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제4장의 첫 구절이다.
道沖 而用之或不盈
도충 이용지혹불영
이 문장에서 우리한테 생소한 글자라 해봐야 ‘충(沖)’하고 ‘영(盈)’뿐이다. 그리고 문장이 어렵지도 않다. 그런데 이런 문장도 똑바로 못 읽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고나 할까, 어이가 없다고나 할가, 도올이란 사람이 참 희한해 보인다. 자기가 확실하게 알지 못해서 자신 없는 부분이 많으니 강의를 하다가 더듬거리고 말이 헷갈릴 때가 많은 것이 눈에 보인다. 아직 공부가 덜 됐거든 나서지 말아야지 안 그래? 방송국 PD들도 그렇지, 세울 사람을 세워야지 도올을 불러다가 노자강의를 맡긴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도올이 예전에 쓴 책 《노자 철학 이것이다》도 안 읽어보고 캐스팅을 했단 말이야? 그 책 읽어보면 도올을 딱 알 수 있잖아. 그 책에서 도올이 한 소리가 뭔데? ‘나는 노자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놈이올시다’잖아. 그런 사람을 불러다가 카메라 앞에 세우면 ‘탱자탱자’ 할 수밖에 더 있어?
원문을 같이 볼까? ‘충(沖)’은 ‘빌 충’ 또는 ‘깊을 충’이다. 그래서 ‘도충(道沖)’이라 하면 ‘도는 비었다’ 또는 ‘도는 깊다’ 혹은 ‘도는 그윽하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중 어떤 의미로 쓰인 충(沖)이냐는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을 보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바로 그 다음 구절에 가서 ‘깊을 연(淵)’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충(沖)은 비었다는 의미로 쓰인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일단 ‘도충(道沖)’을 ‘도는 텅 비었다’로 번역하자. 문제는 역시 그 다음이다. 도올은 문장이 조금만 길면 반드시 틀린다. 뭐라 했느냐 하면, 이용지혹불영(而用之或不盈)을 ‘그러나 아무리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라고 풀고는 덧붙여 기가 막힌 소리를 하고 있다.
盈은 ‘찬다’, ‘채운다’의 뜻인데, 한문은 한 글자가 때로 그 정반대 되는 의미를 내포한다. 여기서의 盈은 채우다의 반대 뜻인 ‘고갈시킨다(窮)’,‘다한다(盡)’의 뜻이 있다. 45장에 ‘大盈若沖,其用不窮’(크게 차 있는 것은 텅 비어 있는 듯하다. 아무리 써도 고갈됨이 없다.)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 뜻이 상통하는 것이다. 여기서 ‘不盈’은 ‘不窮’이다.
《노자와 21세기》상권 193쪽 중단
암만 봐도 도올은 《도덕경》을 볼 게 아니고 《천자문》을 봐야 될 애다. 하늘 천, 따지를 제대로 익혀야 될 애가 《도덕경》을 풀고 앉았으니 이게 장난이지 학문이겠나? 한자가 처음 만들어져서 글자의 의미들이 혼란스럽고 용례가 확실치 않을 때 만들어진 상서(尙書) 같은 고대의 책들에서는 한 글자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정반대의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자가 어느 시대 사람이야? 공자, 아니 꽁쯔가 춘추필법을 세운 시대의 사람이다. 도대체 그 시대에 누가 한자를 정반대 되는 뜻으로 쓰더냐? ‘찰 영(盈)’을 ‘다할 궁(窮)’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빡빡 우기는 이유가 대체 뭐야? 이유는 한 가지뿐이 없지. 지 대갈빡으로는 해석이 안 되니까 글자의 뜻까지 바꾸는 거야. 외국말을 옮기는데 그래. 원문의 의미를 지 맘대로 바꾼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기가 막히는 게 원문의 뜻 그대로 옮겼을 때는 도저히 말이 안 된다든가 문맥이 연결이 안 된다든가 하면 최후의 방법으로 반대어를 넣어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원문의 한자 뜻 그대로 읽지 않으면 해석이 안 된다. 도올처럼 정반대로 옮기면 바로 엽기적인 소리가 돼버린다.
그러니 어찌 옮겨지겠나? 한번 같이 보자.
