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1 날짜 2000/12/28 17:02:12
작성자 구름~~ 조회 7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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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름의 육아 일기(1)
내가 천리안의 모임방에 '구름의 육아 일기'를 연재했던 것이 벌써 7년전인가, 8년전의 일이 되었다. 세월이 참 무상하여 꽃다운 구름이 어느덧 중년이 되었고 어린 두 딸들이 하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한 애는 초등학생이다. 지금에 이르러 나는 옛날 내가 글로서 사람들에게 자랑했던 육아법이 과연 그 결과가 어떠한가를 돌이켜 생각해 본다.
꺼러지가 쓴 '부자가 되는 법'이란 책이 무슨 가치가 있겠으며 문제 아동의 부모가 말하는 '자식 훌륭하게 키우는 방법'을 누가 믿겠는가? 내가 과연 '육아법'에 대해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내 아이들이 올바르게 똑바로 자라 주었는가를 생각해 본다.
며칠 전에 둘째의 엄마들 모임에 나갔다 왔다. 밥값을 누가 냈냐? 으례히 그렇듯이 이번에도 구름이 냈다. 왜? 둘째가 전교에서 1등을 했기 때문이다. '1등 엄마가 내야지' 이게 참석한 엄마들의 통일된 얘기다. 2차로 나이트 클럽을 가서는 어떻게 계산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런 곳에는 안 가기 때문이다. 지금 둘째는 지 언니가 졸업한 그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지 언니 역시 전교 3등 이내의 평균적인 성적으로 6년을 다니고 졸업했다.
어제 학원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큰 애를 방학 동안에 자기 학원에 보내달라는 부탁 전화인데 큰 애가 초등학교 다닐때부터 벌써 몇년 째 잊을만 하면 전화를 해오는 원장이다. 물론 학원비는 면제고 장학금도 주겠다는 제의다. '니 방학 동안 학원에 다닐래?' 큰 애한테 물어 본다. 물론 대답은 'No'다. 큰애 작은 애 모두 학원이라고는 다녀본 적이 없다. 그 흔한 속셈학원 한 군데 안 다녔다. 작은 애는 딱 한군데 '태권도 도장'에 나가는 것 뿐이다. 살이 찌길래 다이어트 차원에서 보낸다.
아이 피아노 의자의 뚜껑을 열어 본다. 두 놈이 받아온 상장들이 가득하다. 작은 놈은 학교에서의 별명이 '상순이'다. 상을 하도 많이 받아서 얻은 별명이다. 그래서 우리집 애들은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오면 아주 미안한 듯이 내민다. '또 받아 와서 미안해요, 엄마'하는 표정으로 슬쩍 주고 만다. 특별히 기뻐할 일도 아니고 칭찬해 줄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학교를 자주 가거나 시쳇말로 촌지라도 줘서 그러냐? 구르미는 학교에 가는 일이 거의 없다.
공부는 그렇다 치고 행실은 어떠하냐? 둘 다 왕범생이다. 범생이 뭔줄 알지? 모범생이다. 나리가 뭐냐? 날나리의 줄임말이다.
요즘 여학교는 범생과 나리로 딱 나뉜다. 범생도 왕범생이 있고 나리도 왕나리가 있다. 내가 우리 애들 시집갈 때 혼수감에 넣어서 보낼려고 성적표를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다. 성적 때문이 아니고 성적표에 선생님들이 써준 생활기록 때문이다. 선생이 학생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칭찬으로 가득찬 값진 문서다.
이 엄마에게는 어떤 딸들이냐? 눈물날 정도의 효녀들이다.
이 정도면 구름은 아이들을 기를 다른 후배들에게 '육아'에 대한 한마디 훈수는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 이 글을 쓰기로 한다.
구름~~
번호 2 날짜 2000/12/28 20:00:13
작성자 구름~~ 조회 4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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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름의 육아 일기(2)
나는 위로 언니들이 많고 또 집안이 넓어서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도 많은 아기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어서 어머니로서의 예비 경험을 풍부하게 가졌던 셈이다. 내가 언니하고 같이 키우다시피 한 조카들도 있다.
주위의 많은 어머니들을 보고 또 그네들이 아기를 키우는 것을 보면서 소녀때부터 나는 여러번 의구심을 느꼈다. 왜, 아이를 이렇게 키우는 것일까? 왜, 이런 경우에 이 어머니는 이렇게 하는 것일까? 왜라는 의문이 무척 많이 솟아날 만큼 내 주위에서 볼 수 있었던 육아의 현장은 참담한 무지와 어리석음의 행진이었다. 내가 본 어머니들이 평균적으로 이 나라의 여성들 중에 학력이나 생활 수준이나 지적인 정도가 떨어지는 사람이냐?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약간은 상위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네들이 아이를 키우는 데서 나는 많은 문제점을 보게 되었다. 한 인간으로서는 훌륭한 교육을 받고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로서는 기본적인 철학과 자세를 갖지 못한 그런 여성들을 많이 보았다. 자식을 제대로 키울 줄 모르는 여성들을 대량으로 양산한 것이 현대의 여성 교육이다. 어머니로서의 소양과 소중한 모성 본능의 보존과는 상극을 달리는 지식 교육의 치중으로 말미암아 소녀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앞으로의 인생이나 그 자녀들에게는 백해무익한 지식을 주입받는데 탕진해버린 여성들의 육아 현장은 그야말로 지리멸렬이요, 참람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고 자녀에 대한 욕심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병적인 집착과 과잉 교육에 어머니들이 몸부림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아이들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매춘에 나서는 어머니들은 세계에서 대한민국 어머니들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그 희망대로 욕심대로 커주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조기 교육, 조기 유학, 고액 과외 등 공부잘하는 아이로 만들려는 어머니들의 노력은 눈물겹다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의 중학교에 70%의 아이들이 공부를 포기한 상태이고 50%의 남자애들은 양아치고 여자애들은 날라리이다. 이건 지나치게 비관적인 시각이 아니라 극히 낙관적으로 봐서 그렇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나는 어머니들에게 있다고 본다. 거슬러 올라가서 책임을 추궁하자면 그네들을 그렇게 길러낸 이 나라 교육의 책임이고 잘못된 여성 교육의 참담한 결과이다.
많은 어머니들이 자기의 아이들을 열등생과 문제아로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과 방법을 다 사용해서 아이를 기르고 있다면 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많은 어머니들은 바로 아이를 망치기 위한 노력을 매일같이 하고 있었다. 심각한 문제는 어머니들이 그것이 아이를 위하는 것이라 알고 있고 자기만큼 아이들에게 열심히 엄마 노릇을 하는 사람도 없다고 착각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망치는 그 절묘하고도 기가 막힌 능력 발휘의 예를 들자면 끝도 없다. 어머니가 그렇게 자기의 모든 노력을 다해 자녀를 열등생으로 만들고 바보로 만들고 문제아로 만들려고 노력을 하는데 아이가 우등생이 되고 모범생이 될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불쌍한 건 바로 아이들이다. 그리고 불행한건 아이들을 불쌍하게 키우는 바로 그 어머니들이다.
구름~~
번호 3 날짜 2000/12/29 19:04:44
작성자 구름~~ 조회 3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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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름의 육아 일기(3)
요즘 초등학교는 옛날처럼 매달 치는 시험이 없어진 대신 반기에 한번씩 학력평가 시험을 친다. 성적표가 집에 오기는 하지만 구르미 어릴때처럼 '수우미양가'도 없고 과목별 성적이 나 등수도 안 나온다. 그대신 훨씬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여러가지 생활 평가이다. 봉사활동을 얼마만큼 자발적으로 했느냐? 개발 활동에 얼마나 적극적이냐? 적응성이 어떠냐 등이다.
그래서 옛날처럼 반이나 전교 석차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내 작은 애가 전교에서 1등을 했다는 사실은 알 수가 있다. 왜? 전교에서 유일한 올백이기 때문이다. 다른 지방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기 마산, 창원에서는 자기 집 아이가 학력평가에서 올백(전과목 만점)을 받으면 학급에 떡이라도 넣어주는 것이 관례다. 엄마에 따라서는 쵸코파이에 우유가 되기도 한다. 석차의 발표가 없는 대신에 공부를 좀 잘하는 엄마들 사이의 관심사는 누가 올백이냐이다. 이번 학년말 학력평가에서는 전교에서 올백이 내 두째놈 하나 뿐이었다. 당근 전교 1등이다.
아무리 석차 제도가 없어져도 전교 1등이 누군지 모르는 초등학교는 없다. 전교 2등 이하는 몰라도 전교 1등은 모두 다 알게된다. 이거 뭐 떨거지들 딴지 때문에 구르미가 팔불출 되겄다.
그러나 팔불출이던 구불출이던 자식 자랑만큼 신나고 재밌는게 없다. 남한테 면박을 당해도 새끼 자랑은 기분좋은거다. 그래서 노자 할아방이 여자 델고는 정치를 못한다캔기다. 나도 말다. 암만 노자 할아방이 머시라 떠들어도 있제. 막상 죽을 때 되면 내 새끼들 고생 안하게 뭐 하나라도 더 남기고 죽을라고 몸부림을 칠끼야. 그게 어미 마음이다. 도씩이나 안 딱아도 그래봐야 허망한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구름이지만 그래도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그거까지 털고 나면 신선이지 신선이 별거겠나? 자식과의 업의 줄을 끊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끊지 못할 것이 없다. 자식에 대한 정을 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떼지 못할 정이 없다.
이 글은 좀 고상틱하고 우아칼하게 쓸라 했더마는 고마 문디 사투리가 또 나와분다. 떨거지들 때메 약빨을 받으마 마 표준말을 까묵능기 구름이다. 일단 구르미 어투가 사투리로 바뀌면 화가 났다는 거다. 이번에는 한넘 잡을끼다. 그건 그렇고 무신 소리 하다가 떨거지들 얘기가 나오노?
맞다. 자식 자랑 이야기다. 부모 마음은 지가 부모가 되봐야 안다는 어른들 말씀을 내가 어미가 되기 전에는 정말 몰랐다. 내 배에서 낳은 내 새끼가 그토록 삼삼하게 눈에 밟히는 것인지 그 전에는 몰랐다. 일마들을 떼놓고 이 애들을 버리고 극락에를 가고 현빈을 가느니 차라리 이 애들을 품에 안은 채 지옥에 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에 천국에 가는 티켓이 딱 1장뿐인데 성인은 한사람 아동은 2사람이 그 한장의 표로 갈 수가 있고 표를 못가진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면 나는 그 표를 내 아이 둘에게 주고 천국으로 떠밀어분다. 천국은 나 혼자만 갈 수 있고 아이들과 함께 갈 수 있는 것은 지옥뿐이라면 나는 아이 둘을 끌어안고 지옥으로 간다. 칼산의 낭떠러지라도 애들을 끌어 안고 뛴다. 쥐 한마리에 질겁을 하는 구름이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산길을 넘는 중이라면 범이 나타나도 나는 물러서지 않을 자신이 있다. 나를 먼저 물어가기 전에는 호랑이 아니라 염라대왕도 내 새끼들은 못 건드린다. 만약에 건드리면 지옥이 시끄럽고 천국에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구름~~
4 날짜 2000/12/30 01:04:04
작성자 구름~~ 조회 3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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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름의 육아 일기(4)
첫애를 낳고 앰블런스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는 친정 엄마가 와 있었다. 시어머니는 외국에 계셔서 오시지를 못했다. 보고싶은 것은 남편이었다. 아기를 옆에 누여놓고 침대에 누워있는데 아기가 울때마다 안아주려고 했더니 그때마다 엄마가 말리는 것이었다. "아기를 자주 안으면 손타서 산모가 힘들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 말이 무척 못마땅했지만 나를 위해서 하루 종일 애쓰는 엄마 말에 면박을 주기도 죄송하고 또 몸에 기운도 없어서 그냥 하라는 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오후에 남편이 일찍 돌아왔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자고있는 애기를 번쩍 안아서 거실로 나가는 것이었다. 엄마가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다가 놀래서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보게 애기 내려 놓게."
