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베인/그리스도 요가

그리스도 요가(Christ Yoga) 17장

기른장 2020. 3. 23. 12:17

모임이 예정된 밤이 다가왔다. 하늘은 맑았다. 달빛 쏟아지는 천개天蓋 속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하늘 가득 별들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달은 만월이었고, 지난 번 모임 때와 같은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협곡과 초몰하리가 완전히 눈으로 덮여서 세상이 온통 하얗다. 아름다운 초몰하리는 달빛 교교한 파란 하늘 속에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배경으로 미를 뽐내며 달빛 실루엣을 드리운 채 파수꾼처럼 우뚝 서 있었다.

 

풍광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비록 바깥은 잔뜩 얼어붙어 있었지만 우리 주위에는 온기가 흘렀다. 그것은 인공적인 수단으로 만들어진 온기가 아니었다.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은 투모의 달인들이었다. 하지만 특별히 투모를 행하지 않아도 열기가 충분했다. 거기에는 행복하고 조화로운 기대감이 넘쳤다. 대기 속에 자기磁氣가 흘렀다. 오늘 밤, 성공적인 모임이 예감되었다. 모든 조건들이 이 보다 더 완벽할 수 없었다.

 

게쉬 린포체가 지난번처럼 모임의 시작에 앞서 입을 열었다.

 

그가 말했다. “사랑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닙니다. 단어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닙니다. 신은 '신'이라는 단어가 아닙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단어가 만들어내는 반응 때문에 그 단어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단어는 특정한 신경 반응을 만들어냅니다. 사람들은 단어를 먹고 삽니다.

 

그러나 말은 공허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경 반응만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나 신이라는 말은 사랑도 아니고 신도 아닙니다. 우리가 말의 본질을 알았을 때, 그리고 말이 마음속에서 어떻게 관념들을 형성하는지 알았을 때에만, 우리는 신이나 사랑이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어는 반응을 만들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응만 알뿐 행위를 모르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행위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사랑이 아니고 신이라는 단어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때에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느낌과 고통에 대해 민감할 때에만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을 이해하길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기도, 구세주, 관념, 집중, 환생, 술, 도취제 등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은 배고플 때 어떻게 먹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하지 않습니다. 그저 음식을 원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사려 없음, 어리석음, 편협함, 야만성을 알아야만 고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직시할 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고통의 원인에 대해 예민해지고, 주의 깊어지며, 깨어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무감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됩니다.

 

고통을 이해할 때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예민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회피하려 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친절과 사랑이 있을 때 회피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지고의 지성을 요구합니다. 예민하지 않으면 뛰어난 지성도 불가능합니다. 오로지 지성인만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사랑이 아니고 신이라는 단어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사랑과 신이 현전하게 됩니다."

 

나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내면에서 느껴졌다. 깊은 내적 변성이 일었다. 우리는 몇 분 동안 침묵에 잠겼다. 신이라는 단어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었다. 내 생각에, 우리 모두 동일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다시 말했다. “지난 모임 때보다 조건들이 훨씬 더 완벽합니다. 오늘 밤 우리는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조건들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그의 연설 덕분이었다. 나는 방 전체가 엑토플라즘으로 가득 채워지면서 하나의 거대한 구름이 형성되는 걸 보았다. 마치 전처럼 하늘의 구름 속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 전보다 훨씬 더 강한 느낌이었다.

 

구름이 서서히 사람의 형상을 띠더니, 이윽고 아주 분명해졌다. 그때 밀라레파가 예의 그 축복의 몸짓을 하며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곧 영교 모임이 활기를 띠었다.

 

밀라레파가 우리 모두에게 말했다.

“나는 우리의 형제인 게쉬 린포체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기 바랍니다.

