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이경숙/노자를 웃긴 남자

노자를 웃긴 남자 (제6장)

기른장 2020. 9. 29. 17:16

제6장

 

어영부영하다보니 벌써 6장가지 와버렸네. 여기서부터가 진짜로 노자한테 헷갈리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도올뿐만이 아니고 노자를 연구한다는 고금의 학자들이 전부 다 골을 싸매고 고민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노자에 대해서 강아지 풀 뜯어먹는 헛소리들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 것도 여기부터다. 물론 우리의 우상, 21세기의 희망 도올의 개그도 가일층 그 환상적인 경지를 보여주게 된다. 첫 문장을 함 보자.

 

谷神不死 是謂玄牝
곡신불사 시위현빈

 

앞에서 말했지만 노자는 《도덕경》5천 글자를 통틀어 다른 사람들이 쓴 적이 있거나 널리 쓰이는 의미태의 고유명사를 단 한 개도 사용하지 않는다. 《도덕경》에 나오는 모든 의미태의 고유명사는 백 프로 노자의 오리지널 창작어들이다. 노자가 지어낸 단어들이어서 이런 고유명사가 뭔지를 사람들이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 해석이 구구하고 중구난방 지멋대로다.

 

이런 조어(造語)의 능력이 뛰어나기로는 지나인보다는 오히려 고대 인도인이다. 불경을 읽어보면 말을 만들어내는 어휘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문학적 가치만으로도 인류의 보고라 할 만하다. 특히 이름을 지어내는 데는 도가 텄다. 부처님한테 놀라는 게 바로 작명력이다. 온갖 대상 온갖 사물에 수천 수만 가지 이름을 만들어 붙이는데 정말 환상적이다. 신들의 이름부터 어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난해한 철학적 개념에 대한 명칭까지 멋지게 이름들을 척척 만들어 붙이는데, 불경에 등장하는 신과 보살, 신장들의 이름만 해도 기억을 다 못 할 정도다. 거기다가 해탈이니 열반이니, 반야니, 업이니, 보니 하는 것들도 전부 다 지어낸 말들이거든. 깨달음 한 가지를 가지고 만들어 붙인 이름이 수백 가지는 될 거야.

 

하지만 불교는 이런 이름들에 대한 설명이 그 작명자인 부처님의 설명을 통해서 밝혀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고, 또 그 의미를 놓고 이설이 분분할 이유가 별로 없다. 반면에 노자 할아방의 글은 《도덕경》의 원문만 전할 뿐 노자가 이에 대해 설명해놓은 강의록이 전해지지도 않고 노자로부터 직접 설명을 들은 제자도 없어서 겨우 왕필이 해놓은 주해가 고작이다. 그런데 왕필의 주해라는 것이 불경처럼 직접 그 원작자의 강의를 들은 제자가 기록한 게 아니고 왕필이 지 멋대로 풀어놓은 것이어서 보다시피 별 신빙성이 없는 참고용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노자의 창조어들이 이 6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노자 연구가들이 이 문장의 처음에 나오는 ‘곡신(谷神)’을 이런 고유명사로 착각한 나머지 이 장의 의미가 오늘날까지 제대로 풀어지지 못했다. 뒤의 현빈(玄牝)은 노자가 지어낸 고유명사지만 ‘곡신(谷神)’은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게 헷갈려서 ‘곡신’이 도대체 뭐냐? 해서 2천 년 동안 별의별 해석이 난무했다. 가장 골 때리는 해석 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지금 중국이나 대만의 내로라하는 동양학자들 중에는 ‘곡신’을 단전(丹田)이라고 우기는 놈도 있다. 그래서 이 문장이 기공 수련의 요체라고 뻗대는 거다. 웃기는 놈들이지. 앞으로도 도무지 해석이 안 되는 이상한 글들이 나오는데 그런 것을 죄다 신선술의 비결로 풀어 젖히는 웃기는 짜장면들이 한둘이 아이다.

