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이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상선약수 수선리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
우리의 주인공 도올이 이 8장의 첫 문장을 해설하면서 말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어느 곳에든지 꼭 ‘노자’ 문구가 많이 걸려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걸려 있는 문구가 바로 이 ‘上善若水’인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같이 노자를 좋아해서 노자말씀을 사방에 걸어놓고 살지만, 예수 말씀만큼 이래도 노자말씀을 이해하는 자는 없고, 우리 역사는 노자가 말하는 미덕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있으니 어쩔 것인가?
《노자와 21세기》하권 36쪽
미쳐버린다. 노자를 이해하는 사람이 적다고 우리 역사를 걱정하고 앉았다. 주인공 자격이 충분하지? 얼마나 가상한가? 남 걱정은 고민하고 지라도 노자를 제대로 이해하면 얼마나 좋겠나?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자를 제대로 이해하면 얼마나 좋겠나?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자를 좋아해서 노자말씀을 사방에 걸어놓고 산단다. ‘상선약수’가 노자 말씀인 줄 알고서 그거 걸어놓은 사람 몇이나 된다고 도올이나 알지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거 몰라.
일단 ‘어쩔 것인가?’하는 걱정은 도올이 안 해도 좋을 것 같고, 그것보다도 이 좋은 ‘상선약수’ 같은 구절을 앞에 놓고 5.16이야기는 왜 꺼내며 자기 중학교 때 선생님 이야기는 왜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 21세기에 대한 걱정보다 나는 그것이 더 궁금하다.
도올의 TV강의를 보다가 내가 헤까닥 뒤집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은 이 장면에서 보여준 것은 정말 백미요 압권이었다. ‘한국사100장면’에 넣어도 좋을 만하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가 대학교 다닐 때 ‘군사정권에서 고려대 정문 안으로 탱크를 밀어 넣었다’는 쌍팔년도 이야긴데 그 담에 이런 소리를 하는 거야. ‘왜정 때 일본넘들이 아무리 악독하다 해도 그넘들은 대학교에 탱크를 집어넣는 그런 무식한 짓은 안 했다. 한마디로 필로소핀가 뭔가가 있는 넘들이었다.’ 대충 이런 나발을 불더란 말이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그 순간 ‘얘 정말 바보 아냐?’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정 때 왜넘들 대학교에서 데모했다는 소리 들어본 적이 없다. 대학생들이 ‘천황제 폐지! 대동아 전쟁 반대!’하면서 도오죠 히데끼 허수아비 만들어서 화형식을 하고 다녔으면 과연 왜넘 정권이 필로소피가 있어서 그걸 관대하게 용서해 줬겠나? 왜정 때 대학교라는 것은 천황제 수호를 위한 엘리트 양성기관이고 체제수호의 방파제였다는 사실도 모르나? 물론 그 속에도 잡다한 인간들이 섞여있다 보니 아나키즘이 풍미하기도 하고, 반전 사상을 가진 넘도 나오긴 했지만 절대 다수가 그러했다는 이야기다.
