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이경숙/노자를 웃긴 남자

노자를 웃긴 남자 (제10장)

기른장 2020. 9. 29. 19:47

제10장

 

여기가 바로 유명한 《도덕경》의 제10장이다. 도올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짐작조차 못 했던 장이다. 다른 장들은 틀리건 맞건 시쳇말로 찍기라도 할 수 있었지만 여기만 오면 그냥 꽉 막혀버린다. 그래서 이 10장의 내용은 어떤 해설서를 봐도 전부 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들뿐이다. 비슷하기는커녕 아예 근처에도 못 오고 달나라에서 병신육갑을 떨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도올한테는 아예 기대할 게 없다. 도올은 처음부터 포기하는 게 속이 편하다.

 

노자께서 등선하신지 2천년 만에 내가 처음으로 이 말의 올바른 뜻을 풀어준다. 이후에 《도덕경》에 대한 논란은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10장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자. 첫 구절이다.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재영백포일 능무리호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지? 아무리 한자에 정통한 사람도 이 문장은 못 읽는다. 대부분의 노자 연구가나 《도덕경》해설자를 보면 여기서부터는 노자가 철학 사상적 사변에서 벗어나 도가수행(道家修行)의 시발점으로 여겨지는 암시들을 내놓고 있다고 야무지게 착각을 하고 자빠진다. ‘백(魄)’이라는 글자에 현혹되고 ‘전기(專氣)’ 같은 말에 헷갈려서 ‘이 장의 내용이 신선술이나 양생법 내지는 기수련에 대한 설명이다’라는 턱도 없는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천만의 말씀이고 만만의 콩떡이다. 천방지축 까부는 소년 왕삐는 물론이고 왕삐를 우상으로 받드는 도올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지나의 학자들이나 물 건너 게다국 전문가상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다보니 앞의 몇 줄은 장님 밤길 가듯이 어찌어찌 풀어나가다가 몇 줄도 못가서 ‘애민치국(愛民治國)’을 만나면 그게 발이 걸려서 헤까닥 자빠져버린다. ‘왜, 이런 데서 갑자기 애민치국이 나오는 거지?’ ‘오사(誤寫)가 아닐까?’

 

‘후대에 잘못 끼여든 구절일 거야.’ 오만 가지 궁리를 해봐도 답이 안 나오는 거다. 그러니 들어 있는 것을 뺄 수도 없고 억지로 풀어놓고 다음 줄로 도망가기 바쁘다.

 

그러나 이 장의 내용은 앞 장에서 개인적인 처세의 방편을 설명한 것에 뒤따르는 치국(治國)의 요령을 설명하는 장이다. 앞장이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장이라면 여기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장이다. 나는 도올의 TV강의를 보면서 사실 도올이 이 장을 어떻게 알아들었을까 궁금했다. 다른 건 다 틀려도 이 장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이해를 했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봐줄 수도 있다. 그러나 태생근기(胎生根氣)가 너무 허약해 보인다. 도올의 첫 구절 번역을 먼저 함 볼까?

 

땅의 형체를 한 몸에 싣고 하늘의 하나를 껴안는다. 그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또 횡설수설하기 시작하지? 번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저렇게 번역한 이유를 늘어놓은 해설이라는 것이 서너 쪽에 달하는데 그 전부가 강아지 풀 뜯는 소리다. 아마 도올 자신도 자기가 한 소리가 뭔지 잘 모를 거야. 저 번역이 맞다 쳐도 그 자체로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냐? 땅의 형체를 한 몸에 싣고 하늘의 하나를 껴안고 떠나지 않다니?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먼저 보자. 재(載)는 ‘실을 재’ ‘이룰 재’ ‘가득할 재’ 자고 영(營)은 ‘경영할 영’ ‘지을 영’ ‘진영 영’ 자고, 백(魄)은 ‘넋 백’ 자고, 포(抱)는 ‘안을 포’ ‘품을 포’ ‘가질 포’다. 그리고 일(一)은 ‘한 일’ 자다. 그러면 이게 뭔 소리겠나? 퀴즈를 푼다 치고 다들 함 생각해봐. 신문 퍼즐 맞추는 거 보다는 훨 재밌는 거다.

 

재(載)는 일단 내버려두고 우선 ‘영(營)’이라는 글자를 먼저 보자. 영(營)은 노자 당시의 춘추전국시대에 군대가 주둔하는 군진(軍陳)의 단위였다. 한 단위의 군대가 모여 세운 진지 또는 숙영지다. 오늘날도 그 뜻 그대로 병영(兵營)이란 말을 쓰고 있다. 노자는 이 글자를 ‘한 무리의 사람들’을 표현하는 단어로 골랐다. 그것도 그냥 사람의 무리가 아니라 어떤 카테고리 내에 엮여 있는 사람들이다. 씨족이건 동족이건 한나라 백성이건 동질성을 가진 어떤 사람들의 집합이다. 군대를 지 맘대로 이탈하는 것을 탈영이라 하고 전시에는 즉결처분 감이다. 즉 ‘영’이란 그 속의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이 엄격하게 묶여있는 집단이다.

 

‘민족’이니, ‘국민’이니 하는 말들이 없던 시대다. 기껏해야 ‘백성’이란 말로 인간 사회 집단을 불렀을 뿐이다. 때문에 여기서 노자가 ‘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 소속된 사람들을 일컬어 한 말이다. 한 국가의 국민이란 징집되어 병영에 모인 병사처럼 국가라는 하나의 테두리 내에 갇힌 사람들이고 그것으로부터의 입출이 자유롭지 못한 강제적인 소속 개념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의 ‘영(營)’은 군대가 모인 진영처럼 운명 공동체로서 조직된 인간의 집단이나 조직을 말한다. 바로 국가이고 국민이다. 그렇다면 다음 글자까지 붙여서 읽어보자. ‘영백(營魄)’은 ‘국민의 넋’ 또는 ‘국민의 마음’이다. 이것을 우리는 ‘민심(民心)’이라고 한다. ‘영백(營魄)’은 민심(民心)이다. 

 

이제 맨 앞의 글자, 재(載)를 붙여 보자. ‘실을 재’ ‘가득 찰 재’를 붙이면 ‘재영백(載營魄)’이 된다. 즉, 영내(營內)에 가득 찬 백(魄)이 된다. 조금 다듬으면, ‘온 나라에 가득 찬 혼’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전 국민의 혼이요, 마음’이다. ‘거국적인 또는 총체적인 민심’이란 말이 된다. 앞 세 글자의 뜻만 알면 다음의 포일(抱一)은 어려울 것도 없다. ‘하나로 안는다’ 또는 ‘하나로 품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앞 구절의 의미는 다 풀었다. 재영백포일(載營魄抱一)의 뜻은 ‘온 나라 백성의 마음을 하나에 담는다’이다. 뒷구절 ‘능무리호(能無離乎)!’는 ‘능히 떠나지 않게(흩어지지 않게)할 수 있겠는가?’이다. 그렇다면 ‘재영백포일 능무리호(載營魄抱一 能無離乎)!’라는 것은 ‘온 나라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에 담아서 이것이 흩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다.

 

이게 뭔가? 바로 치국(治國)의 제일 첩경이요, 요체요, 나라 다스림의 알파요 오메가다. 얼마나 소름 끼치도록 정곡을 찔러오는 표현인가? 나는 어떤 정치학이나 정치론에서도 이보다 더 섬뜩하게 하나로서 전부를 관통하는 촌철살인의 경구를 본 적이 없다. 《도덕경》을 읽을 때 이 문장에서 노자의 무서움을 느꼈다. 공자보다 윗길이다. 차원이 한층 높다. 이토록 심오절묘한 한마디를 뭐라? 땅의 형체를 한 몸에 싣고 하늘의 하나를 껴안아? 지랄육갑을 떨고 놀고 자빠졌다.

 

재영백포일 능무리호(載營魄抱一 能無離乎)!
온 나라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이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정치를 한다는 놈들은 죄다 노자의 이 한마디를 벽에 붙여놓고 아침 저녁으로 들여다보면서 그 말뜻을 새겨야 되는 거다. 아니면 지 이마에 붙여놓고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보고 또 보든지. 저것이 되면 정치는 끝난 거야. 황제, 왕후로부터 오늘날의 대통령까지 하려고 그토록 노력했어도 쉽게 안 되는 게 저거다. 재영백포일 능무리호!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꾼다면 ‘민심합일(民心合一), 국론통일(國論統一)’이다.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정치가다.

 

정치하는 놈들이 노자의 《도덕경》에서 이 10장의 내용만 명심해도 인간이 확 달라질 거야. 정치하는 놈들이 바뀌어야 나라가 변할 텐데 ‘위무위(爲無爲)’할 줄 모르고 ‘공수신퇴(功遂身退)’할 줄도 모르는 놈들이 뭘 가지고 재영백포일(載營魄抱一)을 하며, 그 다음에 ‘능무리(能無離)’를 하겠느냐 말이다.

 

넋두리는 그만 하고 다시 우리 주인공한테로 돌아가 보자. 쥐뿔도 모르는 게 또 탱자탱자한다고 《훈몽자회》까지 들이대면서 백(魄)이란 글자를 설명한다고 오두방정을 떨고 앉았는데 동양학 한다는 인간이 백(魄)자도 몰라서 저 난리를 치니까 보기가 딱하지. 한심하지만 어쩌겠나? 기왕 가르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귀찮지만 이런 것도 설명해줘야지. 이제 도올이가 이 백(魄)을 가지고 뭐라고 턱도 없는 구라를 풀어서 사람을 웃기는지 보자. 그리고 이 글자의 뜻과 노자가 왜 ‘백성의 마음’이라는 표현을 해 이 글자를 사용했는지 알아보자.

 

‘백(魄)’은 옥편에서 찾아보면 ‘넋 백’이라고 나온다. 다른 말로는 ‘얼’이다. 이 ‘백’은 홀로 쓰이기보다 대개 ‘혼(魂)’과 결합되어 ‘혼백(魂魄)’이라는 합성어로 쓰인다. 혼은 우리말로 쓰면 ‘넋’이다. 고대부터 동양에서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하나의 생명으로 결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고, 그 본질을 ‘정(精)’과 ‘신(神)’이라 했다. 이 둘이 결합된 합성어가 바로 ‘정신(精神)’이다. ‘정(精)’은 육신의 생명력이요, ‘신(神)’은 영(靈)의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이 양자를 산 생명으로서 결합시키는 힘이 바로 ‘기(氣)’다. 때문에 동양적 관점에서 ‘살아 있는 인간’이란 ‘정기신(精氣神)’의 결합체이다.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기(氣)’의 운행이 멈춰 육신의 생명력인 ‘정(精)’과 영의 생명력인 ‘신(神)’이 분리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 ‘정(精)’과 ‘신(神)은 산 생명일 때의 정신(精神)이며, 죽은 다음의 분리된 둘은 각각 다른 이름을 갖는다. ‘정(精)’이 ‘신(神)’과 분리되면 ‘백(魄)’이 되고 ‘신(神)’이 ‘정(精)’과 헤어지면 ‘혼(魂)’이 된다. 이 혼이 홀로 영계에 존재하는 것을 동양에서는 신(神)이라 한다. 양넘들의 God하고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동양의 신은 육신과 분리된 혼을 일컫는다. 그래서 신은 곧 귀신이지 별다른 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서양에서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God의 개념과 동양의 신이 뒤섞여 버려서 개념조차 혼탁해져버렸다. 양넘들의 God은 처음부터 God이고 인간들하고는 출생 성분부터 다른 존재이다. 그래서 상넘이 양반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물론 고대로마제국의 신관(神觀)은 동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야훼가 지중해를 건너오면서 신과 인간이 별개의 존재로 분리돼버린 것이다.

 

그러나 동양적 사고에서 보면 인간을 창조한 신이라는 것은 대단히 웃기는 개념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이 된다. 안 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신이 될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귀신이 되어 제삿밥이나 얻어먹으러 다니는 처량한 신세가 돼버린다. 그런 귀신 중에서 특히 영험이 있고 쫌 귀족적인 양반 귀신을 따로 부를 때 재수 없는 귀(鬼)자를 떼버리고 그냥 신이라 하는 거다. 영계에 우글거리는 귀신들은 모두 한때는 살아 있던 넘들이다.

 

하지만 이넘들은 다 수명이 있다. 영생불사하는 게 아니고 다른 세상에 환생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방황하고 있는 혼들이다. 아예 갈 데를 못 찾고 지 주제파악을 못 해서 육신도 없는 껍데기로 오랫동안 개기는 넘들이 바로 무당들이 받드는 귀신들이다. 이게 바로 인격신이다.