‘그러나 아무리 펴내어 서도 고갈되지 않는다’하네. 엽기적이지? 송아지 생선 뜯어먹는 소리 아닌가? ‘도라는 것이 텅 비었다’ 해놓고 뭘 펴내어 쓴다 말이야? 도라는 것은 텅 빈 것인데 펴내어 써도 고갈되지가 않아? 도올은 빈 쌀독에서 마르지 않도록 쌀을 퍼 올리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지. 나도 그 재주 좀 배우고 싶네. 텅 빈 데서 퍼 올려 쓰는 재주 말이다. 그저 궁리를 하느니 어떻게 하면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할가 하는 것뿐이지. 이런 엉터리 같은 학문을 하고 자빠지니 사람들이 ‘동양철학’이라 하면 비논리적이고 앞뒤 안 맞아도 되는 땡초들 선문답 비스름한 것으로 오해를 하는 거다. 그리고 그럴수록 더 심오하고 고매한 무슨 뜻이 있기나 한 것처럼 헛소리나 하고 자빠지는 거고, 그런 것이 ‘동양철학’이고 그런 것이 ‘도’인 줄 알고 밤낮 헛소리만 하는 거야. ‘동양철학’이라는 게 얼마나 논리적이고 체계적이고 그 구조가 엄격하고 정밀한 것인지는 모르고 그저 주둥이로 말장난만 하려고 든다 말이다.
그게 다 도올이 같은 사이비 학자 때문이다. 내 말이 틀리냐?
저 문장의 올바른 뜻은 ‘도는 텅 빈 것과 같아서 막상 쓸려고 하면 아무 것도 안 잡힐지 모른다’는 것이다. 불영(不盈)은 ‘채워져 있지 않다’는 의미잖아? 한자를 보고도 뜻을 몰라, 그래?
‘이용지(而用之)’ 즉, 쓰고자 하면, ‘혹불영(或不盈)’ 아마도 채워져 있지 않을 것이다(손에 잡히는 게 없을 걸)‘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도라는 것을 무슨 천도복숭아처럼 따먹거나 주인 없는 소처럼 타고 다니거나 우물물처럼 두레박으로 퍼 올려 마실 수 있는 것처럼 생각지 말라 이거다. 도는 텅 비어서 소용이 없는 물건이라는 소리다. 쓸려고 하면 써먹을 수가 없다는 거다. 그래서 노자 할아방이 용용 죽겠지 하고 돌아앉아 웃는다. 그걸 가지고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가 않는다니? 노자가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날 소리다.
하긴 저렇게 써놓고도 한자를 반대로 해석한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다음과 같이 중언부언 변명을 하고 있다.
‘而用之或不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해도 가능하다. 道 는 텅 빈 듯해서, 아무리 써도 다시 채울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해도 그 反語的 의미는 동일하게 될 것이다. Yet when you use it, you never need fill it again.
《노자와 21세기》194쪽 상단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도 틀릴뿐더러 영어로 서 놓은 것은 더 웃긴다. 제발 동양고전 하면서 되지도 않은 영어 좀 쓰지 말았음 좋겠다. 내가 콩글리시 한번 해볼까? 문법이 맞다 틀리다 시비는 걸지 말자. 노자의 말을 영어로 옮기면 이렇게 되는 거다. ‘If you use it. you are foolish!’ 왜넘 말로도 해볼까? ‘아나타와 빠가야로데스’다.
우리 도올은 자기가 해놓고는 암만 생각해도 자신이 없는지 못내 불안해서 또 왕삐리한테로 도망을 간다. ‘老子 本義를 꿰뚫는 멋들어진 주를 달아놓았더라’고 하면서 왕삐의 주를 소개해 놨는데 ‘노자의 본의를 꿰뚫는다’는 소리가 뭔 뜻인지 나는 모르겠고 그 왕삐의 주라는 것이 노자의 저 말과 어떻게 통하는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노자가 ‘동(東)!’하면 ‘서(西)!’하고 ‘흑(黑)!’ 하면 ‘백(白)!’하는 꼬라지는 왕삐나 도올이나 둘 다 만만치 않다. 동문서답이 아니라 완전히 성동격서, 좌충우돌, 우왕좌왕, 지리멸렬이다. 왕삐의 ‘노자의 본의를 꿰뚫는 멋들어진 주’는 옮기기도 귀찮으니 관심이 있는 사람은 불후의 명저 《노자와 21세기》상권 204쪽을 함 봐봐. 진도 나가자. 계속 엽기 시리즈다.
다음 구절은 이런 소리다.
淵兮 似萬物之宗
연혜 사만물지종
혜(兮)는 의미 없는 어조사니까 신경 쓸 거 없고, 연(淵)은 ‘도는 깊다’라는 소리다. 이걸 또 도올은 멋을 부린답시고 ‘그윽하도다!’라고 해놨다. 하여간에 구제불능이다. 세수도 못 하는 게 화장하려고 덤비는 꼴이다. 뜻도 모르면서 멋만 부린다 말이다. 그윽하기는 뭐가 그윽해? 그냥 ‘도는 깊다’하면 되지. 텅 비어서 쓸려고 하면 써먹을 데가 없는 도이지만 그러나 그 텅 빈 것이 깊기는 아주 깊어서 만물지종(萬物之宗)이 뭔가? 쉽게 말하면 만물의 씨앗이고 만물의 부모다. 즉, ‘도는 텅 빈 것이어서 쓰고자 해도 소용이 없는 물건이지만 그 속이 깊고도 깊어서 세상 만물이 다 그것에서 나온다’이다. 이 대목에서 훗날의 음양가(陰陽家)들의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이 나왔다. 무극에서 태극이 나오고 태극에서 음양이 갈라져 음양에서 오행이 비롯되고, 어쩌고저쩌고….