도올이 다녔던 명문 고려대가 했던 것처럼 데모로 날이 새고 데모로 날이 졌으면 아마 동경제국대학이라도 박살이 났을 거고, 총장, 학장에 교수들부터 학생까지 모조리 잡아다 물고문, 전기고문, 통닭구이, 칠성판에, 생난리판이 벌어졌을 거야. 그런데 그런 왜넘들이 필로소피가 있어서 학문과 대학을 그 정도로 대우했다고? 안중근 의사가 벌덕 일어나서 도올 강의 들으러 온다 하더라. 그 뒤에 유관순 언니도 고무신까지 벗어들고 쫓아오네. 왜넘들 필로소피 이야기는 빼고 상선약수 번역이나 똑바로 해라. 그러면 필로소피가 넘치는 도올이 번역이라고 해놓은 꼬락서니 한번 볼까?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서로 다투지 않는다.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내가 이번 TV강의를 보면서 이 나라 역대 문교부 장관을 죄 불러다가 그 책임을 물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한자교육을 철폐하고 한글전용을 한다고 빙신육갑을 떤 결과가 이 모양이다. 저렇게 쉬운 한자들로 된 문장을 가지고 저렇게 엉터리로 강의를 하는 데도 한마디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나 같으면 두 마디도 듣기 전에 일어서버린다. 하긴 도올이 어떤 사람이야? 학생들 앉혀놓고 세 시간 네 시간 말 같지도 않은 구라를 치면서 그것도 강의라고 학생들 화장실도 못 가게 한 인간이다. 그걸 또 자랑이라고 무용담처럼 책에다 써놓은 사람이다. 오죽 시답잖으면 학생들이 화장실 간다고 자리에서 일어섰을까? 그리고 한 넘은 강의 끝난 다음에 화장실에서 둘이 같이 꺼내놓고 오줌 누다가 엉겨붙었다 하더라. 그때 그넘이 이 글 보거든 나한테 연락 좀 해. 네가 진짜 싸나이다. ‘그걸 강의라고 하는 거냐?’고 치받으니까 학생이 교수한테 호주머니에 손 넣고 말한다고 호통을 쳤단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걸작이지. 쫌만 더 엉겼으면 자기 태권도 실력을 함 보여줄라 했단다. 인물은 인물이다.
이런 위대한 인물이 TV강의를 하는 자리에서 누가 감히 중간에 일어설 용기가 있을 것이며, 그걸 용납할 도올이겠나. 보나마나 수강생들은 PD한테 정신교육을 단단히 받고 그 자리에 앉았겠지. ‘위대하옵시고 영명하옵신 우리 선생님께서 강의하시는 도중에는 어떤 질문도 해서는 아니 되며, 고개를 돌려도 아니 되며, 오줌보가 터져도 그 자리에서 쌀것이며 등등 사전 교육이 오죽 철저했겠어? 강의를 듣고 감탄을 하고 탄복을 하는 표정 관리에 박수 칠 대목까지 교육을 시켰다 하데? 이게 필로소피가 넘치는 인간의 강의야? 그 놈의 필로소피 두 번만 넘쳤으면 강의하다가 사람 잡겠다.
그리고 말이야 강의만 끝나면 왜 그리 잽싸게 토끼냐? ‘선생님, 질문 있는데요’하고 누가 붙잡을까 봐 겁이 나서 뒤도 안 돌아보고 토껴버리데? 그렇게 자신이 없거들랑 아예 강단에 서지를 마.
보자.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놓고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고 번역하는 꼬락서니는 노자뿐만 아니라 동양의 언어문화 자체에 무지한 것이야. 고우영이 그린 만화 열국지만 읽었어도 상선하면 떠오르는 게 있었을 거고 그것이 있나 없나 찾아봤을 거야. 고우영 만화를 보면 중국넘들이 지네 왕한테 아이디어를 상납할 때 꼭 나오는 버릇이 있다. 그게 뭔가 하면 꼭 상중하로 나눠서 결재를 올린다는 거다. ‘폐하 신이 보기에 이번 사단에 대한 계책으로는 세 가지가 있사온데 상책은 지금 바로 토끼는 것이옵고, 중책은 구라로 사기를 쳐서 막아보는 것이옵고, 하책은 이대로 앉아 있다가 맞아 죽는 것이옵니다.’ 이런 식이다. 그래서 ‘상’이 나오면 반드시 그 다음에 ‘중’과 ‘하’가 나온다. ‘상선’이 나오면 벌써 ‘중선’과 ‘하선’이 따라나오겠구나 하고 감이 와야 글마들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거다. 척하면 삼척이고 탁하면 억이잖아.
