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베인/그리스도 요가

그리스도 요가(Christ Yoga) 16장

기른장 2020. 3. 22. 18:31

아름다운 겨울 아침이었다. 공기가 상쾌했다. 초몰하리 산 뒤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신들이나 봄직한 대 장관이었다. 아침이 더 환해진 것 같았다. 일출도 더욱 장엄하게 느껴졌고 초몰하리도 더 아름답게 보였다. 햇살이 산등성이 너머 하늘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맑은 푸른 하늘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별들을 배경으로 산봉우리가 찬란하게 빛나는 커다란 다이아몬드처럼 보였다.

 

나는 발코니에 서서 머리 위로 밝게 변해가는 하늘빛의 파노라마를 지켜보고 있었다. 라마들의 영창 소리가 들려왔다. "옴 마니 반메 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나는 링쉬라 은자님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그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던 경이에 찬 순간을 떠올렸다. 그 때 누군가 내 곁에 있다는 걸 느꼈다. 나의 스승이었다. 그 역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대 장관을 즐기고 있었다. 그가 팔을 내 어깨에 둘렀다. 그것은 그의 평소 애정 표현 방식이었다. 그가 말했다.

 

“아들아, 이 아침에 네가 여기 있을 줄 알았어. 나는 네가 설산 초몰하리 뒤로, 떠오르는 햇살에 둘러싸여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있었어. 내가 일찍이 보지 못했던 아주 영감에 넘치는 장면이었어. 너는 네 주위로 넓게 퍼져가는 햇살 한 가운데 서 있었어. 온 세상을 향해 빛을 반사하고 있는 설산을 배경으로 둥뚜렷이 나타나는 너의 모습이 장엄하게 보였어. 그 장엄한 광경에 나는 놀랐단다. 나는 너와 너의 사역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비록 육신으로는 함께 하지 못하지만 영으로는 너와 함께할 거야. 오늘 아침에는 행위에 대해 말해주고 싶어. 우리 자리에 좀 앉을까?" 그가 말했다.

 

우리는 일출을 보면서 함께 앉았다. 그는 말을 곧 시작하지 않고 잠시 침묵한 채 앉아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순간 시간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동안 고요한 변화가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세계의 본질은 개인이야.

개개인의 변화 없이는 세상의 변화도 불가능해.

왜냐하면 개인은 세계가 지금 놓인 갈등의 근원이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집단이 변화돼야 개인이 혼란과 갈등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고 믿고 있어.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야.

왜냐하면 개인적 변화 없이는 집단의 자유도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왜냐하면 개인의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는 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왜냐하면 개인은 전체와 분리돼 있지 않기 때문이지."

 

그 순간 나는 그의 목소리를 영원히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전체의 산물이야." 그가 계속 말했다.

“비록 우리들은 저마다의 환경에 따라 사회적, 종교적, 인종적, 정치적으로 각각 다르게 조건화되어 있지만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의 모든 과정은 이 조건화야.

이것을 이해할 때만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게 돼.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자신이 어떻게 조건화 되게 되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야.

 

자, 아들아. 세상은 모종의 액션을 취하라고 외치고 있어.

우리 모두는 행동하기를 원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를 원해.

특히 세계가 정치적, 종교적 반목으로 분리될 때 말이야.

세계는 혼란과 불행 속에 빠져 있어.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우리 자신의 행동 때문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어.

우리는 세계야.

 

행위 그 자체는 사실 존재하지 않아.

행위는 오로지 한 개인이나 사물 또는 관념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어.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행위를 이해해야만 해.

이 이해 속에서 우리는 올바르게 행위를 할 수 있어.

 

행위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야.

자신의 조건화에 따라 행위 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패턴에 따라 행동하게 돼.

그것은 반응에 불과해. 그것은 행위가 아니야.

왜냐하면 우리는 습관화 된 이 패턴을 어떻게 습득하게 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이야.

 

만일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관념에 맞추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행위가 될 수 없어.

그것은 단지 하나의 패턴에 따르는 것에 불과해. 그렇지 않니?

나는 네가 주의 깊게 지켜보기를 원해. 그래야만 너는 이 중요한 문제를 이해할 수 있어.

