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이경숙/노자를 웃긴 남자

노자를 웃긴 남자 (제5장)

기른장 2020. 9. 28. 21:22

제5장

 

어느새 5장까지 와버렸네. 여기서부터는 도올의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한번 보자. 제5장의 첫 줄이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티엔띠 뿌르언!’ 캬~ 발음 죽이지? 내가 TV에서 도올의 고전강의 프로를 볼 때 좀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도올이 ‘티엔띠 뿌르언’ 하는 걸 듣고 밥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는 거잖아. 너무나 완벽한 본토발음이어서 내가 뿅 갔다. 사실 중국말은 사성(四聲)이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은 완벽한 본토발음이 잘 안 되거든. 그런데 너무너무 멋진 발음인 거 있지? ‘티엔띠 뿌르언!’ 천지불인(天地不仁), 이 한마디를 우리 노자가 했던 본토발음 그대로 들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 나는 사실 도올을 용서해주고 싶었다. 그 수많은 날을 TV 앞에서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도오죠 히데끼를 보아야 했던 고역은 상쇄할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있잖아, 나는 암만 생각해도 도올이 중국말하는 것은 용서하겠는데 영어하는 건 용서할 수가 없는 거 있지. 소설 쓰는 것은 용서해도 철학 하는 건 용서할 수가 없어. 어쩌면 좋겠냐? 본토발음의 반만큼이라도 뜻을 알아먹었으면 무지하게 좋으련만 발음만 멋지고 해석은 취권인걸.

 

도올이 TV강의에서 저 ‘천지불인(天地不仁)’을 멋들어지게 노래해서 나로 하여금 홀딱 반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텍스트 속에서까지 본토발음을 써놓은 이유는 결코 중국어 실력을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이번만큼은 그 고질병인 위유식(爲有識), 자찬박학(自讚博學) 증세의 발작이 아니라 어린애처럼 순수한 감동의 발로로 보인다. 그만큼 스스로 말하다시피 도올은 노자의 이 구절에서 주체할 길 없는 감명을 받은 거야.

 

이런 거 보면 도올도 보기보다 여린 남자 아닌가? 나는 왜 저 대목이 그렇게 감동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짐작하건대 도올은 불인(不仁)이란 말을 일반적인 통념과 상식을 깨뜨린 파격적인 통찰이라고 생각한 거 아니겠어? 물론 이것도 헛다리짚은 거는 마찬가지지만 노자의 생각은 도올의 짐작이나 추측과는 전혀 반대편에 서 있다. 통밥을 굴려도 언제나 틀리는 쪽으로만 굴리는 것도 흉내내기 어려운 재주다. 고대에는 루소처럼 나이브한 자연주의자들이 없었다. 자연과 그것이 인간에게 강요하는 생존의 조건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혹독한 시대였단 말이다. 그래서 자연의 가혹함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줄 만한 지혜로운 자를 성인으로 꼽은 거야. 요순이 달리 요순이 아니고 치수(治水)를 잘 해서 요순 아니야? 홍수, 가뭄, 산불, 지진, 역병 등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고난과 역경의 근본 원인이었지.

 

‘대자연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따뜻하니…’ 따위의 자연 예찬은 고대인들의 의식 세계와는 동떨어진 거다. 천지는 그야말로 두려움과 외경의 대상이었다. 하늘은 인간에게는 비정하고 박절하며 아주 잔인한 무엇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겠지? 그리 생각되지?
그런데 노자는 자연의 그런 불인함이야말로 성인의 도와 합치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말을 천지와 성인은 비정하고 박정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천지와 성인은 비정과 온정, 혹은 인자하거나 매정하거나 하는 차원을 벗어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동시대 사람들이 자연을 인자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노자가 ‘아니다. 자연은 인자하지 않다’고 우긴 것으로 도올은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게 대단한 발견이나 된 것처럼 저 혼자 감격해 ‘티엔띠 뿌르언’하고 자빠지고 있으니 얼마나 웃기냔 말이다. 노자가 보는 천지와 성인은 인자하지도 않으며 인자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다정한 것도 아니고 다정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가혹하지도 않고 가혹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노자가 말할 때의 ‘인(仁)’은 공자가 말할 때의 ‘인(仁)’과 전혀 다른 소리라는 것을 도올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머리가 나쁘면 눈치라도 빨라야 귀염을 받지. ‘무위’ 차원의 도를 보고 있는 노자의 눈에 공자의 인은 ‘유위’의 차원이다. 불경에 보면 ‘보살행을 행한다고 생각하면 이미 보살행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보살행을 행한다고 생각하고 행하는 행위는 이미 보살행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다.

 

보살행을 행하고 자비를 베풀고 선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모두 마음의 의지가 불러오는 것이고 이것은 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 ‘위(爲)’에 속할 것이다. 만들어지는 것, 또는 지어내는 것이다. 진정한 보살행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살행을 행한다는 생각조차를 떠나 있는 것이다. ‘인’이란 군자지도의 수양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본래적인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상태’와는 거리가 있다고 노자는 생각한다. 태양의 따스한 기운이 만물을 소생시키고 온갖 생명을 키워도 태양에게 자비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이 대지를 말리고 초목을 태워도 태양이 잔혹하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태양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할 뿐’이고 스스로 그러한 태양이 때로는 생명을 살리고 때로는 생명을 죽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천지야 말로 무위자연의 차원으로서 지극한 것이라고 본다. 천지나 성인의 불인은 인자하지 않거나 매정하거나 잔인하다는 뜻이 아니라 꾸미거나 지어내거나 만들어내는 행위가 아닌 ‘무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불인(不仁)’은 ‘무위(無爲)’의 다른 표현이다. 뒤의 18장에 가면 ‘대도폐유인의(大道廢有仁義)’라 하는 말이 나오는데 ‘지극한 도가 없는 자리에 인의가 있다’는 의미이고, 또 38장에 나오는 ‘상덕부덕시이유덕(上德不德是以有德)’이란 말도 ‘지극한 덕은 부덕한 것이다. 때문에 오히려 덕이 있다’는 것도 비슷한 말들이다. 때문에 ‘천지불인’이라는 말은 천지의 인이야말로 ‘최상의 인’이라는 소리인 것이다. 이 말에 이어서 뒤따라 나오는 말들이 바로 이와 같은 ‘최상의 인’을 설명하는 말들이다.

 

‘이만물위추구(以萬物爲芻狗)’ 이 말은 만물을 풀강아지(芻狗)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추구(풀강아지)라는 것은 중국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사상에 올리는 풀로 만든 개를 말한다. 잡귀를 쫓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 물건이다. 이 풀강아지가 진짜로 잡귀를 쫓는지 귀한 신을 모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제상에 올려진 풀강아지를 눈여겨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있기는 해야 하는 물건이지만 있다 해서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 물건이 바로 추구다.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추구를 대하는 것이나 천지가 만물을 대하는 것이 비슷하다는 말이다. 이것을 잘못 헛짚으면 ‘하찮게 여긴다’ ‘무시한다’ ‘능멸한다’ 라는 말로 오해할 수가 있다. 도올은 아예 ‘불인(不仁)’을 ‘잔인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예의 버릇이 또 나와서 안써도 되는 자리에 꼭 영어를 써서 이러고 나온다.