 

그러면 우리 도올은 이걸 뭐라고 풀었겠나? 내가 지 강의를 듣기 전에 통밥으로 감을 잡아봤다. 아마 도올은 틀림없이 이 ‘곡신’을 또 ‘여호와 하나님’이라 하고 자빠지겠지 생각했거든. 그런데 내 통밥이 틀린거 있지.
도올은 역시 천재였어. 이걸 이번에는 ‘계곡의 신’이라고 번역하더라고. 미치겠더라. 앞에서 상제(象帝)를 여호와 하나님이라 하더니만 ‘곡신(谷神)’은 글자 그대로 ‘계곡의 신’이라 하는데 얘 대갈빡은 내 수준으로는 짐작이 안 돼.
도올이 ‘곡신불사(谷神不死)’를 뭐라고 옮겼느냐 하면 ‘계곡의 하나님은 죽지 않는다’ 이래 놨어. 계곡의 하나님은 죽지 않다니? 그런 강가의 하나님은 죽나? 들판의 하나님도 죽고 산꼭대기에 사는 하나님도 죽는데 계곡에 사는 하나님만 안 죽는단 소린가?

 

그럼 계곡에는 하나님들이 바글바글하겄네? 나는 올림포스 산꼭대기에 신들이 모여 논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안 죽으려고 계곡에 숨어사는 신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한문을 이렇게 읽으니까 당최 앞뒤 연결이 안 될 수밖에 없잖아. 생각 좀 해봐봐. 바로 뒤에 오는 문장이 뭐야? ‘시위현빈(是謂玄牝)’이다. ‘검을 현’ ‘계곡 빈’이다. 그래서 ‘시위현빈’은 ‘이것을 일컬어 검은 계곡이라 한다’다. 그렇다면 당근 앞 문장의 의미는 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계곡’에 대한 이야기라야 된다. 이게 문장의 법칙이다.

 

때문에 이 ‘곡신불사(谷神不死)’의 뜻은 ‘계곡의 신이 죽지 않는다’가 아니고 ‘신이 죽지 않는 계곡’을 말한다. 띄어쓰기를 해서 읽으면 ‘곡(谷),신불사(神不死)’다. 신이 죽지 않는 계곡이 뭐냐? 바로 신선의 고향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고 해탈의 세계이고 부처가 사는 곳이고 노자 할아방이 장자 할아방하고 바둑 두는 무릉도원이고 무극(無極)이고 태허(太虛)의 자리고 내가 죽은 다음에 갈 곳이고, 도올은 부르다가 부르다가 가지도 못해보고 죽을 곳이다. 그 담 문장을 갖고 도올이 뭐라 했는가 함 봐봐. ‘시위현빈(是謂玄牝)’을 갖고 나발을 불기를 ‘이를 일컬어 가물한 암컷이라 한다’ 해놨어. 벌떡 뒤집어질 판이지? 갈수록 태산이고 첩첩이 산중이지?

 

‘빈(牝)’을 옥편에서 찾아보면 ‘암컷 빈, 계곡 빈’으로 나오는데 이 두 가지 뜻 중에서 도올이 눈에는 ‘암컷’이라는 말만 번쩍 띄었던 거라. 누가 지보고 수컷 아니랄가봐. ‘암컷’이나 ‘여자의 거시기’ 비스름한 말만 나오면 헤까닥 해가지고 정신을 못 차려. ‘가물한 암컷’이라니? 이건 달리 말하면 까무잡잡한 암컷이란 말 아니겠어? 도대체 여기서 ‘가물한 암컷’이 왜 나오나? 저 말은 ‘그 곳을 일컬어 검은 계곡이라 한다’라는 뜻이고 두 문장을 연결해서 읽으면 ‘신이 죽지 않고 영원불사 하는 계곡이 있으니 이를 일러 현빈(玄牝)이라 하느니라’다. 그런데 도올이 뭐라 하는가 하면 ‘계곡의 하나님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가물한 암컷이라 한다.’ 이런단 말이야. ‘계곡의 하나님’이 죽지도 않으면서 뭐라? 그게 가물한 암컷이라?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가물한 암컷이란 하나님도 있나?

