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고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도올은 전 국민이 보는 TV에 나와서 고전강의를 한 것이 아니라 삼류개그쇼를 한판 때린 거다. 개그쇼라는 게 사람들을 웃겨보자는 거라고 볼 때 우리는 웃어줘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지금부터 난다긴다하는 개그맨보다 더 골 때리는 도올의 명 개그쇼를 감상하면서 웃어보자. 나라꼴도 한심한데 이런 거나 보고 웃어야지 뭐 하겠냐?
노자 할아방의 불후의 명저 《도덕경》 원문을 보면서 도올의 개그 내용을 살펴보자.
도덕경 제1장의 첫 문장은 이런 소리로 시작한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올의 명저 《노자와 21세기》에 이 문장이 어떻게 풀이되어 있는지 한번 보자. 우리의 건아 도올 가라사대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네.
시작부터 황당해서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저런 소리를 보고 뭐라 그러는 줄 아나? 바로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 라 하는 거다. 첫줄부터 삼천포로 빠져버리니 끝에는 어디로 가겠어? 하기사 이게 도올의 되겠냐? 도올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칭송해 마지않는 왕필이부터 현대 중국과 대만․일본을 비롯 조선 핫바지 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자의 대가들이 한결같이 내놓은 해석이다.
원래 독창성이나 창의성은 별로 봐줄 게 없는 두뇌를 갖고 태어난 도올인지라 뭐 별다른 해석을 할 방법이 없었을 거다. 그저 전부 그렇다하니까 자기도 그렇게 강의했을 뿐이겠지. 이게 평범한 학자의 강의라면 봐주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칭 동양학의 대가요, 노자를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고 뻥을 치는 인간이 이런 것도 바로잡지 못하면 지 자랑이 얼마나 무색한 것이냐 말이다.
《도덕경》의 첫줄은 불과 여섯 자지만 《도덕경》전체 5천 글자를 관통하는 대단히 중요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올바르게 읽지 못하면 노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결코 알 수 없다. 생각 함 해봐봐. 사람이 책을 쓸 때 가장 고심하는 것이 첫 줄 첫 마디 아니겠어? 노자 할아방도 마찬가지다. 노자가 《도덕경》이라는 위대한 사상서를 쓰면서 그 첫머리를 저따위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로 시작했겠어?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라니? 이게 도대체 뭔 소리야? 그럼 도를 도가 아니라고 말해야 도가 되는 거야? 문장 성립이 안 돼. 우리 노자가 작문 배우는 초등학생이 아니잖아. 저런 유의 헛소리는 도올 아저씨가 전공이지 노자 할아방은 절대 저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는 사람이 아니다. 명확하고 분명하고 논리적으로 앞뒤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소리만 한 사람이다. 그리고 저런 엉터리 같은 말이 적힌 책은 사상서로 대접받을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저 번역이 맞다고 치면 노자의 작문이 엉터리가 되는 것이다.
지 말을 한문으로 쓴다면 ‘도왈도 도비도(道曰道 道非道)’가 되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가 될 수 없는 거야. 노자는 문장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구사하는 사람이지 애매하고 모호하게 적는 스타일이 아냐. ‘가(可)’자는 ‘무엇을 할 수 있다’ ‘해도 좋다’ ‘가하다’는 의미를 가진 글자다. 그래서 ‘도가도(道可道)’라는 말은 ‘도를 도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비상도(非常道)’는 ‘하지만 언제나 도라고 할 필요는 없다’ 가 된다. 즉 ‘도를 도라고 불러도 좋지만 꼭 도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소리다.
