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휘용/푸른행성 지구의 진실

푸른행성 지구의 진실 제2장 이유 있는 망각

기른장 2020. 12. 25. 17:13

제2장 이유 있는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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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기억도 있지만 전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얼마든지 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의 경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상상을 반복적으로 함으로써 혹은 자기 최면을 통해서, 점차 자신의 뇌리에서 사라져 가게 된다. 강렬한 체험 일수록 강하게 기억되어 있고 따라서 쉽게 지워지지 않지만, 강렬한 염원이 있을 때에는 어떤 기억이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지고 또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집단적 망각의 경우도 개인적 망각의 경우와 비슷하게 진행된다. 모든 주민들이 특정 종교를 신앙하고 있는 마을에서 어느 날 한 아이가 죽었다. 보통 때와는 달리 유난히 이상하게 행동하는 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를 교주에게 데리고 갔고, 그 교주는 아이가 악령에 씌워졌다고 하며 아이를 때리기 시작 하였다. 어느새 아이의 부모뿐만 아니라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 행위에 동참 하였고, 아이는 곧 싸늘하게 식어 갔다. 일시적 광기가 사라지자 마을사람 모두는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 하였고,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니었기를 염원하게 되었다. 이후 마을 사람 그 누구도 그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그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 마을의 후손들이 그 일을 기억할 리는 더더구나 없었다.

 

이와 비슷한 집단적 망각이 인류 전체에게 실제로 일어났다. 어떤 행위를 잊기를 염원 한 것이 아니라 행위를 넘어선 근본적 원리 즉 전체를 잊고 싶어 하였고, 그래서 실제로 전체는 인류에게서 망각 되었다.

 

아주 먼 옛날의 일이었고, 따라서 인류가 그것을 다시 기억해 내는 것은 특별한 계기가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기억의 자체의 기억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염원에 의해서 기억의 창고 너무나 깊숙한 곳에 간직된 체 오랫동안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2장에서는 인간은 왜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기억하지 못하는지, 왜 자신의 근원에 대하여 까마득히 잊고 살았는지에 대하여 알아본다. 또한 지금은 왜 그것을 다시 기억해 내어야 하는지도 살펴본다.

 

 

지구의 개방과 레무리아

 

지구가 생성되기 훨씬 이전부터 '세 번째 근원의식의 자각체'는 지구라는 특수 공간에 머무르게 될 존재들에 대하여 세심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바이러스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서 자신의 핵심에너지가 손상되어 고통을 호소하는 모든 존재들이 우선적으로 포함되었고 또 바이러스들과 조우하여 조화의 에너지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에너지 전문가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이렇게 치유 목적으로 지구에 오게 될 존재들뿐만 아니라 근원이 머무르는 지구에서 근원의 에너지를 체험하고 진정한 전체, 진정한 하나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존재들도 많았는데 이들에게도 지구는 개방 되었다.

 

그때까지 우주의 모든 존재들에게 있어서 근원 혹은 전체를 체험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구가 만들어진 이후에는 모든 존재들이 진정한 근원을 체험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지구에서 지구에너지를 체험하는 것이 바로 근원의 에너지 곧 근원 그 자체를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들 이외에도 가이아 프로젝트상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탄생되거나 혹은 선발된 존재들도 있는데 이들은 에너지체 가이드(guide in energy body)혹은 인간체 가이드(guide in human body)로 활동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지구의 개방이 단행되어 레무리아 시대가 열렸을 때 가이드들을 포함한 순수한 존재들이 먼저 지구에 오게 되었고 점차 많은 수의 존재들이 지구공간으로 모여 들게 되었다.

 

존재들은 완전한 조화의 에너지 속에서 그리고 모든 것이 영롱한 에테르 상태에서 자신의 형체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며 형용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토끼로써의 흐름을 체험하고자 하는 존재는 즉시 토끼의 원형으로 변하여 깡충깡충 들판을 뛰어 다녔고 물고기로써의 흐름을 체험 하고자 하는 존재는 즉시 물고기의 원형으로 변하여 물속을 유연하게 헤엄치며 다녔다.

