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이제《도덕경》제3장이다. 노자의 말씀은 더욱 깊어지고 도올의 개그도 더욱 웃기는 도를 더해간다. 첫 구절부터 보자.
不尙賢 使民不爭
불상현 사민부쟁
이 정도에서는 설마 한 줄 정도는 맞겠지 하고 기대하는 사람이 많겠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우리 도올이 첨으로 제대로 맞춘 게 이 구절이다. 3장부터는 출발이 좋아서 지금부터는 도올이 뭔가를 보여주려나 보다 기대를 하게 만든다.
‘상(尙)’은 ‘높일 상’ ‘숭상할 상’ ‘우러를 상’이다. 그러니까 ‘상현(尙賢)’이란 말은 ‘현명함을 높이 산다’는 의미다. 이때는 현명함이나 유식함, 똑똑함 등을 총칭하는 것으로 봐도 되겠고, 현명한 사람, 유식한 사람의 뜻으로 읽어도 큰 문제는 없다. 그래서 번역을 하면 ‘현명함(또는 현명한 사람, 현자)’을 높이 받들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투지 않게 된다. 똑똑하고 유식하고 현명한 것을 높이 사는 사회는 경쟁사회다. 똑똑하고 아는 것을 서로 재고 경쟁해서 보다 잘난 놈이 위로 가는 세상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자연히 경쟁과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세상은 이러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지금의 우리 기준으로 보면 아프리카나 인도네시아의 오지에나 가야 똑똑한 게 별 볼일 없는 동네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내용보다는 우리의 도올이 이렇게 어렵고도 긴 문장을 제대로 읽었다는 사실이 더욱 기쁘다. 다음 줄도 제대로 읽어주면 얼마나 좋겠나? 맞게 해놨는지 함 볼까?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불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
궁금하니까 도올의 답지를 얼른 보자. 뭐라고 해놨냐 하면.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하지 말라!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이 되지 않게 할지니’라 해놨네.
역시! 도올은 천재다. 21세기를 걱정할 자격이 있다. 한자 참 잘 읽는다. 도대체 이렇게 읽는 한문이 어디 있단 말이야? 우선 띄어읽기를 제대로 하니까 문장이 웃겨진다. 이 쉬운 문장을 하나같이 ‘불귀 난득지화’로 엉터리로 읽고들 자빠진다. 이 문장의 올바른 읽기는 ‘불 귀난득 지화’다. ‘얻기 힘든 재화를 귀하게 하지 마라’고 하면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귀하니까 얻기 힘든 재화지.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 같으면 그게 ‘난득지화’일 수가 있느냐 말이다. 얻기 힘든 재화를 귀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냐 하면 귀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난득지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얻기 힘든 재화를 귀하게 하지 마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 모순이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맞지?
여기서의 ‘화(貨)’라는 것은 보물(寶物)을 말하는 글자가 아니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경제적 재화를 뜻하는 글자다. 만약에 ‘얻기 힘든 재화’의 의미가 귀한 보물과 같은 뜻이었다면 ‘난득지보(難得之寶)’라고 썼을 것이다. 한번 누군가가 ‘난득지화’라고 읽어버리니까 2천5백 년 동안 ‘난득지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고정관념이란 이렇게 무섭다. 한번 굳어진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불귀 난득지화’가 아니라 ‘불 귀난득 지화’이다. ‘귀난득(貴難得)’은 ‘귀하고 얻기 어렵다’는 말이다. ‘불(不)’은 ‘귀(貴)’와 ‘난득(難得)’의 양자에 똑같이 붙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풀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불귀(不貴),불난득(不難得)’ 즉 ‘귀하거나 얻기 어렵게 하지 않는다’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필수적인 요소들이 귀하고 얻기 어려우면 사람들은 도적으로 변하게 된다는 뜻인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사흘 굶고 담 안 넘는 사람 없다’는 속담들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그러므로 어찌해야 한다?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리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공자나 맹자보다 노자가 위대한 점은 바로 이런 데 있다고 나는 본다. 아무리 인의예지신을 떠들고 예의와 범절을 가르치고 인이니 예니 나발을 불어도 근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 배부른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노자는 갈파하고 있다. 인이니 예니 도덕이니 하는 것보다도 우선 창자를 채우고 따뜻하게 자는 것이 선결문제라는 것을 노자는 냉정하게 말하고 있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을 도외시한 도덕적 규범들을 노자는 냉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고로 성인의 다스림이란…’하고 다음 구절의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천재 도올이 번역이라고 한 고락서니를 함 봐봐.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하지 마라?’ 무슨 재주로? 도대체 어떻게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지 않게 만든단 말이야? 얻기 어려운 재화는 당연히 귀한 것이고 이미 귀하지 않게 된 재화는 난득지화가 아니잖아. 이런 엉터리 작문이 어디 있단 말이야? 안 그래? 그리고 이 문장을 그렇게 읽으면 다음 글들이 연결이 되니나 하느냔 말이지.
