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이경숙/노자를 웃긴 남자

노자를 웃긴 남자 (제7장)

기른장 2020. 9. 29. 18:03

제7장

 

《노자와 21세기》상권을 떼고 하권으로 넘어오면서 나는 보다시피 황당무계하고 유치찬란한 데다가 무식과 무지로 칠갑을 한 도올의 강의가 그토록 많은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불가사의한 매력의 정체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왜 사람들은 그의 책을 사보고 그의 강의를 듣는 것일까? 몇가지 이유가 떠오르지만 우선 생각나는 것은 도올이 아무도 모르는 분야을 골라서 뻥을 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양에 가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시골에서 남대문 이야기로 뻥을 친다는 소린데, 본 적도 없는 남대문을 지은 놈처럼 풀어내는 뻥이 가히 일가를 이룰 만한 경지이긴 하다. 그러나 자기가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구라를 푼다은 사실은 도올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다.

 

내가 아는 학자들 중에 도올만큼 비판을 겁내는 사람이 없다. 그 심리적 방어기전은 그의 강의, 그의 책 모든 곳에 감출 길 없이 드러나고 있다. 질문과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강의 스타일과 무슨 소린지 알 수 없게 장황하면서도 동서남북으로 개구리처럼 정신없이 튀는 글의 전개는 반박이나 비판을 기술적으로 원천 봉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의 논리나 주장이 학문적인 비판으로부터 견뎌내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노자나 기, 한의학처럼 이현령 비현령 억지를 써도 진위 구별이 어려운 난해하고 심오하면서도 일반인들은 상식조차 별로 없는 분야만을 다룬다는 이유가 첫째다. 그리고 그는 전문가들을 상대하지 않는다. 오로지 쥐뿔도 모르는 민초만 잡고 설을 푼다. 이를 일컬어 ‘가물한 암컷의 아랫문’이 아니라 ‘도올식 철학의 대중화’라 하는 거다.

 

철학이 대중화면 얼마나 좋겠나? 나부터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 근데 이게 말이야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완전히 철학의 개그화고 학문의 만화화다. 대중을 상대하려면 개그나 만화라야 먹힌다고? 지금 대중 희롱하나? 제발 노자 말씀처럼 백성을 무지하게 내버려두면 좋지 않겠어? 뭐 하려고 그 어려운 철학을 대중화씩이나 해서 개그를 한단 말이냐고? 그래 쥐뿔도 모르는 놈들 앉혀 놓고 뻥구라를 치니 재밌더냐? 제대로 아는 진짜 전문가를 임자로 만나기 전까지는 니 혼자 동방불패하다.

 

두 번째가 뭐냐? 그 논리의 전개가 그야말로 현란하고 종횡무진 동서고금을 미친년 널 뛰듯이 횡행하므로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는 사람이 정신이 혼란하여 무엇을 비판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부 다 황당한 소리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이게 막상 꼬집어 내려면 실의 끄트머리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디가 시작이고 뭐가 끝인지, 본론이 어디고 결론이 무엇인지 찾을 수가 없으므로 비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강의나 책은 청중이나 독자의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남기는 것이 없다. 주제와 상관이 있건 없건, 앞뒤가 연결이 되건 아니건 오만 가지 잡다한 소리를 모두 끌어다 깔아놓기 때문에 그 방대한 밑천과 풀어내는 보따리의 크기에 압도당해서 질려버리는 것이다. 하긴 난지도도 섬이라 하니 쓰레기도 많이만 쏟아 부츠면 수미산과 높이를 겨룰 수도 있겠다.
거기다가 보다시피 첨부터 끝까지 전부 다 틀리고 자빠졌으니 이걸 비판을 하려면 한 줄 쓴 거 가티조 열 줄 써야 되는 거란 말이지. 중간 중간에 하나씩 틀려야 반박을 해도 간단하게 하고 말지. 손을 대려고 하면 밑도 끝도 없어. 엄두가 안 난다 말이다.

 

그리고 남은 마지막 이유가 뭔지 알아? 잘못 건드렸다가 뒷감당할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지.

 

EBS 강의 도중 어느 신문에선가 다소 비판적인 기사를 실었다가 그 기자가 생욕을 먹는 꼴을 모두 봤잖아. ‘기자 놈들이 나라 망친다’고 패악질을 하는데 방송강의 한 회를 몽땅 할애하고도 분이 안 풀려 씩씩거리는 사람이 도올이다. 제자가 지 말 안 들었다고 노자철학 책의 삼분의 일을 글마 조지는 데 할애한 사람이다.