‘상(上)’은 ‘하(下)’에 대해 상이다. 따라서 ‘상선(上善)’이라는 말도 ‘하선(下善)’이 있을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차선(次善)이 없는데 최선(最善)이 홀로 있을 수 없다. 만약에 노자가 ‘하선(下善)’에 대한 언급 없이 ‘상선(上善)’을 얘기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노자가 한잔 먹고 취해서 쓴 부분일 거다. 그러나 어김없이 바로 뒤에 ‘중선(中善)’과 ‘하선(下善)’들이 줄줄이 따라 나오고 있다. 그것들은 보지도 못하는 까막눈인지, 이걸 ‘가장 좋은 것은…’하고 번역해버리니까 그 뒷줄이 전부 덩달아 ‘제일 좋은 것들’로 같이 둔갑해버리잖아.
이때의 ‘상선’은 글자 그대로 ‘상의 선은…’하고 읽어야 한다. 그래야 뒤에 가서 ‘반면에 중과 하의 선은…’하고 이어서 읽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약수(若水)’는 글자 그대로 ‘물과 같다’라고 읽으면 되겠다. 왜 물이 ‘선지상(善之上)’이냐? 그 이유가 두 가지 나오는데 하나가 ‘수선리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이고 다른 하나가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다. 앞의 것은 도올의 해석대로 읽어도 무방하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서로 다투지 않는다.’
물론 이 번역도 제대로 하자면 틀린 것이다. 한문 읽는 법이 그런 게 아니다. 정확하게 읽으면 ‘물은 다투지 않으면서도 만물을 이롭게 한다’이다. 그러나 도올이 이 어려운 문장을 이 정도라도 읽어냈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한없이 기쁘다. 그런데 우리 도올은 딱 두 줄을 제대로 넘어가는 법이 없다. 어쩌다가 한 줄 제대로 읽었다 싶으면 바로 다음줄에서 그만 뒤집어진다. 특히 이 문장 읽는 꼬락서니를 보면 나는 그냥 만정이 다 떨어진다.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저렇게 읽을 수가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일부러 틀리게 읽으려고 애를 써도 저렇게 읽기는 어려운 문장이다.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 얼마나 평이한 문장이냐? 띄어쓰기 함 해볼까? ‘처(處)’는 어떤 장소에 있다는 뜻이다. 처하다 이런 말이다. 그 담에 ‘중인지소(衆人之所)’가 뭐야? 사람이 많이 있는 장소 아냐? 사람이 모여 있는 곳. 그 담에 ‘오(惡)’는 싫어하다잖아. 쭈욱 이어서 읽으면 되잖아. ‘물은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머물기를(처하기를) 싫어한다.’ 이런 문장은 다르게 읽을 수가 없는 거야. 오직 한 가지로 밖에는 읽을 수가 없어. 그런데 도돌이 읽은 꼬락서니 함 봐봐. ‘뭇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라고 해놨어. 그냥 지가 막 지어내고 있어. 낮은 곳에 뭐라뭐라 하는 말은 눈 씻고 봐도 없잖아.
첨부터 한번 볼까? 물의 선이 선 중의 상선인 이유는 ‘물은 다투지 않으면서도 만물을 이롭게 하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싫어하여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때? 딱 말이 되지. 그리고 앞에서 했던 말, ‘외기신(外基身)’이 왜 세상의 밖에 몸을 두는 것이라고 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겠지? 물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고 그런 물의 성질을 상선이라고 보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물이 필요하니까 주로 강가에 집을 짓고 모여 살지만 그렇다 해도 강물에 붙여서 집 짓는 사람은 없다. 사람 사는 동네와 물은 대부분 거리가 떨어져 있다. 또 물이라는 것은 산 속의 계곡을 따라 흐르기 때문에 번잡하고 시끄러운 사람 동네와는 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런 물의 선을 노자는 선 중에서 가장 최고의 선이라 말한 것이다. 생각 좀 해봐봐. 니가 물이라 치고 그래, 사람들하고 뚝 떨어진 조용한 계곡 속에서 흐르고 싶지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인 곳에 기어 들어가서 시궁창 물로 흐르고 싶겠니? 물이 그런 걸 좋아한다고 우기면 물이 기가 막히지.
