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BOOK/비교진의(秘敎眞義)

각성(Awareness)

기른장 2020. 11. 2. 14:47

오늘밤 나는 각성awareness(깨닫고 있음, 알고 있음, 의식성, 자각, 인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것은 진일보한 신비학도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단순한 말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각성이 없이는 신비학도들이 공부하는 존재계의 어느 영역도 성취되지 않는다. 물질계, 아스트랄계, 멘탈계, 영계에서 각성없이는 조금이라도(단 일보라도) 성장하거나 발달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

 

깨어있는 삶과 죽어있는 삶의 차이는, 깨어있는 삶이 지니는 각성에 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의식하고 있는, 감지하고 있는, 의식적으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과 물질적으로만 깨어있는 사람 사이의 차이는 극과 극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데, 까닭은 각성없이는 우리는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속성도) 이해하거나 배우거나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마다 각성에 있어 큰 차이가 있음을 안다. 어떤 사람은 이 물질계에서 많은 것을 깨닫고 있는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보통사람보다 훨씬 더 먼 거리까지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보다 세심한 빛과 색의 음영을 분간한다. 어떤 사람은 위대한 화가에 의해 그려진 풍경화를 볼 때 그들 옆에 서있는 다른 사람보다 더욱 더 많은 빛의 광도와 색조와 농도를 알아차린다.

 

우리는 여기서 각성과 지각(知覺)에 차이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각성하고 있지 않다면, 그들이 전혀 이해한 적도 본적도 없는 것들을 깨달았다고 여길 수는 없다. 이 물질계를 초월하는 존재의 다른 계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물질계의 두 사람 사이에 차이를 주는 것은, 드러나지 않은 각성의 획득 정도에 달려 있다.

 

각성은 삶의 물질영역에서, 보다 더 큰 능력을 준다. 물질적으로 의식적 관심 집중을 하고 있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각성하고 있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각성을 더 높은 의식계로 확장하는 것을 배운 사람은 각성이 없고 무감각한 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지각할 수 있다. 영적인 힘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차이는, 각성 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아스트랄계로 의식을 투사할 때에 사람은 그 세계가 감지되어야만 하고, 감지(의식)하게 될 때, 우리는 각성을 발달시키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멀리 더 많이 인지할 수 있고 식별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거주하는 물질계를 초월할 수 있기 전에 아스트랄계, 영계에 대한 각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물질계에 대한 각성조차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의식이 더 높은 계를 각성할 수 있겠는가?

 

보통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그것에 대하여 조금도 자각함(realizing, 실감함) 없이 그들의 감각매개(감각기관)와 잠재의식을 통하여 많은 것을(무의식적으로) 지각한다. 그들은 사물에 대해서 듣고 보는 것을 자각 없이 듣고 보며 또한 의식적으로는 주의가 남지 않는 많은 냄새를 맡지만, 잠재의식적으로 듣고 보고 맡는 모든 것은 남김없이 뇌세포에 기록되어 저장된다. 그리고 그의 현재의식(현재심)이 그것들을 의식 못할지라도, 지각하고 있는 잠재의식(잠재심)에 의해 이용될 수 있다. 

 

그것은 최면에 걸린 사람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상태(현재시의 활동상태)에서는 할 수 없는 것을 때때로 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현재 의식이 잠잠해질 때(lulled to sleep) 잠재의식에서 인상 받은 것들이 뇌세포에 (잠재의식적으로) 지각된 상태에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물질계에서도 각성할 수 있게끔 훈련받을 수 있다. 각성은 발전(발달)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무심코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는 것을 그냥 받아들인다. 그들은 무심코 안으로 들어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으려고 하는 의식적 노력을 하지 않는다.