"왜요? 장모님?"
"애기 자꾸 안는 버릇하면 손타서 나중에 에미가 힘들어요."
나는 남편의 대꾸가 궁금해서 귀를 세웠다.
"손을 타요? 손타는게 뭔데요?"
"안아서 키우는 버릇을 하면 하루 종일 안고 있어야 된다니까. 에미가 얼마나 힘든다고."
"아... 괜찮습니다. 장모님. 하루 종일 안고 키우죠 뭐."
"에그, 자네는 직장 나가면 그뿐이지만 종일 애 키워야 하는 에미 생각도 해야지."
들려 오는 남편의 대답은 이랬다.
"아, 그 정도 고생할 생각없이 엄마가 된 집사람이 아닐겁니다."
그리고는 아기를 안은 채 방으로 들어와서 묻기를.
"안 그래? 달님이."하는 것이었다. 달님은 연애 시절부터 남편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다. 내가 남편을 부를 때의 호칭은 '햇님이다. 햇님이 첫번째 별님을 안고 침대 옆에 서 있었다.
나는 웃음으로서 동의한다는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다. 아기를 안고 있는 고생을 마다한다면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될 이유가 없다. 햇님은 그날 밤이 늦어 자정이 되도록 아기를 안고 있었다. 엄마가 질색팔색을 하고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젖을 먹일 때만 나한테 넘겨 주었고 자고 있던 깨어 있던(아기는 하루 종일 자는거지만) 내려 놓지를 않았다. 손을 태워도 지독하게 태워버린 남편이었다. 자다가 애기가 '엥'하고 우는 소리만 내도 햇님은 벌떡 일어나 안아 들었다. 이삼일 후부터 내가 몸을 조금 추스리고 일어나 앉게되자 이미 아기는 사람의 손에서 떠나면 우는 아기가 되어 버렸다. 자다가도 자리에 눕히면 그냥 알아차리고 울어제끼는 것이었다. 낮에는 나하고 엄마가 교대로 안거나 업고 살았다. 물론 힘이 들었다. 그래서 오로지 기다리는게 햇님 뿐이었다. 저녁이 되어 남편이 돌아오면 그때부터는 아기로 부터 해방이 될 수 있었다. 남편은 말려도 하루 종일 아기를 안고 다녔다. 그리고 아기가 잠이 들때까지 못부르는 노래를 불러서 재우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얼마 못가서부터는 아빠가 안고 노래를 안불러주면 잠이 안드는 아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쩌다가 회사 일로 귀가가 늦는 날이면 나하고 엄마는 애기를 재우느라 생 욕을 보고는 했다. 그러나 나나 엄마 누구도 아기를 재우는 재주가 없었다. 아기는 반드시 지 아빠가 와서 안고 거실을 뱅뱅 돌면서 노래를 불러줘야 그제서야 잠이 들었다. 회식이 있거나 접대가 있어서 늦는다는 전화가 오면 나는 미치는거다. 잠이 오면서도 기여코 자지않고 울어대는 애기 때문에 동네 바깥을 몇번씩이나 업고서 나갔다 와야 했다. 하루 종일 엄마 품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던 큰 애였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 부부는 힘들어하지 않았다. 마다하지 않았다. 아이의 안정된 정서와 인성은 신생아 때 엄마의 품에 안겨있던 시간에 비례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의 기운은 이 우주에서 가장 깨끗하고 신비한 기적의 에너지와 같다. 애정이 가득찬 엄마의 품속에 있는 시간이 긴 아기는 결코 경끼를 하지 않는다. 경끼라는 것은 신생아의 불안감에서 온다. 그 불안감을 지워주는 유일한 것은 바로 부모의 품이다. 엄마의 가슴이다. 신생아 때의 행복감과 만족감에 충족되어 있는 시간과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시간의 비례에 따라 인간의 정서는 결정된다. 사랑만큼 인간을 안정시키는 것은 없다.
구름~~
번호 5 날짜 2000/12/30 13:35:34
작성자 구름~~ 조회 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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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름의 육아 일기(5)
한국인의 지적 능력이 대단히 우수하다는 평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일도 그럴 것인가에 대해서 나는 비관적이다. 우수한 한국인을 만들어왔던 육아법이 무너지고 있고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수하다는 한국인의 역사가 왜 그렇게 비참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너무 우수해서 그랬다'고.
대체로 지난 역사에서 강한 나라 우수한 민족이라는 것은 문화적인 측면이나 국민 개개인의 우수성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정복력에 있었다. 문화와 군사력의 양면에서 우수한 국가라 말할 수 있는 나라라면 로마 제국이 있고 근대 이후에는 영국과 독일 정도가 있다. 그 외의 사례에서 나는 국민의 우수성이 국가의 위대함에 직결된 사례를 보기가 쉽지 않다.
위대한 국가는 우수한 국민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니라 평균적인 국민에 뛰어난 지도자를 가진 나라이다. 만명의 병사에 한명의 장군이 있는 군대와 만명의 장군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싸우면 장군의 군대가 진다.
왜넘들이 한국 사람들에게 주눅이 드는 이유가 일대일로 부딪히는 한국인들 모두가 저거보다 훨 똑똑하고 잘난 넘들로 보이기 때문이다. 생태적인 대한국(対韓国) 강박관념의 뿌리가 그것에 있다. 기술 지도를 하러 쪽바리 엔지니어가 한국 기업을 방문하면 배우기 위해 싸부를 초청한 한국 공장의 기술자들이 저거보다 더 많이 아는 체를 한다는 것이고 심지어 엔지니어 밑의 공원들까지도 속으로는 '이 쪽바리 새끼들, 조오또 아인 것들이..'하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왜넘들은 저거보다 기술이 나은 미국이나 유럽의 기술자를 초청해서 기술 이전을 받는다고 하면 복도 저쪽 끝에서부터 구십도로 절을 한다. 한마디 설명을 할 때마다 연신 굽신거리고 '하이! 호!'대답과 탄복의 감탄사를 연발한다.
전부 다 너무 잘나고 자존심 강하고 똑똑해서리 한국인은 지보다 잘난 넘을 인정할 줄 모른다. 누구나 다 지 생각에는 지가 세상에서 제일 잘 난 것이 한국인이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다. 임진왜란 때 평균적인 왜넘들의 자질과 조선 사람을 비교해 보면 이건 쨉이 안된다. 왜넘들이 저거 역사 최고의 영웅이라 생각하는 풍신수길이나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는 덕천가강을 우리나라의 이항복이나 유성룡이나 이순신이나 비교를 해보면 이것도 어른과 애들이다.
통신사로 갔던 황윤길 김성일같은 조선 관료들을 히데요시가 야코를 죽이려고 벼라별 대글빡을 다 굴렸지만 얻은 것은 '경멸과 냉소' 뿐이었다. '조오또 아닌 것들이다' 이게 히데요시를 만나고 온 통신사들의 소감이었다. '쥐새끼 같은 것이...' 조선 통신사들한테는 오사까 성의 위용도, 조총의 위력도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오사까 성에 주눅이 들고 조총 소리에 놀랐다면 임진왜란의 진행이나 결과가 달랐을 것이다. '도대체가 예법이라는 것을 모르는 무식한 야만족의 추장'을 만나고 온 것이다.
이것은 대내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은 보스를 마음 속으로 섬길 줄 모른다. 왕에 대한 충성심에서 사육신이 그렇게 죽은 게 아니다. 자기 자존심 때문에 버티다가 죽었다. 단종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수양대군에 대한 자존심이다. '조오또 아인기 니가 뭔데?' 이것이 불러 온 비극이다. 왜넘들은 '내가 뭔데?' 때문에 배를 가르고 한국인은 '니가 뭔데?' 때문에 맞아 죽는다.
그러나 맞아 죽을 때 죽더라도 '니가 뭔데?'하고 눈을 흡떠 보는 것이 한국인이다. 그래서 한국인만큼 다스리기 어려운 국민이 없다. 곤조가 있고 땡깡을 잘 부리고 말 잘 안 듣고 고집세고 격한 기질있고 한마디로 성질이 조오가튼 넘들이 한국넘들이다. 그 바탕에 뭐가 있느냐? 우수한 자질이 있다. 똑똑함이 있다. 한마디로 잘난 넘들이라서 그렇다. 실제로 잘났는지 아닌지는 둘 째치고 저마다 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림없다.
21세기는 한국인의 시대가 될 것이다. 나라가 지금 개판인 것은 으례히 그래 왔듯이 위에 넘들이 개판을 쳐서 그런건데, 이전의 시대에는 그것이 곧바로 나라의 흥망과 성쇄에 직결이 되었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위에 넘이 개판을 쳐도 그거 때문에 나라가 주저않지는 않는다. 지금은 각개 약진의 시대고 만명의 장수가 각기 싸우는 시대다. 이것이 정보통신 시대이고 인터넷 시대이다. 인터넷 시대에는 한명의 위대한 장수가 별볼일 없다. 만명의 장군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가장 막강한 군대다. 이게 인터넷 시대의 국력이다. 한국인의 단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장점은 특장점으로 발휘될 수 있는 시대적 환경이 도래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새미나 대충이가 어떤 지랄육갑을 떨고 임프나 임포가 난리를 쳐도 장기적으로 볼 때 낙관적인 안도감을 갖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한국인의 우수한 자질을 육성해 온 우리 어머니들의 육아방식를 전승하고 발전 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다.
양넘들의 방식은 결코 올바른 길이 아니다.
구름~~
6 날짜 2001/01/05 21:48:23
작성자 구름~~ 조회 3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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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름의 육아 일기(6)
우리 민족은 전 세계에서 희귀하게도 요람이 없는 나라이다. 그리고 아이를 엄마의 등에 업고 다니는 것도 우리 나라뿐이다. 구한말에 우리 나라에 온 외국인들 눈에 가장 경이롭게 비친 것이 바로 우리 어머니들의 아이 키우는 모습이었다. 등에 젖먹이를 업고 한 손에 서너살 짜리 아이의 손을 잡고 한 손에 빨래를 한바구니 끼고 머리 위에는 물동이를 이고 그 좁은 논두렁길을 걸어가더라는 것이다.
한국인처럼 엄마의 태내에 오랫동안 머물다가 태어나는 사람들은 없다. 거의 걸어다닐 때까지는 엄마의 태내에 있을 수 있는 행운을 가지고 태어난다. 어머니의 따뜻한 등에 업혀있는 것은 태내에 있는 것과 같은 심리적 안정을 얻는 효과가 있다. 업고만 있느냐? 그렇지 않다. 울면 둥게 둥게 얼러주고, 빨래를 하고 밥을 지으면서도 노래를 불러주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기를 애기 띠로 앞쪽으로 안 듯이 매는 것과 업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아기의 시야가 우선 다르고 엄마의 동선이 아기의 시선과 같은 방향이다. 특히 등에 업힌 아기와 가슴에 안긴 아기는 두 손의 자유가 다르다. 가슴 쪽에 안긴 아기는 두 손으로 뭘 할 것이 없다. 장남감을 쥐어줘도 그것을 움직일 공간이 안 생기는 것이 품이다. 그러나 등에 업힌 아기는 엄마의 머리를 잡아당길 수도 있고 두 손을 어느 정도 움직여 헤작질을 할 수 있다. 가장 커다란 장점은 아이를 품에 안고는 엄마가 이동하는 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데 비해서 업은 상태에서는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사 일은 물론이요 밭일이나 논일까지도 아기를 업고서 할 수 있다. 그래서 엄마의 일 때문에 엄마와 젖먹이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시간을 없앨 수가 있다. 그래서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아기는 엄마와 밀착되어 지낼 수 있다. 요람에 눕혀놓은 아기보다는 등에 업힌 아기가 훨씬 많은 것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것과 대면하게 되고 보다 많은 사람의 얼굴을 가까이 하게 된다.