이 첫 문장은 노자가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무엇에 대해서 이름을 ‘도(道)’ 라고 붙인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자기가 지금부터 그것의 이름을 ‘도(道)’ 라고 하기는 하지만 꼭 그것의 이름이 ‘도(道)’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후대의 엉터리 학자들이 그 말을 못 알아먹고 2천 년 동안 헛소리만 해온 거라. 이름을 ‘깨달음’ 이라 해도 좋고, ‘섭리’라 해도 좋고, ‘법칙’이라 해도 좋다는 말이다. 그냥 이름을 붙이다 보니 ‘도(道)’라 했을 뿐이니 이름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지 않는가 고민하지 말라는 친절한 설명이다. 《도덕경》의 제1장은 노자가 어떤 것에 붙인 이름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을 첫줄부터 못 알아먹고 딴 동네 가서 놀고 자빠졌으니 그 담부터는 볼 것도 없이 죄 횡설수설이 될 수 밖에 없지.
불교가 동양정신의 거대한 기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현장의 탁월한 한역에 힘입은 바가 크다. 만약 범어로 된 불경을 현장이 한문으로 번역해서 중국에 소개할 때도 도올처럼 엉터리 짓을 했더라면 불경도 코미디 대본으로 전락했을 거다.
현장은 범어의 ‘니르바나’를 의역(意譯)하는 우매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냥 소리나는 대로 ‘열반(涅槃)’이라고 음역(音譯)한 것이다. 이게 위대한 번역이다. 열반이란 말에는 아무 뜻이 없다. 그저 이름이 열반일 뿐이다. 열반이란 이름에 어떤 뜻을 담으면 그건 이미 열반이 아닌 것이 돼버린다. 노자가 그것을 염려하여 첫머리에 저 말을 써놓은 것이다. ‘도라는 것은 그저 이름일 뿐이고 그것(이름)은 꼭 도가 아니어도 무방하다’라고 뒤에 가보면 알겠지만 이런 문장의 의미를 모른채 《도덕경》을 해석한답시고 사람 속 뒤집는 짓을 하고 있으니 도(道)를 ‘길’이란 뜻으로 받아들이는 촌극을 벌이게 된다. 도올은 아예 그것을 영역으로 ‘WAY’라 한다. 이게 개그가 아니면 뭐가 개그겠나? 도(道)를 조선말로 번역하면 ‘도’가 되고 영어로 옮기면 ‘TAO’가 된다. 이것을 ‘길’이라거나 ‘WAY’ 로 번역하는 인간은 노자가 뭔지도 모르는 인간이다. 이런 수준으로 노자를 팔면서 책장사 강의장사를 하고 앉았으니 어찌 나한테 욕을 안 얻어먹겠나? 계속해서 개그쇼를 감상해보자.
다음 구절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은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를 부연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이름으로 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반드시(꼭) 그 이름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사과나 애플이나 능금이나 이름은 어떻게 붙이든 그 가르치는 대상이 하나의 약속으로 받아들여지면 좋지 않은가라는 말이다.
도라는 이름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는 문장을, 도라는 것 자체의 본질에 대한 설명으로 오역해버리면 책 내용을 완전히 뒤바꾸게 된다. 《도덕경》이란 심오하고 고매한 철학사상서를 도올이 들어서 오역과 악역으로 황칠을 해놓은 탓에 누군가의 말처럼 초등학생 도덕교과서보다 못한 황당무계한 잡서가 돼버린 거다.
왜 그러냐? 한 줄을 잘못 읽어버리니까 그 다음 구절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앞줄과 뒷줄이 내용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전혀 연결이 안 된다. 그러니 이게 고전이라 대접을 받겠느냐 말이다. 《도덕경》이 그런 책일까? 노자가 문장 실력이 없어서 앞뒤 연결도 안 되는 수작을 그토록 늘어놓았을까? 노자 할아방은 개똥철학자가 아니다. 《도덕경》 전체 5천 글자는 그야말로 한 글자도 잘못 끼여든 것 없이 전체가 물 흐르듯 한 일관성과 논리성을 갖춘 경탄할 만한 명저다. 그러나 도올의 번역을 통해 《도덕경》을 읽으면 이건 완전히 유치원생이 일기 써놓은 책과 같다. 점심 먹은 내용 쓰고 그 다음에 아침에 늦잠 잔 얘기 나오다가 갑자기 자기 전에 TV 본 거 썼다가 또 오후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써놓은 애들 일기장 같다는 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글을 그렇게 쓰는 사람이 어찌 대사상가가 될 수 있으며 그런 책이 어찌 철학서란 말이야? 안 그래?
