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영주/누구나 아름다운 영혼을 지니고 있다

11. 빙의된 영혼은 사람의 모습이나 마음까지도 바꿔놓는다

기른장 2020. 6. 28. 21:34

지금은 불가에 귀의하여 스님이 되기 위한 길을 걷고 있는 그녀의 속세에서의 이름은 은주였다. 그녀도 날 처음 만났을 때는 빙의된 상태였다. 그냥 빙의된 정도가 아니라 몸속에 들어온 영혼에 휘둘리느라 정상적인 생활이 거의 불가능했다. 가족과도 사사건건 불화가 일어나 하는 수없이 집을 나와 가족과 떨어져 따로 살고 있었다.

 

원래부터가 몸이 허약했던 그녀였지만 차츰 나이가 들수록 머리, 어깨, 무릎, 팔 등 온몸이 다 아프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엄청나게 먹어댔다는 것이다. 일례로 앉은 자리에서 스폐셜 피자 한판에다, 만두 한접시, 튀김 한봉지를 한번에 먹어치워도 계속 배가 고팠다는 것이다. 그녀가 몸이 아프기 시작해서 집에 나오기까지 불과 서너달 사이에 체중이 무려 30Kg이나 불었다고 한다.

 

기독교 모태신앙인 그녀는 다른 종교나 무속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스스로도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여겼던지 용하다는 곳은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병원에 가도 원인을 밝힐 수가 없었고, 따라서 아무도 치료법을 얘기해 주지도 않았다.

 

심지어 이름깨나 있다는 무당에게 가서 굿을 하면 꼭 일주일만에 괜찮았을 뿐, 시간이 지나면 증상이 그대로였다. 결국 무당은 빙의된 영혼을 천도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빙의된 영혼의 힘을 약화시킬 뿐이라는 결론을 내린 그녀는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내림굿을 받아야만 아픈 것이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는 습관처럼 들렸던 무당집에도 발길을 끊었다는 것이다. 평생을 무당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로서는 그나마 남아 있던 위안거리마저 포기해야만 했다.

 

내가 운영하는 수련원 회원의 손에 이끌려 들어온 그녀를 처음 만나 수련을 시키면서 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아주 놀랐다. 첫째는 흔히 무병이라고 말하는 고통을 수년째 겪고 있어서 몸과 마음이 말이 아닌 지경인데도 아직 무당이 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일단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되면 그 오랜 고통에서 해방될 수도 있고 영혼에게 매인 몸이긴 하지만 무당으로 한평생 살아가는 것도 삶의 한 방법일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요즘처럼 힘든 세상에 무속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라는 얘기도 종종 들려오는 터라 나는 그녀가 빙의된 몸으로 아직 버티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못해 신기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두 번째로 내가 그녀에게 놀란 것은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적개심 때문이었다. 회원의 손에 이끌려 막상 수련원까지 오긴 했지만 그녀는 나를 보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무안해질 만큼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 버리는 것이었다. 빙의된 사람에게서 별별 희한한 현상까지 목격했던 나로서는 너무 의외의 일에 내심 당황하기까지 했으니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빙의된 영혼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과의 첫대면은 그리 매끄럽지 못한 편이다. 빙의된 영혼의 조종 탓에 주위가 산만하거나 의례적인 예의를 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무엇보다 나로 인해 천도될 영혼들이 처음에는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주의 경우는 내가 지금껏 보아온 사람들과도 사뭇 달랐다. 눈가에는 귀기가 완연했고 인사는 고사하고 나에게 ‘선생님’이란 호칭도 붙이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행동거지가 거칠기 짝이 없었다. 한마디로 막돼먹은 처녀였다.

 

나는 잠시동안 그녀가 하는 양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의 행동거지로 봐서는 곱게 구슬리고 달래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녀가 알아듣지 못할 말로 투덜거리다 잠시 조용해진 순간 나는 벼락같이 고함을 치며 그녀를 꾸짖었다.