인간의 시간은 태어난 직후부터 죽는 그날까지 계속 빨라져 간다. 막 태어난 신생아는 하루의 대부분을 잠자는 것으로 보내고 눈을 뜨고 깨어있는 시간은 불과 몇 분이 안 된다. 그러나 그 10분의 시간이 노인의 하루보다 길다. 신생아의 하루는 노인의 한 달이다. 두 살 짜리의 하루는 스무 살 청년의 일주일과 같다. 어릴수록 시간은 더디 흐르고 하루가 길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체감 시간은 훨씬 빨라진다. 어린아이들에게 하루는 무척 길어서 참으로 많은 것을 하고 보낸다. 그래서 아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대단히 오래 걸린다. 그러나 스무 살 청년이 마흔의 장년이 되는 것은 금방이고 마흔의 장년이 환갑노인이 되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다. 환갑노인이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는 그야말로 시간이 총알같이 빨리 흐른다. 누구나 어린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 보라. 아침에 일어나서 해가 질 때까지도 무척 길었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등교해서 종례를 하고 하교하게 되는 순간이 얼마나 더디게 오더냐 말이다. 교단에서 강의를 하는 선생님한테 50분은 금방 지나가지만 수업을 받는 학생한테는 50분이 대단히 길다. 마흔 살만 넘겨 보라. 하루해가 순식간에 간다. 어느새 일년이 후딱 후딱 넘어가는 것이다. 반면에 신생아의 하루는 성인의 일년과 같다.
그래서 신생아가 잠에서 깨어 있는 잠시 동안 주먹을 한번 쥐었다 펴는 것이 유치원생이 한시간 동안 그림 한 장을 그리는 것보다 더 큰 학습효과가 있다. 신생아에게 엄마가 건네는 한마디가 중학교 가서 수업받는 한 시간보다 더 가치가 있고 그때에 아이의 귀에 들리는 엄마의 자장가 소리가 성인이 된 후에 세시간 짜리 교향곡보다 인성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친다.
구름~~
번호 7 날짜 2001/01/07 20:26:50
작성자 구름~~ 조회 3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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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름의 육아 일기(7)
신생아의 하루는 유치원생의 한 달보다 중요하고 유치원생의 한 달은 대학생의 1년보다 중요하다. 유치원 나이 이후는 죽을 때까지 중요도에서 별 차이가 없다.
요는 인간의 인성과 지능의 발달은 태어난 직후부터 유치원 나이 사이에 대부분이 결정되는 것이며 그 이후에 교육에 쏟는 노력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가서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전부 신생아 때와 기어다니던 무렵에 결정이 된다.
고등학생이 된 자식한테 학원비에 과외수업에 만금의 돈을 갖다 부어도 유아기 때의 낭비해 버린 시간을 보상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3살까지만 잘 키우면 평생 절약할 수 있는 교육비는 엄청날 것이다. 그 많은 학원비, 과외비 전부 다 안 들여도 되는 돈이 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아무 생각 없이 키우다가 애가 유치원 가고 초등학교 가고 중학교 가서 공부 안하고 뒤쳐지고 하니까 그제서야 돈을 바리바리 쏟아 붓고 발을 동동 구르지마는 이미 가버린 버스요, 죽은 자식이다.
이 때에 엄마가 조금 편해보겠다고 아이를 요람에 눕혀놓고 휘파람 불고 댕기고, 젖 모양 베린다고 우유나 사서 먹이고 하다가는 새댁 때 조금 편했던 것 평생 동안 골병으로 갚는다. 인간의 행복은 자식과 떼 놓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렵고 삶이 곤고해도 자식새끼들이 잘 자라주고 공부 잘하고 잘 커서 잘 살아주면 행복과 보람을 느낄 것이고 암만 억대의 재산을 모으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 떵떵거리고 살아도 자식새끼 잘못 키워 놓으면 인생에 낙이 없고 행복이란 영원히 오지 않는 파랑새다.
젊은 시절 엄마로서의 수고를 조금 더하고 덜 한다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식은 그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엄마인 내 인생이 어찌 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아이가 어릴 때에 조금만 더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 나중에 해야할 고생의 대부분을 덜 수 있고 나중에 들여야 할 돈의 대부분을 벌 수 있다. 고생이나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내 인생이 보람있었다 말할 수 있느냐가 결정되어 버린다.
서양식 가족관과 육아법이 들어오면서 엄마들은 많이 편해졌다. 그러나 그리 행복해지지 못했다. 엄마로서의 희생과 수고를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인생의 낭비라고 가르치는 여성교육 아래서는 엄마와 아이들이 모두 불행해질 따름이다.
우리 집의 두 아이는 모두 하루종일 나와 남편이 번갈아 가며 품에 안고 키웠다. 그것을 귀찮아 해 본 적이 없다. 첫째는 일곱 살 때까지 젖을 먹었다. 내 젖을 떼고 내 동생이 조카를 낳자 이모 젖까지 이어서 먹고 컸다. 그러다가 지 동생을 낳고 나서는 동생하고 같이 젖을 먹었다. 젖 빨리 뗀다고 좋은 게 아니다. 지가 먹겠다 하면 원하는 대로 먹였다. 먹을 만큼 먹고 나면 자연히 떼는 게 젖이기 때문에 억지로 뗄려고 젖에 쓴 약을 발라서 아이한테 쇼크를 주고 엄마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게 만들 필요가 없다. 물론 우리 집 아이들은 공갈 젖꼭지를 한번도 입에 물어본 적이 없다. 나는 공갈 젖꼭지만큼 흉악한 물건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만큼 아이의 인성을 해롭게 만드는 것도 없다고 본다. 엄마의 젖이란 물고 빨면 맛있는 젖이 나온다는 것이 한 인간이 태어난 후에 이 세상에 대해서 갖게 되는 첫 번째 믿음이다. 그 믿음을 철저하게 파괴해버리는 흉악한 물건이 바로 공갈 젖꼭지다. 물고 아무리 빨아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 공갈 젖꼭지는 아이의 마음에 첫 번째 의심을 만든다. 엄마의 젖꼭지는 젖이 나올 때도 있고 안 나올 때도 있다. 이것은 엄마에 대한 불신과 의심의 시초가 된다. 엄마가 조금 편하자고 아이의 마음속에 이런 세상에 대한 불신의 싹을 심을 수는 없다. 엄마가 아기를 잡고 사기를 치면서 어찌 올바르게 커주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공갈 젖꼭지로 아기한테 사기를 치면 안된다. 하루에 수십 번이라도 진짜 젖이 나오는 엄마의 진짜 젖을 물릴 일이다.
구름~~
번호 8 날짜 2001/01/08 02:47:42
작성자 구름~~ 조회 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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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름의 육아 일기(8)
인간은 선천적인 학습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배우려고 하는 본능은 어떤 아이를 막론하고 대단히 강력한 것이다. 엄마가 해야 할 일은 아기가 가지고 태어난 학습 의욕을 꺾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면 누구나 다 자란 후에 영재가 되고 수재가 되고 똑똑한 인간이 된다. 그런데 왜 나중에 공부를 하기 싫어하고 주의력이 산만하고 머리가 나쁜 사람이 되느냐? 이 타고난 학습 의욕을 엄마가 기어코 꺾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금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가장 비교육적인 폭력이다. 엄마가 습관적으로 아이한테 하는 '안돼!'와 '하지 마!'가 자식을 바보로 만든다. 우리 나라 엄마들의 가장 좋지 못한 습관이 바로 '안돼!'와 '하지 마!'라는 두 마디다. 아기가 보다 어릴 때는 '지지'와 '맴매'라는 말로 나타난다. '금지'는 바로 '본능적인 충동에 대한 억압'이다. 이 억압이 아기의 학습본능을 약화시키고 배우려고 하는 의욕을 꺾어놓는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엄마들이 생각지 못 한다.
내가 단언컨데 아기가 3살이 될 때까지는 '안 돼'와 '하지 마'라는 두 마디를 할 일이 없다.
'지지'와 '맴매'라는 두 마디는 아기를 키우는데 필요 없는 아니 가장 해로운 두 마디다.
큰 아이가 막 기어다니기 시작했을 때 내가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방안에서 엄마가 '지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방에 들어가 봤더니 아기가 신문이 놓여진 자리에 기어가서 그것을 쥐고 구겨 놓으니까 엄마가 뺏으면서 한 소리였다. 애기 아빠가 아직 보지 않은 신문을 구겨 놓을까봐 아기가 손으로 만지고 있는 신문을 뺏은 것이었다. 나는 그 신문을 아기한테 다시 줬다. 남편은 신문 하루쯤 안 봐도 되고 구겨진 신문 봐도 상관없다. 아기가 방바닥에 놓인 신문이라는 것(큰 종이)에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을 만지작거린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나는 하도 기뻐서 버리려고 내다 놓은 신문들을 한 아름 가져와서 방안에 온통 퍼질러 놨다. 아무 데나 기어다녀도 신문이 아기 손에 잡히도록 여기 저기 신문을 늘어놓은 것이다. 한참 동안 아기는 신문을 가지고 놀았다. 처음에는 신문을 손에 잡아보려고 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 그것을 구길 정도로 힘이 생길 때까지는 꽤 오랜 시일이 걸린다. 구겨보는데 익숙해지면 다음 단계는 그것을 찢어보는 것이다. 우리 아기가 처음으로 신문을 찢는데 성공했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한번의 성공을 하기까지 아기는 수백 번도 더 넘게 신문과 씨름을 했다. 찢으려 하는데 안 찢어지니까 화를 내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하면서 그러나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다음날도 해보고 그 다음날도 또 해본다. 그러다가 거의 한 달이나 걸린 끝에 드디어 그 질긴 신문이 아기의 손에 의해 찢겨져 나간 것이다. 한번 성공한 다음부터는 제법 쉽게 찢는다. 신문 찢는 재미를 붙인 아기는 신문이 가장 좋은 장난감이다. 싫증이 나서 다른 것을 찾을 때까지는 신문이야말로 아기의 가장 훌륭한 친구고 좋은 장난감이다. 그 때에 신문을 한번 찢는데 성공한 것은 아기가 자기 일생에 수없이 되풀이하게 될 시도에 대해서 끈기와 집념을 가지고 성공을 한 첫 경험이다.
이것의 중요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남편이 보는 신문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한달 동안의 수 없는 짜증나는 실패와 좌절과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처음으로 신문이 찢어졌을 때 우리 아기는 일생에서 처음으로 성공의 희열을 맛본 것이다. 성취감이 무엇인지를 느껴본 것이다. 이 첫 경험을 언제 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한달, 아니 하루라도 일찍 해 본 아기가 나중에 인생에 성공할 가능성이 더욱 크다. 만약에 아기가 신문에 관심을 가질 때 '지지'하고 뺏어버리는 행위는 한 인간의 엄청난 시도를 방해하는 것이고 대단한 성공의 기회를 박탈하는 폭력이다. 아기의 손에서 신문을 뺏고 그 대신 딸랑이를 쥐어주는 것은 금은보화를 뺏고 쇳덩이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엄마가 좋다고 생각하는 장난감이 아니라 아기가 좋아하는 것을 장난감으로 줘야 한다. 신문 종이에 관심을 보이는 아기에게는 신문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장난감이다. 그거 대신 어떤 값비싼 딸랑이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아기가 밥그릇을 가지고 놀면 밥그릇을 주고, 숟가락을 가지고 놀면 숟가락을 줘야 한다. 아기가 관심을 갖는 모든 물건은 위험하지 않은 한 절대로 뺏으면 안 된다. 다른 것을 대신 줘도 안 된다. 아기가 관심을 갖는 바로 그것을 줘야 하고 '지지'라는 소리는 금물이다.