앞으로 자연히 알게 되겠지만 《도덕경》은 결코 그렇게 허술한 짜임새를 가진 책이 아니다. 소름이 끼치도록 논리 정연하고 완벽하게 짜여진 서술구조와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문장의 절약을 보여준다. 그 전체가 가히 천하의 미문이요, 명문이다. 이런 책을 망쳐놓는 꼬락서니를 보면 정말로 쪼인트를 까주고 싶다. 다름 구절을 보면서 정말로 그런가 확인하자.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노자와 21세기》에서 도올이 해놓은 번역은 이렇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컥! 목이 메인다. 이런 식의 번역문을 보면 결론은 둘 중 하나다. 노자가 엉터리이거나 도올이 사이비거나.
앞서 말했듯이 제1장은 ‘도라는 이름’에 대한 설명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때는 천지의 시작이고, (도라는)이름을 붙이고 보면 이것은 만물의 어머니가 되는 무엇이다’라는 말이다. 바로 도라는 이름을 붙여 노자가 지금부터 설명하려는 그 무엇은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냥 천지의 시작이니 언급할 이유가 없고, 도라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부터는 만물의 어머니로서 설명이 가능해진다. 고로 어쩔 수 없이 (도라는)이름을 붙이게 되었노라, 하고 작명의 동기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름을 붙이든 안 붙이든 우주는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주’라는 이름을 붙여놓기 전에는 우리는 ‘우주’에 대해서 논할 수가 없다.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이 세상의 근본 공간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인식 세계에 편입되는 것은 이름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다. 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노자는 이름을 붙이기 전의 무엇은 천지의 시작이니 따지기 어렵고, 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서야 만물의 모태로서 하나의 인식 대상이 되고 설명이 가능해진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 어렵고 난해한 철학적 서술을 불과 스물네 글자로 해치워버린 표현법은 실로 놀랍다.
천지지시(天地之始)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고 철학적 사변의 범주가 아니다. 그러나 만물지모(萬物之母)는 언어로 설명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무엇이 된다. 그 경계가 바로 무명(無名)과 유명(有名)인 것이다. 그 어떤 초월적이고 불가사의하며 전세계(全世界)적인 대상일지라도 우리는 이름만 붙이고 나면 그때부터 사유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음이다. 우주의 이전, 태초의 태초, 빅뱅 이전의 세계도 ‘무극(無極)’이라든가 ‘태극(太極)’이라든가 물리학적 용어로 ‘우주알(Cosmos egg)'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이름만 붙이면, 일단 언어적 표현의 대상물이 되고 언어의 범주에 포함되면 인식과 사유의 대상물이 된다는 철학적 통찰의 압축이다.
도올의 번역과 해석을 보라. 저게 무슨 철학이 되며, 사상씩이나 될 소리냐 말이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시작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이게 뭔 소리야? 아무 의미도 없고 내용도 없는 말장난이잖아. 이름이 없는 것이 어떻게 천지의 시작이 돼? 이름이 있는 것은 다 만물의 어미다 그 소리야? 이런 번역대로 해석된다면 《도덕경》은 쓰레기야. 도올이 그렇게 만들어버렸지만. 노자의 세계를 짐작조차 못 하는 범부가 《도덕경》을 강의한다고 나선 것은 비극이다. 그리고 그것이 통하는 것이 대한민국 동양학계의 현주소다.
다음 구절을 보자.