 

각성에 대한 본보기 중의 하나는 후디니(Houdini)에서 이름을 따온 사람, 로버트 후든(Robert Houden)이다. 후든이 소년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물질적인 측면에서 그가 각성하게끔 훈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파리의 시가지를 걸을 동안 그는 그 아이가 복잡한 상점 진열장을 한번 슬쩍 보도록 한 다음, 한번 보았던 상품들의 이름을 외어내도록 하곤했다. 그리고 나서 즉시 가게 진열장을 보게 하는 것이었다. (확인을 위해)

 

그가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단지 그가 본 것 중 2~3가지만 기억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두 번 세 번 봄으로써 더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 훈련 후 그는 놀랄만한 기억을 발전시켰는데 한번에 550개나 되는 물건 이름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훈련은 그로 하여금 만년에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유심론자(唯心論者)의 하나가 되도록 하였다. 그는 시범회를 가지면서 전 세계를 여행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상호관련 없는 수백개의 물건을 가져오도록 한 다음, 한번 보고 그 물건 각각을 낱낱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가 물질적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훈련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이 그만큼이나 사물을 감지할 수 있었다면, 계속해서 보다 위대한 지점까지 나아가고 더 높은 수준의 세계까지 각성이 확장하도록 했어야만 했다. 불행히도 그는 자신을 각성의 어떤 상태에 다소 한정지어 버렸다.

 

이와 같은 각성의 상태는 선명한 촬영기억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이러한 기억의 유형은 단순히 어떤 것을 한번 보고 그것을 보존한다. 이와 같은 원칙은 낱장 인쇄물, 책 전체 그리고 그 밖의 것에 적용될 수 있다. 이러한 기억과 각성의 방식으로 각 페이지당 1초씩 훑어봄으로써 책 전체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이 특별한 개발은 삶의 전 영역에 적용될 수 있다.

 

후든은 이것을 단지 증명목적으로 물질적인 일에만 적용했다. 그러나 무작위로 뽑힌 누구라도 훈련을 받는다면 그것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도 그들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마음을 훈련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뇌세포에 그것을 각인하고 자신이 그것과 일치시켜서, 그들이 그것을 필요로 할 때에 언제라도 그것을 끄집어낼 수가 있다. 

 

시인 바이런(Lord Byron)은 상당한 정도로 이 기억법을 개발하였다. 한 번에 책을 다 읽고 첫 단어부터 마지막 단어까지 외울 수 있을 만큼 각성의 감각을 발전시켰다. 그는 성경을 포함하여 많은 책을 그렇게 했다. 그는 성경을 끝까지 암기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모든 책 내용은 그의 마음에 사진처럼 찍혀졌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단지 사람이 물질계에서 놀랄만한 각성의 힘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많은 실례 중의 두 가지일 뿐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훈련해서 각성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의 기억이 떨어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감퇴된 것은 그들의 기억이 아니라, 그들의 노력과 의지이다.

 

이것을 발전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하루 종일 여러분들이 행하는 세세한 작은 것들을 순간 순간 감지(의식)하는 것이다. 날마다 15분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 있어서, 어느 한 사물 또는 어느 한 사람만 의식할게 아니라, 여러분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 또는 모든 사람들을 감지할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킬 수 있다. 각성은 엄청난 정도로 발전될 수 있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각성에 불과하다. 그것은 첫째로 각성이며, 그 다음에 우리가 지각한 것을 뇌세포에 각인하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들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뇌세포에 의해 지각된 것들은 뇌세포에 각인된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감지하도록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지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력과 두뇌능력의 천분의 일도 사용하지 못한다.

 

나는 여러분이 혼자 방안으로 들어가서, 어두운 방안에 홀로 있는 상태에서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감지하려고 의지를 가해 보길 권한다. 여러분은 이전에 감지 못하던 냄새를 맡기 시작할 수 있다. 여러분은 심지어 전에는 없었던 냄새가 있게끔 의지작용을 할 수도 있다. 여러분은 이전 경험으로부터 뇌세포에 심어진 각성으로써 냄새를 만들어낼 수 있다.

 

여러분은 또한 같은 방법으로 빛과 소리를 감지할 수 있다. 가장 어두운 방안에서 조차, 소위 우리가 말하는 빛의 스펙트럼에 해당하는 빛의 선들이 있어서 우리의 눈은 감지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각성을 빛의 파동에 맞출 수 있다면 적외선도 볼 수가 있다. 그것은 각성의 문제이다.