우리 집 아이는 기어다닐 때 신문을 엄청 많이 찢었다. 찢으라고 방바닥에 언제나 신문을 흩어 놓았다. 엄마가 아기를 위한다고 다른 종이를 주면 아기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더 비싸고 더 좋은 종이는 엄마 생각이고 아기는 신문을 원한다. 신문을 원하면 얼마든지 준다.
고사리 같은 자그만 손으로 신문을 한번 북 찢는 행위가 나중에 네 살 다섯 살 때 레고블록으로 아주 크고 복잡한 집을 하나 짓는 것보다 훨씬 아기를 발달시키고 초등학교 가서 어렵고 힘든 공작을 수십 번 하는 것보다 가치가 있다.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아기가 '성공을 체험해볼 수 있는 기회'를 '지지'라는 웃기는 소리로 박탈해서는 안 된다.
구름~~
번호 9 날짜 2001/01/15 00:11:54
작성자 구름~~ 조회 3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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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름의 육아 일기(9)
나는 우리 아기가 처음으로 신문을 찢는데 성공하고서 나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던 그 표정을 잊지 못한다. 얼마나 기뻤는지 찢어져서 손아귀에 들어온 작은 조각을 다른 한 손에 박수를 치듯이 부딪히며 으쓱한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는 것이었다. 그 것을 보고 나는 눈물이 스며 나오는 것을 참고 같이 박수를 쳐주고 칭찬을 해주었다. 겨우 앉을 수 있는 아기이지만 엄마가 자기의 성공을 같이 기뻐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안다. 이럴 때 그것을 아기한테 전달하지 못하는 엄마는 자격이 없다. 칭찬이란, 말을 배우고 난 다음에는 이미 늦다. 격려와 칭찬 그리고 아기의 행동에 엄마가 같이 기뻐한다는 공감대의 체험은 태어난 직후부터 가능하고 그렇게 해야 한다.
아기가 가지고 태어난 학습본능은 엄마의 칭찬과 기쁨으로 극대화되고 금지와 야단으로 위축된다. 아기가 무엇을 하던지 외부 세계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거나 호기심을 가질 때 엄마는 그때마다 기뻐해 줘야 한다. 그게 아무리 사소하고 하찮은 행위일지라도 아기에게는 자기의 전 역량을 동원한 시도이고 놀라운 발견을 하고 있는 중이며 엄청난 모험과 탐험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기는 엄마의 반응에 대단히 민감하다. 자기에 대해서 기뻐하고 있는지 싫어하는 것인지 극히 예민하게 알아차린다. 아기의 학습본능을 고취시키거나 위축시키는 건 오로지 엄마의 반응에 달려 있다. 신문을 찢은 아기에게 엄마가 보낸 최대한의 찬사와 놀라움과 축하는 우리 아기에게 곧바로 기쁨과 용기 그리고 성취감을 향한 의욕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어머나 드디어 찢었네, 아이고 내 새끼 너무 장하네요. 아이고 이뻐라 쪽쪽쪽' 엄마가 옆에서 보고 있다가 '야 남들이 보면 니만 아기 키운다고 하겠다' 하고 놀려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모든 가능한 표현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해서 기뻐해 줬다.
그 결과는 금방 드러났다. 아기는 신문을 찢는 일에 목숨을 걸게 된 것이다. 마치 신문을 찢기 위해서 태어난 아기처럼 하루 종일 신문만 찢고 다녔다. 신문을 북 찢고 나면 으레히 엄마를 한번 돌아본다. 자기의 그 장하디 장한 쾌거에 엄마가 까무라치는 것을 자꾸 보고 싶은 것이다. 나중에 자란 다음에 공자의 논어를 백날 들려주고 부모은중경을 수십 번 읽게 하는 것보다 이 것이 자식을 효자로 만든다. 엄마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엄마가 기뻐할 수 있는 어떤 행위를 자기가 할 수 있다, 그리고 했다는 것의 체험이다. 이것을 기어다닐 때 겪게 해야 한다. 그래야 자란 후에 남을 기쁘게 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인성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고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 소질의 배양은 오로지 유아기 때 아기의 행위에 대한 엄마의 반응에 달려있다. 엄마는 부지런해야 된다. 조기 교육을 한답시고 값비싼 교재 사다가 걷지도 못하는 애기 귀에 꼬부랑 영어를 들려주는 그런 일에 부지런할 게 아니라 아기에게 엄마의 반응을 보여주는데 하루 종일 부지런해야 된다. 계속 기뻐해 주는 자동 인형이 되어도 좋다. 아빠까지 합세를 해주면 금상첨화다. 자기의 행위에 대해 엄마가 기뻐하는 것을 적게 체험한 아기는 남을 기쁘게 만드는 일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이 된다. 엄마는 무뚝하거나 감정의 표현이 무디면 안된다. 엄마가 하루종일 기뻐하는 기계가 되는 것이 아기를 천재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한가지 중요한 것은 기어다니는 아기가 있는 집 방은 절대로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으면 안 된다. 아기가 어떤 물건에 관심을 갖고 흥미를 보일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위험한 물건을 제외한 모든 잡동사니를 방에 쏟아 놓을 필요가 있다. 기어다니는 아기한테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경이로움이다. 눈앞의 모든 물건이 견딜 수 없는 호기심으로 유혹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대상물은 많고 다양할수록 좋다. 나는 애기가 기어다니는 방안에 신문, 그림책, 색연필, 밥그릇, 둥그스럼한 숟가락 자명종 시계, 딸랑이 헝겊, 천쪼가리 등등 쓰레기 집합소처럼 퍼질러 놓고 키웠다. 엄마가 보고는 언제나 눈쌀을 찌푸리던 그 방은 우리 애기한테는 온갖 신기한 물건들로 가득찬 마법의 궁전이다. 아기는 돈주고 산 장난감보다 일상용품들에 더 관심이 많다. 나지막한 차상도 신기한 물건이다. 애기가 올라가려고 귀통이를 잡고 바둥거리니까 엄마는 교자상을 치워 버리신다. 위험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다시 가져다가 아기 앞에 놓았다. 우리 아기가 그 상위에 기어올라갈 수 있을 때까지 상을 붙들고 아기가 하는 대로 지켜보는 것이다. 올라가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게 상이건 침대건 백두산 꼭대기건 올라가 보게 나둬야 한다. 지가 하다가하다가 지쳐서 포기 할 때까지 넘어지거나 상이 엎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우리면서 아기가 하는 대로 지켜보는 것이다. 무슨 짓을 하던 이 때는 다 하도록 놔둬야 하고 시도하는 가운데 다치지 않도록만 옆에서 지켜봐 주면 되는 것이다. 어떤 급한 일이 있어도 우리 아기가 뭔가를 하려고 시도를 할 때는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나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도가 성공했을 때 아낌없는 격려의 박수를 쳐줄 만반의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었다. 엄마는 스물 네 시간 임전태세가 아니라 박수태세고 5분 대기조가 아니라 5초 응원조이다. 아기에 대해서는 5초 이내에 엄마의 반응이 간다. 금지와 야단의 반응이 아니라 칭찬과 기쁨의 반응이다.
구름~~
번호 10 날짜 2001/02/14 12:04:01
작성자 구름~~ 조회 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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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름의 육아 일기(10)
내가 첫 아이를 가진 게 결혼하고서 3년이 지나서였다. 왠 일인지 아이가 들어서지 않아서 걱정을 하다가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밑에 동생하고 첫 아이를 같이 가졌다. 나보다 몇 달 늦게 동생이 애를 가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집 큰애하고 동생네 큰 애는 둘다 범띠로 동갑이다. 동생은 아들만 둘을 낳았고 나는 딸만 둘을 낳았다.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우리집 큰애는 엄마 젖을 뗀 후에 이모 젖까지 계속 얻어먹고 자랐던 것이다.
오뉴월 하루 땡볕이 무섭다고 그래도 내가 몇 달 먼저 엄마가 된 덕분에 동생한테도 육아에 대해 훈수를 많이 했다.
그 중에 동생이 우리 집에 와서 내가 아이 키우는 것을 보고 놀랜 것이 많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아기 밥 먹이는 모습이었다. 겨우 앉아서 턱받이를 하고 이유식을 먹을 때면 아기는 누구라도 숟가락질을 하려고 한다. 어떻게 하나 두고 보면 고사리 손으로 숟가락을 쥐고는 음식을 떠서 입에 갖다 넣는 시늉을 하는데 이게 잘 될 턱이 없다. 겨우 뜬 국물이 입 근처에 숟가락이 가는 동안 다 쏟아져 버린다. 숟가락을 뒤집기 때문이다. 그리고 숟가락을 정확하게 입에 가져가 대는 것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 코에 갖다 대고 턱을 찌르기가 일쑤다. 그렇게 하다가 도저히 안 되면 짜증이 나는 지 최후의 방법을 쓴다. 세상에서 가장 편리한 젓가락을 동원하는 것이다. 숟가락은 버리고 손으로 덤빈다. 반찬들을 손으로 휘젓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이때 아이가 숟가락질을 하는 것을 중단시켜본 적이 없다. 자기가 숟가락으로 떠먹어보려고 노력을 하는 한 절대로 도와주지 않았다. 동생은 그 무렵에 아이를 턱받이를 예쁘게 해놓고 인형처럼 앉혀놓고 엄마가 일일이 떠 먹여 주는데, 아기가 숟가락질을 할려고 해도 그것을 못하게 말리고 엄마가 멕여주는 것이다. 나는 여러 번 그러지 말라 했는데도 엄마 성질이 급해서 아기가 숟가락질에 짜증을 낼 때까지 기다려주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서툰 숟가락질에 온통 식탁이 버리고 음식들이 바닥까지 떨어져 흐트려지는 것을 참을 수 있는 인내가 부족한 것이다.
엄마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식사시간이 길어지더라도 아기가 숟가락질을 지 손으로 해보겠다는 것을 말려서는 안 된다. 숟가락이 뒤집어지지 않도록 수평을 유지하면서 자기의 입에 정확하게 갖다댄다는 동작은 아기에게는 수백 번의 실패와 끈질긴 도전을 요구하는 험난한 가시밭길이다. 그것을 이겨내야 하고 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음식물이 담긴 숟가락을 자기 입안에 바로 넣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어야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음식 그릇에서 한 숟가락 떠서 입에까지 가져가는 그 단순해 보이는 동작 한번의 연습이 훗날 피아노 레슨 열달 시키는 것보다 더 빠른 지능과 운동신경의 발달을 가져다준다. 음식이 쏟아지지 않게 숟가락의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나중에 평균대 위에서 체조를 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균형감각과 공간지능을 아기가 갖게 하는 것이다.
이때는 아기의 배를 부르게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지가 지 손으로 숟가락질을 해보고 싶어하는 그 학습의 욕구를 엄마가 떠 먹여 주는 것으로서 꺾지 않는 일이다. 그 의욕과 의지를 짓밟지 않는 일이다. 아기 식사 시간이 두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는 끝날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먹여주는 것은 마침내 아기가 포기하고 숟가락을 집어던지고 울기 시작할 때이다. 물론 그때 쯤에는 아기 얼굴이며, 옷이며 식탁은 난장판처럼 어질러져 있고 아기가 쏟아놓은 반찬 국물과 음식들로 전쟁터 같이 되어 있지만 그것은 치우면 될 일이고 아기의 전쟁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집 아이들은 숟가락 젓가락 질이 보통 아이들보다 1년이 빨랐다. 그것은 그만큼 다른 아이들보다 지능이 빨리 발달했다는 이야기이다.
