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BOOK/비교진의(秘敎眞義)

제4부 4. 예수의 비밀 교훈들(The Secret Teachings of Jesus)

기른장 2020. 11. 2. 19:55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성경에는 예수의 참 가르침에서 아주 적은 부분만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예수가 두 종류의 완전히 다른 교훈을 가르친 것도 알고 있다. 즉, 그는 많은 대중들을 위한 가르침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다른 가르침을 주었던 것이다. 이것에 관한 근거로, 성경 마태복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저렇게 가르치고 자신들에게는 다르게 가르치는 이유를 예수에게 묻는다. 그 대답으로 “너희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있도록 허락되었지만 그들은 아니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니 그들의 눈은 멀었고 귀는 먹었기에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 말만 가지고도 일반대중에게 주었던 것 이상의 초월적이고 숨겨진 어떤 가르침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 우리가 배웠고 그리고 그 교훈들에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그것들이 볼 눈도 없고 들을 귀도 없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안다면 그러한 신비적 교훈에 접근하는 수단을 갖지 못하는 한, 우리들이 성장하며, 발전하고 신을 발견할 수 있는지에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것인가? 

 

예수의 삶에서 아주 적은 부분만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성경에는 예수의 삶에 관해 합해야 겨우 3년 정도의 기록이 있다. 그의 탄생, 12살 이후의 행적이 묘연하고 그리고 29세 혹은 30세부터 그 후의 3년간의 그의 가르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이것을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예수의 삶에서 겨우 약 42일간의 일을 들은 것뿐이다. 

 

동양에서는 예수가 다른 이름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어 그의 12살부터 28살의 행적등과 같이 우리가 서양에서 알고 있던 예수의 삶에 관한 것보다도 더 많은 것들이 동양에 알려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하겠다. 12살 이후에 그가 잠시 이집트로 갔으며, 그 후 티벳 사원에서 5년을 보낸 후 5년 정도 인도에서 가르침과 치유활동을 하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비카타(Vikata)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8년 이상 인도와 티벳에서 지냈다. 나는 예수가 그의 5년을 보낸 그 사원에서 2년을 보냈다. 그곳에 있을 때에 크리스천 교훈들에 관해 한 라마승과 토론을 했는데, 그는 “우리는 당신들이 서양에서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예수의 가르침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가 여기서 5년을 보냈기 때문이지요”라고 하면서 나에게 예수의 필사본을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것을 조사해 보았을 때에 그것은 양피지 위에 물감 같은 검은 색 물질로 기록한 문자들이 있는 두루마리로 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붓으로 그린 것처럼 눈에 띄는 것이었고 그 문자는 아람어 문자였다. 아람어란 예수가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되던 언어이다. 그당시 히브리어는 이미 사어였다. 오직 대 제사장만이 고대의 히브리어를 읽었고, 일반 제사장들은 타르굼(구약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한것)을 읽었던 것이다. 

 

이글의 중요한 주제는 내가 그 티벳의 사원에서 읽은 것들 중에서 몇 가지를 선택하여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설명해 주려는 것이다. 정통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을 해석할 때 많은 오역이 있었다. 예수가 “죽음이란 없다”고 말했는데도 그들은 그가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 죽었다고 말한다. 예수가 한 말은 “영생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려고 간다”라는 말이었는데 자신들을 위해 죽었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정통교회의 근본원리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아바타, 즉 신의 아들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주려고 왔으며 사람들이 잃어버렸던 광명 속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려던 것이었다. 문제는 그 빛을 받을 만한 사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없었던 것 뿐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려는 이런 문장 속에서 내가 읽었던 그 두루마리 경전의 아주 작은 조각만이 성경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두루마리의 글들은 메모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즉 그에게 떠오른 것들을 기록한 금언집 혹은 수상록과 같았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 것은 짧은 문장들이다. 나는 이것들을 가능한 한 서로 연결해 보려고 노력 하고 있다. 

 

나는 32권으로 된 금언집 두루마리의 완전한 필사본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고 전혀 다른 것들을 다룬 두 권이 더 있다.

어느 날인가 나는 이것들을 출판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는 언제나 지시에 따라서 활동한다. 어떤 보이지 않는 안내인이라든가 혹은 정령들이 아니라 백색단의 대 스승들의 지시에 의한 것이다.