 

Heaven and Earth are ruthless! 천지는 잔인하다! 노자의 사상에는 가벼운 낭만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천지는 잔인하기에 위대한 것이다. 잔인하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둑 터진 임진각의 탁류에 휩쓸려 묻힐지언정 천지를 원망치 마라! 왜? 우리의 천재소년 왕필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고 있다.
《노자와 21세기》 243쪽 하단

 

나는 저기서 영어가 왜 나와야만 하는지, 왜 기어코 나오고야 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네. 그건 그렇다 치고 천지가 잔인하다고? 노자가 말한 뜻이 그런 거라고? 천만에 말씀이다. 노자의 말뜻은 ‘천지는 인자하지도 인자 안 하지도 않고, 잔인하지도, 잔인 안 하지도 않다’이다. 제사 지내는 사람들이 추구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니야. 그렇다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제상에는 올려놓는 것이 관습이니까 올려놓긴 하지만 소중히 여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부러 하찮게 여길 이유도 없는 것이 추구라는 물건이다. 올려놓고 그저 있나 보다 하면 그뿐인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가 ‘추구’라는 것의 의미를 찾기를 제사를 지낼 때는 소중히 여기다가 제사가 끝나면 길에 갖다버리거나 불에 태워버리는 것으로 생각해서 필요할 때는 소중히 여기고 일이 끝나면 매정하게 버리는 것에 대한 비유일 거라고 보고 있다. 노자의 말을 왜곡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제 제사를 지내는 광경에 대한 상상력 부족이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에도 추구가 그리 소중한 제물은 아닐뿐더러 제사가 끝났다 해서 매정씩이나 한 마음을 가지고 일부러 홀대하는 물건도 아니다. 제사 지내는 사람이 추구를 소중히 받들거나 잔인하게 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저 별 생각 없이 올렸다가 별 생각 없이 내리는 물건이다. 이 구절을 가지고 ‘잔인하다’로 옮기면 노자가 할 말이 없어.

 

적당한 비유를 찾자면 ‘소가 닭 쳐다보듯이 한다’는 말에 가까울 것이다. 닭을 쳐다보는 소의 눈길에는 애정도 연민도 호감도 적의도 없다. 그냥 무심한 눈길이다. 소가 닭을 쳐다보는 눈길이야말로 천지가 만물을 바라보는 눈이요, 성인이 백성을 바라보는 눈이다. 소가 마당을 가로질러 가다가 닭이 낳아놓은 알을 밟아서 깨뜨린다 해도 소가 닭한테 감정이 있어서 한 짓이 아니다. 소는 그저 마당을 지나 밭으로 걸어갔을 뿐이다. 배고픈 닭이 소똥 마른 것을 주워먹어도 소는 닭을 위해 똥을 싼 것이 아니다. 그냥 나오니까 쌌을 뿐이다. 닭도 소가 자기 알을 밟고 지나가도 소를 원망하지 않는다. ‘내 알이 깨졌구나. 저절로 깨졌겠지(謂我自然)’ 소똥을 맛있게 먹어도 소한테 감사할 줄 모른다. ‘먹이가 저절로 땅 위에 생겨났다(謂我自然)’고 생각할 뿐이다. 모든 것이 저절로 일어나고 절로 이루어졌을 뿐 ‘소가 했다느니, 닭 때문이라느니’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천지성인(天地聖人)과 만물백성(萬物百姓)의 관계가 이런 소하고 닭과 같다는 것이 노자의 말씀이다. 반면에 공자의 인(仁)은 사람이 키우는 닭과 같다. 집도 지어 주고 먹이도 주고 물도 주고 춥지 않게 덥지 않게 보살펴주지만 언젠가는 손에 칼을 들고 닭의 모가지를 딴다. 이게 인(仁)이다. 노자는 백성이 잘살도록 도와주지도 않고 못살게 굴지도 않는 게 최고의 통치라고 본다. 인이니 군자의 도리니 쓸데없는 나발을 불어대던 인간들이 죄없는 백성을 괴롭히고 전쟁터에 내몰고 재산을 뺏고 죽이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말고 아예 백성을 무지무욕(無知無慾)하게 내버려두라는 심오고매한 노자의 주장이시다. 그러면 백성은 절로 행복할 것이요 자기가 행복해져도 그것을 통치자(성인)의 덕택으로 생각지 않고 내가 저절로 행복해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도의 정치라는 가르침이다. ‘백성이 자기가 절로 행복해졌다고 생각하게 하는 정치야말로 최고 최선의 정치라는 것’이 이 대목의 골자요, 노자정치상의 핵심이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개그계의 황제 도올의 쇼가 또 있다.

 

노자는 또 말한다. 天地가 不仁한 것처럼 聖人 또한 不仁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백성을 어여삐 여기고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고 교화하는 대통령을 좋아할지 모른다. 노자는 말한다. 모름지기 대통령은 은혜를 베풀면 안 되고 백성을 사랑한다 생각하면 아니 된다. 그는 인자하면 아니된다. 그는 잔인해야 한다. 자기 당이라 편들고, 선거전에 자기에게 괘씸하게 굴었다고 미워하고, 정적이라 해서 그 능력이 있음에도 무조건 음해하기만 한다면 과연 지도자의 자격이 있겠는가? 天地不仁! 聖人不仁! 그 얼마나 통렬한 핵심을 찌르는 反語인가!
《노자와 21세기》245쪽 중단

 

참으로 배꼽을 찌르는 개그다. 기가 막혀서, 잔인해야 한다면서 미워하면 안 되고 음해하면 안 된다 하니 개그계의 황제답다. 동양학자 해라. 동양학자 못 하게 하면 정치한다고 나설까봐 겁난다.
이 대목의 해설에서 도올은 자기가 1989년에 펴낸 《길과 얻음》이라는 책이 우리말로 《도덕경》을 번역한 최초의 책이라고 자랑하면서 이런 나발을 불고 있다.