 

‘대통령이 사는 곳이 있는데, 그 이름을 청와대라 한다’는 문장을 ‘대통령이 있는데, 그 이름을 청화대라 한다’고 번역하면 이게 어찌되겠나? 청와대란 지명이 대통령 이름으로 바뀌어버린다. 내가 도올을 보면 그 대갈빡 구조가 어찌된 앤지 심히 궁금하다. 지 강의를 보고 있으면 말이다, 얘가 저능안가? 지능지수가 미달인가? 싶을 때가 많다. 이게 뭐 어렵냐 말이다. 곡신이란 게 만약에 어떤 신의 이름이면, 이름이 하나만 나와야지 뭐 때문에 똑같은 이름이 현빈이라고 또 나오느냐고? 안 그래? 여호와면 여호와고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여호와라 해놓고 하나님이라 하는 거나 똑같은 거야.

 

‘곡신은 안 죽는 신인데 이름이 현빈이다’ 이런 문장은 초등학생 작문에도 안 나와. 이미 곡신이라는 신의 이름이 나왔는데 뭔 이름이 또 나오느냐 말이다. 한문을 이 따위로 읽는 넘들은 노자가 ‘곡신불사(谷神不死)’를 알기 쉽게 ‘신불사곡(神不死谷)’으로 써놓으면 이번에는 ‘신은 계곡에서 죽지 않는다’로 번역하고 자빠질 넘들이다. 바로 쓰나 거꾸로 쓰나 못 알아먹는 넘들한테는 똑같은 거야.

 

암만 대가리가 돌이라도 그렇지. 다음 구절에 ‘현빈’을 옥편만 들고 찾아봐도 ‘검을 현에 계곡 빈’인데 이게 ‘검은 골짜기’나 ‘신비한 골짜기’로밖에 해석이 더 되나? 물론 ‘현빈’은 ‘현빈’이지 ‘검은 골짜기’나 ‘신비한 골짜기’는 아니다. 그냥 이름이 ‘현빈’이다. 그러나 한자의 뜻을 봐야 감이 잡히는 수준이라도 최소한 ‘검은 골짜기’로는 찍어야 된다. 그러면 당연 앞 구절의 의미는 뻔하잖아. 뒷구절에서 ‘이를 일컬어 이름을 뭐라고 한다’고 나왔으면 앞 구절에 있는 것은 당근 이름이 무엇인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이겠지. 이건 논술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그냥 초등학생 글짓기 수준의 이야기야.

 

‘이름을 현빈이라고 하는 무엇은 바로 신이 불사하는 계곡이다’라야 말이 되지. 이걸 ‘이름을 현빈이라 하는 무엇은 곡신이라고 하는데 이 놈은 죽지 않는다’로 풀어봐, 골이 어지럽지. 도무지 문장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가 있잖아. 앞 구절을 엉터리로 읽고 나니 다음 구절이 감당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현빈’을 ‘가물한 암컷’이라고 지랄염병을 떨고 나오는 거고.

 

내가 앞에서 말했지만 도올은 환장기가 있다. 간이 안 좋거든. 그래서 수시로 증상이 나오는데 어떤 경우에 드러나냐? ‘암컷’이라든가, ‘여자’라든가 ‘자지나 보지’ 같은 것만 나오면 그냥 환장을 하는 거야. 이게 바로 환장 증세다. 이해가 잘 안 되겠지만 그게 다 간이 나빠서 나오는 성격이다. 옥편에서 ‘빈(牝)’자를 찾아보니 ‘암컷’이라는 뜻도 있거든, 거기다가 ‘곡(谷)’이 뭐야? 골짜기 아냐? ‘암컷’이 나오고 ‘골짜기’가 나오니까 도올이 대갈빡 속에 번쩍하고 떠오르는 게 뭐였겠어? 바로 여자 거시기 밖에 없지. ‘아! 노자가 말하는 게 바로 여자 거시기구나!’ 무르팍을 친 거야. 내가 있지 도올이 공부하는 고락서니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지가 노자를 갖고 횡수를 늘어놓으면 저런 헛소리가 왜 나오는지 그 이유까지 다 안다.