 

그 위에 양넘들의 God과 비슷한 개념의 것도 있기는 있다. 특별히 하느님 또는 천신, 또는 상제라 하는 넘들인데 그 존재조차 의심스럽다. 화기광이고 동기진 같은 넘들이어서 정체가 가물가물한 넘들이다. 그리고 그냥 허이불굴하고 있는 넘들이라 사람들한테 별나게 복을 주는 일도 없고 해코지하는 일도 없다. 생이불유하는 존재들이라 무용이다.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없다. 개개인의 길흉화복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존재들이다. 바트 그러나, ‘하늘의 뜻’ 또는 ‘천명’이라는 개념으로 확대해서 볼 때에는 뭔가 수작을 부리는 듯한 흔적이 자주 보인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넘들이다. 역사를 공부할 때 자주 그런 심증을 갖게 된다. ‘하늘의 뜻’, ‘신의 의지’같은 것이 혹 작용한 탓에 일이 그리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 말이다.

 

정리해보면 ‘백(魄)’은 우리말로 ‘넋’ 또는 ‘얼’이라 하고, ‘혼(魂)’을 ‘넉’이라 한다. ‘얼’은 육신의 생명력인 정이어서 육신과 함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얼은 ‘빠진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얼빠진 놈’이라 하는 것이지 ‘얼 나간 놈’이란 욕은 없다. 반면에 ‘넉’은 영체(靈體)로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어서 넉은 ‘나간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넉 나간 표정’이 아니고 ‘넉 빠진 표정’이라 쓰면 틀린 말이 된다. 동시에 ‘넋(얼)이 나갔다’라는 말은 틀린 표현이다. 혼(넉)은 신의 생명력으로 죽으면 하늘로 돌아가고 백(넋, 얼)은 정의 생명력으로서 죽으면 땅으로 꺼지는 것이다. 기(氣)는 죽으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도올의 해설을 보면 기의 개념은 고사하고 혼과 백의 구별도 제대로 못 해서《훈몽자회》를 들여다보니 ‘혼은 넉이고 백은 넋이다’는 정도 밖에 안 나오거든. 그래 뭐라 뭐라 궁시렁궁시렁하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자기부터 정확하게 모르는 것을 남에게 설명하려니 본인인들 오죽 죽을 맛이겠나? 원문을 옮겨놓고 같이 보겠지만 ‘영(營)’의 뜻을 설명하면서, ‘고대인의 인체관에서 영(營)은 위(衛)는 하늘(氣)이 된다’는 골 때리는 결론이 나올 수가 있는 거다. 기(氣)는 하늘과 땅을 하나의 생명으로 유지시키는 힘(기운)이지 기가 하늘이거나 땅의 개념으로 사용될 수가 없다. 저런 무식이 철철 넘치는 소리를 하면서 어떻게 ‘기철학’을 하는지 신통방통할 따름이지. 그러니 ‘땅의 형체를 한 몸에 싣고 하늘의 하나를 껴안는다’ 같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다시 한번 ‘재영백(載營魄)’이라는 말로 돌아가볼까? 글자 그대로 옮기면 어찌되나? ‘한 무리의 사람들 것으로 채워진 백’이란 뜻이지. 즉 ‘백(魄)의 집단’을 말한다. 이것을 어떻게 한다? 포일(抱一), ‘하나에 담는다’는 말이니까 다시 말하면 인간 집단의 백(얼)을 자루 하나에 담아서 이것을 어찌한다? 능무리호(能無離乎), ‘흩어지지 않게 한다’다. ‘수천 수만 명의 영혼을 하나로 묶어서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 인간의 영혼을 수집하는 악마가 등장하는 호러무비가 생각나지?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아래에 나오는 ‘애민치국(愛民治國)’의 요체라는 말이다.

 

지도자를 향해 민심이 복속하고 천하가 하나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또 ‘영(營)’이란 말이 나왔으니 ‘장수가 장병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아 군대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과도 통하는 소리다.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독재자들이 국민을 세뇌하여 통치한 것도 노자의 ‘재영백포일 능무리’가 완전히 엽기적으로 실현된 예다. 요새 자주 사단을 일으키는 사이비종교집단에서 하는 짓은 ‘재영백포일 능무리’의 호러편이다. 어떤 방법을 쓰든지 간에 정치의 요체는 바로 ‘재영백포일 능무리(載營魄抱一 能無離)’하는 데 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왜 노자가 이 대목에서 혼(魂)과 백(魄) 중에서 백(魄)만 가지고 얘기를 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 재영혼포일이 아니고 재영백포일이어야 하는가의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그 이유를 알아보자.

 

만약 노자가 이 대목에서 ‘백(魄)’이 아닌 다른 글자를 썼다면 노자가 아니다. 노자는 글자 하나도 생각 없이 집어넣는 사람이 아니다. 이게 철학이다. 정(精)과 신(神), 그리고 혼(魂)과 백(魄)은 서로 바꿔 쓸 수 없는 글자다. 이 경우에 노자가 말하는 영백(營魄)이라는 말 속에는 국가, 국민, 민족과 같은 개념이 깔려 있다. 그리고 민족혼이나 애국심, 동포애와 같은 집단 의식은 혼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에 들어 있다. 이런 혈연과 밀접한 영적인 소속 개념은 땅에 결부되어 있고, 그 땅에서 나서 그 땅으로 돌아가는 백에 담겨 있는 것이지 허공으로 사라지는 혼(魂)과는 무관하다고 보는 내세관과 영혼관이다. 

 

육신의 생명력인 정(精)은 그 양분을 땅에서 나는 음식에서 얻고, 영의 생명력인 신(神)은 그 활력을 대기의 호흡에서 얻는다. 그러므로 정(精)의 영화체(靈化體)인 백(魄)은 그 땅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그 땅에 서 나는 곡식과 물을 떠나지 아니한다. 신토불이(身土不二)가 그래서 나온 말인 것이다. ‘국가와 민족’ 또는 ‘씨족과 혈연’이라는 것은 땅으로 해서 맺어지는 것들이다. 때문에 ‘애국심’이나 ‘충성심’ ‘동포애’ 같은 것은 모두 얼(백)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백(魄)만 하나로 모으면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의 혼(魂)은 치국(治國)의 방해물이다. 혼(魂)은 신(神)의 영화체(靈化體)로서 전인류적, 전생명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래서 어느 나라 사람이나, 어느 부족 사람, 어느 집안 사람과 같은 토착성이 희박하다. 그래서 사람의 혼(魂)에는 애국심을 기대할 수 없다. 그렇게 따지고 들면 한국혼(韓國魂)이란 말은 잘못 합성된 조어이다. ‘한국의 얼’ 또는 ‘한국백(韓國魄)’이 되어야 하는데 습관적으로 쓰기를 ‘한국혼(韓國魂)’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신(神)은 국적(國籍)이 없다.

 

반면에 정은 먹거리의 촌수를 따진다. 그래서 먹거리가 달라지면 정이 바뀌고 정이 바뀌면 사람의 체형과 생김새가 바뀌고 모습이 달라지면, 즉 다른 종자가 돼버린다. 대한민국을 지키려면 김치를 지켜야 하고, 고추장을 지켜야 하고, 된장을 지켜야 하고, 쌀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야. 먹거리가 달라지면 사람도 달라지고 그 얼이 바뀌게 된다.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은 먹거리를 지키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얼이 제자리 제 땅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만리 타향에서 죽은 몸일망정 그 시신이나마 조국의 흙에 묻히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왜 노자가 ‘뭇 사람의 백을 하나로 모아 흩어지지 않게 하라’고 하는지 이제 알겠지? 정(情)과 그것의 영화체(靈化體)인 백(얼)만이 피를 모으고 촌수를 따지고 먹거리를 가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고 말할 때 한국적인 모든 것은 바로 얼에 담겨 있다. 신은 혈통과 살아온 땅과 먹거리에 구애받지 않는다. 한국인의 백은 있어도 한국인의 혼은 없다. 한국인의 얼은 있어도 한국인인 신은 없다.

 

한국인의 백은 포일(抱一)이 아니라 백산(百散)하고 있다. 오호 통재라! 환인 ․ 환웅 ․ 단군의 세 분 삼성(三聖)께서 개천하신 이래 일만 년 이어온 하늘 백성의 적통(嫡統)이 오늘에 이르러 혼비백산(魂飛魄散)을 하는구나.

 

내가 《도덕경》을 처음 읽을 때 이 10장의 내용을 읽는데 어떤 장면 하나가 눈앞에 선연히 떠올랐다. 아마 이 장의 내용을 올바르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떠오를 장면이다. 그러나 도올처럼 흰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자요 하면 눈앞에 보이는 게 없어. 그게 어떤 장면이었는지는 좀 있다가 말하기로 하고 이쯤에서 헛소리의 대가, 잠꼬대의 달인 도올의 해설이라는 것을 한번 보자. 그래야 한번씩 웃지.

 

인간의 몸은 하늘과 땅의 묘합이다. 몸의 하늘을 魂 (넉,《훈몽자회》이라 부르고, 몸의 땅을 魄(넋,《훈몽자회》이라고 부른다. 우리말에 ‘혼났다’ ‘넋 잃다’ ‘넋이 빠졌다’ ‘넋이 나갔다’ 등의 표현은 잠시 혼이 백에서 분리되는 현상을 뜻하는 것이다. 《훈몽자회》는 ‘魂 =넋’이라 했는데 우리 고대말에서는 혼과 백이 그리 명백하게 분화되지 않은 듯하다. 혼과 백이 분리되면(죽으면), 혼은 제 고향인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제 고향인 땅으로 돌아간다. 혼은 무당들이 하늘에 제식을 올리고, 백은 장례자들이 땅에 묻는 것이다.
《노자와 21세기》하권 98쪽

 

‘營’은 고대인의 인체관에서 ‘衛’와 상대되는 말인데, 營은 몸의 내부를 운영하는(영양을 공급하는) 營血을 의미한다. 衛는 몸의 밖으로부터 保衛하는(주로 면역작용과 관련) 衛氣를 의미한다. 즉 營衛는 氣血論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을 天地論적 도식으로 설명하면 역시 營은 땅(血)이 되고 衛는 하늘이 된다.

 

 

따라서 여기 ‘載營魄’은 모두 땅과 관련된 말들임을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인간 유형의 형체를 말한 것이다. ‘영백을 싣는다’라는 뜻은 즉 내 이 비계덩어리를 가지고 산다는 뜻이다. 그레 반하여 여기 ‘一’이란 有形이 아닌 無形者요, 포괄적인 道의 別稱이다. 《太一生水》에서 말한 ‘太一’이다. 그러므로 나는 암암리 營魄이 땅의 함의가 강함으로 ‘一’을 하늘의 뜻으로 대비시켰다. 우리는 어차피 비계덩어리를 가지고(載) 사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란 이 비계덩어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이 비계덩어리와 하늘의 무형의 기운이 같이 떠나지 않고 있을 때만 존속되는 것이다. ‘一’이란 우주 전체, 즉 ‘太一’의 기운이다. 이 전체의 기운을 내가 끊임없이 받을 때만이 나는 생동할 수 있는 것이다.
《노자와 21세기》98쪽~100쪽

 

어때? 가히 절세의 학문이지? 백년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한 대학자다. 정말 식자우환이라더니 어찌 이렇게 꼴값을 떨 수 있느냐 말이다. 혼(魂)과 백(魄)을 몰라서 《훈몽자회》까지 들추고 자빠지나? 애는 썼다. 욕본 것은 가상하다마는 ‘재영백(載營魄)’을 어쩐다고? ‘비계덩어리를 가지고 산다’라고? 이런 육갑을 떨면 안 되지. 그리고, ‘암암리에 어쩌고 저쩌고 하여 대비시켰다’는 소리는 또 뭐야? 무슨 학문적인 저술에 암암리에 대비시킨다는 소리가 나와? 독자나 청중을 상대로 속임수 쓰나? 차라리 도저히 모르겠으면 ‘나 천하의 도올도 이 구절만큼은 뜻을 모르겠더이다’하면 나 같은 사람이 있어 나서서 가르쳐줄지도 모르잖아. 근데 왜 다 아는 척 사서 고생이야? 무슨 학문에 ‘암암리’가 나오나? 암암리는 평안북도 고계면에 있고 야바위꾼들이 패 돌릴 때 눈속임이 암암리다. 그래 암암리에 대비를 시켜서 풀릴 문제야? 다음 구절 ‘전기치유(專氣致柔)’하고 ‘능영아호(能嬰兒乎)?’는 어쩔래? 이거는 숨어서 사바사바해서 해결할래? 함 볼까? 고대에 행해지던 전기 치료법이라고 우길까봐 겁난다.

 

‘전기치유 능영아호(專氣致柔 能嬰兒乎)’라는 다음 구절을 대부분의 해설서가 기를 가지고 몸을 부드럽게 만들어 어린아이의 몸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뜻으로 풀어서 마치 기공 수련의 비결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전기(專氣)’라는 말에 현혹이 되고 ‘영아(嬰兒)’라는 말에 헷갈린 나머지 노자가 지금까지 해 온 소리를 다 까먹었다는 소리다. 이 구절을 보고 기수련(氣修鍊)을 연상하면 안 된다. 이 구절부터는 계속 앞 문장에 이어지는 말이고 지금까지 해왔던 말의 되풀이다.