 

각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감각과 지각의 범위 안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그 자신이 완전히 수용적으로 되는 것이다. 우리의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 점이 우리가 각성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하여 한 가지 사물에 집중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사물로써 기억한다. 그러나 그 사물은 마음을 스쳐지나갈 때 흥미를 유발시키지 않으며, 두뇌 세포에 인상을 남기지만 현재의식에서는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나는 지금 우리가 일하고 있는 물질적 측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물질계에서 우리가 각성할 수 있는 정도만큼, 우리는 아스트랄, 멘탈, 영계에서 또한 각성할 수 있다. 이점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스트랄계에 대해 거의 또는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들은 여기 물질계에서 마져도 주위 사물을 깨닫고 있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의식의 더 높은 계에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단지 어떤 것들만 관심을 집중하도록 훈련되어 있고, 길들여져 있으며, 그들 주변의 많은 상황과 사건들을 의식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미 아스트랄계에 투사하는 것을 배운 학생들 마져 아스트랄계에서 열리고 있는 영적 모임을 모르고 있다.

 

그들은 항상 거기에 있는 그러한 모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세계에서 주관하는 그러한 모임(단체)을 발견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이유는 각성의 결핍에 있다.

 

영계와 그들 자신을 동조하려고 할 때, 그들은 신과 영계에 대한 고정관념에 집중한다. 그들은 물질세계 안에서 그들의 제한된 각성으로 쌓아올린(기반한) 어떤 선입견을 갖는다. 그들은 물적 존재 안에서의 각성의 정도에 따른 영계에 대한 심적 상념을 창조한다. 따라서 그들은 영계의 가장 낮은 국면만을 지각한다.

 

우리는 모든 우주가 존재하는 어떤 법칙과 원리가 있음을 안다. 그것 아래 모든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법칙은 이것을 깨뜨리려는 인간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불변이다.

 

사람은 단지 그가 의식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만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주변의 사물의 진실한 본성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그 점이 바로 붓다가 세상은 마야 또는 환상(환영)이며,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는 시간의 어떤 지점에서(어떤 순간에) 고정된 상태 속에서 (우리의 선입견에 의해서 이루어진) 세상을 감지할 뿐이라고 말한 이유이다.

 

어떤 과학자는 그것이 실재한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모든 물질적 질료는, 결론적으로 말해, 움직임(변화) 안에서 無이다. (상대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는 有이다. 많은 시간이 지나면 물질도 형태가 사라진다.) 과학에서 우리는 원자를 전자, 양자, 중성자로 나눌 수 있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전자, 양자, 중성자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우리는 더군다나 그것이 분해되고 분해되어 결국에는 아무것도 없기에 이른다는 것을 안다.

 

모든 것은 변전하거나 변화하는 상태에 있다. 사물은 단 한순간도 동일하지 않다. 매 순간순간 모든 것은 아주 미묘하게 변한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은 자신의 입자가 분해되고 방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지각과 각성은 단지 찰나의 각성일 수밖에 없는데, 까닭은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의식하고) 있는 순간 이외에는 진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한 순간에 진실이었던 것이 다음 순간에는 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질우주의 한계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이 한계 밖에서, 지속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더 높은 계에서도, 각성의 감각을 사용할 줄 아는 것은 비상하게 중요한 일인 것이다.

 

시간도 또한 변화한다. 우리는 시간이 사물의 운동을 측정한 것임을 안다. 그것은 항상 같은 것이 아니다. 일초 전은 지금이 아니다.

 

우리가 이 물질계에 대한 각성을 발달시키는 동안, 더 고차원적인 의식의 계로 길을 열기 위한 디딤돌로써 오직 이 각성을 사용할 수 있음을 우리는 반드시 알게 된다.

 

다음 단계는 (의식의) 멘탈계에서의 각성이다. 위는 물질계에서는 적용하는 것과 같은 동일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이 물질계에서는 우리는 공간과 거리에 제한 받는다. 물질계에서 우리는 운반 수단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단계까지 발전되어 왔지만, 특정의 속도로 밖에는 움직일 수 없다. 아직도 우리의 움직임은 거리에 제한 받는다.

