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BOOK/비교진의(秘敎眞義)

제4부 2. 스승 예수의 생애에 상징된 다섯 개의 대 비전

기른장 2020. 11. 2. 19:08

동양의 신비학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은 삶의 조건을 극복하여 주인이 되기 위해서 다섯 개의 대 비전(initiation)들을 통과한다. 그 다섯의 비전은 개별적이고 영적이다. 그것들은 의식(ritual), 형태(form), 형식적 의례(ceremony)의 비전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의식, 형식, 예식의 비전이라는 것은 내적이고 영적인 비전의 상징에 불과한 것인데, 사람의 혼이 크라이스트 의식상태에 도달할 때 통과하여야 할 마지막 비전의 도래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도래는 어느 누구도 예견할 수가 없다. “신성”과의 일치됨에 대하여 예수는 이런 말을 했다. “그것이 언제 올지는 그 시간, 그 날, 그 주일, 그 달, 그 해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른다. 아버지 오직 그 분만이 아실 뿐이다.” 

 

예수의 생애 즉, 그 다섯 가지의 위대하고도 중요한 시기ㅡ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의 비전을 상징한다.ㅡ에 숨겨진 상징의 의미를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가 누구이건 그들이 어느 정도 진보했건 간에 모두 신성한 깨달음으로 가는 도상에 있다. 그들의 인간적 진화 또는 영적 진화의 정도가 얼마나 이루어져 있던지간에 상관없는 것이다. 어쨌건 그들은 길에 발을 놓은 것이다. 탄생에서 생명을 얻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경험의 학교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우리가 성취하고 완성해감에 따라 어떤 발전단계로 올라간다. 과거의 모든 위대한 신비단체 브람Brahm의 신비단, 디오니소스Dionysius신비단, 바쿠스Bacchus 신비단, 브랜 막맘Bran Mak Mom 신비단, 오시리스Osiris의 신비단, 블루시안Bleusyan의 신비단 등 실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신비단에서는 모든 진보가 성장의 결과이기 때문에 비전이란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신과의 일치됨을 얻기 위한 어떤 마술적 혹은 신비적 공식은 없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에 내재한 영적본성을 펼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나는 5천개의 만트라 전부를 알고 있다. 나는 브람의 만트라를 알고 있고, 드루이드 신비파와 다른 모든 가르침을 알고 있지만 의식이나 예식만으로는 그 어디에서도 조금의 진보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진보는 영적 성장과 자각을 통해서 온다. 예수의 생애에는 인간의 혼이 통과해야할 다섯 개의 대 비전이 그려져 있다. 처음 것은 예수의 탄생에 상징되어 있다. 예수는 베들레헴 교외의 한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출생에는 어떤 징후와 놀라운 일들이 동반되었다고 하는데, 예수의 탄생에 세 현자가 금과 유황과 다른 것 등의 선물을 가지고 그곳에 나타났다. 그들은 그의 별인 동방의 별을 따라왔다고 한다. 

 

예수가 탄생한 동굴은 인간의 머리에서 볼 수 있는 두뇌의 공동을 나타낸다. 그 두뇌의 공동은 신비교단의 둥근 천정을 한 방이다. 그것은 머리의 바로 중심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세 개의 커다란 힘의 센터가 있다. 물리적 육체에서는 송과선, 시신경체, 뇌하수체로 나타난다. 이 세가지 커다란 물리적 센터는 세 개의 대 아스트럴 통로들의 물리적인 표현체들이다.