 

최근에 논어강의 도중에 연로하고 병약한 노인네 한 분이 방청석의 앞자리에 앉아서 강의 풍경 버린다고 개 끌 듯이 끌어낸 사건 함 봐봐. 나중에 그 어르신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 데 가족이 용서를 안하고 있다 하더라. 충효를 가르치는, 논어를 강의한다는 인간이 노인네가 볼썽 사나운 모습으로 방청석 앞자리에 앉아서 카메라빨 받는다고 내쫓은 인간이 도올이다. 방청석에다가 경로우대석은 못 만들어줄 망정 그래 갖고 되겠어? 정말 겁나지? 공포의 엽기 아닌가? 내가 걔보고 미치고 환장하는 증세가 있다 하는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도올은 정신을 잘 안 챙기면 일 낼 수 있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천장지구 천지소이능장차구자 이기부자생 고능장생

 

제7장의 첫 구절이다.

 

천장지구(天長地久)! 말의 순서를 조금 바꾸면 천지장구(天地長久)다. 《도덕경》에서 유래한 ‘하늘과 땅은 길고 오래 간다’는 유명한 말이다. 흔히 ‘장구한 세월’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거니와 ‘오랠 구(久)’가 들어간 단어로 또 늘 쓰는 것 가운데 하나가 ‘유구(悠久)’는 ‘아득하게 오래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 간다’라고 해석하는 돌이 있다. 누구는 누구겠니? 바로 대철학자 도올이지.

 

‘지구(地久)’와 떼서 ‘천장(天長)’을 풀이하면 그냥 ‘하늘은 길다’가 돼버린다. 하늘이 너르면 널었지 길다는 건 뭔 엉뚱한 소리? 하늘을 보고 ‘야! 하늘은 참 길구나!’하면 약간 맛이 간 넘 아냐? 그런데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하늘은 길다’라고 번역하고 자빠지니 기가 막히지. 물론 도올 자신도 그렇게 번역을 하려니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던 모양이지. 그것을 느끼는 것을 보면 약간은 희망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도올은 “그래서 나는 그것을 ‘길다’라고 표현치 않고 ‘너르다’라는 역어를 썼다”하며 자랑스럽게 나발을 불고 있다. 참 똑똑하지, 우리 도올이. 내가 기특해 죽겠어. 명색이 교수요, 학자요 그것도 동양학의 대가라 하는 사람이 여기서의 ‘장(長)’을 ‘길다는 틀리고 너르다가 맞다’고 하니 더 할 말이 없어. 간만에 잘해보려고 어렵게 역어까지 써가며 애를 썼다만 헛짚고 자빠지는 꼴은 하권에 와서도 변함이 없다. 도올의 지리멸렬한 논리 능력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여기서 나온다.

 

그런데 보통 천지코스몰로지에서 天은 시간을 나타내고 地는 공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여기서 ‘長’은 앞의 2장에서 ‘長短相較’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 공간을 나타내는 말이다.
《노자와 21세기》하권 13쪽 중단

 

역어를 그렇게 쓴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 심히 웃긴다. 이 문장 전체가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 되고 있다. 철학을 하는 사람이 이렇게 문장 하나 속의 논리가 뒤죽박죽이어서야 한심할 뿐이다. 앞의 2장에 나왔던 장단상교(長短相較)의 ‘장(長)’을 무슨 이유로 공간을 나타내는 의미라고 우기는지도 황당할뿐더러 그렇다 치더라도 대 천지코스몰로지가 天이 시간을 나타내고 地가 공간을 나타낸다 하면서, 천장(天長)을 ‘하늘은 너르다’로 번역하고 자빠지는 꼴은 뭐냔 말이다. 대 천지코스몰로지가 하늘을 시간으로 나타낸다면 당근 ‘천장(天長)’의 뜻은 ‘하늘은 오래 간다’거나 ‘하늘은 영원하다’하는 식의 번역이 되어야지. 안 그래? 이렇게 엉망진창 뒤죽박죽인 것이 ‘천지코스몰로지’라고 자기가 뽀록을 내면 어쩌자는 것이야? 도올의 개그를 계속 들어볼까? 어차피 웃기자고 애를 쓰고 있으니 웃어줘야지.