그러니까 노자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한 것은 가장 상의 선을 취하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부처가 제자들이나 사바 중생에게 출가를 권유한 것과 같은 맥락이야. 노자도 우리한테 속세를 떠나 산 속의 물처럼 사람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있기를 권유하는 것이다. 그래야 도를 닦고 몸을 닦아서 ‘가물한 암컷의 거시기’를 구경하러 현빈으로 가볼 거 아니냐.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속세를 떠나 대가리 깎고 중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래서 부처님도 출가가 불가능한 사바 중생을 위해서 재가불자를 위한 설법을 했고 계율을 준 것이다. 팔정도가 바로 재가불자를 위한 생활규범이다. 우리 노자도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을 떠나 유유자적 구름 위에서 노는 신선이 되지 않겠느냐고 꼬시면서도 한편으로 그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중선과 하선을 주고 있다. 그게 바로 다음에 따라나오는 거선(巨善), 심선(心善), 여선(與善) 등등 쭈욱 줄 서 있는 선들이다. 물의 상선을 취할 수 없어서 중인지소에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중선과 하선일 망정 이러이러한 선은 가지고 살아라 이거다. 상선은 물 하나로 끝난다.
그런데 도올이나 여타 모든 노자 연구가들은 한결같이 이하 나열된 여러 선을 전부 다 물로 보고 있다. 이건 바로 노자 할아방을 물로 보는 짓이다. ‘노자를 물로 보지 마!’
‘상선약수’란 말이 그냥 여기서 이유없이 튀어나온 말이 아니다. 노자가 ‘외기신이신존’이라고 쓰고 보니 아무리해도 나중에 사람들이 뜻을 몰라서 헷갈릴 거 같거든. 그래서 ‘외기신이신존’의 이유를 들려주느라 넣은 글이다. 글 쓸 때 노자의 마음가짐이 이리 세심하고 친절하다. 그런데도 못 알아먹는 멍텅구리들은 어쩔 수가 없어. 왕삐부터 그걸 모르고 이걸 다음 장으로 후딱 넘겨버리니 도올이 같은 애는 더 헤매는 거야.
물은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머물기를(處) 싫어해서 멀리 떨어져서 유유히 흐르기 때문에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들 가까이 있는 물은 더렵혀지기 마련이잖아.
상선(上善)은 약수(若水)이니 : 선 중의 상은 물의 선과 같은 것이니.
수선(水善)은 이만물이부쟁(利萬物而不爭)하고 : 물의 선은 다투지 않으면서도 능히 만물을 이롭게 하고,
처중인지소(處衆人之所)를 오(惡)하느니라 : 사람이 많은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느니라.
고(故)로 기어도(幾於道)이니라 : 그러므로 거의 도에 가깝다 할 수 있느니라.
(幾는 ‘거의 ~하다’, ‘가깝다’의 뜻이고 於는 감탄의 뜻을 내포하는 어조사)
만약 그대들이 상선을 따르기(外其身) 어렵다면 중선과 하선이라도 따라야 만이 능히 자기 한 몸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니라(而身存), 이 말이 노자가 생략해버린 구절이다. 상선이 나왔으니 당근 다음 나오는 것은 중선 아니면 하선일 수밖에 없으니 굳이 설명을 안 해도 알아먹겠지 하고 생각하신 거다. 달나라에 갈 수 있게 된 훗날의 인류가 이 정도의 생략 때문에 노자 자신의 글을 못 읽는 수준으로 지능이 퇴화하리라고는 짐작을 못 했던 거지. 어찌 도올 한 사람만의 죄겠나? 다음의 중선 이하를 보자.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거선지 심선연 여선인 언선신 정선치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사선능 동선시 부유뷰쟁 고무우
거선지(居善地) : 머물 때는 땅을 잘 보고 앉아야 하고
심선연(心善淵) : 마음은 언제나 그윽하게 가지도록 하며,
여선인(與善仁) : 남을 대할 때는 인으로서 대하고,
언선신(言善信) : 말을 대할 때는 믿을 수 있는 말만 하고,
정선치(正善治) : 바로잡을 때는 다스리는 법도로서 하고
사선능(事善能) : 일을 할 때는 능력으로써 하며
동선시(動善時) : 움직일 때는 때를 잘 보고서 움직여야 하리로되,
부유부쟁(夫唯不爭) :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남과 다투지 않는 것이니
고무우(故無尤) : 그리하면 네가 허물(우환)이 없으리로다.
