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사실 시작 부분에서 보여준 도올의 개그는 과히 심하게 웃긴 건 아니었다. 개그쇼로는 함량미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다. 진짜로 웃기는 건 지금부터니까. 그리고 갈수록, 진도를 나갈수록 포복절도, 기절초풍, 어안 벙벙한 개그의 진수를 보여준다. 본 게임의 막을 올려보자. 제2장이다.
도덕경 제2장의 첫 줄은 다음과 같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딱 보니까 벌써 걱정이 되지? 서너 글자밖에 안 되는 짧은 문장도 제대로 못 읽는 우리의 도올이 이렇게 긴 한문을 어찌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팍 되지. 하지만 도올이 누구냐? 이 시대의 석학 아니야? 직기의 천재. 도올이 해놓은 번역을 먼저 보자. 배꼽들 조심하자.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추한것이다.’
벌써 골이 띵하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천하 사람들이 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이 추하다니? 우리 노자가 노망들었다는 소리야? 천하 사람들이 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아름다운 것은 노자가 봐도 아름다워야 하는 게 정상이다. 맞지? 그런데 저 혼자 추하다고 우기는 것은 사상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그냥 노망일 뿐이다. 도올은 노자를 망령 난 할방구로 만들고 있다. 노자건 공자건 우리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게 진리다. 안 그래? 그런데 그것을 아니라고 우기는 게 위대한 사상일까? 천만의 말씀이고 만만의 콩떡이지. 진리는 상도(常道)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상궤(常軌)를 이탈한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사이비 종교가 사이비인 것은 모두 그 주장하는 바가 상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제2장의 첫 줄은 서두의 첫 구절과 마찬가지로 《도덕경》전체를 파악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문장이다. 이 문장 속에 《도덕경》의 열쇠를 푸는 키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뭔지 못 보는 사람이 노자를 떠들어서는 안 되는 거다.
그 열쇠는 바로 ‘위(爲)’라는 한 글자이다. 노자는 《도덕경》전체를 통틀어 이 ‘위’라는 글자를 대부분 한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물론 뒤에 가면 예외적인 사용도 있긴 하다). 이 ‘위’의 뜻을 모르고 《도덕경》을 읽고 자빠지면 도올의 번역처럼 첨부터 끝까지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만 하든가,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만 하게 된다.
원문 번역도 똑바로 못 하는 게 책에서 한 소리 함 봐봐. 《노자와 21세기》를 보면 말이지, 자기가 중국에 갔을 때 꾸꽁(대 동양학자는 고궁(古宮)을 꼭 꾸꽁이라 발음한다는 것도 새겨두자. 왕필이라 하면 무식하다 소리를 들으니까 가급적 왕삐라고 하고 공자도 꽁쯔라 해야 사람들이 우러러 본다)을 다니던 회상이나 백거이의 시가 어쩌고 지 자랑을 주절거린 담에 양귀비하고 서시에 고갱의 그림에서 타히티의 여인들까지 들먹이면서 횡설수설을 한참하고 있는데 당최 노자 이야기하고는 연결이 안 되는 잡소리들이다. 그렇게 약장사 사설을 줄창 늘어놓고는 하는 소리가 이렇다.
노자는 말한다“천하의 사람들이 아름다움(美)의 아름다움 됨(爲美)만을 안다(知)”
그러면서 말하기를, “최소한 4~5세기 이전에 이러한 철학적 주제가 이미 충분히 논의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하면서 감탄하고 있다. ‘철학적 주제?’ 그래서 이 문장을 해설하면서 객관주의니 주관주의니 하는 골치 아픈 소리들을 잔뜩 했던 거였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 참으로 포복절도할 명강의를 내밀고 있다.
노자의 언어는 경이롭다. 노자는 美의 상대어로서 ‘醜(추)’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美의 상대어는 惡(오)인 것이다. 중국 고대어에서는 惡를 모두 요새 우리가 생각하는 ‘악’으로 읽어서는 아니된다. 惡는 악이 아니라 오인 것이다. 오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싫음’이요, ‘추함’이다. 다시 말해서 ‘악’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노자와 21세기》상권 122쪽 상단
나는 노자보다도 도올의 언어가 더 경이롭다. 어쩌면 저렇게 횡설수설을 잘할 수 있는지 탄복치 않을 수가 없다. 하기사 도올이 대천재요 기린아로 극찬해 마지않은 왕필, 앗 나의 실수, 왕필이 아니라 왕삐다. 그 왕삐부터가 만만치 않다. 저 해설 뒤에 도올이 천하의 명주(名住)라고 소개해놓은 왕삐의 주도 번지수를 잘못 찾기는 마찬가지니 그 주를 보고 공부한 도올한테서 무슨 신통한 해설이 나올 수 있겠느냐 말이다.