 

미리 밝히지만 《도덕경》 전체에 세인이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노자가 어떤 개념을 여자 거시기에 빗대서 말한 곳은 없다. 이게 다 도올이 같은 돌들이 노자를 연구합네 하면서 퍼질러 놓은 헛소리들 때문이다. 《도덕경》이란 책이 말하자면 정치론인데 그것도 대단히 심오하고 고매한 정치철학선데 여기에 여자 거시기가 뭐 때문에 나오느냐고? 간이 나빠서 환장한 놈들이라 그런 해석을 하고 자빠지는 거야. 다음 문장들을 보면 진짜로 지랄에 육갑을 떨고 앉았다. 같이 함 보자.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현빈지문 시위천지근

 

도올이 이 ‘현빈지문(현빈지문)’을 풀어 가라사대, ‘가물한 암컷의 아랫문’이라 하고 자빠지는데, ‘가물한 암컷의 아랫문’을 똑바로 쓰면 뭐겠나? ‘시커먼 여자 보지’ 아냐? 이게 정신 있는 인간이야? 옛날에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도올이 한 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지. 그걸 책으로도 냈고. 어린 대학생들을 모아놓고 명색이 교수란 인간이 강의를 하면서 ‘여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도 안하고 네 시간 동안 계속 ‘자지 보지’만 한 거야. 듣기 싫어서 나가려는 애들 있으면 호통을 쳐가면서 억지로 앉혀놓고 신 나서 ‘자지왈 보지왈’ 했다는 거다. 그래 가지고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혼줄이 빠진 적이 있지. 그래서 요새는 아주 점잖아졌다. 옛날 같으면 ‘시커먼 여자 보지’라 했을 인간이다. 많이 순치된 거다. 철이 좀 들었다 해야 되나? 호랭이 물어갈 인간 같으니, 노자철학을 강의하는데 ‘가물한 암컷의 아랫문’이 뭐야?

 

‘곡신불사, 시위현빈’은 ‘신이 영생불사하는 계곡이 있으니 그곳을 가리켜 현빈이라 하느니라’ 하는 말이다. 고대 지나나 인도인들이 생각하는 신은 영원히 존재하여 불사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부처, 보살, 신장은 인간세의 수명에 비하면 영원한 시간상의 존재지만 그것들도 모두 인연법에 의해 나타난 존재일 뿐이어서 언제나 인연이 다하면 돌아가는 것이며 영원불사하는 존재는 없다고 본다. 생자필멸은 불변의 법칙이며 영적인 존재인 신들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 시간적 개념이 비록 억겁으로 세는 것이긴 해도 인간세 60년이나 부처의 억만 겁이나 영원의 관점에서 보자면 찰나지간이긴 마찬가지이다.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가 암만 멀어도 무한한 우주 공간적 거리에서 보면 지구상의 개미가 1분 동안 기어가는 거리나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불교적으로 유추하면 그것은 해탈의 경지고 도피안이다. 해탈이란 인연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인연법이야말로 모든 존재를 현상계에 내보내는 세계의 법칙이다. 인연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세계의 저편으로 건너간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이 세계의 모든 것과의 영원하고 완전한 작별이다. 아디오스 발발탄이다. 부처는 이 세계와 저쪽의 경계를 넘어 가버린 사람이다. 그래서 실제로 부처는 우리와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아무리 부처님 전에 엎드려 애처롭게 빌어도 부처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만약에 그 소리가 들리고 그 간절한 하소연에 부처의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있다면 부처와 나는 인연에 의해 연결되는 상대자가 된다. 부처 역시도 나와의 인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부처의 해탈은 뻥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히 구라다. 그러나 부처님은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너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즉 노자가 말하는 도(道)의 존재로 돌아가버린 사람이어서 너희에게는 무용(無用)이라는 것을 확실히 했던 것이다.