 

부생모육지은(父生母育之恩)은 부모생육지은(父母生育之恩)이란 뜻이지 아버지가 낳고 어머니가 길러준다는 말이 아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노자는 AaBb를 ABab로 쓸 때가 많다. 천지장구를 굳이 천장지구로 표현한 것은 위의 ‘부생모육지은’처럼 한문만의 독특한 멋 살리기다. 만약에 ‘하늘과 땅은 영원하도다’라는 말을 ‘천지장구’라 써버리면 이게 너무 싱거운 글이 돼버린다. 유덕화 나오는 영화 제목으로 채택될 수가 없다. 근데 ‘천장지구’라 쓰니까 읽을 때 감칠맛이 있잖아. 그런데 문제는 ‘천지장구’를 ‘천장지구’라 써놓으면 도올이처럼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는 소리하고 헛소리하는 맹꽁이들이 생기는 거라.‘부생모육’을 가지고 자식을 낳는 건 아버지라고 우기는 넘이나 똑같은 거야. 좋다. 뭐 도올이 말이 맞다고 치자고. ‘하늘은 너르고 당은 오래 가는 것’이라고 이해해주자. 그러면 바로 다음 문장하고 연결이 안 돼. 우리 도올이 지랄하고 자빠지는 꼬락서니를 보기 전에 노자의 ‘천장지구’가 들어간 시 한 수 구경할까? 백거이의 시 장한가(長限歌)의 끝 부분이다. 

 

천장지구유진시(天長地久有盡時)
차한면면무절기(此恨綿綿無絶期)

 

하늘과 땅도 다할 때가 있으련만
이 몸의 한은 끝날 때가 없으리.

 

도올은 이 시를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 가는데 시간이 다해도 나의 한은 이어지고 이어지니 끝날 때가 없겠구나’하고 읽을 거야. 도올의 명해설로 가볼까?

 

그에 비하면 ‘久’는 분명 지속을 나타내는 말로서 시간적 개념이다. ‘오래 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분명 ‘천구지장’(하늘은 오래 가고 땅은 너르다)이라 해야 옳다. 시간을 나타내는 하늘에는 시간적 형용사가 붙어야 하고, 공간을 나타내는 땅에는 공간적 형용사가 붙어야 할 것이다.
《노자와 21세기》하권 13쪽 중단

 

겁나게 웃기지? 하늘이 시간을 나타내고 땅이 공간을 나타낸다는 정의가 어디서 나왔단 말이야? 공자가 그랬어? 맹자가 그랬어? 소크라테스가 그랬어? 무슨 철학이 지 멋대로야? 엿장사 맘이고 오야 맘이야? 도올이 얘는 몇 구절만 넘어가면 앞에 나왔던 구절은 다 까먹는 애다. 앞뒤를 연결해서 통괄할 줄을 모른다. 노자가 앞에서 천지를 가지고 말한 적이 있었다. ‘천지지간 허이불굴(天地之間 虛而不屈)’이라 했다. 이게 바로 천지를 공간적 개념으로 설명했던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 7장에서는 시간적 개념의 천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늘과 땅을 공간적으로 볼 때는 텅 비었지만 찌그러지지 않는 것이요, 시간적으로 볼 때는 오래도록 영원한 것이라고 노자는 그야말로 물이 흐르듯 질서 있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도올은 물이 흘러오는 곳도 못 보고 흘러가는 곳도 못 보고 그저 지금 지가 보고 있는 눈앞의 그 물밖에 모르는 거야. 이러면서 무슨 고전을 번역하며 강의를 한다고 지랄육갑이야? 그러면서 또 하는 말 좀 봐봐.

 

왜 그랬을까? 여기 벌써 명백하게 천지코스몰로지적 사고에는 음양의 착종(錯綜)이라고 하는 음양론의 기본적 사유패턴이 개입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다시 말해서 ‘天久’‘地長’이라고 하면 하늘이라는 시간과 땅이라는 공간이 실체적으로 유리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하늘은 하늘로서 하늘이 되는 것이 아니고, 땅은 땅으로서 땅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은 땅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고, 땅은 하늘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하늘 속에 땅이 들어 있고, 땅 속엔 하늘이 들어 있는 것이다.
《노자와 21세기》하권 14쪽 상단

 