무극이라는 것은 음양오행과 세상 만물의 시작이지만 무극 자체는 볼 수도 만질 수도 파악할 수도 서먹을 수도 없는 텅 빈 무엇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를 음양사상의 무극에 견준다면 도올은 무극을 암만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 것이라고 나발부는 정신나간 인간이 돼버린다.
무극은 퍼내서 쓰고 자시고 할 물건이 아니다. 바로 노자가 앞에서 말했던 ‘천지지시’다. 이 천지지시가 이름을 붙이는 순간 뭐가 된다? 바로 만물지모가 된다. 이게 무엇이다? 바로 태극이다. 태극은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고 음양이 조화를 일으키고 있는 상태다. 도올은 이것을 사람이 쓰고 이용할 수 있는 양넘들의 창조주 비슷한 개념으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원래 도올은 그리스천이잖아. 그래서 그 사고의 저변에 창조론적 관념이 있다. 그래서 노자 말씀에 더 헷갈리는 거다. 그래서 걸핏하면 도를 하나님, 야훼 이런 개념에 갖다 붙이는데 그것도 무식의 소치고 무지의 소산이다.
노자는 ‘도는 쓸모 없는 물건이다. 소용이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한다. 만물을 낳기는 해도 만물한테 소용되는 구석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에다가 기도하고 찬송해봐야 응답도 없고 가피공덕도 바랄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나 야훼 같은 창조주, 조물주는 다르다. 이런 건 소용이 있다. 아플 때 기도하면 병을 낫게 해주는 의사로도 쓰이고 사업이 안될 때는 고문역도 되고 컨설턴트로도 쓰이고, 심지어 어느 종목이 오를 것인지도 가르쳐주는 주식투자 자문에 펀드매니저 역할도 해준다. 가끔씩은 미운 놈 패주는 청부폭력 해결사 역할도 하고 어떤 때는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고 전쟁도 하지만 그런 건 모른 척하자.
아무튼 노자는 도는 그런 데 소용이 없으니 도를 어디에 써먹을 생각일랑 아예 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도올처럼 ‘만물의 으뜸 같도다’라고 번역하면 30점 짜리다. 하긴 30점이 어디냐? 다음을 보자. 진짜 엽기가 나온다. 납량특집이다.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도올의 풀이를 먼저 보는 게 재미가 더 있겠다. 도올 가라사대,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힘을 푸는도다. 그 빛이 튀쳐남이 없게 하고 그 티끌을 고르게 하네’라고 해놨다. 캬~ 죽이지? 완전히 시다, 시. 철학가가 아니라 시인해도 되겠다.
뭐 어쩐다고? 날카로움을 어떻게 하고 얽힘을 풀어? 티끌도 고르고 뭐가? 도가? 도가 할 짓이 없어서 그런 짓을 한다 말이야? 도는 그런 작용들과는 전혀 관계 없는 물건이다. 뭘 무디게 하고, 풀고, 없게 하고, 고르고 하는 따위 잡스러운 일은 안 하는 게 도다. 노자의 말뜻을 너무 못 알아먹고 있다. 도올의 해석이 왜 납량특집 엽기 시리즌가 똑바로 푼 것을 보면서 한번 알아볼까? 좌기예(挫其銳)의 세 글자 가운데 ‘좌(挫)’는 ‘꺾을 좌’다. ‘其’는 ‘그 기’이고, ‘예(銳)’는 ‘날카로울 예’다. 가운데 ‘其’가 가리키는 ‘그것’이 뭔가 하면 바로 ‘도(道)’다. 그래서 이 말은 ‘도의 날카로움을 꺾고’라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도라는 물건의 형상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물건에서 날카롭게 삐쳐나온 것들, 즉 튀어나온 가지들을 꺾어버린다는 말이다. 삐죽삐죽 나온 것을 모조리 꺾으면 둥글든 육방체든 그 속의 틀이 드러날 것이다. 그렇게 도라는 물건의 뾰족하게 나온 부분을 모두 쳐내면 바탕 틀이 어떻게 생겼느냐? 그 모습을 묘사해놓은 말이 바로 화기광(和其光)이다. 여러 개의 빛이 어우러진 상태라 영롱하지만 형체가 없는 모습이다.
해기분(解其紛)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 ‘해(解)’는 풀어헤쳐서 가른다는 글자다. ‘분(紛)’은 어지럽고 난잡한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어지럽고 복잡하게 얽힌 것을 풀어서 헤치면 도가 어떻게 되느냐? 바로 ‘동기진(同其塵)’ 즉, 티끌과 같아진다는 것이다.