 

나: 여기가 어디라고 주둥일 함부로 놀리는 게야. 너는 사람을 대할 때 위아래로 모르느냐? 누구한테 투덜대는 거야 투덜대길!

 

갑작스런 나의 호통에 멍해진 그녀를 나는 냉큼 수련실로 끌고 갔다. 그런데 막상 수련실에 들어온 그녀는 좀전과는 전혀 다르게 의외로 순순히 내가 하라는 대로 자세를 잡고 수련을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녀의 고통도 이제 곧 끝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의 몸에 빙의된 영혼이 이제 그만 떠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은주는 수련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허리의 통증을 호소해 왔고, 곧 몸이 뒤로 젖혀져 벌렁 드러누웠다. 나는 손바닥에 기를 모아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서부터 전신을 훑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손이 은주의 명치 부분만 지나가면 그녀는 고통의 신음을 내지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프다는 신음을 내더니 차츰 숨이 가빠지면서 이윽고 제발 살려 달라며 울면서 매달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잠시 틈을 두었다가 대체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내 옷섶을 잡고 살려 달라며 매달리던 그녀의 손이 갑자기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참 후 마침내 은주의 입에서는 굵직한 노인의 음성이 튀어나는 것이었다. 

 

영혼: 선생! 나는 이 아이의 증조 할아비야

 

그녀의 입을 통해 말문을 연 영혼은 굶어 돌아가신 그녀의 증조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꼭 4개월 뒤에야 은주는 초췌해진 모습으로 날 찾아왔다. 제 몸속에 다른 영혼이 빙의되어 있다는데 심한 충격을 받은 그녀는 그동안 연락 한번 하지 않은 상태였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고통에 시달리며 숱하게 무당들을 찾아다니면서도 자신이 빙의되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풀죽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그녀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앞장서서 수련실의 문을 열었다. 다소곳이 따라 들어온 그녀는 지난번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자신이 빙의된 몸이라는 것과 이 빙의된 영혼을 제대로 천도시키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과 수련을 통해서만이 자신이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확신이 그녀를 그렇게 수련에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수련을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수련의 효과는 얼마든지 증폭되어 나타나기 마련이라서 처음과 달리 은주의 몸에 빙의된 영혼을 불러내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나 고통이 따르지 않았다.

 

차한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쯤 나는 그녀의 증조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천도를 시키기 전에 빙의된 영혼이 하고픈 말을 다 할 수 있게끔 들어주는 것이다.

 

빙의된 영혼이 사람의 육신을 빌어 얘길 할 때 당사자가 겪는 현상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그림이나 풍경이 떠오를 수도 있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을 받아서 자신이 전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며, 빙의된 당사자가 직접 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빙의된 영혼의 말이 머릿속에서 한자씩 찍혀 보이기도 한다. 물론 기수련을 통해 빙의된 영혼과 얘길 나누는 것은 당사자도 또렷이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 정황까지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고, 주위에는 누가 있으며,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다 알 수가 있다.

 

빙의된 은주의 증조 할아버지는 구한말의 몰락한 양반이었다고 했다. 그 당시 일부 상류계층을 제외한 사람들의 생활상은 우리가 역사책을 통해서도 배웠거니와 몰락한 양반들의 삶이란 소작농들의 궁핍에 못지 않았다. 더구나 알량한 체면에 얽매이느라 모질게 마음을 먹지 않으면 생업에 종사할 수도 없었다. 그의 삶도 그러해서 결혼을 해 한가정을 이룰 무렵에는 끼니를 거르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했다. 차마 고향에서는 어떻게 해보지를 못하고 굶어서 부황이 든 식구들을 보다 못해 식량을 구하러 나섰던 그는 객지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고 했다.

 

영혼: 내가 그렇게 죽었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한이 되더란 말이야. 살아 있는 동안 그없는 살림에도 틈만나면 온 정성으로 천지신명께 그렇게 기도를 올렸는데 조금도 나아지지가 않았어. 선생도 알겠지만 그렇게 죽어서는 어디 저승으로 갈 수도 없어 내내 떠돌아 다녔지.