 

나의 《길과 얻음》은 한문을 될 수 있는 대로 한글로 풀었다. 그리고 先泰古經은 본래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독립된 의미단위이므로, 그것이 모여서 생기는 개념을 하나로 묶지 않고 본래대로 한 글자씩 다 풀어 번역하였다. ‘萬物’이면 ‘만물’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만 가지 것’이라든가 ‘온갖 것’으로, ‘天地’도 ‘천지’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늘과 땅’으로 번역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런데 이번 번역은, 대중을 상대로 한다는 원칙을 세웠는데 이때 아이러니컬한 것은 한글로 풀면 의미가 더 전달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대중을 상대로 한다’는 구체적인 뜻은 ‘대중의 언어의미구조에 가장 쉽게 전달가능한 방식의 언어기준을 세운다’는 뜻이다. ‘道’를 그냥 ‘도’로 하는 것이, 오히려 ‘길’로 하는 것보다 의미가 더 직접적으로 포괄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왜냐 우리 민중에게 이미 道는 ‘도’로서 그들의 삶과 더불어 살아 움직여왔기 때문이다. 미국인에게는 분명 ‘Tao’보다는 ‘the Way’가 더 낳은 번역이다. ‘Way’하고 하면 ‘길’ ‘방법’ ‘사람이 살아가는 행로’ ‘만물이 움직여 가는 법칙’ 등등의 뜻이 다 생겨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말로 ‘길’이라 해놓으면 소달구지 마찻길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특별한 해설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오히려 한문 투보다 협애해지고 폐쇄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요번 나의 번역은 지난번, 지금으로부터 꼭 십 년 전 이맘때의 번역보다 그냥 평범한 한국말,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보통 한국 사람들이 가장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기준으로 해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번역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말한다면 십 년 전 《길과 얻음》(통나무,1989년11월16일 초판 발행)을 참조해보는 것도 그 맛이 새로울 것이다. 그러나《길과 얻음》은 왕필 주석에만 그 기본을 둔 것이며, 마왕퇴 백서와 곽점 죽간본의 연구성과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요번 번역은 1999년 11월까지의 세계적인 연구성과들을 집약했다는 면에서는 기존의 어떤 역서와도 그 성격이 다르다.
《노자와 21세기》213~214쪽

 

킁… 자기는 노자가 뭔지도 몰라요 하고 광고 나발을 불고 자빠졌지? 이리 긴 글을 왜 다 옮겨 소개했겠나? 바로 이 글 속에 도올이 공부했다는 노자가 다 들어 있다. 도올은 도가 적합한가 길이 더 나은가, Tao가 맞는가 Way가 맞는가 고민할 필요 없다. 왜냐 하면 어느 것을 쓰건 틀린 것은 마찬가지니까. 십 년이면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세월이다. 그 세월 동안 노자 하나만 연구하고 전 세계적인 연구성과를 집약했다는 사람이 겨우 도와 길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런 속 터지는 중생이 있을까봐 노자는 서두에서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이라고 미리 못을 박아둔 것이다.

 

그래도 보람이 없는 걸 어쩌겠어? 반야(般若)는 그냥 반야(般若)지 그 이름에는 아무 뜻이 없다. 열반(涅槃)은 그 이름이 열반(涅槃)이지 이름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냥 인도어 니르바나를 소리나는 대로 옮겼을 뿐이다. 노자도 ‘도(道)’라는 글자로 이름을 삼았을 뿐 그 이름에는 아무런 뜻도 없는 것이다. 글자가 한문으로 가지고 있는 ‘길’이라는 의미와는 전혀 무관하다.

 

한술 더 떠서 우리나라 말로도 번역을 제대로 못 하면서 영역을 한다고 설치니 딱 겁이 난다. 도를 영어로 Way로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음마, 하품 나온다. 도는 도고 Tao지 길이나 Way가 아니다. 이름인 글자 자체에 의미가 들어가면 그건 이미 노자가 말하는 ‘도’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다. ‘도’라는 이름에는 아무 뜻이 없다. 이름은 도올이 좋아하는 ‘좆’이라 해도 관계없다.

 

티엔띠 뿌르언~ ‘천지불인(天地不仁)하니 이만물위추구(以萬物爲芻狗)요’,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에 무심하고’,‘성인불인(聖人不仁)하니, 이백성위추구(以百姓爲芻狗)니라’,‘성인도 이와 같이 불인하니 백성들을 간섭치 않는도다’라고 번역하면 그런대로 준수하다. 그리해야 다음 문장들과도 뜻이 잘 통하여 막힘이 없게 된다. 도올식의 악역인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라고 해버리면 다음문장하고 연결이 안 된다.

 

이 문장을 해석할 때 ‘다룬다’는 단어가 들어가면 무조건 빵점이다. 풀강아지처럼 다루건 보물처럼 다루건 아무튼 다룬다는 의미는 이 문장과는 상극이다. ‘다루지 않는다’ 또는 ‘무심하다’는 것이 바로 ‘위추구(爲芻狗)’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지는 결코 만물을 다루지 않는다’는 문장을 ‘천지는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룬다’로 하면 이게 어찌 번역일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런 수준으로 노자를 강의해서 이름을 얻고 강의료를 받고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어디에 와 있는 것일까? 참말로 나라의 장래가 걱정스럽다. 다음 문장을 보면 도올이 진짜 술 먹고 주정하는 꼴을 보게 된다.

 

이거 큰일났네. 갑자기 겁나게 어려운 한자가 나오는데 이를 어째? 이런 한자를 도올이 어찌 읽겠느냔 말이야. 밑에 문장에서 ‘탁(槖)’자하고 ‘약(籥)’자는 천자문에도 없는 글자고 시골 서당 훈장도 못 알아보는 글자다. 우리 도올이 큰일났지? 어쩌는가 함 가보자.

 

天地之間 其猶槖籥乎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虛而不屈 動而愈出
허이불굴 동이유출

 

이 어려운 문장을 도올이 번역도 잘했지. 왈, ‘하늘과 땅 사이는 꼭 풀무와도 같다. 속은 텅 비었는데 찌부러지지 아니하고 움직일수록 더욱 더 내뿜는다’라고 해놨네.

역시 도올이군. 내가 기가 막혀버린다. 여기서 풀무가 왜 나오나? 생각을 함 해봐봐. 노자가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을 어디 비유할 데가 없어서 바람 내는 풀무에다 비교를 했겠나? 그리고 풀무라고 하면 이게 말이 되나? 이것부터 다음 다음 문장까지 당최 이해가 안 돼버려. 좋다. ‘탁약’을 옛날에 그릇 굽는 가마나 숯 굽는 가마에다가 바람 불어넣는 기계인 풀무라고 보자고. 풀무라는 게 속이 텅 빈 것은 맞지. 그래서 어찌 됐단 말이야?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아서 허이불굴(虛而不屈) 즉, 속이 비었지만 찌부러지지 않는다 이런 말이야? 들어보니 완투가 있는 소리네. 그지? 그럴듯 하지 않나? 그러면 그 다음 구절 함 볼까? ‘동이유출(動而愈出)’이네. 이게 무슨 소린고? ‘움직일수록 더욱 많이 나온다’라는 소리 아냐? 조금 헷갈려버리네.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네. 완투는커녕 제로도 안 오는데.