 

그래서 죽은 부처한테 절하고 공양을 하고 염불을 해봤자 기대할 게 없다는 얘기다. 우리한테 소용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은 부처가 아니라 부처가 남긴 가르침이고 그 말씀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돌아가실 때 제자들에게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등불로 삼으라고 했던 것이다. 부처가 저쪽 세계로 아주 가버려서 아무런 영험도 없고 기도빨도 안듣는다면 우리 같은 중생 입장에서는 믿을 이유가 없잖아. 말씀인즉슨 암만 진리라 쳐도 중생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아플 때 낫게 해주는 거고 돈 잘 벌게 신이 도와주는 거고, 애 못 낳는 여자 아들 하나 뽑아내게 해주는 거 아냐? 맞지? 그런데 무슨 영험이 있어야 사람들이 모인다. 이게 종교다.

 

그래서 불교에서 영험 없는 부처 대신에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는 게 뭐게? 바로 보살들이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같은 보살들이 피안으로 영영 가버린 부처를 대신해서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고 어려움을 풀어준다. 이게 보살신앙이다. 보살이란 어떤 존재냐? 부처님처럼 아주 ‘현빈’으로 가버릴 수도 있었던 사람인데 고해에서 신음하고 인연법에 묶여 고통받는 중생에 대한 가련함과 측은지심 때문에 마지막 한발자국 앞에서 해탈을 스스로 포기한 존재들이다. 중생을 제도하고 구원해주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여 인연법의 세계 속에 자신을 남긴 사람들이 바로 보살들이다.

 

이런 보살들은 실제로 기도에 응답을 하고 영험도 보여준다. 지장보살은 이 세계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제도하고 지옥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이 모두 풀려난 다음 지옥불이 완전히 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부처님 뒤를 따라가겠소이다, 하고 부처님께 서원한 사람이다. 이런 보살들은 겁의 세월을 두고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겠지만 그것도 인연이 다하면 부질없이 잊혀질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간에 지금 부처가 가 계신 그런 곳을 노자는 일컬어 ‘현빈’이라 하는 거다. 신이 죽지 않고 영원불사하는 곳. 그런 곳은 인연에 따라 성주괴공하는 이 세계와는 다른 곳이다. 그러나 그곳이야 말로 이 세계가 있게 된 근본이다. 이 세계가 그 곳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이다. 그곳이 바로 열반의 세계요, 피안이며, 도요, 현빈이다. 바로 노자의 ‘현빈지문 시위천지근(玄牝之門 是謂天地根)’이 그 말이다. ‘현빈의 들어가는 입구야말로 천지의 근본이다’라는 말이다. 부처님이 넘어 가버린 그 문이 바로 ‘현빈지문’이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중생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에 뒤돌아보다가 차마 넘지 못하고 발걸음을 되돌린 바로 그 자리가 ‘현빈지문’이다.

 

그 문을 여는 데는 정말로 모질고 독한 마음이 필요하다. 두고 가는 형제들, 자식들, 모든 사랑했던 사람들, 생명의 유혹과 그 본능까지도 다스려 잡지 못하면 넘지 못하는 문이다.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이야말로 우주의 근본 자리이고 영원불사하는 세계이며 고통과 슬픔과 비참이 없는 곳이며 우주와 내가 일체가 되는 자리이다. 기독교인이 생각할 때는 그리스도가 황금보좌에 앉아 있고 그 우편에 베드로가 왼편에 바울이 있으며 천사 미카엘이 그 날개로 이 세계를 덮고 서 있는 그 장소가 바로 ‘현빈’이다.
이런 심각하고 엄숙하고도 진지한 철학적 명제를 논하는 자리에 ‘가물한 암컷의 아랫문’을 들고 나오는 꼴값은 어찌 해야 되겠나? 이걸 강의라고 하고 자빠지는 꼬락서니를 언제까지 두고봐야 되겠느냐 말이다. 도올이 도를 알려면 한 겁의 윤회가 더 필요할 거다.

 

도올은 골짜기만 보면 여자 깊은 곳이 생각나고 문(門)만 나오면 여자 아랫문이 떠올라 노자의 고상하시고 우아하신 성인(聖人)철학을 갑숙이의 성인(成人)소설로 둔갑을 시키고야 말았다. 《도덕경》이 졸지에 ‘장미여관’으로 전락해버리고 ‘무위의 도를 지향하자’가 ‘가끔은 포르노스타를 지향하자’가 돼버린 거 아니냐 말이다. 내 말이 지나쳤나?