신-진리-사랑은 당신들로부터 떨어진 무엇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신은 영원, 항존하는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신은 혼란되고, 조건화되고, 제한된 마음으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어떻게 무한하고 조건화되지 않은 실재-신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마음은 자신의 제한, 조건화로부터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만 마음은 한정, 관념, 말을 초월한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실재는 미지자입니다. 말로는 결코 미지자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자아는 실재를 만들어냅니다. 왜냐하면 자아는 모방하고 베끼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관념들로 가득한 책들을 너무도 많이 읽어왔습니다.
자아는 이 모든 관념들, 타인의 경험들, 말, 말, 말들을 반복할 뿐입니다.
만일 당신 마음속을 들여다 본다면 당신은 말의 본질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모방하지도 베끼지도 타인의 말을 되풀이하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말이나 관념들을 초월해 있고 그것들보다 더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그것들은 마음의 창조물들입니다. 그러나 실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 서적들을 읽고 신에 대해 사색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들은 그것들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아에 대한 이해 없이는 실재에 대한 깨달음은 불가능합니다."

 

말을 마친 뒤 그가 내게 와서 말했다.
“아들아, 너의 사역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될 거야. 우리는 따라다니면서 너를 도와주고 보호해 줄 거야.
너의 작업은 거짓을 폭로하는 것이야. 너는 거짓에 무자비해야만 돼.
너는 그것의 잘못을 낱낱이 들춰내야 돼. 왜냐하면 그것만이 거짓을 녹일 수 있기 때문이야.
말의 그물에 걸려들어서는 안 돼. 왜냐하면 거짓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야. 거짓은 거짓이야.

 

그것이 거짓에 대한 진실이야.
너는 그것을 축소시켜서도 안 되고 그것에 어떤 형태로든 실재의 옷을 입혀서도 안 돼.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야.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 속에 아무리 깊이 거짓이 박혀 있다 해도,

그것이 그들에게 아무리 소중하고 뿌리 깊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너는 결코 그것들에 동의해서는 안 돼.

너는 그 마음의 창조물들의 거짓됨을 폭로해야만 해.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지.

 

실재는 배제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해.
사람과 사람을 분리시키는 것은 거짓이야.
그것이 바로 관념과 말이 하는 짓이야.
말이나 단어, 관념 속에서는 결코 진리를 발견할 수 없어.
네가 이것을 깨달을 때에만 실재가 작동할 수 있어.
그리고 그 작동 속에서 사랑과 무한한 지성이 현현하게 돼."

 

이번에는 밀라레파가 창타파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창타파는 오크 사원의 예언자이고 밀라레파가 게쉬 린포체에게 말할 때 이용되는 영매였다. 밀라레파는 게쉬 린포체가 히말라야에서 눈 속에 갇혔을 때 창타파를 통해 게쉬 린포체에게 음식을 주기도 했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책, <히말라야를 넘어서>에 언급돼 있다.)

 

그 사이에 링쉬라 은자님이 내게 왔다. 나는 그를 일주일도 채 안 돼 다시 보게 되어 기뻤다. 그를 처음 찾아갔을 때가 떠올랐다. 놀랍게도 그는 그때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다. 은자에 대한 흠모심이 더욱 깊어갔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내게 애정 어린 상념과 축복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놀라운 친구들을 가졌다는 걸 새삼 절감할 수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너의 걸음걸음마다 따라 갔어. 녠첸탕가 산맥의 니블룽리충 산 위에서도 나는 너와 함께 있었어. 잠사르는 나의 암자로부터 직선거리로 40마일정도밖에 되지 않아. 하지만 미답지라 산길이 없지. 그래서 너는 잠사르까지 150마일을 돌아가야만 했던 거야."

 

그가 계속 말했다. “아들아, 너 때문에 참 기쁘다. 잠사르에서 너는 많은 사색거리를 발견했더구나.”

 

“예.” 내가 말했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아주 깊이 토론했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자,” 그가 말했다.
“질서는 혼란을 통해서는 올 수 없어. 네가 이점을 깨달았으면 해.
질서를 만들기 위해 혼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는 질서는 이루어질 수 없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이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 혼란과 무질서를 사용하도록 신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생각해.

이것이 지상에 전쟁과 경제 공황이 계속 반복돼 일어나는 원인이야.