애달픈 일이다. 왕삐가 했다는 천하의 명주를 한번 보자.
美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나아가 즐기는 바의 것이요, 惡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바의 것이다.(美者,人心之所進樂也,惡者,人心之所惡疾也).
《노자와 21세기》상권 122쪽 중단
왕삐가 노자의 주를 단 것이 나이 스물이 되기 전이라 하는데, 십대 소년이 저 정도 쓰면 대견타 할 만은 하겠으나 무슨 천하이 명주씩이나 되고 천재씩이나 되는 양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가 안 됨이다. 왕삐의 저 글 조차도 노자의 글을 제대로 못 보고 쓴 것이니 ‘천하의 명주’란 것이 저럴진대 도올의 해설이야 일러 무엇 하리요, 아니겠나?
우리가 외국 글을 우리말로 옮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원저자의 의도하는 바에서 벗어나지 않고 원문에 충실한 것이다. 그을 다듬고 꾸미는 것은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원문에 충실한 것이다. 글을 다듬고 꾸미는 것은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원문에 충실한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원저자의 의도와 원문의 뜻을 벗어나서 역자의 생각을 펼쳐놓는 것은 번역이나 해설에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노자의 생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오라고 멋대로 바꾸는 것은 허락될 일이 아니다. 그것을 바꾸기 전에 노자가 왜 惡이란 글자를 사용했는지 생각하는 게 바른 순서다. 위의 문장에서 惡은 美의 반대어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도올이 여기서부터 왜 헛다리를 짚고 시궁창에 처박히게 된 것인지 살펴보자. 도올은 여기서 실족한 다음부터 《도덕경》의 마지막 끝 글자가 끝날 때까지 정신을 못 차린다.
중학생을 붙잡고 노자사상이 뭐냐고 물어봐도 ‘無爲(무위)사상 아닙니까?’ 정도의 대답은 듣는다. ‘무위’는 노자사상의 상징어다. 그런데 무위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찌 노자를 강의할 수 있다는 말이냐? 소가 웃을 일 아니겠나? ‘爲(위)’자의 의미를 모르는데 무위를 어찌 알겠느냐 말이다.
노자는 제1장에서 ‘도(道)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 말했다. 그리고 2장으로 넘어오면서 곧바로 이 ‘위(爲)’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노자가 《도덕경》을 써나간 순서는 대단히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다. 제2장의 첫 번째 줄은 바로 ‘위(爲)’에 대한 설명이지, 아름다운 게 아름답고 추하고 이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생각 좀 해봐봐. 제1장에서 도(道)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설명했잖아. 그럼 그 다음에 무슨 소리가 나와야 되겠어? 자기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그게 본론이잖아. 그런데 갑자기 아름답고 추하고 이딴 소리가 왜 나오냐 말이다. 글을 그렇게 쓰면 유치원생이지 사상가겠어?
제2장의 첫 줄은 바로 노자사상의 핵심인 ‘위(爲)’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느니 추하게 보느니 해대고 엉뚱한 소리나 늘어놓으니 노자가 억장이 막혀 돌아가실라 한다. 노자 딴에는 앞으로 자기가 계속 써야 될 ‘위(爲)’라는 글자에 대한 의미를 헷갈리지 말라고 고심고심해서 알아듣기 좋도록 예문을 적어줬더니 얼래! 알아봐야 될 ‘위(爲)’자는 쳐다도 안 보고 ‘미(美)’ 자나 ‘악(惡)’자를 갖고 악다구를 해대니 이게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암만 노자가 쉽게 써줘도 돌대가리들한테는 소용이 없다.
《도덕경》의 원문으로 함 가보자. 우선 ‘천하개지미지위미(天下皆知美之爲美)’부터 보자. ‘개(皆)’는 ‘모두 개’니까 ‘천하개지(天下皆知)’는 ‘온 세상이 다 안다’는 뜻이다. 뭐를? ‘미지(美之)’니까 ‘아름답다는 것을’이다. 그러니까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문제의 두 글자가 있다. 바로 ‘위미(爲美)’다.
‘위(爲)’자는 ‘만들 위’,‘꾸밀 위’다. 그러니까 ‘위미(爲美)’는 ‘꾸며진 아름다움’이다. 이제 감이 잡히지? 그러니까 저 문장의 올바른 의미는 ‘온 세상 사람들이 아릅답다고 생각하는 것도 실은 꾸며진 아름다움이다’라고 옮길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사악이(斯惡已)’라고 했다. 즉 ‘그것은 나쁜 일이다’이다.