 

글이라는 게 반드시 점잖음으로 칠갑을 하고 교양으로 화장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강의도 마찬가지다. 자지 보지가 꼭 필요할 때가 있고 또 목적상 자유스럽게 써야 할 장합도 있다. 이영희씨가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노래하는 역사》같은 거 말이다. 그의 글 속에 대단히 노골적인 묘사들이 나오고 남녀의 신체 부위에 대한 쌍스런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아무도 이 글을 외설이나 저질스러운 글로 보지 않는다. 글의 목적과 주제 자체가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이나 강의 내용에 있어야 할 알맹이는 하나도 없으면서 그런 말들을 흥행 목적으로 동원해서 빈약한 내용을 커버하려 들거나 학문적 빈곤을 호도하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작태다.

 

도올의 강의 ‘여자란 무엇인가?’가 그토록 세인의 분노와 비난을 샀던 이유는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 용어로써 자지 보지를 썼기 때문은 아니다. 그 강의가 전체적으로 내용이 황당할 뿐 아니라 ‘여자란 무엇인가?’란 강의 제목에 걸맞는 알맹이가 하나도 없는 날맹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파격적이라 할 만한 용어 구사만으로 강의의 상품성을 만들어내려고 들었기 때문에 그토록 욕을 얻어먹은 것이다.

 

도올은 ‘곡신’과 ‘현빈지문’에서 그게 무슨 여성성을 상징하여 쓴 말인 줄로 헛짚고 자빠진 나머지 대단한 발견이나 한 양 온갖 구라를 다 치던데 한마디로 웃기지도 않는 삼류 개그였다. 노자가 그걸 본다면 얼마나 어이가 없겠나? 설마 하니 ‘현빈지문을 갖고 ’가물한 암컷의 아랫문‘이라고 읽는 인간이 2천년 후에 태어나리라고 짐작이나 했겠나?

 

‘현빈지문’을 ‘가물한 암컷의 아랫문’이라고 한 도올이 시위천지근(是謂天地根)을 뭐라고 했는지 함 보자. ‘이를 일컬어 천지의 뿌리라 한다’고 해놨다. 지 말이 맞다고 쳐도 황당하기 짝이 없지. 기왕에 ‘현빈지문’을 ‘암컷의 아랫문’이라고 우길 참이면 ‘시위천지근’도 ‘암컷의 자궁’ 정도로 우겨야 말이 되잖아. 근데 갑자기 웬 ‘뿌리’? ‘문’이 여성의 상징적인 비유어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뿌리’는 남성의 상징이다. ‘문’과 ‘뿌리’는 대칭되는 두 개념으로는 쓰일 수 있어도 ‘문’과 ‘뿌리’가 동일 개념으로 쓰일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문은 드나드는 것이요 뿌리는 한자리에 박혀 있는 것이다. ‘암컷의 아랫문은 곧 천지의 뿌리다’ 이런 말은 대단히 어색하지? 만약에 노자가 이런 의미로 글을 썼다면 아마도 이렇게 썼을 거다. ‘현빈지문 시위천지궁(玄牝之門 是謂天地宮).’ 만약에 암컷의 아랫문이 뿌리처럼 요지부동이면 수컷은 어떻게 해? 난감하겠지? 자고로 문이란 잘 열리고 닫혀야 되는 거고 뿌리란 튼튼하고 실해야 되는 거다.

 

도올은 이렇게 번역해놓고는 자기가 봐도 어색했는지 이런 소리를 해놨다. ‘여성의 성기야말로 모든 생성의 뿌리다.’ 역시 도올이 철이 들긴 들었다. 억수로 점잖지? ‘여성의 성기’라. 더 쉬운 말도 있는데.

