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BOOK/도인(道人)

도인(道人) 1 - 15. 양 청푸와 태극권

기른장 2025. 3. 11. 21:53

15. 양 청푸와 태극권

사이훙은 계속해서 사부와 할아버지의 소개로 무림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권법의 고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무림의 대표적인 고수들로는 형의권(形意拳)의 쑨 루탕(孫陸塘)과 바오 텐이(包天義), 팔괘장(八卦掌)의 푸 정쑹(輔正松), 장 자오동(張照童), 그리고 태극권의 양 청푸(楊澄甫) 등이 있었다.

사부는 사이훙에게 무림을 두루 다니며 내공의 기초를 닦으라고 일렀다. 기술과 기교로 싸우는 외공에 비해 내공무술은 기공과 명상을 응용해 내적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데 더 주안점을 둔 무술이다.

형의나 팔괘, 태극은 그 내공이 각기 독특해 나름대로 한 유파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태극권은 최상승의 내공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당대 태극권의 최고수인 양 청푸는 베이징에 개인 도장을 열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양 청푸가 화산에 들렀기 때문에 사이훙은 어릴 적부터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사이훙은 그를 〈양 아저씨〉라고 불렀고, 양 청푸는 사이훙을 〈꼬마 원숭이〉라는 애칭으로 불렀었다. 그런데 그 꼬마 원숭이가 벌써 혼자 여행을 다니고, 마냥 재롱을 떨며 달라붙던 아저씨를 사부라고 부를 만큼 장성한 것이다.

양 청푸는 사이훙을 따뜻하게 반겼다. 양 청푸는 180이 넘는 거한으로, 뾰족한 정수리가 드러나도록 깎은 머리와 강인한 얼굴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이 단단해 보였다.
 
양 청푸에게 가르침을 받는 동안, 사이훙은 양사부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이훙이 어려서부터 알고 있던 양사부의 모습은 온화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안경까지 걸친 그의 모습은 일생을 책 속에서 파묻혀 지낼 서생처럼 보였다. 사이훙은 그런 양사부의 모습을 좋아했다. 하지만 양사부가 일단 싸움을 시작하면 잔인하고 악랄한 초수를 펼친다는 것이다.

베이징에 있는 양 청푸의 도장에 도착한 사이훙은 곧 양 청푸의 제자가 되었다. 고명한 고수의 손자로서, 또 화산파의 제자로서 태극권 대가의 몇 안 되는 수련생 반열에 들 수 있었던 것이다.

몇 주 뒤에는 양사부와 사형으로부터 태극권의 기초를 전수받기 시작했다. 태극권은 내공을 증진하기 위한 체조와 명상, 그리고 실전에서 쓰이는 무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권법이다. 〈최상의 권법, 궁극의 권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수련 자세와 수련 기구를 이용하였다. 사부와 사형은 먼저 물 흐르듯 유연하게 움직이는 몸 동작과 태극권 고유의 내공 수련 자세를 가르쳤다. 기립 명상과 가부좌 명상 자세는 물론이고, 효과적인 수련을 위해 태극봉(양끝에 손잡이가 달리고 가운데 구멍이 파진 나무 막대)과 태극구(직경 1미터의 둥근 돌과 작은 구슬)를 사용하는 방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이 모든 방법은 수련자들이 스스로 정문(頂門)과 심문(心門)을 열 수 있게끔 내공을 단련시키고 증강시켜 주었다.

사이훙이 기본 동작을 익히자 태극권의 자세는 운기행공(運氣行功)으로 넘어갔다.
 