 

고대의 신비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의 혼은 물리적 육체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육체를 통해서 힘으로 현현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신, 절대자로서의 영적이고 신성한 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성심(Divine Mind)계와 아스트럴계와 물질계로 흘러들어와 반사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의 그 동굴에서의 탄생의 상징은 인간 혼 또는 의식이 두뇌의 동굴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한다. (혼은 다른 계에 존재한다.) 3인의 현자(세 왕)는 사람의 아스트럴 구조에서 발견되는 천부의 재능을 간직하고 있는 세 개의 큰 힘의 센터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열려서 물리적 현현속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현자들이 따라왔던 그 별은 동방의 비전서를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뚜렷이 알 수 있는 상징이다. 그 별은 물리적 별이 아니다. 그 별을 볼수 있는 사람은 비전을 전수받은 현자들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스터의 아스트럴체 위에, 그리고 내부에 현현되기 때문이다.(각성한 자만이 볼 수 있는 별이다.) 그 별은 동양의 신비단체에서는 제1비전의 상징이고 흔히 물리적 육체로 들어가기 전에 영혼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 육체 안으로 들어가기 전의 감정적이고 욕망적인 성질의 영적인 정복을 상징한다. 욕망이나 감정적 성질을 정복했기 때문에 그의 삶이나 일에서 그것들에 의해서 영향받지 않는다.

 

세상 모든 사람은 제1비전을 통과할 때 욕망과 감정적 성질을 정복한다. 사람이 사물에의 집착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을 때까지는 결코 영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이것이 젊은 부자가 예수에게 가서 제자가 되겠다고 청하자 예수가 그에게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한 이유이다. 그가 가진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의 소유물을 놓아버림으로서 그는 자신의 욕망과 감정적 성질을 놓아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들은대로 하지 않았다. 그가 들은대로 했더라면 그가 놓아버린 것들이 천 배로 크게 되돌아 오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지만 그의 멍에(집착)가 그의 감정과 욕망을 놓아버리지 못하게 했다.

 

그 별은 욕망과 감정적 성질의 정복과 초심자가 비전의식을 거행하는 둥근 지붕을 한 방, 두뇌의 공동 속의 세 왕 앞에서 최초의 비전을 통과하는 것을 상징한다.

 

두뇌의 그 공동에 비전의식의 상징과 큰 관계가 있는 것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비전 입문자에게 주도록 허용을 받지 못했지만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 사람의 머리에는 송과선을 둘러싸는 열 두개의 힘의 큰 통로 혹은 중심이 있다. 고대 신비에는 그것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상징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대 제사장의 흉갑에 있는 12개의 색깔의 돌은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는 그 12가지의 큰 힘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것은 황도대 12궁도의 12개의 정복없이는 구루, 마스터 혹은 위대한 스승의 문하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사물에 대한 욕망을 물리쳐야 한다. 그들은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적이어야하며, 감정과 욕망이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키거나 이타적이 될 수 없다.

 

제2의 대 비전은 세례의식에 나타나있다. 세례의식은 예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비학파 만큼이나 인간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 수백만년의 연륜이 있다. 가장 오래된 시대로부터 세례의식은 제2비전을 상징했다. 그것은 모든 고정관념과 이념의 노예인 자기 자신을 정화하고, 그들의 마음과 의식으로부터 ‘신성한 빛’의 길을 따라 나아가는 그들에게 방해가 될지모르는 모든 잘못된 이념, 모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영’의 물을 통과하는 것을 상징한다. 예수가 “사람이 물과 영으로 세례받지 않으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물과 불이라고 했다) 하늘의 왕국으로 결코 들어갈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의 세례의식은 초심자가 자신을 물에 담금으로서 그의 마음과 탐욕의 본성의 정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그는 물에 담궈서 전에 흘러가버린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어떤 종류의 오염도 부조화도 없이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으로서 새 옷을 입고 서 있는 것을 세상에 표현하는 것이다. 물의 세례는 제2비전의 상징, 의식적인 부분이다. 진정한 세례는 영과 불의 “세례”이다.