 

멘탈계에서는 우리는 거리와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즉시 천마일 또는 만마일 떨어진 곳까지 갈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의 눈으로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을 지각할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다. 아스트랄계에서 의식을 투사함에 있어, 우리는 한 순간에 천마일 또는 만마일을 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멘탈계와 아스트랄계에서는 물질세계에서의 한계를 벗어나고 자유로워진다. 사람이 육체로부터 투사를 해서 의식적으로 아스트랄계 안으로 이동할 때, 그 사람은 여기로부터 저기까지 어떠한 시간의 걸림(장벽, 지체)도 없이 간다. 

 

순간적으로 여기로부터 거기까지 운반된 것은 의식 또는 자아의 각성이다. 그러므로 각성의 멘탈적 상태는 의식의 모든 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물론, 자아 또는 의식 또는 영혼의 영적인 존재이지 물질적인 것은 아니며, 한 순간(찰나, 즉시)에 모든 것을 감지할 (의식할,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우주의식을 획득하는 것은, 그가 물질계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각성(깨달음) 안에서, 아스트랄, 멘탈, 영계를 감싸안을 수 있는 위치까지 각성을 발전시킬 때 가능하다.

 

그가 그와 같은 각성의 상태에 도달할 때, 그는 전 존재의 상태, 전 의식세계, 모든 속성에 대해서 따로따로가 아니라 동시에 지각하고 알게 된다. 이것이 우주적 각성(Cosmic Awarness)이다.

 

성경에서 신은 모든 것을 감싸고 있으며, 심지어 참새 한 마리도 신이 허락지 않고선 땅에 떨어질 수 없으며 여러분의 머리카락 숫자도 세고 계시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10장 29-30절에 이렇게 나와 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잇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의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너의 머리의 머리카락까지 모두 헤아리시나니.”

 

이것은 떨어지는 참새의 숫자나 여러분의 머리카락 숫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주적 각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어진 한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일순간적인(즉각적인) 각성을 의미한다.

 

어떻게 사람이 각성(깨달음)을 발전시킬 수 있겠는가? 몇몇 사람은 비록 그들이 그것을 붙잡지 않았을지라도 그러한 의식을 획득했음을 우리는 안다. 몇몇 사람은 짧은 기간 동안 그것을 얻었고, 그리고는 우주의식으로 되돌아갔다. 그것은 도달된 것이다. 얼마의 사람은 그것을 지녔었다. 그것은 크리스트의식 붓다의식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것은 사람이 의식적으로 전 존재계와 전 의식차원을 동시에 감지하고(깨닫고) 있는 의식상태의 획득인 것이다. 이 물질계에서 우리는 매순간 매일매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의식하려고(깨달으려고, 의식적으로 관심을 집중하려고) 노력함에 의해서 각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선가 반드시 출발해야만 한다. 우리는 반드시 바로 이 순간에 우리가 있는 곳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주의를 큰 것에만이 아니라 세심한 부분까지 기울여야 한다. 작은 것을 통하여 우리는 더 큰 것으로 확장된다. 무한히 큰 것을 통해 우리는 무한히 작은 것으로 축소할 수 있다.

 

우리와 반목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모든 창조의 한 부분이고 삶의 경험들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모든 것의 부분이기 때문에 그것을 또한 깨달아야만 (관찰해야만, 의식적으로 관심을 집중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각성(깨달음)과 전체(모든 것)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우리는 매일의 매 순간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각성(깨닫고)하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도시와 들판을 지나 길을 따라 운전할 때, 우리의 대부분은 도로와 경관 좌우측까지 모두 보지 않는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것(이미 지나간) 보다 우리 자신이 2~3마일 더 먼 곳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운전한다.

 

우리는 습관을 통해(습관 때문에), 각성(하는 것)을 차단한다. 우리는 반드시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을 계속적으로 의식하고 확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만 한다.(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내부로 들어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다)

 

[출처] [M. 도릴] 비교진의|작성자 알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