 

체험할 수 있는 많은 동식물의 원형이 이미 존재 하였고 원하는 경우 어느 존재나 그 흐름을 체험할 수 있었으며 거기에는 아무런 제한도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때까지 인간의 원형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주에 있을 때 매순간 찢어지는 듯한 고통속에 있었던 존재들에게도 이러한 황홀한 체험은 가능 하였다.

 

지구가 속해 있는 이 우주에서는 진정한 조화가 부재 하였기에 부조화가 그 효력을 발휘하였지만 근원(전체)의 에너지가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는 지구공간은 완전한 조화 그 자체였고 따라서 그 존재들에게 입력된 인식 즉 부조화가 당연한 것이라는 인식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떠한 불협화음도 없는 상태에서 누구나 다 근원과 하나가 되어 있었고 오랫동안 다양한 흐름들을 체험하며 다 함께 머물렀다. 절대적 평온과 조화 완전한 행복 혹은 지복 그 자체 이것이 레무리아 시기에 대한 모든 존재들의 공통된 기억이다.

 

레무리아 후기 지구는 물질화의 예비단계인 고형화 상태로 돌입하였다. 고형화란 흘러내리는 액체처럼 흐물흐물한 에테르 상태에 비하여 존재들이 비교적 고정된 형태를 유지하는 상태를 일컫는데 이 상태에서는 존재들이 자신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 이전처럼 자유롭지는 않았다.

 

하나의 흐름을 체험하다가 순식간에 다른 흐름을 체험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고 새로운 흐름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시간의 경과가 필요 하였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고형화 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인간의 원형이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전체(근원)의 대행자로써 예정된 흐름이었고 인간의 형상을 한 상태에서 어떤 흐름이든 체험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부여된 흐름만을 체험 할 수있도록 되어 있는 다른 모든 동식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모든 동물들의 소리를 흉내 낼 수 있고 모든 동물들의 동작을 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었다.

 

이렇게 설계된 인간이 진정으로 모든 흐름을 체험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흐름을 포함하는 전제(근원)가 인간의 원형으로 나타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고형화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지구의 모든 공간에 스며들어 있던 전체가 최초의 인간의 원형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냈고 레무리아의 모든 존재들은 그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인간으로 현현한 근원을 무(MU, MOOH)라고 불렀다.

 

많은 존재들은 스스로도 인간의 원형을 체험하고 싶어 하였는데 그들은 일정 기간 동안 몇 가지 흐름을 체험할 수 있는 고형화 된 인간의 몸을 가질 수 있었다.

 

에테르 상태와 비교해 체험하고자 하는 흐름을 바꾼다든지 하는 측면에서 약간의 제약은 있었지만 모든 존재들은 고형화 된 이후에도 여전히 근원의 에너지 속에서 다양한 동식물의 흐름을 보다 선명하게 체험하며 끝없는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지구가 물질화 단계로 접어들었을 때 레무리아의 모든 존재들은 말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오랫동안의 낙원생활을 기억 속에 간직한 채 차례대로 넘실대는 물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레무리아 라고 불리던 모든 지구공간은 에테르 상태의 순수한 물로 가득 채워지게 되었고 이 상태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모든 존재들은 그 순수하고 황홀한 물속에 녹아들어 레무리아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지구의 물질화

 

온 천지를 가득 채운 채 넘실대던 에테르 상태의 물이 점차 빠져나가면서 지구의 물질화는 시작 되었다. 제일 먼저 물이 빠지기 시작한 곳은 물질화가 예정되어 있던 공간이었고 시간을 두고 지구의 다른 공간들에서도 물이 빠져 나갔다.