 

나는 40번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텍사스주의 첼만chelman에 부흥회가 마을에 돌아올 때마다 어떤 사람은 종교를 갖고 세례를 받는데, 그들이 마을을 떠나면 다시 술에 취한다. 세례는 그 이상의 것이다. 세례는 사람들이 탐욕스러운 물질적 성질을 정복하는 때이며 그들의 마음을 평정과 균형의 상태로 가져가서 신성한 영의 불길이 그들 속으로 쏟아져 들어와 탐욕스러운 육체의 부조화와 부정을 변화시켜 그것을 정화하는 것이다. 불의 세례는 왜곡된 이념하에 파묻힌 낡은 물리적 신체와 낡은 마음을 변화시켜 그 속으로 새 술을 부을 수 있도록, 그것이 성스러운 사원으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예수는 “새 술은 헌 부대에 담을 수 없다.”라고 한 말에서 이것을 상징하고 있다. 새 영의 불을 받기 전까지는 사람은 낡은 부대다. 그 불길은 너무나 강하고 조화로와서 평정치 못한 마음과 몸의 불균형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단지 낡은 이념과 오해와 부조화를 불식하고 마음에 의식을 조화, 평화, 고요, 평정의 상태로 만듦으로써 ‘신성한 영’과 대화를 할 수 있다. 위대한 구루가 언젠가 내게 “사람의 마음은 신의 편재하는 빛을 반사시키는 거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거울은 금이 가있고 은도금은 벗겨져 나가고 어떤 것은 유리에 기포가 있고... 그런 상태의 거울들은 ‘신성한 빛’을 굴절해서 왜곡된 선(lines)과 빛(rays)으로 반사한다.

 

사람이 해야할 일은 자아의 마음과 의식을 ‘신성’이 머물수 있는 상태로 가져감으로써 거울을 ‘신성의식’(Divine Consciouness)의 빛이 빛날 수 있도록 티없이 맑게 만들어놔야 한다. 신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환희(지복)의 상태에 있다. 그런고로 사람은 그와 똑같은 상태의 마음과 의식으로 신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렇게 하면 제2비전의 불길이 그들 속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면 멘탈계를 정복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거의 매순간 의혹(의심)과 불안과 고통과 공포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리저리 흔들린다. 우리는 굳건히 서 있지 못한다. 신에게 접근하려고 할 때 우리는 언제나 공포와 고통을 가지고 다가간다. 우리는 신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똑같은 의식상태를 가지고 신에게 접근하여야만 한다. 조화와 환희(지복)와 아름다움 속에서 신에게 가라. 걱정과 공포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듣기로 예수가 물에서 나왔을 때 비둘기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의 어깨에 앉았고 하늘에서부터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에게 대단히 만족하도다.”라고 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런데 누가는 “어떤 사람은 그것을 천둥소리라고 말했다.”고 말한다. 아마도 대다수가 큰 진동외에 아무 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내적인 귀가 열린 사람들만이 “이것이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하는 상징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자신을 ‘신성한 의식’에 바치면 여러분은 신의 자식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하늘에서 나타나 예수의 어깨에 앉은 비둘기는 유태인에게 큰 상징물이다. 그들의 기도를 신에게 바치면서 여호와(Jahveh)의 제단에 비둘기를 공양하는 것이 관습인데 하늘로부터 비둘기가 나오는 것을 보는 것보다 그들에게 더 큰 상징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인간에게 메시지를 가지고 하늘로부터 되돌아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생애에서 나타나는 제3의 대비전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산상에서 일어난 변형이다. 그들은 산으로 올라갔고 예수는 베드로, 야곱, 요한 등 3명의 제자 앞에서 모습을 바꿨으며 그들은 예수의 놀라운 빛에 경외감에 휩싸여 얼굴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그들은 “엘리아와 모세와 같은 영이 예수와 함께 걷고 말하고 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제3의 비전은 크라이스트 의식과의 영적 교류(친교)로 들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 비전 후에 위대한 사역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몸안에 있는 영의 ‘정의’로 들어가서 그에게 세상에서의 완전하고 신성한 힘을 주는 크라이스트 의식을 현현시켰다. 예수가 가장 놀라운 치료를 행한 것이 그 이후였다. 왜냐하면 그 비전에 의해서 진동이 창출됐는데, 그것은 어떤 부정한 것이라도 그의 의식속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멘탈계를 넘어섰으므로)

 

우리는 이것이 동정심 정복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비밀학파에서는 그것을 연민상태의 정복이라고 부르는데, 그럼으로써 사람은 세상의 모든 고통받는 인간들에게 동정을 느낄 수가 있고, 보고 이해하고, 깨닫고, 도와줄 수 있으면서 그것의 일부는 되지 않는다. 세상의 존재이며 그 안에 있지만 그것에 종속되지 말라.