캬~ 이런 심오한 생각을 어떻게 해냈나 모르겠어. 얘 두뇌구조는 참말로 희한한 회로지. 도대체 ‘착종(錯綜)’이란 말은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나는 가방끈이 짧아서 얘 말은 당최 못 알아듣겠어. 그리고 노자가 언제 사람인데 자꾸 음양이 나오니? 춘추전국시대에 무슨 음양론의 기본적 사유 패턴이 있었다는 말이냐고? 음(陰)과 양(陽)이란 글자 자체의 뜻도 헷갈리던 시대다. 상고시대 문헌을 조금만 공부해본 사람이면 이런 글자들의 의미가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알 수 있지. 특히 음양이란 두 글자는 아주 골 때리는 의미의 변화를 겪은 글자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음과 양의 의미로 정착된 것은 훗날 전국시대 말에 등장한 소위 음양가(陰陽家)라는 약간 맛이 간 인간류가 등장하기 시작한 쥬라기 때부터다. 주역조차도 그 이전에는 음양이란 개념으로 해석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건은 하늘이요 곤은 땅이요 이런 식이었어. 《도덕경》전체에 음(陰)과 양(陽)이라는 글자는 한번도 나오지 않을뿐더러 노자가 음양사상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노자철학이 뉴튼 물리학이면 음양사상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마찬가지로 시대의 선후가 다르단 말이다. 그런데 노자사상에 음양사상의 기본적 사유 패턴이 나타난다고 지랄하고 자빠지면 이건 뉴튼 물리학에 상대성이론의 개념이 나온다는 소리나 같은 거야.

 

《도덕경》에 음양사상에 기반한 사유 패턴이 대 천지코스몰로지적 철학으로 등장한다 하니 까무러칠 노릇이지. 쟤 말뜻인즉슨 그거였겠지. ‘하늘과 땅에 어울리는 개념끼리 짝을 맞추면 두 쌍이 유리되는 관계로 노자가 머리를 좀 써서 말을 바꿨다 이 소린데, 하는 짓마다 꼴통이야. 쉬운 문제를 무지 어렵게 대갈빡을 굴려서 꼭 틀린 답을 찍는단 소리지. 다음 구절을 가보자.

 

天地所以能長且久者
천지소이능장차구자

 

도올의 번역은 들여다볼 것도 없이 ‘하늘과 땅이 너르고 또 오래 갈 수 있는 것은’이겠지. 어디가 틀렸는지 말할 필요도 없지. ‘너르고’는 끼여들 자리가 아니다. ‘하늘과 땅이 길고도 오래도록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이 올바른 풀이라고 알고 넘어가면 된다. 당근 다음 구절은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이기부자생(以其不自生)’,‘자생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풀 수 있는 문장인데 문제는 ‘자생(自生)’의 뜻이다. 재미 삼아 객관식 5지선다로 풀어볼까?

 

① 자기를 고집하여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② 스스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③ 존재하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④ 자기 힘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⑤ 자기가 태어나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게 정답이겠나? 그리고 세기의 천재 도올이 고른 답은 뭐겠나?

 

자 도올이 찍은 답부터 먼저 보자. 역시 우등생 도올은 예상대로 ①번을 골랐다. 객관식에서 답을 잘 모를 때는 제일 긴 것이 정답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 ‘찍기의 제1법칙’이지? 도올은 거기다가 특이한 버릇이 한 가지 더 있다. 가급적 어렵고 난해하고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주로 고르는 건데 이것은 ‘찍기의 법칙’에도 없는 거다.

 

‘자기를 고집하여 산다’는 말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자아에 집착한다’는 의미와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어가 생명체가 아닌 하늘과 땅이기 때문에 생(生)을 ‘산다’ 또는 ‘태어난다’로 직역하기보다는 ‘존재한다’로 바꾸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니면 약간 글자의 본래 뜻과는 말지만 다음 문장과의 연결 관계를 고려하면 ‘내보인다’는 의미를 선택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①번은 ‘자기를 고집하여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가 되는데, 물론 이 번역도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구절의 ‘부자생’에 대한 해석이 알려진 것만도 수백 가지가 된다. 그 가운데는 위의 다섯 가지가 전부 포함된다.

 

《도덕경》 전체를 통틀어 ‘이것이야말로 올바르고 정확한 유일한 해석’이라고 단정짓기 곤란한 구절은 그리 많지 않다. 《도덕경》은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전체적으로 메시지가 대단히 명료한 책이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애매한 구절이 있다면 여기 나오는 ‘부자생’이라는 말 정도다. ‘천지가 영원토록 이어지는 이유는 천지가 부자생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에서 ‘부자생’의 의미로 넣었을 때 어색하지 않은 해석이 몇 가지 나올 수 있다. 나는 위의 5지선다에서 고른다면 ③을 택하고 싶다. ‘존재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또는 ‘내보이려고 애쓰지 않는다’ 주어가 천지이므로 훨씬 자연스러운 번역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 문장 ‘고능장생(故能長生)’은 ‘그러므로 천지는 능히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다’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사용된 ‘장(長)’도 시간적인 ‘오래’를 나타내는 말이지 결코 공간적으로 ‘길다거나 너르다’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하늘과 땅은 스스로 존재하려고(내보이려고) 애쓰지 않으므로 능히 오랜 세월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나왔듯이 비려고도 애쓰지 않고 채우려고 애쓰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無爲), 저절로 그러한’ 자연(自然)을 노자는 되풀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도올이 설명한 ‘자연은 빔을 극대화하는 것을 지향한다’고 하는 것이 《도덕경》의 논지와는 전혀 빗나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장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자.