 

물이 빠져나가자 물질화가 예정되어 있던 곳에는 빛이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공간은 처음에는 진한 액체와 같은 상태였지만 점차 진흙처럼 끈적끈적한 상태로 변하고 그리고 점점 단단해지기 시작 하였다.

 

물질화 이후 최초의 인간 혹은 다른 생명체로서 태어나기로 예정되어 있던 존재들은 자신들이 아주 컴컴한 세상에서 아직 신체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치 자신의 신체가 진흙으로 빚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 속에서 물질화 된 최초의 인간들과 최초의 생명체들은 아주 서서히 진행되는 신체의 완성을 기다렸다.

 

주위가 조금씩 밝아 오고 또 물질로 된 신체를 빚는 과정이 끝났음을 느꼈을 때 최초의 인간들은 자신의 몸을 살펴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레무리아 후기의 고형화 시대를 경험하면서 물질화에 대하여 이미 상당한 예비지식을 쌓은 상태였지만 실제로 물질화된 지구를 체험하는 것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새로 태어난 최초의 인간들과 생명체들에게 물질화 된 몸의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되는 세상의 생생함은 너무나 경이로운 것이었다. 이전까지의 비물질 세상에서는 상대방과 주위에서 느껴지는 파장을 통해서 세상을 인지해 왔었는데 펼쳐진 장면들을 눈으로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느끼며 피부로는 촉감을 느끼게 된 그들에게 물질화 된 지구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들에게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장면이 포착 되었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 보았을때 세상이 대기와 대지 즉 하늘과 땅으로 확연히 나뉘어져 있었다. 물질화 이후 지구상에 태어난 인간들과 생명체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놀라운 것으로 다가오지 않겠지만 그때까지 에너지 세상에 익숙해져 있는 그들에게 지구의 하늘과 땅은 크나큰 놀라움이었다.

 

물질화 예비단계인 레무리아의 고형화 시대에서조차 나누어지지 않은 채 오직 하나의 공간만이 있었기에 그들의 놀라움은 당연한 것 이었다. 세상이 둘로 그렇게 확실히 나뉘어져 전개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그들에게 물질화 지구는 흥분과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에게서 발견되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 역시 그들에게 너무나 새로운 것이었다.

 

지구에 온 이후 이미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동식물의 원형을 체험해 보았던 그들이었지만, 남성체와 여성체는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성별의 구분은 존재들로 하여금 서로 다른 신체상에 구현된 각각의 흐름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 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존재들이 남성으로 태어나느냐 여성으로 태어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흐름을 체험할수 있게 되었다.

 

물질화된 최초의 지구는 어떠한 오염도 없는 순수한 에테르 상태에 있었고 모든 것은 투명할 정도로 빛이 났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의 지구에는 오직 하나의 대륙과 하나의 바다만이 있었는데 끝없이 펼쳐진 대륙은 대체로 끝없는 평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구릉이나 언덕 그리고 숲들은 드문드문 형성되어 있었지만 높은 산이나 계곡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지금과 같은 큰 강이나 호수는 아니지만 작은 규모의 하천과 호수는 간간히 형성되어 있었다. 바다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하고 빛나는 물로 가득하였고 잔잔한 물결만이 바닷가 모래사장을 적시고 있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낮과 밤의 구별이 조금씩 확연해지기 시작하면서 인간을 위시한 생명체들은 낮에는 활동을 하면서 체험하였고 밤에는 근원의 에너지 속에서 휴식하는 상태로 빠져들었다. 기후는 항상 온화 하였고 피부로 느껴질 만한 바람조차 없었다.

 

 

초기의 인간들

 

사람들은 드문드문 몇 명씩 모여 살게 되었고 숲과 들에는 오늘날 동식물들의 원형이 되는 생명체들이 살아가게 되었다.

 

하천이나 호수에도 작은 물고기들이 서식 하였고 바다에는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들과 해조류 들이 서식하였다.

 

먹을 것은 어디를 가든지 풍부 하였고 비도 바람도 혹독한 기후도 없었기에 인간을 위시한 동물들이 의식주를 걱정할 아무런 이유도 었다.