 

너는 궁극적으로 이 상태들이 종식되도록 미래의 변화를 찾고 있어.

그러나 그것은 항상 미래에 속할 뿐이야.

이제 마음은 항상 미래의 관점에서 사고하게 되지. 때문에 마음은 현재 속에서 작동할 수 없게 돼.

 

아들아, 너는 변성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니?”

 

“예, 이해합니다. 미래의 어느 때에 일어나는 변성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저는 압니다. 그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거짓을 거짓으로 보고 진리를 진리로 볼 때,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거짓을 볼 때 변화는 지금 바로 일어납니다. 그것은 내일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변성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거짓을 알았을 때 나는 그 거짓에 대한 진실, 즉 그 거짓이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즉각적으로 변성이 일어나고 그 변성 속에서 해방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래, 내 아들아.” 그가 말했다.
“반복은 한정된 마음의 투사야. 네가 이것을 깨달을 때 변성이 일게 돼.
무엇이 분리, 갈등, 불행을 만드는 지 알 때 즉각적인 변성이 일게 돼.
바로 그것의 진리성이 해방을 주는 거지.
진리에 대한 인식은 우리를 변화케 하고 자유케 해.
그것은 내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거야.
왜냐하면 변성은 지금 일어는 것이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다면 변성은 불가능해.

 

네가 돌아갈 세상에서 너는 거짓에 둘러싸이게 될 거야.
그러나 거짓에 대한 인식은 순간순간 변성을 가져오게 돼.
너는 기억, 시간을 통해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어.
왜냐하면 진리는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지금'이기 때문이야.
너는 결코 내일 진리를 발견할 수 없어.
그리고 네가 읽었거나 들은 것들 속에서도 진리를 발견할 수 없어.
왜냐하면 그것들은 관념에 불과하기 때문이야.
네가 진리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너에게 다가오는 거야.

 

네가 진리를 향해 가고 있을 때 그것은 단지 너의 자아의 투사에 불과해.
자아를 이해했을 때 진리는 오는 거야.
그것은 즉각적이야. 영원은 지금이야! 지금은 새로워.
그것은 과거의 반영이 아니야. 왜냐하면 그것은 기억이기 때문이야.
'지금'은 미래도 아니야. 미래는 마음에 속해 있어.
'지금'은 생생히 살아있어. 과거는 죽었어. 미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어.

 

만일 네가 낡은 것을 가지고 새로움에 접근한다면 너는 결코 그 새로움을 발견할 수 없어.
낡은 짐을 진 채로는 새로움을 체험할 수 없어.
그것을 네가 깨달을 때에만 낡은 것이 새로움 속으로 계속 투사되는 것이 멈추게 돼.
아들아, 그것은 순간으로부터 순간으로 존재해.

 

한 순간이라도 과거에 속한 것은 결코 지금 존재할 수 없어.
마음에 속한 것은 새로움에 방해가 돼. 그러므로 너는 신선하게 새로움에 접근해야만 해.
결코 과거에 의해 조건화 되어서는 안 돼.
그렇게 되었을 때만 너는 순간순간 거듭나는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어.

 

네가 변화되기를 갈망할 때 변화는 불가능 해.
왜냐하면 너는 '되기'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있기 때문이야.
진리는 지금 순간순간의 '존재'야.
진리는 결코 책 속에서 발견되지 않아.
그것은 웃음 속에서, 눈물 속에서, 포옹 속에서, 충만한 사랑 속에서 순간순간 발견할 수 있어.
사랑이 없다면 진리는 존재할 수 없어.
사랑이 있는 곳에 변화가 있어.
왜냐하면 사랑은 순간순간의 '존재'이기 때문이야.
아들아 그것이 진리야.

 

네가 이곳을 떠나도 우리는 너와 함께 있을 거야.
우리 각자의 내면에 거하는 영靈 속에는 분리라고 하는 것은 없어. 신은 분리되지 않아.
이 위대한 진리를 감추는 것은 조건화된 마음이야.
아들아, 이것을 알면 너의 믿음은 계속될 거야. 그리고 너의 사랑이 너를 해방시킬 거야.
구속하는 사랑은 진리가 아니야. 구속하는 사랑은 마음에 속한 거야.
진리-사랑은 마음을 초월해 있어. 그리고 그것이 유일한 실재야."

