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 협곡에서의 시간이 마냥 흘러가고 있었다. 날마다 게쉬 린포체는 내가 세상에 나가 해야 할 일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오크 협곡에서의 체류기간도 끝나가고 있었다. 나의 마음 한 켠이 슬퍼졌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느꼈던, 세상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조화와 사랑 때문이었다.
내가 떠나기 1주일 전, 나의 친구들이 모두 이곳에 찾아왔다. 양탕 사원의 다르창, 곤사카사원의 밀라파, 그리고 퉁라, 오크 사원의 창타파, 그리고 잠사르에서 온 나의 스승. 창타파는 라사에서 수 주 동안 있다가 돌아왔다. 나의 스승은 내가 처음 그를 만났던 칼림퐁까지 나를 배웅해줄 것이다.
이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한 사람을 꼽기는 어렵다. 저마다 모두 독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사랑과 애정이 넘쳤다. 굳이 순서를 매긴다면 게쉬 린포체, 나의 스승, 퉁라. 나머지는 모두 똑같다. 링쉬라 은자님은 거기에 없었다. 이제 조만간 만나게 될 것이지만.
스승이 내게 편지 한 장을 전해주었다. 그걸 보자 누구의 편지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바로 노르부의 편지였다. 나는 편지를 읽고는 그것을 스승에게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우리 둘 사이에 비밀 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3년 후에 칼림퐁에 돌아오겠다고 그녀에게 전해주세요. 거기서 그녀와 당신을 만날 겁니다.”
“그래, 아들아. 우리는 거기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실제로 정확히 3년 후 우리는 다시 만났다. 우리에게는 세월의 흔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이를 먹거나 어떤 달라진 느낌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체험이었다. 마치 헤어진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우리는 행복한 가족 같았다. 게쉬 린포체, 나의 스승, 퉁라, 창타파, 다르창, 밀라파, 원장 그리고 나. 우리는 함께 왁자하게 웃으며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지난 이야기보따리들을 쏟아 놓았다.
나는 그간 그들 각자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이 몹시도 알고 싶었다. 가장 흥미롭고 기뻤던 것은 퉁라와 나 사이의 텔레파시가 전보다 훨씬 쉽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우리는 서로의 상념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이제는 원장도 저어하지 않고 우리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나는 그가 교리의 틀을 대부분 벗어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놀라운 변화였다! 나는 그의 이런 변화된 모습에 대해 말했다.
“예.” 그가 말했다. “당신이 떠난 후 나는 게쉬 린포체와 오랜 토론을 많이 가졌습니다. 나는 마음의 습관, 구성 작용, 신조 등의 허구성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것들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죠. 그러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해방감이 느껴지더군요."
“예.” 내가 말했다. “이번에 당신을 보자마자 한 눈에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더군요."
“그런데 말이죠.” 그가 설명했다. “변화는 여기서 당신의 스승을 만난 이후에 발생한 거예요. 그것이 저로서도 정말 이상해요. 게쉬 린포체는 전에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한 적이 없어요. 나를 어리석음에서 구해준 것은 바로 당신의 스승이에요. 그러면서 원장이 나의 스승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는 그때 받았던 그의 가르침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해요.”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히말라야을 넘어서> 8장에 나온다.)
게쉬 린포체는 사물의 핵심에 바로 접근하지만 설명 자체는 아주 온화했다. 나의 스승은 그 반대였다. 그는 허구의 핵심을 바로 찌르고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게쉬 린포체는 보다 부드러웠다. 그는 차분하게 무엇이 틀렸는지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나의 스승은 문제의 핵심을 바로 쳐서 그것을 해체했다. 두 분 다 위대한 현자들이었다. 그러나 가르침의 방식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나는 둘 다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덧붙이자면, 링쉬라 은자님은 또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의 스승이나 게쉬 린포체보다 더 위대한 마스터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나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퉁라, 다르창, 밀라파, 창타파 그리고 원장, 이들은 모두 나의 공부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돌이켜 보건대 그 모든 것들이 너무도 명확하게 보인다. 그것은 계획에 착착 들어맞았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계획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마음을 훨씬 넘어 서 있는 계획이다. 깊이 들여다보면 지상의 우리의 존재는 인간의 이해와 의지의 수준을 넘어 서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의 영으로부터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땅위의 누구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한 분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 우리는 원장의 방에서 함께 초몰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이 그 위를 비추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다. 협곡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커다란 통나무 장작의 잔화殘火가 방 안을 검붉게 밝히고 있었다. 우리 여덟 사람이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링쉬라 은자님이 우리 가운데 나타났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때 마침 나는 그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방안에는 그가 물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엑토플라즘이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비록 우리가 그 목적으로 모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윽고 그가 말했다.