 

특히 인간의 경우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생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인간들처럼 생존을 위한 활동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다만 주어진 모든 것을 그대로 느끼고 모험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뿐 이었다.

 

특히 물질화 초기의 인간들은 지구에 오기 전 부조화에 감염된 적이 없는 존재들이었고 우주에서의 완전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여 지구로 오게 되었는지 등에 대하여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항상 전체를 느끼며 매순간을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무엇을 먹든 어디서 자든 그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특히 자신들이 전체의 대행자로써 물질지구에 존재함을 인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나'라는 인식조차 없이 이웃들 및 다른 동식물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인간의 마음에는 아무런 욕심도 없었고 전체에 녹아들어 하나를 느끼며 항상 지복감 속에서 지냈다.

 

또한 초기의 인간들은 전체 속에 녹아들어 생활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두뇌는 항상 전체와 공명하고 있었고 따라서 필요한 것은 언제든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비록 물질화 되었지만 몸으로 주위 파장(에너지)과 존재들이 발산하는 에너지를 완전하게 느낄 수 있었고 따라서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의사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는 비단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주위의 동식물들과도 가능한 일이었다.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과도 바로바로 의사전달이 가능하였고 장거리 여행을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순간이동 능력을 이용하였으며 아무리 무거운 물건이라도 들어 올릴 수 있는 공중부양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인간에게는 지금과 같은 노화현상도 질병도 그리고 아이를 낳을 때의 고통도 없었다.

 

모두가 오랜 시간을 다 함께 하다가 때가 되면 몸을 벗고 빛으로 화하여 육신이 없는 존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할 뿐이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아이의 몸을 입은 채 다시 아름다운 물질 지구의 과정을 밟았다.

 

이렇게 물질화 초기의 인간은 과학자들이 전해주는 원시인류나 혹은 일부 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시조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태고의 지구에는 모든 것이 있었고 모든 것이 완전했던 것이다.

 

지금의 사람들에게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소위 물리적인 한계는 물질화 초기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후 사람들이 망각에 빠져들면서 점점 더 효력을 발휘하게 된 개념일 뿐이다.

 

 

망각과 분리의 시작

 

지구상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부조화에 감염된 존재들도 점차 인간으로 환생하게 되었다. 이들이 처음 인간으로 환생했을 때에도 모든 것은 풍부하였고 또 생존에 아무런 어려움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들 내부의 부조화는 발현되지 않았고 이미 확고하게 형성되어 있던 인간사회의 질서에 순응하며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아갔다.

 

하지만 그 존재들의 숫자가 점점 증가함에 따라 이들 중 내면의 부조화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여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마을에서 추방당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시작 하였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 하고 다른 존재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추방당하게 된 이들에게는 당장 생존의 문제가 심각하게 다가오기 시작 하였다.

 

초기의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무엇을 먹거나 마실 필요가 전혀 없었고 다만 보다 생생한 체험을 위하여 음식을 필요로 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물질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하고 특히 내면에 부조화를 지닌 존재들이 그것을 탐닉하게 되면서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은 점점 중요한 일이 되었고 그런 기억이 축적되면서 먹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태로 점점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본래 전체의 대행자로서 탄생하였고 또 동식물들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물질화 초기에는 인간에게 필요하다면 동물들은 자신의 먹이조차 제공하였다.