 

이윽고 그가 비켜서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제 너의 위대한 영적 안내자, 성 안토니오가 너에게 말할 거야."

 

나는 성 안토니오와 대화하기를 갈망하였다. 나는 전 세계를 다니며 그와 아주 많이 말했었다. 나는 나의 사역에 그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말은 비록 동일한 진리가 드러나긴 하지만 다른 분들과는 그 표현방식이 달랐다.

그가 손을 앞으로 내밀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손을 잡게, 친구여.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만물을 창조한 자기적 질료를 통해 자네의 계획을 돕고 있네.
모든 형상, 모든 현현의 바탕에는 단 하나의 질료가 있어.
비록 그 질료는 상이한 여러 단계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말이야.
이제 자네는 그 모든 단계의 질료들을 가지고 있네.
비록 의식하고 있지 못하지만 자네는 그 모든 것들을 활용하고 있어.
그것들은 하나의 질료의 세분화에 불과해. 하지만 그것들은 분리돼 있지 않아.

 

육신을 떠나더라도 자네는 여전히 동일한 질료의 상이한 차원 속에서 기능하게 돼.
이 과정은 여러 단계를 통해 계속 되게 돼. 그때마다 그 질료는 더욱 더 정묘해지게 되지.

 

자네는 일을 수행해 나갈 때 자기체magnetic body로 알려져 있는 것을 사용하게 될 거야.
자기체는 육체에 필요한 생명에너지를 공급해 줘.
자네는 멘탈체와 영체도 동시에 사용하게 될 거네.
이것은 자네 마음의 심리학적 측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네.
그것은 자네의 아스트랄체와 자기체를 모두 관통하고 있는 영체를 말하는 거야.

 

영은 이 모든 영체들을 조화롭게 사용하고 있어.

자네의 사역을 도울 때 우리는 환자의 상태에 따라 상이한 영체 또는 센터들을 통해 작업하고 있네.

 

자네가 생명의 영적인 측면들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영감을 느낄 때

우리는 정묘한 영체나 센터들을 통해 일하고 있어.
그러나 진리는 이 모든 것들 위에 있어.
진리는 생명-사랑이야.
사랑은 마음이 낡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때 현현하게 돼.
사랑은 항상 새로워.
자네가 과거, 낡은 것을 이해하고 그것이 떨어져 나갈 때만 자네는 새로움과 만날 수 있네.
새로움을 만나기 위해서는 낡은 것으로 만나서는 안 돼.
그렇게 되면 그것은 낡은 것의 투사에 불과하게 돼.
낡은 것은 기억, 체험이야.
그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될 수 없어.
자네가 이것을 알 때 자네는 새로움과 만나게 돼.
새로움은 항상 새로운 거야. 결코 낡은 것이 아니야.

 

그것이 진리이고, 사랑이야. 왜냐하면 그것은 실재이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새로움은 실재야.
낡은 것은 실재가 아니야. 그것은 기억, 체험이야. 그리고 그것은 너를 종종 조건화시키지.

 

진정한 영적 치유는 자네가 낡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일어나게 돼.
왜냐하면 영적 치유는 항상 새롭기 때문이지. 내 말 이해되나?"

 

“예. 이해됩니다.” 내가 대답했다.
“영은 항상 지금 존재합니다. 그것은 항상 새롭고 결코 낡지 않습니다. 영은 항상 거듭 새로워집니다. 영의 거듭남은 순간순간 계속됩니다. 그 속에는 질병이나 죽음,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지금'만이 있습니다. '지금'은 항상 새롭습니다. 이 속에서 나는 진정한 영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과거나 기억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렇다네, 친구여.” 그가 말했다.