“약속대로 내가 왔습니다. 그동안도 당신들과 함께 있었지만 오늘 밤은 이렇게 직접 모습을 나타내 말합니다.”
나는 그가 한 말뜻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매일 밤 우리와 함께 있었다. 나는 그의 존재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그가 물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엑토플라즘이 없었을 뿐이었다. 지금 우리는 모두 같은 생각을 하면서 초몰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한 엑토플라즘이 생성된 것이다.
그날 밤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출현을 위해 별다른 준비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앉아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방문이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 방법이야말로 물현을 위한 최적의 방법인 것이다.
은자님이 내게 말했다. “나의 아들아, 나는 네가 우리를 떠나 세상으로 출발하기 전에 네게 말을 하기 위해 왔어.”
그가 예의 그 사려 깊고 느린 어투로 천천히 말했다. 그의 말 속에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생명의 표현이야.” 그가 말했다. “우리는 살아있는 현존의 표현이야. 그것은 관념이 아니야. 그것은 어떤 외적인 매개에 의존하지 않아. 모든 창조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살아 있는 현존이야. 만일 네가 살아 있다는 걸 인식하면 그 생명 속에서 너는, 네가 마음속에서 창조한 것과 살아있는 현존에 의해 창조된 것이 지극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어. 너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네가 듣고 배우고 체험하고 믿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는 알게 될 거야. 이 기억들은 사라지게 될 거야. 살아 있는 현존은 너의 생명이고 영원한 창조성이고 유일한 실재야.
따라서 너는 너의 몸을 지은 이지령이 그 이전부터 존재했고, 몸이 자신의 원질 속으로 돌아가 사라진 후에도 존재하게 될 거라는 걸 분명히 인식해야 해. 형상의 원천인 원질과 이지령은 영원히 남게 돼. 왜냐하면 영원자의 밖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야. 모든 것이 영원자 안에 있어. 그러나 영원자에 대해 이제껏 너의 마음속에서 형성해 온 관념은 그것이 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영원자가 아니야.
내가 너에게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너는 계속 관념들을 만들고 있어.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아.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너는 아직도 내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한 관념들을 만들면서 마음을 움직이고 있어. 그러나 네가 깊이 있게 듣는다면 거기에 관념들로 구성되지 않은 계시 과정이 생길 거야. 그것이 내가 원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너는 관념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어. 왜냐하면 네가 관념의 본질과 그 작용의 메커니즘을 자각하지 않으면 너는 결코 관념을 초월한 것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야.
너는 타인들에게 의존하고 있어.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타인에 대한 의존이라는 환영을 영속화시키고 있어. 그것은 아무 쓸모도 없어. 너는 이 환영 뒤로 숨은 채 ‘신은 사랑이다, 신은 지혜다, 신은 생명이다.’ 이런 말들만 되풀이하고 있어.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관념에 불과해. 그렇지 않니? 전에 너는 이것을 인식하지 못했어. 왜냐하면 너는 타인의 말에 의존하였기 때문이야. 네가 타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외부의 권위에 의존한다면 너에게 있어서 신은 결코 실재일 수가 없어.
과거에 너는 타인들의 말에 의존해왔어. 너는 그들이 너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두었어. 너는 전통, 신조, 국적 등이 너의 삶을 지배하도록 허용했어. 이 모든 것들이 분리, 두려움, 제한, 혼란, 슬픔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이야.”
이제 나는 은자님을 아주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비록 은자님의 말은 나를 향한 것이었지만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의 주의 집중 때문에 엑토플라즘이 더욱 짙어졌다. 그 순간 마치 내가 링쉬라 은자님의 암자에 와 있는 듯했다.
“자,” 그가 말을 계속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너는 신조, 한계, 분리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 생각해야만 해. 이것이 진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네가 너의 신조,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너는 결코 진리를 알 수 없어. 너는 너를 속박하고 있는 원인을 식별해야만 해. 만일 너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한다면 너는 결코 타인을 해방시킬 수 없어.
너는 환영을 분명히 식별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자유는 불가능해. 자유는 지금 존재해. 그러나 의존에 대한 환영이 너를 계속 속박하고 있어. 너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낡은 거야. 너는 반드시 낡은 것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움을 만나야 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낡은 것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어야 해. 그렇게 되면 너는 낡은 것으로 새로움을 만나지 않게 돼.
예수가 알았던, 내가 알고 있는, 그리고 네가 알기를 바라는 생명은 미래나 과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존재하는 거야. 너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면 너는 미래라는 것은 단지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네가 이 사실을 인식하게 될 때 그것은 떨어져 나가게 돼.
너는 해방감을 느끼고 있어. 왜냐하면 진리를 알았기 때문이지. 미래는 단지 마음의 관념일 뿐이야. 생명에 대한 관념은 결코 생명 그 자체가 아니야. 실재에 대한 너의 관념은 실재가 아니야. 이것을 알았을 때 너는 너의 생명을 자각하게 돼. 왜냐하면 너는 그것을 하나의 관념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야. 내 말 이해되니?”