알기 쉽게 문장의 순서를 정리하면 이렇다. ‘좌기예즉화기광(挫其銳則和其光)이요,해기분즉동기진(解其紛則同其塵)이니’라는 하나의 문장이 된다. 다시 조선말로 풀면, ‘도라는 물건의 튀어나온 부분들을 잘라내서 그 바탕의 모습을 보면 비이 어우러지는 모습이요, 도의 복잡하고 난잡한 것을 풀어헤쳐서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낱낱의 티끌과 같다’이다. 고로 천하 만물이 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아무리 그것을 잘라보고 가루로 빻아보고 실타래를 풀 듯이 헤쳐봐도 빛이 어울리는 화광이나 먼지보다 작은 티끌 같은 것이어서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괜히 도가 어떤 건지 확인해보겠다고 파보고, 뒤집어보고, 헤쳐보고, 세워보고, 눕혀보고, 튀겨보고, 찔러보고, 잘라보고, 녹여보고 기타 등등 헛지랄 하지 말라는 충고다. 그 말을 못 알아듣고 도라는 것이 뭘 무디게 하고 풀고 고르고 하는 거라고 헛다리 짚고 자빠지면 어쩌자는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어.
도올은 자기 책에서 말하기를 주차장에서 차에 먼지가 쌓인 것을 보고, ‘아! 이게 동기진(同其塵)이구나 하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하는데 하기사 절 밑에 떡 파는 할머니 점심 문답에서 깨치는 수도 있으니 주차장에서 도를 얻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차에 먼지가 앉았으면 노자를 생각하기 전에 세차장으로 몰고 가는 게 낫다. 자동차 후드 위에 앉은 먼지가 극히 정교하게 앉았는데 이게 바로 도가 티끌을 고르는 것과 같다고 대오각성했다는 것이다. (노자 할아방은 창틀에 먼지가 앉았으면 그냥 털이개로 털어버린다.)그런데 더 웃기는 게 뭐냐면 그랜저와 체어맨에 먼지가 앉으니 그 빛이 안 튀고 조화를 이루더란다. 세상에 세차장 다 문닫겠다. 그걸 보니 바로 화기광이라는 소린데 내 차에 앉은 먼지는 지저분하기만 한 이유가 고물닥지 프라이드라 그런 모양이지. 벌써 그랜저하고 체어맨 같은 고급차에 의미를 부여하는 속물 근성으로 노자의 세계를 엿본다는 것은 눈먼 고양이 쥐 잡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여기가지만 해도 아직 봄날이다. 이 정도는 약간의 한자 실력이나 옥편 한 권만 들고 앉으면 어찌 해볼 수가 있다. 그런데 쪼금 뒤로 가면 진짜로 동양철학과 고대철학사상의 전반적인 이해와 깊이 있는 저변의 기초 없이는 도저히 접근해볼 수 없는 대목들이 나온다. 이런 대목에 이르러서 도올이 보여주는 촌극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코미디요, 처절한 몸부림이다. 내가 TV를 보다가 차마 마음이 아파서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안 돌아가는 대갈빡 갖고 얼마나 수많은 날을 노심초사, 고뇌 번민해 갖고 저 정도에 이르렀을까를 생각하면 부아가 연민으로 바뀐다. 사람은 자기 능력을 벗어나는 일을 하면 안 되는 거다. ‘주제파악’은 《도덕경》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도라는 것은 빛이 어루러지는 것과 같고 티끌과 같아서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말을 ‘도라는 것이 날카로운 것을 다듬고 얽힌 것을 푸는 조물주 비스름하고 영험 있는 귀신 같은 것’ 이라고 턱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자바지는 꼴을 앞에서 봤다. 만약에 도가 뭐를 다듬고 풀고 하는 거라면 우리는 도한테 엎드려 절하고 빌고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 기도란게 뭐야? 좀 풀어달라는 거잖아.
내가 잘 아는 어떤 아줌마가 있는데 웃기는 게 이 아줌마는 주식을 사기 전에 꼭 기도를 한다는 거다. 주가가 막 고라박으니까 이 아줌마, 팔아야 될지 갖고 있어야 될지 좀 가르쳐주십사 열심히 기도를 하던데 얼마 전에 만나보니 완죤 죽은 사람 얼굴이더라.