“자네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네. 이 이해와 더불어 자네의 사역은 세상에 더욱 큰 가치를 지니게 될 거야. 그리고 자네는 세계의 변화를 위해 자네와 함께 일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큰 가치를 지니게 될 거야.

 

자네는 자네가 읽은 것을 단순히 반복해서는 안 돼. 오늘날 세상의 대부분의 스승들은 녹음기들이야.
그러나 너는 음악가가 되고 음악이 되어야만 해. 오로지 그런 방식 속에서만 너는 창조적이 돼."

 

그러고 나서 그가 말했다. “여기 자네와 얘기하길 원하는 다른 분들이 있네."

 

이 날 모임은 이제껏 내가 체험했던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이었다. 세상을 떠난 많은 친구들이 왔다. 요기Yogi 친구인, 압둘과 실룸은 고대 이집트 타블레트와 보석, 티베리우스의 금화 등 모두 20여 점을 가지고 와서 내게 주었다. 그 중에는 고대 그리스어로 기록된 고대 밸럼(송아지피지) 문서가 있었다. 그의 왼손에는 로마 초서체로 씌어진 매매증서도 있었다. 아마도 1세기 무렵 한꺼번에 매매된 것으로 보였다. (몇 년 후 시드니에서 있었던 베일리의 교령회에서 유사한 것을 받았다.)

 

고대 페르시아 마기 한 분도 말했고, 자연스럽게 내 어머니와 다른 친구들도 나타났다. 모임은 새벽 3시경까지 계속되었다. 장장 여섯 시간동안 우리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 그리고 아직도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연속해서 만났다. 그 방안에는 한꺼번에 10명 또는 그 이상이 한꺼번에 출현하기도 했다.

 

사후에도 존재가 계속된다는 증거로 이런 직접적인 만남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지속되는 생명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모든 죽음의 공포는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많은 사적인 얘기들을 나누었다. 나는 고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새 소식을 비롯해 다른 여러 가지 정보들을 직접 받았다.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가 확인해 보니 그것들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모임의 끝에 찬란한 빛이 나타나더니 그 속에서 예수가 출현해 우리 모두를 축복했다. 모든 이의 가슴 속에, 그리고 모든 영역에 항상 존재하는 영원히 살아계신 그리스도. 그분을 볼 수 있었던 이 순간은 전체 모임의 클라이막스였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많은 집들이 있도다. 나는 그대들을 위한 장소를 준비하기 위해 가노라. 내가 있는 곳에 그대들도 거하게 될 것이다."
그는 분명하고 명백하게 이 말을 하였다.

 

이것으로 모임이 끝났다. 우리는 잠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저마다 자신의 상념에 잠겼다.

 

이제 얼마 없으면 나는 내게 많은 것을 주었던 놀라운 친구들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이 생각이 내 마음을 스치자 약간 슬퍼졌다. 게쉬 린포체는 그것을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그가 곁에 앉아 있던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네가 느끼는 것을 나도 느끼고 있어. 나는 네 생각을 알고 있어. 하지만 진정한 이별은 없어. 오늘 모임이 그 증거잖아. 신 홀로 살고 있어. 우리는 그 속에서 살고 움직이고 있어. 그는 살아 계시고 우리 안에서 운동하고 있어. 이것을 이해하고 기뻐하도록 해. 그러므로 분리란 것은 없어. 그것은 오직 마음속에만 존재할 뿐이야. 네가 알다시피 그것은 환영이야."

 

우리는 한 시간 넘게 말하며 앉아 있었다. 갑자기 배고파 죽을 것만 같았다. 원장에게 말했다. “뭐 좀 먹고 싶어요. 왜 이렇게 배고픈지 모르겠군요.”

 

“예.” 원장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막 아침을 먹으려고 했어요.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원장은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원장의 시자인 두 명의 라마가 음식을 날라 왔다. 그것은 아침이라기보다는 저녁이었다. 게쉬 린포체가 빵을 쪼개고 그것을 축복한 뒤 친밀한 어조로 나의 도착과 체류, 그리고 떠남에 대해 말했다. 이 위대한 현자가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자 나는 몸둘바를 몰랐다. 거기에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사랑이 있었다.

