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베인/그리스도 요가

그리스도 요가(Christ Yoga) 14장

기른장 2020. 3. 16. 13:31

트락체 곰파(사원)은 티베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들 중 하나이다. 높은 산에 둥지를 튼 사원은 눈 덮인 토빙추 협곡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멀리 라사 포탈라의 황금 지붕이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이 보였다.

 

연중 이 시기가 되면 밤에 추웠다. 일몰 후에는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밤하늘에는 수백만 개의 별들이 반짝였고, 수정 같은 알싸한 눈 위에 별빛이 반사되어 계곡 전체가 미광으로 환하게 밝았다. 눈이 내리는 시기가 되면 강풍을 동반한 폭풍설이 몰아쳤다. 그럴 때면 어떤 곳은 눈이 10 피트도 더 깊게 쌓였다. 이런 폭풍설이 발생하면 몇 야드 앞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매일 협곡을 오르내리는 야크와 나귀들의 행렬을 볼 수 있었다. 그 놈들은 티베트 안팎으로 짐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눈보라가 치든, 햇빛이 나든, 비가 내리든, 날씨와는 상관없이 겨울과 여름이 시계처럼 규칙적으로 지나갔다.

 

장차 내 앞에 오크 협곡, 링마탕, 칼링퐁으로 이어지는 2백여 마일의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먼저 눈과 얼음으로 덮인 강과 산길을 넘어 오크 협곡까지 가는 여정은 대략 2주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겨울에 여행 할 때 게쉬 린포체는 많은 야크들을 데리고 갔다. 야크 떼가 앞서 가면서 눈 속에 길을 만들어 주었다. 눈 덮인 히말라야의 산길에서 야크는 최고의 눈 쟁기이다. 몇 마리의 야크가 눈 위를 터벅터벅 걸으면 곧 불안한 산길 위로 말끔한 길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미, 돌아가는 길에 라사를 우회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왜냐하면 거기서 으스대는 관료들을 만나 시간 낭비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여행에 나설 날이 다가왔다. 우리는 기운이 충천했다. 우리는 사원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 우리 조랑말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갔다.

 

무역로는 토빙추와 만나는 캬추 강을 따라 나 있었다. 우리는 우측으로 빠져서 토빙추와 키추 사이의 삼각지를 가로질러 갔다. 우리는 무역로가 아닌 다른 길을 따라 이동해 남파까지 갔다. 이 길은 많이 이용되는 루트는 아니지만 아주 좋았다. 그 길은 토빙추 강과 키추 강이 만나는 삼각지의 꼭지에 위치한 라사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우리는 룽상 준령을 거쳐 라사보다 10여 마일 위에 위치한 키추에 도착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20 마일의 여정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겨울의 무역로는 아주 질척했기 때문이다.

 

둘째 날, 우리는 4 시경에 종토 사원에 도착했다. 그날 우리는 거기서 하루 밤을 묵었다. 이 루트를 밟은 덕분에 우리는 한 겨울 위험한 키추를 가로지르지 않아도 되었다. 강이 어떤 부분은 얼어있고 어떤 부분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라사를 우회하는 길을 따라 가고 있었다. 그 길은 정상적인 루트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관료들을 만나 허비할 시간과 에너지가 없었다. 사실 그들은 전통과 의식儀式에 사로잡혀 있었고,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다음 날 우리는 추수르 협곡에 도착했다. 여기서 키추 강은 드넓어졌다. 어떤 곳은 강폭이 2마일 더 되었다. 강위에는 많은 섬들이 있었다. 추수르 마을에는 기도벽prayer wall이 있다. 다양한 색깔의 신들이 조각된 그 벽은 길이가 50야드 정도 되었다. 이 협곡은 아주 울창했지만 지금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었다.