 

하지만 부조화 파장을 발산하는 인간들은 동식물이나 식물들조차 전체의 대행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먹을 것이 부족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당장 굶주리지 않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들은 동물을 사냥하는 등 생존을 위한 다양한 행위들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행위들로 인하여 기존의 인간사회 및 주위의 동식물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내재된 폭력성과 잔인성 등 다양한 부정적 성향들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사람들이 육식을 하게 되면서 날 것으로 먹을 때의 비릿함을 없애기 위해 썰고 다듬고 불로 익히는 등 다양한 조리법이 등장하기 시작 하였다. 이는 물질화초기 모든 존재들이 하나로 머물 때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파장의 음식만을 가공하지 않고 섭취한 것과는 아주 달라진 모습이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음식의 맛이나 모양 혹은 색깔을 중요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존재의 본질이 아닌 몸에 점점 더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이로 인해 '나'라는 인식이 확고히 생겨나기 시작 하였다. 사실 개별성에 대한 인식은 지구에 오기 전 우주에서도 있었고 각자가 다양한 형상을 하면서 체험하던 레무리아 때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각 존재들이 인식하던 개별성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그 이후 사람들이 '나'라고 여기게 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지금 사람들의 경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는 단순히 자신의 신체상에서 나오는 속성들을 '나'라고 인식하다가 차차 성장하면서 외부에서 받아들인 관념과 지식들을 통합하여 '나'라고 인식하게 되는데 이렇게 형성된 '나'는 존재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의 집합체이다.

 

이렇게 '나'에 대한 인식이 강해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이기적이고 경쟁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최초에 먹고 살기위하여 '나는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였으나 '나'라는 인식이 점점 강해지면서 '너 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잘 자기 위하여 나는 한다'는 개념으로 변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자신의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당장의 물질적 생활이 변화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나는 한다'라는 인식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고 새롭게 발견한 자신의 힘을 행사하고자 원하게 되었다.

 

'나는 한다'는 인식은 처음에는 부조화의 인식이 심어진 존재들에게만 국한된 채 확산되었지만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그들이 사회의 다수로 등장하면서 모든 인간들에게 퍼져나가기 시작 하였다. 인간사회의 주도권이 부조화에 감염된 존재들에게로 넘어가면서 생존의 문제는 이제 누구나 고민하여야 할 문제로 대두되었고 이에 따라 누구나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생이란 그냥 전체에 머무르며 체험하는 것이라는 그들 조상들의 생각은 점점 현실성이 결여된 허황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대신 인생이란 노력하고 창조하는 것이라는 사고가 대다수의 인간들에게 스며들게 되었다.

 

사람들 특히 치유가 필요한 존재들의 경우 물질에 빠져들어 '나는 한다'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전체의 느낌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지구에 오기 전 우주에 있을 때의 기억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지만 물질적 삶에 점차 몰두하게 되면서 레무리아 시기 전체에 녹아들어 있던 때의 느낌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여기서 느낌이란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감성적 인식 혹은 충동과는 다르며 진실을 아는 것을 의미 한다. 즉 매순간 무엇이 필요한지 그 자체로 아는 것을 의미 한다. 생각 혹은 사고에 의해 아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반면 사람들에게 전체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치유가 필요한 존재들은 자신이 이러한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염원하게 되었다.

 

전체에 대한 느낌이 희미해진 상태에서 자신들이 빠져들고 있는 물질의 배후에 근본적인 원리 혹은 힘이 있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당장의 물질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기억이 자신의 물질 행위를 제한하고 구속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전체에 대한 기억은 현재 자신이 행하고 있는 삶의 방식 즉 물질에 대한 탐닉을 억제하게 만들고 자신이 전체의 의지에 반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자신을 두렵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전체를 잊고 싶다는 사람들의 염원에 의해 전체는 사람들에게서 빠르게 망각되어 갔고 어느 순간 '과연 전체는 있는가?'를 의심할 정도로 그 기억은 희미해졌다. 그리고 그 의심은 '전체는 없다' 는 스스로의 정리에 의하여 완전한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전체는 없다' 는 인식은 곧 '완전한 조화는 없다' 혹은 '완전한 것은 없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또한 근본 원리는 망각한 채 드러나는 형상만을 인식하게 되면서 '영원한 것은 없다' 는 인식 등으로 확장되었다.