이 한 줄만 가지고는 혹시 부족해서 헷갈릴까봐 노자가 또 한 줄을 써 놨다.
‘천하개지 선지위선 사불선이(天下皆知 善之爲善 斯不善已)’라. ‘천하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고 알고 있는 것이 실은 꾸며진 선(위선)이니 이것은 불선이다’
《도덕경》전체를 보고 나면 자연히 알겠지만, 노자는 아름다움(美)과 착함(善)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추(醜)함과 악(惡)함을 멀리하지도 않는다. 노자는 미추(美醜)와 선악(善惡)의 구별 자체를 싫어한 사람이다. 뒷장에 가면 ‘너와 나의 거리가 얼마이며, 선과 악의 거리가 얼마이냐?’ 라는 말이 나오는데 노자는 미추와 선악을 함께 인정하고 수용하려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노자가 가장 경계했던 것은 바로 ‘위(爲)’다. 악(惡)을 멀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위선(爲善)을 멀리했고 ‘추(醜)’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위미(爲美)’를 미워했다.
자연(自然)이란 ‘저절로 그러함이고’, 무위(無爲)는 ‘있는 그대로’이다. 그래서 ‘무위자연’이란 ‘있는 그대로, 저절로 그러함’을 말한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대로, 못난 것은 못난 대로, 착한 것은 착한 대로, 악한 것은 악한 대로, 세상 모든 것이 지 생겨먹은 그대로 ‘저절로 그러한 상태’가 바로 노자가 말하는 도의 상태이다. 선악미추가 모두 있는 그대로 저절로 그러해야지 위선,위악,위미,위추가 있어서는 아니되겠다는 이야기다. 만약에 세상 모든 일에 ‘위(爲)’가 끼어들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설명한 내용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이 첫 두 줄을 엉터리로 번역해버리니까 이어서 나오는 소리들이 또 연결이 안 된다. 도올의 번역을 맞다고 치면 제2장은 처음 두 줄이 같이 놀고 이하 구절들은 전혀 엉뚱한 소리가 되고 만다. 하나의 장 안에서 여러 문장이 문맥상 연결이 안 되고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면 이런 것을 어찌 책이라고 읽고 앉았나?
‘위(爲)’라는 한 글자의 의미를 전하기 위해서 노자가 5천자 가운데 스물세 글자나 투자를 했는데 제일 중요한 ‘위(爲)’는 갖다버려 버리고 번역을 하니 노자의 말이 완전히 노망든 노인의 헛소리가 돼버리지.
《도덕경》에서 노자는 이 ‘위(爲)’를 ‘꾸며놓은 것, 가식해 놓은 것, 위장해 놓은 것, 사실과 다르게 만들어 놓은것’이라는 의미로 일관되게 쓰고 있다. 그리고 이 글자가 이런 뜻으로 쓰인 문장은 대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구절이라서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도덕경》을 번역하면서 《도덕경》전체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중심어를 빼먹은 번역을 어찌 번역이라 말할 수 있나?
도올은 여기서 노자가 전해주는 ‘위(爲)’의 의미를 놓치고 만 까닭에 《도덕경》 전체의 번역을 엉터리로 하게 되는 것이다. ‘무위(無爲)’란 꾸미지 않은 상태,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인데, 도올은 《노자와 21세기》에서 시종일관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란 뜻으로 풀고 있다. 즉 ‘무위(無爲)’를 ‘무행(無行)’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노자강의’가 개그쇼가 될 수밖에 더 있나 말이지. 계속 가보자.
노자는 미(美)와 위미(爲美), 선(善)과 위선(爲善)이 들어간 문장을 두 개나 써서 위(爲)에 대한 용례를 보여줬다. 그래서 아마도 후대 사람들이 ‘위(爲)’라는 글자의 뜻을 헷갈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런데도 도올이 같은 까막눈들이 나올 거라고 짐작이나 했겠나? 불쌍한 노자 할아방. 이건 노자의 잘못이 아니다. 노자는 혹시나 남이 이해를 못 할까, 잘못 알아듣지는 않을까 세밀하고 섬세하게 살펴서 그런 오해가 없도록 여러 가지 장치를 글 속에 마련해놓는 사람이다. 그래도 못 알아먹는 거야 어쩌겠나? 그거야 읽는 사람 잘못이지. 안 그래? 쓰는 사람이 그 이상 어떻게 해줄 수 있나?