 

우리는 캄바라를 지났다. 그곳은 강변으로부터 지그재그로 오르내리는 굴곡진 길이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착삼 나루터에 도착했다. 우리는 거기서 언덕 우측에 자리한 아름다운 초코량체 사원에 묵었다. 사원 원장은 게쉬 린포체를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아주 편안한 숙소를 제공 받았다. 나는 하룻밤을 푹 쉴 수 있어서 기뻤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나루터를 건너 창포의 오크 쪽으로 갔고 1만 7천 피트 높이의 냡소 라령嶺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상에 오르자 저 아래로 창포 협곡의 길이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대 브라마푸트라 강이 양 옆의 설산을 가르며 굽이쳐 흐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산들은 유구한 세월 동안 마치 말 없는 보초병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이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저 멀리 몇 마일 앞에 얌드록 호수와 페데종 마을이 보였다. 게쉬 린포체는 그 날 저녁을 그곳에서 묵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곳 촌장에게 조랑말을 돌려주어야만 했다. 마을에 도착하자 우리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나의 스승에 대한 그들의 환영도 대단했지만 게쉬 린포체에 대한 환영은 훨씬 더 놀라웠다. 우리는 친절한 숙식을 제공 받았다.

 

나는 촌장에게 빌려준 조랑말을 돌려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여행을 마칠 때까지 그 조랑말을 계속 쓰다가 나중에 돌려주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듣자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왜냐하면 '검은왕자'가 내 맘에 쏙 들었기 때문이었다. 검은왕자와 나는 서로를 너무나 잘 알았다. 이제 와서 다른 조랑말로 갈아타는 것은 내키지 않을 것 같았다.

 

게쉬 린포체가 촌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말했다. "조랑말은 꼭 돌려드리겠습니다."

 

떡 벌어지는 식사가 준비되었다. 얼마나 많은 요리가 나왔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최소한 열 가지는 넘었던 것 같다.

 

먼저 우리는 가루반죽에 싼 다진 고기를 먹었다. 다음에는 절인 양파를 곁들인 생선포를, 그 다음에는 민달팽이 수프를 먹었다. (이 수프는 참 맛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민달팽이 수프라는 걸 알게 된 것은 훗날의 일이었다.) 다음에는, 다진 삶은 계란. 다음에는, 건포도가 들어간 쌀밥. 다음에는, 푸딩 잼. 다음에는, 삶은 돼지고기와 양고기. 이런 식으로 계속 나오는 요리를 우리는 먹었다. 우리는 티베트 맥주인 창Chang도 실컷 마셨다. 오늘날 만약 그렇게 먹어댔다면 나는 당장 배탈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한창 때였다.

 

페데종은 지난 늦여름 내가 보았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은 한 겨울이었다. 대지는 눈으로 덮여 있었다. 풀을 먹기 위해 눈을 파고 있는 야크의 모습도 눈에 들어 왔다. 호수는 더욱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그 장관은 오래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그때 그 모습이 선명하다. 여름에 울긋불긋 온갖 야생화들이 만발하던 곳에 지금은 백설이 융단처럼 덮여 있다. 겨울이지만 물에 염분이 있어서 얼지 않았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여기저기 노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페데종의 날씨는 몹시 추웠다. 하지만 다음 날 우리는 여행을 계속 했다. 해가 떠 있는 오전 10시에서 오후 3시까지는 무척 더웠다. 그러나 그 시간 전후로는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오지 않거나 돌풍이 불지만 않는다면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루트는 내게 처음이었다. 지난 번 스승과 함께 여행할 때는 랑추로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는 낭가르체령嶺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날씨는 매우 추웠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강풍 때문에 별로 나아가지 못했다. 홍고에 도착하자 그곳 촌장이 우리를 초대해 숙식을 제공해 주었다. 방 한 가운데 커다란 둥근 화덕이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그 주위에 앉아 있다가 그 자리에서 잠을 잤다.

 

다음 날 1만 5천 피트 높이의 카로령嶺을 통과했다. 꼭대기에서 보니 저 멀리로 눈 속에서 붉은 지붕의 집들이 이곳저곳 점점이 흩어져 있었고, 강이 협곡 아래로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우리 양 옆으로는 2만 피트의 설산들이 치솟아 있었다.

 

그날 밤 곱시에 도착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게쉬 림포체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다음 날 밤에 갼체Gyantse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고 그곳 사원에서 하루 밤을 묵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듣자 나는 기뻤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빠른 속도로 여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길들은 몹시 위험했다. 나는 여행하지 말고 하루 쉬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 아들아.” 그가 말했다. “동절기에 세계의 지붕인 이 고지대를 혼자 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이유를 이제 너도 알겠지?"