 

그는 빙의된 다른 영혼들처럼 원한에 맺혀 있었지만 악다구니를 늘어놓지 않았다. 마치 남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과거에 양반이었다는 체통이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 같았다.

 

영혼: 은주가 태어난 지 100일이 채 안되었을 때 들어왔지. 이 아이의 가족이나 일가친척을 다 둘러봐도 애만큼 착한 사람이 없어서 그랬어. 그리고 이 아이의 장래가 그렇게 순탄할 것 같지도 않구해서 말이야.

 

은주가 집을 나오게 된 것도 또 체중이 불어난 것도 다 굶어죽은 자신이 작용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혼: 선생도 알고 있겠지만 이 아이가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운명은 아니잖아? 사실 난 내 증손녀를 도와주려고 들어온 거야. 어차피 기구하게 살 운명이라면 내가 이 아이를 무당으로 만들어 보려고 했지. 아주 영험한 무당으로 말이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하고 싶었어.

 

빙의된 은주의 증조할아버지는 그렇게 은주를 무당으로 만든 다음 나중에 자신의 영적에너지, 그러니까 영험이 떨어지면 같이 저승으로 가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서 조금만 더 있다가 내림굿을 받게할 요량으로 기다리다가 그만 나를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은주가 굿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녀의 꿈을 통해서 보여줬다고 했다.
보통 무속에서는 굿을 하고 나면 선몽이라고 해서 3일 뒤에 굿을 하면서 기원했던 것이 꿈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은주의 꿈에는 옥색 옷을 입은 남녀한쌍의 애기동자들이 나타나서는 제상에 차려진 모든 음식을 차례차례 내려놓았다는 것이었다. 은주는 할아버지가 제사상을 제대로 받아서 그런줄 알았는데 나중에서야 이따위 무당이 차려준 상은 다 필요없으니 상을 물리라는 뜻이었다고 했다. 남녀 한쌍의 애기들은 하나는 동자고, 하나는 선녀였는데 할아버지가 무당을 만들기 위해 데리고 온 영혼들이었다는 것이다. 한참 동안 은주의 증조부 얘길 듣고 있던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 이제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사람에게 빙의된 영혼을 천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영혼의 바람이 중요하다.
빙의된 영혼이 저승으로 가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그렇게 하도록 달래야 하기 때문이다. 자칫 섣불리 우격다짐으로 영혼을 천도시키겠다고 설쳐대다는 산 사람의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 뭘 말이요, 선생?

 

나: 알다시피 할아버지가 은주몸에 들어있으면 은주는 정말 무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으세요?

 

영혼: 글쎄. 선생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아무래도 날 저승으로 보낼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렇지만 이제 선생을 만났으니까 뭐. 굳이 내가 손녀를 무당으로 만들어서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하고 싶지는 않아. 나 땜에 그렇게 고통을 당했으니 나도 이젠 그만 가야지.

 

어쨌거나 다행스럽게도 은주의 증조부는 자신이 저승으로 갈수만 있다면 왜 굳이 손녀를 무당으로 만들겠느냐며 자신을 천도할 날을 빨리 잡자고 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틀 뒤에 천도재를 올리기로 하고 그날의 수련은 그만하기로 했다. 

 

천도재를 지내기까지 이틀동안 은주는 수련원에 그냥 머물러 있기로 했는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 이틀동안 그녀가 보여 준 행태는 거의 영험한 무당 그 자체였다는 점이다. 수련을 받기 위해 오는 회원들의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이 뭘 하는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알아냈고 또 사람을 따라다니는 영혼들도 눈에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따라다니는 영혼은 얼굴에 핏기만 없을 뿐 대개 죽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법인데 그런 영혼들이 눈에 보이면 은주는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할아버지의 말을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만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주절주절 읊어대는 것이었다.