 

내가 알려주려는 첫 번째의 금언은 질문 형식으로 된 아주 특이한 것이다.

 

그 질문은 이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죽음이 통치할 것인가?

 

그리고 그 대답은 이렇다.
“여인이 출산을 하는 한 죽음이 통치할 것이다. 나는 여인의 일을 마치게 하려고 왔다.”

 

탄생과 죽음은 서로 서로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원의 시작과 끝인 두 점이다. 그는 탄생을 끝내려고 왔던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죽음을 끝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한 일은 영혼 혹은 자아가 죽음을 극복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죽음을 극복함으로써 생명의 바퀴에서 그리고 재 탄생에서 그 자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재탄생의 원인을 정복함으로써 죽음을 종결 지울 수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서 그들이 스스로 생명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게 하며, 그래서 그는 그들이 다시 태어나야 할 필요성을 제거하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 문장은 이것이다.
“나는 높은 언덕 위에 서서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을 보았고 천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나는 가까이 가 그 팔을 들었다. 그 소리는 나는 그대요 그대는 나다. 그대가 있는 곳에 나 또한 있다. 만물 속에 나는 내재한다. 그대가 어디서라도 나를 거두어들이면, 나를 모은 가운데 그대 자신을 모은 것이다.”

 

고대의 히브리 신비에서는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이란 신과 인간, 거대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카발라적 신비에서 이 거대한 사람을 아담카드본이라 한다. 그는 거대한 혹은 신성한 세상의 사람이고 반면에 작은 사람은 지금의 아담, 인간의 종족, 인류를 말한다.

 

그는 언덕에서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대요 그대는 나 자신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내가 있는 곳에 그대도 또한 있다.”

 

물질계의 저급 인간이 있는 곳에는 또한 신성인간도 존재한다.


“그대가 신성계에서 무엇을 심든지 나는 그곳에 있다. 나는 또한 만물 속에 있다. 그대가 나를 모을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을 거둔 것이다.”

 

이 말을 군중들에게는 더욱 쉬운 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고, 너희는 내 안에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은 신성인간 안에 하나라는 말이다. 높은 언덕이란 해골의 언덕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대의 신비에서 해골 모양의 언덕은 천상계, 인간의 머리를 상징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거인과 작은 사람이 언덕의 꼭대기에 서 있다. 작은 인간은 세상의 최고봉에 도달한 그 지점까지 진화했다. 그러므로 그는 큰 사람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을 신성하고 거대한 사람과 합일 시켰다.

 

특별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다음 문장을 선정했다.
“오! 인간이여 그대는 하나의 귀로 듣고 다른 하나는 닫혀 있다.”

 

매우 짧은 문장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외부의 귀, 물질의 귀로 듣기 때문에 이 말은 모든 진리의 학생들에게는 대단히 의미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외부의 눈들과 외부의 귀들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신성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내면의 귀가 닫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성의식의 지도하는 목소리에 의존하기보다는 그의 동물적인 직감과 충동에 의존한다. 그들은 하나의 귀로 듣는다. 외부의 귀로 듣는다. 그러나 내면의 귀, 성령의 음성을 들을 귀는 닫혀 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주님께서 말하시길 만일 그대가 그대의 저급을 높게 하고 그대의 굽은 것들을 곧게 펴지 않으면, 그대는 나의 왕국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이 문장에 어떤 보충설명도 붙어 있지 않다.
여러분의 낮은 것들을 높게 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다. 영적인 존재인 인간이 육체에 빠져 있으며 무덤 속에 묻혀 있는 것처럼 그 안에 사장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영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자기 육체의 충동과 감정의 충동에 지배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육체를 영의 지배하에 두어야 한다. 그는 모든 저급의 물질본성에서 오는 행위들과 그의 모든 활동들을 영성화 해야 한다. 그래야만 성령과 일체가 되도록 자신을 준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굽은 것들이 펴져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사람이 감정적 본성의 말을 들을 때에는 이리저리 휩쓸리게 되어 감정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에 간혹 진리의 길에서 이탈하는 수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사람은 그의 목적지까지 그의 인생 길을 곧장 직진하여 옆길로 새지 말고 가야 한다. 만일 그가 성령과 일체가 되려 한다면 말이다.