엄마의 조급함과 친절함이 아기들을 바보로 만든다.
구름~~
번호 11 날짜 2001/02/14 21:17:12
작성자 구름~~ 조회 6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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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름의 육아 일기(11)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한다. 자기가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되면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라도 자식만은 성공을 시키고 싶어한다.
그런데 과연 어떤 사람이 성공을 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뚜렷한 주관이 없이 산다. 만약에 자기 자신이 성공을 못했다면 그것은 자기의 부모가 자기를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유형의 사람'으로 키우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식만큼이래도 성공한 사람을 만들고 싶다면 자기 부모가 그랬던 것과는 달리 자기는 자식을 '성공 가능성이 높은 사람'으로 키우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이 성공의 가능성이 높은가?'에 대해 뚜렷한 답을 모른다는 것이고, 혹 답을 알고 있더라도 그럴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식을 키우는 방법을 모른다는 데 부모로서의 고민이 있다. 물론 자식이 부모 키우는 대로 되는 것이냐하면 그건 장담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떻게 키우던 그것과 관계없이 자식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교육 무용론' 내지는 '환경 무관론'이 되어 버리고 육아론이니 교육 이론이니 방법론 따위 전부가 쓸데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육아론을 쓴다는 것 자체가 '교육의 필요성'과 '환경의 영향'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만큼 '그렇게 키운다고 다 자식이 잘 된다는 보장이 있는가?'라는 반론은 일단 접어 두자.
그런 반론을 수용하게 되면 '교육'에 관한 한 아무 할말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유형의 인간'이라고 보는 몇가지 '성공할 인간의 특성'이 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온갖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했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의 특성을 살펴보고 그들의 공통분모를 뽑아 본 결과이다. 어떤 사람이 성공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 몇 가지를 나열해 보자. 옆의 ○×는 각 항에 대한 구름의 판정이다. '○'는 'Yes'고 '×'는 'No'다.
1. 좋은 집안 출신이다.(훌륭한 가계) ×
2. 부유하게 자랐다. ×
3. 찢어지게 가난했다. ×
4. 큰 도시에서 성장했다. ×
5. 농촌에서 자랐다. ×
6. 어릴 때 공부를 잘했다. ×
7. 학벌이 좋거나 명문 대를 졸업했다. ×
8. 미남이거나 미녀이다. ×
9.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 ×
10. IQ가 높았다. ×
11. 성격이 밝고 명랑했다 ×
12. 대인 관계가 좋았다. ×
13. 결혼을 잘했다. ×
14. 큰 재산을 물려 받았다. ×
위 항목들의 어느 한 가지가 성공의 이유인 사람들은 물론 있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이유인가?'하고 물을 때는 예외가 너무나 많아서 전부 '×'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러했다'라 말할 수 있는 '공통점'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물론 드물게도 예외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공통점'은 세 가지 정도를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구름~~
▒ 성공의 조건 ▒
네띠앙 게시판에서 연재하다가 말은 '육아일기'에서 내가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걸 요약해서 말하면 이 세 가지다. 물론 어떤 일에도 예외라는 건 있지만 그 예외가 희소할 때는 공통점이라 말할 수 있다 생각하니까 예외를 내밀면서 반론하시지는 말기 바란다. 여기서의 '모든'에는 '드문 예외가 있는 모든'이란 뜻이다.
첫째,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독서량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전공 분야나 학문적인 독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대한 취미적인 독서를 말한다. 학력은 국졸이건 대학원졸이건 관계없이 성공한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었더라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 경험으로도 가장 강적은 독서광이다. 설대 수석 입학, 수석 졸업, 하바드 유학자도 사실 겁이 안 나는데 책 많이 읽은 사람은 상대하기 쉽지 않다.
두번째는 모든 성공한 사람은 언변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말에 신언서판이란 말이 나왔을 것이다. 말 못 하면서 성공한 사람을 나는 거의 보지 못했다. 학력과 언변 중에 성공에 더욱 중요한 요소는 언변이다. 대학원 나오고 말 못하는 사람보다 국졸이지만 말 잘하는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나는 본다. 여기서의 언변이란 협의로 말하면 '설득력'이다. 설득력 없이 성공은 꿈꿀 수 없다.
세 번째가 뭐냐? 바로 결정하는 힘이다. 이것은 정상에 서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필수불가결한 자질이다. 나는 그 좋은 학벌, 훌륭한 집안, 수려한 외모, 뛰어난 언변, 방대한 학식과 기술을 가지고도 어느 모로 봐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을 볼 때 저 사람한테 부족한 것이 뭔가? 자기보다 모든 면에서 나은 사람을 부리는 저 사람의 뛰어난 점이 뭔가? 하고 찾아보면 그 차이는 결정력이 있느냐 없느냐인 경우가 많다. 모든 성공인은 Decision Maker이다.
결정해 주는 것을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정하는 사람이다. 이 디시젼 파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키울 때 이 세 가지를 갖추어주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 책을 좋아하는 인간으로 만들고, 설득력이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 그리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인간으로 키우고자 했다. 물론 성공과는 무관한 덕목의 교육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도덕적인 인간 못지 않게 세속적으로도 성공한 인간이 되는 것의 중요성을 나는 낮추어 보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이란 바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과 자신의 능력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자신의 능력 사이에 갭이 있는 사람이다.
무엇을 하고 싶던, 그리고 그것을 해서 행복해지던 아니던 그것은 자식의 몫이고 부모로서 나의 책임은 내 아이가 능력이 부족해서 자신의 하고 싶은 바를 해보지도 못하는 사람은 아니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해보니까 그게 행복은 아니더라.'는 결론을 내리게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해보고 아는 것이 해보지도 못해서 어떤지 알 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성공은 그런 결과를 얻는 것과 모르고 죽는 것의 차이다.
구름~~
학습의 시작은 모방이다. 모든 동물들은 어미의 행동을 모방해서 따라하는 것으로 학습을 시작한다. 사람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행동을 모방하려고 하는 본능이 있고, 어머니가 관심을 갖는 물건에 아이도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학습본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육아라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가가 쉽게 나온다. 바로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모범이다. 나는 주위의 많은 부모들이 아이를 교육함에 있어서 '나는 바담풍 하더라도 너는 바람풍이라고 해야 한다'는 식인 것을 본다. 게가 지 새끼한테 너는 왜 똑바로 못 걷느냐고 다그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경우를 늘 보는 것이다. 교육은 돈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회초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야단쳐서 하는 것도 아니다. 교육은 모범이다. 아이는 엄마가 하는 대로 간다.
나는 아이를 올바르고 똑똑하게 키우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본다. 첫째가 부모의 사랑이요, 두 번째가 모범이며, 세 번째가 칭찬이다. 이 세 가지로 키워서 잘못 되는 아이는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다시 말하면 문제아란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가지 이상이 결여된 환경 속에서 유아기를 보낸 아이를 말한다.
앞에서 성공한 인간의 공통점으로 '독서'를 들었다. 모든 부모들의 바램이 자기 아이가 책을 좋아하고 책을 많이 읽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책을 좋아하는 인간으로 만들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나는 자랑은 아니지만 독서광이다. 자그만 도서관 하나는 내 머리 속에 통째로 들어있다. 나는 내가 왜 책을 그렇게 좋아하게 됐을까 생각해 본다. 그 이유는 첫째, 너무나도 다행스럽게 나는 독서에 아주 양호한 환경 속에서 컸다는 것이다. 바로 집에 책이 많았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내가 어려서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책을 좋아하셔서 많은 장서를 나한테 물려주셨는데,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안방과 거실의 책장마다 책이 가득 꽂혀있었다 어린 나한테는 너무나 어렵고 글자가 작고 빽빽한 그런 책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국민학교 저학년때부터 아버지 책꽂이의 책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서 읽었다. 당시에는 이해가 절반도 안됐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읽은 책의 내용을 가지고 어른들한테 당돌하게 아는 척해서 놀래킨 적이 많았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위로 언니나 동생도 책을 많이 읽으면서 자랐다. 자기 아이가 책을 읽기를 바란다면 우선 집에 책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들한테는 돈을 아끼지 않아서 어려서 그림책부터, 조금 자라면 동화책에, 더 자라면 문학전집류에 이르기까지 아이들 책은 볼 만큼씩 사주고 있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푸념들을 한다. 그렇게 많은 책을 사주는데 왜 아이는 책을 보지 않느냐? 그 답은 부모가 안 보기 때문이다. 내가 집에 책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이들 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부모의 책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책이란 물건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과 호기심은 기어다닐 때 자기 엄마가 책을 보는 모습에서 저절로 생긴다. 그래서 아이는 책과 같은 물건이 있으면 그것을 펼쳐서 자기 엄마가 하는 것처럼 그것을 보는 흉내를 낸다.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이면 더욱 좋겠지만 빽빽하게 활자가 박힌 어른들 책이라도 관계없다. 책과 같이 생긴 물건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엄마의 행동을 모방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책의 성격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나는 부주의로 내가 읽던 책을 방바닥에 놓아둔 것을 아이가 발견하고 그것을 찢고있는 것을 발견해도 뺏지 않았다. 내가 가진 책들 중에는 너덜너덜한 책이 대부분이다. 세조각 네조각 난 책도 많다. 펴보면 군데군데 찢어지고 구겨진 페이지를 스카치테프로 붙여놓은 것도 많다. 다 두 딸이 어릴 때 갖고 놀다가 찢어먹은 페이지들이다. 나는 아이가 찢은 페이지를 나중에 테프로 붙일망정 책을 가지고 노는 것을 뺏어본 적이 없다. 내가 가진 책들의 전부를 걸레를 만들어 놓아도 나는 무방하다. 그걸 아이가 읽는 것이 아니라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아도 책이라는 것을 손에 쥐고 논다는 자체만으로 나는 대만족이었다. 어떤 장난감보다 책을 가지고 노는 시간이 많을수록 좋다.
지금 내 손아래 올케나 친척들을 보면 임신했을 때부터 아이 책을 준비를 해서 여러 가지 값비싼 그림책을 장만해 놓는 것을 본다. 그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런 책들을 그 그림을 볼 나이가 될 때까지 모셔둔다는 것이다. 그때는 이미 늦다. 아이가 기어다니는 방에 언제나 그림책 몇 권을 던져두어야 한다. 일부러 읽으라고 아이한테 강요할 필요없다. 그렇게 그림책 몇권 던져놓고 엄마가 하루 중에 30분만이라도 책을 읽는 모습을 아이한테 보여주면 아이는 방바닥에 놓여진 책이라는 물건에 대해 관심을 나타낸다. 이건 틀림없다. 그림을 이해하건 안 하건 그런 것은 신경 끊어도 좋다. 우선 필요한 것은 기어다니는 아이가 책처럼 생긴 물건에 대해 반응을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유아때 좋아했던 것이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평생을 간다. 물론 이때 아이가 책을 읽지는 못하고 그림을 볼 나이도 아니지만 하여간에 엄마를 흉내내어 책을 펴보고 우선은 찢어보려 할 것인데 이때 비싸게 샀다고 새책이라고 아까워 할 필요는 없다. 신주단지 모시듯이 잘 모셔두었다가 제 나이 되었을 때 그림을 보여주고 글자를 읽히는 것보다 기어다닐 때 한 장 찢어보는 것이 지능발달에 백배 유익하다. 그림책을 볼 나이가 되기 전에 우리집 아이들은 그림책전집 서너질을 찢어먹고 자랐다. 아이들의 기억 속에는 재생되지 않겠지만 유아기때 책이라는 것을 가지고 찢고 집어던지고 고사리같은 손으로 크레용이나 색연필을 쥐고 그어대며 놀았던 것이 가장 즐거웠다는 무의식의 기억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래서 책을 손에 들면 마음이 편해지고, 책을 읽으면 행복해지는 것이다.