 

내가 10장의 글을 읽을 때 눈앞에 좌르르 펼쳐진 광경이 뭔지 아나? 노자는 수염이 허연 산신령이 아니고 주(周)나라 아니면 초(楚)나라에서 관리로 근무했던 사람이다. 앉은 그대로 공중으로 떠 오른다고 뻥을 쳐서 사람들을 웃긴 어떤 영감처럼 백발이 성성한 도인을 연상할지 모르겠는데 실제 노자는 대단히 핸섬한 미남이다. 도사풍말고 아주 정열적인 혁명가를 연상하면 오히려 비슷하다. 그 이미지가 게바라하고 오히려 엇비슷할 거야. 이런 잘생긴 우리 노자를 초나라 왕이 불렀단 말이다. 바둑 두자고 부른 게 아이고, 치국평천하의 도를 물어보자는 것이었어. 왕이 묻고 노자가 답하는 광경이 마치 어제 본 영화의 장면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거야. 이건 아마 실제로 있었던 장면이라고 믿어도 된다. 역사적인 기록에는 없는 장면이지만 내가 있었다 하면 있었던 거야.

 

왕이 묻기를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길이 무엇이뇨?’ 하니 노자가 오히려 왕한테 묻기를 ‘왕께옵서는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능히 이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겠나이까?’ 하는 거야. 그러니까 왕이 답이 좀 궁하거든. ‘짜식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지, 내가 그걸 할 수 있으면 너 잡고 물어보겠냐 임마?’ 싶었지만 꾹 참고 말하기를, ‘그럴 수 있다 치고, 그 다음은 무엇이뇨?’ 하고 물으니까, 우리 노자가 줄줄이 말해 놓은 것이 바로 ‘전기치유 능영아호’ 이하 제10장의 구절들이다.

 

專氣致柔 能嬰兒乎
전기치유 능영아호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로 모은 뭇 사람 얼의 기운을 마음대로 부드럽게 만들어 어린아이처럼 변화시킬 수 있겠사옵니까?’ 하고 노자가 왕한테 묻는다. 앞에서 노자가 했던 말, ‘위백성무지무욕(爲百姓無知無慾)’을 실제로 해낼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전(專)’은 ‘오로지 전’ ‘제 마음대로 할 전’이다. ‘전기(專氣)’는 ‘기운을 마음대로 한다’이다. 또는 그냥 ‘오로지’라는 말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러면 ‘전기치유(專氣致柔)’라는 말은 ‘오로지 백성의 기운을 부드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하면 백성의 심성을 사납고 흉포하게 만들지 말라는 주문이다.

 

노자가 살던 시대는 춘추시대의 끝 무렵이고 전국시대로 접어들던 때다. 국왕이나 제후들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자기 나라 사람들을 사납게 만들어서 이웃나라와의 전쟁에 써먹을까 골몰하던 시대다. 남자는 태어나면 전사(戰士)로 양육해서 어떻게 해서든 사나운 싸움개로 키워야 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시대에 왕한테 ‘치국의 도’라고 상주하기를 ‘백성들의 기운을 부드럽게 만들어 어린아이처럼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왕이 기가 막히지.

 

이 문장들이 전부 의문문으로 되어 있는 이유는 노자가 통치자와의 대화형식을 빌려 치국의 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노자는 ‘백성의 기운을 하나로 하여 떠나지 않게 해라’가 아니고 ‘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왜 ‘백성들의 기운을 부드럽게 하여 어린아이처럼 만들어라’가 아니고 ‘만들 수 있겠느냐?’ 고 물었을까? 즉 노자의 ‘치국의 도’라는 것은 아무 왕이나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자도 그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별스럽게 속세간에 크게 쓰이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그럴 욕심도 없었다. 말하고 싶지 않지만 왕이 물으니 심드렁하니 되묻고 있는 듯한 감을 준다.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괜히 사람 말시키지 마쇼’하는 것이 저 말을 할 때의 노자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그 다음에 오는 구절들을 주욱 읽어보기만 해도 그 뜻이 눈에 잡힐 거야. 도올이 계속해서 자빠지고 개다리 춤을 추는 것은 좀 있다 봐도 되니까 한번씩 생각 좀 해봐봐.

 

노자의 출생지와 신분

노자는 《사기열전》에 따르면 초(楚)나라의 고현(苦縣:河南省 鹿邑縣) 여향(厲鄕) 곡인리(曲仁理) 사람이다. 성은 이(李)요,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또는 담(聸)으로 노담(老聸)이라 했다. 춘추시대 주(周)나라의 수장실사(守藏室史 : 장서실 관리인)였다고 전한다. 한편 노자의 본명이 노담이라는 기록은 《사기》외에도 《여씨춘추》의 불이편(不二篇)과 《장자(莊子)》의 양생주편(養生主篇)이나 응제왕편(應帝王篇) 등에 나온다.

하지만 이 노담이 과연 사기에 기록된 주나라 사관을 지낸 그 노담이냐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론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사기에 기록된 노담이란 사람과 그 후손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담은 공자의 제자인 자사와 동시대 인물이 된다. 기원전 약 400년 전 사람이다. 그러나 장자의 천운편에 보면 공자가 노자에게서 예를 배웠다는 기록이 있고 사마천 역시도 사기의 공자세기나 노자편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어서 사마천도 노자의 실존을 확인하기 어려워 세간의 떠도는 이야기로 정리했으리라는 추정을 하게 만든다. 주나라 사관인 노담과 공자는 약 100년의 차이가 난다.

또 다른 학설로는 초나라의 철학자이며 관리를 지냈던 효자로 이름이 높은 노래자(老萊子)가 바로 《도덕경》을 쓴 노자라는 학설도 있다.

나는 후자의 학설을 지지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훗날의 황노학이 연나라, 제나라와 같은 중국 변방의 나라에서 일어난 학문이고, 이 황노학을 연구했던 학자들 역시 당대 학계의 주류가 아닌 사람들로서 초나라 사람이 많았다. 특히 황제학(黃帝學)과 노자의 장생술을 접목해서 황노학을 성립시킨 것으로 유명한 환연(環淵)은 노자의 제자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사람도 초나라 사람이다. 반면에 황노학에 주나라 학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어떤 가정을 하더라도 노자의 실존적 인물이 누구냐 하는 것은 알기 어렵다.

또 주나라의 태사(太史)인 담(儋)이 진(秦)나라 헌공(獻公)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떤 이는 그가 곧 노자라 하고 어떤 이들은 아니라고 한다. 노자가 주나라가 쇄해가는 것을 보고 거기를 떠나 함곡관(函谷關) 밖으로 사라져 행방을 감추었는데, 그때 관문지기였던 윤희(尹喜)가 청하여 노자에게서 오천언(五千言)의 도덕경을 받았다고 한다. 도덕경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질문자도 없고 어느 인물에 대한 평도 안 보이고 지명조차 등장하는 것이 없다.

다만 《논어》의 산문적 성격에 비해 《도덕경》이 지니는 시적, 상징적, 명상적인 경향은 남방적인 특성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노자는 초나라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만 사마천이 사기를 쓸 무렵인 한(漢)대에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어서 정확한 기술이 어려웠을 정도로 그의 실체는 신비에 싸여 있다.

 

백성의 기운을 어린아이와 같이 어질고 순박하게 만들 수 있겠느냐는 노자의 말을 듣고 왕이 무슨 생각을 했겠어? ‘이 자슥이 뭘 잘못 먹었나?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자빠진 거야?’ 왕이 듣고 싶었던 것은 ‘부국강병책’이었지 노자가 말하는 것과 같은 ‘패러다이스의 건설’이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다행히도 왕은 인내심이 강했던지 콱 쪼인트를 까주고 싶은 생각을 누르고 다시 묻는다. ‘그래, 백성을 아이처럼 만들어서 어쩌자는 거야?’ 그러자 노자가 왕한테 또 묻는데 이게 팔 돌아가실 소리다. 내가 눈물을 쏟았다는 게 바로 여기다. 함 들어봐.

 

滌除玄覽 能無疵乎
척제현람 능무자호

 

캬~ 정말로 죽이지? 나는 저 ‘척제현람 능무자호?’에서 뿅 갔다. 얼마나 가슴이 찡한 소리냐? ‘상선약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있지 정말로 존경할 만한 사람이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면 내가 신필로 용이 날아가듯이 저 여덟 글자를 휘갈겨서 집무실에 걸어 놓게 할 거다.

 

척제현람(滌除玄覽)! ‘척(滌)’은 ‘닦을 척’, ‘씻을 척’이다. ‘세척제’라 할 때 쓰는 글자다. ‘제(除)’는 ‘섬돌 제’, ‘층계 제’다. 섬돌이란 옛날 집에서 대청 마루 올라갈 때 딛고 오르도록 마루턱에 놓아두는 넓적한 돌이다. 다르게는 ‘마당이나 뜰’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그러니까 ‘척제(滌除)’는 ‘섬돌을 닦아준다’는 말이고 다르게는 ‘마당을 쓸어준다’는 뜻으로 옮겨도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씻어준다’ ‘닦아준다’는 말과는 ‘마당’보다 ‘섬돌’이 표현상 더 어울릴 것 같다. 미천한 백성이 집에 오를 때 흙투성이 발을 딛는 그 섬돌을 왕이 허리를 굽혀 손수 닦아준다는 말이다.

 

그러면 ‘현람(玄覽)’은 뭐겠냐? 어려운 말이 아니다. ‘어두운 곳을 본다’는 소리다. 그래서 ‘척제현람’은 바로 ‘백성의 섬돌을 닦아주고 그 어두운 곳을 살펴준다’는 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현(玄)’은 빛깔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신비스러운 어두움이다.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백성들 삶의 어둡고 아픈 곳을 살펴준다는 말이 참으로 시적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문장으로 다가온다.

 

그 다음의 구절 ‘능무자호(能無疵乎)’를 마저 보자. ‘자(疵)’는 ‘흠집’ ‘상처’라는 글자다. 그러니까 이 말은 ‘상처를 없앨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전체를 같이 함 읽어볼까? ‘왕이시여, 몸소 허리를 굽혀 백성의 섬돌을 닦아주고 그 어두운 곳을 살펴 백성들의 아픈 곳을 없앨 수 있겠나이까? 하고 묻는 말이다.

 

지도자 복이 지지리도 없던 박복한 민족의 딸로 태어난 나는 노자의 저 말에 울고야 말았다. 저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노자는 성인이라 했다. 저게 바로 노자의 ‘성인정치’다. 《도덕경》 5천글자의 핵심이고 노자사상의 전부다. 저런 말을 가지고 도를 닦아 신선이 되네, 기 수련을 어떻게 하네 하면서 헛지랄을 해왔으니 노자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나?

 

일반적인 노자 해설서에는 저 소리가 뭐라고 되어 있는 줄 알아? ‘마음을 깨끗이 닦아 흠집을 없앤다’로 되어 있다. 완전 초등학생용 도덕교과서지? 불세출의 대학자 도올은 뭐라고 해놨겠어? 주인공을 빼먹으면 주인공 섭해서 삐진다. 한번 보자.

 

여기 현람(玄覽)이란 우주적 거울을 말하는데 그것은 곧 우리의 ‘마음’을 뜻할 것이다. 帛書甲本에는 覽이 ‘藍’으로 되어 있고, 乙本에는 ‘監’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모두 자형으로 보아, 그릇에 물을 떠놓고 자기를 비추어보는 형태의 甲骨文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자》《天道》에 ‘水靜猶明 而況聖人之心靜平! 天地之鑑也 萬物之鏡也’ (물의 고요함이 이와 같이 맑게 비추거늘, 하물며 성인의 마음의 고요함이랴! 그것은 천지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귀감이요, 만물의 거울이다)라 한 것이 바로 《노자》의 구절과 상통한다 할 것이다. ‘滌除’란 우리가 세척(洗滌)이란 말을 쓰듯이, 내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하여 티끌 하나도 없이 하여(無疵) 만물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노자에게 이러한 《대승기신론》등지에서 말하는 佛敎의 心眞如相的 통찰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아무 티끌도 없는 마음의 거울, 그래서 끊임없이 生滅하는 常道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 言說相을 떠나고 名字相을 떠나고 心錄相을 떠난 如如의 세계! 그것을 노자는 이미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와 21세기》102쪽

 

설파하고 있는 거 좋아하네. 호나상적인 개다리 춤이라 해라. 꼴에 ‘우주적’인 거는 무지 좋아하지. ‘우주적 거울’이라. 나중에는 ‘우주적인 강아지’도 나오겠다. 뭐라고?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심진여상적통찰’이라고? 심진여상적이란 게 뭐야? 그거 설명할 줄 알면 내가 도올을 다시 보지. 대승기신론을 뭘 안다고 들먹이냐 들먹이길. 말하는 꼬락서니 보면 첨부터 끝가지 지도 모르고 남도 모를 소리뿐이면서.