행공에는 소주천(小周天)을 따라 기(氣)를 상반신에서 수직으로 환류시키는 것과, 대우주궤(大宇宙軌)를 따라 사지 전체로 골고루 순환시키는 것이 있었다. 이 같은 운기 과정을 통해 모인 내공은 자연스럽게 정문을 쳐올리고 심문을 뚫어 주어 인간 내면에 잠재된 에너지를 물 흐르듯 모아 주었다. 기를 순환시켜 증강된 내공은 심적 안정과 근육 이완 효과를 가져왔으며, 신경 및 장기, 골격 등에 생긴 이상을 회복시키는 치유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상대의 몸에 직접 손을 대지 않고도 적을 물리치는 투기로서의 기능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태극권의 고수가 내공을 사용하여 적을 공격하면 그의 몸에서 나간 기가 주먹으로 직접 때린 것보다 훨씬 큰 힘으로 상대의 몸 구석구석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태극권이 가진 특성은 이런 파괴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권법이 힘과 강한 타격을 기본으로 하는 데 반해 태극권은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강조했다. 태극권을 수련한 자들은 공격에 대해 유연하게 반응한다. 머릿속의 잡념을 지우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근육이 긴장되어 기의 흐름을 막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싸우는 동안에도 편안한 자세와 냉정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신체의 긴장이 풀리면 오히려 적의 공격 방향과 공격 강도를 쉽게 알아챌 수 있으며, 동시에 몸을 움직이는 것도 훨씬 수월해진다. 그러니 이 부드러움이야말로 내공 무술의 정수인 것이다.
 
기본 훈련과 행공을 거친 사이훙은 태극추권(太極推拳)을 수련하면서 더욱 심화된 태극권을 맛볼 수 있었다. 이는 민감한 손을 회전시켜 공격해 오는 상대의 가격을 막고 동시에 내공으로 그를 밀쳐내는 권법으로, 수많은 대련 과정을 통해 동작을 완벽하게 익혀야 한다. 태극권은 그야말로 〈최상의, 궁극의〉권법이었고 양 청푸는 수십 년에 걸친 수련으로 그 사실을 충분히 입증해 주었다.

사이훙은 의외로 빨리 양사부의 냉혹함을 목격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양사부는 가족과 제자들을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양 청푸는 식사를 마치고 식구들보다 앞장서 식당을 나섰다.

「뒤로들 물러서라!」

식당을 나서던 양 청푸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고 동시에 두 명의 괴한이 나타나 돼지 잡는 바구니를 양 청푸에게 뒤집어씌웠다. 등나무 줄기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폭이 좁은 바구니가 양사부의 팔과 몸통을 꽉 죄었다. 양사부가 바구니를 벗으려는 순간, 괴한 중의 하나가 바구니를 식당 아래 언덕으로 차버렸다.

아마도 양 청푸를 꺾어 무림의 명성을 얻고자 하는 자들인 듯 싶었다. 바구니가 굴러 내려가기 시작하자 두 괴한은 칼을 빼들고 언덕 아래로 줄달음을 쳤다. 언덕 아래에는 동료로 보이는 또 다른 두 명의 괴한이 칼을 치켜 들고 바구니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놈들이 다냐?」

바구니가 멎자 양사부가 물었다.

언덕에서 달려 내려온 자들까지 가세해 모두 네 명이 된 괴한들은 대답 대신 칼을 치켜들며 바구니로 다가섰다.

「좋았어!」
 
양사부는 흔쾌히 외치고 나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부드러운 손동작 하나로 바구니는 쉽게 벗겨졌다.

양 청푸는 괴한들 앞에 우뚝 섰다. 거리의 어슴푸레한 빛에 드러난 그의 모습은 이미 험상궂은 신상(神像)의 모습이었다.

「나를 죽이고 싶다 이거지?」

양사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것 참 안됐군. 그럴 수가 없을 테니. 주위나 한 번씩 둘러봐. 오늘 저녁이 네놈들의 제삿날이 될 테니 말이야.」

네 명의 괴한은 양사부를 향해 재빨리 칼을 내찔렀다. 양사부는 느릿한 동작으로 칼을 피하더니 두 사람의 심장에 각기 한 초를 펼쳤다. 거의 같은 동작으로 몸을 돌리며 다른 두 명의 목을 가볍게 틀어쥐었다. 네 명의 괴한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양사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툭툭 털고 언덕을 올라왔다.