《도덕경》은 앞줄을 못 알아들으면 다음 줄의 번역이 안 된다. 그 좋은 예가 여기 제2장이다. 다음 문장들을 보자.
故有無相生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고유무상생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도올이 그래도 동양학을 전공했다는 학자고 칠판에 한자를 써가면서 강의하는 사람 아닌가. 물론 한번씩 한자가 기억이 안 나서 더듬거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이 정도는 번역할 수 있다. 도올을 너무 무시하면 안 된다. 정말로 대견스럽게도 멋지게 풀어놨다 말이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어떠냐?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한 거 같지 않나? 맞다. 제대로 하긴 했다. 그런데 그걸로 다가 아닌 것이 문제지. 한자를 풀기는 풀었는데 도대체 이런 소리가 여기에 왜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는 거다.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거나 선하다고 알고 있는 것이 추하고 선하지 않은 것이다’ 해놓고 그 바로 뒤에는 있고 없고, 어렵고 쉽고, 길고 짧고가 나오니 이게 서로 연결이 안 되는 거야. 그러니 온갖 잡소리만 실컷 늘어놓고는 이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이 다음 장으로 도망가버리고 말았지. 내가 TV에서 저 강의하는 것을 보니까 이런 데서 막혀서 지 혼자 낑낑거리고 고민하는 모습이 눈에 선해. 우리 도올이. 불쌍한 도올이.
하긴 우리 도올만 그런 게 아니고 《도덕경》을 해설했다고 하는 책들이나, 노자를 연구한다는 세계의 전문가들도 다 마찬가지다. 문장의 글자는 알아보지만 이런 말들이 하필 왜 이 자리에 갑자기 끼어드는 것인지 아는 사람이 없는 거야. 앞줄하고 뒷줄의 연관성을 찾지 못하니까 그냥 어물쩍 넘어가 버리고 마니까 노자의 책이 웃기는 만화책이 돼버린다 이 말이다.
그러나 이 문장이야말로 이 대목에서 꼭 필요한 내용이며, 노자가 왜 위미(爲美)와 위선(爲善)을 악(惡)과 불선(不善)으로 기피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는 대목인 거야. 노자가 여기서 하고 있는 말을 정리해줄게.
‘유가 있어야 무가 성립이 되고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 수 있고, 높은 것이 있어야 낮음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만약에 실제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놓고 사람을 속이면 진짜 없음이 나타날 수가 없고, 실제로는 짧은 것을 긴 것처럼 꾸며놓고 속이면 진짜로 긴 것이 긴 줄을 모르게 된다. 이것을 미(美)와 선(善)에 소급해서 말하면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꾸며놓고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으로 믿게 만들면 진짜 아름다운 것이 드러날 수가 없고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한 것처럼 꾸며서 속이면 진짜 선한 것이 선한 줄을 모르게 된다. 그러하므로 아름다움을 지어내거나 선을 가장하는 짓은 나쁜 짓이니라.
→惡, 不善
다음에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
무위란 노자철학의 핵심적 사상을 이루는 개념으로 통상 유위와 대비되는 것이다. 무위는 ‘함이 없음’이다. 그렇다고 무위가 곧 아무 것도 하지 않음(actionless)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무위는 곳 무위다.
무위의 ‘위’는 유위적이고 조작적인, 도의 흐름에 배치되는 사특한 행위인 것이다. 그것은 위선적인 행위이며 거짓적인 행위이며, 독선적인 행위이며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부분적인 행위이다. 당연히 모든 사회의 리더는 그러한 조작적인 인간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리더는 잔일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작은 일에 집착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리더는 자기는 함이 없이 남으로 하여금 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인 것이다.
《노자와 21세기》 상권 131쪽 하단
참말로 황당하다. 노자의 위(爲)를 ‘무엇을 하는 것’ 즉 (行)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그 순간부터 노자하고는 빠빠이다. 노자의 생각은 고사하고 뒤통수나 발굼치도 볼 수 없다. 노자의 위(爲)는 ‘꾸밈이 있는 것’이고 무위(無爲)는 ‘있는 그대로’를 의미하는 말이다. 뭘 하고 안 하고의 뜻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무위(無爲)요 추한 것이 있는 그대로 추한 것도 무위(無爲)다. 선한 것도 무위(無爲)요, 악한 그대로 드러난 악도 무위(無爲)다. 노자는 미추와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추한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위장되거나 악한 것이 선한 것을 가장하는 것을 유위(有爲)라 하여 멀리할 뿐이다. 선악미추장단고저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은 모두 무위(無爲)인 것이다. 위(爲)란 꾸밈이요, 무위(無爲)는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남이다. 위의 난삽하고 구질구질한 도올의 정의는 위(爲)를 잘못 알고 있는 데서 나온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본 것 같이 도올은 노자가 흑이라 하면 자기는 백이라 하고 노자가 오른쪽으로 가라 하면 왼쪽으로 간다. 그것은 청개구리 따라서 그런 게 아니고 위(爲)의 의미를 몰라서다. 위(爲)를 모르는 노자철학의 대가가 노자강의를 하는 방송을 우리는 보았다.