 

그 다음 문장은 천국이 오는 것에 관한 것이다.
“왕국은 언제 올 것인가? 언제 둘이 하나가 될 것인가? 이것은 내면의 것 뿐만 아니라 외부의 것도 마찬가지다. 남성 혹은 여성으로가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하나가 될 때에.”

 

이 글들과 두루마리의 상당부분이 질문 형식으로 되어 있고 그는 그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이번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은 “둘이 하나가 될 때, 즉 내면의 것과 외부의 것도 마찬가지이며 남자나 여자가 아닌 남성과 여성이 하나인 때”이다. 이 말들은 기독교 성경에서 천국의 결혼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 말 속에 들어 있다. “하늘에서는 결혼이나 결혼식을 거행하지 않는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영혼이 동물체 안으로 화신하여 들어오기 이전 태초에 음과 양이 하나 안에 있었다. 남성과 여성은 하나 속에 들어 있는 둘이었다. 고대 지혜는 이렇게 가르쳤다. “신은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현현한 상태의 신인 성령은 남성과 여성이 하나인 상태였음을 알수 있다. 인간의 원초상태는 남성과 여성이 하나인 상태였다. 이것은 육체에 관한 언급이 아니며 영혼의 극성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추락했을 때에 영혼은 두 부분으로 분리되었고, 전 생명의 기간을 통해서 두 성(姓)간의 견인력이 음과 양이 서로 다시 합쳐지고 하나가 되려는 끌어당김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다. 이것이 이성간의 서로 끌어당기는 법칙의 기원이다. 

 

쌍둥이 영혼에 관한 원리가 여기서 발생했다고 고대 지혜는 말한다.

이것은 음과 양의 두 극성을 형성하기 위해서 분리된 것이나, 결국에는 영혼이 다시 하나가 될 것이다. 동물적인 속성을 극복하는 지점에까지 도달하면, 영혼의 두 극성들은 다시 하나가 되며 그리스도의 의식이 나타난다. 이것은 물질계에서의 일이 아니고 영계에서의 일이다. 둘이 하나가 될 때 듀아드가 모나드가 될 때에,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그 상태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결코 남성이나 여성이 아니며, 그들은 하나의 의식이 되며 그리스도 상태로 융합된다. 예수는 남성, 여성이며 둘 다 하나 안에서 있는 상태이며, 이 상태란 신과 절대적인 일체에 도달한 사람들이 얻는 상태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계에서 어떤 것을 현현시키려면 두 극성이 필요하다. 즉 석영(bull quartz)과 근본 광맥, 이 두 암석층이 없는 산에서는 금조차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동물, 식물 그리고 광물계에서도 진실이며, 영계에서도 진실이다. 그리스도 의식을 얻는 순간에 그들은 완전히 왕국안으로 들어간다.

 

그 다음 문장은
“위대한 것들을 구하여라. 그러면 작을 것들이 그대에게 더하여 질 것이다. 하늘의 것들을 구하여라. 그러면 지상의 것들이 더하여 질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가 범하는 실수는 우리가 위대한 것들을 구했는데 적게 얻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천상적인 것들을 구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지상의 모든 것들이 더하여지지 않았다. 성경에는 이 말들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그대는 먼저 천국을 추구하라. 그러면 이런 모든 것들이 더하여 질 것이다.” 이 말은 여러분의 물질적인 마음으로 볼때에 위대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천상의 것들을 구하라. 영적인 것들을 구하라. 그러면 지상의 모든 것들이 여러분에게 더하여 나타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아름다운 사상이 들어있다고 생각되는 다른 문장이 여기 있다. 성경에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그 문장은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나는 연약하며, 배고픈 자들을 위해서 나는 굶주리는 고통을 겪으며, 목마른 자들을 위해서 나는 목마름을 겪는다.” 예수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명령했을 때에 위의 말을 완전하게 전한 것이다.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어라.” 

 

그는 말했다. 사람들 사이로 가거라. 그들 인생의 어떤 상황속으로든지 들어갈 수 있도록 하여라. 그래서 그들 삶에서 무엇을 실현하고 싶어하는지를 깨달으라. 오직 이렇게 할 수 있어야 너희들은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동굴속에서 산속에서 사람들을 도울 수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돕지 못한다. 사람들과 어떤 곳에서 만나든지, 그들이 생각하는 그대로 생각하며 그들이 느끼는 그대로 느껴라. 그러면서도 그대들의 균형과 신성과의 일치 상태를 유지하라. 