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고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역시 《노자와 21세기》의 번역을 먼저 보는 게 순서겠지.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만 본다’ 는 게 도올의 번역이다. 이게 무슨 소린지 이해되는 사람 있나? 욕심이 없으면 묘함을 보고 욕심이 있으면 가장자리를 보다니? 묘한 것의 반대어가 가장자리던가? 묘함과 가장자리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대구가 되느냐 말이다. ‘요’라는 글자는 ‘지름길,샛길 요’자다. ‘돌 요’로도 쓰인다. 우리가 ‘요행을 바란다’는 말을 쓸 때 저 ‘요’자를 쓴다. 글자의 어원을 거슬러 가면 아주 고대에는 ‘변방의 요새’를 뜻하기도 했다. 도저히 해석이 안 되니까 글자의 어원까지 동원한 끝에 ‘변방’을 ‘가장자리’의 뜻으로 끼워 넣은 것이 아닌가 싶은데 그렇다쳐도 읽는 발음도 틀려서 ‘요’를 ‘교’라고 읽고 있다. 발음이 틀린 건 지엽적인 문제니까 넘어간다 쳐도 도올의 해석대로 하면 《도덕경》은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나오는 허망한 책이다. 당최 뜻이 제대로 통하는 구절이 없는 거다. 저런 내용을 가지고 강의를 하는 것도 재주는 참 재주다.
노자가 도라는 이름에 대해 말하다가 왜 뜬금없이 전혀 엉뚱해 보이는 이런 소리를 이런 위치에서 불쑥하고 나오냐는 것이다. 도라는 이름과 무명이니 유명이니 하는 소리들과 천지지시나 만물지모가 나온 앞구절하고 이 구절이 도저히 연결이 안 되잖아. 이게 무슨 철학서냐? 그런 생각 안드나? 도올의 번역대로 《도덕경》을 보자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과연 《도덕경》이 그런 책일까? 노자가 전혀 문맥상 상관도 없는 소리를 노망든 할망구 방구 뀌듯이 아무 데나 싸질러 놓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노자가 엉터리로 써놓은 것이 아니라 도올이 번역을 엉터리로 해서 그리 보일 뿐이다.
이 구절에 쓰인 ‘욕(欲)’이라는 글자의 뜻을 생각해보자. 이름(名)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욕(欲)이란 글자가 튀어나오냐 말이다. 욕(欲)은 ‘하고 싶어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다. 무욕(無欲)은 당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되겠다.
그렇다면 위의 문장에서 무엇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냐를 생각해야 한다. ‘욕(欲)’의 목적어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이름(명)이다. 그래서 ‘고상무욕(故常無欲)’은 ‘꼭(굳이)(도의)이름을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하는 뜻이다. ‘이관기묘(以觀其妙)’ 이 말은 ‘그(도의) 묘(妙)를 볼 것이고’로 해석하면 된다.
이어서 역하면 ‘도에 이름을 꼭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도의 묘함을 볼 것이고’가 되겠다. 앞에서 노자가 뭐라고 했지? 무명이면 천지지시라고 했잖아.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천지지시의 묘를 보게 된다는 말이다. 다음 문장의 뜻은 자연히 이와 같다. 상유욕(常有欲), 즉 ‘도에 굳이 이름을 붙이고자 하면 그 요를 볼 것이다.’ 두 문장을 연결해서 주해를 달아 읽어보자.
‘굳이 도에 이름을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천지지시의) 묘를 볼 것이고, 이름을 붙이고자 하면 (만물지모)의 요를 보게 된다’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묘와 요의 의미가 무엇이냐다. 무엇일까? 노자는 무엇을 묘라 하고 무엇을 요라 했을까? 그 것은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가장자리를 본다’는 식의 번역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다. 고전을 그렇게 함부로 지 멋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특히 전 국민이 다 보는 TV에 나와서 자칭 동양학의 대가라 하면서 이렇게 몰상식한 소리를 하면 안 되지.