 

우리 도올이 보면 하여간에 놀라운 애지? ‘섬돌을 닦아주는 일’에 ‘대승기신론’이 왜 나오며, ‘심진여상적(心眞如相的) 통찰’이 왜 나오느냐 말이다. ‘백성을 그만큼 아끼고 사랑하라’는 말에 ‘심연상을 떠난 여여의 세계’가 뭔 소리야? 얘는 하버드대학 동문서답과 나왔을 거야. 지 고대 다닐 때 횡설수설과가 있었나 모르겠다. ‘척제(滌除)’를 못 읽어서 ‘세척(洗滌)’하고 같은 말이라 하는 수준으로 무슨 노자야? 안 그러냐?

 

愛民治國 能無知呼
애민치국 능무지호

 

풀고 자시고 할 것도 없네. 말은 쉬운데 문제는, 뭐 마음을 닦고 거울을 들여다보고 해 쌓다가 갑자기 이런 소리가 나오니까 도올은 그만 정신이 혼란해지는 거다. 애민치국이 여기서 왜 나오느냐 말이다. 왜 나오기는, 이 장이 치국평천하의 성인치도를 설명하는 장이니까 나오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지(知)에 의지하지 않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하는 소리다.

 

앞에서 노자가 ‘불상현(不尙賢)하라’고 했던 말을 생각하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아는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마라’는 주문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다스리라는 소리겠니? 오직 진실된 마음으로 다스리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리 개판인 이유가 바로 똑똑하고 잘난 대통령이 진실된 마음이 아니라 ‘지(知)’만 믿고 대갈박을 굴려서 그렇다. 진심은 찾아볼 수가 없고 오로지 그때 그때 땜빵이나 하려고 임기응변의 술책과 권모술수로 헤쳐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우 아가리 하나 벗어나면 늑대 아가리 앞이고 그거 겨우 벗어나면 호랑이 아가리다.

 

대통령 주위에 있는 놈들도 하나같이 마음을 똑바로 쓰는 놈이 없고 전부 다 잔대가리 굴리는 놈들뿐이야. 그런 대가리는 어찌 그리도 영악하게 잘 돌아가는지, 보는 내가 탄복을 할 정도야. 지(知)로 다스리니까 그런 거다.

 

도올이 학문을 한다고 하면서 재주부리는 것도 다 지(知)에만 의존한 공부라서 그렇다. 지(知)를 붙들고 있으니까 마음이 까막눈이 되는 거야. 좋지도 못한 대갈빡을 천재적이라고 야무지게 착각하니까 그런 거다. 그런 천재적인 머리로 이 문장을 푸니까 ‘능무지호(能無知呼)’가 ‘능히 무지할 수 있는가?’라고 나오는 거야. 웃지도 말자. 이런 거 가지고 웃으면 나중에는 감당이 안 돼. 다음 구절 함 볼까?

 

天門開闔 能無雌乎
천문개합 능무자호

 

아이고, 도올이 좋아하는 말 또 나왔네. ‘문(門)’이다 문 나왔다. 문만 나오면 도올이 한테서 나오는 소리는 딱 정해져 있지. ‘암컷의 거시기’ 거기다가 이번에는 ‘열고 닫는다(開闔)’는 말도 있고 거기다 ‘자(雌)’자까지 나왔네. ‘자(雌)’가 뭐야? ‘암컷’이잖아? 문이 나오고 그 문이 열리고 닫히고 암컷이 나왔으니 이거는 볼 것도 없이 ‘암컷의 거시기’다. 도올이 전공과목이니 이거는 맞겠지 하고 믿어줘야 되나? 이번에는 ‘암컷의 거시기’가 틀림없나?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니?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번에도 아니다. ‘암컷의 거시기’는 도올을 도와주는 법이 없다. 정말로 원망스러운 암컷의 거시기지.

 

나를 보고 어떤 사람은 할아버지라 하고 어떤 사람은 ‘천리안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도 하는데 할아버지건 전설이건 그런 건 상관없다. 그러나 여기엔 쫌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
그게 뭐냐면 바로 사람들이 맹종하는 권위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말이 맞느냐 아니냐’가 아니고 ‘그 사람의 말을 믿을 만한 권위가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하는 거야. 내가 노자에 대한 글을 쓰니까 내가 그런 글을 맞게 쓸 만한 사람인가를 고민하고 자빠지는 거야. 유학을 다녀왔는지, 박사 학위는 있는지, 다른 저명한 저서가 있는지. 교순지… 이런 천하에 쓰잘데기 없는 권위를 찾으려고 눈을 두리번거리는 맹꽁이들이 있는 거다. 이건 비단 누구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고 나라 전체의 심각한 병이야.

 

나는 지금까지 내가 어느 학교를 나왔네, 뭐를 했네 그런 거 떠들어 본 적이 없어. 그리고 내가 앞서 출판했던 책에서도 일절 ‘약력’ 같은 것을 넣지 않았어. 내가 쓴 그 책이 바로 나의 약력이고 나의 경력이지 그 외의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 물론 사실을 말하면 내가 명문 고려대학교라도 나왔으면 자랑스럽게 넣었을 거고 하버드를 다녔으면 책 제목보다 더 크게 ‘하버드 유학 다녀왔음’하고 넣었겠지. 박사학위가 있으면 아예 학위 증명서로 표지를 디자인 했을 거야. 하지만 내가 뭐 내놓을 만한 가방끈이 있어야지.

 

일전에 TV ‘PD수첩’인가 뭐 그런 거를 봤어. ‘실물 경제’에 관한 책을 써서 돈도 벌고 이름도 날린 어떤 머슴애가 학력하고 경력을 날조했다가 들켜서 그만 매장을 당하는 꼬락서니가 나오더라. 근데 웃기는 게 뭐냐면 미국의 유명 대학 대학원을 나온 경제학 박사 아무개일 때는 아무도 그 사람의 책을 비판하지 못하다가 막상 정체가 드러나고 나니까 그때서야 ‘그 책은 사실 상식적인 수준으로 아무나 쓸 수 있는 정도고 어쩌고’ 지랄육갑을 떠는 놈들이 나온다는 거야. 학력을 속인 그놈보다 나중에 뒷북치고 나오는 놈들이 더 형편없는 놈들이야. 이게 대한민국이다. 실력보다 학력에 뻑 가고 능력보다 간판에 고개 숙이는 놈들이 너무 많은 거야. 그놈이 뭐 사람이 나빠서 그랬겠어? 그런 경력이라도 안붙이고 책을 냈어봐. 아무리 세계 경제를 살릴 만한 책이라도 서점 창고에서 먼지나 뒤집어 쓸 거야. 어찌 도올의 명저 《노자와 21세기》처럼 초초초 베스트셀러가 되겄어?

 

‘저 말이 맞나 안 맞나’가 아이고 저 말을 하는 사람이 어느 학교를 나왔나? 뭐 하는 사람인가? 그거나 신경 쓰고 자빠지니까 나라가 이 모양이다. ‘노자’를 배우는 건 급하지 않다. 도올 지가 제 아무리 대한민국 사람 전부가 인정하는 동양학의 대가고 제 아무리 세계에서 젤로 좋다는 하바드 대학을 나온 박사라 해도 그 말이 틀렸으면 주저 없이 망설이지 않고 틀렸다고 말해야 한다, 나처럼.

 

지 나이가 아무리 환갑에 가깝고 그 권위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학문에 나이와 권위는 쥐뿔도 아닌 거다. 이건 말이지 도돌이 옛날에 지 입으로 한 얘기가 있어. 지 젊고 나이 든 노털 교수들이 짱짱하게 버티고 있을 때 치받은 말이 있어. 내가 이 참에 뒤져서 원문을 공개할 생각인데, 말은 맞는 말이야. 학문은 ‘맞느냐 틀리느냐’이고 ‘누가 과연 옳으냐’이다. 어느 날 내가 짠하고 졸업장하고 학교 성적표 들이밀면 그때서야 끔뻑할래? 그건 학문적인 납득도 아니고 인간적인 매료도 아니야. 그저 간판에 절하는 짓이고, 계급장에 경례 붙이는 거고 껍데기에 끔뻑 죽는 쪼다 짓이야. 제발 이 나라 사람들 용기를 갖기 바란다. 조작된 권위에 맹종하지 마라. ‘세상 사람들이 다 엎드려 맹종하는 권위가 사실은 꾸며진 권위이니 이는 불선이니라.’ 노자의 말씀이다. 말이 난 김에 내가 옛날 얘기 하나 해줄게.

 

러일 전쟁 때 러시아군의 여순 요새를 공격한 게다군의 대장이 노기마레츠케란 놈이다. 훗날 왜넘들한테 군신으로 추앙 받은 넘이다. 이 넘이 만주로 가는데 왜넘 총사령부에서 요새공략전을 염두에 두고 당시 왜넘 군바리 중에서 포병의 전문가라 할 만한 놈들은 죄다 뽑아서 노기 밑에 붙여줬어. 당시 노기의 일본 제3군 사령부는 일본 포병의 간판스타들이 전부 다 모였어. 이 전문가 중의 전문가라 하는 놈들이 온갖 전문적인 지식을 총동원해서 전문적인 포병전을 펼쳤지. 결과가 어땠을 것 같아? 6개월에 10만 명이 넘는 왜넘들 시체가 여순 요새를 뒤덮고도 함락을 못 시켰어.

 

이걸 나중에 해낸 놈이 누군 줄 알아? 고다마 겐타로라는 넘이야. 이 넘은 노기의 친구로 만주에 있는 일본군 총사령부의 참모장으로 있던 넘인데 이넘은 포병의 ‘포’자도 모르는 넘이야. 이넘이 다급해서 여순에 나타나가지고는 노기의 지휘권을 뺏다시피 해서 지휘를 하게 돼. 작전회의를 하는데 전문가 포병 장교들이 뻑 하면 ‘그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기술적으로 그건 불가능하고, 그건 시간이 부족해서 안 되고 전문가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건 말이 안 되는 작전이올시다’하고 사사건건 지랄육갑을 떤 거야. 그러니까 고다마가 이랬다 하더라. ‘야 이넘들아. 골 때리는 소리 고만 하고 시키는 대로나 해!’ 그래가 어찌 됐겠냐? 6개월 동안 10만명이 뒈지고도 끝이 안 났던 전투가 단 반나절 만에 끝나버린 거야.

 

전문가라는 인간들은 자주 웃기는 소리들을 한다. 그걸 맹종하면 안 되는 거다. 포병의 전문가라는 권위에 맹종했던 노기는 무능의 표본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그넘만큼 무능한 장군은 찾아보기 힘들다. 나중에 메이지가 뒈지고 나서 뒤따라 자살한 바람에 왜넘들이 군신이니 꼴값이니 떠받들고 자빠지고 있는 거지만.

 

전문가다, 교수다, 박사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맞느냐’가 중요한 거야. 이게 바로 실사구시야. 물론 나는 진짜 전문가를 존경하고 전문가야말로 소중한 사회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단 전문가니까, 전문가의 말이니까 하는 선입관에 의한 맹종은 위험하다는 거다. 전문가도 종종 틀리니까. 그리고 그 틀리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일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전문가가 틀리면 바로 잡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했더라. 맞다. ‘천문개합(天門開闔)’ 하다가 말았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힌다’는 소리네. 그런데 우리 도올은 하늘을 빼먹고 문이 열리고 닫힌다고 하니까 암컷의 거시기가 열리고 닫히는 것만 생각이 나는가봐. 그게 뭐가 보기에 아름다운 모습이겠나? 나는 얘가 그런 것만 떠올리는 게 참 신기해. 그게 그렇게 좋단 말이야? 도올이 뭐라고 했는가 같이 보면서 얘기할까?

 

天門開闔 能無雌乎 : 帛書 乙本에는 ‘天門開闔, 能爲雌乎?’로 되어 있다. 帛書가 정확하다 ‘無雌’는 ‘爲雌’의 誤寫이다. 王弼注에도 ‘雌雄而不倡, 因而不爲, 言天門開闔能爲雌乎, 則物自賓 處自安矣.’(암컷이란 본시 부르는 데 응할 뿐 자기가 주창하지 아니하고, 무엇에 원인이 되어줄 뿐 자기가 능동적으로 하지 않는다. 천문이 열렸다 닫혔다 함에 능히 암컷이 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한 것은, 곧 만물이 스스로 질서 지우며, 그 처함이 스스로 편안해짐을 말한 것이다.)로 되어 있다. 암컷(雌)은 無爲의 덕성의 상징이다.
《노자와 21세기》하권 103쪽

 

얘는 참 번역 쉽게 하지. 해석이 잘 안되면 그냥 원문 글자를 내리 바꿔버린다. 그렇게 하면 세상에 번역 못 할 사람이 어딨냐? 여러 개 원본 중에 지가 찍기라도 할 수 있는 쪽을 진짜라고 우기는 거야. 이런 학문이 어딨나? 안 그러나? 이런 거는 학문이 아니고 ‘개똥 철학’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노자를 ‘원조 페미니스트’로 둔갑시켰다. 뭐라? 암컷이 무위의 덕성의 상징이라? 노자가 무위의 덕성으로 본 건 여자가 아니다. 그건 좀 있다가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노자 정치사상의 핵심이랄 수 있는 제10장에 걸맞게 도올이 보여주는 개그의 최고 경지를 보도록 하자.