빚을 5천만 원이나 졌다더라. 생각 좀 해봐봐. 그래 여호와니 예수가 주식투자 전문가야? 펀드매니저야? 기도를 할 걸 하고 기댈 걸 기대야지. 노자는 뭘 다듬고 풀어 주고 하는 어떤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도를 그런 것으로 착각하고 혹시라도 절하고 기도하고 자빠지는 중생이 있을까봐 ‘도는 쓰려고 하면 텅빈 것이고 차 있지 않아서 서먹을 수 없다. 그 생긴 모양을 볼 것 같으면 그냥 어우러진 빛이고 티끌과 같아서 정체도 알 수 없는 것이니라’ 하고 거듭 말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도올이 번역하고 자빠진 꼴 좀 함 봐. 노자 말뜻하고 완전히 따로 노는 거야. 이런 강의를 해서 되겠나? 도올은 어려서부터 받은 기독교의 영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은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다음 구절도 좋은 예다.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담혜 사혹존 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
내가 있지. 도올에 대해서는 박사다. 내가 지가 쓴 책들을 대개 다 봤거든. 뭐 남는 게 있어서 본 게 아니고 횡설수설 해대는 게 읽어보면 유머집처럼 재미가 있는 거라. 와! 이런 걸 이렇게 받아들이는 돌대가리도 있구나, 하고 웃는 재미가 있지. 그래서 나는 이번에 《노자와 21세기》를 사기 전에 강의를 보면서 이 대목은 이 정도로 해석하겠지 하고 예상하면서 봤는데 그게 빗나가본 적이 없다.
이 구절에서 나는 도올이 상제(象帝)라는 것을 여호와나 하나님으로 번역할 거라고 짐작했거든. 그런데 내가 진짜로 상상도 못 한 게 튀어나온 거 있지. ‘여호와’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야. 미치겠더라. 여호와면 여호와고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여호와 하나님’이 뭐야? 세상에 그런 신이 어디 있나? 얘 정말로 무식한 애다. 꼭지 덜 덜어진 목사 중에는 ‘우리 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라 하고 자빠지는 인간도 있긴 있더라마는 철학을 한다는 인간이 단어를 이렇게 쓰면 안 되지. 잘 모르겠으면 ‘상제(象帝)’를 그냥 ‘코끼리 신’이라 하지. 그렇게만 번역을 했어도 50점짜리는 된다.
내가 애들 공부를 시켜보면 있지, 우등생이 의외로 쉬운 문제에서 틀릴 때가 있다. 그것은 아주 쉬운 문제를 어렵게 생각한 끝에 틀린 답을 고르기 때문이다. 보통 학생들은 쉬운 문제는 맞추고 어려운 문제에서 틀리잖아. 그런데 열등생은 어떤가 하면 쉬워도 틀리고 어려워도 틀린다.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냥 연필을 굴리거나 처음부터 끝가지 3번이나 4번을 써내기도 하지. 그런데 내가 ‘꼴통’이라 부르는 애들이 있다. 평소에 하는 걸 보면 그리 못할 것 같지 않은데 시험만 치면 바닥에서 헤엄을 치는 애들이다. 쉬운 문제는 어렵게 생각해서 틀리고, 어려운 문제는 우습게 보다가 틀리는 애들이다. 도올을 보면 예날에 가르치던 ‘꼴통’들이 생각난다.
상제(象帝)가 코끼리 신이지 뭐겠나? 안그러나? 그걸 어렵게 생각해서 머리를 굴리고 굴린 끝에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답을 적어내니 돌아가실 판이지 중국에는 코끼리나 기린의 서식지가 없다. 그러나 상고시대 유적에서부터 상아가 발견되는 것과 공자가 기린을 언급한 것을 보면 고대 지나인들이 코끼리나 기린이라는 동물을 알고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코끼리라는 동물은 중국 쪽에서 보면 인도에서 들어왔을 텐데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없고 먼 이국에서 가져온 이빨이나 풍문으로만 들을 수 있던 동물이기 때문에 약간 신비감을 가졌는지 지나인들은 코끼리, 기린, 낙타 등을 신성한 동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지나인들이 제(帝)라고 하는 것은 의인화된 신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점에서는 로마제국과 흡사하다. 네로나 시저 같은 황제도 신의 반열에 당당히 올라 있는 것처럼 상황오제는 전부 지상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물론 노자 할아방도 관운장과 같이 신의 반열에 올라 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지나인들에게는 별의별 것들이 다 신이 된다. 색깔이나 방위도 어엿한 신이다. 노랑 신은 황제(黃帝)라 하고 중앙의 신이며, 검정 신은 흑제(黑帝)로 북쪽의 신이고, 파랑 귀신은 청제(靑帝)면서 동쪽의 신이라고 하는 식이다. 유대인들이 여호와나, 창조주 혹은 절대자라는 의미로 부르는 하나님과 지나인들이 말하는 제(帝) 혹은 신(神)은 전혀 다르다. 무당들이 섬기는 관운장신이나 동자신 또는 할아방신의 개념과 비슷하다. 그러니 동물들도 신이 안 되란 법이 없지. 생명 있는 것이든 사물이든 그것의 영화(靈化)된 것들을 총칭해서 신이라 하는 거다. 그런 세계의 사상을 논하는 자리에 하나뿐인 유일신이라는 뜻의 하나님을 갖다 붙이는 것은 난센스다.