도올이 번역을 다소 틀리게 한 정도면 내가 이렇게 심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건 그냥 노자 말씀을 자기 멋대로 바꾸고 뒤집어서 흰 책을 깜장 책으로 만들고 있으니 내가 이러는 거다. 그래도 기특한 것이 다음 줄에 가서는 또 바로 읽은 줄이 나온다. 열에 하나둘은 맞더라 하는 게 이런 거다.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불견가욕 사민심불란
‘욕심 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는 것이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지 않는 길이다.’ 이 정도 문장이라도 읽을 줄 아는 게 어디야? 대견스럽지. 근데 말이다. 이렇게 한번씩 잘하다가도 두 줄을 못 넘기는 거다. 다음 줄에 가면 또 자빠진다. 어쩌는지 계속 따라가보자.
아이고! 이기 뭐야? 어구야 기네. 우리 도올이 큰일났다. 도올은 네글자만 넘어가면 읽지 못하는데 이리 긴 글을 어찌 읽겠나?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시이성인지치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
도올이 해놓은 소리는 볼 것도 없다. 일단 문장이 이 정도 기니까 백프로 틀렸을 거라고 보면 된다. 우선 내가 제대로 읽고 도올이 거는 나중에 봐도 되겠다.
‘시이성인지치(是以聖人之治)’는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이란…’의 뜻이다. 여기서 ‘그러하므로’가 무엇인지는 앞에서 설명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허기심(虛其心)’이니까 이거는 ‘마음을 비우고’라는 소리네. 그 담에 ‘실기복(實其腹)’은 ‘배를 채우라’는 소린가 보네. 그러면 ‘약기지(弱其志)’는 뭘까? ‘뜻을 약하게 해라’는 말씀이겠고, ‘강기골(强其骨)’은 ‘뼈를 튼튼하게 해라’ 이 소리네. 에이, 뭐 별로 어려운 소리도 아니네. 괜히 쫄았잖아.
쭉 붙여서 함 읽어볼까?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이란 백성들의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워주며,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소리네.
조금 해설을 붙이면, ‘성인이 백성을 다스리는 요체는 마음과 뜻 즉 심지(心志)를 비우고 약하게 만들고(虛弱), 반면에 그 배와 뼈는 채우고 강하게(實强)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로써 노자정치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구절이다. 다시 말하면 백성이 쓸데없는 야심이나 큰 뜻을 세우는 주제넘는 생각을 못하게 하면서 그 대신 배부르고 등 따시게 해주라는 소리다. 복실골강(腹實骨强)이란 쉽게 말하면 ‘배부르고 등 따시다’는 말이다. 노자는 정치사상적으로는 우민정책(遇民政策)의 주창자로 보이기도 한다. 단 그의 우민은 애민을 위한 우민인 것이 마키아벨리즘의 우민정책과의 차이점이다. 즉 다스리는 자를 위한 우민이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백성을 위한 우민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배부르고 등따신 백성이 제일 행복한 백성이라고 보는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성인의 정치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라의 다스림에 있어서 백성의 기본적 생존권 보장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지상의 과제라는 것’이 노자가 말하는 이 장에서의 핵심이다. ‘일단 사람들의 배가 불러야 된다’가 노자정치사상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정치사상의 핵심이라 하기에는 너무 번하고 쉬운 소리인 것 같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이것이야말로 인류 역사에 있었던 모든 정치론의 온갖 구라들과 잡소리를 전부 다 합친 것보다 훨씬 가치로운 한마디다.