 

제10장은 노자정치사상의 핵심이다. 그건 또 어찌 알았는지 도올은 그에 걸맞게 여기서 개그의 최고 경지를 선보이고야 만다. 도올이 한 소리를 소개하기 전에 소개자로서 미리 독자들에게 주의를 해 두어야 할 책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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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天門이란 추상적인 말이 아니다. 이것은 여체의 부분을 말한 것이다. ‘하늘의 문’,그것은 여체에 있어서의 만물의 생성의 문이다. 그것은 곧 여자의 성기를 의미한다. 門이라는 표현과 성기의 이미지와의 상응성은 리얼하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天門開闔’이란 바로 고대 여성들에게서 아주 명료하게 나타났던 에스트루스 성징을 하는 것이다. 이 시기는 배란기며, 자궁에 있어서의 증식기(에스트로겐 지배기)와 분비기(프로게스테론 지배기)가 엇갈리는 때인 것이다. 이 때는 외음순(labiamajora and minora)이 도톰해지면서 핑크빛이 더 돌고, 검으티티한 색깔이 나면서 분비물이 많아지고 사향과 같은 냄새의 발동이 심해진다. 그리고 음순과 클리토리스가 빽빽해지고 뿌듯해지면서 성욕이 발동하고 입술과 입술 사이가 더 벌어지면서 구멍이 열리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때가 소위 말하는 天門이 開하는 시기인 것이다. 멘스트루알 사이클(menstrual 뇨칟,월경 주기)에 있어서 그 반대되는 시기가 闔의 시기(황체의 기능이 떨어지는 시기)가 될 것이다. 여자의 몸이 天門이 개합(열렸다, 닫혔다)하는 것이 곧 生成의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달의 기울고 차는 모습, 계절의 변화, 《太一生水》말대로 조습한열의 변화가 모두 生成의 시간이요 리듬인 것이다. 그러한 리듬의 흐름 속에서 지배적이고 조작적인 남성적인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적이며 순응적인 여성적 가치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고 노자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노자와 21세기》하권 104쪽 105쪽

 

노자 해설이 아니라 완전 《킨제이 보고서》지? 도올이 같은 안다이 박사가 와 저기서 ‘G SPOT' 얘기는 뺐는가 모르겠어. 문만 나오면 여성의 성기를 들고 나와. 이 고매하고도 심오한 정치사상을 논하는 자리에 음순과 클리토리스가 웬 말이야, 맨스트루알 사이클이 왜 나오나?

 

노자 할아방이 점잖지 못하다 해서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세 가지다. 깡패, 칼잡이, 여자가 그거다. 그런데 어째서 노상 꺼내는 이야기가 깡패, 칼잡이 아니면 여자 거시기 소리뿐이야? 얘는 암만 봐도 항문기에 고착된 유치한 정신 상태가 ‘선천성 구제불능성 여자 거시기 집착증’으로 증상이 나타나는 케이스인 거야. 이 대목에서 도올은 아마 ‘짜식들, 어떠냐? 내가 동양학만 하는 줄 알았겠지만 여자에 대해서도 박사고, 산부인과도 전공이야’ 하고 속으로 우쭐우쭐했을 거야. 월경 주기를 영어로 맨스트루얼 사이클이라 하면 그게 유식한 건가? 에스트로겐이 어쩌고 프로게스테론이 어쩐다고? 꼴에 클리토리스는 알아서.

 

할아방은 《도덕경》에서 천문(天門)이건, 현문(玄門)이건, 지문(地門)이건, 사립문이건 ‘문(門)’이라는 말을 쓸 때 ‘여자의 거시기’ 생각은 눈곱만큼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여기서 ‘천문개합’이란 말이 왜 나오겠니? 앞서 했던 말을 쭈욱 읽어보면 감이 와야지. 한번 더 리플레이 해줄게.

 

왕이 치국지도를 물었어, 노자가 답하여 묻기를,
‘주공께옵서는 온 나라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이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사옵니까?

왕이 다시 묻기를,
‘그런 다음에는 어찌해야 하느뇨?’ 하니 노자가 다시 물어 가로되,
‘오로지 백성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만들 수 있겠사옵니까?’

왕이 다시 묻기를,
‘그리한 다음에는 무엇이뇨?’ 하니,
‘백성들 집의 섬돌을 주공께서 허리를 굽혀 손수 닦으시고 어두운 곳을 살펴, 아픈 곳이 없도록 할 수 있겠나이까?’

하니 왕이 다시 답하여,
‘그렇게 하면 성인의 치도라 하겠느뇨?’ 그러자 노자가 말하기를,
‘그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성인의 도를 행하는 것이옵니다.’

이제 감이 잡히냐? ‘천문개합’이란 바로 ‘성인지도’다. 강증산이 늘 말했던 ‘천지공사(天地公事)’라는 것이 바로 성인의 다스림이다.

 

내가 《도덕경》을 읽으면서 노자한테 참 반했던 것이 그 문학적 표현이다. 얼마나 기가 막히냐? ‘척제현람’이나 ‘천문개합’ 같은 소리는 문학적으로 볼 때도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이냐? 이 말을 듣고 음순에 클리토리스를 떠올리는 양아치가 어찌 노자의 사상을 이해한다는 말이야?

 

그럼 그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말 ‘능무자호(能無雌乎)’는 뭐겠어? 이 말의 의미를 알면 우리는 노자한테 다시 한번 까무러친다. 인간 세상의 본질과 정치라는 것의 이면의 이면까지 꿰뚫어보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소리다. 이런 것이야말로 대 사상가의 통찰력이고 그런 정신세계를 엿볼 때 우리가 놀라고 감탄해야 할 대목이 이런 곳이야.

 

과연 노자는 그와 같은 성인에 의한 이상적 통치가 가능하다고 본 것일까? 나는 그랬으리라고 본다. 중국넘들의 정치적 이상은 요순이다. 요와 순이 그네들이 그리는 이상적 정치지도자의 모델이다. 노자가 말하는 성인에 가까운 인물이 존재할 수 있느냐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그보다 훨씬 윗길이라 할 만한 인물들도 그리 귀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인간은 한편으로는 조잡한 동물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위대한 생명체이다.

 

석가모니를 보라. 인간이 그럴 수 있겠느냐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아니 한계를 훨 뛰어 넘었다. 노자도 그러하지만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사실 찾자면 셀 수도 없다. 그런 분들을 볼 때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인간사회가 이 모양이냐? 요순의 태평성대가 왜 무너졌느냐? 왜 성인이 성인치도를 행하지 못하게 되느냐? 성자에 가까운 왕이 있어서 노자가 묻는 말에 ‘다 그리할 수 있겠노라. 또 그리 하겠노라’고 대답하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한다 하여도 그게 다가 아니다.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가 아직도 남아 있다. 물론 이 문제는 인류 탄생 이래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 인류가 사라질 때까지 해결될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문제다. 그게 뭘까? 딱 짚이는 거 없어? 머리 속에서 팍 하고 오는 뭐가 없냐고? 그게 뭐냐? 바로 여자다.

 

협의로 말하면 남자의 배필인 마누라 문제다. 제 아무리 성인도 마누라 잘못 만나면 선정이고 치국이고 평천하고 간에 엿 돼버린다. 요순까지 쳐다볼 일도 없어. 소크라테스 함 봐봐. 정관의치라 했던 당나라의 전성기가 양귀비에 무너지고 그 찬란했던 백제가 의자왕의 탕음에 쓰러지고 그 총명했던 공민왕이 노국공주에 혼을 뺏겨 5백 년 고려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어. 은나라가 달기 때문에 망했고 주나라가 포사의 웃음에 망조가 들었어. 요순의 태평성대가 어이타가 무너졌냐? 천하의 덕이 있는 자(성인)을 모셔서 선위하던 풍습이 지 자식새끼한테 대물림하게 되면서 옛 이야기가 돼버렸어.

 

세습이란 게 남자들이 만든 게 아니야. 그 어미가 지 아들한테 물려주려고 지랄발광을 하니까 애비가 그걸 이길 수가 없는 거야. 성인정치 좋아하네. 태평성대? 그런 것 엿이나 먹으라고 그래. 나는 그런 건 잘 모르고 어쨌든 내 배에서 낳은 내 새끼가 물려받는 꼴을 봐야 내가 눈을 감는단 말이다. 내 아들넘을 놔두고 뭐라? 성인을 모셔와? 그놈의 성인이란 것들 내가 씨를 말려버린 테니 함 데리고 와봐. 이게 여자다. 아니 여자가 아니라 어미다.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이 왜 일어났고, 연산군이 어쩌다가 미치광이가 됐는지, 영조가 지 아들넘을 뒤주에 처넣어 죽여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봐.

 

정치를 남자가 하고 역사를 남자가 만든 줄 아나? 천만에 말씀이고 만만의 콩떡이야. 여자가 용서해주고 너그럽게 봐줄 때 지가 성인이고 정치가지 누구 맘대로 성인 행세를 한단 말이야? 여자 허락 안 받고 성인할 놈 여기 함 나와봐. 그게 남잔 거야.

 

마누라 이기는 남자는 없어. 여자한테는 이길지 몰라도 마누라는 못 이겨. 마누라는 이길지 몰라도 지 새끼들 엄마는 절대로 못 이겨. 그걸 잘 알기 때문에 노자가 ‘능무자호(能無雌乎)’ 하고 처량한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성인의 도를 행하는데 과연 ‘배필 없이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거야. 일단 왕한테 마누라가 있고 그 마누라가 끼여들면 성인이고 나발이고 만사 꽝 된다는 것을 노자는 아는 거야. 그래서 ‘배필 없이 할 수 있겠어요?’하고 걱정스레 묻는 거다.

 

그런 거 보면 부처님은 참 머리가 좋다. 제일 먼저 마누라부터 떼버리고 산으로 토꼈으니까 말이다. 암, 여자를 옆에 끼고 득도나 수행이 가당키나 한 소리야? 그래서 부처님이 여자 거시기는 뱀의 아가리보다 무서우니 제발 가까이 가지 마라. 그 안에다 물건 처박는 순간 너는 수행이고 나발이고 끝이라는 걸 명심해라. 당부에 당부를 하신 거다. 독신 출가가 다 이유가 있다.

 

能無雌乎
능무자호

 

‘주공이시여,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것과 같이 중요한 일이라 할진대 그것을 위해 배필을 두지 않을 수도 있겠사옵니까?’ 하고 물으니까 왕이 뭐라고 했겠어? 더 말하기도 싫었겠지. ‘원 별 또라이 같은 자식 다 보겄네. 내가 여자도 없이 살 바에는 차라리 왕을 안 하고 말겠다, 자슥아’ 하는 생각이 든 거야. 저런 턱도 없는 나발을 불다가 노자가 어찌 됐겠어? 삭탈관직, 봉고파직 당하고 쫓겨난 거야. 내가 왕이라도 쫓아내버리지. 저런 헛소리 나발을 부는 영감탱이를 뭐 하러 옆에 놔두겠어? 안 그래? 하지만 노자는 어쩔 수가 없었다. 왕의 마누라가 왕의 마누라로만 끝나면 문제 삼지 않았을 거야. 여우 같은 게 옆에 붙어서 수작을 해도 어찌해나가겠지. 하지만 문제는 그게 왕의 아들의 어미라는 데 있다. 세습에 대한 집착과 욕구는 어미의 그것이 아비의 그것보다 훨씬 강하다. 그리고 성인정치와 세습제는 공존할 수 없는 문제다. 노자의 고민이 그것에 있었다.

 

그래서 노자의 결론이 뭐였겠어? ‘제길 이게 인간들 세상에서는 안 되는 거다. 될 수가 없는 일이야.’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고 그만 산에 들어가 신선이 돼버렸다. 마음 잘 먹었지? 오밤중에 성문 지키는 놈한테 여권 없이 불법 통과하는 뇌물 대신 써주고 토낀 게 바로 《도덕경》이다.

 

곤충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어떻게 하는지가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는데 근자에 페로몬이라는 것이 발견되면서 그 비밀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한 마리가 적에게 공격을 당하면 같은 순간 수만 마리의 동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 페로몬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경 전달 물질과 마찬가지고, 개개의 생명체로 보이는 곤충의 집단은 실제로 하나의 육신을 가진 거대 생명체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일부의 생물학자들은 갖고 있다.