이 칠선(七善)은 종교적인 계율이나 도덕적인 덕목이 아니라 속세를 살아가는 중생의 처세요령이다. 그것을 지키고 따르는 목적이 대단히 속물적이다. 그리해야 내 한 몸에 화가 없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는 소리다. 얼마나 솔직하냐? 십계명을 지켜야 천국에 가고 팔정도를 지켜야 극락왕생한다는 구라에 비하면 노골적이지만 그만큼 가슴에 와 닿는 구석이 있잖아. 노자는 사람이 나중에 천국을 가고 극락에 왕생하고 열녀비를 세우고 하는 그딴 것보다도 우선 자기 한 몸 안 다치고 어찌하든 보신이라도 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만큼 춘추전국시대 민초의 삶이란 위험하고 불안한 것이었다.
그래서 노자는 거듭거듭 당부하기를 ‘제발 남과 싸우지 마라. 다투지 마라. 사소한 이익은 차라리 포기하고 양보해라. 네 한 몸 잘 보존해라. 죽으면 니만 섧다. 나서지 마라. 아는 척하지 마라. 없는 듯이 살아라’ 말끝마다 전쟁터 나가는 아들 붙잡고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는 어머니처럼 신신당부하는 거다. 백성에 대한 노자의 연민과 그 보살피는 마음은 병아리 돌보는 어미 닭보다 더 지극하다.
사바 중생에 대한 부처님의 측은지심에 비견할 만하다. 이 뒤에 가면 그런 노자의 애민지정에 내가 눈물을 쏟은 대목이 나온다. 물론 도올은 그게 무슨 소린 줄도 모르니까 아무 생각없이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요 하고 넘어가 버렸지만 말이다. 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노자가 당부한 부쟁(不爭)에 어긋나는 줄은 잘 안다. 그러나 노자의 말씀이 이토록 진흙탕에 뒹굴게 두고 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지?
상선(上善)은 도를 따르는 일선(一善)이고 이하 중하선(中下善)은 세상 속에 살아가며 새겨야 할 칠선(七善)이다. 이 여덟 개의 선은 도교의 십계명이고 노자의 팔정도라 할 수 있다. 도올이 이 대목을 가지고 뭐라고 또 횡수를 늘어놓았는지 함 볼까?
도올은 상선 이하 쭈욱 나열된 차선들을 보고 이게 도대체 뭔 소린지 알 수가 없었나봐. 상선약수에 처중인지소오는 어떻게는 찍으려고 통빡을 섞어서 황당하게나마 풀었는데 거선(居善) 심선(心善) 여선(與善) 언선(言善)하고 나오니까 이게 뭔가? 한참 고민했겠지. 상선(上善)에 대한 차하선(次下善)들이라는 것을 눈치도 못 채고 얼마나 속으로 꿍꿍 가슴앓이를 했는지 이렇게 해놓은 거 있지.
‘居善地’로부터 시작하는 일곱 구절은, 帛書本에도 거의 비슷한 형태로 실려 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방식은 너무도 다양한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같은 글자에 대해서도 동사․형용사․목적어의 다양한 변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노자와 21세기》48쪽 하단
이렇게 해놓고는 내가 했던 것처럼 객관식 사지선다를 해보자고 판을 벌여놓은 거야. 그런데 웃기는 것은 문제를 출제한 사람이 내놓은 사지에 정답이 없다는 거야. 도올이 거선지(居善地)를 샘플로 삼아 내놓은 객관식의 답안을 한번 볼까?