 

그 다음에 예수가 말하길,
“우주에는 3원리가 있으니 아버지, 영이라 불리는 신성, 창조력 곧 엘로힘이요, 그리고 자연혼이다. 엘로힘과 자연혼에서 24우주력 혹은 천사들이 나타났으니 12는 아버지-영(father-spirit)의 의지를 따르고, 12는 어머니-영혼(mother-soul)의 본성을 따른다. 저급의 열둘이란 에덴동산의 현상계-나무(world-tree)들이다. 그 나무들은 3개씩 4그룹으로 나뉘어 있으며, 에덴의 네 강으로 분리되었다.”

 

나는 가능한 한 명확하게 설명해 주려고 노력한다.

첫째로, 우리는 우주에 3원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신성, 창조력, 자연혼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첫째, 신성은 만물의 근원이다. 신성한 무형의 진수이다. 엘로힘은 신성의 숨결에서 나온 말씀이다. 이것은 전도서에 Hebeli로 되어 있는 신성한 숨결이다. 이 말은 고대 히브리어로는 ‘신성한 숨결’ 이란 말인데 공허함이라고 번역했던 것이다. 이 엘로힘은 카발라 학자들이 Ain Soph Aur라 부르는 것, 신성한 빛, 편재하는 진수에서 나온 신의 숨결, 혹은 말씀이다.

 

자연혼(World-soul)이란, 인간의 동물체를 포함하여, 더 저급한 동물들, 식물계와 광물계까지 포함한 모든 물질에 삼투해 있는 생명의 영이다. 이것은 세상의 생명력이고, 신성의 창조력이며, 만물의 신성근원이다. “창조적 숨결, 신성한 숨결, 신성한 영, 생명의 힘”에서부터 우리의 기독교는 영과 영혼을 동의어로 생각한다. 인간속에 있는 신성한 진수가 영혼이고, 모든 만물 속에 내재한 생명의 힘은 영이다. 전도서에 표현된 이 말들이 잘못 번역되어 있다. “누가 위로 올라가는 인간의 영을 알며, 땅 아래로 내려간 동물의 영을 알리요?” 이 문장을 올바르게 번역한다면, “누가 천국으로 올라가는 인간의 영혼을 알며, 땅속으로 내려가는 동물체의 영을 알겠는가?”로 된다. 영 혹은 동물체는 자연혼의 한 부분이다.

 

반면에 인간의 의식은 신성근원의 한 부분이다. 이 근원으로부터 자연혼을 포함한 만물이 현현해 나온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신성근원의 인식하는 부분이다. 창조력, 즉 말씀으로부터 현현하며, 이 말씀은 수면 위를 운행했던 것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물들이란, 자연혼, 생명력, 생명에너지를 말한다. 신성한 숨결은 수면 위를 거닐었고, 신은 말했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있었다.” 빛은 영계의 성령의 첫 창조였다. 영계의 성령이란 원시창조의 24영역의 지고의 천사들이다.(천사란 개념을 일반인의 생각과 혼동하지 말것. 카발라적인 용어임) 

 

계시록(묵시록)에서 읽은 보좌 앞의 24영들을 기억하라. 이 24는 창조력의 첫 번째 현현들이다. 자연혼보다 앞서 이24영들이 창조되었다. 이들은 신성이 사람을 창조할 때 사용할 힘들 혹은 대리자들을 형성시켰다. 이24의 열둘은 영적 센터들이고, 12는 인간 아스트럴체 내의 물질센터들이다. 이 영적 12센터들은 머리 안에서 발견되며, 12물질센터들을 통해서 그 힘을 표출하는 것이다. 