차양자동 출이이명
此兩者同 出而異名
암만 머리가 나쁜 도올이라도 이 정도 쉬운 문장이야 알지 않겠어? 그런데 여기서 이 시대의 청재 도올은 그 진면목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번역하여 가로되, ‘그런데 두 가지는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했을 뿐이다.’ 정말 번역 죽인다. 기가 막힌다. 다른 노자 주해서를 보면 ‘이 둘은 같은 근본에서 나왔으나 이름을 달리한다’라고 해놓은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인 노자 주해서의 번역을 가지고 아주 멋을 부려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얼마나 멋지나? 도올은 소설을 써도 아주 잘 쓰겠다. 그러나 양쪽 다 노자의 본 뜻과는 거리가 먼 소리들이다.
한자는 소리글자가 아닌 뜻글자이기 때문에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옮겨 쓰는 기능이 적다. 검인정 교과서의 문법이 없던 시대의 기록인 《도덕경》을 읽으려고 하면 우리는 노자란 사람의 필법을 먼저 살펴야 하고 그가 주로 사용하는 어순과 글 버릇을 파악하지 않으면 오역이 나오기 쉽다.
그리고 고려해야 할 또 한 가지 문제는 문장으로서의 한문은 띄어쓰기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읽을 때는 오히려 정확하고 규칙적인 띄움을 사용한다. 그래서 만약 엷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이라면 전후 네글자씩 둘러 갈라지지 세 글자, 다섯 글자, 혹은 여섯 글자 두 글자 식으로 문장을 만들지 않는다.
만약 앞의 네 글자가 ‘◎◎◎◎’이면, 뒤의 네 글자도 ‘◎◎◎◎’가 되고 앞부분이 ‘◎◎◎ ◎’이면 뒤도‘◎◎◎ ◎’이 되도록 문장을 틀에 맞춘다는 것이다.
노자도 《도덕경》을 기술할 때 이런 규칙성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차양자동 출이이명(此兩者同 出而異名)’이란 문장을 해석할 때 우선 이 문장의 구조를 살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차양자동(此兩者同)’이란 앞부분을 띄워쓰면 ‘차양자 동’이 된다. 즉 ‘이 두가지(此兩者)는 같다(同)’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뒷부분도 같은 구조로 띄어 읽으면 정확한 의도가 나온다. ‘출이이 명’이 되는 것이다. 즉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出而異) 이름(名)이다’와 ‘다른 이름으로 나온 것이다’는 비슷해 보이지만 의미가 다르다. 후자를 택하면 앞에 나온 내용들과 논리적으로 연결이 안 되는 것이다.
앞부분에서 노자가 이야기해왔던 것은 도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와, 이름을 붙이고 안 붙이는 것의 차이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다. 무명(無名)이냐 유명(有名)이냐 즉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말한 것이지, 이름이 같으냐 다르냐를 말한 것이 아니다. 천지지시와 만물지모의 차이는 이름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묘와 요도 마찬가지로 이름을 붙여 부를 때와 이름이 없어 부를 수 없을 때의 차이이다. 따라서 저 문장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되어야 정확한 것이 된다.
‘저 두 가지는 같은 것인데, 차이가 나는 것은 이름이다(있느냐,없느냐)’
보고 있듯이 노자의 글은 건너뛰거나 난데없이 엉뚱한 글이 하나씩 끼어들거나 논리가 엉뚱한 곳으로 튀거나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돼서 물처럼 끊기지 않고 흐르는 사상의 강이다. 이것을 번역을 제대로 안 하니까 그냥 중구난방 좌충우돌하는 글이 돼버리는 거다. 사실 나는 도올이 ‘고전강의’를 하면서 노자 할아방을 제대로 설명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이게 그냥 난장판이 되더라 말이지.