① 거할 때는 땅을 좋은 것으로 삼고
② 거할 때는 낮은 데 처하기를 잘하고
③ 좋은 땅에 거하고
④ 거할 때는 땅을 좋게 하고
나는 있지. 도올이 아직까지 동양학 교수를 하고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다. 학생들이 얼마나 불쌍하겠니? 예문에 정답이 없는 객관식 문제를 교수가 시험에 턱하니 내면서 풀라고 하면 이게 환장할 일 아니겠나? 이런 문제를 내놓고도 뭐라고 하는가 보면 더 걸작이야.
이 밖에도 다른 번역의 가능성이 있겠지만,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번역해도 어느 것이 더 정답이라는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같은 책 49쪽
불가능한 거 좋아하네. 모르면 모른다고 해. 그러면 가르쳐주기나 하지. ‘거선(居善)’이란 머물 때의 지혜를 말하는 거잖아. 이것은 비단 어디서 살 것이냐 하는 거주지를 뜻할 뿐만 아니라 직장, 벼슬 등 살아가는데 있어서 처하게 되는 모든 상황을 두루 아우르는 말이다. ‘머무름에 있어서의 선(善)은 그 땅을 살피는 데 있다’ 라는 뜻이지. 땅은 꼭 대지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고 어떤 상황 전체를 말한다. 주변 상황을 잘 살피고 파악해서 거하라는 처세의 방편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이 가르침을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발 뻗을 자리를 보고 앉아라’라는 말이다.
거선지를 모르면 사람이 어찌되는 줄 아나? 도올이처럼 사지(死地)에 빠져버린다. 지가 지금 TV강의로 한번 떠서 천지분간도 못 하면서 논어강의까지 하고 자빠지는데 지금 지가 서 있는 TV녹화장소가 바로 ‘죽을 자리’라는 것도 모르는 거야. 내가 앞에서 그랬잖아 높이 나는 놈일수록 대갈빡은 확실히 깨진다고. 멍청하게 호랑이 아가리 앞에 자리를 깔고 드러누으면 어쩌자는 거야? 대한민국에 사람이 없는 줄 아나? 이 나라가 그리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잘나고 똑똑한 놈들이 곳곳에 쌔고 쌨다.
도올은 이 ‘거선지(居善地)’ 이하의 나열을 물에 대한 설명이 계속 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 끝도 없이 헛다리 짚고 자빠지는 거야. 그러다 보니 사지선다가 아니라 십지선다를 해도 정답이 없을 수밖에. 물의 선(善)에 대한 이야기는 ‘고기어도(故幾於道)’에서 이미 끝났는데 도올은 저 혼자 물을 붙들고 기를 쓰고 있는 거거든.
어떤 스님 둘이 내를 건너는 데 물이 불어서 한 처자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자 한 스님이 냉큼 업어서 건네줬어. 그리고는 한참 길을 가는데 다른 스님 하나가 물었어.
“출가한 몸으로 처자를 등에 업어도 됩니까?”
그러자 그 스님이 이렇게 대답했어.
“나는 그 처자를 아까 등에서 내렸는데 자네는 아직도 업고 있구만.”
노자는 물 이야기를 벌써 끝냈는데 도올은 아직도 그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어. 그러다 보니 말하는 저도 곤혹스러운 거야. 생각을 함 해봐봐. 도대체 물의 성질하고 거(居) 심(心) 여(與) 언(言) 정(正) 사(事) 동(動)이 어찌 연결이 되느냐고? 도올은 절벽만 만나면 그냥 대가리를 박아버려. 보고 있는 내가 답답해서 못 봐주겠어. 얘는 또 지가 막히면 나오는 버릇이 있지. 멀쩡하게 보이는 게 횡설수설을 막 하는 거야. 강의 주제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나발을 신나게 불어젖혀서 사람들 혼을 약간 빼놓은 다음에 사람들이 눈치 못 챌 때 얼른 다음으로 도망가버리는 약은 꾀를 부린다 말다.