도올은 근본적으로 노자를 잘못 알고 있으며 전혀 모른다. 도올이 해놓은 대로 자기는 함이 없이 남으로 하여금 하게 만드는 게 무위라면, 그리고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이 무위의 도를 깨친 성인이라면, 성인은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기꾼이라야 한다는 소리다. 그렇지 않은가? 자기는 안 하면서 남을 부려먹으려면 달콤한 말과 이익으로 꼬시거나 힘이나 거친 말로 위협하는 수밖에 더 있나? 그게 어찌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가 되며 그런 사람이 어찌 성인이 될 수 있단 말이냐? 오히려 노자는 그렇게 말로 꾸며서 사람들을 속이지 말고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 가르치라고 권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가 아니라 ‘하라(行)’고 말한다. 하되, 말로 꾸미거나 속이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라고 말하고 있다.
노자사상의 핵심은 바로 이 행(行)에 있다. ‘무위(無爲)의 행(行)’ 이것이 바로 노자사상이다. 꾸미고 지어내지 않는 자연스러운 행함이 바로 무위의 행이다. 말로 속이고 말로 사람을 부려먹지 않고 스스로 실천하는 행이 바로 무위의 행인 것이다. ‘무위(無爲)’를 ‘함이 없음’이라고 받아들이면 대책이 없다. 기왕에 시작한 거니 끝까지 가보자.
도올한테는 좀 어려웠을지 몰라도 지금까지 나온 한자들은 그래도 좀 쉬운 글자들이었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생소한 글자들도 막 나오기 시작한다. 이걸 어쩌면 좋아 그래, 얼마나 웃길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다음 문장은 이런 건데 우리의 희망, 21세기의 등불 도올의 강의를 따라가 보자.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도올 가라사대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데 성인은 내가 그를 자라게 한다고 간섭함이 없고…’ 딱 나오는 폼이 끝까지 옮기기도 귀찮게 만든다. 스스로 자라는 만물을 보고 성인이 할 짓이 없어서 간섭을 해? 번역이랍시고 해놓은 것마다 어찌 이리도 개판이야? 지금이 21세기 국민의 정부 시댄데 저 혼자 자유당이다. 이 정도 진도가 나갔으면 한 줄 정도는 맞는 게 나와야 되지 않겠어?
내가 끝까지 두고 봤는데 끝까지 틀리는 거야. 기가 막혀서, 정말. 그래서 나중에는 내가 속으로 도올이 딱 한 줄이라도 제대로 하면 예쁘게 봐주자 결심했다. 그런데 《도덕경》5천 글자를 다 풀 때까지 끝끝내 그 한 줄을 못 맞추는 거야. 근데 내가 어찌 예뻐해줄 수가 있느냐 말이다. 내 살다가 이런 애 첨 본다.
우선 ‘만물작언이불사(萬物作焉而不辭)’다. 여기서 사(辭)자는 ‘말할 사’다. 그러니까 ‘불사(不辭)’는 ‘말하지 않는다’ 또는 ‘말이 없다’란 뜻이다. 엄청 쉽잖아. 이걸 못 읽는다는 게 나는 이해가 안 된다. 도올은 혹시 작(作)이라는 글자 때문에 헷갈렸나 생각도 해본다마는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작(作)’은 ‘짓다’ ‘만든다’는 뜻이잖아. 행(行)과 같은 의미로 봐도 무방하지. ‘언(焉)’은 ‘어찌 언’인데 문미에 쓰일 경우 강조하는 기능을 갖는 거고 그러면 다 끝났잖아. ‘성인은 만가지 사물을 만들지라도 말로 떠들지 않는다. 즉 자랑삼지 않는다. 공치사를 하지 않는다’ 이런 뜻이지. 이것도 못 읽어서 뭐라?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데 성인은 내가 그를 자라게 한다고 간섭함이 없다’고? 참말로 육갑도 여러 가지로 떤다. 《도덕경》을 강의하지 말고 차라리 《도올경》을 짓는게 낫겠다.