 

도올은 웃기는 게 꼴에 페미니스트 흉내를 내려고 든다. 인상이 험악한 남자일수록 페미니스트가 많은 이유에 대해 사회인류학적, 남성심지락적 고찰을 해서 논문을 하나 쓰면 아마 박사학위쯤은 쉽게 딸 거야.

 

도올은 또 ‘따라서 우주적 암컷의 성기(아랫문)야 말로 천지의 뿌리라고 노자는 갈파하는 것이다’라고 헛소리를 계속한다. 하지만 천만에다. 노자는 그렇게 갈파한 적 없다. 노자를 어설픈 페미니스트로 만들지 마라. 그리고 노자철학을 ‘여성성의 우월’을 갈파한 페미니즘으로 둔갑시키지 마라. 우주적 암컷의 성기가 천지의 뿌리라면 우주적 수컷의 성기는 도대체 뭐라는 거야? 줄긴가? 열맨가? 가지? 아니면 우주적 수컷의 성기는 아무 짝에도 못 쓰는 물건인가?

 

도올의 엽기적인 개그를 조금만 더 볼까?

 

항상 뽐내고 으스대고 잘난 체하는, 봉우리같이 불뚝불뚝 서 있기 좋아하는 남성들이여! 항상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며 수모 받는 낮은 자리에, 소리없이 숨어 있는 여성들을 우습게 보지 말라! 아무리 그대들이 뽐낸다 한들, 높은 것은 결국 낮은 것으로 되돌아오게 마련이요, 소리는 아무리 질러봐도 침묵으로 돌아가게 마련이요, 참은 빔으로 돌아가게 마련일지니, 남성이란 여성이라는 대지 위에 흩날리는 티끌만도 못한 존재로다! 남성이란 생멸의 한 고리에 불과한 잠시적(ephemeral)이라고 한다면, 여성이란 모든 생멸의 근원자로서 영속적(permanent)인 것이다.
《노자와 21세기》상권 262쪽

 

위의 글은 페미니스트인 척하는 남자들의 심리적 저변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지들은 불뚝불뚝 서 있고 여자는 낮은 데 숨어 있다고? 하기사 불뚝불뚝 설 게 없으니 그거야 할 수 없다마는 뭐가 낮은 데 숨어 있단 말이야? 여성을 찬미하는 척하면서 아주 여성을 깔보고 능멸하는 황당무계한 오만과 편견의 전형이지. 저 소리가 여성 예찬으로 들릴 정도로 이 나라 여자들이 바본지 아나?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성일수록 의식의 심층에는 여성 비하 의식이 더욱 강하게 도사리고 있다. 말로는 여성을 위하는 것 같으나 그 행동은 극히 남성중심적이다. 이게 바로 노자가 미워하는 ‘꾸밈(爲)’이다. 여성을 귀히 여기지 않으면서 귀히 여기는 것처럼 속이는 것. 바로 ‘위여귀(爲女貴)’이고 ‘위(爲)페미니즘’이다. 여성들은 이런 소리에 속으면 안 되나니 불퇴전의 의지로 남성다운 남성을 찾아야 한다. 내가 페미니즘을 경멸하는 이유는 페미니즘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우주적 암컷의 아랫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암컷은 있어도 우주적 암컷은 없다. 우주적이라는 말 속에는 암수의 구별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현빈이라는 곳은 남자로서 또는 여자로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우주라는 것은 음양의 조화체이지 양이 아닌 것처럼 음이 아니다. 우주적 개념에 암수의 구별을 한다는 것은 ‘여호와’가 남자라고 우기는 거나 마찬가지다. 도올은 ‘우주적 암컷’이라는 말이 얼마나 웃기는 말인지도 모르고 있다. 이쯤 하고 다음 구절로 가볼까?