“예.” 내가 말했다. “분명하게 이해됩니다.”
“너의 심장을 계속 뛰게 만드는 것은 너의 가족도 나라도 교회도 신조도 전통도 아니야. 이것을 알 때 너는 이 한계들을 넘어선 것을 볼 수 있을 거야. 그것은 너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는 어떤 것이야. 이 경이로운 일을 하고 있는 것은 관념도 아니고 너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너는 왜 외부의 원천에 의존해야 하지?
예수는 이렇게 말했어.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아내, 자식, 심지어 자기의 생명까지도 버리고 오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이 말의 의미는 이런 거야. 네가 어떤 사람, 어떤 존재에게 의존하는 한 그것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너는 결코 항상 지금 있는 실재를 알 수 없어. 그것은 모든 것의 배후에 존재해.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위대해. 세상에 오는 모든 혼들 속에 신의 영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한 너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어. 네가 외부의 원천에 의존한다면 너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어.
너는 결코 그리스도의 외적 표현들을 숭배하거나 그것들에 의존해서는 안 돼. 너는 진리와 실재 속에서 신을 숭배해야만 해. 외적인 존재를 숭배할 때 너는 노예가 돼. 너는 네가 숭배하는 것의 환영에 구속되게 돼.
너는 외적인 반응에 의해 자극받을 수 있어. 그러나 모든 자극들은 그 효과가 유사해. 네가 술을 마시고, 그림을 보고, 콘서트에 가고,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등 어떤 행동을 할 지라도 그것들은 동일해. 그것들은 단지 자극제에 불과해. 네가 이것을 이해하면 그것들은 떨어져 나가게 돼. 그리고 그 모든 것들보다 위대한 것이 현전하게 되지. 그것은 모든 환영으로부터의 해방이야. 그렇게 되면 너는 높건 낮건, 가치가 있건 없건 그 자극을 이해하게 돼. 그것들은 자유와 진리가 아니라 환영으로 너를 이끌어.
조직화된 종교, 정치, 의례, 국적, 전통 등이 사람을 구속하는 족쇄하는 걸 너는 이미 이해하고 있어. 그것들은 그 신봉자들을 광적으로 만들지. 그것은 투쟁과 비참함을 야기해. 우리를 혼란시키는 양의 탈을 쓴 이 늑대를 우리는 발가벗겨야 해. 필요한 작업을 너는 스스로 할 수 있어. 너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남의 말이 아니야. 그것은 또 하나의 관념에 불과해. 상반되는 것을 믿는 자들은 서로 배척하지. 그것들은 결국 동일한 거야. 스스로 생각함으로써만 너는 타인, 그리고 신조, 관념, 신봉 등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돼.
어떤 사람들은 그것들을 버리길 무척 어려워해.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야. 그들의 고정 관념이 너무도 깊이 마음속에 박혀 있어서 그것들에 사로잡혀 버린 거지. 그것이 그들의 바탕이고, 그들은 그 바탕을 통해서만 사고할 수 있어.
아들아, 그것들은 마음을 왜곡시키고 편협하게 만들고 독단적으로 만든다는 걸 너는 알거야. 결과적으로 그것은 갈등과 투쟁을 야기하지. 더 나아가 그것은 사고를 조건화시켜. 그래서 더 많은 비참함을 야기하게 되지. 그것은 결국 원인과 결과의 끝없는 사슬을 만들게 돼. 이 사슬은 오로지 네가 그것의 허구성을 인식할 때만 그치게 돼. 그랬을 때 비로소 그것은 떨어져 나가게 돼.
그리고 즉각적으로 자유와 실재가 현현하게 되지.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현재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너의 사고와 느낌의 반응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것이 필요해. 그랬을 때 너는 환영의 그물에 걸리지 않게 되는 거야.
만일 네가 너에게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타인들에게 의존한다면 그들이 아무리 고결하다 할지라도 너는 다시 분리와 의존 속에서 길을 잃게 돼. 그룹에는 시작과 끝이 있어. 그리고 대개의 경우 구성원들은 서로 반목해. 그리고 그것은 더 많은 혼란을 야기하게 되지.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을 추구한다면 그 여행은 너의 내면속에 있어. 다른 모든 길은 환영으로 이끌 뿐이야. 그 속에는 자유도 진리도 없어.
갈등과 슬픔을 그것과 동일한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애쓰면 오히려 상황이 더욱 악화될 뿐이야. 더 큰 갈등, 슬픔, 좌절만을 체험하게 되지. 그러나 네 주위에서 발생하는 일을 부단히 자각하며 길을 가다보면 너는 항상 지금 존재하는 실재와 사랑의 표현을 막고 있는 것을 식별하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네 인생 여정은 계시의 과정이 될 거야. 그것은 끊임없는 해방과 창조의 체험이야. 그 속에서만이 자유와 진리가 현현하게 돼."