 

是以聖人 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시이성인 후기신이신선 외기신이신존

 

‘그러므로 성인은, 후기신이신선(後其身而身先)하고 외기신이신존(外其身而身存)이니라’ 대단히 좋은 말이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필요한 가르침이다. 물론 도올의 해석대로 읽으면 이것도 황당한 개그가 돼버린다. 먼저 보도록 하자.

 

‘그러하므로 몸을 뒤로하기에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밖으로 던지기에 몸이 안으로 보존된다’ 가 도올이 내미는 해석이다. 번역이란 한자로 쓰인 원문을 한국말로 옮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문자 자체가 함의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한자 고전은 더 더욱 그렇다. 적어도 고전을 번역하려는 사람이라면 이 문장을 대할 때 제일 먼저 선후(先後)와 내외(內外)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노자는 무엇의 앞과 뒤를 말하는가? 무엇의 바깥을 말하는 것인가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 대한 도올의 해설을 볼라 치면 참으로 황당무계, 포복절도의 엎어치기 한판이다. 그것을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다소 길지만 어쩔 수 없이 끝까지 볼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항상 그 몸을 뒤로하기에(후기신) 오히려 그 몸이 앞서고(身先), 항상 그 몸을 밖으로 던지기에(外其身) 오히려 그 몸이 앞서고(身先), 항상 그 몸을 밖으로 던지기에(外其身) 오히려 그 몸이 안으로 보존된다(身存). ‘그 몸을 뒤로한다’는 것은, 잘난 체하면서 항상 앞장서고, 뭘 자기가 꼭 앞서서 리드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러한 인격자세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 몸을 밖으로 던진다’는 것은 자기 일신만을 지키는 데 급급하지 아니하고 내 몸을 내던져 희생할 줄 아는 삶의 자세를 가리킨다. 요즈음같이 몸을 도사리기만 하며, 앞에 서서 자기현시하기만을 좋아하는 시대풍조에 정말 노자의 말씀은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그런데 그 몸을 뒤로하는 것은 뒤로함으로만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 몸이 앞서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내 몸을 내던지는 희생적 행위는 희생으로만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 몸이 보존되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멋’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자사’ 함으로 생기지는 않는다. 인간의 ‘멋’이란 ‘손해 볼 줄 아는 것’ ‘희생할 줄 아는 것’에서 생겨난다.《天長之久》와 같은 모든 깡패영화에 공통된 주제는, 주인공 깡패의 삶의 자세가 항상 범인을 초월하여 ‘後其身’하고 ‘外其身’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들이 비록 사회적으로는 불량한 행위의 범주 속에 분류되고 있지만, 무엇인가 인간에게 안타까운 느낌을 주는 ‘멋’을 발한다는 데 있다. 《비트》속의 정우성 역이 그러하지 아니한가? 즉 사회적 악의 범주 속에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선의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대개 갱스터 무비장르의 제1주제인 것이다.
《노자와 21세기》하권 20쪽 21쪽

 

노자 할아방 심장마비 걸려 숨넘어가는 소리 안 들리나? 희생정신? 깡패의 멋? 천장지구에 비트? 세상에나. 노자 할아방은 있지 도올이 차원의 ‘희생정신’은 헌신짝만큼도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이다. 노자가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성인은 이백성위추구(以百姓爲芻狗)한다고 백성 보기를 풀로 만든 강아지처럼 보는 성인이 무슨 놈의 ‘희생정신’을 발휘한단 말야? 노자가 말하는 ‘몸을 뒤로 하라는 것’은 나서지 마라, 잘난 척하지 마라, 아는 체 하지 말라는 것이고 접속사 이(而)는 ‘=’의 뜻이다. 그래서 ‘몸을 뒤로 하기에 몸이 앞선다’가 아니라 ‘몸을 뒤로 하는 것으로서 앞세움을 삼는다’라는 뜻이다.