 

풀무야 당연히 피스톤 식이건 날개 식이건 움직일수록 바람이 많이 나오지. 근데 하늘과 땅 사이가 어찌 움직일수록 뭐가 쏟아져 나오나? 지구도 돌고 해도 돌고 별도 막 돌아버리니 뭐든지 막 나온다 이 소린가? 천지지간의 광대하고 적막한 공간하고 피스톤 파이프가 막 움직여 바람이 쌕쌕 나오는 풀무하고 정서적으로 연결이 안 되는데? 내가 이상하나? 노자가 이상하나? 다 이상하고 도올만 정상인가? 하늘가 땅 사이가 풀무처럼 정신없이 움직이면서 뭘 뱉어내는 그런 물건인가? 노자의 우주론은 24시간 상시 창조 체제인가 보네. 이건 쉽게 풀 문제가 아니다. 일단 척 보니까 도올이 달려들어서는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지?

 

‘탁(槖)’자는 옥편을 찾아보면 ‘전대 탁’ ‘절구 탁’이다. ‘약(龠)’은 뭐냐? ‘피리 약’이다. 에프킬라는 파리약이고 ‘약’은 ‘피리 약’이다. 그러니까 ‘탁약’은 ‘절구와 피리’다. 이 탁과 약을 붙여서 ‘탁약’이라고 하면 ‘풀무’라는 단어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탁’과 ‘약’을 절구와 피리라는 두 개의 단어로 볼 것이냐, 아니면 ‘탁약(풀무)’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런 때는 문장의 앞뒤 관계와 문맥의 흐름으로 볼 대에 어느 쪽이 자연스럽고 논리적으로 순접하는 해석이 가능하느냐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

 

풀무라는 기계에서 나오는 바람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고 강강익선(强强益善)이다. 많이 나오고 세게 나올수록 좋은 것이 풀무의 바람이다. 만약에 천지지간에 비유한 것이 풀무라면 그리고 천지지간은 무엇이든지 많이 만들어내고 세게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뜻이라면 사람의 말도 많을수록 좋은 것이 되어야 앞뒤가 맞는 소리가 된다. 그런데 바로 뒤에 노자가 하는 말은 ‘다언삭궁(多言數窮) 불여수중(不如守中)’이란 말이다. ‘말이 많으면 금세 막히는 법이니 가슴에 담아둠만 못하다’이다. 이 말을 가지고 유추해 보면 노자는 ‘뭔가 많이 내놓은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풀무’는 아닌 것이다.

 

반면에 절구와 피리는 이 경우에 대단히 적합한 비유가 된다. 절구는 너무 심하게 절구질을 하면 곡물 가루가 밖으로 마구 튀어나오고 피리도 너무 힘껏 불어 젖히면 쓸데없는 고음에 깨지는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많이 나오는 것은 좋지 않다’는 말에 어울리는 비유는 ‘풀무’가 아니라 ‘절구와 피리’이다.

 

앞 뒤 문장의 연결 관계도 그렇지만 문장 자체의 구조로 볼 대도 ‘탁’과 ‘약’은 ‘절구와 피리’로 볼 수밖에 없다. ‘탁약’이 도올의 설명대로 풀무라 하면 앞의 ‘기(其)’자하고 그 담의 ‘유(猶)’ 자는 ‘움직일 유’, 또는 ‘원숭이 유’잔데 ‘움직일 동(動)’과는 쓰임새가 약간 다르다. 원숭이 까불듯 촐싹거리면서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하는 글자다. 노자는 이 ‘유(猶)’를 절구질과 피리 부는 동작을 묘사하는 글자로 고른 것이다. 그래서 ‘유탁약(猶槖籥)’은 ‘절구질과 피리 부는 일’로 옮길 수 있다.

 

‘기(其)’를 붙여서 읽으면 ‘기유’는 ‘그 움직임은’이 된다. 맨 뒤의 감탄어조사 ‘호(乎)’와 호응해서 ‘절구질과 피리를 부는 동작이란!’하는 뜻이 되는 것이다. 물론 생략된 말은 ‘얼마나 경망스러운 것이냐?’ 가 되겠다. 이런 문장을 ‘유’는 버리고 ‘호’자는 빼버리고 풀무라 하면 이건 번역이 아니라 창작이다. 그것도 황당무계한 창작이다. 탁약을 ‘풀무’라고 하고 나니까 그 다음 번역이 안 되는 거야. 당근 횡설수설을 시리즈로 할 수밖에 없지. 그건 좀 있다가 보기로 하고 이 문장의 전체적인 의미를 알아보자.

 

노자의 글버릇을 살펴보면 한 가지 특이한 필법이 눈에 띄는데 그건 바로 ‘Aa Bb’ 구조의 글을 ‘AB ab’로 쓰는 버릇이다. 그것을 알아야 뜻이 통하는 부분이 더러 나온다. 앞에서도 그런 구조의 글이 나온 적이 있었다. ‘허기심 실기복(虛其心 實其腹) 약기지 강기골(弱其志 强其骨)’이란 말과 ‘좌기예 해기분(挫其銳 解其紛) 화기광 동기진(和其光 同其塵)’이 그런 예이다. 이 문장을 읽기 쉽게 배열을 고치면 ‘허기심 약기지(虛其心 弱其志)’ ‘실기복 강기골(實其腹 强其骨)’이 된다. 뒤의 문장도 ‘좌기예 화기광(挫其銳 和其光)’ ‘해기분 동기진(解其紛 同其塵)’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게 하고 뜻을 약하게 하며, 배를 부르게 하고 뼈를 튼실하게 만든다’라는 문장을 노자는 ‘마음을 비우게 하고 배를 부르게 하며,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한다’는 어순으로 써놓은 것이다. 이런데 헷갈려서 도올은 정신을 못 차리고 헛소리만 하는 거다.

 

‘그 뾰족한 부분을 쳐내고 모습을 보면 빛이 어우러지는 영롱함이요, 그 얽힌 것을 풀어 헤쳐서 속을 보면 그것은 먼지와 같은 것이다’ 라는 문장을 어순을 바꿔서 ‘뾰족한 부분을 쳐내고 얽힌 것을 풀어보면 빛이 어루어지고 먼지와 같다’ 해놓으니까 도올 같은 머리로는 이게 해석이 안 되는 거다. 천지지간(天地之間) 기유탁약호(其猶槖籥乎) 허이불굴(虛而不屈) 동이유출(動而愈出)로 어순을 바로 잡으면 아주 쉽게 그 뜻을 알 수가 있다.

 

‘하늘과 땅 사이는 텅 비어 있어 찌그러지지 않을 뿐이나, 절구질이나 피리를 불 때는 찧거나 불수록 튀어나온다(곡물 찌꺼기와 소리)’라는 뜻이다. 그러면 노자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만 알면 된다. 천지지간이라는 대자연의 공간과 절구나 피리처럼 인위적으로 파놓은 공간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광대한 공간은 텅 비어 있어서 그것(빔)의 소용은 다만 찌그러지지 않을 뿐이지만 절구와 피리의 속은 똑같이 비어 있으면서도 그것은 움직일수록 무엇인가가 경망스럽게 튀어나온다는 뜻이다.