네가 세상에 돌아가면 너는 이 문제와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될 거야.

 

그러므로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너는 반드시 일정한 패턴을 따르는 이 잘못된 과정을 이해해야만 해.

습관은 결코 올바른 행위가 될 수 없어. 올바른 행위는 반응이 아니야.

하나의 패턴에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행동은 혼란과 갈등의 원인이야.

왜냐하면 너는 그것의 잘못을 모르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너의 행동은 패턴의 반복이야.

이런 식으로는 결코 평화와 조화가 있을 수 없어.

하지만 네가 잘못을 잘못으로 인식할 때 그 잘못은 떨어져 나가게 되고 너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어.

 

올바른 행위는 생명 그 자체에 대한 평화로운 접근이야.
그것은 욕망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 생명을 이용하려고 애쓰는 난폭한 접근이 아니야.
그것은 필연적으로 슬픔과 갈등을 낳는 자아의 표현에 불과해.
그런 행동은 관념의 결과야.
그것은 네가 잘못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한계 없는 상태에서 작동하는 진정한 행위가 아니야.
네가 잘못을 이해할 때 너는 비로소 올바르게 행위할 수 있어.
그리고 우리는 관계를 통해서 그것을 가장 잘 깨달을 수 있어. 이해되니?"

 

“예.” 내가 대답했다. “일상 삶의 관계 속에서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자명합니다. 깨어있는 사람들은 관념, 전통, 시스템, 관습에 따른 개인적, 집단적 행위가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거나 그것에 순응하는 것으로는 임박한 재앙을 막을 수 없습니다. 원인을 이해함으로써만 변화를 낳는 올바른 행위가 가능합니다."

 

“이제 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계속 말했다. “변화는 시간의 경과를 통해서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일어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결코 무시간적인 존재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시간적 상태에서만 고요, 자유, 평화, 행복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 아들아.” 그가 대답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중시하는 거야.

세계 곳곳에서 갈등, 가난, 고통, 파업, 국지전 등이 벌어지고 있어.

이것들은 결국 전 지구적인 규모의 고통으로 발전되지.

하지만 그 문제들은 해결될 수 없어. 왜냐하면 거짓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이것을 지적으로 토론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어. 실제 체험이 있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변화는 불가능해.

너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잊어버려야만 해.

나는 그 누구의 말도 인용하지 않아.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다른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을 때 그 때 너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어.

너는 스스로의 힘으로 발견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너는 다른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돼.

 

만일 네가 어떤 관념을 따르게 되면 이해는 불가능해. 그것은 맹목적 순응에 불과해.

그러므로 관념과 행위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 발견하는 것이 중요해.

만일 관념이 앞서게 되면 너는 그 관념에 순응하게 돼. 그것은 단지 관념에 대한 모방에 불과해.

우리의 문명의 전 구조는 대립되는 관념 위에 세워져 있어.

 

그것이 바로 혼란과 갈등이 존재하는 이유야.

대립되는 관념들로 인해 세계는 분리돼 있어.

관념들의 전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편당을 짓는 것은 어리석고 유치해.

그것은 성숙하지 못하다는 징표야.

성숙한 사람은 인간적 갈등, 전쟁, 기아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해.

편당을 짓는 것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조건화시키는 거야.

그렇게 되면 문제에 대한 해결은 불가능해.

 

만일 관념들이 너의 행동을 짓게 된다면 바로 그 행동에 의해 더욱 큰 불행과 혼란만 부추기게 돼.

그러나 너의 행위가 관념이나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는 걸 네가 인식하게 되면

개선할 필요가 없는 긍정적인 상황들이 발생하게 돼.

 

그런 상태는 관념에 따른 것이 아니야.

그것은 관념의 본질과 그 작용의 메커니즘, 그리고 행동의 형성 방식 등을 이해했을 때만이 가능해.

 

관념으로부터 만들어진 행동은 진정한 행위를 해쳐.

그러한 행동으로 문제의 해결책을 구하는 것은 헛된 짓이야.

관념에 바탕을 두지 않은 행위만이 갈등과 적의로부터 자유로운, 항상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

내 말 이해되니?"