하느니 지 자랑이요, 나오느니 억지고, 내미느니 무식이라 도저히 참고 봐주기가 어렵더라. 이제부터 보면 알겠지만 첨부터 끝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고, 제대로 아는 게 전무한 거야. 그리고 입만 열면 자랑해대는 게 그 놈의 학벌이야. 지가 대학 다닐 때부터 ‘노자’를 읽고 뿅 가서 평생을 심취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뿅 갈 게 뭐 있냐 말이다. 지가 번역해 놓은 노자는 뿅 갈 게 하나도 없는 황당한 책인데.
다음 구절을 보자.
同謂之玄 玄之又玄
동위지현 현지우현
갈수록 한자가 쫌씩 어려워지네. 이렇게 어려운 한자가 나오니 도올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이런 어려운 한자들이 앞으로 계속 나올 텐데 도올이 그 한심한 한문 실력을 갖고 어찌 해석을 하고 강의를 하느냐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동양학의 대가 도올을 굳게 믿자. 어찌 해놨는지 같이 보자.
도올이 이 구절을 풀이하여 가라사대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고 한다. 가물고 또 가물토다’라 해놨다. 역시 도올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대문호다. 표현 함 봐봐. 철학서의 번역이 아니라 완전히 시다. 근데 문제는 일단 도올이 번역만 했다 하면 우리는 알아먹을 수 없는 소리가 돼버린다는 거다. 그런 것을 가물타고 하다니? 도대체 뭐가 가물타는 것이고 가문 게 뭐야? 도올이 하는 소리를 주욱 이어서 한번 볼까?
‘욕심이 없으면 묘함을 보고 욕심이 있으면 가장자리를 보는데, 이두가지는 같은 것이고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했으니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 하니 가물코 또 가물토다.’
이게 뭔 소린지 다 알지? 바로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다. 철학이라는 게, 사상이라는 게 무식한 민초 골탕 먹이는 소리가 아니다. 누가 듣고 누가 보더라도 타당성과 합리성과 논리성과 유용성을 가진 이야기를 철학이라 하고 사상이라 한다. 도올이 번역해 놓은 것이 맞다고 치면 노자철학이 철학이 될 수 있겠나?
‘현(玄)’은 ‘검을 현’이다. 그러나 검은 색을 가리키는 ‘흑(黑)’자와는 쓰임이 다르다. 천자문의 첫 구절에 나오는 천지현황(天地玄黃)이란 말처럼 하늘의 색이고, 신비스러운 궁창의 색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붉은 빛을 띤 검은 빛으로 검붉은 빛이라 할 수 있으나, 빛깔이 짙어서 무슨 색인지 구별이 안 가는 그런 색이다. 그래서 좀체 이해하기 어려운 성질을 나타내는 색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것을 ‘가물한 색깔’이라고 표현해서 안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표현이 아니라 내용이다.
‘동위지현(同謂之玄)’을 직역하면 ‘검은 것으로서 같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검기는 마찬가지다’가 된다. 뭐가? 바로 이름을 붙이기 전의 그 무엇(도)이나 (도라고)이름 붙인 그 무엇은 사람이 뭐라고 나발을 불든지 검기는 마찬가지니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도올은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고 한다’고 해 놓으니 이거 참 골 때리는 소리가 돼버린다. 뒷부분의 ‘현지우현(玄之又玄)’은 더욱 기가 막힌다. 이 구절을 ‘가물고 또 가물타’라고 해서 어쩌자는 거야? 그래 가지고 앞뒤가 연결이 되기나 하냐 말이다. ‘현지우현(玄之又玄)’은 이놈도 검고 저놈도 검다‘라는 말이잖아. 암만 한자를 제대로 몰라도 그렇지 이 정도의 한자를 갖고 번역조차 똑바로 못 하면 어찌 동양학을 하며, 어찌 노자를 갖고 설을 푼단 말이냐? 대책이 없다. 21세기가 걱정스럽다.