 

고로 같은 ‘빔’이라도 자연의 ‘빔’과 인공적인 ‘빔’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어떠해야 한다? 절구나 피리처럼 움직일수록 경망스럽게 뭔가가 튀어나오는 절구나 피리 같은 ‘빔’이 되지 말고 천지지간의 ‘빔’처럼 그저 찌부러지지 않으면서 고요한, 그런 ‘빔’을 가지라는 가르침이다. 이에 대한 결론은 다음 구절에 따라 나온다. 그런데도 도올은 ‘탁약’을 ‘풀무’라 해버린 끝이라 앞 뒤 글의 연결이 불가능해서 끝까지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만 하고 자빠진다. 이런 애가 공자를 강의하고 자빠져 있으니 내가 마 억장이 무너진다.

 

절구와 피리라는 물건은 사람이 그 속을 파서 비게 만든 물건이다. 이 빈 것이 절구와 피리를 쓸모 있는 물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인공적인 빔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사람의 부가적인 노동이 필요하다. 절구는 공이로 부지런히 찧어야 곡식이 빻아지고 피리는 입과 손을 열심히 움직여야 소리가 난다. 열심히 할수록 더욱 많은 곡식을 빻고 더 요란한 소리를 낼 수가 있다. 그러나 절구질은 세게 할수록 가루가 밖으로 튀어나오고 피리도 너무 세게 불면 음이 깨져서 나온다. 이게 바로 ‘동이유출(動而愈出)’이다. 즉 절구나 피리를 불 때 너무 세게하면 곡식가루나 음이 튀어나오는 것과 같이 ‘말이 많으면 금세 막히니 가슴속에 아껴둠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천지가 만물을 보고 아무 소리 안 하고 성인이 백성을 간섭하지 않으며 천지간의 공간이 비어 있음으로써 찌그러지지 않는 것을 본받고, 절구와 피리처럼 경망되이 움직여 쏟아내지 마라. 모름지기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는 법이니 모쪼록 말을 아껴 가슴속에 담아둬라, 이런 가르침이다.

 

‘다언삭궁(多言數窮)이니 불여수중(不如守中)이니라’ 얼마나 좋은 말인고?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마음속에 담아둠만 못하느니라’는 노자의 이 말씀은 도올이 명심해야 될 소리지. 사람이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 가지가 따라서 많아지는 거야. 틀린 말이 많아지고, 거짓말이 많아지고, 책임 못 질 말이 많아진단 말이다. 이 세 가지 때문에 사람이 궁지에 빠지게 되는 거고. 요새 사람이 비명에 횡사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것이 뭔가? 교통사고지. 그러나 옛날 사람이 비명에 돌아가시는 이유 중에 으뜸이 뭐였겠나? 바로 말이다. 횡액의 대부분이 말에서 비롯됐다.

 

연산군이 대신들한테 걸어준 묵언패의 내용이 ‘입은 화를 부르는 구멍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였잖아. 그래서 현대인은 싸돌아다니지 않으면 죽을 일이 없고 옛날 사람은 말을 안 하면 죽을 일이 없었다. 말로써 궁지에 몰리기는 백성이나 위정자나 범인이나 군자나 다를 바가 없었지. 옛날 같았으면 도올 같은 촐싹이는 그 입 때문에 벌써 인생 종치고 날 샜을 텐데 세상이 좋다보니 아마 죽을 때까지 헛소리 나발을 불 수 있을 거야. 그게 다 세상을 잘 타고난 덕분이지. 하지만 노자 당시에는 나발 잘못 불면 바로 가는 수가 있었다. 가도 지 혼자 가는 게 아니고 불쌍한 처자식에 3족까지 데리고 갔단 말이다.

 

그래서 노자가 말하기를 대저 성인은 백성을 추구를 보듯이 하여 간섭치 않고 장담도 하지 않고 약속도 아니하며 거짓말도 아니하니, 이와 같이 말을 아끼라고 재삼 당부하는 것이다 위정자가 말을 아끼면 백성은 위정자의 말에 따라 흔들리지 아니하고 약속을 하지 않으면 기대를 하지 않고, 장담을 하지 않으면 믿지도 않으며, 거짓말을 아니하면 분노할 일도 없으므로 그저 묵묵히 지 할 일이나 하며 산다는 얘기다. 그래서 불행해도 당연, 행복해도 당연, 그저 그런 것이려니, 이게 인생이거니 하고 살아갈 따름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보는 것이지.

 

자연(自然)! ‘천지지간(天地之間)은 텅 비었으므로 굽히지 않는데, 사람은 절구나 피리와 같이 경망되이 움직이고 말이 많아서 자주 궁지에 몰리는도다. 모름지기 다언삭궁이니 불여수중이니라!’

 

이쯤에서 도올의 번역과 해설을 또 아니 보고 넘어갈 수는 없지. 함 보자. 도올 가라사대,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네. 그속에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네’라 해놨다. ‘수중(守中)’을 ‘그 속에 지킨다’로 풀고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단순히 ‘그 속’이 아니라 ‘흉중(胸中)에’ 또는 ‘가슴속에’라고 약간 말을 꾸며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꾸밀 때 꾸미고, 꾸미지 말아야 할 때 꾸미지 않는 것이 좋은 번역의 첩경이다. 직역이 더 어울리는 대목에서 억지 멋을 부리거나 가미해야 할 때 무미하게 두는 것은 훌륭한 번역문이 못 된다. 이런 문장의 꾸밈도 꾸밈이지만 번역을 엉터리로 했을 때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모든 문장의 뜻이 연결이 안 되고 각각 나 홀로 블루스를 춘다는 점이다. 천지지간이 풀무처럼 움직일수록 쏟아내는 것이라 해놓고 사람은 반대로 말을 아끼고 삼가라 하니 무슨 놈의 가르침이 이렇단 말이냐. 나같이 머리 나쁜 사람은 노자 못 배우겠다.

 

도올의 번역은 엽기적인 오역과 악역의 점철일 뿐만 아니라 어쩌다 하나씩 비슷하게 찍은 것조차도 그 꼬락서니가 한심하고 더욱이 사람을 기겁하게 만드는 건 그 해설이다. 번역보다 해설은 더 죽인다. 21세기의 명작《노자와 21세기》상권230쪽을 보자.

 

그러나 노자철학을 총괄해서 보면 그가 말하는 스스로 그러함은 분명 어떤 특징이 있다. 그 특징은 무엇인가? 노자가 말하는 ‘스스로 그러함’은 바로 만물의 존재방식이 ‘빔’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유지될 때 스스로 그러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항상 도는 스스로 그러할 때, 빔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 빔을 채워버리는 방향, 그 빔을 근원적으로 파괴시키는 방향으로의 사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함이없음(無爲)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빔을 유지하는 함이요, 그 빔을 유지하는 함이야말로 바로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當爲가 아니라 自然이다. 이것은 곧 모든 존재를 스스로 그러하게 내버려둘 때는 반드시 스스로 그러하게 허를 유지한다고 하는 자연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의 有爲的 행동만이 빔을 유지시키지 않으며 스스로 그러함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함은 存在의 自然이다. 여기서 우리는 虛와 無爲와 自然이 하나로 노자철학에서 관통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道의 쓰임(用)이다.