노자의 저 이야기를 조금 바꿔 말하면 ‘아무리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해낸다 해도 말로 자랑치 않고 실천으로써 행한다’가 되는 거다. 그 담에 나오는 말이 뭐야? ‘생이불유(生而不有)’네. 이런 글이야 중학생도 해석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이 정도 한자 못 읽고 고입 시험 패스할 수 있나? 어려운 글자가 뭐 있느냐 말이다. ‘날 생(生)’ 모르는 사람 있나? ‘아니 불(不)’ 모르는 사람도 없지? ‘있을 유(有)’를 모른다고? 장난은 치지 말고. 다 아는 글자잖아? ‘이(而)’자는 첨 보나? 그건 그냥 접속사다.
몰라도 관계없다. 글자 그대로 따라 읽으면 되잖아. ‘나긴 났는데(生), 있지가 않다(不有)’ 이러면 해석 끝난 거잖아. 문장이 조금 이상해? 그럼 조금만 다듬어보지 뭐. ‘있지 않은 듯이 났다.’ 이러면 약간 뜻이 통하는가? 그래도 이상해? 조금 더 비틀어볼까? ‘없는 듯이 산다’는 어때? 이게 정답이다. 한 번만 더 비틀면 아주 쉬운 말이 된다. ‘생이불유(生而不有)’ 즉, ‘살면서도 없는 듯하다’는 뜻이다. 우리 주위에서도 드물지만 이런 유의 사람을 가끔 만날 수 있다. 함께 있으면서도 말로 떠들거나 다투는 법이 없이 항상 조용하게 자기 일만 성실히 하는 사람이다. 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만큼 없는 듯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성인의 사는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그러면 우리의 우상 도올이 뭐라 해놨나 봐야지. 도올은 이 ‘생이불유’를 ‘잘 생성시키면서도 그 생성의 열매를 소유함이 없고’라 해놨다. 미칠 노릇이다. ‘생(生)’이란 글자가 어찌 ‘잘 생성시키는’으로 해석이 되며, ‘있을 유(有)’가 어찌 소유(所有)라는 말로 둔갑을 하느냐 말이다. ‘생이불유(生而不有)’ 란 ‘살면서도 없는 듯하다’는 말을 ‘잘 생성시키면서도 그 생성의 열매를 소유하지 않는다’고 해대니까 내가 더 상대해주고 싶은 생각이 싹 가시는 거 있지. 내가 더 이상 도올이한테 눈높이를 맞출 방법이 없다.
‘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만큼 없는 듯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성인의 사는 모습’이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난데없이 웬 소유가 여기서 나오나? 노자의 가르침 중 핵심적인 것이 바로 ‘살면서 튀지 마라’는 당부다. 잘난 척 튀지 말고 파묻혀서 없는 듯 사는 게 만수무강의 첩경이라는 것이다. 도올처럼 쥐뿔도 모르는 게 너무 튀면 언젠가는 호되게 두들겨 맞는다는 경고를 내포하고 있다. 하긴 도올은 뜻도 모르고 읽고 앉았으니 배울 게 있었겠나? 《도덕경》만 들여다보면 뭐 하나? 노자의 가르침을 다르고 본을 받아야지. 이 다음 줄에 가면 더 골 때린다. 계속 보자.
내가 도올이 TV에서 하는 강의를 몇 편 보다가 처음에는 웃었지. 근데 나중에는 기가 막히다가 실실 부아가 나기 시작하는 거야. 저걸 세상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 말이지 거기다 대고 황당무계한 소리만 하고 자바지니 이걸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고, 참 돌아가시겄더라고 그래서 내가 서점에 가서 그놈의 《노자와 21세기》를 사왔다는 거잖아. 돈이 아까워 죽겄더라. 내가 읽을 필요도 없는 책을 생돈 주고 사보기는 첨이다.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함 봐봐라. 우리 도올이 갈수록 태산이다. 이 ‘위이불시(爲而不恃)’를 갖고 뭐라 해놨는가 하면 ‘잘 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것에 기대지 않는다’라고 해놨다. 얘가 도대체 한자를 알고 설을 푸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어. 일단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까지 볼까?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속에 살지 않는다’고 완전히 흉몽 중에 칼부림이다. 잠꼬대 하고 있다.