 

綿綿若存 用之不勤
면면약존 용지불근

 

도올 왈 ‘이어지고 도 이어지니 있는 것 같네.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도다.’ 앞에서 ‘이용지 혹불영’을 ‘아무리 퍼내어 써도 마르지 않네’라 했던 것과 독같은 지랄 육갑이 또 나오지. ‘면면(綿綿)’은 노자가 처음 쓴 이래 지금도 우리가 자주 쓰고 있는 말이다.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과 같이 말이다. ‘면(綿)’은 ‘솜 면’, ‘잇닿을 면’, ‘끊어지지 안을 면’이다 이 면이 두 개가 중첩되면 ‘이어지고 이어진다’ ‘끊임없이 연결된다’는 의마다. ‘약(若)’은 ‘같을 약’이지만 ‘혹시’ 또는 ‘만약’의 의미로도 쓰이고 어조사로 쓰일 때는 앞뒤 연결 관계에 따라서 여러 가지 뜻으로 옮길 수 있는 글자다. 이 ‘약’을 도올은 ‘같을 약’으로 읽어서 ‘약존(若存)’을 ‘있는 것 같네’라고 옮겼다. 하지만 이것도 한문 번역을 제대로 못 하는 초딩 같은 짓이다. 이 문장에서의 ‘약’은 앞뒤 구절의 문맥상 의미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어조사로 기능하고 있다. 뒤 구절의 뜻을 먼저 보자. ‘용지불근(用之不勤)’ 불근은 말 그대로 ‘부지런하지 않음’이다. 달리 말하면 ‘나태하고 게으른 것’이 ‘불근’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쓰임에는 게으르다’는 뜻이다.

 

‘혹불영’, ‘채워져 있지 않다’와 맥락을 같이 하는 글이다. 즉 ‘현빈’이라는 것은 ‘천지의 근원으로서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지만 쓰임(用)에는 게으른 것’이라고 노자는 다시 한번 말하고 있다. 때문에 ‘약’은 ‘~이지만’ 또는 ‘~일뿐’이라는 어조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면면약존 용지불근’을 보기 좋게 옮기면 ‘영원토록 이어져올 뿐 쓰임은 없느니라’가 된다. ‘용지불근’은 곧 ‘이용지혹불영’이고 ‘도무용(道無用)’이다.

 

부처의 해탈은 윤회의 사슬을 끊은 한 개인의 해방이고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지만 그것은 곧 이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한다. 차안과 피안의 강은 너무나 넓고 깊어서 한번 건너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이다. 피안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차안의 입장에서 피안은 아무 소용이 없는 땅이다. 그것은 그곳으로 건너 가버린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아직 차안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무용지지(無用之地)다. 오직 한 가지, 그곳으로 갈 수 있는 희망으로만 존재한다. 나무 한 그루, 석탄 한 조각, 과일 한 개 그곳으로부터 가져올 수 없음이다. 그래서 노자는 ‘이용지혹불영’ ‘용지불근’이라 말하는 것이다.
도올처럼 《도덕경》을 읽으면 이게 완전히 개그집이 돼버린다.

 

이것으로 불세출의 동양학자 도올님의 희대의 명저 《노자와 21세기》상권이 끝났다. 이제 하권으로 가면 지금까지처럼 도올을 심하게 야단칠 수가 없을 것 가타. 왜냐하면 여기까지는 사실 천자문 수준이라 이 정도의 한문도 제대로 못 읽고 헤맨다면 당근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아도 싸다. 그러나 하권부터는 도올이 우왕좌왕 지리멸렬로 꼴값을 떨어도 그게 그렇게 욕먹을 일은 아닐 정도로 사실 노자 글에 어려운 대목이 많다. 어쩌면 도올이 모르는 게 당연한 거고 알면 오히려 신기할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도올만 그런 게 아니고 세계의 내로라하는 노자 연구가들이 한결같이 질퍽거리고 있음을 미루어볼 때 우리의 희망 도올의 기를 너무 죽일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도올 번역

 

계곡의 하나님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가물한 암컷이라 한다.
가물한 암컷의 아랫문.
이를 일컬어
천지의 뿌리라 한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니
있는 것 같네.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도다.

 

바른 번역

 

신이 죽지 않고
영원불사하는 계곡이 있으니
그 골짜기의 이름을
일러 현빈이라 하느니라.
그 계곡의 문이야말로
천지가 시작된 곳이니
그로부터 이어지기가 영원하지만
결코 쓰이고자 애쓰지 않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