 

그리고는 박스까지 두르고 아래와 같이 도식을 그려놨다.

 

빔(虛) ≡ 함이 없음(無爲) ≡ 스스로 그러함(自然) ≡ 쓰임(用)

 

도올이 얼마나 노자사상을 모르는지 이 표만 봐도 알 수가 있다. 도올의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고 행여 사람들이 노자를 실용주의자로 오해하게 될가봐 걱정스럽다. 노자는 실용주의자가 아니다. 위의 도식을 바로잡으면 다음과 같다.

 

도(道) ≡ 빔(虛) ≡ 본래 그대로(無爲) ≡ 스스로 그러함(自然) ≡ 쓰임이 없음(無用)

 

노자는 앞에서 ‘이용지혹불영(而用之或不盈)’이라 하여 ‘도무용(道無用)’임을 명백히 한 바 있다. 적어도 하나의 사상체계가 되고자 하면 앞뒤 말에 어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앞에서 ‘아’라 했던 것을 뒤에 가서는 ‘어’라 하는 수상쩍은 구석이 보이면 그것은 이미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도올이 번역한 노자의 어디에 앞과 뒤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있던가? 도(道)는 허(虛)로써 무용(無用)이지, 결코 실(實)로써 용(用)이 아니다. 도(道)는 모든 실(實)이 나오는 허(虛)요, 모든 용(用)을 낳는 무용(無用)이다. ‘도(道)=용(用)’이란 등식을 그리는 인간이 어찌 노자를 아는 인간일 수가 있겠나? 소가 웃을 일이지. 그럼 이 인간이 노자를 강의하는 꼬락서니는 뭐겠나? 소가 웃지도 못할 일 아니겠나?

 

이 장에서 우리 도올이 중언부언 해설이랍시고 잔뜩 늘어놓은 것들을 살펴보면 꼭 술 처먹고 오바이트 해놓은 거 같애. 이게 만약 철학이고 도올이 철학자라면 주일이는 성인이고 석천이는 보살이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퍼질러 놓고는 한다는 소리가 자기의 “기철학적 용어로 그런 것을 ‘천지코스몰로지(Tien-ti Cosmology)’라 한다”라니, 티엔띠가 조선땅에 와서 고생이 많지. 영어까지 꼽사리 껴서 같이 고생이다. 그 ‘천지코스몰로지’가 어떤 건지 볼라치면 “하늘(天)은 형체 없음이니 무형(無形)이라서 형이상(形而上)이고, 땅은 형체가 있어서 유형(有形)이라 형이하(形而下)인데, 양자는 일형(一形)으로서 일기(一氣)다”라 한다.

 

어렵지? 참말로 가방끈 짧은 나는 철학 못 배우겠다. 도올 같은 대학자의 글은 도무지 어려워서 이해를 못 하겠거니와 통박으로 굴려서 찍어도 역시 황당할 따름이다. 책을 보면 어쩌고저쩌고 골치 아픈 소리가 한참이나 계속되다가 역시 결론은 버킹검이야.

 

이것은 내 기철학의 방대한 의론(醫論)부분을 들어봐야만 그 실마리를 터득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서는 거론키를 삼갈 수밖에 없다. 정신은 마인드(Mind)가 아니라 몸(Mom)이다.

 

도올의 글은 끝까지 읽을 필요가 없다. 안 봐도 결론이 뻔하기 때문이다. 끝은 꼭 지 자랑으로 끝난다. 도올의 ‘기철학’인가 뭔가 하는 책은 내가 읽고서 포복절도했다는 거잖아. 방대하다는 의론(醫論)은 정말 황당하기가 《노자와 21세기》뺨친다. 나중에 이 의론이라는 것을 함 볼 때가 있을 텐데 일단 내가 이 말 정도는 뒷감당할 자신이 있다. ‘도올은 노자는 물론 기나 한의학에 대해서도 쥐뿔도 아는 게 없어.’

 

주차장에서 차에 앉은 먼지를 보고 ‘도(道)의 본질’을 깨닫고, 다방레지한테서 ‘빔(虛)의 도리’를 깨닫는 도올의 일도정진(一到精進)하는 학구열이야 감히 내가 흉내낼 경지겠느냐만 그 대갈빡 나쁜 것은 정말 흉내내기도 불가능이다.

 

얘 말하는 거 함 봐봐. “노자가 말하는 ‘스스로 그러함’은 바로 만물의 존재방식이 ‘빔’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유지될 때 스스로 그러하다고 하는 것이다”하고 봉창 두드리는 소리하고 자빠지잖아. 완전히 대철인(大鐵人)의 확철대오(確鐵大誤)답지? ‘빔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만물의 존재방식’이라? 이게 뭔 해괴한 소리야? 만물은 ‘빔(虛)’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채움(盈)’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비려고 하지도 않고 차려고 애쓰지도 않는 것, 이것이 ‘저절로 그러함(自然)’이다. 빈 놈은 빈 대로, 찬 놈은 찬 대로의 ‘있는 그대로’가 바로 무위(無爲)다. 하늘과 땅이 그 사이를 비어 있게 하려고 애쓰는 걸 본 적 있나? 하늘과 땅은 둘 사이를 텅 비게 유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극대화는커녕 현상유지조차도 관심이 없다. 다만 스스로 그렇게 비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절구나 피리와의 차이점이 있다.

 

절구나 피리는 스스로 그러해서 속이 빈 것이 아니다. 사람이 속을 파내고 긁어서 비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천지간의 빔은 쓰임이 없다. 그저 짜부러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쓰고자 하는 것도 없다. 그러나 절구와 피리의 빔은 쓰임이 있다. 곡식을 빻고 소리를 낸다. 그 쓰임(用)을 위해서 움직임(猶)이 필요하다. 이것이 스스로 그러한 천지간의 빔과 용을 위해 만들어낸 빔(극대화시킨 빔)의 차이점이다. ‘빔을 극대화 하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이 아니라 절구나 피리를 파서 속이 비게 만드는 짓이다. 도올은 무위(無爲)를 ‘행함이 없음’이라고 어이없는 소리를 해대더니 이제 와서는 자연(自然)을 ‘빔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라고 헛고리 나발을 불고 있다.

 

도올이 개떡으로 만들어버린 게 노자 할아방뿐이면 내가 말도 안 해. 죄 없는 음양오행설까지 들고 나와서 이것까지도 음양횡설, 오행수설을 만들고 앉았다. 얘를 어쩌면 좋겠냐? 머리 나쁜 게 부지런하면 뭐고? 바로 돌대가리지? 언제나 일을 조지는 건 멍부 맞지? 머리가 나쁘면 게으르기라도 해줘야 그게 사람들 도와주는 거지. 안 그래? 도올의 음양횡설, 오행수설 한마당 들어볼까?