나는 요즘 젊은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고 한달에 몇 번이나 서점에를 가는지 묻고 싶다.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서점이라는 것을 처음 간 것이 몇 살 때인지도 묻고 싶다. 나는 우리집 아이들이 태어난 그 첫달부터 애기를 들쳐업고 서점에 책 사러 들어갔다. 겨우 서서 아장아장 걸을 때는 서점의 매장에서 돌아다니게 놔두고 책을 골랐다. 그래서 우리집 아이들은 슈퍼나 옷가게, 시장의 풍경보다 책이 진열된 서점안의 풍경에 더 일찍 익숙해졌다. 엄마가 늘 옷가게 들려서 예쁜 옷이나 사입고, 뻔질나게 미장원 가서 지루하게 애 앉혀놓고 머리나 하고, 동네 아줌마들 모여서 화투나 치고, 어디 맛있는 거 없나 음식 잘하는 집이나 찾아다니고, 찜질방에나 아이 델꼬 다니면서 그런 엄마를 보여줘 봐야 아이가 보고 배울 게 없다. 정말로 보여줄 엄마의 모습은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책을 사와서 집에서도 시간 나는 틈틈이 책을 읽는 모습이다. 그래야 아이가 엄마를 모방해서 책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고 흥미를 갖게 된다.
다른 집 애들은 시간 나면 창동으로 합성동으로 몰려서 놀러다니고, 영화보러 가고 피시방가고 노래방 가는데, 우리집 두 녀석은 돈 생기고 시간 나면 둘이 손잡고 책 사러 서점에 간다. 창동에 가는 것도 군것질하고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큰 서점에 책 사러 간다. 언니네, 동생네 할 것 없이 우리집을 보고 제일 부러워하는 것이 바로 아이들 독서열이다. 언니들도 가리늦게 나한테 묻는다. "니는 아를 우찌 키우길래, 너거집 아들은 저리 책을 좋아하노?" 질투반 부러움반으로 묻는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하고 대답하고 말지만, 이유는 하나뿐이다. 언니들은 책 안 읽자나. 아이들 데리고 서점 안 가자나.
나는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가장 자주 간 곳이 서점이었다. 동네 슈퍼말고는 가장 자주 갔다. 그리고 아이들이 책을 사달라고 하면 돈을 아끼지 않고 사주었다. 반찬 가지수를 줄이는 한이 있어도 사달라는 책을 안 사준 적은 한번도 없다. 우리집 식구들이 총동원돼서 백화점을 가도 백화점 안의 서적코너는 참새 방앗간이다. 누가 먼저 가자 소리를 안 해도 자연히 서점에 가게 된다. 책을 한권도 안 사고 온 식구가 흩어져서 뒤적거리다가 오는 날도 많다. 그러나 지하 식당가는 안 들려도 서점은 들린다.
아이가 태어나서 대학을 갈 때까지 아이 데리고 서점가서 책을 사본 기억이 언제적에 있었는지 가물가물한 엄마들이 많다. 아이들이 다 자라도록 책을 몇 권이나 사봤는지 열 손가락이 남는 엄마들도 많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고 공부를 잘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연목구어나 마찬가지다. 우물에서 숭늉찾는 짓이다.
아이가 책을 좋아하기 바란다면 아이한테 책을 사서 안기지 마라. 엄마인 당신의 책을 사라. 당신이 책을 읽어라. 아이 책이 아니라 엄마의 책을 사는데 아이를 데리고 다녀라. 그러면 아이는 자기 볼 책을 지가 사게 된다. 아이는 책볼 생각도 않는데 값비싼 전집류를 할부로 뎅겅뎅겅 사서 안겨봐야 빚만 늘 따름이다. 집안에 폐지뭉치만 쌓인다.
구름~~
독서에 대해서는 앞에서 얘기를 했는데, 그렇다면 공부를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알고 있는 답은 간단하다. 한달이라도 일찍 연필을 쥐고 논 아이가 공부를 잘하고, 유아기때 손에 연필 쥐고 놀았던 시간과 자라서 공부하는 능력은 비례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 손에 억지로 연필을 쥐어놓고 놓지 못하도록 반창고로 붙여놓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아이가 연필을 가지고 놀 수 있게 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이것 역시 답은 마찬가지다. 엄마가 아이 앞에서 연필 쥐고 놀면 된다. 내가 새댁들한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아이가 갓난쟁이일 때 하다 못해 아이가 보는 앞에서 매일 가계부라도 쓰고, 아이를 들쳐업고 일기라도 쓰라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를 유심하게 본다. 아이가 아직 서지도 못한다 해서 아무 생각이 없을 거라고 보면 큰 오산이다. 엄마가 뭘 하는지, 엄마 손에 뭘 가지고 있는지 아이는 엄마의 일거수 일투족을 유심하게 관찰하고 있다. 그건 바로 본능이다.
엄마가 연필같은 것을 쥐고 공책에 뭔가를 글적거리는 모습을 보게 되면 아이는 기어와서 엄마의 손에서 그것을 뺏으려고 한다. 아이가 가장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는 대상은 엄마의 손에 있는 물건이다. 아이가 겨우 손을 펴서 무엇인가를 쥘 수 있을 때가 되면 방바닥에 색연필이나 크레용을 몇 개 던져 놓으면 된다. 굳이 아기 손에 쥐어주려고 안달할 필요도 없고, 조급하게 생각할 일도 없다. 아이가 관심을 안 보여도 그뿐이다. 그렇게 던져놓고 엄마가 비슷하게 생긴 물건을 손에 쥐고 일기를 쓰건 그림을 그리건 가계부를 정리하건 엄마 할 일만 하면 된다. 엄마가 연필로 뭔가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가 연필처럼 생긴 물건에 흥미를 일찍 나타내는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을 쥐고 뭔가를 쓰는 동작의 흉내도 더 일찍 내기 시작한다. 유아기 때의 한달 차이는 아동기 때의 1년 차이와 맞먹는다. 아동기의 한달 차이는 역시 청소년기의 1년 차이와 같다. 연필을 생후 6개월에 처음 쥔 아기와 7개월에 쥔 아이는 1년 차이가 난다고 나는 본다.
나는 큰애가 걸음마를 배울 때 처음으로 크레파스로 방바닥을 쿡쿡 찍어서 자국을 내 놓은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엄청 빨랐다. 벽에 손을 집고 겨우 벽따라 걸으면서 한 손에는 크레파스 같은 걸 쥐고 벽에 줄을 긋고 다녔다.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당장에 문방구에 가서 큰 모조지를 사다가 아이 손이 닿을 수 잇는 높이까지는 모든 방과 거실의 벽에 모조지를 테프로 발라주었다. 장롱에도 다 붙였다. 마음대로 온 집안의 벽에 황칠을 하고 돌아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인데 이 종이가 며칠을 못 가는 거였다. 아기가 잡아서 뜯어놓는 것이었다. 나증에는 그냥 벽에 그리고 다니게 놔뒀다. 장롱을 엉망으로 만들고 장판을 볼펜으로 그어놔도 말리지 않았고, 오히려 짧은 작대기 하나 그어놔도 피카소 그림 보듯이 감탄을 해주고 칭찬해주고 그랬다.
남편한테는 미리 못박아 말해 두었다. 애기가 조금 자라고 나면 도배 새로 해달라고. 그때까지는 애기가 하는 대로 놔 두자고. 남편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사람이다. 반대가 있을 리 없다. 벽이나 방바닥에 낙서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얼라한테 가르칠 필요는 없다. 가르칠 수도 없다. 많은 엄마들이 아이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야단을 친다. 아이는 야단치고 화내는 엄마의 모습이 무서워서 울뿐이고, 매가 아파서 자그만 손을 비비면서 빌기도 하겠지만 그건 훈육이 아니다. 그저 엄마의 화플이고 아이에 대한 이유 없는 폭력일 뿐이다. 아이한테 스케치북을 사줄 나이가 되면 벽이나 방바닥에 그리라 해도 안 그린다. 구태여 가르치지 않아도 그것은 나이들면 자연히 알게 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아기가 연필이나 크레용으로 뭔가를 그리는데 흥미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놀라운 성장과 발전을 그까짓 몇만원만 들이면 언제라도 새로 할 수 있는 도배와 견줄 이유는 없다. 벽의 도배하고 장판지를 통째로 걷어내고 새로 한다 해서 비용이 얼마나 들겠냐 말이지. 나중에 아이가 공부 못하고 머리 나빠서 빌빌거리면 과외비, 학원비 엄청나게 깨져야 하는데 그까짓 도배지 장판지 값이야 그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내 두 딸은 학원은 고사하고 속셈학원 한군데 안 다니고도 둘 다 전교에서 1,2등을 다툰다. 갓난아기 때 언니들이나 주위 친척들이 나보고 아이한테 낭비가 심하다는 말들을 하곤 했다. 그렇게 말한 것들이 주로 뭐냐? 마음놓고 찢어서 갖다버린 그림책들. 줄 한 두개 긋고 부러뜨려서 갖다버린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들, 한 장에 기껏 동그라미나 세모 따위 엉성하게 하나씩 그린 채로 갖다버린 스케치북들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벽이나 바닥에 마음놓고 그어대던 시기를 잠깐 거친 후에 나는 바로 스케치북을 아기한테 사다줬다. 겨우 일어서서 보행기타고 걷는 아기가 그리면 뭘 그리겠나. 그냥 새 스케치북 한 장에 줄 하나 긋고 나면 그 페이지는 안 쓴다. 깨끗한 새 종이는 알아가지고 기어코 새 면에다가만 헤작질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케치북 한 권에 겨우 선 몇 개 긋고 동그라미 비슷한 거 두어개 치고, 세모 같은 흉내 한두 개 하고는 고마 버리는 것이었다. 펄프 하나 생산이 안 되는 나라에서 너무 종이가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정도 낭비야 감당할 수 있는 경제수준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복이었다.
사실 스케치북 한 권이 얼마였겠나. 당시에 한 3백원 하지 않았나 싶다. 80년대 중반 이후니까 남편 봉급이 50만원쯤 됐나 모르겠다. 그만한 투자로서 지금 우리 집 애들 미술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거다. 둘 다 그림을 잘 그린다. 특히 큰애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디자인 쪽에 천부적이다 싶을 정도로 놀라운 경지를 보여준다.
그게 다 이 엄마가 지 갓난쟁이때 아낌없이 크레용이며, 색연필이며 스케치북을 열심히 사다바친 결과이다. 저거는 저거가 잘나서 공부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줄 알겠지만 다 엄마 잘 둔 덕이다. 어릴 때 그런 비용을 아낀 언니네 조카들은 지금에 와서 거금의 확원비, 과외비를 쏟아붓고 있지만 그게 뭔 소용이 있냐는 거다. 그런다고 애들이 공부를 잘하고, 그림 그리는데 취미가 있고, 책읽는 거 좋아하겠냐는 거지. 육아에 있어서 내 경험으로 말하면 사람은 세 살까지의 교육에서 거의 90%는 결정되어 버린다. 그 이후는 노력하는 것만큼의 효과는 별로 없다. 이 말은 세살 지나면 이미 늦다는 것이다. 일곱 살 이후에는 안 바뀐다고 보면 틀림없다. 일곱 살까지 성장한 내용대로 사람은 평생 산다.
조기 교육, 영재교육 해가면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얼라를 잡고 벼라별 값비싼 프로그램들이 나오고 있는데, 나는 그런 프로그램들의 가치를 별로 못 느끼는 편이다. 어떤 유아용 프로그램도 엄마의 모범보다 나은 것은 없다. 아기가 하고싶은 것을 하게 하고, 하려고 할 때 마음껏 할 수 있게 보장해주는 것보다 더 나은 유아용 교육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 아기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금지하고 억압하면서 엄마가 시키고 싶은 것을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지 못한 교육이다.