‘백성의 배를 채워주고 뼈를 튼튼하게 만들어라!’ 이 소리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소리인 거 같나? 노자 아니면 못 하는 소리다. 이게 위대한 사상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얼마나 쉬운 소리야? 그래도 예수 아니면 못하는 소리다. ‘백성들 배부터 채워줘’ 오직 노자라 할 수 있는 소리다.
공자 말씀 전부를 놓고 노자의 이 한마디를 놓고 저울에 달면 노자쪽으로 추가 기우는 거야. 정치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어. 정치란 어떤 의미에서는 이 한마디가 시작이고 긑이고 알파요 오메가고 이게 전부야. 이거 외에 정치가 뭐 있겠어? 이거만 하면 정치는 다 된 거야. 나머지는 사실 잘 안 돼도 심각할 일이 없어. 듣고 보면 뻔하고 뻔한 소리고 말할 필요도 없는 얘기 같지만 이 한가지를 못 해내는 것이고 가장 쉽고 기본적인 것이 가장 어려운 거야. 그리고 그런 것을 잘라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위대한 사상가인 거고, 사상이나 철학이 무지 어렵고 난해한 구라를 풀어내서 사람들 골에 쥐나게 만드는 게 결코 아니야. 노자의 위대함은 바로 이런 것에 있어.
이것을 얼핏 보고 설핏 보면 마치 백성을 힘센 소나 배부른 돼지로 만들자는 우민정책으로 보이지만 백성들 배 채워주는 정치가 제일 아냐? 맞지?
그러면 심허지약이 왜 나왔겠어? 백성이란 건 복허(腹虛)하고 골약(骨弱)하면 자연히 심실(心實)하고 지강(志强)하게 되는 거야. 복허골약하면서 심실지강한 넘들이 뭐겠어? 바로 투사들이고 혁명가들이야. 복실골강하면 심허지약해지니까 어떻게 해서는 백성들 배는 부르게 해라.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귀하게 만들거나 얻기 힘들게 해서는 정치고 나발이고 쥐뿔도 되는 게 없을 거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어. 근데 우리의 주인공 도올이 말하는 꼬락서니 함 봐봐.
노자의 우민정책이 얼마나 심오한 사상 철학적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인가는 앞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쯤에서 밀어놓았던 도올의 명오답을 보자고. 척 보니까 도올이 써낸 건 오답이 아니라 아예 희한한 창작논리를 만들어냈어. 심허지약하게 만드는 한편 복실골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심허로서 복실하게 하고 지약으로서 골강하게 만든다 하는 거야. 즉 마음을 비우면 배가 차고, 뜻이 약하면 뼈가 강해진다는 골 때리는 소리를 하고 자빠진다.
《노자와 21세기》 상권 155쪽의 원문을 같이 보자.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이상적 정치)은 그 마음을 비워(虛其心) 그 배를 채워주고(實其腹), 그 뜻을 약하게 하여(弱其志) 그 뼈를 강하게 해준다(强其骨). 여기서 心이란 인간의 타율신경계의 모든 복잡한 이론을 말한다. 腹은 인간의 자율신경계의 상징이다. 자율신경계의 특징은 ‘스스로 그러함’이다. 그것은 곧 ‘自然’이다. 그것은 곧 ‘無爲’를 말하는 것이다.
어때? 환상적인 개 풀 뜯어먹는 소리지? 노자가 어이가 없어서 웃지도 못하고 돌아앉았다 하더라. 노자는 자율신경계니 타율신경계니 하는 것을 알지도 못한 사람이다. 복(腹)은 그저 사람 밥통을 말한 것이고 그걸 채워주라고 했을 뿐이지 ‘스스로 그러함’을 밥통에서 찾은 적이 없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면 배가 채워진다는 건 무슨 논리야? 뜻을 약하게 가지면 뼈가 강해진다는 소리는 또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도올이 한의학 공부를 하더니 인체이론도 지 멋대로 막 만들어내네? 배가 불러야 생각이 없어지고 뼈가 튼튼하면 심지를 굳힐 일이 없다는 소리를 거꾸로 뒤집어서 나발 불고 있잖아.
사람이 배가 고프면 악에 받치는 법인데, 악에 받치니까 배가 고프다는 소리하고 똑같아. 노자가 단순하게 ‘백성들이 쓸데없는 생각을 못하도록 하고 배부르고 등 따시게 해주면 그게 젤 좋은 정치야’히고 말한 것을 도돌은 확대발전, 침소봉대, 논리비약, 견강부회한 끝에 이런 어마어마한 독창적 이론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노자와 21세기》에 나발을 불어 놓기를….