앞의 현(玄)은 묘(妙)의 성질이고 뒤의 우현(又玄)은 요(徼))의 성질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고 묘를 보거나, 굳이 이름을 붙여서 요를 보거나 간에 이 두 가지가 검기는 마찬가지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이 검어서 양자는 결국 같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자기가 지금 ‘도(道)’라고 이름을 붙여서 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것의 이름을 편의상 ‘도’라고 붙이긴 했지만 그 이름에 신경쓰지 말자는 소리다. 그 이름이 도건 다른 무엇이건, 굳이 도라고 이름을 붙이고 보건 이름 없이 보건 그것이 검기는 마찬가지고, 이라 봐도 검고 저리 봐도 검은 놈이니 검은 것만 보면 되지 이름이 무슨 상관이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노자가 하고 싶은 말, 즉 결론이 나온다.
衆妙之門
중묘지문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름을 붙이든 안 붙이든, 묘를 보건 요를 보건 자기가 지금 도라고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모든 묘한 것이 나오는 문이다’ 이런 말이다.
제1장의 중심어는 ‘명(名)’이고, 결론은 ‘도이중묘지문(道以衆妙之門)’이다. ‘도는 모든 오묘함이 나오는 문이니라. 그러니까 그쯤만 알고 다음 설을 들어보란 말이야’ 하고 《도덕경》의 서두를 꺼내고 있음이다. 혹시나 사람들이 ‘도(道)’라는 이름에 사로잡힐까봐 노파심으로 서두에 못을 박아두는 것이다.
《노자와 21세기》에서 도올이 해놓은 마지막 구절의 번역은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겠는가!’이다. 제1장에서 그래도 비슷하게 찍은 건 마지막 한 줄이다.
도올의 개그쇼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2장3장으로 넘어가면 갈수록 골 때리는 개그가 나온다. 웃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봐야 될 거다. 계속 봐주자.
제2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제1장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자. 《도덕경》의 원문과 도올의 번역문과 내 번역문을 차례로 보면 무엇인가 느끼는 게 있을 거다.
도올번역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를 본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 했을 뿐이다.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라고 한다.
가물코 또 가물토다.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는가!
소감이 어떠냐? 저게 천하의 대 사상서라는 《도덕경》의 서문이란다. 당최 후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먹을 수가 없지? 어찌된 글이 그래, 불과 13줄밖에 안 되는데 서로 연결되는 소리가 하나도 안 보이느냐 말이다. 13줄이 전부 딴 소리다. 글이라는 것이 앞줄의 내용을 받아 뒷줄로 이어져야지 줄마다 딴 소리를 하는 글이 어디 있나? 이래 놓고 이걸 가치로운 고전이라고 21세기 사람들한테 내민단 말이야?
만약 이게 정말 《도덕경》이라면 내가 뭐 할 짓이 없어서 도를 배우고자 하겠나? 내가 노자를 좋아하고 《도덕경》을 탐독하는 이유라면 그 말들이 전부 도리에 맞고 이치에 합당하고 앞뒤가 딱딱 어울리는 고매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자의 말씀을 저렇게 조잡한 맹탕으로 둔갑을 시켜 갖고 사람들한테 팔아먹는 꼴을 두고봐야 되겠나 이 말이다.
제대로 된 구름의 번역을 보고 다음 장으로 가보자. 진짜 골 때리는 쇼가 벌어지고 있으니.
바른 번역
도(는 그 이름을)를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 이름이) 꼭(항상)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이름으로(어떤 것의)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꼭(항상) 그 이름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이니 따질 수 없고
(우리가)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름을 붙이기 전(도의 이전)에는 (천지지시의)묘함을 보아야 하지만
(※묘함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붙인 후(도의 이후)에야 그것의 요(실상계의 모습)를 파악할 수 있느니라.
이 두 가지는 똑같은 것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 이름뿐이니
(도 이전의 세계와 도 이후의 세계가)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은 것이니
(도와 도 이전의 무엇은 같은 것이니라)
도는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니(지금부터 그것을 말하려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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