구름~~
신생아 때 신문지 귀퉁이 한번 찢는 동작이 초등학교 가서 글라이더 10개 만드는 것보다 더 지능을 발달시키고 성취욕을 고취시킨다. 돌 때 색연필을 쥐고 장판에 삐뚤삐뚤 겨우 5센티 정도밖에 안 되는 선 하나 긋는 것이 유치원 들어가서 도화지에 꽉차는 그림 열 장을 그리는 것보다 훨씬 미술적인 소질이 크게 개발되게 만든다. 세 살 이전의 아주 사소한 동작 하나, 그때 가졌던 자그만 흥미나 관심 하나가 자란 후의 어떤 교육보다 한 인간의 생애에 더욱 결정적이다. 유아 때 도전이 금지되고 호기심이 억압당하고 성공의 희열을 느껴보지 못하면 자란 후에는 성공에 필요한 에너지가 나오지 않는다. 유아때 사랑받지 못하고 큰 인간은 성장했을 때 남을 사랑할 줄 모르게 된다. 어릴 때 맞고 자라면 반드시 부모가 된 후에 자기 새끼한테 복수를 한다.
오늘은 한국인의 가장 두드러지는 위크포인트(Week Point)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 한국인은 개개인을 놓고 봤을 때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특질을 가진 민족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한국인에게 가장 부족한 점, 가장 취약한 약점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한국정부의 여러 부처들 중에 어디가 제일 무능한 곳인가를 보면 답이 나온다. 바로 외교통상부다. 한국인은 외교에 제일 서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협상력은 낙제점에 가깝다. 그것은 멀리 쳐다볼 것도 없이 인터넷상의 여러 토론방을 보면 된다. 한국인의 토론능력은 지리멸렬한 수준이다. 대통령이나 여당의 대표가 미국 가서 말하는 수준을 보라. 어업협상이나, 납치범과의 대화나, 남북협상이나 간에 말로서 푸는 데는 젬병이다. 혼자서 떠드는 연설이나, 정견 발표나, 큰소리 치라 하면 한국인을 따라올 민족이 드물겠지만 상대가 있는 대화이고, 적절한 양보와 타협이 필수적인 협상이 되어버리면 그냥 벽창호요 절벽이 되어 버린다. 노조가 사측과 협상하러 갈 때 합리적인 타협안이나 요구조건을 준비하고 사측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와 데이타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이마에 빨간 띠부터 맨다. 협상이 아니라 떼를 쓸 준비부터 먼저 한다는 것이다. 사측도 마찬가지다. 노조를 설득할 자료를 충분히 모으고 성의를 갖고 협상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공권력에 기댈 생각이나 먼저 하고, 직장패쇄와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먼저 각오한다.
왜 그럴까? 그 책임은 우리나라의 육아와 가정환경에 있다. 우리나라의 가정문화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온 것이다. 우리나라 아이들에게는 유독 떼쓰는 아이가 많다. 아니 아이로 하여금 떼를 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엄마들이 세계에서 우리나라에 제일 많다. 이 아이들이 자라면 기업체의 대표로 다른 기업과 계약조건을 협상할 때 상식에 벗어나는 떼를 쓰게 된다. 관료가 돼서 민원인이나 다른 부처와 협상을 할 때 합리와는 거리가 먼 억지를 부리게 된다. 정치인이 돼서 외국의 정부와 협상을 할 때 무리한 조건을 내밀고 안 받아들여지면 뒷감당도 못할 험한 소리를 뱉고야 만다.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과 정부와 나라에 돌아온다. 노무현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말을 잘한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노무현은 그 반대로 말도 제대로 못하는 인간이다. 지독하게도 말을 못하는 사람이다. 자기 하는 말이 합리적인지, 억지인지, 논리적인지 모순투성인지 구별을 할 능력이 없다. 더 치명적인 문제는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예측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상대가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소리를 해놓고도 상대가 화를 내면 자기가 더 놀랜다는 것이다. 보편적인 한국인 중 한사람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이 자기의 장점이 언변이라고 야무지게 착각을 하고 위기 때마다 그 장점에 의지해서 돌파를 하려고 든다는 거다. 그러다보니 돌파가 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머리를 들이박고 있을 뿐이다. 노무현은 자기의 가장 큰 약점이 말이 서툰 것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야 말을 적게 하게 되고 그래야 문제가 풀려나갈 수 있다. 노무현의 재앙은 바로 그 서툴기 짝이 없는 혀에서 나온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처음으로 설득을 해보게 되는 상대가 누구일까? 바로 엄마다. 조금 확대하면 아버지까지 끼워줘서 부모다. 그러나 우리나라 엄마는 아이들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절벽이다. 도저히 설득을 해볼 상대가 아닌 것이다. 왜? 아예 아이의 말을 들어주지를 않으니까. 우리나라 엄마들의 입에 늘 달려있는 소리가 이런 거다. '니가 뭐 안다고 나서니?', '니 하라는 공부나 잘해라. 어른들 일에 나서지말고.', '시껍다. 입닫고 니방에 들어가서 공부나 해라', '잔소리 말고 엄마가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해', '쬐그만 것이 왠 고집이야, 고집이...'
이런 소리들이 아이들의 의지를 꺾어놓는다. 엄마를 설득해보려는 시도 자체를 못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엄마는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전제군주이고 폭군이다. 설득은 무슨 얼어죽을 설득. 뻗대고 떼쓰는 것 외에는 어떤 방법도 안 통하는 것이 엄마라는 사실을 아이들은 말을 배움과 동시에 깨닫게 된다.
나는 애들이 말을 겨우 배운 세 살경부터 장난감 하나도 그냥 사주지 않았다. 반드시 그것이 왜 필요한지 엄마한테 설명하게 했다. 물론 세 살짜리가 설명하는 것은 뻔하다. '인형 이뻐. 사줘.', 아니면 '옆집 철이도 갖고 있어. 나도 갖고 싶어' 이 정도다.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표현의 한도 내에서 말이 되던 안되던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를 대면 나는 그것을 듣고 아이한테 설득을 당해 줬다. 니가 엄마한테 말한 그 이유가 타당해서 엄마는 사준다는 식이다. 물론 이유가 타당할 리는 없다. 이유야 있던 없던 애가 사달라 하면 사줄 거지만 그러나 아주 어려서부터 나는 엄마인 나를 설득해 보게 했다. 그래서 엄마를 설득하는데 성공한 체험을 계속 쌓게 만들었다. 상대를 설득해서 자기의 의도하는 바대로 동의를 끌어냈을 때의 성취감과 기쁨을 매일 느끼게 만들어줬다. 그리고 필요할 경우에는 아이의 사고수준에 맞게 엄마의 반론도 피력해주는 것이다. "니 말을 잘 알겠는데, 엄마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해서 너한테 그 물건이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절대 안돼, 암만 졸라봐야 소용없어' 이런 식의 말투여서는 안 된다.
아이와의 대화는 진지하고 성의있게 진정성을 갖고 해야 한다. 그래서 엄마의 반론에 대해서 아이가 다시 설득논리를 궁리하고 어떻게 엄마를 꼬실까 연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조금 더 노력하면 적당한 때에 설득 당해 주는 것이다. 어차피 엄마의 대답은 처음부터 '예스'이지만 무조건 '예스'가 아니라 지한테 설득 당한 결과의 '예스'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는 지가 사리대로(지 아이 수준에서의 사리이지만) 여러 이유를 대어 설명하면 언제던지 설득이 가능한 상대라는 믿음과 성공의 체험을 갖게 해야 한다.
엄마가 설득되는 상대이면 아이는 떼를 쓰지 않는다. 온갖 논리와 이유를 나름대로 궁리하고 생각해서 엄마를 설득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는 대개 성공한다. 우리 집 애들은 말 겨우 배운 세 살 때부터 엄마하고 타협을 할 줄 알았다. 떼를 쓰지 않고 엄마를 꼬실려고 논리와 애교와 반대급부의 착한 짓을 해서 목적을 달성할 줄 알았다. 나와 남편은 한번도 아이들한테 '조용히 해.', '시끄러.', '니 일이나 잘해.', '공부도 못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번만 그 소리 해봐라, 이걸 그냥' 등등의 언사를 써본 적이 없다. 말이 되건 안되건 아이들의 말은 언제나 존중해서 들어주었고, 저거가 무슨 말을 하던 엄마 아빠는 항상 자기들 말에 동의를 해줄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말을 해봐야 안 통하는 부모라는 고정관념이 어려서 딱 박히면 반드시 아이는 자라서 거짓말을 한다.
내 아는 사람 중에 아이 손버릇이 나빠서 고민하는 여자가 있다. 집안에 지갑을 못 두는 것이다. 엄마 몰래 애가 돈을 빼가기 때문이다. 집안에 그냥 돈을 놔두면 반드시 없어진다. 나는 그 여자가 아이 어릴 때 어떻게 키웠는지 잘 안다. 애는 아무리 자기한테 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 엄마한테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훔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집 엄마가 남의 집에 비해서 애한테 돈을 덜 쓰거나 용돈의 양이 적으냐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우리집 애들보다 용돈을 더 많이 준다. 그런데 왜 그러냐? 아이가 필요할 때는 말이 안 통하면서 엄마가 주고 싶을 때 주니까 그렇다. 아이 수중에 돈이 한푼도 없어도 필요할 때 엄마한테 말하면 언제라도 그 필요성에 대해 엄마를 설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 그것은 아이 수중에 있는 거금보다 더 아이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돈이 필요할 때 엄마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없으면 아이는 수중에 돈이 없으면 불안해진다. 용돈은 용돈대로 쓰면서도 늘 욕구불만과 불안감에 쫓긴다.
우리집의 아이들은 그런 점에서 조금도 구김살이 없다. 우리 집은 잔돈들은 온 방에 흐트려 놓고 살지만 십원짜리 하나 나 몰래 없어지는 일은 없다. 어려서부터 떼쓰는 것을 모르고 큰 애들이다. 그러나 엄마 아빠와 대등하게 협상할 줄 안다. 나는 이 아이들이 세 살 때부터 대등한 자격을 가진 대화의 상대자로 대해주었다. 내가 들어줄 수 없는 요구인 경우에는 그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했고, 아이가 알아들을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설명했다. 한번도 화내보지 않았다. 그래서 다 큰 지금도 우리 아이들은 엄마가 설득을 하면 자기들의 고집을 꺾고 양보할 줄을 안다.
자기 엄마를 설득해서 성공해 본 경험을 갖지 못한 사람이 장차 누구를 설득할 수 있겠는가? 엄마는 한 인간이 만나게 되는 최초의 대화 상대이고, 협상의 대상자이다. 이 사람을 설득하지 못한 인간은 누구도 설득하지 못한다. 자라면 노무현 같은 사람이 되고 만다.
엄마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설득 당해주는 기계이다.