인간은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배로 산다! 이것은 우리의 통념을 깨는 노자의 지혜다. 그리고 이것은 뇌 중심의 서양 인체해부학에 대하여 복부중심의 한의학적 인간학의 지혜로운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청하는 것이다.
불후의 명저 상권 156쪽
노자의 지혜 좋아하네. 우리 노자한테 저런 소리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는다. 노자는 도올처럼 머리가 복잡한 사람이 아니다. 간단명료하게 정리하는 단순성과 순진성이 특징이다. 그래서 노자의 말에는 파격이 없다. 다 상식적인 이야기다. 자율신경계가 나오고 인체해부학이 나오고 ‘한의학적 인간학의 지혜로운 가치’까지 나오면 노자는 할말이 없지.
마음을 비운다고 해서 불러지는 배를 갖고 있다면 세계의 식량난이 사라질 것이고 뜻을 약하게 하면 강해지는 것이 사람의 뼈라면 의술이 필요 없겠다. ‘A도 하고, B도 한다’는 문장을 ‘A를 해서 B가 되게 한다’로 바꿔버리면 이 두 문장은 전혀 다른 것이 돼버린다. 《도올 판 노자》는 《노자의 노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이 둘은 공통점이 전혀 없다. 도올의 노자강의를 듣고 노자를 알았다는 사람은 큰 착각을 하는 것이다. 무늬만 노자를 배웠고 제목만 노자인 도올의 황당무계한 학설을 들었을 뿐이다. 나는 사람들이 도올의 TV강의를 보고서 노자를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리를 떠든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할까봐 그게 걱정이다.
이 다음에 노자사상의 참으로 심오한 문장이 나오는데 도올은 여기서 개그쇼의 진수를 보여준다. 기대를 갖고 다음으로 넘어가보자.
지금부터 노자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물론 우리 도올이의 진면목도 함께.
常使民無知無慾 使夫智者不敢爲也
상사민무지무욕 사부지자불감위야
일단 문장이 길고 조금 어려운 한자들이 보인다 싶으면 도올이한테는 기대할 게 없다.
당근 틀린다고 보면 틀림없지만 그래도 어떻게 틀리는가가 궁금하고 재밌는 거다. 도올은 열심히 틀리고 부지런히 틀림으로써 사람들을 웃긴다는 자기 일을 충실하게 하고 있다. 그 열의를 봐서 같이 보고 웃어주자.
도올 가라사대 ‘항상 백성들로 하여금 앎이 없게 하고 욕심이 없게 한다. 대저 지혜롭다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해놨거든.
웃기지? 이리 웃기는 개그맨 첨 보잖아.
앞 구절은 그런대로 뜻이 통한다고 치고 뒤의 구절을 ‘지혜롭다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라고 읽고 자빠지는 꼴을 보면 도올은 노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사부지자 불감위야(使夫智者 不敢爲也)’ 이 한마디야말로 노자의 정치사상이 단순한 우민정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도덕경을 읽으면서 노자 할아방이 이 한마디를 넣어놓은 이유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공부 헛했다는 증거지. 안 그래도 나쁜 머리에 오만 가지 쓸데없는 지식을 잡동사니로 쌓아놓고 정리도 못 하는 게 마음속에는 오만과 편견만이 꽉 차 있으니까 노자의 글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겠나 말이다.
앞 구절에서 노자가 뭐라고 했나? ‘언제나 백성들을 잘 모르게 하고 욕심이 없게 만들어라’ 했잖아. 이 말은 이것만 가지고 보면 대단히 반인류적이고 비인도적인 반동사상가로 오해받을 만하다. 그래서 노자가 2천 년 동안 유자(儒者)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거잖아.