 

“예” 내가 말했다. “이 여행을 마치고 나면 세계 어느 곳이라도 여행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이 여행만 순간순간 즐길래요. 당신과 함께 있으니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요.”

 

“그래, 아들아.”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너는 사람이 아니라 신을 믿어야만 해.”

 

다음 날 밤, 우리는 갼체에 도착했다. 그곳 사원 원장이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지난번에는 내 스승과 함께였는데 이번에는 게쉬 린포체와 함께였다. 나는 지난번과 같은 방에서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우리는 다음 날 거기서 쉬었다. 나는 오전 10시까지 잠을 잤다. 그러고 나니 오크 협곡까지 남은 여행을 위한 활력이 충전된 느낌이었다. 이제 여행길은 쉬웠다. 많은 야크와 나귀 행렬이 오갔기 때문에 길이 잘 닦여 있었다. 낮 동안에는 길이 눅눅했지만 일몰 후에는 서리가 내려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해가 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려고 애썼다. 겨울에 티베트를 여행한다는 것은 결코 피크닉이 아니었다.

 

오크 협곡에 도착하는 데는 5일이 더 소요되었다. 당분간은 이것이 내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몇 주 동안 나는 여기서 게쉬 린포체와 함께 머물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제 친구들이 내가 이곳을 떠나기 전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그들과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승원장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는 나를 열렬히 환영하며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게쉬 린포체가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네게는 또 보고 싶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어. 도대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는 거지?" 그러고는 그가 한바탕 웃었다. 나는 그가 노르부를 두고 내게 농담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말했다. "노르부를 잊지 못할 거예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녀도 너를 잊지 못할 거야, 아들아."

 

그곳에서 나는 무척 행복했다. 날마다 게쉬 린포체가 내게 가르침을 주었다. 원장은 내가 지난 번 만난 이래로 많이 발전해 있었다. 내 스승이 그에게 해주었던 말들이 그를 변화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히말라야를 넘어서> 7장을 보라).

 

때때로 게쉬 린포체는 원장도 합석시켜 가르침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나도 그것이 기뻤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원장도 우리 일원이라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대개는 나를 통해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내가 질문을 하면 게쉬 린포체가 입을 열었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우리 세 사람이 모여 앉았을 때 내가 질문했다.
"경직된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가 대답했다.
“전에 비슷한 문제를 다루었던 것 같은데 네가 질문을 하니 대답을 하도록 하지.”
그리고는 게쉬 린포체가 계속 말했다.
“고정 관념에 집착하는 것은 무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야.
이런 유형의 마음으로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어.
왜냐하면 고정된 마음은 그 자체의 조건 속에 갇혀 있어 주거나 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런 상태에서는 진리가 아닌 것만을 반영할 수 있을 뿐이야.
경직된 마음은 무지해. 왜냐하면 그 자신의 관념이나 신조를 넘어서서 볼 수 없기 때문이지.

 

이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너는 타인의 관념들로 꽉 차 있는 마음을 바로 인식할 수 있어.
그것이 바로 자기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야.
소위 지성인들이라는 사람들을 봐.
그들의 머리속에는 타인의 관념들로 가득 차 있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그들은 독창적인 사고를 하기가 어려워.
책을 많이 읽으면 뭐해? 그들은 그것에 의해 조건화 돼. 그리고 그 조건들을 표현할 뿐이지."

 

“예.” 내가 말했다.
“지성인들이 독창적인 생각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의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권위 있는 출처를 인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 아들아. 맞아. 마음에 유연성이 없으면 이해가 불가능해.
우리가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면 마음의 경직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어.
경직된 마음속에는 진리가 현현할 수 없어.
진리는 항상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있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어.
진리는 우주를 움직이는 힘이야. 인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야.
생명 안에는 분리란 없어. 우주를 움직이는 힘이 인간 속에서도 활동하고 있지.

 

우리가 조건화된 사고로부터 해방되면 생명은 우리의 신성한 본성을 펼치게 돼.
인간의 신성한 본성은 그리스도야. 그것은 영원한 현재이지. 그것은 죽음도 질병도 몰라.
왜냐하면 그것은 대대待對 속에서 살지 않기 때문이지.
이것은 바로 지금 있는 존재 그 자체야.
뭔가 되려고 할 때 거기에는 대립된 것들 사이의 투쟁이 있게 돼.
생명과 죽음, 건강과 질병, 성공과 실패 등. 이 투쟁이 그칠 때 실재가 현전하게 돼.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지금 존재하기 때문이지."