또, 이 온갖 잡다한 지나의 신들은 끗발에 따라 위계 질서가 있다. 신들의 세계는 군대식 계급사회다. 그래서 최고 대빵을 상제, 천제, 또는 옥황상제라 하고 저 아래 서낭당 고목 신가지 셀 수도 없는 신이 줄을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실은 그런 신들이 종종 겸직을 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황제(黃帝)’라고 하면 복희,신농과 더불어 중국에서 삼황 중의 한 사람이고 도교의 교조로 숭상받기도 하는 전설상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방위 중 한가운데를 상징하는 중앙신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5원색 중 노란색의 신을 뜻하기도 하고 오행(五行) 중 토(土)로서 흙의 신을 말하기도 하고 동물로서는 용신(龍神)이 되기도 한다. 이 전부는 같은 신이기도 하고 각각 다른 여러 개의 신이기도 하다. 지나인들이 생각하는 신의 계급으로 볼 때 아마 황제(黃帝)는 옥황상제의 아래쯤 될 것이다. 오행 중의 으뜸인 황(黃)의 레벨이다. 옥황상제는 오행(五行)을 낳은 음양(陰陽) 즉 태극의 레벨이다. 태극 위에는 뭐가 있어? 바로 무극(無極)이 있다.
태허(太虛) 또는 노자가 말하는 도(道)가 있다. 그렇다면 동물나라의 계급은 어떻게 될까? 일단 지나인 하면 용이 생각나는데 용의 계급이 황제와 비슷할 것이다. 그렇다면 옥황상제와 같은 레벨의 동물이 무엇이냐? 아마 노자는 그것을 코끼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는 노자나 공자가 코끼리를 직접 보았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인도 전문(傳聞)을 통해서 들었을 것이고 그것의 이빨이라고 하는 상아는 보았을 것이다. 이빨 하나가 이 정도로 큰놈이면 덩치가 용보다 더 크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코끼리를 용이나 봉황 앞에 세워 제일 계급이 높은 신의 상징으로 삼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노자가 말하는 상제(象帝)란 끗발이 제일 높은 신이다.
그런데 왜 노자는 상제(上帝)나 천제(天帝) 같은 단어를 사용치 않고 ‘상제(象帝)’라고 썼겠느냐 말이다. 《도덕경》을 읽으면서 그 이유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직 이 책을 읽을 때가 안 된 것이다. 내가 앞에서 하나 하나의 글자의 뜻만을 볼 게 아니고 노자의 필법과 글 버릇까지 살펴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가 이런 대목 때문이다. 노자가 《도덕경》5천 글자를 쓰면서 다른 사람이 한번이라도 사용한 적이 있는 ‘의미태의 고유명사’는 절대 쓰지 않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어야 《도덕경》을 번역한다고 덤빌 자격이 있다.
내가 노자의 글을 읽으면서 감탄한 것은 그 내용만이 아니라 이런 철학사상적 개념을 그 이전에 사용된 적이 있는 의미태의 고유명사를 단 하나도 글 속에 넣지 않고서 문장을 완성해냈다는 점이다. 《도덕경》에 사용된 모든 의미태의 고유명사는 노자가 직접 만든 오리지널 창조어 뿐이다. 모든 이름은 그 지적소유권이 오로지 노자한테 있는 말들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일상적인 한자어 가운데 노자가 그 원작자인 말은 무척 많다. 《도덕경》이 그 말들의 시원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남이 만들어 붙인 이름을 노자는 자기 글 속에서 단 한 마디도 쓰지 않는다. 이것은 노자의 엄청난 자존심 탓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도’라는 것은 노자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설명하는 무엇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설명에 필요한 모든 단어까지도 노자가 만들 수 밖에 없고 다른 어떤 글에 쓰여진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고집의 산물이라고. 즉 그대까지 사용되던 상제니 천제니 하는 것들도 노자가 말하는 상제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노자는 자기가 ‘상제’라는 이름을 만들어서 쓴 것이다 뒤에 나오는 ‘현빈’과 같은 단어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마치 불교에서 나오는 열반이나 도솔천 같은 지명, 여러 신장의 이름과 마찬가지다. 전부 석가모니가 지어낸 오리지널 창작 이름들이다.
그래서 《도덕경》을 해석할 때 노자가 지은 신의 이름인 《상제》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바꿔 번역할 수도 없고 번역해서도 안 된다. ‘상제(象帝)’가 뭐냐? 그냥 ‘상제(象帝)’다. 이 말을 ‘상제(上帝)’나 ‘천제(天帝)’ 또는 다른 신의 이름으로 번역하는 것은 노자에 대한 모욕이다. 《도덕경》이 어떤 책인지도 모르는 맹꽁이들이나 이런 노자 고유의 창조어를 번역하려고 육갑을 떠는 거다. 하물며 이 ‘상제’를 ‘여호와 하나님’이라 해서 되겠나? 차라리 노자 족보를 바꿔라.