구름~~
아이들이 자기가 원하는 장난감이나 갖고 싶은 물건들을 부모가 사주지 않을 때 부모한테 원망을 품고 불만을 갖는 경우는 부모와 자기를 상대적으로 비교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엄마는 낭비벽이 있어서 자기 입고 싶은 옷은 철철이 사대면서 지가 갖고싶은 장난감은 별로 비싸지도 않은데 사주지 않으면서 조른다고 야단이나 치면 아이는 엄마한테 원망을 품게 된다. 아버지가 과시욕이 있어서 남한테 돈을 펑펑 쓰고 인심 좋은 행세를 하고 다니면서 자기가 용돈 좀 달라했다고 핀잔이나 주면 그 아버지가 곱게 보일 리가 없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엄마가 못해주는 경우와 충분히 해줄 수 있는데도 자기한테만 부모가 짜게 굴고, 인색한 것을 아이들은 구별해서 볼 줄 안다. 부모가 다른 용도에 돈을 쓰는 씀씀이와 자기한테 할당되는 몫의 밸런스에 아이들은 민감하다. 아무리 해주고 싶고 다 들어주고 싶어도 능력이 안되면 부모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부모가 능력이 안돼서 못해주는 것은 아이들도 안다. 자기 환경에 대한 불만은 있겠지만 부모를 원망하거나 비뚤어진 마음을 먹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아이들은 자기 집의 소득에 대해서 일정 부분은 자기가 요구할 자격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나이가 아주 어려도 마찬가지다. 비록 추상적이고 모호한 관념이기는 해도 아버지나 엄마가 벌어들이는 돈의 일정 부분은 자기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만큼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 말해 부모가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만큼의 지출을 자기를 위해서 해주지 않으면 부모한테 불만을 품는다.
아이가 불만을 품는 기준이 되는 것은 실제적인 가정의 수입액이 아니라 엄마의 소비 행태이다. 용돈을 필요한 만큼 안주고, 갖고 싶은 것을 사주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은 바로 아이 눈에 불필요하거나 지나치게 보이는 다른 용도에 대한 지출 때문이다. '엄마가 저런데 쓸 돈은 있으면서 나한테는 용돈을 안 준다'는 것이 문제가 되고 아이를 빗나가게 만들고 부모한테 감정을 품게 만든다.
모든 가정마다 경제적인 형편이 다르기 때문에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는 한계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이 경우에 중요한 것은 아이가 상대적인 박탈감, 비교된 불행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엄마가 가정의 경제적 형편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는 자기를 위한 지출을 가장 우선해서 배려해준다는 느낌을 아이가 갖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엄마의 금지나 설득이 아이한테 먹힐려면 아이가 보기에 엄마의 말이 사실인 것 같아야 한다. '돈이 없어서 못 사준다'는 엄마의 말이 거짓말로 들리면 아이는 떼를 쓰고 조른다. 그러나 정말 '엄마한테 사줄 돈이 없다'고 생각되면 아이들은 떼쓰지 않는다.
어른들의 생각보다 아이들은 영리하고 계산이 빠르다. 엄마가 생활에서 검소하고 낭비가 없는 모습을 보일 때 아이는 자기의 욕구를 자제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게 엄마의 모범이다. 엄마가 낭비벽이 있으면서 아이한테는 욕구를 참도록 가르칠 수 없다. 그것은 자제가 아니라 원망을 심어주게 된다. 다른 지출은 어렵지 않게 하면서 자기 갖고 싶은 장난감만 안 사주면 아이는 납득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떼를 쓰고 땡깡을 피우게 된다. 아이들은 집안 형편에 대해 눈치가 빠르다. 일곱 살만 지나면 능력 없는 엄마를 괴롭히지 않으려는 효심이 나온다.
우리 집 아이들의 경우, 집의 형편이 허락하는 한 그네들의 요구는 거의 대부분 들어준 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무리한 요구를 아이들한테서 당해본 기억이 별로 없고 우리 집 아이들은 아주 검소한 편이다. 중학교 때 사준 핸드폰이 너무 구형인 것 같아서 디카 되는 칼라폰으로 바꾸어줄까 물어 보면 '괜찮아요 엄마, 나는 이게 더 좋아요, 저한테 디카가 무슨 필요가 있어요?'라고 말한다. 남편이 우리 딸들한테 털어놓는 불만이 한가지 있다. 그게 뭐냐하면 이때까지 두 딸이 저거 아빠한테 용돈 달라는 소리를 한번도 안 했기 때문이다. '너거는 이놈들아 어떻게 애비한테 용돈 주세요 소리도 한번 안 하냐?'하고 야단친 적이 있다. 물론 엄마 선에서 해결이 되니까 그렇겠지만 애들이 불필요한 지출이나 낭비를 하는 적이 없다. 돈을 주면 쓰지를 않아서 늘 지갑에 그대로 있다.
지금부터는 경제관념을 어떻게 길러줄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구름~~
▒ 최상의 교육 ▒ 이경숙님께서 올리신 글.
우리집 큰 애는 학원이라고는 다녀본 적이 없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전교 탑에서 밀려본 적이 없는 우등생이다. 그 비결을 나한테 묻는 엄마들이 많다.
비결은 별 거 없다. 애가 어릴 때 엄마가 독해져야 한다. 적당한 양의 하루 공부거리를 정해주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만큼은 반드시 그날 중에 해야 하는 습관을 들인다. 어떤 가정 대소사가 있고, 천재지변이 있어도 그것만큼은 예외가 없고 사정이 없다, 새벽 3시, 4시가 넘어가도 그것을 다 하지 않으면 절대로 재우지 않는다. 물론 엄마인 나도 안 잔다.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떼를 쓰거나, 툴툴거리거나, 징징거리면 통할지 모른다는 그런 기대를 애당초 갖지 못하게 한다. 공부는 습관이다. 하루 세끼 밥을 먹어야 살듯이 공부는 하루라도 안하면 본인이 견디지 못하는 습관이 되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초등학교 2,3학년 까지만 신경쓰면 그 다음부터는 공부 잔소리는 할 게 딱 하나뿐이다. '그만하고 제발 좀 자거라'는 잔소리만 하게 된다.
쉬운 일 같지만 이게 쉽지 않다. 왜 그러냐? 왜 엄마들이 구름처럼 못하냐? 아이들은 부모를 예리하게 관찰한다. 엄마가 자기한테 요구하는 것을 자기는 잘 하는지 영악하게 잰다. 그래서 엄마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자기한테만 요구하는 것은 결코 마음에서 따르지 않는다. 엄마 역시 자기 일을 열심히 해야 하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 모범을 보여야 아이도 졸리는 눈을 비비면서 공부를 다하고 잔다. 엄마만 그런다고 되는 것이냐? 천만의 말씀이다. 아빠 역시 모범을 보여야 아이가 부모의 지시에 승복하게 된다. 육아가 어려운 것은 이론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아이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고 부모가 모범을 보이고, 스스로 하지 못하는 것은 아이에게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이게 어렵다.
엄마들이 수많은 육아책을 보고, 온갖 방법을 다 쓰는데도 아이들이 우등생이 아니되고 모범생이 아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범이야 말로 가장 훌륭한 교육법이다.
구름~~
▒ 엄마 때문에 공부를 한다? ▒ 현경섭님께서 올리신 글.
웃기는 얘기입니다. 엄마가 나의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공부는 뒷전일테고, 아이들이 하고픈 그 하나 대학가기전 마련하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입니다.
일이등 하~ 그건 중요한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건 꼬맹이가 무얼 하고 싶은지, 그게 중요할 뿐...
더하기 빼기의 인생에 있어 결국 더하기 빼기라면...
설령 엄마일지라도 더 이상 꼬맹이의 삶에 있어 할 말이 없어야 합니다.
미적분도 아닌 더하기 빼기라...
그냥 웃고 말지요!
▒ [RE]엄마 때문에 공부를 한다? ▒ 이경숙님께서 올리신 글.
한 인간이 자기 인생에서 운명적으로 만나게 될 자신의 길을 언제 만나며,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어떻게 알게 될는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타고난 재질이 네살 다섯살에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진실로 자신의 하고싶은 바가 무엇인지 마흔이 넘어 발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은 왜 어릴 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느냐? 자신의 인생에서 가능한 선택의 범위를 넓혀주기 때문입니다.
내 주위에는 음악이나, 운동 쪽을 택한 아이들도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천부적인 재능이나 본인의 희망이라기보다는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달리 할 것이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차선의 길을 가는 아이들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는 선택 가능한 범위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무엇을 하고 싶으냐 보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선택에서 우선되는 조건입니다. 공부를 잘하면 뭐든지 골라잡을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이가 자기 인생에서 하고자 하는 것을 하면서 살수 있게 하기 위해서 공부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딱 그만큼의 행복밖에 모르고 살다가 죽습니다. 그 이상을 모르는 불쌍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잘살고 못살고 출세하고 아니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생의 행복을 진정 아는 인간이 되는데 학문의 바탕이 필요하다고 저는 봅니다. 그게 공부의 이유입니다.
저는 돈벌려고, 성공하려고, 출세하려고 공부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했으므로 나는 그만큼 행복을 알았습니다. 인생을 그만큼 진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더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한테 공부를 시킵니다. 학문은 인간을 갈고 닦는 연마석입니다.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름~~
▒ 무풍지대 ▒ 이경숙님께서 올리신 글.
내 집은 지난 20년 간 말 그대로 무풍지대였다. 남편과 나, 그리고 두 딸의 보금자리요, 행복한 요새였다. 이 철옹성에는 어떤 외풍도 스며들지 못했다.
심지어 시집 식구들의 자그만 간섭조차도 일체 허용되지 않은 네 식구만의 절대 영역이었다. 남편은 시어머니를 포함해서 시누건 그 누구이건 간에 우리 가정의 내부 영역에 개입해 들어오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시어머니의 잔소리조차 허락치 않는 남편이다. 생활비 드리는것을 포함해서 자식된 도리는 다하지만 나의 가정 경영권은 남편에 의해 철저하게 보호되어 왔다.
그랬던 만큼 나 역시도 주부로서의 위치에서 단 한번도 일탈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집 두 딸은 어려서부터 자기들이 학교에를 다녀오거나, 어디에를 갔다 오더라도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부재중일 수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하고 컸다. 언제라도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엄마는 집에 있다는 사실을 의심해 보지 못 했다. 한번도 엄마가 없는 빈집의 문을 아이들이 열고 들어오게 했던 적이 없다. 나중에 우리 집 애들과 대화를 해 보면 구름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게 될 거다.
많은 벗님들이 내가 오프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섭섭해 했다. 더러는 오해를 했던 벗님들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통신 벗님들을 만나러 싸돌아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통신으로 해서 내 가정에 털끝만큼의 피해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도 많이 컸고, 나도 졸렬한 내용이지만 책을 내고 작가 소리를 듣다보니 언제까지나 그것을 고수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던 참이다. 남편도 나보고 이제는 통신 벗들도 만나고 필요하면 집에도 초대를 하고 자유로이 활동을 하라고 권하고 있다. 얼마던지 도와주고 협조해 줄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물론 남편 허락이 없어서 못했던 것은 아니다. 남편은 나에 대해 단 한번도 노라고 말한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조금씩 준비를 하고 있다. 어차피 피치 못할 운명이라면 과감하게 받아들일 생각이다.
무풍지대에 태풍이 불더라도 남편과 두 딸은 안전할 수 있도록 조처를 하고, 집 자체도 태풍에 견딜 수 있도록 개보수를 해야 된다는 생각이다.
걱정은 과연 우리 가정이 개방에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하냐는 점이다. 평균에 비해볼 때 다소 패쇄적인 가정이었다. 남편과 내가 너무나 튼튼하게 울타리를 쳤기 때문이다. 이제 울타리를 걷어야 될 때가 왔다. 아이들도 항상 북적거리는 복잡하고 시끄러운 생활에 서서히 적응을 해야 되겠지.
'엄마, 갑자기 집에 왠 손님이 이리 많이 와요?' 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응, 그건 말이다, 엄마가 너무 유명해졌기 때문이란다' 이리 대답할까? 우리집 아이들은 아직도 저거 엄마가 작가인 줄도 모른다. 신문사 기자건, 출판사 사람이건, 누구건 간에 우리 집 대문 안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없다.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도 극소수다. 그러니 딸들은 엄마가 누군지 잘 모른다. 구름이 뭔지도 모른다.
구름~~
화일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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