 

“예.” 내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너는 알 수 있을 거야.” 그가 계속 말했다.

 

“지배욕이 얼마나 악하고 어리석은 것인지. 타인의 생각을 자기 뜻대로 좌우하려고 강제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과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어.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것을 반복해서 봐왔어. 우두머리나 모사謀士를 만드는 것은 너 자신이야. 왜냐하면 너는 혼란돼 있기 때문이지. 그렇기 때문에 너는 우두머리나 모사에게 의지하는 거야.

 

사랑, 이해, 친절, 자비가 진정 유일한 힘이야. 이 실재의 힘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줘. 책략, 권력에 사로잡힌 마음은 결코 사랑을 알지 못해. 사랑이 없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너는 이해를 미룰 수도 있어. 너는 그것을 지성적으로 회피할 수도 있어. 너는 임시방편들을 만들 수 있어. 그러나 선의가 없다면 불행과 파괴만이 증가될 뿐이야. 상식적인 인간에게 이것은 자명한 거야.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관념도, 청사진도, 더 나은 지도자도 아니야. 필요한 것은 선의, 자비, 사랑, 친절이야.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친절을 갖춘 사람들이야.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만 해. 만일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타인을 사랑하길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타인이 친절하고 자비에 넘치기를 기대할 수 있겠니?

 

사랑은 하나의 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야.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의 특정한 신을 숭배하고 있어. 그것은 다른 신을 믿는 신자의 믿음과 대치될 수 있지. 그렇지 않니?

 

어떤 이들은 특정한 이미지, 석상, 목상, 또는 신에 대한 특정한 개념을 숭배해. 이것은 자신과 타인의 야만성으로부터의 놀라운 도피행위야. 하지만 그것은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는 않아. 사랑이 유일한 해결책이야.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는 거야. 이웃은 네가 만나는 모든 이들을 의미해. 아들아, 그것이 진리야. 그것은 단순한 관념이 되어서는 안 돼. 그것은 내면의 역동적 변화야. 왜냐하면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외화外化되기 때문이지. 이것이 그리스도 요가야."

 

그가 막 말을 마치자 게쉬 린포체와 원장이 밖으로 나와 우리 옆에 앉았다. 잠시 후 다른 사람들도 뒤따라 나왔다. 그 즈음 해가 떠올랐고 기온이 후끈해졌다.

 

이 발코니는 게쉬 린포체가 즐겨 일출을 보는 장소였다. 그는 대개 이곳에서 아침 차를 마시곤 했다. 잠시 후 수 명의 라마들이 티베트 차를 가지고 왔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차를 즐기게 되었다.

 

우리 사이에 일반적인 대화가 오갔다. 그때 퉁라가 내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걸 느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티베트 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텔레파시 수련을 위해 나는 영어로 대답했다. 게쉬 린포체가 우리에게 다가와 웃음 지으며 말했다. "두 사람, 서로 마인드 리딩을 하고 있나?"

 

내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이걸 먼저 시작한 건 당신입니다."

 

이 말에 좌중이 모두 웃었다. 이제 우리의 마인드 리딩은 완전 오락이 되었다. 그날 밤 우리는 종종 마인드 리딩 게임을 했다. 퉁라와 나는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그냥 인간일 뿐이었다. 초인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초인은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며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모든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어리석은 우월의식에 빠진 몽매한 자들만이 그런 현상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몰고 간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우리는 햇살을 즐기며 발코니에 계속 앉아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게쉬 린포체가, 내내 곁에 붙어 있던 내게 말했다. "얘야, 점심 먹으러 가자."

 

우리는 모두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지난 번 영교 모임 때와 동일한 배석이었다. 그 이후에도 우리가 모두 모일 때면 항상 같은 배치로 않았다. 나의 스승이 테이블의 반대 끝에 앉았고, 그 우측에 다르창, 좌측에 밀라파가 앉았다. 원장은 게쉬 린포체의 좌측에 앉았다. 퉁라는 나의 우측에, 창타파는 원장의 좌측에 앉았다. (<히말라야를 넘어서> 9장을 보면 자리 배치를 볼 수 있다.)