앞서 말했다시피 ‘위(爲)’라는 글자는 《도덕경》전체의 중심어 역할을 하고 있는 글자다. ‘만들 위’,‘지을 위’다. 그런데 노자는 이 책 속에서 위(爲)라는 글자를 좋은 의미로 사용한 적이 별로 없다. 언제나 ‘(허위로)꾸며낸다’ ‘(거짓으로)지어낸다’ 또는 ‘가식한다’ 따위의 의미로서, 그렇지 말아야 할 불선(不善)과 악(惡)의 원인 내지는 근원으로 보고 있다. 해서 노자는 무위(無爲)를 지향해야 할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지. 《도덕경》에서 가장 중요한 한 글자를 고르라고 하면 바로 이 위(爲)자가 정답이기 때문에, 《도덕경》을 볼 때 이 글자가 사용되어 있으면 한번 더 유의해서 살펴봐야 된다 말이다.
위 문장에 이 위(爲)가 첫머리에 나오잖아. 그럼 이게 뭔 말이겠나? ‘위이불시(爲而不恃)’는 바로 ‘꾸며대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주어는 ‘성인’이다. ‘성인은 자기 일을 할 때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살아가기를 마치 없는 듯이 하며, 꾸며서 지어내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잖아. 즉 성인은 자기를 내세워 자랑하지 아니하고, 드러내지 아니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지 결코 꾸미거나 지어내는 법이 없다는 말이다.
위(爲)라는 글자를 ‘잘되어가도록 한다’는 뜻으로 번역을 하게 되면 노자의 사상은 무위(無爲) 지향이 아니라 유위(有爲) 지향의 사상이 돼버려. 무위(無爲)란 ‘잘되어가도록 함을 없앤다’는 뜻이 될 터이니 이게 무슨 철학이요 사상이 되겠느냐 말이다. 내가 번역이 더러 이상한 책은 봤어도 이렇게 말뜻을 정반대로 써놓고 번역을 했다고 육갑을 떠는 인간은 도올말고는 본 적이 없다.
사상이고 나발이고 인간사 모든 것이 잘되자고 하는 일인데 잘되도록 해주는 것을 없애자는 말이 어찌 사상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느냐 말이다. 노자는 사상가지 결코 노망든 영감탱이가 아니다. 노자를 평생 연구하고 강의까지 하면서 살아왔다는 인간이 노자를 망령 난 노인으로 만들고 있는데 내 눈에 어찌 불이 안 나겠어?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도 마찬가지.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속에 살지 않는다’는 해석이 명색이 학자란 인간이 내놓을 물건인가? 왕삐야 당시 나이가 중학생 정도였으니 봐줄 수 있다. 그 정도 나이에 그만한 답안이면 칭찬을 받을지언정 구지람 들을 일은 없다. 그러나 명색이 교수요, 학자요, 자기 말대로 불혹의 나이를 10년도 전에 넘긴 사람이 저런 답안을 내면 안 되는 거다.
저 문장에서 거(居)자를 ‘살 거’로 읽으면 바로 다음 문장의 해석이 불가능해진다. ‘살 거’가 아니라 ‘쌓을 거’로 읽어야 한다. 문맥상의 뜻으로 보면 ‘차지한다’라는 의미가 더 어울릴 수 있다. 즉 ‘공을 이루어도 그것을 쌓아두지 않는다’ 또는 ‘차지하지 않는다’이다. 왜 ‘살 거’가 아니고 ‘쌓을 거’라야 하는지 다음 문장을 보면서 설명하자.
夫唯不居 是以不去
부유불거 시이불거
틀렸을 것이 뻔한 도올의 해석을 먼저 보자. ‘대저 오로지 그 속에 살지 아니하니 영원히 살리로다!’ 여기서 제대로 된 번역은 ‘대저(夫)’와 ‘오로지(唯)’뿐이다. 앞 문장까지는 주어가 ‘성인’이었지만 마지막 문장의 주어는 바로 ‘공(功)’이다. ‘공을 쌓아두지 않기(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이)떠나지 아니한다(없어지지 않는다 또는 흩어지지 않는다)’라는 글이다. ‘성인이 공 속에 살지 않아서 영원히 산다’는 그런 괴상망측한 소리가 노자하고 어울리기나 한가? 《도올 역 노자》에는 말이되는 소리가 하나도 없다. 저리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갖고 몇 달 동안 TV강의를 하고도 들키지 않고 흥행까지 대박을 터뜨리는 것을 보면 역시 대한민국은 이상한 나라다.
여기서 하나 소개하고 넘어가야 될 일이 있다. 나는 도올이 어떻게 ‘생이불유’라는 말을 보고 소유하니 마니 하는 소리를 하게 됐을까 궁금했거든. 근데 알고 보니까 이걸 러셀이라는 양코배기한테서 커닝한 거더라 이 말이지. 배꼽이 빠질 노릇이다. 지 책에 보면 러셀이 노자 말씀을 영역했다는 것이 소개가 되어 있다. 한번 같이 볼까?