그것은 왕삐라는 애송이부터 도올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이 그 말 다음에 노자가 뭐라 했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었다. ‘상사민무지무욕(常使民無知無慾)’이라는 말은 쉽게 풀면 백성을 아무 것도 모르고 욕심도 낼 줄 모르는 촌무지렁이로 만들어야 된다는 소리다. 그저 ‘송충이는 솔잎 먹고 살아야 한다’ 하면서 자기 주제파악을 확실히 하고 땅이나 파면 된다는 그런 말로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백성을 그렇게 만든다 쳤을 때 아는 것도 없고 욕심 낼 줄도 모르는 어린 백성은 그야말로 통치자의 노예가 될 게 뻔하다. 무지하고 무욕한 백성이야 사실 지배 세력에게는 이상적인 백성일 테고 심하게 말하면 그들이 소유한 가축 무리와 마찬가지 일테니까. 많이 알고, 욕심 만만한 소수의 무리(지배계층)와 아무 것도 모르고 욕심도 없는 어린 백성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과연 노자는 이상국가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지배계급과 일반 백성의 구별이 없이 몽당 다 무지하고 무욕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만약에 전자라면 노자는 우민화를 부르짖은 반동이요, 후자라면 노자는 사상가가 아니라 몽상가다.
그러나 문맥상 후자를 말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使)란 글자는 ‘만든다’ ‘하게시킨다’라는 뜻의 글자이므로 ‘백성을 무지하고 무욕하게 만들어라’하고 노자가 사주하고 있는 어떤 상대가 있다. 바로 지배계층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배계층이 바로 ‘많이 아는 무리’다. 다음 구절에 나오는 ‘지자(智者)’가 바로 그들이다. 즉 식자(識者), 지식층(知識層)을 말한다. 물론 도올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이 지자(智者)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성인(聖人)이다.
따라서 뒤의 구절은 지식층에 대한 당부이고 그들이 ‘백성을 무지무욕하게 만들어 통치하는 반대급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백성이 무지무욕하여야 한다면 반면에 너희 지식층은 어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것이 뭐냐? 바로 ‘지자불감위야(智者不敢爲也)’다. 백성들과는 다르게 많이 아는 지자(智者)들은 절대로 무지무욕한 백성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백성을 무지무욕하게 만드는 것이 허용되기 위해서는 무지무욕한 백성을 속이는 지자(智者)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고 있다.
‘불감위야(不敢爲也)’는 ‘감히 속이거나 꾸며대지 않는다’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노자는 《도덕경》에서 위(爲)라는 글자를 ‘속이는 일’‘꾸며대는 일’‘가장하는 일’‘가식하여 하는 일’이란 의미로 일관되게 쓰고 있다. 때문에 여기서의 위(爲)도 엉터리 도올의 해석처럼 ‘어떤 일이든 못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속이고 꾸며대는 짓을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만약에 한 나라의 지도층이 백성을 속이고 꾸며대지 않는다면(不爲), 일반 백성은 설사 무지하고 무욕하다 해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노자는 주장하는 것이다. 이게 노자정치사상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런 뜻도 모르고 ‘안다고 하는 놈들이 뭘 한다고 까불지 못하게 해라’는 뜻이라고 박박 우기면 참말로 대책이 없다. 이런 소리는 정치론이 될 수가 없다. 그냥 헛소리일 뿐이다. 생각 좀 해봐봐. 지도층 없이 국민 전체가 무식한 국가가 존립할 수 있겠나? 그리고 지식층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누가 해? 노자는 앞에서 그런 지도층이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자(智者)가 감히 뭘 한다고 까불지 못하게 하면 어쩌자는 거야? 지자(智者)들이야 말로 사명감을 가지고 많은 일을 맡아서 해야 할 사람이다. 이 사람들이 제대로 까불어야 나라꼴이 똑바로 될 터인데 못 까불게 하자? 그게 노자의 사상인가? 그런 게 노자의 사상이라면 미련 없이 갖다버려야 마땅하다. 도올이나 주워서 혼자 놀게 하면 족하다.
여기까지 이해를 하더라도 노자의 정치사상이 비판받을 소지는 남아 있다. 즉 현실 정치를 도외시한 이상가의 꿈같은 소리라는 공박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현실 정치에서 지도층이 과연 국민에게 한 마디의 거짓말도 하지 않고 어떤 것도 숨기거나 꾸며대지 않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냐 하는 것이다. 노자의 놀라운 점은 바로 그런 비판에 대한 대답까지도 제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노자의 통찰력은 바로 다음 한 줄에 집약되어 있다.