 

마음이 둔중해진 순간은 없었다. 우리는 깨어 있었고, 마음은 항상 명징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지내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식사 후에 게쉬 린포체는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

 

점심 후, 그는 조만간 다시 모임이 열릴 것이고 전처럼 다시 친구들(육신을 떠난 사람들과 링쉬라 은자님처럼 아직 육신을 지니고 있는)을 만나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와 링쉬라 은자님이 조정한 대로 3일 후 일요일 밤에 모임이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그 말에 나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아도 내 일정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모임이 언제 열리는 지 수 차례 물어보려고 망설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에게는 6일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이 소중하기 그지없는 시간을 나의 모든 친구들, 특히 게쉬 린포체와 같이 보내고 싶었다. 사실상 그 목적을 위해 그는 라사를 넘어 멀리 트락체 사원까지 온 터였다.

 

점심 후 게쉬 린포체가 나를 자기가 묵고 있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이것은 매일 오후 반복되었다. 그는 그 시간에 나와 얘기하기를 가장 좋아했다. 그날은 그가 내게 뭔가 아주 중요한 일을 말하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말을 시작했다. “아들아, 네가 우리를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구나. 한편으로는 슬프고, 한 편으로는 기쁘다. 너를 육신으로 다시 볼 수 없게 되어 슬프고, 반대로 영으로 너와 항상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기쁘구나. 나는 육신을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그가 그렇게 말하자 슬퍼졌다. 그러나 육신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거기에 진정한 죽음도, 분리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기쁘기도 했다. 내가 이 얘기를 하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는 그에게 아주 많이 끌리고 있었고,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자, 아들아.” 그가 말했다.

 

“누군가를 추종하는 것으로는 너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해.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너 자신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지. 누군가를 추종하는 것은 아주 쉬워. 인성이 뛰어날수록 따르기도 쉽지. 그러나 그것은 창조성을 막게 돼. 왜냐하면 추종자는 결코 창조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 이 사실을 이해하였을 때 너는 독창적이 될 수 있어. 더 이상 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녹음기가 되지 않게 돼. 나는 너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어. 이것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지. 이해되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계속 말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네 자신과 직면할 때 너는 너의 본질을 알게 돼. 왜냐하면 관계는 거울이기 때문이야.

그 속에서 너 자신을 볼 수 있는 그런 거울. 하지만 그것은 종종 불쾌하지. 그렇기 때문에 너는 네 자신을 보기를 원치 않아. 그래서 너는 누군가를 추종함으로써 도피하려고 애쓰지. 그러나 그것은 타인의 그림자 속에서 사는 거야. 어떤 사람들은 도피 수단으로 새로운 사상에 매달리기도 하지.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불과해.

 

자기 자신을 보기 위해서는 비난도 수용도 정당화도 동일시도 해서는 안 돼.

이런 식으로 초연하게 자각한다면 너는 의식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 있게 돼. 그리고 깊이 감추어진 너의 반응이 네 앞에 스크린처럼 펼쳐지게 돼. 이것은 오로지 네가 사고 과정을 이해했을 때만 가능한 거야.

 

상념은 네가 축적해 놓은 기억으로부터 일어나. 이것이 너의 조건화야.

그것을 이해했을 때 자아와 그 작용에 대한 자각이 생기지. 왜냐하면 사고를 하는 자와 사고는 분리돼 있지 않기 때문이야. 이것을 알았을 때 너는 너를 너의 상념과 분리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게 돼. 너는 그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되지. 너의 상념들을 이해했을 때 너는 네 자신과 너의 상태를 이해하게 돼.

 

어째서 너는 하나의 생각에만 집중하려고 하지?
어째서 너는 하나의 생각을 붙들고 다른 모든 생각들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지?
너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면 너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어.
너는 하나의 생각에 집중하고 다른 생각들을 억누름으로써 네 자신이 그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해.
왜냐하면 그 억압된 생각들은 꾸역꾸역 일어나 기어코 집중을 흩어놓기 때문이지.
그런 식으로는 너는 네 자신이나 너의 생각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어.
너 자신에 대한 이해 없이는 올바른 사고는 불가능해.