 

‘즉 몸을 뒤로하는 것으로 앞세우는 것을 대신하는 것이 성인이다.’인데 만약에 자기가 남보다 앞서기 위한 방책으로 몸을 뒤로 뺀다면 이런 ‘후기신’이야말로 바로 노자가 가장 싫어하는 위선이다. 위후기신이 되는 것이다. 남의 뒤에 서기 위해서 몸을 뒤로하는 것이어야지 남의 뒤에서는 것이 남보다 앞설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맞지? 설마 노자가 그런 약삭빠르고 교활한 대갈빡을 굴리라고 가르치겠냐? ‘남보다 앞서는 가장 빠른 길이 몸을 남의 뒤로 빼는 것이니라’라는 음험한 수작을 가르치고 있겠느냐고. 그런 게 노자철학이야? 노자 욕을 보여도 분수가 있어야지. 안 그래? 그래도 여기까지도 괜찮다. 그 뒷줄로 가면 완전히 골에 쥐나는 소리를 하고 자빠진다.

 

‘후기신이신선(後其身而身先)’을 ‘몸을 뒤로 함으로써 결국은 앞서게 하는 것’이라고 턱도 없는 구라를 풀어놓고는 바로 다음 구절 ‘외기신이신존(外其身而身存)’을 가지고는 어이없는 잠꼬대를 하고 있다. ‘외기신(外其身)’을 풀어 몸을 밖으로 던진다느니 희생정신을 발휘하라라는 얘기라 해대니 이걸 뭐라 해야 돼? 엽기라는 말로도 표현이 안 돼. 보자고 ‘외기신’은 ‘몸을 그곳(其)의 바깥에 둔다’는 소리지. 여기서 노자가 가리키는 그곳(또는 그것)이 도대체 뭐겠나? 그걸 모르면서 노자를 떠들어서는 안 되는 거다.

 

노자가 말하는 그곳은 바로 ‘세상의 바깥’ ‘명리의 바깥’ ‘시비의 바깥’ ‘이익의 바깥’이다. 즉 세상살이에 초연하게 벗어나 있으라는 말이다. ‘그리하면 네가 허물이 없고 몸이 안전할 것이니’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유덕화를 본받아 깡패 같은 희생정신을 발휘하라고? 돌았나? 도대체 노자의 가르침에서 무엇을 구하는 거야?

 

불교식으로 말하면 속세(俗世)를 멀리하고 세상 시비에 끼어들지 말라는 거다. 희생정신 발휘하다 죽은 넘이 한둘인가? 공자 말씀 지키다가 죽은 넘이 그 얼마고, 부처 진리 찾는다고 죽은 넘은 얼마며, 예수 말씀 믿다가 죽은 넘은 또 얼마야? 충성 때문에 죽고, 명예 때문에 죽고, 재물 때문에 죽고, 의리 때문에 죽고, 정 때문에 죽고, 여자 때문에 죽어 나가는 게 세상살이다. 도대체 죽을 이유가 너무나 많은 위험한 아귀 지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이 성인의 삶이니, 이리 해야 하늘과 땅이 장구한 것과 같이 네가 탈없이 오래 살 수 있다는 훈계다.

 

노자 할아방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를 제일 싫어한다. 희생정신이야 필요하지. 당연히 권장되어야 할 덕목이나 이 희생정신도 도올이 말하는 깡패 수준이 되면 그건 시비의 가름이고 시의 편에서의 폭력이냐, 비의 입장에서의 폭력이냐 그 차이뿐이다. 노자는 애국이니, 애족이니, 충성이니, 희생이니, 헌신이니 하는 것들을 우습게 본 사람이다. 그런 덕목을 구하려면 공자나 맹자, 순자를 찾아가야지 노자 할아방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번지수가 틀린 얘기다.

 

도올이 얘가 얼마나 노자를 잘 모르고 야무지게 헛다리 짚고 자빠지는 앤지 이런 대목을 보면 여실하다. 그런 차원의 세속적인 가치 규범은 털어야 노자를 배울 수 있다. 그야말로 코스몰로지적인 가치를 찾고자하면 몰라도 아직도 ‘희생정신은 고귀한 것’ 따위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하산하기가 너무 빠르다. 쥐뿔도 모르면서 어디서 천지코스몰로지가 나오나? 입산도 안 해본 주제에 하산한 것처럼 뻥을 치면 안 되지. 노자의 이러한 탈속(脫俗)성향은 이 장의 바로 뒤에 나오는 유명한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에서 다시 접하게 되는데, 물론 그 대목에서도 도올이 보여주는 엽기적인 개그는 환상적이다.