 

티엔띠 뿌르언을 기똥차게 설명하면서 느닷없이 호주의 시드니가 튀어나오는 거야. 이게 뭔가 하고 보니까 또 지 자랑인 것이라. 세계실내건축가 워크샵인가 뭔가에 가서 일장 연설을 하고 왔노라 하는데 그런 단체는 내 첨 듣지만 참 별의별 자리에 다 낯짝을 내밀고 다니는구나 싶어서 그 부지런한 활약에 감탄을 안 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외국에까지 나가서 횡설수설을 하고 온다는 거야.

 

생각 좀 해봐봐. 코쟁이들이 뭔 음양오행을 알겠어? 지들이 황제내경을 들어보기나 했겠어? 노자란 사람이 있는 줄이나 알겠어? 그래도 그렇지 암만 양코배기들이 모른다 치고 막 떠들어도 분수가 있어야지. 이럴 순 없는 거야. 명색이 한의대를 나오고 한의사자격증을 받았다면서? 요새 한의대가 6년 과정이지? 지는 몇 년 하고 한의사시험 패스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역사 유구한 동의학도 노자 짝 날까 염려스럽다. 도올의 골 때리는 한의학 지식을 함 들어보자. 기대 되지?

 

도올은 개그를 하면서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는 데도 부지런하다. 노자만 갖고는 안 되니까 이제 음양오행설에 한의학까지 개그의 소재로 써먹자고 설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개그쇼의 단골메뉴라 하는데 암만 그래도 어찌 수천 년 역사를 가진 우리 의학을 갖고 코미디를 한단 말이냐. 허준 대감이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다.

 

도올이 명저 《노자와 21세기》에서 지 한의학 지식을 자랑한다고 보따리 풀어 놓은 거 같이 함 보자. 그 나이에 한의대 가서 뭘 보웠는가 의심스럽다.

 

도올이 시드니까지 가서 양넘들을 앉혀놓고 나발 불어 왈, 비장과 위장의 소화 효소작용이 화(火)라 했단다. 골 때리지? 이런 건 한의학의 기본의 기본이고 기초의 기초다. 1학년 때 다 배우고 2학년만 돼도 달달달 외우는 거다. 이런 데서 지랄육갑하고 자빠지면 한의사 사람 잡는다.

 

비장과 위장은 오행상 토(土)에 속하는 장부지. 당근 토기(土氣)를 그 기운으로 삼는단 말이다. 화(火)는 심장과 소장을 관장하는 기운이야. 오행의 상생상극으로 볼 때 화생토(火生土)요, 목극토(木剋土)의 관계가 있어. 그래서 토에 속하는 비장과 위장은 심장과 소장의 화기로부터 도움을 받고 간과 담의 목기(木氣)로부터는 상함을 받게 되는 거야. 위치상으로도 비장과 위장은 위로는 심장 아래로는 소장 사이에 딱 끼여 있잖아. 그래서 심장과 소장의 화기(火氣)가 비장과 위장이란 그릇(土)을 굽는 가마가 되는 거다. 화력이 셀수록 도자기는 단단해지고 광택이 좋아지는 것처럼 심장과 소장의 기운이 좋을수록 비장과 위장도 튼튼해지는 것이다.

 

반면에 간과 담(쓸개)은 토를 극하는 목기(木氣)의 장부여서 간의 기능이 승하면 비장의 기운을 억제하고, 담의 기운이 강하면 위장을 손상시키는 것이야. 이런 것은 한의학의 기본 상식이다 내 살다가 비장과 위장의 소화효소작용을 화(火)라 하는 돌팔이는 첨 본다. 그리고 또 도올이 뭐라 하는가 함 봐. 비장과 위장의 일차적 기능이 부숙(腐熟)에 있다 하는 거야. 얘가 노자를 지 멋대로 만들더니만 인체과학도 새로 만드는가보지. 부숙(腐熟)은 썩히는 것을 말하는데 택도 없는 소리지? 비장의 기능은 생리기능 조절에 있고 위의 기능은 해체(解體)와 혼합(混合)에 있는 거다. 위장이 하는 일은 잘게 부수고 섞는 것이지 썩히는 게 아니다. 썩힘과 섞음은 발음은 비슷해도 전혀 다른 소리잖아. 위장에 화기가 모이면 바로 위열(胃熱)이 되고 그건 바로 위궤양으로 직행하지. 큰일 날 소리하고 있다. 흙(土)의 성질이 바로 이와 같은 해체와 혼합이며, 부숙 즉 썩히는 것은 습기(濕氣)인 물(水)의 작용이다. 

 

오행을 각각 대응하는 색으로 나타낼 때 토는 누를 황(黃)이고, 화(火)는 붉을 적(赤)이고, 목(木)은 푸를 청(靑)이다. 그럴듯하잖아. 그런데 수(水)의 색이 검을 흑(黑)이라 하면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한다. 선뜻 납득이 안 가지? 오행에 대입시킬 때 물의 색이 왜 검은 흑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이것 하나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그게 우리나라 한의학이다.

 

물의 색이 오행상 왜 흑이 되느냐 하면 그건 바로 수기(水氣)가 도올이 말한 부숙(腐熟)의 기운이기 때문이야. 물은 모든 생명을 길러내지만 동시에 그것을 불러들여 썩히는 것이 바로 물이야. 그리고 썩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 색이 검게 변하게 돼 있어. 바로 습기의 작용으로 수의 색깔을 띠게 되는 거지. 우리는 ‘시커멓게 썩었다’고 말하지 ‘시퍼렇게’ 또는 ‘시뻘겋게 썩었다’고 하지 않아. 그리고 물 없이 썩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거고 (수분 없는 부패 없다), 소금이 썩은 간장도 검은 색이고, 낙엽이 썩어도 검은 색이고, 고추장을 오래 둬보며 알듯이 빨간 고추도 썩으면 검어진다.

 

그래서 인체에서 볼 때 수(水)의 장부인 신장(腎臟)이 바로 부숙(腐熟)의 역할을 한다. 인체에서 썩은 물을 걸러내는 것이 신장이고, 그게 바로 오줌이잖아. 불의 기운이란 썩어가던 물건도 소독을 해버리는 것이지. 위장의 작용이 화(火)라 해놓고 이 화가 부숙을 시킨다 하면 21세기에는 물로 소독하고 불로 썩히는 시대가 되는 모양이지? 그러면 뭔 줄 아나? 그게 말세다.