 

하나의 생각을 선택하고 그것에만 의식을 집중하는 것, 너는 그것을 명상이라고 여겼어.
그러나 이런 식의 명상으로는 결코 너의 조건화된 사고의 짐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어.

 

너는 왜 하나의 생각을 선택해서 거기에 집중하는 거지?
너는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결과나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그것 뒤로 숨을 수 있는 거지.
그러나 하나의 생각에 집중하고자 하는 그 욕망 자체가 꾸역꾸역 일어나는 다른 모든 상념들에 대한 저항을 만들게 돼. 그 결과 네가 선택한 하나의 생각과 억누르려고 애쓰는 다른 모든 생각들 사이에 끊임없는 싸움이 벌어지게 되지.

 

그런 식으로는 너는 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네가 찾고 있는 자유도 얻을 수 없어.

네가 이점을 분명하게 이해했으면 좋겠어. 그러나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지켜보고 그것의 의미를 발견한다면 그 상념들은 결코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 상념들은 그걸로 종료되는 거지. 이해되지 않은 상념은 종료되지 않아. 그것은 계속해서 꾸역꾸역 일어나게 돼.

 

중요한 것은 상념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거야.

너의 마음이 욕망과 환경과 축적에 의해 편협하게 한정되고 통제되고 조형되는 한 결코 자유를 얻을 수 없어. 자기 보호를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과정은 정반대의 결과를 야기하게 돼.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지. 두려움에 찬 마음이 어떻게 두려움 없는 실재를 향해 열릴 수 있지?

 

너는 너의 상념들이야. 이것을 알았을 때 너는 이해하기 시작한 거야.
네가 너의 상념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그것들을 너와 분리된 것으로 보게 되고 그것들을 두려워하게 돼. 그러나 그것들이 네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창조물들은 더 이상 너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게 돼. 이 이해 속에서만이 자유가 생기게 돼. 그리고 그 자유 속에서 실재가 현현하게 되지. 그렇게 되었을 때 너는 생각하는 자와 생각 사이에 싸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돼. 그리고 마음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지.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마음은 고요해지게 돼. 그것은 만들어진 고요가 아니야.

만들어진 고요를 통해서는 마음은 결코 실재를 알 수 없어. 그런 식으로는 실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해.

 

너는 조건화된 마음을 식별할 수 있어. 그것은 속박돼 있어. 그것은 보잘 것 없어. 보잘 것 없는 마음이 신을 보잘 것 없게 만든 거야. 사고 과정이 종식되어 더 이상 대립 속에 싸우지 않게 될 때 마음은 자유롭게 되고 고요해지게 돼. 그 고요 속에서 존재는 보다 광활하고 깊은 상태가 돼. 그러나 만일 네가 계속 깊이 쪼기만 하면 그것은 사변적이 돼 버려. 그것을 그쳐야만 실재가 현현하게 되는 거야.

 

그러므로 이해는 명상의 시작이야. 진정한 명상은 실재에 이르는 문이야.
배워야 할 트릭도, 따라야 할 테크닉도 없어.
왜냐하면 그것은 너를 자유와 자기 인식의 첫 번째 원리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기 때문이지.
자기인식이 없으면 자유는 불가능 해.

 

너는 반드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봐야만 해. 그러면 너는 너 자신을 이해하게 돼.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마음은 고요해지게 돼.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존재의 무한한 상태 속에서 실재가 작동하게 되지.

 

아들아,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영감에 이르는 길이야.

그것은 자유로운 마음이야.

그것은 과거의 축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실재와 새로움을 가리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이야.

너는 과거와 낡은 것의 방해 없이 새로움을 만나야만 해."

 

전에도 유사한 말들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말들은 보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말들에는 보다 깊은 내적 변성을 가져오는 힘이 있었다. 거기에는 내가 하나의 생각에 마음을 집중하는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었던 이해와 자유가 있었다. 내 앞에 모든 과거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것이 자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그것에 부여한 힘을 제외하고는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두려움은 내 자신의 조건화에 의해 스스로 창조한 환영이었다.

내가 이것을 알게 되자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다가오지 않던 자유가 느껴졌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