 

앞 구절을 똑바로 읽지 않으면 다음 구절과 연결이 안 되는 게《도덕경》이란 책이어서 살신성인하는 희생정신을 부르짖은 도올은 뒤 구절에 가면 그냥 대가리를 절벽에 처박고야 만다. 희생정신 갖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말이 뒤따라 나오기 때문이지. 함 볼까?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비이기무사야 고능성기사

 

지가 앞 구절을 잘못 풀어놓으니 도저히 이 구절하고 꿰맞출 방법이 있었겠나? 천하의 도올이 이 절벽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꼬랑지를 내리고 만다. 불후의 명작인 《노자와 21세기》에는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아예 없다. 할 수가 없었겠지. 해석은 싹 빼먹고 괜히 왕삐만 가지고 횡설수설을 한참 하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다음 장으로 도망 가버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제7장의 전문 번역에 나와 있는 한 줄만 가지고 우리는 대학자의 번역을 훔쳐볼 수밖에 없다.

 

‘비이기무사야(非以其無私邪) 고능성기사(故能成其私)’를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오히려 그 사사로움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라고 풀고 있는데 어때? 지가 앞에서 한 소리하고 하나도 안 맞지? 지가 아무리 지어내고 싶어도 여기서 노자가 말하는 ‘사(私)’가 무엇인지 만들어내기 힘들었겠지. 첫 구절의 마지막 ‘야(邪)’는 문장을 의문문으로 만들어주는 어조사다. 그래서 풀이는 도올이 번역한 바와 비슷하다. 그러나 도올은 그 말의 의미를 몰라서 팽개쳐버리고 토긴 거다.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에서의 사사로움이란 말 그대로 개인적인 이익의 추구, 명리의 추구, 시비의 가림 등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사로움을 버리고 능히 이룰 수 있다고 한 사사로움이 뭐겠나? 그게 바로 이 우주 전체보다도 소중한 자기 자신의 생명이요 보존이다. ‘천하를 얻는다 해도 자기 몸 하나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래서 언제나 남의 뒤에 서고 명리와 시비의 바깥에 몸을 둠으로써 하찮은 사사로움은 포기하고 오로지 소중한 자기 한 몸을 탈없이 잘 보존하라는 가르침이시다. 이제 알겠나? 이렇게 읽어보니 제7장의 전체적인 뜻이 쫘악 통하지?

 

‘하늘과 땅이 스스로 내보이려 애쓰지 않아서 영원히 이어지는 것처럼 성인은 남의 앞에 나서지 않고 세상의 바깥에 몸을 두어 명리와 시비를 멀리하여 사소한 이익들을 버리기 때문에 능히 개인(私:몸,목숨)을 보존 하느니라’는 말씀이 바로 제7장의 내용이다. ‘능히 사사로움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그 사사로움을 버리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의 사사로움 두 개 사이에서 뺑뺑이를 돌다보니 이게 앞의 사(私)하고 뒤의 사(私)가 해석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지금껏 노자 연구서들이 여기만 오면 그냥 헛지랄을 했던 거고. 이 문장에 나오는 두 개의 사가 각각 무엇인지 모르면 노자를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올이 여기서 직면한 문제는 앞의 구절에서 노자가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자기 몸을 밖으로 던지라’고 했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 놓고 다음 문장에서 ‘사사로움을 이룬다(私)’하니 도올의 나쁜 머리로도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소리라는 것을 눈치 챈 거야. ‘몸을 던지는 희생정신’과 ‘사사로움을 이루는 것’이 도저히 연결되지 않잖아.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왕필 이야기를 끌어다가 횡설수설하고 다음으로 도망가버린 거다.

 

다시 말하지만 이 문장에서 노자가 말하는 ‘사(私)’는 바로 ‘자신의 안전과 보존’이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사상이라고 보일지 모르겠으나 노자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다. 남의 일에, 세상사에 아는 척 잘난 척 나서고 까다가 화를 입지나 말고 그냥 자기 몸이나 잘 보존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게 바로 ‘능성기사(能成其私)’하는 첩경이 다. 노자는 천하의 일보다 자기 몸이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본 사람이다. 정의니 인이니 도덕이니 사회니 국가니 하는 따위가 저 하나 죽고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는 생각을 가진 게 노자다.

 

물론 그렇게 세상일에 무심하게 초연한 삶을 살아도 누구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노자가 바라보고 있는 곳이 어딘가? 바로 현빈이다. 그 가물하고 검은 골짜기를 보고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누군가? 바로 영원불사하는 신들이다. 그게 신선이다. 그런 영원불사의 이상향을 꿈꾼 사람이 노자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명리와 시비는 하찮은 것으로 보고 초연하려 했다. 그런데 말이다. 현빈을 가서 ‘가물한 암컷의 거시기’가 어찌 생겼나 한번 보려면 우선 중요한 것이 비명횡사를 안 해야 된다는 점이다. 제 아무리 공력이 높아도 까불다가 잡혀 죽으면 죽는 거다. 별 수 없다. 