 

“예.” 내가 말했다.
“의식이 조건화된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때에만 존재에 대한 자각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존재는 결코 '되기'를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겠습니다.
왜냐하면 '되기'는 항상 미래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항상 내일일 뿐입니다.

하지만 내일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존재를 깨달으려면 우리는 이 투쟁을 그쳐야만 합니다.
내가 조건화된 사고의 본질과 그것의 발생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과거와 미래,

그리고 그 조건화된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때만 존재가 현전합니다."

 

“맞아, 아들아. 하지만 지금 존재를 자각할 때 너는 여전히 외부 세계를 보고 있어.
너는 육체와 심적 구성물들을 의식할 수 있어.
그리고 눈을 감으면 생명의 모든 소리들을 들을 수 있어. 그것은 기지旣知의 것이야.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야. 그것은 실재가 아니야.
그것이 상대적인 거라는 걸 알 때에만
너는 네가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이 창조적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돼.
그렇게 되면 미지자에 대한 자각이 가능해. 그것은 지금이야!
그것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이야!

 

존재에 대한 자각과 단지 되어가고 있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
소위 진리의 탐구자들이라는 사람들 대부분은 후자의 단계에 있어.
그들은 항상 뭔가 되기를 추구하고 있지. '되기'는 시간에 갇히는 행위야.
하지만 존재에 대한 자각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왜냐하면 시간은 무시간적 존재를 결코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지.

 

내일은 결코 항상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현존을 드러낼 수 없어.
어제와 내일로부터 자유로울 때만 항상 현재인 존재가 드러나게 돼.
그것을 힐끗 보기만 해도 그 순간 마음은 고요해지게 되고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지.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실재를 깨닫게 되지.

 

요가 수행법은 내적인 감각에 대한 집중의 하나야.
그 집중 상태에서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이 차단되게 돼.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결코 마음을 초월한 실재를 드러낼 수 없어."

 

“예, 알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집중은 정신 활동의 하나입니다.
집중으로는 정신적 활동이 아닌, 마음을 초월한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체험했습니다.
나는 집중을 통해 마음이 고요해질 때 오는 해방감을 경험했습니다.
나는 또한 의식이 마음의 모든 층과 조건 지어진 사고 속에 삼투할 때 느껴지는 삼매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되기'입니다.
그것은 기지의 것이고 그 상태에서는 존재에 대한 자각이 불가능합니다.
기지의 것은 결코 미지자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결코 피조 되지 않은 존재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되기'의 허구성을 깨달을 때에만 영원한 현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조건화 된 마음속의 관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적인 실재이고 지금 존재하며, 자아가 영원한 현재 속에 녹아 사라질 때 현현합니다.
그것은 마치 한 방울의 물이 대양 속으로 녹아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한 방울의 물과 대양은 동일한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속의 영과 우주의 대령이 동일한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영은 결코 나뉘어져 있기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계속 말했다.
"나는 신성한 이성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성한 이성은 결코 이성을 초월한 것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신성한 이성조차 마음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고요해지기 위해서는 이성의 작용이 그쳐야만 합니다.
마음은 결코 미지자를 알 수 없습니다.
투쟁이 그칠 때 마음은 고요해 집니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실재가 현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지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현현합니다.
거기에는 시간이 필요치 않습니다."

 

내가 덧붙여 말했다.
“마음이 생각 짓기를 그칠 때 마음은 고요해 지고, 거기에 실재가 현현합니다.
마음은 결코 실재의 본질을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였을 때 실재가 현현하고 '나'의 투쟁은 그칩니다."

 

미동도 않고 우리의 토론을 유심히 귀 기울여 듣던 원장이 말했다.
“변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당신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동안 내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내 마음과 그 작동 방식, 그리고 실재의 작용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나는 내 자신을 명징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신조와 관념의 허구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얻은 자유의 느낌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변화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그동안 무겁게 지고 있던 나의 낡은 사고와 신조에 더 이상 갇혀 있지 않습니다.”