처음 출발을 잘못하면 끝까지 빗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도덕경》이란 책이다. 아니면 앞 줄 얘기가 틀리고 뒷줄 얘기가 따로 노는 비논리적이고 몽환적인 이상한 책이 돼버린다. 어쟀거나 이 다음에 노자가 해놓은 소리를 보면 진짜 기가 막힌다. 그런 걸 읽어낼 수 있어야 노자를 만날 수가 있다.
爲無爲 則無不治
위무위 즉무불치
노자에게 감탄하고 반해야 하는 대목이 있다면 바로 여기다. 《도덕경》은 여러 번 탄복하게 만드는 대목이 있는데, 물론 그것은 《도덕경》의 뜻을 제대로 알고 읽을 때의 이야기다. 도올처럼 엉뚱한 동네에서 저 혼자 노는 사람은 음악회 가서 언제 박수를 쳐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나 같고, 개그나 코미디를 보면서 웃어야 할 때를 모르는 사람과 같다. 노자의 글을 올바르게 해석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노자한테 감탄하며 노자한테 반했다고 말하는지 불가사의할 따름이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탄복해야 할 대목은 뭔지도 모르고 넘어가고 별 의미도 없이 해놓은 소리를 붙잡고 자기 혼자 끔벅 죽기도 한다. 뜻도 모르는 책을 읽고 감탄을 하고 반할 수 있다는 것도 도올만의 기발한 개성이고 재주겠지.
도올은 저 구절을 풀어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함이 없음을 실천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라 했거든. 도올은 ‘함이 없음’을 너무 좋아하는 게 탈이지. 벅 하면 들고 나오는 것이 ‘함이 없음’인데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는 거지 ‘함이 없음’이 뭐야? 지금 철학강의를 하는 건지 말장난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지금까지 내 글을 읽어온 사람이라면 ‘위무위(爲無爲)’의 뜻이 어렵지 않을 거야. 이게 어려울 게 뭐 있느냐 말이다. ‘무위(無爲)’가 속이거나 구며대지 않는 거라 했잖아. 그러면 ‘위무위’는 뭐겠나? 바로 ‘꾸미지 말고 하라’는 말이거나 ‘꾸미지 않은 것처럼 꾸민다’는 말이다. 즉 정치를 함에 있어서 완벽한 무위(無爲)가 불가능할지라도 최소한 무위(無爲)한 것처럼 꾸미기라도 하라는 말이다. 즉 백성을 어쩔 수 없이 속여야 할 경우에도 백성이 속는다는 사실을 모르도록 속이라는 정치술의 요체를 말하고 있는 거다. 그게 바로 ‘위무위(爲無爲)’다. 현실 정치에서는 무위(無爲)의 치(治)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위(無爲)를 위(爲)하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노자의 위대함이 있다.
무위(無爲)가 어렵다 해서 유위(有爲)를 택하지 말고 무위(無爲)를 위(爲)함으로써 현실에 대처하라는 가르침이다. 백성이 무지무욕(無知無慾)하고 지자(智者)들은 무위(無爲)한 척이라도 해야 되겠다는 노자의 희망사항이다.
백성이 무지하고 욕심이 없어서 단순 소박하다 해도 그것을 기화로 지도층이 백성을 속이고 꾸며대는 짓이나 하면 백성의 단순 소박함이 유지될 수가 없고, 반드시 소요와 혼란이 일어남은 당연지사라 하겠다. 하지만 지도층이 최소한 백성이 그런 사실을 모르도록 숨길 수 있는 염치와 지혜로움만 있어도 나라는 잘 다스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실정치에서 유위(有爲)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백성에게 알려졌을 때다. 백성이 모르게 하는 정도의 위(爲)는 눈감아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위무위(爲無爲)하면 즉무불치(則無不治)’라 한 것이다.
잊을 만하면 ‘검은 돈’ 문제로 온 세상이 시끄러운 것도 다 정치하는 놈들이 ‘위무위’를 할 줄 몰라서 그렇다. 현실정치라 하는 게 돈 없이 될 수 있나? 정치 자금이라는 게 필요하지. 그런 걸 해먹더라도 정도껏하고 받을 돈을 받고, 받더라도 국민이 모르게 좀 요령껏 재주껏 해야지 임마들이 하는 짓을 보면 그냥 내놓고 도둑질하는 거야. 그리고 서로 캥기는 넘들끼리 동네방네 나발을 불면서 물고 뜯고 싸우고 그러니 어찌 백성이 그 추잡한 짓거리를 모를 수가 있겠나? 암만 무지하고 무욕한 백성이라도 그런 꼬라지를 자꾸 보게 되면 무지무욕이 유지될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노자가 제발 백성 모르게 ‘위무위’하라고 당부하는 거다. 그래야 백성이 속는 줄 모르니 지도자들을 믿고 맘 편하게 산단 말이다.