노자사상에 대한 불세출의 명 해설서 《노자와 21세기》는 이 장에 대해 꽤나 길게 중언부언 잡다한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지만 노자가 이 장에서 물에 대해 언급한 것은 단 네 중레 지나지 않고,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싫어하는 물의 성질로서 도를 비유했을 따름이며 그와 같이 은둔함이 좋지 않겠는가 하고 은근슬쩍 권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도올은 이 장 전체가 물에 대한 기술이라고 보고 노자가 물이라는 것에 대해 아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단단히 착각한 나머지 노자 해설서를 ‘물에 대한 보고서’로 만들고 앉았어.
‘상징화(symbolization)’니, ‘상징적 표상(symbolic representation)’이니, ‘보편적 적응의 원리(a principle of universal applicability)’니, 하면서 그 전매특허 같은 유식이 철철 넘치는 소리를 잔뜩 한 다음에 약방의 감초같이 왕필의 주가 나온 끝에 ‘물은 유(有)로서 관념의 세계고, 도는 무(無)로서 사실의 세계다’라고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를 또 하고 자빠진다. 이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가 단순히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가 아니고 사실은 언어의 제약과 상징 체계를 벗어나는 심오한 철학적 꽈배기 언어의 산출물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런 다음에 곽점죽간본이라는 근자에 발견된 《도덕경》의 또 다른 사본의 내용인 ‘태일생수(太一生水)’의 원문을 옮겨놓고 장황스레 연구결과를 과시하고 있는데, 이것도 진짜 웃긴다. 곽점죽간본의 태일생수편 내용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도덕경》에는 나타나지 않는 개념과 말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다.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을 비롯 해서 사시(四時)라든지, 차고 덥고 습하고 건조한 것 등 훗날 오행(五行)에 대입되는 개념들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동양학의 대가씩이 못되는 올챙이 아마추어 동양학자가 봐도 공노(孔老)시대의 사상이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훗날 전국시대 말기에 동북(東北) 변방의 제(濟)나라에서 융성한 황노학(黃老學)의 산물인 것이다. 음양오행의 철학체계는 빨라도 전국시대 말에서 한대(漢代)에 걸쳐 발생한 것이다. 노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음양사상이 태동하기도 전이었다. 곽점죽간본의 태일생수편은 후대의 황노학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노자는 물이라는 것에 대해 도올이 착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도덕경》전체에 물이 나오는 것은 이 장의 단 네 줄로 처음이고 끝이다. 책을 똑바로 보지 못하다보니 뭐가 중요하고 뭐가 덜 중요한지 알지 못하고 그저 고추 먹고 맴맴이다.
《노자와 21세기》에서 장황하게 늘어놓은 태극도설이니 음양사상이니 하는 것들은 노자와는 거리가 먼 소리들이다. 노자는 태극이라는 말도 몰랐던 사람이다. 그래서 ‘곡신불사(谷神不死)’니, ‘현빈(玄牝)’이니 해서 노자가 손수 이름을 지어가며 설명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을 노자의 사상이라 말해서는 안 되는 거다.
도올번역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뭇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살 때는 낮은 땅에 처하기를 잘하고,
마음 쓸 때는 그윽한 마음가짐을 잘하고,
벗을 사귈 때는 어질기를 잘하고,
말할 때는 믿음직하기를 잘하고,
다스릴 때는 질서 있게 하기를 잘하고,
일할 때는 능력 있기를 잘하고,
움직일 때는 바른 때를 타기를 잘한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어라.
바른 번역
선 중의 상은 물의 그것과 같다.
물의 선은 다투지 않으면서도
만물을 이롭게 하며
뭇 사람이 모이는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은 도와 가깝다 할 수 있다.
(만약 물과 같은 상선이 어렵다면)
머물 때의 선을 땅을 살피는 것으로 하고
마음을 간직하기를 그윽함으로써 선을 삼고
남과 어울릴 때는 어진 것으로 선을 삼고
말을 할 때는 믿음으로써 선을 삼으며
올바름을 세우는 것으로 다스림의 선을 삼고
능히 해낼 수 있느냐로 일할 때의 선을 삼으며
움직이는 것은 때를 가리는 것으로 선을 삼아야 하나니
모름지기 다투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리해야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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