 

나도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즉, 수천 수만 마리의 개미떼는 사실 하나의 생명체이고 낱낱의 개미는 그 생명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세포 단위와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유기적으로 묶어서 하나의 생명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해주는 것이 페로몬이라는 신경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곤충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냐?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수십억 인간은 실제로 하나의 유기체이며 이들간의 보이지 않는 영적인 또는 무의식적인 교감이 이루어진다고 볼 만한 여러 정황이 존재한다. 인간의 문명과 문화가 발달해 온 과정을 더듬어보면 수천,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대륙의 인간들 간에 마치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개념과 비슷한 단계의 문명이 건설되고 있었음은 우연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오늘날에도 놀랄 만큼 유사한 아이디어에 기반한 동일한 연구가 세계의 여러 곳에서 각기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예가 많다. 물론 각자는 서로 어떠한 의견 교환이나 또는 자기 외의 사람이 같은 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말이다. 한 인간의 진화는 전체 인류의 진화를 선도하고 촉발하는 원인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처 한 사람이 나오면 억만 중생이 그 가피를 입는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한다.

 

왜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노자를 읽다보면 부처의 말씀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감을 받기 때문이다. 당시의 인도와 중국은 지구와 달나라만큼 멀었다. 히말라야 산맥과 힌두쿠시가 가로막은 두 대륙이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인종도 달랐다. 즉각적인 학문적 교류라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시대다. 불교라는 것이 중국에 알려지고 그것이 이해되는 데 수세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노자와 부처는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차이가 나봐야 불과 100년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세계관과 지향점이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그 가르침이란 것이 오십보백보다. 팔만대장경을 5천 글자로 압축하면 《도덕경》이고 그것을 다시 290자 정도로 팍 줄여버리면 《반야심경》이 된다. 이것을 세 글자로 줄이면 ‘깨달음’이고 두 글자로 만들면 ‘성불’이고 한 글자로 바꾸면 ‘도’다.

 

그런데 이 두 성인이 약속이나 한 듯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여자가 옆에 있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부처의 출가 권유나 노자의 ‘외기신’이 다른 이유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다. 바로 ‘여자가 무서워서 토껴야 되겠다’는 거지 딴 게 아니다. 물론 무서운 게 여자 자체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실 가는 데 바늘 따라온다고 여자가 옆에 있으면 인간사의 모든 문제가 따라온다. 먹여 살리는 문제, 줄줄이 생기는 자식들, 가족간의 갈등, 특히 도망가거나 피할 길 없는 잔소리와 바가지. 거기에 치이다보면 성인이고 나발이고 수행이고 자시고 간에 그 전에 진이 빠져서 끝난다.

 

그러나 그게 여자 잘못이냐? 그렇다면 듣는 여자 섭하지. 여자 입장에서 보면 도를 닦네, 수행을 합네, 해탈을 합네, 현빈에를 갑네 하는 소리는 다 엿 같은 소리다. 배부른 넘들 지랄육갑 떠는 짓이지 그게 무슨 소용이야? 안 그래?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한 놈이라도 더 퍼질러 낳는 거고, 낳은 새끼들 배 안 곯고 잘 키우는 거고, 오늘 땟거리 안 떨어지게 하는 거지 뭔 놈의 말라비틀어진 도야? 만약에 여자들까지 말이야 머슴애들 고 지랄 떠는 데 휩쓸려서 천지분간도 못 하고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앉았어봐, 세상 벌써 끝났어. 그나마 세상이 이 정도까지 온 게 다 여자들 덕분인 거지. 너희가 무신 지랄염병을 떨어도 우리는 낳고 기르고 해왔다는 얘기야.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어 놓고 남자를 보고 마음을 놓은 게 아니야. 여자들이 있으니까 어찌됐건 이것들이 어어는 가겠지, 하고 돌아누워서 낮잠을 자는 거야. 남자들만 있었어봐. 하느님이 불안해서 잠을 못 자. 그렇게 생겨 먹은 거다. 그걸 아니까 부처님이 그토록 여자들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으려 했던 거다. 부처의 이모, 고모들이 따라다니면서 울고 불고 난리를 쳐도 비구니라는 것을 인정을 안 하려 했다. 물론 나중에는 못 이겨서 허락하기는 했지만 여자의 본성과 그리고 모성의 무서움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여튼 두 할아방한테 여자는 거추장스러운 방해물로 보인 거지. 그래서 금욕을 합네, 독신을 합네, 출가를 합네 난리육갑을 떠는 거다. 웃기지?

어쨌거나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건 남자들이 해왔고 여자들은 도올이 좋아하는 아랫문이나 열심히 열고 닫아왔다는 거다. 각자 다 지 할 일 열심히 한 거다.

 

부처나 예수나 노자나 다 하늘의 문을 열고 닫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뭘까? 여자가 없었다는 거다. 하늘의 문을 열기에는 좀 속물 같은 구석이 있지만 마호메트는 참 난 놈이다. 돈 많은 과부 꼬셔서 자식새끼 줄줄이 낳고 거기다가 처처처처첩까지 꿰차고서 그런 일을 해냈으니 말이다. 이런 넘이 잘난 넘이지. 세종대왕도 빠질 수 있나? 자식을 수십 명 만들고도 성군 소리를 들었으니 말이다.

 

해서, 부처와 노자는 성인의 길을 가는 데 두 가지를 권하고 있다. 하나는 속세간에서 벗어나는 길이요, 하나는 독신이다. 배필을 데리고는 갈 수 없는 길이요, 자식새끼들을 끌고는 못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던 거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도 색에는 눈이 멀고 자식한테는 당달봉사가 돼버린다. 도교의 도사들도 불교의 비구와 마찬가지로 독신자들이다. ‘능무자호?’에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면 도사도 비구도 될 수 없다. 너거도 도 함 닦아볼래? ‘능무자호?’

 

이 장을 읽으면서 나는 노자의 가슴 저리는 애민지심에 울었고, 한편으로는 노자가 불쌍해서 울었다. 하긴 불쌍한 할아방이 어디 노자뿐인가? 공자도 그러했고, 맹자도 그랬고, 달마도 그러했고, 예수도 마찬가지였어.

 

공자가 큰 뜻을 품고 천하를 주유하며 직장을 얻으러 다닐 때 이 공자가 재주는 뛰어난데 요령이 없어서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다. 위나라 영공이 공자의 학식과 재주에 대해 소문을 듣고 불렀어. 공자는 혹시나 한자리 얻어걸릴까 기대를 갖고 면접을 보러 갔겠지. 면접관인 위영공이 구두로 문제를 출제했는데 그게 진법(陣法)이었던 거다.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진법이 뭐뇨?’ 하고 물으니 우리 불쌍한 공쯔 할아방 두꺼비처럼 눈만 끔뻑끔뻑 하다가 쫓겨나버렸어. 나중에 추천했던 사람이 무색해서 공자를 잡고 그랬어. ‘아니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에 두루 통달하신 분이 그까짓 진법을 대답을 못 하십니까?’ 공자 대답이 이랬다는 거야. “자고로 군자는 병(兵)을 입에 담지 않느니.” 이리 푼수들이 없어서 개나 고동이나 다 해먹는 재상 자리 하나 못 얻어서 평생을 비루먹었다는 거 아니겠어?

 

맹자도 마찬가지야. 양나라 혜왕이 맹자를 불러다가 ‘과인이 지금부터 조나라를 칠라고 하는데 좋은 계책이 있으면 함 말해봐봐.’ 이랬거든. 그러니까 맹자 할아방이 답하기를 ‘옛날에 주의 태왕께옵서는 이웃나라가 쳐들어오자 스스로 빈땅으로 물러갔나이다’ 이런거야. 이게 당최 취직할 생각이 없는 넘들이지? 당근 노자도 못 얻고 쫓겨났지.

 

공맹 두 할아방의 청승맞은 꼬락서니를 한탄하여 훗날에 사마천이 적기를 “이윤은 솥을 지는 요리사로서 탕왕을 격려하여 왕도를 이루게 하였고, 백리해(百里奚)는 수레 밑에서 소를 먹이다가 목공(穆公)을 도와 패업을 이루게 하였다. 먼저 상대의 비위를 맞추다가 나중에 그들을 대도로 인도하였다.”고 답답해했어. 물론 사마천이 공자하고 맹자보다 이윤이나 백리해가 윗길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세상에 영합하지 않고 대도를 걸은 할아방들을 칭송하는 글들이 사기의 곳곳에 보인다. 달마도 그랬어. 인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다음 양(梁)나라 무제(武帝)를 만난 자리에서 불법을 이해시키는 데 실패하고 소림사로 돌아가 십 년간 묵거에 들어갔어. 할아방들의 고상무비한 설이 세상에 먹히지 않았던 거야. ‘능무자호?’가 ‘계집은 '다다익선!’을 부르짖는 현세의 왕들한테 먹힐 리가 없지.

 

하지만 할아방들이 취직에 번번히 실패하고 백수로 살았다 하여 자기 신세를 한탄했겠어? 대저 천하의 일이라는 것이 아침에 잠깐 풀앞에 맺혔다가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것이니, 천지의 장구함을 보는 성인군자가 어찌 발 밑의 이슬을 보겠나.

 

노자 할아방인들 저런 소리가 먹힐 거라고 생각하고 한 소리는 아닐거야. 하지만 왕이 점점 심드렁해지는 것을 억지로 참고 ‘그래 마누라도 없이 살아라 이 말이지. 그 담은 뭐냐?’ 하고 죄 없는 지 코를 쑤시면서 물으니까. 노자는 눈치도 없이 말하기를 ‘생지축지(生之畜之)’라 했어. 이 말이 무슨 소리겠어? 글자 대가리 수 맞추려고 들어간 앞뒤의 지(之)자를 빼버리면 생축(生畜)이다. 많이 보던 단어 같지 않아? 뒤집으면 바로 ‘축생’이다.

 

중생 바로 밑이 축생이고 그 아래가 아귀생이다. 업이 많아서 사람으로 못 태어난 서글픈 생명이 바로 짐승이고 그것을 축생이라 한다. 생지축지(生之畜之)의 축(畜)은 축양(畜養)이란 뜻으로 잘 양육한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생지축(生之畜)은 ‘짐승으로 살아라’라는 소리다. 소나 개돼지처럼 살 수 있겠나이까? 하는 소리다. 이런 소리야말로 노자 아니면 할 수 없는 소리다.

 

인간이 무지무욕(無知無欲)하고, 허기심(虛其心)하고 약기지(弱其志)하면서 오로지 실기복(實其服)하고 강기골(强其骨)하기만 하면 그게 뭐겠나? 바라 ‘짐승’이다. 노자 얘기는 꾸미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글자 그대로 ‘짐승이 돼라’는 소리다. 이런 대목을 보면 영악하게 지혜가 발달하고 욕심덩어리인 인간이란 것에 대해 혐오를 느끼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랬을 수도 있다. 나는 노자의 심정을 이해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한 게 루소지? 만약 루소가 2000년 전에 중국에 노자란 할아방이 있어서 ‘짐승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저 말을 못 했을 거다. 루소 같은 근대적 교양인은 결코 노자처럼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소리를 차마 못 하는 단점이 있다. 내가 노자를 좋아하는 이유가 글을 쓸 때 불필요한 장식이나 멋을 부리지 않고 둘러대거나 은유하지 않고 꼭 나처럼 있는 그대로 내질러 버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노자의 글을 읽을 때 사람이 약간의 쇼크를 받을 수 있다. 백성의 마음을 비우게 하고 뜻을 약하게 만들어라. 등 따시고 배나 부르게 해라. 이런 소리들이 전부 뭐야? 짐승으로 되돌리라는 얘기다.

 

도덕이니 인이니 법이니 하는 것을 인간들에게 가르치기보다 그런 것을 알지도 못하는 상태라야 한다는 얘기야. 그게 바로 영아(嬰兒)이고 축생(畜生)이야. 능영아호(能嬰兒乎)? 능생축호(能生畜乎)?라고 노자는 묻는다. 능히 어린아이가 되고 짐승이 될 수 있겠느냐?

 

혼자 떠들다보니 주인공을 잊어버렸다. 우리의 주인공이 뭐라고 하데? ‘암컷이야말로 무위의 덕성의 상징’이라고 헛소리 나발을 불었지? 노자가 무위의 덕성의 상징으로 본 건 암컷이 아니라 어린아이요 짐승이다. 암컷은 오히려 유위로 칠갑을 한 욕심덩어리니 어쨌든 멀리 도망가라고 권하는 대상이다. 이쯤에서 우리 같이 주인공 말씀 함 들어볼까?

 

專氣致柔, 能嬰兒乎 : 이것은 우리나라의 모든 단전호흡이나 국선도(國仙道), 기공(氣功) 등의 원리가 다 여기 이 《노자》에게서 나온 것임을 말해주는 구절이다. ‘專氣’란 ‘氣를 오로지 한다’라는 뜻으로 내 몸의 기를 專一하게 집중시키는 것을 말한다. 기를 집중시킨다는 것은 단전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운영이 氣 를 깨끗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자와 21세기》하권 101쪽 상단

 

완전히 지 혼자 달밤에 체조를 하고 자빠지지? 내가 앞에서 도올은 기에 대해서도 쥐뿔도 모른다고 말했잖아. 저 여덟 글자에서 무슨 기공의 원리가 나온단 말이야? ‘기를 오로지 하여 몸을 어린아이처럼 만든다’는 것이 기공의 원리야? 그리고 국선도가 그런 원리로 만들어졌다 말이야? ‘국선도’가 뭔지도 모르는 게 마냥 아는 척만 하는 거야.