 

그녀의 의식은 아주 또렷했다. 맑은 정신으로 스스로가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는 것도 가능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마치 금방 신이 내린 무당처럼 자신도 모르게 할아버지의 얘기가 그대로 입밖으로 튀어 나오더라는 것이다.

 

은주에게서 증조부의 영혼을 빼내는 일은 예상했던 대로 만만치가 않았다. 빙의된 영혼은 천도시키는 동안 그녀는 위속의 내용물을 거의 다 토했는데 영혼이 그녀의 입을 통해 빠져나오는게 일반 사람들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그녀의 목부위는 심하게 쿨렁쿨렁거렸다. 

 

영혼: 선생! 내가 가기 전에 부탁이 있어.

 

그런데 은주의 몸을 빠져나온 영혼은 제단 위에 점잖게 앉아서 나를 가까이 부르는 것이었다.

 

영혼: 선생을 만나 내가 저 아이에게서 나올 수는 있었지만 내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 저 아이의 앞날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선생이 저 아이를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좀 도와줘. 마음 닦는 공부 말이야. 선생이 약속하지 않으면 내가 저 아이를 두고 갈 수가 없겠어.

 

은조의 증조부는 천도하는 마당에도 못내 증손녀의 앞날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나: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본인이 싫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니 할아버지도 많이 도와주셔야 할 겁니다.

 

영혼: 그럼, 여부가 있나. 당연히 그래야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은주의 증조부는 은주를 어루만진 다음 서서히 멀어져 갔고 은주는 한참 엎드려 목놓아 울었다. 제 몸에 들어온 증조부의 영혼에 오래 휘둘림을 당했지만 가족들에게서 살가운 정이라곤 느껴보지 못했던 그녀였기에 저승으로 갈 때까지도 자신을 염려해 주는 할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에 설움이 북받친 때문이리라. 

 

그녀에게 빙의된 영혼을 천도시키고 나서 며칠사이에 은주의 얼굴은 몰라보게 좋아졌다. 심술궂다 못해 사악해 보이기까지 하던 어두운 그림자는 그녀의 얼굴에서 말끔히 사라졌고, 살이 올라 도톰한 얼굴이 그렇게 귀엽고 예뻐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수련원에 오는 회원들마다 그녀의 얼굴을 몰라보겠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그녀는 뜻한 바가 있어 지금은 전라남도의 어느 절에서 스님으로서 일생을 보내기 위한 힘든 길을 걷고 있다. 다소 장황해 보이기까지 한 사례였지만 빙의된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왜 무속인이 빙의된 영혼을 천도시킬 수 없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설명이 된 것 같다. 

 

은주의 경우에서 보듯 사람의 몸에 들어온 영혼은 때에 따라서 신통한 능력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영혼의 능력은 마음을 제대로 닦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건 어디까지나 무속인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무속인의 몸에 빙의된 영혼의 조화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영혼의 조화에 자신의 마음까지 맡겨 놓는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은주는 일단 빙의가 되었더라도 영혼의 힘에 휘둘리던 몸과 마음을 끝까지 지켜낸 경우이다.
한때 무당에 의지해서 어떻게든 자신을 추슬러 보려고도 했지만 결국은 무당은 자신을 구원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다른 방법을 모색했고 그 결과는 아주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명백히 무병이라고 일컬어지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의지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대부분은 견딜 때까지 견뎌보다 결국은 내림굿을 받고 마는 것이다. 물론 내림굿을 받았다고 해서 다 무당이 되는 것은 아니라서 내림굿을 받은 사람 중에는 무당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싫든 좋든 제 몸에 빙의된 영혼의 의도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나는 무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당이 되는 것을 두고, 잘못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또 제 마음의 평안을 느끼기 위해서 무당을 찾는 것을 두고 잘못된 것이라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라도 해서 제 한몸이 편안하다면야 굳이 말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 몸과 마음이 그렇게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평생을 질질 끌려 다녀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주기적으로 굿을 하고 무당을 찾아다니는 것은 심각한 수술을 뒤로 미룬채 임시방편의 진통제만 맞고 있는 중환자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