 

게쉬 린포체가 기뻐하며 말했다.
“내 아들아, 네가 원장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구나.
너는 네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나는 알았어."

 

잠시 침묵한 후에 그가 계속 말했다.
“그래, 아들아. 순수한 사고는 과거와 미래, 건강과 질병,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신과 악마에 의해 조건화 되지 않아.
왜냐하면 이것들은 마음의 산물이기 때문이야.
이 관념들은 너의 조건화의 결과란다.

그것들은 상호 대립되는 이원성에 갇혀 있어.
그리스도는 이 모든 조건화로부터 자유로워.
그리스도는 어떤 방식으로도 조건화 되지 않는 신의 아들이야.
아버지의 생명이 아들 안에 있어.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어.
너는 그걸 기다릴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이지.

 

“예.” 내가 외쳤다.
“그것이 음식을 소화시켜 주고 있고, 그것이 심장으로부터 온몸으로 피를 보내주고 있고,

온갖 영양분을 보내어 세포들에 새로운 활력을 주고 있고, 노폐물들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이 내적인 지성의 조정 작용으로 겨울이나 여름이나 일정한 체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과 피조 되지 않은 창조적 존재 사이의 관계는 항상 상대적입니다.

우리의 몸은 다른 모든 통로들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낡게 됩니다.
하지만 실재, 의식, 생명 그 자체는 영원히 현재 속에 존재할 것입니다."

 

내가 계속 말했다.
“인간의 몸에 비교할만한 기계는 만들어진 적이 없습니다.
이 모든 놀라운 일들을 하는 힘은 몸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부로부터 작동함에 틀림 없습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복잡한 기계는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조물이 결코 그 창조자와 필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조물은 끊임없이 변화되지만 창조자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피조물은 상대적인 반면 창조적 존재는 영원한 현재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감의 원천, 사랑과 지혜와 힘의 무한한 원천과 항상 접촉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덧붙여야 함을 느꼈다.
"그것에 대해 말을 하는 순간 그것은 상대적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속에 있는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구성행위를 그칠 때 나는 이 영감과 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것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그래, 아들아.” 게쉬 린포체가 대답했다.
“관념, 이미지, 신조, 전통 등에 묶이면 너는 그것들에 갇히게 돼.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어떤 자유도 없어.
왜냐하면 너는 그것들에 따라서 사고하고 행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야.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실재의 작용을 방해하게 돼."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우리는 스스로 감옥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관념이나 신조를 바꾸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감옥을 다른 감옥으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직된 교리 때문에 하나의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마음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하나의 감옥에 불과합니다. 실재에 대한 관념은 실재가 아닙니다.
새로운 감옥은 조금 더 편할지는 모르지만 구속과 이해가 없는 감옥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 지 이해했을 때만
우리는 스스로 만든 감옥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그래.” 게쉬 린포체가 평소의 어투로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를 자각하지 못해.
그들이 온갖 변덕, 관념, 기분에 휩쓸려 무지의 바다 위를 표류하다가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 그 증거야.
그들은 건강과 행복을 얻기 위해 좌충우돌하고 있어.
그것을 위해 심지어 환경을 바꾸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한 노력으로 인해 그들은 오히려 자신의 조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어.

그리고 잘못된 투쟁 속에서 설상가상이 돼버리지.
혼란에 빠진 그들은 자기들을 가르쳐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한테 달려가게 되지.
하지만 그들은 무지의 대양 위에 키 없는 배를 타고 폭풍 속을 헤매는 형국이 돼.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유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야."

 

“예.” 내가 대답했다.
“나도 그런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을 사람들과는 분리된 존재로 말합니다. 그들의 신은 상대적인 신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은 우리와는 동떨어진 어떤 존재에 대한 관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네 말에 동감한다, 아들아.
그들은 신과 악마, 선과 악, 건강과 질병, 성공과 실패, 소유와 무소유, 죄, 고통, 죽음 등 이원성에 갇혀 있어.

그들에게 그것들은 실제야. 하지만 그것은 오류야.
그들은 항상 뭔가 되기를 추구하고 있어.
그러나 존재 속에 오류나 오류에 대한 의식은 없어. 거기에는 파괴적인 요소가 없어.
왜냐하면 존재 속에는 대대待對도 없고 극복하거나 정복해야 할 것도 없기 때문이야.