 

국선도의 창시자는 청산(靑山)이란 사람이다. 이 양반이 뭐 하던 사람이냐? 차력사다. 국내에서 최초로 차력 시범단을 만들어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순회공연을 한 사람이다. 입으로 물통 들어올리기, 몸에 벽돌 올리고 망치로 두들겨 부수기, 마빡으로 송판에 못 박기. 이런 게 주 레퍼토리였다. 6,70년대에 공설운동장이나 초등학교 운동장 같은 데 사람들 모아놓고 약장사 하듯이 차력술을 보여준 사람이다. 칠선녀니 기발산이니 하는 애들 끌고 다니면서 무술 시범을 하다가 돈을 좀 모아서 도장을 차렸는데 초기에는 고생 억수로 했어. 나중에는 상전벽해가 무색할 만큼 성공을 했지만. 제자도 많아지고 전국 곳곳에 지부며 도장이 열렸어.

 

이 청산거사가 나발불기를 자기는 지리산인가 설악산인가 어디 들어가서 10년 수도한 끝에 드디어 금강체를 이루었다 한 거야. 불 속에 앉아 있어도 뜨겁지 않고 몸을 쇠망치로 때려도 안 아프다고 뻥을 친 거야. 아마 일본 NHK인가 그런 데도 출연해서 믿지 못할 경지를 보여주기도 했어. 그게 뻥인지 아닌지는 내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차력 무술이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하고 연결이 되는 소리야?

 

얘는 뭐든지 끌어다 붙이는 데는 능력이 있어. 맞는지 안 맞는지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지도 모르고 듣는 놈들도 모르니까 무조건 아무거나 끌고 오는 거야. 생각 없이 듣고 있으면 진짠 거 같아. 근데 쫌만 알고 들으면 이게 배꼽을 잡을 개근 거야. 도대체 어떤 놈이 저 여덟 글자를 읽고 기공의 원리를 알아낸단 말이야? 그 놈 낯짝 함 보자. 지금 금용이 영웅문 얘기하나? 아니면 이연걸이 나오는 황비홍 얘기야?

 

무협지를 보면 말이야, 주인공이 구음진경 같은 상승무공의 비전에 적힌 요상한 구결 한두 줄만 외우면 공력이 배씩 상승해서 하루아침에 일류 고수로 둔갑하는 황당한 소리들이 나오지만 도올이 무슨 재주로 저 여덟 글자를 보고 기공의 원리를 깨친단 말이야? 철학을 한다는 게 다 말장난뿐인 거야. 본 김에 조금 더 볼까?

 

매일 아침 단전호흡학원에 나가 온갖 수련을 다 해도 낮에는 더럽게 外食하고 저녁에는 酒色에 곯아버리는 상황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專氣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致柔’다. 내 몸이 뻣뻣해진다는 것(剛)은 내 몸의 삶의 부분을 죽음의 부분이 이기고 있다는 증표이다. 專氣는 오로지 내 몸이 부드러움(柔)에 이르는(致) 현상을 통해서만 증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허리가 부드럽고, 목이나 온갖 관절이 자유롭게 돌아가며, 근육이 보들보들하면서 탄력성이 있는 몸, 그것을 우리는 어린애와 같은 몸(嬰兒)이라 부르는 것이다. 노자는 묻는다. 專氣致柔하여 영아(갓난애기)와 같은 몸을 유지할 수 있는가? 조선민족이여! 늙지 말자! 항상 어린애 같은 몸을 유지하자.
《노자와 21세기》하권 101쪽 하단

 

개그도 이 정도 되면 입신의 경지지. 조선민족이 쪽팔려서 얼굴을 못들겠다. 해봐, 해봐, 하니까 진짜로 여덟 글자 구결 하나 갖고 기공수련의 원리를 만들고 앉았어. 그만 해. 참아 제발. 저 가서 혼자 놀아라. 노자 다음 말씀이나 보자.

 

이 10장의 내용을 도올이처럼 ‘기공 교본’으로 해석하고 자바진 맹꽁이들은 하나같이 애민치국과 생지축지에서 갈팡질팡 방향감각을 상실해버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를 어찌어찌 해서 몸을 어린아이처럼 만들어 불로장생하자는 소리 가운데 애민이 왜 나오고 치국이 왜 나오느냐 말이다. 그것도 괜찮다. 갑자기 생지축지가 나오니까 그냥 허겁지겁하는 거야. 지금까지 노자가 해온 소리들을 하나도 귀담아 안 들었다는 소리야. 들었어도 도올이처럼 엉뚱한 소리로 듣고 자빠졌으니까 이게 글자 그대로 ‘짐승처럼 살아라’는 소리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거야. 노자가 해 온 소리들을 꼼꼼히 읽어온 사람이면 노자가 바로 이 소리를 하려고 그렇게 너절한 소리들을 해왔구나 하는 것을 단박에 알아야 돼.

 

지금까지 노자가 해왔던 소리를 쭈욱 적어놓고 초등학교 애들한테 ‘이 글의 결론을 요약해서 10자 이내로 적어봐’ 하고 논술문제를 내면 애들은 ‘짐승이 되라는 소리네요’하고 대답할지 모른다. 노자를 알려면 모든 선입견과 편견과 지식을 버리고 노자와 벌거벗은 마음으로 마주앉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성인들이 해왔던 고상하고 우아한 구라들은 다 잊어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상태에서 노자가 하는 말은 하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노자를 알 수 없다. 얄팍한 대갈빡을 굴려서 지 멋대로 글자를 바꾸고 문장을 비틀고 뜻을 왜곡해서 구라를 풀어봐야 그건 노자가 아니고 지 생각일 뿐이다. 이 대목에 대해 왕필이 했다는 주가 소개되어 있는데 한번 보고 가자.

 

왕필은 ‘生之’에 대해서는 ‘不塞其原也’(그 근원을 막지 않는다)라는 주를 달았고, ‘畜之’에 대해서는 ‘不禁其性也’(그 본성을 억압하지 않는다)라는 주를 달았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구절이 문맥의 흐름에서 너무 돌연하게 들어와 있음으로 착간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였지만, 帛書의 발굴로 과거에 착간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구절들이 제자리에 제대로 있는 것임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生之, 畜之’는 결코 추상적으로 얼버무릴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노자의 사상을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강령이요, 《중용》과 같은 기타 유가문헌과도 연속적 관계에 있는 매우 중요한 사상을 반영하는 명구절이다. ‘生之’란 道 의 측면을 말한 것이요, ‘畜之’란 德의 측면을 말한 것이다. 道란 보편자요, 우주적 원리요, 상대적 언어개념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변화하는 현상 그 자체이다.
《노자와 21세기》106쪽~107쪽

 

치다가 손가락도 아프고 귀찮아서 그만뒀는데 이하 계속 이어지는 소리는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니까 끝까지 옮길 것도 없어. 무슨 근거로 어떤 이유로 생지가 도의 측면이고 축지가 덕의 측면이 된단 말이야? 다 지 생각이야. 차라리 착간이라고 우겨라. 그게 외려 낫다. 저 글을 쪼금 더 읽으면 이런 소리도 나온다. ‘도는 길이요, 덕은 얻음이다’ 어때? 한마디로 죽이지? 그래 놓고는 영어로 버츄가 어떻고 희랍어로 아레테가 어쩌고 하면서 영어만 갖고도 안 돼서 희랍어까지 주절거리고 나오니 도올은 참 큰 일 하고 있다. 우리나라 개그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거다. 어떤 개그맨이 개그할 때 희랍어 쓰더냐? 도올이 첨이다. 상 줘야 된다. 희랍어를 구사하는 개그맨은 아시아를 통틀어 도올 하나뿐이다.

 

노자는 인간을 세상에서 제일 못된 짐승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인간만큼 흉악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동물은 없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 그 자체이다. 속일 줄도 모르고 꾸밀 줄도 모르고 잔인하고 포악한 짓은 더 더욱 할 줄 모른다. 인간도 어쩌면 인지가 덜 발달했던 옛날에는 다른 짐승처럼 배고프면 먹고 때가 되면 짝짓기하고 날이 저물면 동굴에 들어가 잠을 잤던 그런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런 시절의 인간은 그리 악한 존재가 아니었고 모든 인간이 다 성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우리는 노자가 말하는 성인들을 만나기 어렵지는 않다. 비행기를 타고 혹은 배를 타고 조금 멀리 가는 기분은 들지만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나 자바 또는 뉴질랜드의 오지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성자들만 사는 원주민 마을들이 있다. 그들에게서 노자가 그토록 미워하고 혐오했던 인간의 악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인간이 원래 그랬다. 애초부터 악하고 사악한 짐승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변해왔느냐? 노자는 그 이유를 인지(人知)의 발달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아버린 인류는 자연계라는 실험실의 실수로 태어난 프랑켄슈타인이다.

 

이게 노자가 인간을 보는 시각이다. 그래서 그놈의 지(知)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거듭 거듭 말하고 있다. ‘배나 채우면 되지 공부가 뭔 소용이냐?’ 라는 것이다. 알면 알수록 많이 아는 자와 덜 아는 자의 차이가 생기고 이것이 권력을 만들고 권력이 전쟁과 노예를 만든다. 그래서 불상현하라는 거다. 암만 많이 아는 놈도 지보다 더 많이 아는 놈한테는 지고, 아무리 잘나도 지보다 더 잘난 놈이 있으니까 비참한 꼬락서니를 겪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두 다 짐승들처럼 똑같이 모르는 상태로 가자는 거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달리 행복했던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몰라서 행복했다.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 무엇인가 대갈빡 속에 띵하고 들어가면서 낙원은 사라졌다. 두 발 짐승이 인간이란 것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된 다음의 아담과 이브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낙원에의 동경이 무엇이겠나? 바로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에의 동경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 대한 회귀의 본능이다. 어린아이들은 모르기 때문에 행복하다. 그저 배부르고 등 따시면 쌔근쌔근 행복하게 잠든다. 그런 행복을 인류는 너무나 오랜 옛날에 잃어버렸다.

 

인간이 짐승보다 나을 거 같나? 그러나 짐승들이 인간보다 더 행복할 지 모른다. 철없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눈물이 난다.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낙원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노자는 어린아이와 짐승들에게서 성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아마도 다음에 나오는 장이부재(長而不宰)를 말했을 것이다.

 

노자가 앞에서 했던 말인 ‘생이불유 위이불시(生而不有 爲而不恃)’를 한번 더 말한 다음에 꺼낸 소리가 바로 ‘장이부재(長而不宰)’다. 생이불유 위이불시는 설명한 대로 ‘없는 듯이 살고, 꾸밈에 의지하지 말라’는 소리다. 이 꾸미지 말라는 말은 도덕경의 앞부분에 참으로 여러번 나온다.

 

여기서 내가 건너뛴 한 구절을 함께 묶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천문개합, 능무자호’ 다음에 ‘생지축지’가 나오기 전에 한 구절이 더 있다. 바로 ‘명백사달 능무위호(明白四達 能無爲乎)?’란 말이다. 풀어보면 ‘뜻을 명백하게 사방에 전하는 데 꾸밈이 없겠는가?’라는 말이 된다. 지도자가 자신의 의사나 생각을 온 천하에 명확하고 분명하게 알리되 그것에 꾸밈이나 거짓이 들어가지 않게 하겠는가 하는 물음이다. 다시 말하면 백성을 상대로 ‘거짓 선전이나 기만하는 허위 나발을 불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알려야 할 것은 분명하게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온 소리가 바로 ‘생지축지’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소리가 ‘없는 듯이 살고, 꾸밈에 의지하지 말라’이고 그리고 ‘장이부재 시위현덕(長而不宰 是謂玄德)’이다. 이 전체를 보면 생지축지란 말을 ‘짐승들이 하는 것처럼 할 수 있겠느냐?’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도자가 명백하게 자기의 의사를 꾸밈없이 사방에 알리면서도 다스리지 않는 지도자가 되는 현명함은 짐승들이 가장 잘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짐승은 자기들 집단의 우두머리를 둔다. 사자를 한번 볼까? 수사자는 암사자들과 새끼들로 이루어진 가족을 거느리는 우두머리다. 그런데 이 수사자가 자기 영토와 식솔들을 다스리는 꼬락서니를 함 봐봐. 아무 것도 하는 짓이 없이 그냥 빈둥거려. 나무 밑에서 낮잠이나 자고 한번씩 암사자들이 와서 꼬랑지를 흔들면 그거 한번씩 해주고 그게 다야. 사냥도 안 하고 일도 안 해. 어쩌다가 마지못해 영토 내를 한번씩 둘러보면 그걸로 끝이야. 그러나 수사자가 한번 크게 울면 사바나 전체의 동물들이 숨을 죽여. 그래서 백수의 왕이라 그래. 그게 바로 명백사달이야.