 

“열둘은 아버지-영의 의지를 따른다.”고 들었다. 엘로힘: 이들은 신성력이 흐르는 통로들이다. 그리고 “열둘은 어머니의 의지를 따른다.”고 말한다. “저급의 12는 에덴동산의 현상계-나무들이며, 이 나무들은 각각 3개씩 4그룹으로 묶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에덴의 4개의 강을 형성한다.” 다시 말하지만 에덴과 에덴의 네 강은 여러분의 몸 속에 있다. 예수가 “천국은 안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네 개의 강이 있고, 생명나무는 12종류의 과일이 달린다. 고대 히브리어에서는 “생명나무는 12종류의 과일을 맺는다.”라고 한다. 그런데 기독교 성경에는 단지 12통로의 3개씩으로 된 영역들이다. 이것을 통해서 성령이 흐른다. 이것은 점성학의 12궁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점성학에서는 신비계로 깊이 탐구한 사람들이 많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점성학 이면의 신비법척에 대한 어떤 철학도 없다. 

 

그 다음 문장은
“엘로힘은 위는 여성이요, 아래는 뱀으로 상징된다. 뱀으로부터 동물들이 나오고, 여자로부터 인간이 나온다.”라고 되어 있다.

 

특이한 문장이 아닌가? 엘로힘은 신의 성령 혹은 창조력임을 기억하라. 부조화, 부정이 있는 저급의 세상으로 성령이 현현했던 것이다. 여성은 인간 속의 고급, 영적 본성을 나타내며 뱀은 동물체와 인간의 본성을 나타낸다. 성령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이 형성되었고, 뱀으로부터는 자연혼의 저급한 혼이 형성되었다. 즉 인간의 동물체다. 그래서 인간은 본성이 둘로 되어 있다. 우리는 여자가 뱀의 머리를 짓밟을 것이라고 들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 위에 서 있다는 말이다. 여성이 뱀을 파괴해야만 하고, 그녀의 자녀가 뱀, 즉 동물 혹은 물질성을 부수어야 한다. 그런 후에 엘로힘은 신성, 즉 그가 나온 근원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문장은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에덴과 엘로힘은 그들의 힘을 인간에게 맡겨 두었다. 영혼인 인간에게 자연혼이 인계되었고, 자연혼은 인간의 영과 혼합되었다.”

 

다시말해 인간은 조합된 존재이다. 인간은 영, 형상(그의 동물체)과 영혼(영적인 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에덴상태로 있을 때 셋이 하나로 합일되어 있었다. 이것이 브라만들이 보여주는 삼각형의 인간이며 카발라적 신비에서 언급되는 인간속의 3성, 영과 영혼과 그리고 에덴이 형성되어 있는 영과 영혼의 절대적 균형이다. 의지만 있다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충분한 의지가 없다는 점이다.

 

그 다음 문장은
“참 인간은 성이 없는 남성-여성이다. 그러므로 그는 동물본성을 버리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위에 있는 영원한 진수(Eternal Essence)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그곳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새로운 모습이 있는 곳이다.”

 

참 인간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인간은 그가 분리되었고, 떨어지게 된 곳에서 동물본성을 버리려고 애쓰는 것이며, 그래서 그가 둘이 하나로 존재하는 순수한 영으로 돌아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둘이 하나 안에 있다는 말을 할 때에 나는 비정상적인 사람을 일컫는 양성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심리학적인 문제이며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런 경우는 영혼의 두 부분이 뒤섞인 것이지 둘이 하나로 된 것이 아니다. 즉, 두 창조의 힘을 모두 지니고 있는 하나가 된 것이 아니다.

 

그 다음 문장은
“이것은 천국의 문이며, 이것은 신의 집이다. 여기에 선한 신이 독존(獨尊)한다. 이곳으로 어떤 불순한 인간도 들어오지 못하며, 어떤 심령도 육체의 인간도 들어오지 못한다. 이것은 오직 영적인 것만을 위해 보존되고 있다. 이곳은 그들의 옷들을 벗어버리고 동정의 영에 의해 모두가 순수한 신랑들이 되어서 와야 하는 곳이다. 동정의 영에 의해 동정이 된 사람이 어린이를 임신한 동정녀이며,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아이는 심령도, 동물도 그리고 육체도 아니요 영원의 영원으로 축복된 자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간단하게 이런 말이다. 오직 영원한 일체만이 있으며 어떤 분리도 없는 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 모든 인류의 목표이다. 그 상태에는 어떤 불순한 것 불순한 사람도 들어가지 못한다. 여러분의 의식과 마음과 본성에 분노와 미움과 두려움과 부조화가 있다면 여러분은 신에 이를 수 없다.