 

삼국지에 보면 우길(宇吉)이란 도사가 오주(吳主)손권의 형 손책한테 까불고 개기다가 칼에 맞아 죽는 대목이 나온다. 공명과 우길은 노장의 신선술을 공부한 동문이다. 그러니까 노자의 제자들이다. 손책이 처음에는 우길을 화형시키려고 장작더미 위에 앉히고 불을 붙였는데 우길이 한번 껄껄 웃으니까 소낙비가 내려서 불이 꺼져버린 거야. 졸따구들한테 죽이라고 하니까 이것들이 도력에 겁을 먹고 전부 뒷걸음을 치니까 할 수 없이 손책이 직접 칼을 뽑아 우길의 목을 쳐 죽였어, 나중에 죽은 우길의 귀신이 손책을 데려갔다 하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고 중요한 것은 제 아무리 도사라도 한칼 맞으면 죽는다는 사실이지. 공명이 적벽에서 동남풍을 부른 것과 우길이 장작더미에서 소나기를 내리게 한 것을 묶어서 호풍환우(呼風喚雨)라 하는데 공명과 우길이 호풍환우하는 재주가 있어도 세상사에 부대끼는 한 화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노자는 세상 밖(外)으로 나와 있으라고 하는 것이다.

 

외기신(外其身)!
세상에서 제일 지독하고 무서운 것이 바로 사람이다. 도사 아니라 신선도 사람 손에 걸리면 죽기는 마찬가지다. 사람이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보다 귀신이 사람을 더 무서워한다. 우화등선하고 현빈으로 들어가면 그때야 산 사람들 손이 미치지 못하니 안전하겠지만 그 전에는 어쨌든 몸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자의 결론이 뭐냐? ‘도를 닦는 내 새끼들아, 모쪼록 사람들을 조심해라.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놈들이니까 가급적 사람 사는 근처에는 가지도 말아라’다 그런데 호풍환우도 못 하는 도올이 뭘 믿고 저리 인간세에 좌충우돌 나대는지 당최 이해가 안 돼.

 

‘외기신이신존(外其身而身存)’의 뜻이 ‘세상의 바깥에 몸을 두어 그 몸을 보존하라’는 것이라고 했는데, 왜 이 문장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대답할 말이 있을까? 당근 있지. 노자는 사람들이 그 문장만으로는 의미를 알기 어렵다 싶은 구절 뒤에는 반드시 부연하는 문장이나 보충설명을 해두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하여 사람들한테 밝혀놓은 것이 바로 다음 장의 첫 구절인 유명한 ‘상선약수(上善若水)’란 말이다.

 

왕삐가 노자의 《도덕경》을 주해와 함께 남기면서 장 가름을 해놨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도덕경》을 나누는 불변의 기준이 된 81장이다. 그러나 왕삐의 분장(分章)은 군데군데 불합리한 곳이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여기다. 물론 왕삐가 ‘상선약수’를 앞장과 분리해서 별도의 장으로 넘긴 것은 이 말의 바른 뜻을 몰랐기 때문이고 제7장과 제8장이 바로 이어져야 하는 내용인 줄 몰랐기 때문이다. ‘상선약수’는 제8장의 처음이 아니라 제7장의 마지막 구절로 포함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외기신이신존(外其身而身存)’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상선약수’의 뜻을 모르면 ‘외기신이신존’을 알 수 없다. 도올이 상선약수를 가지고 웃기는 짜장면 한 사발을 퍼질러 놓은 것은 잠시 뒤로 미루고 일단 제7장의 전문을 같이 보는 게 순서겠다. 그리고 《도덕경》에 대한 올바른 분장은 뒤에 가서 한번 손댈 때가 있을 것이다.

 

도올번역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 간다.
하늘과 땅이 너르고 또 오래 갈 수 있는 것은
자기를 고집하여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밖으로 던지기에
몸이 안으로 보존된다.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오히려
그 사사로움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바른번역

 

하늘과 땅은 길고 오래 간다.
하늘과 땅이 그토록 길게, 또 오래도록 가는 이유는
존재하려고 스스로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랫동안 존재한다.
그래서 성인은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 것으로
남의 앞에 서는 것을 삼는다.
세상 밖에 자신을 둠으로써
자신을 보존한다.
이것은 (작은)사사로움을 버리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럼으로써
능히(자신의 보존이라는 큰)사사로움을 얻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