생이불유(生而不有) : production without possession (소유없는 생산)
위이불시(爲而不恃) : action without self-assertion (자기 주장 없는 행동)
장이부재(長而不宰) : development without domination (지배 없는 발전)
황당하기는 진배없지만 그래도 도올보다는 러셀이 약간 수준이 높지. 그래도 그렇지, 다른 거면 몰라도 ‘노자’를 양코배기가 어찌 안단 말이야? ‘나서서 까불지 말고 없는 듯이 살아라’는 말을 ‘소유 없는 생산’이라고 영역을 해놓으니까, 양코배기 학자라고 하면 또 끔뻑 죽는 도올이 그걸 보고 그대로 베껴 갖고 써먹는다는 거잖아. ‘꾸밈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기 주장 없는 행동’ 이라고 풀면 노자 할아방이 설 자리가 없다. 나도 러셀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러셀이 뭔 노자를 해설한다 말이다. 우리가 기대할 걸 해야지. 그래, 노자 말씀을 우리가 못 알아듣고 양넘한테서 답을 빌려온다 말이야? 우리 학문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돼? 세종대왕이 통곡하시는 소리가 안들리나?
도올번역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선한 것이 선하다고만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하고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데
성인은 내가 그를 자라게 한다고 간섭함이 없고
잘 생성시키면서도 그 생성의 열매를 소유함이 없고
잘 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것에 기대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속에 살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그 속에 살지 아니하니
영원히 살리로다.
우리가 문장에서 ‘그러므로’라는 말을 쓸 때는 그 앞의 문장에 ‘그러한 이유’가 나와야 하고 그 이유와 뒷 문장의 ‘어떠하다’가 논리적으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 이건 초중학생 논술지도에서나 나올 얘기인데 명색이 노자사상을 논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서글픈 일이다.
그런데 현재 나와 있는 《노자 도덕경》의 해설을 볼라치면 앞글과 뒷글이 따로 노는데다가 논리적인 연결이라고는 전혀 안 되고 있는데도 오히려 그런 점을 견강부회 억지점철로 끼워 맞추어 노자사상의 심오함이 그런 데 있기나 한 것처럼 혹세무민하는 학계의 현실을 볼 때 아무리 좋은 말로 점잖게 말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만든다.
도올 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도올은 억울할 수도 있다. ‘쓰바, 나만 그랬냐? 딴 놈들도 다 나하고 비슷하게 해석들 해왔는데 왜 나만 이리 모질게 두들기냐?’고 원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옛말도 있고 긁어 부스럼 만든다는 소리도 있고, 가만히 있으면 50점을 받을 텐데 나서서 빵점 받는다는 소리도 있잖아. 우리나라에서 노자를 내놓고 팔아먹은 사람은 도올이 첨이다. 그러니까 도올이 시범케이스로 매를 맞을 수밖에 없지 않나?
사설은 그만 줄이고 2장에 대한 내 번역을 보고 3장으로 진도 나가자.
바른번역
세상 사람들이 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꾸며진 아름다움이면
이것은 악한 짓이며,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
선함을 가장한 것이면
이것은 불선이니라.
없음에서 있음이 생기고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게 되고
긴 것을 두고 짧은 것을 재는 법이며
높은 것과 견주어 낮은 정도를 보고
소리와 비교해서 음악을 알아듣고
앞이 정해져야 뒤가 다를 수 있음이니라.
(만약에 아름답지 않은데 아름답게 지어내거나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하게 꾸미거나
어려운데 쉬운 것처럼 가장하거나
짧은데도 긴 것처럼 속이거나
낮은 것을 높은 것처럼 과장하거나
소리를 음악이라고 우기고 앞과 뒤가 헷갈리면,
세상 사람들이 진실로 아름답고 추한 것과 선한 것과 악한 것과 있고 없음과 길고 짧음과
어렵고 쉬운 것과 높고 낮음과
음악과 소리의 구별을 하지 못하며
무엇이 앞이고 무엇이 뒤인지를 알지 못하나니)
그러한 이유 때문에 성인은 꾸미지 않고 일을 처리하며
말없이 가르침이 되게 실천하며,
천하 만물을 자기 손으로 만든다 해도
떠들어 자랑삼지 않는도다.
살면서도 (드러내지 않기를)없는 듯이 하고
꾸며서 지어내는 것에 의존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차지하지 않음이니.
대저, 오로지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이 없어지지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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