“자, 아들아.”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 자유를 체험하기 위해서 너는 어떤 권위나 개인에게 의존해서는 안 돼. 그 권위나 개인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할지라도 말이야. 왜냐하면 의존은 어떤 경우든 불확실과 두려움을 야기하고, 결과적으로 실재에 대한 체험을 방해하기 때문이지.
아들아, 오늘날 세상에는 창조적인 이해가 거의 없어. 자기 인식 없이 달려든다면 거기 아무런 희망도 없어. 자아 인식이 없다면 우리는 갈등, 슬픔, 혼란, 유혈에 빠지게 돼. 자아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이 너는 자아를 넘어서 고요한 존재의 상태에 이르게 돼. 그리고 항상 지금 존재하는 실재, 사랑과 지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돼.
너는 항상 현존하는 실재를 만들어내지 못해. 자아가 실재에 이르는 장애물이라는 것을 네가 깨달을 때만 실재는 작동하게 돼.
자아는 악의 근원이야. 예수는 이것을 알고 있었지.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던 거야.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지켜볼 때 너는 내면을 자각하게 돼. 그 내면은 사랑이야. 그것은 실재의 지성적 표현이지. 내면에 대한 자각이 있을 때 외부는 투명하게 보이게 돼. 이것은 타자와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야. 그것은 네 안에 있는 실재야. 실재는 타인 안에도 존재해. 실재 속에는 분리란 없어.
그때 너는 악이 혼란된 인간의 마음의 표현이라는 걸 알 수 있어. 그것은 자아 속에만 존재하는 거야. 그것은 환영이야. 그것은 갈등 속에 있는 기억과 관념의 다발이야.
아들아, 네가 이것을 이해할 때, 너는 교활한 기만과 속임, 허구로 가득 찬 외부를 볼 수 있게 돼.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길을 잃어버렸지. 이 혼란과 불행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상념-느낌-반응을 통해 그것들을 지배하는 공적인 의견을 받아들이지. 이제 너는, 내가 말한 계시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을 거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만든 상태들에 대해 반항해.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그들 자신의 상념-느낌-반응으로부터 일어난 인과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지. 자신의 상념-느낌-반응을 식별하고 이해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해. 그렇게 했을 때에만 그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야.
어떤 특정한 믿음을 따를 경우 사람들은 그 믿음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게 돼. 만일 그 믿음과 상반되는 어떤 것이 일어나면 그것을 단번에 배척해 버리지. 그렇게 그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몸부림치며 나아가게 되지. 그래서 그들은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거야.
네가 실재의 즉각적인 현존을 깨달을 때 거기에는 어떤 차별도 분리도 없어. 모든 것이 같아. 처음과 끝, 그리고 끝과 처음이 모두 같아. 왜냐하면 그것들은 살아있는 현존 속에서 하나이기 때문이야.
분리는 결코 존재할 수 없어. 따라서 차별도 있을 수 없지. 모든 것이 항상 지금 존재하는 사랑의 왕국 속에서 하나야. 처음과 끝은 하나야. 우리는 지금 무한 속에서 하나야. 왜냐하면 우리는 그 바깥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 무한의 바깥에는 어떤 존재도 없어.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왜냐하면 그들은 분리와 차별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
자, 아들아.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모두, 살아있는 신의 우주 신전 속에서 행복하게 살게 될 거야. 전 인류의 우애와 아버지 유일자의 영광 속에서."
말을 마치자 그가 두 팔을 들어 올려 축복의 사인을 지으며 말했다.
“오, 거룩한 유일자여, 무지 속에서 우리는 당신을 외부에서 찾았나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외부는 비실제적이라는 걸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내면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무가보의 진주를 찾게 됩니다.
외부에서 영감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우리는 두려움과 의심이라는 바람 앞에 흩날리는 겨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리의 경계를 넘어 당신의 사랑의 날개를 펼쳤을 때, 당신은 기쁨에 찬 우리의 가슴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독생자 그리스도, 당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 축복받으신 이여, 오 축복받으신 이여."
은자님의 말이 끝난 뒤 잠시 깊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그가 게쉬 린포체를 향해 몸을 돌리고는 말했다.
“사흘 후에 있을 정기 모임에 다시 오겠소. 그때 우리의 아들은 세상을 향해 출발할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사역을 완수할 때까지 그를 지켜보게 될 것이오."
말을 마치자 그가 우리를 떠나갔다. 나는 그의 위엄에 찬 모습이 안개 속에 녹아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전全 아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이 현자와 함께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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