 

“영이 순수한 사람만이 신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성경의 말씀을 기억하는가? 신을 찾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노력했지만, 그렇게도 많은 사람이 실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러분들은 신이 자기 본성의 한 부분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그런 상태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신은 오직 완전한 평화, 고요, 안정, 조화와 순수성 속에서 그에게 오는 것만을 인식하고 또 일체가 되기 때문이다. 

 

심령이란 없는 것이다. 심령이란 악령, 엘리멘탈력과 같은 것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점점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자신들을 정화시키는 것은 구하지 않고 현상(phenomena)을 구한다. 참된 능력을 현현 시키기 위해 여러분들이 가야할 길은 여러분들의 저급 본성을 변형시키는 일임을 알아 두라. 

 

“어떤 육체의 인간도 안된다.”라는 말은 지상의 체에 묶여 있는 어떤 사람이라도 안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육체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에 묶여 있는 그의 속박된 곳으로부터 그의 지성적인 의식을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 영적인 세계들로 올라갈 수 있다. 우리가 모든 네가티브와 불순한 상념을 넘어갈 수 있을 때에 우리는 마치 동정의 신부처럼 영계로 들어갈 수 있다. 모든 부조화를 씻어 내고, 그것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우리는 동정의 영에 의해 동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실로 천상의 마스터가 되는 일이다. 둘이 하나가 될 때에 오직 신의 유일한 영만이 체를 통해 나타난다. 우리가 그 상태에 들어갈 때 우리는 아들을 낳는다. 그 아들이란 바로 우리 자신이요 신의 태양이다. 

 

“이는 육체적이거나 심령적이거나 동물이 아니라 영원의 영원으로 축복된 자이다.” 이는 시작부터 종말까지 존재한다. 삶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것은 곧 인간의 순수한 영혼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영혼이 육체라는 올무에 결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 문장은 윤회전생을 다룬 것이다.
“영혼은 재탄생하는 주기적인 활동과 존재의 모든 영역들을 다 통과해야 한다.”

 

이 말은 생명의 모든 상태와 측면들을 거쳐야 하고 그 다음에 그것에서 자유를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마스터란 환경과 사물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는 사람이다.”라고 들었다. 생명과 자신들의 저급 본성을 극복하고 정복할 때까지는 우리는 탄생, 죽음, 재탄생의 굴레에 묶여 있다.

 

그 다음 문장은
“완전성이란 자신들의 이전 상태들을 기억하는 것에 의해 인도된 모든 한계들과 차별을 넘어서 고도의 합일의 명상으로 날아오르는 영혼들이 얻는 것이다.”

 

이 말은 이런 뜻이다. 우리가 어떤 발전의 단계를 지나면,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되는데, 그때에 과거의 실수들로부터 현재의 무엇을 피할 것인가를 배운다. 과거의 부조화로부터 어떻게 현재의 조화를 창조할 것인가를 배운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게 될 때에 육체의 한계와 우리 주위의 지상적 환경들을 넘고 초월하여 비상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차별보다는 고도의 합일에 우리의 집중력을 모아야 한다.

 

그 다음 문장은 대단히 깊은 뜻이 있다.
“거미가 그 자신으로부터 거미줄을 치듯이 신이 우주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종류의 방사물 혹은 어떤 종류의 사물이 필요했는지 우리가 추측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말씀을 하니 그것이 있었다."

 

이것은 모세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의 의미이다. 신이 말하길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빛은 어디서 왔는가? 無에서 왔다. 어디라고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오직 말씀을 발하는 자의 목소리에서 온 것이다. 그 말씀을 발하는 자가 없었을 때에 그것도 없었다. 우주의 씨앗(우주를 만드는 최초의 유전자)을 위해서 말씀이 발성되었다. ‘빛이 있으라’는 존재의 차원을 넘어선 곳에서 왔다. 이것이 세상에 나타난 모든 사람들을 비추는 참 빛이다. 인간은 그 씨앗에서 그의 원리들을 가져오고 그것에 의해서 광명을 얻는다. 이 원초의 빛과 생명이 만물의 근원이다.