 

이 곳, 이 방 안에는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친구 이상의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자연의 섭리를 터득한 마스터들, 현자들이었다. 그들의 지식, 사랑, 지혜는 우리 투쟁의 세계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위대한 아데프트들은 신을 향해 자신의 가슴을 열려는 세상 사람들을 돕고 있다. 이분들은 그들로 하여금 실재의 치유력과 사랑에 대한 유일한 장애물인 조건화된 마음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햇살이 초몰하리 꼭대기 뒤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발코니로 가서 그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오늘 아침 일출은 유달리 경이롭게 보였다. 초몰하리 꼭대기를 중심으로 햇살이 거대한 부채처럼 위로 퍼져갔다. 수정 같은 눈이 이 눈부신 광채를 반사시켰다. 라마들은 "옴 마니 반메 훔"을 영창했다. 그들의 깊은 목소리가 더욱 더 커져갔다. 그때의 광경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의 기억에 생생히 떠오른다.

 

아침 영창이 끝나자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갔다. 나는 침대로 가서 잠을 잤다. 비몽사몽간에 나는 천상의 존재들과 의식적으로 만났다. 하지만 그것이 꿈인지 사실인지 나로선 알 수 없다.

 

한낮이 될 때까지 나는 잠에 빠졌다. 누군가 내 곁에 있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떠보니 게쉬 린포체가 나를 보며 서 있었다.

 

그가 말했다. "이제 너의 영, 혼, 몸의 원기가 회복되었을 거야."

 

내가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네가 일어나면 협곡 아래로 산책을 가려고 해." 그가 말했다. “너와 얘기하고 싶어. 내일이면 우리는 너를 떠나보내야만 해. 오늘 너와 같이 있고 싶구나. 영 속에서 분리는 없지만 네가 떠난다니 나의 외아들을 보내는 심정이다."

 

음식을 간단히 먹은 뒤 우리는 초몰하리 방향의 눈 덮인 협곡 아래를 산책했다. 내가 말했다. “당신을 떠나게 돼서 정말 슬퍼요. 육신을 지닌 채로 다시 당신을 볼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더 슬퍼집니다. 당신은 제게 아버지보다 더 가까운 존재니까요. 나는 아주 깊은 애정을 가지고 당신을 바라보며 성장했어요.”

 

“그래, 아들아.” 그가 대답했다.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아주 오래되었어. 그것은 너와 육신으로 만나기 훨씬 전부터의 일이야. 사역 속에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너와 함께 했었기 때문이지. 이제 나는 머지않아 생을 마치고 육신으로부터 해방될 거야. 나는 더 이상 육신으로 환생하지 않고 다른 영역 속에 머물게 될 거야.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너와 함께 할 거야. 너의 경애하는 안내자, 성 안토니오처럼 말이야."

 

그가 덧붙여 말했다.
"이런 격언이 있어. ‘내 입술의 말로부터 지혜를 얻어라, 이해하라, 잊지 말아라, 낙담하지 말라.'
그러나 보다 더 낫고 고차원적인 길이 있어.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

 

사랑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야. 신은 사랑이고, 사랑은 신이야. 그러나 사람들은 가슴 속에서 타인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신에게로 다가가지. 가슴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고 마음속에 적대감이 없을 때만 우리는 신에게 접근할 수 있어.

 

아들아, 자기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적대적인 사람은 비종교적인 사람이야. 그런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야. 왜냐하면 인류를 갈라놓는 이념들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야.

 

아들아, 관념은 그 무엇보다도 인간 사이를 갈라놓아. 그래서 좌파나 우파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기지. 그들은 단지 관념을 따르고 있을 뿐이야.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사상이 타인의 사상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해. 이것이 적대감, 투쟁, 유혈을 낳게 되지. 관념과 신조가 어떻게 인간 사이를 반목하게 만드는 지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평화와 사랑은 올 수 있어.