노자의 말뜻을 풀어보면 도라는 것이 코끼리 신보다도 윗길에 있을 거다. 신들 중에 제일 끗발 높은 신보다도 먼저 생겼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노자는 도라는 것이 있어 보이기는 하나 하도 맑아서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짐작컨대 최고 높은 신보다도 먼저가 아니겠는가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도를 신(神)이나 제(帝)보다 앞서 존재하는 무엇으로 보는 것이다. 무엇을 다듬고 얽힌 것을 풀고 조화를 부리고 사람의 기도를 듣고 소원을 풀어주고 하는 영적인 존재들, 즉 신이란 것은 도의 다음에 나오는 개념이고 도는 그런 존재보다 선행하는 무엇이다. 이 소리다. 이제 알겠지? 도올이 해놓은 번역대로 《도덕경》을 읽으면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다는 것을 첨부터 끝까지 말장난이 돼버린다.
도올은 《도덕경》이란 책의 본질과 노자의 생각을 모르니 이 상제(上帝)란 말을 갖고 엄청 고민했을 거야. 코끼리 상(象) 자가 왜 들어갔을 까 하고 엄청 끙끙거리면서 침식을 잊었겠지. 《노자와 21세기》를 보면 그 고민의 편린들이 참으로 아름답게 어질러져 있다. 코끼리 상(象)자에는 ‘…인 것 같다’는 뜻이 있다고 우기면서 굳이 ‘It seems…’라고 영역까지 해서 영어 실력을 다시 한번 과시하고는, ‘여호와 하나님보다 앞서는 것 같네(‘같네’에 밑줄 쫘악)’라 해놓았다. 도올이 이 코끼리를 갖고 얼마나 심사숙고, 오매불망, 용맹정진을 했는지 생각해보면 원문을 한번 봐주지 않을 수 없다.
그대들이 帝를 말한다면 만물의 근원자인 道는 그 제보다 분명히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왜 노자가 ‘象’자를 썼는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는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한다. 道는 여호와 하나님(여호와 하나님에 밑줄 쫘악)보다 앞서는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순간에 노자는 바로 앞서 ‘나는 누구의 아들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직선 시간적 계시성(직선 시간적 계시성에 밑줄 쫘악)을 부정했던 그 부정의 논리에 위배되게 되는 것이다. 노자는 근원적으로 도가 그러한 존재의 시간적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서 개념화될 수 있고, 실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帝)보다 앞서는 것 같네’(象帝之先)라고 하여, 그 초개념적 문의의 맥락(초개념적 문의의 맥락에 밑줄 쫘악)을 명료히 한 것이다. 이로써 노자는 러셀 경이 비판하는 기독교의 논리적 위선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노자와 21세기》상권 199족 상단
누가 자기보고 철학하는 사람 아니랄가봐 그러는지 무지 어렵게 쓰고 있지. 나는 솔직히 저런 글 보면 딱 골치가 아프다. ‘직선 시간적 계시성’ 어쩌고 하면 나는 벌써 이해불가능이다. 될 수 있으면 어렵게 써야만 학자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날맹탕들이 가끔 보인다. ‘초개념적 문의의 맥락을 명료히 한다’ 같은 소리도 내 귀에는 강아지 풀 뜯어 먹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린다. 도올은 유식 칠갑을 떠는 저런 소리로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게 아니고 지 글에서 앞뒤가 맞는지 안 맞는지나 먼저 생각해보는 게 안 좋겠나?
도가 좌기예하고 해기분하는 것이라고 도올은 말했잖아. 그런 것들은 모두 시간적 사건이다. 무엇을 다듬고 풀고 하는 것은 시간적 개념상의 사건들인데 그런 것들을 하는 것이 도라고 풀어놓고는 뒤에 와서는 ‘道가 그러한 존재의 시간적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서 개념화될 수 있고, 실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노자가 주장하려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거든. 이런 것을 보면 도올은 철학을 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논리의 치밀함과 사고의 정연함과 문장 구조상의 엄격함과 접근의 합리성이 결여된 사람은 철학을 할 수 없다. 바로 앞줄하고 그 다음 줄 내용하고의 모순이 눈에 안 들어오는데 무슨 철학을 하며 뭔 놈의 설을 푼다 말이야?