무림계에서 최상의 무술이란 없다. 단지 고수에 의해서 증명될 뿐이다. 태극권도 수많은 도전자들을 물리치면서 무림의 독특한 유파로 자리를 잡았다. 양사부는 물론 그의 아버지, 숙부, 할아버지, 동생까지도 모두 태극권의 고수였고, 이들은 태극권의 이름을 꺾어 고수의 반열에 들고자 하는 도전자들을 수없이 물리쳐 왔다. 경쟁 상대는 형의권과 팔괘장뿐이었다. 당시 〈내공 무술〉로 지칭되던 형의나 팔괘, 태극은 서로 나란히 어깨를 견주고 있었다.

양사부의 도장 별채에는 한 남자가 기거하고 있었는데 그는 거의 종일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남자는 형의권의 고수인데, 넉달 전 양사부에게 도전했다 패하여 부상을 치료하는 중이라고 했다.
 
두 사람의 결투는 특이했다. 싸움이 시작되고 한 식경이 지나도록 양 청푸는 형의권 고수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상대의 공격이 워낙 세차 계속 관찰만 한 것이었다. 공격자 역시 내공이 뛰어난 고수인지라 약점을 찾는 일이 그리 쉽지가 않았다. 한 사람은 차고 찌르고, 한 사람은 이리저리 피하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형의권의 고수가 양 청푸의 머리를 향해 손을 내리치는 순간 양 청푸는 얼른 꽃병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막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상대는 미처 손을 거둘 새도 없이 꽃병을 내리치고 말았다. 잠시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양 청푸의 손에 들린 꽃병이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랗게 부서져 내렸다. 양 청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바닥을 펴서 앞으로 쭉 뻗자 형의권 고수는 문 앞까지 날아가 문을 부수며 쓰러졌다. 그의 입, 코, 귀 등 모든 구멍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양 청푸는 제자들에게 그를 별채에 눕히고 내상을 치료해 주도록 지시했다. 형의권의 고수는 아직 회복을 못하고 있었지만 그의 내공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죽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사이훙은 태극권을 익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양사부의 도장에 들르곤 했다. 양사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사이훙은 양사부의 도장에 발길을 끊지 않았다. 사이훙이 태극권 수련을 어느 정도 마무리짓고 처음 도장을 떠나기 전날, 팔괘장의 장문인인 푸 정쑹이 양사부에게 도전했다.
 
푸 정쑹은 땅딸막한 체격의 젊은 사람이었다. 그는 용형팔괘장(龍形八卦掌)의 자세를 갖추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양 청푸의 주위를 끊임없이 돌았다. 양 청푸는 두 눈을 감고 꼼짝 않고 서서 내공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30분이 넘었지만 푸 정쑹의 도는 자세나 속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양 청푸도 일체 움직임이 없었다. 순간 갑자기 푸 정쑹이 손을 내밀며 양 청푸를 향해 돌진하자 양 청푸는 눈을 번쩍 뜨더니 그의 손을 맞받았다. 푸 정쑹의 몸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자 양 청푸는 상대의 몸이 땅에 닿기도 전에 가슴을 향해 한 초를 다시 내질렀다. 내공으로 단련된 사람이었으므로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푸 정쑹은 큰 상처를 입고 양 청푸의 도장을 떠났다.

이 두 대가의 싸움에서 사이훙은 명상을 통한 내공의 힘과 태극권의 우수성을 알 수 있었다. 사이훙은 자신의 권법에 태극권을 접합시켜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태극권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려면 25년이 걸리니, 사이훙이 양사부의 도장에 묵었던 그 짧은 시간은 겨우 태극권의 맛을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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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극종사 양 청푸(楊澄甫: 양징보)

사진출처 : https://m.blog.naver.com/aiwulyc/220558602624

 

2. 국내에도 태극권의 고수가 있는데, ‘밝은빛 태극권’ 박종구 원장을 소개합니다.
https://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614795.html#cb

 

파도의 끝처럼 느림은 빠름을 제압한다

상대는 중년의 50대 여인이었다. 중국 베이징 사범대의 찻집 앞에서 수련하는 여인의 태극권 몸놀림은 예사롭지 않았다. 자신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한국에서 온 청년을 의식한 여인은 “관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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