 

곰팡이가 피고 균이 번창하는 것은 오로지 습기 대문인 것이니 썩어가는 것을 햇볕에 말려보면 당장에 썩는 것이 멈춰져. ‘비장과 위장이 썩히는 역할을 하고, 그 기운이 화기(火氣)라 하고, 불이 사물을 부패시켜 썩힌다’는 소리를 태평양을 건너가서 불쌍한 양넘들을 앉혀놓고 떠들고 왔다 말이야? 그걸 자랑이라고 하고 자빠지니 이걸 어찌해야 돼? 동의학의 국제적 망신이지. 어물전에 꼴뚜기가 따로 없어.

 

물을 불이라 우기는 짓이 바로 지랄병이다. 비장은 곧 지라인데 인체의 생리기능 조절에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 지라가 나쁜 사람의 증세를 일컬어 지랄병이라 한다. 지라 바로 위에 있는 심장의 화기가 너무 승할 때 지랄병이 생긴다. 은행까지 갔다가 통장을 안 가져와서 되돌아오거나 차 속에 키를 꽂아두고 문을 잠가버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지라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은행까지 가서 집에 전화해서 구좌번호를 물어보거나, 철사를 구해서 차 문짝에 쑤셔 넣고 낑낑거리는 것이 바로 지랄하는 짓이란 말이다. 내 보기에 도올은 지라에 약간 문제가 있어. 글에 지랄병 증세가 자주 보이기 때문이고 해외에까지 나가서 나라 망신을 시키는 것도 그렇지. 꼴에 저 나발을 시드니에서 영어로 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강의한 영어원고를 책에다 그대로 실어놨는데 그것도 다 지랄병이다.

 

심장의 화기가 머리에까지 치밀어 올라서 언제나 뚜껑 속에 증기가 풀풀 솟는 상태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인 거야. 심장을 식히고 머리 속의 김을 좀 빼내서 증기압을 낮추지 않으면 도올은 장수하기 어렵지. 지가 뭐 TV에 나와서 푸샵 몇 개 한다고 오래 사는 게 아니다. 태권도 단증 흔들어 보인다고 해서 튼튼한 것도 아니고 내가 지 몸의 건강이나 상태까지 다 보고 하는 얘기야.

 

한의학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참에 도올의 증상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해주는 것도 괜찮겠다. 도올이 지금 하고 자빠진 꼬락서니를 일컬어 ‘지랄염병’이라 하는데 이 ‘지랄염병’이 어떤 병이냐? 염병은 ‘염통’이 나빠서 생기는 병이다. 한의학적 소견으로 이 염병은 심장이 허(약)해서 오는 심장병이다. 심장의 기운인 화기가 약해지면 어찌되느냐, 바로 지라가 같이 허에 빠진다. 왜냐하면 지라(비장)는 심장의 화기를 받아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장부이기 때문이다. 비장은 토(土)에 속하기 때문에 화생토(火生土)의 관계상 화기를 못 받으면 힘을 못 쓴다. 그래서 심장이 나쁜 사람은 반드시 지라가 안 좋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염병은 지랄병을 부르고 지랄병은 반드시 염병과 같이 온다. 그래서 우리가 이 둘을 항상 붙여서 ‘지랄염병’이라 하는 거다.

 

그 담에 ‘미치고 환장하겠다’ 하는 말을 자주 쓰잖아. 이게 무슨 병이냐? 미치고 환장하는 증세의 원인은 신장(콩팥)에 있다. 심장의 화기를 억제해주는 것이 바로 신장의 수기(水氣)인데 신장이 약해서 몸에 수기가 부족하면 화기가 위로 올라가서 골에 미치게 된다. 사람은 화기가 머리에 미치면 미쳐버린다. 수기가 부족해서 몸이 말라버리면 미치기만 하느냐? 그게 아니다. 환장을 같이 하게 된다. 환장은 ‘간이 말라서 비틀어지는 병’이다. 물이 없으면 나무는 마른다. 간은 목(木)이다. 그래서 신장의 수기가 부족하면 간이 마르게 되고 심하게 마르면 이게 비틀려서 뒤집어지는 거다. 이게 바로 ‘환장’이다. 그렇다고 배를 째서 간을 보고는 ‘간이 제자리에 있는데 무슨 소리냐?’ 하고 묻는 것은 무식한 짓이다. ‘간이 뒤집어진다’는 말은 부침개 뒤집듯이 엎어진다는 게 아니고 그 기운이 뒤집어진다는 소리다. 때문에 미치는 증상은 환장하고 같이 온다. 그래서 ‘미치고 환장하겠다’ 소리를 하는 거다.

 

이런 원리로 볼 때 ‘지랄염병’과 ‘미치고 환장하는’ 증세는 같이 오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인체라는 것은 하나가 나빠지면 도미노 카드가 쓰러지듯이 줄줄이 상하게 마련이라서 ‘미치고 환장’ 하는 증세가 계속 심해지면 ‘지랄염병’도 오게 된다.

 

도올은 심장이 유독 실해서 화기가 승한 체질이라 ‘지랄염병’할 체질은 아니다. 그런데 왜 자구 지랄병을 치게 되느냐? 몸에 수기가 부족해서 환장을 하기 때문에 나빠진 간(木)이 지라(土)를 침범해서 그렇다. 목극토(木剋土)다. 심장의 화기가 지라를 감싸주기 때문에 저 정도로 버티는 거지 천성적으로 심장까지 약하면 벌서 염병가지 떨고 있을 거다. 지가 어릴 때 관절염인가 류머티즘으로 고생한 것도 선천적으로 신장이 약해서 앓은 병이다. 수기(水氣)는 신장과 방광의 기운이지만 동시에 뼈의 기운이다. 수기가 부족하고 화기가 승한 사람은 뼈가 나쁠 수밖에 없다. 도올은 오래 살라면 어떻게 하든지 성질머리를 죽여서 화기를 누르고 좋은 물을 많이 마시는 수밖에 없어.

 

마음은 오장육부 상태의 총체적인 조화에서 나오는 것이고 글이라는 것은 마음의 표상이어서 어떤 사람의 글을 보면 그 사람의 건강상태를 알 수가 있다. 나는 얼굴을 한 번도 안 봐도 글 두세 개만 보면 ‘야! 이 사람은 몸의 어디가 안 좋은 사람이고 어떤 부분의 기능이 활발한 사람이구나’ 정확하게 안다. 도올의 건강진단은 공짜다. 또 한 장 마무리하자.

 

도올 번역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꼭 풀무와도 같다.
속은 텅 비었는데
찌부러지지 아니하고
움직일수록
더욱더 내뿜는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네.
그 속에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네.

 

바른 번역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보듯이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고
성인도 불인하여
백성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대하듯
간섭하여 말하지 않는다.
천지 사이의 공간이 어떠한가?
절구질과 피리를 부는 것은 어떠한가?
천지지간은 텅 비어서
찌그러지지는 않을 뿐이지만
절구와 피리가 속이 빈 것은
부지런히 움직일수록 많은 것을 흘리고 있으니
그와 같이 말이 많을수록 자주 막히는 바이니
흉중에 담아두어 밝히지 않음만 못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