 

자신의 관념이 중요하다고 믿는 환영을 놓아버릴 때 비로소 사랑은 우리의 가슴과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돼. 이것은 즉각적인 거야. 우리는 그 거짓됨을 즉각적으로 알게 돼. 그때 우리는 유일자 아버지와 닮은 힘을 가지게 돼. 그는 사랑이야. 그는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야.

 

예수는 결코 스스로 초자연적인 존재라고 주장한 적이 없어.
사람들이 그를 초자연적인 존재로 만들고는 자신의 정신적 환영을 숭배했을 뿐이야.
숭배를 통해서 그들은 적대감, 증오, 질투로 가득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애쓰지.
거짓을 봄으로써만 진리는 지금 현전하게 돼.
아들아, 그것이 지혜야.
거짓을 이해함으로써만, 거짓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 앎으로써만 지혜는 현현하게 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발버둥치고 있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게 돼.

 

지혜가 너에게 현현할 때,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도 자기 의지로 자라고 꽃을 맺는 것이 아니라는 걸 너는 깨닫게 될 거야. 그리고 무한자 속에 그 원천을 두고 있지 않은 것은 지상에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너는 더 이상 무지 앞에 입을 다물거나, 거짓 앞에 벙어리가 되지 않게 될 거야.
너는 이해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게 될 거야.
너는 더 이상 무엇이 문제인지 묻지 않게 될 거야.
너는 모든 문제들의 해법을 보여주게 될 거야.

 

가장 높은 차원의 사고-느낌은 이해를 통해서 와.
그것은 결코 관념이나 신조에 대한 공격적인 자기주장으로부터 오지 않아.
우리는 실재, 사랑 속에서만 우리의 창조성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어.
그러므로 더 이상 안전을 구해서는 안 돼.
왜냐하면 안전을 추구하는 자는 항상 결핍 속에 있기 때문이지.
안전의 기초는 앎에 있지 추구에 있지 않아.
너는 항상 지금 존재하는, 결코 끝나지 않는 공급의 원천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야.”

 

나는 그의 말을 지극히 주의 깊게 경청했다. 나는 관념의 형성 없이 자아의 이해를 통해 듣는 기술을 터득했다.
자기 인식은 자유이자 변화였다. 이 자유 속에서 실재는 어떤 제한도 없이 작용했다.

 

나는 더 이상 이분들과 처음 만났을 때의 내가 아니었다. 심리학적, 철학적 태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것들은 정신적 훈련에 불과할 뿐, 대부분 실재의 현현에는 방해가 되었다.

 

이것이 게쉬 린포체가 내게 들려준 마지막 얘기였다. 그것은 일종의 마지막 조언이었다. 비록 그는 결코 조언하려는 의도가 없었지만. 그것은 이해를 통한 정화였다. 그것은 스스로 혼자 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말했다. “예정과 달리 나는 너와 함께 링마탕으로 가지는 않을 거야. 나는 겨울 동안 여기서 남을 거야. 나는 이곳의 모든 것을 사랑해. 해가 뜨고 질 때 저 아름다운 산을 보면 네 생각이 날 거야. 하지만 너의 스승은 너와 함께 저 멀리 칼림퐁까지 가줄 거야. 그 후에는 너 혼자 가야겠지. 하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너와 항상 함께 할 거야.

 

“이 십자가를 받아. 이것은 소년시절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거야. 아버지가 내게 주신 거야. 잘 보면 십자가의 중심에 다이아몬드가 박혀있어. 이것은 아버지-어머니 신의 결합인 아들을 상징해. 이 아들은 사랑과 지혜, 즉 진리 속에서 태어났어. 이 십자가를 네가 항상 간직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가 목에서 십자가를 빼고는 내 목에 걸어준 뒤 나를 축복해 주었다. 나의 뺨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그리스도가 나의 혼 속에서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내게서 변화가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마치 거지 옷을 벗고 그리스도 요가라는 사랑의 옷을 입은 것 같았다. 고통 받는 혼이 그 옷깃을 살짝 건들기만 해도 치유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