 

뒤에서 노자가 하는 말이 있어. 태상은 하지유지라고. 가장 좋은 우두머리는 아랫사람들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는 자라고. 수사자가 그래. 아무 일도 안 하고 암사자들을 괴롭히지도 않지만 수사자가 하릴없이 나무 밑에서 뒹굴면서 낮잠이나 자고 게을러터져서 사냥도 안 하지만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바나 전체가 사자의 집단에 복종을 하는 것이고 어떤 다른 짐승들도 사자를 우습게 보지 못해. 그리고 암사자들은 그가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하고 새끼들을 키우는 거야. 이게 성인치도의 모델이야.

 

코끼리도 마찬가지야. 늙은 수코끼리 한 마리가 수백 수천 마리의 대가족을 거느리고 살지만 암만 카메라를 숨겨놓고 여러 달을 관찰해도 그 우두머리 코끼리가 특별히 통치행위를 하는 게 없어. 그저 우두머리라고 있을 뿐이고 모든 코끼리 집단이 그 권위를 인정하는 거야. 그러나 초원에 가뭄이 들면 우두머리 코끼리의 명령일하에 수천 마리의 코끼리떼가 수백 킬로미터의 행군을 하는 거야. 새끼 코끼리 한 마리조차도 우두머리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는 법이 없어. 이것이 바로 장이부재요, 명백사달이야.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대통령들 통치라고 하는 꼬락서니 함 봐봐. TV,라디오,신문,잡지 온갖 것을 총동원해서 국민들 정신이 혼란하도록 광고나발을 불어도 국민들이 그 말을 믿지 않아. ‘능무위’를 못 하기 때문이고 ‘명백사달’이 안 되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장이부재는 꿈도 못꾸고 각 부처의 국장들이나 신경 쓸 일을 대통령이 직접 챙긴답시고 나서서 설치고 오두방정을 떨어도 나라가 안 되는 거야. 이게 전부 뭐 때문이겠어? 그 말에 ‘위’가 많기 때문이야. 인간이 과연 사자나 코끼리보다 나은 동물일까?

 

‘장이부재’하다가 나라 망하게 할 뻔한 어떤 왜넘 이야기를 해줄게.

 

‘장이부재(長而不宰)’는 ‘다스리지 않는 우두머리(長)’라는 말이다. 이 말을 보더라도 10장은 ‘지도자의 성인지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짐승들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우두머리라는 것도 다스림이란 행위가 불필요하다고 노자는 보고 있다. 천지가 만물을 위추구하듯이 백성들을 간섭치 말고, 더 잘살게 해주겠다고 나서서 깝죽거리지 말고 그냥 가만있으라는 얘기다. 그러나 노자의 말은 모두 이면이 있다. 반드시 그 말의 전제가 따라 붙는다. 다스린다는 행위가 없다는 것이 방치나 유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재영백포일’하고 ‘척제현람’하며, ‘애민치국’하여 ‘천문개합’하고 ‘무위’로 ‘명백사달’ 함으로서 백성이 ‘무지무욕’하고 ‘실기복 강기골’해서 ‘부쟁무우(不爭無憂)’한 상태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전제 되는 것이다.

 

노자의 ‘장이부재’를 성인도 아닌 게 실천하려고 들면 어찌되느냐? 앞에서 말했던 어떤 왜넘 꼬락서니가 돼버린다. 노자의 장이부재를 제도로써 제법 써먹은 놈들이 사실 왜넘들이다. 하지만 왜넘들의 천황이라는 것은 장이부재하는 성인이 아니라 그냥 핫바지고 허수아비다. 그러다가 반짝 메이지가 제대로 일을 했고, 그 다음에 히로히토는 역시 등신이 됐다. 에도 막부의 역대 쇼군이라는 것도 그런 전통에 휩쓸리면서 정신박약아 내지 유치찬란한 놈들 시리즈로 이어졌다. 이놈들은 대가리를 허수아비로 앉혀놓고 장이부재를 실천하면서 밑에 놈들이 다 해먹는 묘한 전통이 있다. 그래서 웃대가리는 바보라도 좋고 등신이라도 좋고 인형처럼 아랫놈들이 입혀주는 의관이나 제대로 입고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다. 왜넘들이 제일 이상으로 생각하는 지도자는 ‘절 받는 인형’이다. 그리고 그 인형 앞에서 절은 열심히 한다. 이런 습성은 메이지 시대에도 그대로 드러나서 당시 게다군의 편성은 등신 같은 총대장에 똑똑한 참모들로 만들었다. 

 

러일전쟁 때 만주의 일본군 총대장은 오야마 이와오란 넘이고 그 밑에 참모장이 고다마 겐타로다. 오야마는 참모회의할 때 한마디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나라에서 주는 봉급을 받아먹을 수 있었다. 작전은 고다마가 다 짰다. 다행히 이넘이 근대 일본 육군에서 난 넘이라 러시아를 상대로 한 버거운 싸움에서 겨우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등신 같은 총대장에 병신 같은 참모가 붙으면 어찌되냐? 여순에서의 노기 꼬락서니가 나버린다. 노기 마레스케도 오야마하고 마찬가지로 회의 때 앉아 있는 일 외에는 어떤 일도 할 줄 몰랐던 넘이다. 그런데 참모장인 이지치라는 넘이 말하자면 돌대가리다. 이넘이 얼마나 황당한 돌대가린지 작전이라는 게 ‘도스케키’밖에 몰랐어. 한번 돌격에 1만 명에서 1만5천 명 정도 잔나비새끼들이 죽어 나갔어. 여순은 왜넘들의 지옥으로 변했어. 고지마다 산마다 왜넘들 시체가 산처럼 쌓여서 뒤덮였는데도 노기 이넘은 백마 고 돌아다니면서 한시나 짓고 자빠졌어. 여순 전투를 한 달 만 더 끌었더라면 근대 일본은 서기도 전에 무너졌을 거야. 나라 전체를 망국 일보 직전으로 몰로 간 것이 노기란 넘하고 이지치란 넘이다.

 

하지만 이런 ‘장이부재’ 스타일의 조직이 대단히 효율적이고 이상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은 보여준 것이 왜넘들인 것은 틀림없다. 해군에서 보면 도오고오 헤이하치로가 육군의 오얌 이와오고 아키야마 사네유키란 넘이 고다마 겐타로다. 이 콤비는 환상적이어서 여순과 대마도 앞 바다에서 러시아의 극동함대와 발탁함대를 깨부수고 일본을 승리로 이끌었다. 오야마나 도오고오는 ‘장이부재’하면서도 ‘명백사달’ 할 줄 알았던 넘이고, 노기는 그냥 등신일 뿐이야.

 

그 도오고오가 쓰시마 해전이 끝난 다음에 세계 각국의 기자들한테 둘러싸여서 질문을 받는데 ‘해군 역사상 누가 가장 위대한 제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니까 ‘영국의 넬슨이야 감히 내가 견주겠지만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제가 신발에 끈을 맬 자격도 없소이다’ 했어. 이건 낭설이 아니고 실제 그대로의 이야기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박통 이전에는 이순신 장군 잘 몰랐어. 하지만 왜넘들은 이순신 장군을 바다의 군신으로 생각해왔단 말이지. 장군들뿐만 아니라 졸병들까지 러일전쟁 당시에 이미 다 알고 있었어.

 

심지어 쓰시마 해전을 앞두고 진해 만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출격을 할 때 졸병으로 배에 타고 있던 한 왜넘이 수기를 남겼는데 ‘마음속으로 이순신 장군님께 함대의 가호를 빌었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야. 참 이순신 장군이 까무러칠 일이다마는 ‘장이부재’하고 ‘명백사달’할 수 있었던 성인의 모델로 손색이 없는 분이 이순신 장군이다.

 

‘세계의 전사에 그 존재 자체가 불가사의한 분이다.’

 

이건 어떤 일본 군사학자의 말이다. 쓸 만한 배 한 척이 없어도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왜넘들과 게다국 전체가 벌벌 떨었고,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조선 백성들이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 지도자를 다시 보고 싶다. ‘장이부재 명백사달’이란 말을 보면서 생각난 이야기를 조금 주절거렸다. 이제 10장의 원문 전체를 한꺼번에 보고 다음으로 가자.

 

제10장은 ‘시위현덕(是謂玄德)’이라는 마지막 말로 끝난다. ‘그리하면 그것이야말로 한량없이 높고 지극한 덕일 것이옵니다’이다. ‘현(玄)’은 앞뒤의 내용에 따라 그 해석이 수없이 달라질 수 있는 글자니 뜻과 같이 글자도 가물한 놈이다.

 

현빈이라 할 때는 ‘신비롭고 기묘한 계곡’이라 말할 수 있고, 현덕이라 쓰면 ‘가이없이 지극한 덕’으로 읽을 수도 있고 ‘현람’이라 할 때는 ‘어둡고 컴컴함 곳을 본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사실 이런 말은 굳이 번역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현덕은 열반이나 성불과 같은 소리다. 그냥 그대로 ‘현덕이라 합니다’라고 읽고 현덕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하는 게 좋겠다. 왜냐하면 열반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뜻을 풀어서 쓰려고 하면 엄청 길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덕도 풀어서 쓰면 작문이 되지 그게 단어가 안 된다. 그래서 이런 말들은 그냥 ‘현덕이라 한다’고 읽고 ‘지극히 높은 덕을 일컫는 이름’이구나 생각하면 된다.

 

도올이 이 말을 ‘가물한 덕’이라고 옮긴 겄가지 뭐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도올이 금과옥조로 삼는 왕필의 주는 솔직히 뱀발에 가깝다. 발을 그려서 조진 뱀 그림이다. 한번 읽어보면 되겠고, 그 다음에 이 10장의 마지막 결어가 너무 걸작이어서 그것만 옮기려 하니까 보기 싫더라도 참아주기 바란다. 웃자는 거니까.

 

‘(유비의)삼고초려’란 곧 ‘물’과 같이 자기를 낮추는 玄德의 지혜다. 그래서 제갈공명과도 같은 天下의 지혜인을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대세는 반드시 지혜로운 자들에게 돌아가는 것인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논해야 할까?

 

마지막 말이 너무 멋있잖아.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논해야 할까?’ 나는 저런 대목에서 사실 도올한테 반한다. 내 머리를 순간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들거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순간적으로 머리속에서 한바퀴 돌려봐도 노자의 이 10장하고 연결되는 장면이 떠오르지가 않는 거야. 뭘 가지고 저런 기막힌 결구를 끄집어냈을까? 그거 생각하다가 내가 돌 뻔했다. 어떤 할 일 없는 인간은 모나리자의 미소가 무슨 의미일까 평생 그 생각만 하다가 돌았다 하더니만 나도 돌 뻔했다. 내가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고수다, 도올은.

 

‘세익스피어의 비극이라… 셰익스피어의 비극… 셰익스피어의 비극….’

 

에라 모르겠다. 궁금한 사람은 도올한테 직접 물어봐. 하여간에 10장을 마감하면서 내가 노자의 말씀을 한번 요약해봤다. 그대로가 내 인생철학이고 좌우명이다.

 

무욕무적(無慾無敵) : 욕심이 없으면 적이 없고
무지무우(無知無憂) : 아는 게 없으면 걱정이 없고
부쟁불패(不爭不敗) : 싸우지 않으면 질 일도 없다.

 

도올번역

 

땅의 형체를 한 몸에 싣고 하늘의 하나를 껴안는다.
그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기를 집중시켜 부드러움을 이루어
갓난아기가 될 수 있는가?
가물한 거울을
깨끗이 씻어
티가 없이 할 수 있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앎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힘에
암컷으로 머물 수 있는가?
명백히 깨달아 사방에 통달함에
함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도는 창조하고, 덕은 축적하네.
낳은 것을 소유하지 않고
지으면서도, 지은 것을 내 뜻대로 만들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자라는 것을 지베하지 않네.
이것을 일컬어 가물한 덕이라 하네.

 

바른 번역

 

온 나라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하여
그것이 흩어지지(분산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의) 기운을 오로지 부드럽게 하여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백성의)섬돌(또는 마당)을 손수 닦아주고
그 어두운 곳을 살펴,
(백성의)아픈 곳을 없이 해줄 수 있겠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지(知)에 의존치 않고 할 수 있겠는가?
성인의 도를 행하는 데 있어
배필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
분명하고도 밝게 뜻을 온 천하에 전하면서도
꾸밈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
짐승들이 그러하듯이
없는 듯이 살며,
꾸밈에 의존하지 않고
우두머리이면서도 다스리지 않으면
이를 일컬어 ‘玄德’이라 하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