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가 정신병원에 감금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바야흐로 시작되자 뉘른베르크(Nurnberg) 대학에서의 연구생활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빅터는 오스트리아로 되돌아왔으며 그의 아들 발터는 군대에 소집명령을 받았다. 얼마후에 빅터 또한 신체검사 통지서를 받게 되었는데 -이 당시 그의 나이가 연금 받을 연령이 거의 되어 가는 정도였는데도 불구하고-이 소집 명령 배후에는 당시의 공학협회와 건축협회의 음모가 깔려있었던 것 같다. 정작 빅터 본인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신체검사장에 출두하였으나, 그는 특별검사라는 명목으로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놀랍게도 그곳은 정신병원이었다. 그제서야 그를 음해하려는 사람들의 농간임을 알아차린 빅터는 어떻게든 침착하게 행동하여 덜미를 잡히지 않아야한다고 다짐했다.
한참 후에야 젊은 의사에게서 진단을 받게 되었는데, 당연히 그 의사는 이 환자가 지극히 정상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무엇인가 착오가 있었음을 그의 상관에게 보고하였다. 그의 상관인 포츨(Fotzl) 교수는 즉시 중증정신병동에서 빅터를 일반병실로 옮기게 하였고, 바그너-자우레그(Wagner-Jauregg) 교수에게서 재진단을 받은 후에 매우 정상일 뿐 아니라 대단히 지적능력이 탁월함이라는 판정을 받고 병원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누가 빅터를 정신병동으로 내몰리게 사주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 사건에 관련된 문서도 결국 공개되지 않았다.
<마우타우센 수용소에서의 연구생활>
1943년의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노인들까지도 징집을 당하기 시작하였는데 결국 빅터도 소집영장을 받게 되었다. 그에게 배당된 곳은 이태리의 한 낙하산 제조공장이었다. 그러나 사전계획이 있었다는 듯이, 이내 힘믈러(Himmler)에게서 명령통지서가 도착했고 그는 S.S 친위대 관할의 마우타우센(Mauthausen)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수용소에 도착하자 S.S 지휘관 자이라이스(Zeireis)가 힘믈러로부터 받은 명령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는 당신의 연구와 아이디어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당신이 선택할 길은, 수용소내의 전직 기술자나 과학자들로 구성된 연구팀을 결성하여 에너지장치 개발에 몰두하거나 아니면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연구팀을 결성하였으며-그의 연구원들이 수용소내의 죄인취급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하였다. 그 지역이 폭격을 받게 되자 린츠(Linz) 근교의 레온슈타인(Leonstein)으로 옮겨서 연구는 계속 진행되었는데 구심성동력장치로부터 추진력을 받는 비행접시형의 항공기개발이 주된 과제였다. 이 비행접시의 설계원리는 이미 빅터에게는 명백한 것이었다.
물이나 공기 같은 매질이 콜로이드(colloid)형태의 진동회전운동을 하게 될 때 에너지의 발생이 생겨난다. 이러한 원리에 입각하여 반중력현상인 공중부양이 가능하다. 이러한 형태의 구심성운동은 에너지생성과 공중부양을 동시에 가능케 한다. 이 원리를 이용하면 이상형의 비행기(비행접시)나 잠수함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연료는 거의 필요하지 않다.
이 시기동안의 연구결과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빅터는 그때의 상황을 이후에-1956년 2월 28일-서독 국방장관 슈트라우스(Straus)에게 편지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비행물체의 외형디자인을 먼저한 뒤에, 일년의 기간을 소모하여 첫 번째 접시형의 비행기를 만들어내었다. 처음 작동 시에 이것은 예상치도 못하게 천정까지 바로 부상하여 천정과 함께 부서져버렸다. 이 일이 있은 며칠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감지한 듯한 미국군인 몇 명이 나타나서는 모든 것을 압수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고위장교들에 의한 철저한 수색이 뒤따랐고, 나는 최소 6명의 감찰군인들에 의해 6개월간이나 보호감찰을 받았다. 한편으로 그 비행접시의 중요부품들은 나의 아파트에 있었는데 소련군인들이 먼저 수색 발견하였다.
이 편지의 다른 단락에서 계속 그가 언급한 내용을 통해 보면, 그 첫 번째 비행접시는 천정에서 폭발하기 전에 위로 떠오르면서 청회색과 이어서 은색의 발광현상을 보였다고 한다. 빅터의 아파트를 수색한 소련군은 기기장치의 중요부품을 약탈한 뒤에 아파트건물을 폭파시켰는데, 아마도 그들이 미처 알아내지 못한 다른 중요한 정보들이 남들의 손에 넘어갈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 듯하다. 수용소시절에 빅터와 함께 일했던 연구팀의 멤머들 중에는 소련군출신의 몇 명의 과학자들이 있었는데, 전쟁 종료 후 이들은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그후 소련이 우주로켓트기술개발에 빅터의 아이디어를 활용하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레온슈타인(Leonstein)에서 시험비행 도중 파괴되었다는 비행접시의 크기는 직경 1.5m, 무게 135kg, 1/20 마력으로 추진되었다고 전하여진다. 이 실험에 참가하였던 모든 사람들이 빅터와 같은 소견서를 제출하고 있다. 1956년에 빅터가 남긴 글에는 그때 전쟁직후의 상황에 대해 계속 언급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나는 거의 일년가까이 점령미군에 의해 구금 당하였다. 그 이후 재수감의 위협을 받으며 풀려나긴 하였지만 당분간 어떠한 연구도 하지 못하게 강요당하였다. 극동평화조약(Far East Peace Treaty)체결된 후 다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는데, 이때에는 이미 모든 재산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연구는 느리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미군에 의한 구금에서 풀려난 후에 빅터는 린츠(Linz)지방으로 옮겨 연구를 계속 진행하려 하였으나 자금부족으로 답보상태에 머물렀던 것 같다. 그는 그 당시에 ‘주머니에 칼과 동전 몇 푼만 가지고는 많은 것을 성취 할 수 없습니다(with a penknife and a few pennies in the pocket, one cannot accomplish much)’라고 말하곤 하였다.
‘슈리버-하버몰’ 플라잉 디스크는 1943년에서 1945년 사이에 개발되었습니다. 1944년 수직으로 상승하여 3.12분 만에 높이 12km, 수평 비행 속도 2000km/h에 도달했습니다.
1941년에서 1942년 사이에 개발된 첫 번째 테스트 모델. 이것은 그림 (a)와 동일한 비행 특성을 가졌지만 제어 장치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발렌조-슈리버-미에테 디스크’. 접이식 차대 다리는 팽창식 고무 쿠션으로 마감되었습니다. 3명의 승무원이 탑승했습니다.
샤우버거의 ‘비행 접시’ 모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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