 

완전한 조화란 존재하지 않으며 부조화는 당연하다는 전제하에서 형성되는 제한된 현상들을 보면서 그 현상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부조화는 진실이라 확인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즉 현재 인간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모든 부조화의 현상들은 부조화가 진실이라는 믿음에 의해 나타난 현상들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자신의 본질에 대한 기억도 차차 희미해져가기 시작 하였다.

 

환생이 거듭됨에 따라 물질세계에서의 생생한 기억은 축적되어 갔고 또 당장의 물질적 필요성에 허덕이게 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은 우주에서의 일들을 모두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전체에 대한 망각이 일어났던 것과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존재들 자신의 과거도 완전한 망각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 기억들 자체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물론 아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더 이상 표면의식으로 떠오르지 않는 아주 깊은 곳에 저장하게 된 것이다.

 

 

망각 이후의 인간들

 

이로써 인류는 전체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본질에 대하여 완전한 망각 상태에 빠졌고 전체로부터 사실상 분리되었다고 믿는 상태에서의 체험들이 전개 되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전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진실이라고 단정해 버림으로써 일종의 집단 최면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물질에 점점 더 빠져 들어감에 따라 물질 이면의 에너지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내면의 부조화가 표출되어 나옴에 따라 초기의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완전한 유전자는 급속히 변형되고 파괴되어 갔다. 이에 따라 인간에게 본래 가능하였거나 당연했던 다양한 능력들은 급속히 사라졌고 오직 오감으로만 세상을 인지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을 인간의 본래 모습 혹은 진화된 모습인양 착각하게 되었다.

 

많은 능력들을 상실한 인간들에게 삶은 어렵게만 느껴지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노력, 근면, 최선 이라는 단어가 삶의 키워드가 되었고 도구를 만들어 삶의 불편을 해소하거나 감소시키는데 인간 활동의 초점이 모아졌다.

 

항상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불안하게 느끼기 시작하였고 발전이나 진보는 인간의 역사를 기술하는데 가장 중요한 수식어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관 속에서 인간의 조상은 굶주림과 추위에 허덕이면서 동굴생활을 한 원시인간으로 그려지고 있고 '전체는 없다'는 부정에 근거한 존재방식은 '자유의지'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다른 모든 생명체들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망각하고 '전체는 없다'는 전제를 진실인 양 착각한 채 전체로부터의 분리를 진실이라 믿으며 생활해 왔다. 하지만 실상은 모든 존재가 항상 전체의 품안에 있었다. 물질화 여부와 상관없이 전체의 에너지는 지구 모든 곳에 빠짐없이 스며들어 있고 또 인간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대지는 물론 들이마시는 대기 속에도 전체는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자체로 머무르는 전체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는 물질들 속에서 물질을 향유하면서 생활해 왔다. (제3장참조)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항상 전체 속에 있었지만 다만 인간들이 분리가 진실인 양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을 뿐이다. 이후 근원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다시 말해 '진실은 하나'라는 느낌을 잃지 않은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인간의 본질과 근원에 대한 진실 된 주장이 이따금씩 제기되었지만 그런 허황(?)된 주장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 그러한 것에 동조하는 사람들조차 처형당하거나 사회로부터 배척 되었다.

 

 

전체(근원)의 모습

 

제1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근원', '전체' 혹은 '하나'는 본태극의 의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우주가 펼쳐져 나오기 이전 본태극은 모든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고 따라서 본태극 의식에는 우주가 펼쳐져 오면서 지금까지 나타난 모든 것들뿐만 아니라 향후에 펼쳐져 나올 무한대의 것 역시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전체에 없는 무언가 새로 만들어지거나 창조된 적은 없으며 물론 앞으로도 없다. 그런데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과 실제 존재하지는 않지만 상상이 가능한 그 모든 것들을 합친다고 해서 전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상상이 가능한 모든 것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인데 전체는 상상의 한계를 뛰어 넘어 존재하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원의식들에 의하여 우주가 펼쳐져 나오기 시작한 이후 본태극의 의식 즉 전체는 오직 우주의 근본원리로 인식 되어왔다. 이후 세 존재로 인해 이 우주에 혼란이 초래된 뒤 이 우주 세 번째 근원의식의 자각에 의하여 진정한 전체가 무엇인지를 느끼는 의식은 탄생하였지만 '세 번째 근원의식의 자각체' 는 탄생 직후 완전한 본 태극의 의식을 가지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지구에 와서 오랜 기간에 걸쳐 '진정한 하나로 머물려는 흐름'과의 완전한 융합이 일어남으로써 진정한 근원, 완전한 전체로서 부활하였던 것이다.