물론 이게 백성의 눈과 입을 강제로 막고 속이라는 말은 아니다. 성인의 치는 불위함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위무위’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염치껏 요령껏 하라는 소리다. 알겠지?
《노자와 21세기》에서 도올이 이 대목에 이르러 논하고 있는 꼴을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이런 걸 보고 ‘꼴값’이라고 하지 싶다. 공산주의 이론과 자본주의의 본질이 나오고, 미국이 어쩌고 소련이 어쩌고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가 잔뜩 나온 끝에 노자가 자본주의를 ‘인간의 욕망을 자극시키는 재화의 유통이라고 규정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가히 압권이다. 횡설수설의 클라이맥스요 헛소리의 진수다.
노자가 말한 것은 ‘백성이 도적이 될 만큼 헐벗고 굶주리게 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지 ‘재화의 유통’이나 ‘자본주의의 해악’을 말한 것이 아니다. ‘소유 없는 생산’이니 하면서 노자를 원시공산주의자로 모는 것도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다. ‘오직 생활에 필요한 정도의 의식주에 궁핍하지 않게 하되 그 이상의 욕심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노자의 경제 노선이다.
이런 노자한테서 현대산업사회를 이끌 만한 깊이 있는 경제이론을 도출하려는 것은 각주구검이고 연목구어고 초상집에서 춤추는 짓이다. 거러지가 동냥질을 해도 번지수는 제대로 찾아야 굶지 않는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도 나오고, 금강경의 여래도 나오고, 왕본, 무슨 본 해가며 《도덕경》의 원전 몇 종을 놓고 비교분석을 한답시고 오도방정을 떨고 있는 것도 노자를 아는 데는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일 뿐인데 그 끝에 이런 대목이 있어서 사람을 또 놀래킨다.
그 변모의 과정을 이렇게 양자 테스트를 비교해보면 명료하게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작업이 바로 우리 전문가들이 하는 작업인데, 지금 이것은 대중방송을 위한 저술임으로 이런 작업을 일일이 다 밝힐 수는 없고(…)
《노자와 21세기》176쪽 상단
우리 같은 전문가라니? 누구? 도올 같은 전문가? 세상에나. 정말 착각도 야무지지. 원문 번역도 똑바로 못 하는 사람이 무슨 전문가씩이나 된다 말이냐? 여러 종류 늘어놓고 비교분석한다고 땀 빼지 말고 있는 거 하나라도 놓고 제대로 읽어라.
제3장의 원문을 전체적으로 보고 도올과 내 역을 나란히 보자. 도올의 번역을 읽어보면 이게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도올 역 《도덕경》은 시종일관 말이 안 되는 헛소리의 나열이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도올의 개그쇼는 최상의 경지를 보여준다. 개그가 아니라 엽기 그 자체다. 제4장으로 가보자.
도올번역
훌륭한 사람들을 숭상하지 말라!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할지니.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하지 말라!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이 되지 않게 할지니.
욕심 낼 것을 보이지 말라!
백성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어지럽지 않게 할지니.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워 그 배를 채우게 하고
그 뜻을 부드럽게 하여 그 뼈를 강하게 한다.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앎이 없게 하고
욕심이 없게 한다.
대저 지혜롭다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한다고 하지 못하게 한다.
함이 없음을 실천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바른 번역
현명함을 높이 사지 않으면
백성이 서로 다투지 않으며
재화를 귀하고 얻기 어렵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도적이 되지 않는다.
욕심이 날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으면
백성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백성의 마음을 비우게 하는 대신 그 배를 채워주고
백성의 뜻을 약하게 하는 대신 몸을 튼튼히 해주어
모름지기 아는 것과
욕심이 없게 한다.
반면에 다스리는 자들은
꾸밈이 없어야 한다.
꾸밈이 있더라도 백성이 모르게 한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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