 

그들이 산에서 돌아온 후 예수는 제자들에게 대단히 이상한 말을 했다. “그 비전(vision)을 인간의 아들이 죽음으로부터 다시 일어날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말라.” 그 이상한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제자들이 예수의 그 이전의 강림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적인 것은 이렇다. 산자들의 세상에 있다하더라도 세상에 있어 부정의 영역에 묶여있는 사람은 죽음의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해방시켜서 변형된 크라이스트의 상태에 다다를 때까지, 여러분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고 나도 죽은 사람이나 다름 없다.

 

예수가 그들 앞에서 모습을 바꾸었을 때 그는 죽음에서 일어났다. 그 변형에서 그는 사람이 산자의 세상이라고 부르는 죽어있는 세상의 육체의 멍에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예수는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일어나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다. 그가 무덤으로부터 부르고,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킨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가 성령으로 깨닫게 했던 모든 영혼들이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진정으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크라이스트 의식으로 변형된 자들뿐이다. 사람이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걸어다니는 죽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의 무한한 능력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변형되었을 때 그는 죽음의 무덤으로부터 일어나 그의 진정한 의식, 크라이스트 의식으로 일어섰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이 제3비전을 통과하면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된 모든 사람은 암흑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그들의 형제를 도와 주기 위해 예외없이 세상으로 나간다. 

 

제4비전은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힘에서 나타난다. 이 비전들 사이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사람이 그 비전을 얻는데 있어서 부딪쳐서 극복해야 할 것들을 상징한다. 최고의 의미에서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형상(form)에 대한 갈망의 정복을 상징한다. 동양의 신비학이 말하는 바로는 사람이 지고의 상태로 되기 위해서는 형상에 대한 욕망을 놓아버려야 한다. 위대한 스승 중의 한 사람이 한때 말하기를 “욕망이 없어진 형상으로부터 형상이 없는 형상이 형성되었다.(of desireless form is the formiess form formed)"고 했다. 대단히 이상하고도 묘한 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문자 그대로 물질의 십자가에 영의 못박힘이 있었다.

 

우리의 기독교 성경에서는 예수가 그 비전에서 실패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았다. 그가 만난 모든 사람에게 “너희들은 너희들의 신인 주를 의심하지 말라”고 말한 후에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나의 신이여, 나의 신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라고 울부짖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외쳤던 말은 “나의 신, 나의 신, 이 일을 위해서 제가 이 세상에 왔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육체에 대한 신성의 초월적 영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 그는 정복하고 통과했다. 그는 9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고대 신비, 카발라의 신비를 아는 사람에게 또 오시리스의 신비, 토트의 신비, 브람의 신비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있었던 시간은 그들에게 아무런 신비가 될 수 없다.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의 생애에 있어서 그가 어떻게 9시간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는가에 대한 기록이 있고, ‘카발라에는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가 태어나오는 신인(Divine Man)이 공간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는가’라고 나와 있다.

 