 

레무리아 때 지구에 온 존재들은 지구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는 전체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는데 우주가 펼쳐진 이후 존재들이 완전한 전체, 완전한 하나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후 레무리아 후기 전체는 고형화된 에너지로서 인간의 원형을 한 채 모든 존재들 앞에 나타났고 지구의 마지막 시기에는 물질화 된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렇게 지구상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는 전체에 대한 기억이 있다.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레무리아 시기 전체#1)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또 물질화 된 이후에도 지구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는 전체의 에너지를 항상 접해 왔기 때문이다. 에너지 세계에선 물론이고 물질세계에 있는 존재들도 물질 이면에 녹아 있는 전체와 항상 연결되어 있었다.

#1)에너지 상태에 있었던 레무리아 시기와 물질화 상태에 있는 지구의 시기를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굳이 현재의 시간 개념으로 비교하자면 레무리아 시기로 불리어지는 기간은 물질화 된 지구의 시간보다 훨씬 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전체를 망각하였다고는 하지만 이렇듯 항상 접하고 있는 전체를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지구상에 펼쳐진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며 전체의 사랑을 느껴왔고 너무나 오묘하게 돌아가는 자연 속에서 근본원리로서의 전체를 느껴왔던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간을 넘어선 그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아왔고 인생에서 슬플 때 하소연하고 분노하였을 때 항의하고 혹은 우울할 때 중얼거리며 이야기해 온 대화의 상대방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혹은 자연 속에서 가지게 된 전체에 대한 순수한 느낌은 기존의 종교나 철학과 결부되면서 왜곡되어 버렸다.

 

따라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신, 하나님 혹은 조물주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며 상상하고 표현해온 전체는 실상과는 큰 차이가 있다. 전체를 인간의 언어로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오직 느낌으로만 인지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지금까지 상상 해 온 절대적 존재와 전체와의 차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전체의 윤곽만이라도 간략히 기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전체는 하나이고, 영구불변이며, 유일한 실체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전체가 특정의 모습으로 현현한 것이다. 전체는 무한히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데 모든 개별화 된 존재들과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은 전체의 다양한 모습의 일부일 뿐 이다. 개별 존재들이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이미 처음부터 전체 속에 있었고 다만 필요에 의하여 개별 존재의 모습을 띈 채 구현되어 있을 뿐이다.

 

사랑이란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체는 사랑 그 자체이다.


전체가 바로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에 우주는 사랑으로 펼쳐져 나왔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는 전체의 사랑이 녹아들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순간 벌어지는 사건들과 상황들에서 근심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는 사람들이 '진정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부조화는 당연한 것이다'라고 믿기 때문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시각 즉 전체의 시각에서는 항상 가장 최선의 것이 일어나고 있고 따라서 인생에서 진정한 고통, 진정한 슬픔은 없다. 이것이 바로 전체의 사랑이고 또한 완전한 조화를 의미한다.

 

전체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인데 이것은 대지의 속성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

 

사람들은 대지를 무생물이고 이용 가능한 터전일 뿐이라고 인식하고 있으나. 사실은 항상 하나에 머물려는 전체의 흐름이 대지의 형태로 구현 되었다.

