스스로 독특한 삶을 살고자 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혁명적인 어떤 가르침을 세상에 펴고자 일생을 소모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신념과 통찰력에 당혹해 하면서도, 빅터가 그 자신의 이론을 인정받기 위해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하였다. 그는 지구를 죽음으로 이끄는 잘못된 기술들과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는 그릇된 문화를 비난하고 경계하려 했던 예언자 였다. 그는 자신의 통찰이 옳다는 신념하에 새로운 지혜를 우리에게 전파하려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그의 새로운 기술이 대자연을 계속 거슬리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오용되지나 않을까 우려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비밀스러운 언어를 사용하여 암시와 부분적 설명들로 그의 이론체계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데, 이러한 글들은 오랜 기간을 투자하여야만 비밀을 해독할 수 있으며 빅터 자신이 이 점을 몰랐을 리는 없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카톨릭 신부이며 사회경제 개혁론자였던 우데(Ude) 교수에게 보낸 서한에서 빅터는, 젊은 세대들을 닥쳐올 어두운 미래로부터 보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남기고 있다.
“당신이 보기에도 내가 명백한 증거도 없이 대중들 앞에서 떠들어 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우매한 욕심쟁이들에게 이 비밀을 완전히 노출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본주의자들은 결코 이상주의자가 될 수 없으며, 이것은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두 잘못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객관적이어야 할 과학자들 조차도 참된 진리의 세계를 역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조심스러운 행보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비극적 종말이었다. 대중적인 삶의 전반적 과정이 점점 열악해져서 더 이상 그의 비밀을 방치할수 없다고 판단하여 보따리를 완전히 풀자마자, 상황은 돼지우리에 진주를 던져버린 격이 되고 말았으며 그는 치를 떨어야 했다.
물속에서 나선형 운동.
<빅터에 대한 주위사람들의 평판>
내가 만나본 빅터의 지기들은 똑같은 목소리로, 생전의 그는 정직하고 점잖은 사람이었으며 따뜻한 마음씨와 멋진 유머감각을 가졌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부드러운 성품이면서도 위선적이고 교만한 사람들에게는 그 사회적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아예 상종을 하지 않는 강직한 일면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는 숲과 시골의 단순한 전원생활 속에서 나무꾼들과 사냥꾼들 그리고 농부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성장하였으면서도 집단사회를 기피하지는 않았으며, 언제나 강한 개성과 위엄을 지니고서 대하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에게는 절친한 친구들과 동료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 몇몇은 빅터에 대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중부유럽전역에 사회개혁자로 잘 알려져 있는 스위스의 베르너 짐머만(Werner Zimmermann) 교수도 이 중의 한 명이다.
1930년에 비엔나에서 있었던 강연회에서 나는 빅터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당시 그는 나의 강연회에 참석자로 와 있었다. 그는 나에게 그의 관심사들에 대해 말했으며 그가 만든 장치들과 생명활성을 강하게 가진 물을 보여주었다. 이후부터, 그와의 교류가 시작되어 1935년 9월에 내가 발간하는 ‘타우(Tau)’ 잡지에 그의 첫 논문인 ‘라인강 조절에 관한 소고’가 수록되었으며, 1938년에 히틀러 정부에 의해 정기간행물이 발행금지될 때까지 빅터의 많은 논문이 실려졌다. 돌이켜보면 그와 같은 능력있고 열성적인 연구가를 알게 된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그는 자연스러운 친화력을 타고난 사람이었으며 날카로운 눈매에 우뚝한 매부리코, 미끈한 콧수염을 지녔었다. 뛰어난 관찰력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답변은 항상 명쾌하였고 참신한 아이디어는 샘물 솟듯 하였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터놓고 웃을 수 있는 신뢰를 주는 사람이었으며, 그가 쏟는 열정과 신념은 마치 그가 살았었던 거대한 산과 같았다. 진리와 그 의무에 대하여 그는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1936년 7월에 그가 나에게 편지를 통해 남긴 귀절이 떠오른다.
“백 년을 앞서 사는 사람은 현재에 대해 결코 놀라지 않습니다.(He who lives a hundred years in advance is never surprised with the present.)”
일백년의 시공 속에서 상황은 어떻게 변해갈까? 당연히 현재의 그릇된 문명개발은 계속 진행되어갈 것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건강한 새로운 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어질 것이며, 결국은 정부당국들도 이 개혁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이때에 사람들은 빅터가 평생토록 노력해 왔던 그의 예언적인 미래관이 점차 실현되어가고 있음을 기억해 낼 것이다.
남부독일의 유기농업 지도자인 오스왈드 히치필드(Oswald Hitschfield)도 빅터의 오랜 친구중 한사람인데,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첫인상이 가장 확실하다고 이야기들 한다. 1930년대에 물을 자연스럽게 흐르게 해야 한다는 빅터 샤우버거의 논문을 읽은 후, 내가 직접 그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것은 1942년 여름이었다. 그때 나는 한 학술모임에 참석하였는데 여기에서 과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고 있는 빅터를 만날 수 있었다. 3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나는 그 첫 만남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그에게 던져지는 공격적인 질문들에 대해 탁월하고 날카로운 어조로 하나하나 되받아침으로서 주위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 당당한 자세와 불굴의 신념! 사람들은 그가 내면에 깊은 통찰력을 갖추고 있으며, 대자연과 생명의 비밀스러운 실제법칙들을 일목 요연하게 밝히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농업과 임업의 분야에서 어떻게 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그와 장시간 토론하였는데, 그때까지 이 분야의 여러 전문가들을 만나 보았었지만 빅터만큼 문제의 핵심을 명쾌히 풀어내는 사람을 본적이 없었다. 그후에도 그는 만날수록 더욱 신뢰를 더해주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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