 

그렇기에 두려움도 의심도 선도 악도 없어.
이것들은 마음속에만 있어. 그것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창궐해.
왜냐하면 그것들에 대한 믿음으로 그것들을 키우기 때문이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들에 의해 조건화되는 거야.

 

자, 그런데 진리와 오류가 뒤섞이면
그 결과 건강과 질병, 선과 악, 삶과 죽음 등이 생겨나게 돼.
그러면 진리와 오류 중에 어느 것이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지?
거짓에 대한 식별을 통해서만 오류는 떨어져 나가게 돼.
왜냐하면 그것은 조건화된 마음에만 존재하기 때문이지.
진리는 마음을 초월해 있고 자유로워.
진리는 우리가 거짓을 식별하고 이해할 때 즉각적으로 현현해. 이해가 되나?"
이렇게 말하면서 게쉬 린포체가 원장을 쳐다보았다.

 

“네, 완벽하게 이해됩니다.” 원장이 대답했다.

 

그러자 게쉬 린포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보고 들을 수 있는 힘은 물질 속에 그 원천이 있는 것이 아니야.
그것은 마음속에서 기원起源해.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보고 듣는 것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해.
마음이 조건화될 때 몸 역시 조건화 돼.
그러나 마음은 물질 속에 발언권을 가지고 있지 않고,
몸은 오로지 마음이 느끼는 것을 재생산할 때에만 반응해서 답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몸을 물질이라고 불러. 하지만 내가 알게 된 바에 의하면 몸은 형성 에너지야.
이 형성력 이면에서 방향을 잡는 힘은 생명이야.
무지한 자는 모든 것을 가장 높은 곳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
만일 우리가 그 과정을 역으로 하면 만물의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형성 작용을 보게 돼.
그리고 만물을 추적함으로써 우리는 무한자에 이르게 돼.

 


그 속에서 오류와 환영이 녹아 사라지게 되고 실재에 대한 의식이 즉각적으로 현현하게 돼.
육체는 영원한 유일 생명을 떠나서는 생명력을 가질 수 없어.
그러므로 만일 네가 육체에 매달린다면 너는 실재의 생명을 놓치게 돼.
그것은 심지어 육체 속에 있을 때조차 자유로워.
'나는 생명이다.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나는 영원한 너의 주이다.'"

 

게쉬 린포체를 보자 그의 얼굴이 빛으로 감싸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일어나 팔을 앞으로 뻗어 축복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나는 수천 볼트의 전기로 충전된 기분이었다.

 

이런 말로 그는 가르침을 마쳤다.
“오 무한자여, 당신은 인간의 도움 없이 쑥쑥 자라는 작물에 물을 주십니다.
인간이 하는 일은 씨앗을 심는 것뿐입니다. 당신은 대지를 만들고 그것에 햇빛과 비를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그 길을 찾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 무한자여. 나는 만족합니다. 나는 당신이고, 모든 것이 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 앉아 있는 동안 우리는 변화되고 고양되었다. 나의 마음은 고요해졌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그 순간 내가 느끼고 있던 황홀경의 상태에 남아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의 지혜와 사랑은 언설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은 그가 한 말 중에서 작은 단편에 불과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아직도 그때의 황홀경이 느껴진다.

 

잠시 후 그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를 따라 발코니로 가서 협곡을 내려다 바라보았다.

 

초몰하리가 오렌지 빛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흰색 조각상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해가 지면서 하늘색이 밝은 핑크와 붉은 색으로 변했다. 협곡에는 구름이 드리워져 계곡 전체에 덮인 흰색 융단을 가렸다. 구름이 점차 짙어져 남색과 자색으로 바뀌었다. 구름이 웅장한 초몰하리를 덮기 시작해, 나중에는 봉우리 끝만 그 위로 솟았다. 해가 사원 뒤편으로 사라지고 별들이 하늘에 나타나 구름 위로 은은한 미광을 던졌다.

 

게쉬 린포체의 가르침을 통해 황홀하게 고양된 우리는 그 모든 변화 과정을 지켜보았다. 자연의 이 웅장한 광경에 취한 우리는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