 

형상과 질료(substance)의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은 자신의 형상과 질료에 대한 관념으로 신을 측량하는 습성이 있다. 이것이 바로 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간의 관념이다. 인간은 신을 빛이라든지 불이라든지 혹은 바다 등등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신이 그런 것일까? 아니다. 신은 그런 것이 아니다. 신은 한계나 중심이나 주변이 없기 때문이다. 신은 만물을 포함한 거대한 無(Great Nothingness)이다.

 

“그가 말씀을 발하자, 우주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형성했는가? 無로부터 그것은 내면에서 창조되었으며, “거미가 자신으로부터 거미줄을 치듯이” 신의 한 부분이다. “신의 빛이 움직이고 우주가 창조되었다.” 신의 빛은 모든 형상을 초월한 존재의 참 본성이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비추는 참 빛이다.” 그러므로 무형의 신(비형상의 신)의 참 본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형상으로부터 후퇴해야 하는 것이다. 

 

고대의 신비교훈에서 “신은 창조되었고 그리고 창조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카발라 학자들은 신은 ‘아인-아인(Ain-Ain)’, 양과 음의 존재라고 말한다. 즉, 양의 존재는 물질계를 말한다. 물질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형성되고 창조되고 나타나기 전에 신성광(Divine Light)속에 먼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음 문장은
“신의 아들들은 신성한 불꽃이요, 내재의 참 영적 인간들이다. 이들은 존재의 하급 상태에 남아있던 영혼들에게 질서를 주고, 인내하며, 교정하고 완전하게 하려고 씨앗의 세계를 떠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육체를 입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육체에 묶인 적이 없는 영적인 아바타들이다. 이들은 인간이 자신들과 같은 의식의 하나 상태로 돌아오도록 인간을 돕고 인도하기 위해서 신성 안에 존재한다."

 

여러분 모두가 기억해 두기를 바라는 문장이 하나 있다. 이것은 모든 차원들과 공간들 안에서 알려져 있는 예수의 이름이다. 예수가 “그들이 나의 이름으로 악령을 몰아냈단 말인가?”라고 말 한 것을 기억하라. 교회는 그것이 예수의 이름이었다고 말하지만 예수의 이름이 아니다. 그들에게 분쟁과 싸움이 일어난 것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그의 비밀 이름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그를 무한의 절대적 끝에서도 부를 수 있었던 이름이다. 이 이름은 그의 영혼의 이름으로 모든 시대를 거쳐 그의 존재의 일부로 존속한다. 나는 다음 말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겠다. “아멘, 아멘,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나니 모든 시대를 거쳐 나의 이름은 아베라멘쏘(Aberamentho)이다. 그대가 첫 번째 신비를 알고자 한다면 아버지가 나에게 준 나의 이름을 부르라."

 

영혼은 육체의 이름과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 지식은 현대의 영국계 인종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민족이 아는 것이다. 심지어 아메리카 인디언도 이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비밀이름을 지니고 있다. 초기의 화란인들과 힌두인들도 그랬다. 영혼의 이름은 숨겨진 이름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의 이름을 그가 신비계로 인도한 사람들에게 주었으며 그들이 필요할 때 부르게 했던 것이다. 예수가 환자를 치료하고 악령을 몰아낼때 사용했던 위대한 다섯 낱말은 다음과 같다. “자마, 자마, 오자, 라카마, 오제이아”. 나는 이 말씀으로 악령을 몰아낸다. 이 문장 뒤에는 그가 악령을 몰아내는데 이 말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상세히 기록했다.

 

그가 ‘자마 자마’에 대한 설명을 한 문장에 따르면 이것은 신성의 창조와 비창조의 힘이고, ‘오자 라카마 오제이아’는 힌두인들이 ‘라자스 사트바 타마스’라 부르는 인간 머리 속의 3대 에너지 센터들을 진동시키는 말씀이다. 라자스, 타마스는 아벨과 카인이다. 활동과 비 활동의 센터들로 힌두 신비에서 가르친다. 이것들은 구약성경에 카인과 아벨이란 이름으로 보존되어 왔다. 이 문장 이후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 말씀들은 죽은 아벨을 살리는 힘을 지닌다. 이 힘이 몸의 부조화를 몰아내므로 치료가 일어난다. 만일 네가티브, 부조화의 영이 주변에 있다면 그것은 태풍에 의한 것처럼 날려갈 것이다.

 

출처 : 비교진의(秘敎眞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