대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가보면 십자가 모양으로 된 9개의 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늘을 향해 있는 그 십자가는 왕비의 방 위에 있는 비밀 방과 연결되어 있다. 거기에서 입문자들이 통과하는 비전의식은 형상에의 욕망을 제거하는 것을 상징한다. 생명과 죽음의 형상에 대한 갈망과 공포는 문자 그대로 불 태워진다. 그것은 십자가의 예수에게도 불태워졌다. 그런 일을 겪을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나는 여러분들에게 길을 보여주러 왔다. 이런 방식으로 너희들은 나를 따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의 생애에 여러분이 따라와야 할 모든 단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육체 속에 있는 영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가 했던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성경에서 “그는 그의 영(Spirit)을 내던졌다”라고 한다. 그리이스어에서는 이 영은 푸뉴마이다. 그는 그의 영을 내 버렸다. 그는 자신의 형상(form)을 내던졌다. 여기서 영이란 말은 불명의 에센스, 인간의 의식적 의식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영은 생명이고 육체의 물리적 틀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솔로몬이 “누가 별로 올라가는 인간의 영과 땅속으로 들어가는 짐승의 영을 아느냐?” 라고 말했을 때 그가 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이스어 원본(original)에서는 “누가 별로 올라가는 인간의 영혼을 알겠으며, 땅속으로 내려가는 애니마 먼디(Anima Mundi 세계 영혼, 우주혼) 즉, 세계혼(World-soul)으로 들어가는 동물의 생명을 알겠는가?”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영을 내버리고 그의 육을 정복하고, 물질적 형태에 대한 모든 욕망을 정복했다. 여러분의 큰 공포는 무엇인가? 물리적 육체에 일어나는 무엇이다.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사용하고 있는 이 작고 낡은 형상에 벌어질 일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모든 작용과 고통에 종속되어 있으나 여러분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사원의 주인 조차도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다. 동양에서는 육체라고 하는 이 형상은 그것이 물리적 세계에 현현되어 있는 한 혼에 의해서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하다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은 육체에 대한 어떠한 욕망도 놓아버려야만 한다. 

 

우리는 몸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어떠한 공포로부터도 자신을 해방 시켜야 되고, 그러면 불구덩이를 지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상처에 대한 의식이 없는한 어떤 것도 육체를 다치게 할 수는 없다. 동양 사람들은 속박과 형상에 대한 욕망을 놓아버렸던 것이다.

 

예수가 그의 영을 내던졌을 때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육신을 내던지고, 진실로 살아서 그 몸으로부터 나갔던 것이다. 예수는 여러분, 아니 그 누구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죽지 않았고,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인간의 영이 육의 멍에를 초월하고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땅이 흔들리고 어둠이 사방을 덮었고 사원의 베일은 둘로 찢겨지고 무덤은 열리며 많은 성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 보였다.”라고 한다. 왜? 해방된 영이 육을 초월한 때 그것은 대우주(cosmos)에 존재하는 모든 공간과 모든 차원을 하나의 대 조화속으로 이끌어 한 동안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 제5의 대 비전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출현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그가 산상에서 제자들 앞에 섰던 때였는데, 그가 그들에게 모든 지시를 주고난 후에, 표현 된 대로 “하늘로(느닷없이) 들어 올려졌다.” 그 승천은 마지막 비전인 제5번째 비전을 상징한다. 형체의 욕망이 극복되고 사람이 그의 진정한 영 속에 서게 되면 그들은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된다. 모든 물질은 그들에겐 유동적 일 뿐이다. 예수가 정원의 마리아에게 현현하여 “나를 만지지마라, 나는 아직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에게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을 때의 예수처럼 그들은 물리적 육체를(일시적으로) 취할 수 있다. 그가 산상에서 제자들 앞에 섰을때 엄청난 빛의 홍수가 그의 존재를 감싸고 그는 들려 승천했으며 하늘의 상태 즉, 신의 영과 하나인 신성한 합일의 상태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 상태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극복한 자를 나의 신의 사원의 기둥으로 만들 것이요,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나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을 때, 성경에서 말해지는 그 상태로 들어 올려졌다. 그것이 승천이다. 왜냐하면 그때 사람은 ‘신’ ‘신성한 영-성령’과 최후의 신성한 일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생 여정은 조만간 이 다섯가지 국면, 혹은 단계를 거쳐 마침내 그 또한 세상과 세상의 조건을 극복하여 그 주인이 되게 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되지 못하면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형성될 때 바깥의 암흑으로 던져질 것이다.

 

출처 : 비교진의(秘敎眞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