만약에 뒷부분의 설이 앞에서 한 소리하고 틀리면 그것은 벌써 그 글을 쓴 사람이 자기 생각에 대해서 정리가 덜 됐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완성되지 않은 개념을 가지고 썰을 풀고 있다는 증거다. 《도덕경》이 만약에 그러한 책이었다면 나는 읽다가 집어던져 버렸을 거다. 그러나 노자의 얘기는 앞뒤에 어긋남이 없다. 전후에 모순이 없고, 수미가 일관되게 흐른다. 이런 빼어난 고전을 도올이 들어서 만화로 만들어버렸다. 워커발로 쪼인트를 까야 정신을 차릴 인간이지.
기독교의 여호와는 창조주다. 모든 것의 시작이 그로부터 비롯되는 태초의 아버지다. 이러한 모든 것에 선재(先在)하는 창조주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불합리한 것인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겠다. 도올까지도 그것을 알고 있을 정도이니까. 이러한 인격신(영적 권능 또는 힘의 행사자)의 존재 이전에 무엇인가를 상정하지 않으면 신학은 풀 수 없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그 존재의 이름을 노자는 ‘도’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신이나 제 등은 도에서 나온 것들이다. 도가 만물지모라고 할 때 신의 존재들조차도 그 만물에 포함된다. 이러한 ‘도’가 만물에 직접적인 효용가치가 있다고 하면 노자의 도론(道論)은 출발부터 무지막지한 반론과 공박의 목표가 되었을 것이다.
일단 노자의 결론은 그렇다. ‘도에 대해 말하기는 하지만 사실 도는 설명이 가능한 무엇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방법으로 이해를 할 것인가? 바로 도가 낳은 만물의 법칙에서 그것을 유추해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도’에 기반한 생활 윤리이며 규범이다. 그리고 그것에서 도출한 정치사상이 바로 노자의 ‘성인정치’다. 이 성인정치는 공자의 ‘왕도 정치’와 확실히 다른 정치론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이와 비슷한 철학적 토대 위에 서 있는 정치사상을 꼽는다면 나는 니체의 ‘초인정치’를 들고 싶다. 물론 양자는 같은 점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지만 위대한 두 스승의 응시점은 같다고 본다.
그건 그렇고 이 기회에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도덕경》이란 책의 성격에 대해서다. 인류 역사상 《도덕경》만큼 그 성격이 그토록 오랫동안 오해와 편견 속에 묻혀 있던 책은 없다. 주로 음양사상가에 의해 성립된 황노학으로부터 훗날의 도교에 이르기까지 노자의 얘기는 ‘도’에 대한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도’라는 하나의 종교철학과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법의 지침서인 것처럼 곡해되었고 왜곡되어 온 것이다. 도올의 번역뿐만 아니라 지금가지의 수많은 해석이 《도덕경》의 원문을 그런 방향으로 비틀어서 해석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도’란 노자의 이야기처럼 보거나 만지거나 설명하거나 분석해서 그 실체와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무엇이기 때문에 노자도 ‘도’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도덕경》은 무엇에 대해 써놓은 책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정치사상서’고 노자의 주장은 바로 정치론이다. 그리고 곁들여 뛰어나 처세학 교과서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형이상학적인 철학서가 아니라 극히 현실적이고 형이하학적인 정치논문이다. 조금 더 진도를 나가면 사람들이 노자의 이야기를 ‘도인술’ 또는 ‘신선술’ 같은 것을 가르친 신비스러운 비서(秘書)처럼 왜곡시켜 놓은 대목을 만나게 된다. 물론 우리의 도올도 별 수 없이 그에 편승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도덕경》의 올바른 원뜻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글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노자 도덕경》4장을 개괄해보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도올 번역
도는 텅 비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
그윽하도다!
만물의 으뜸 같도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힘을 푸는도다.
그 빛이 튀쳐남이 없게 하고
그 티끌을 고르게 하네.
맑고 또 맑아라! 저기 있는 것 같네.
나는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몰라.
하나님보다도 앞서는 것 같네.
바른 번역
도는 텅 빈 것이어서
쓰려고 하면 잡히지 않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도는 깊어서
온갖 만물이 그에서 비롯되니
도의 가지를 쳐내고 본래 모양을 보려 하면
빛이 어우러져 춤추는 것과 같고
어지럽게 얽힌 것을 풀어 헤쳐 그 속을 보려 하면
다만 낱낱의 티끌이 있을 뿐이며
맑고 맑아서 어찌 보면 있는 듯도 하건마는
그 비롯됨을 알 수 없구나.
다만 가장 높은 신보다도 먼저 있었음만 알겠구나.
'구름 이경숙 > 노자를 웃긴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자를 웃긴 남자 (제6장) (0) | 2020.09.29 |
---|---|
노자를 웃긴 남자 (제5장) (0) | 2020.09.28 |
노자를 웃긴 남자 (제3장) (0) | 2020.09.28 |
노자를 웃긴 남자 (제2장) (0) | 2020.09.27 |
노자를 웃긴 남자 (제1장) (0) | 2020.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