 

대지는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하든 설령 그것이 대지를 근본적으로 훼손시키는 행위일지라도 그 모든 것을 수용해 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대지의 존재에 대하여 바르게 인식한 적이 한 번도 없을지라도 아무런 불평 없이 사람들의 삶을 지탱시켜 왔다. 이러한 전체의 사랑은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 혹은 자비와는 큰 차이가 있다.

 

일부사람들 역시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인간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이상 아무런 조건 없이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은 사랑을 인간에게서 기대하기 어렵다.

 

간혹 사람들은 익명으로 거액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행위를 조건 없는 사랑의 예로 떠 올리기도 하지만 그런 기부자의 마음에도 비물질적인 보상에 대한 은근한 기대가 내면에 있다. '하나님이 나의 이런 행위를 좋아하겠지' 혹은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는 마음조차 갖지 않는 기부자를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전체의 사랑은 일시적으로 혹은 개별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엄격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인간의 관점이란 시간적 공간적으로 매우 좁은 범위에 국한될 뿐만 아니라 개별적,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혹독한 시련으로 보일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지구의 마지막시기'중에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시련은 일단 자신의 입장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만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개개인에게는 매우 엄격하고 냉혹하게 느껴지는 체험들이 사람들을 망각에서 기억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리고 궁극적인 진실로 이끌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체험이었음을 자각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그것이 전체의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란 절대의 자리 혹은 전체와 하나인 자리에서만 알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이란 모든 것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이며 모든 분리로 인한 아픔들을 치유할 수 있는 자리이다. 힐러(healer)들이 사람들을 치료할 때 사랑(love)의 에너지를 끌어 쓰게 되는데 그들이 말하는 사랑에너지는 곧 전체의 에너지를 말하고 그들이 지칭하는 사랑은 바로 전체를 가리킨다.

 

전체는 또한 절대이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절대적 기준은 없다. 다시 말해 우주에 실재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 즉 전체뿐 이고 그것은 곧 사랑이다. 다른 모든 기준은 상대적인 기준이고 인간사회에서만 통하는 인간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절대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지만 절대의 개념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서 절대란 말을 사용할 만한 것은 사실상 전혀 없다.

 

사람에 따라서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바뀌는 것은 전부 인간적인 것이고 상대적인 것이며 절대는 아닌 것이다.

 

전체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우주가 펼쳐지기 이전에 이미 모든 펼쳐짐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전체는 우주에 존재하는 진정한 힘, 유일한 힘을 의미하며 전체의 인지능력은 인간의 상상을 불허 한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힘들은 모두 체험을 위하여 용인된 것일 뿐이고 오로지 전체만이 진정한 힘이다.  사람들은 행사하고 드러나는 것을 힘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진정한 힘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며 그 자체로 머무르고 있는 근본 원리이다.

 

하지만 전체는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불확실한 것을 받아들일 때 혹은 받아들이고 싶어 할 때 믿음을 이야기 한다. 사람들은 무언가 믿기 때문에 그에 따른 행위를 하게 되지만 그러한 믿음이 깨어지면 다른 믿음으로 바꾸거나 대체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왔다.

 

사람들은 믿음 그 자체에는 가치를 부여하지만 믿음의 대상에는 결코 그러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설령 그 믿음의 대상이 자신이 신앙하는 신 혹은 하나님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이란 진실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인데 전체는 결코 믿음의 대상자는 아니다.

 

인간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있었고 존재들이 본래의 자리에 머무는 한 누구나 느끼고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체에 대하여 지금까지 인간이 사용해 왔던 신 혹은 하나님 등으로 지칭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다. 사람들은 신이나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이미지나 개념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며 따라서 그것에 대한 통일된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신 혹은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본질이 없는 공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단어들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투사하는 독특한 에너지, 특히 신 혹은 하나님을 찾을 때 사람들이 투사하는 다양한 욕구가 녹아들어 있고 따라서 그 단어들은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전체, 근원 혹은 하나를 기존의 다른 용어로 바꾸어 부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