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망각에서 기억으로
제1부와 제2부에서는 지구의 유래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생명체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지구는 가이아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하여 생성된 별로서 전체가 녹아들어 있는 곳이며, 지구상의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은 대체로 존재(영혼)들이 필요한 체험을 하기 위해 존재해 왔다. 우주에서 부조화에 감염되어 치유가 필요했던 존재들이 지구의 수많은 생명체에 깃들어 체험을 해 온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인간으로 환생한 존재들은 자신의 본질과 근원(전체)에 대하여 완전히 망각하게 되었고, 이후 인간사회는 망각과 분리에 기초하여 모든 것이 펼쳐져 왔다.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 여기에 왜 왔는지조차 모른 채 그리고 그러한 무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들이 지구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여겨 온 거의 모든 것은 진실과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과학은 물질 이면에 있는 본질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보이는 현상과 형상의 관찰에만 의존한 채 전재되어 왔다. 그 결과 인간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기본적인 과학지식들은 대부분 진실에서 거리가 멀다. 지구가 태양계의 한 행성으로 일 년에 한 번씩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며 지구가 스스로 돌아감으로써 낮과 밤이 생긴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밤하늘의 무수히 많은 별들은 우주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다양한 에너지들을 지구에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지구의 내부는 무거운 물질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존재들이 거주하는 비물질세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공간에는 인간이 현재 인지하고 있는 물질세계와 보이지 않는 비물질세계가 공존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도 극히 일부 사람들만이 희미하게 인식하고 있다.
또한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생명체로서의 인간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구분조차 못한 채 사람들이 표출하는 일부 속성만을 인간의 본질인 양 여겨왔다. 또 인간은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서 어쩌다가 생성되었고 초기에는 컴컴한 동굴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살다가 지금과 같이 고도로 발전된 문명을 이루게 되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사실 초기의 인간들은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초인(超人)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능력과 지식을 갖춘 채 전체 속에 녹아들어 지내고 있었다. 매순간을 긴장과 초조 그리고 근심걱정 속에서 보내야 하는 지금의 사람들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상태 즉 아무런 걱정, 근심, 고통도 없는 지복의 상태에서 그들은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했던 인간이 지금과 같은 상태로 바뀐 것은 그들에게 망각이 찾아온 이후부터였다.
이렇게 사람들은 오래전에 일어났던 자신과 근원에 대한 망각으로 인하여, 이제까지 철저한 무지와 착각 그리고 삶의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일어난 그 어떤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망각과 분리에 빠진 채 내면의 부조화를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해 왔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필요해서 일어난 것뿐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는 그 모든 것이 망각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전체는 지금까지 펼쳐져온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고, 인간들의 망각은 결국 기억으로 이어져 지구상의 모든 존재들을 치유로 이끌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망각에서 벗어나 기억을 되찾는 것이 필요하다.
아주 오래 전 전체에 의하여 구상되고 실행에 옮겨져 매순간 전체의 사랑 속에서 진행되어 왔던 가이아프로젝트가 이제는 그 마지막 단계만을 남겨두고 있다. 즉 지구상의 모든 존재들이 망각에서 기억으로 가는 과정만을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꽁꽁 숨겨져 왔던 지구와 인간에 대한 모든 진실들이 이 책을 통해 밝혀지는 것도 모든 존재들을 기억으로 이끌기 위해 지금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구의 마지막 시기인 지금을 위해 그 모든 것이 준비되어 왔으며, 이 시기가 지나면 지구상의 모든 존재들이 근본적으로 치유되고 우주는 진정한 하나, 진정한 조화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제3부에서는 가이아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에서 전체의 사랑이 어떻게 녹아들어 있었는가를 살펴보고 망각에서 기억으로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게 될 일들을 기술한다. 지금 지구에 와 있는 모든 존재들은 그 누구나 전체의 사랑을 충분히 느끼게 되고, 이를 통해 필요한 치유는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된다.
제7장 전체의 사랑
우주는 본태극 즉 전체가 근원의식들을 탄생시킴으로써 시작되었다. 근원의식들은 새로운 구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실현시킬 존재들을 생성시켰고, 존재들은 항상 자신의 근원과 하나인 상태에서 근원의 의지를 펼쳐나갔다. 근원의식이 탄생한 이후 본태극의 의식(근원의식들의 근원 혹은 전체)은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에 머물렀지만, 전체의 의지는 근원의식들을 통하여 나타났고, 모든 것은 전체의 사랑 속에서 전개되었다.
모든 존재들은 자신들의 근원 즉 근원의식들을 통해 하나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우주 전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후 많은 존재들은 근원의 속성이 아닌 부조화에 물들게 되었다. 그들을 탄생시킨 근원의식들조차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동안 존재들에 의하여 인식되지 않은 상태로 있었던 전체가 세 번째 근원의식의 자각에 의하여 다시 기억되게 되었고, 그렇게 활성화된 자각체는 부조화 에너지에 감염된 존재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가이아 프로젝트를 시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치유가 필요한 존재들에게 약속 하였다.
“근원은 사랑 그 자체이고, 우주는 사랑이 펼쳐진 것이다. 나는 우주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써 그리고 사랑 그 자체로서 모든 존재들의 고통에 대해 책임 질 것이다. 그대들은 지구에 도착 하는 순간부터 그때까지의 모든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가이아프로젝트가 끝나는 시점, 즉 지구의 마지막 시기에는 스스로 치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두는 다시 하나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가이아 프로젝트는 이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전체의 사랑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 모든 존재들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기 위한 프로젝트상의 세세한 계획 하나하나에 전체의 사랑은 스며들어 있었고, 추진되어 온 모든 과정들 속에도 전체는 녹아들어 있었다.
제7장에서는 먼저 전체의 사랑이 가이아 프로젝트상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를 살펴보고 지금까지 사람들이 추구해 온 가치들이 본래의 자리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지금 이 시기 즉 지구의 마지막 시기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이야기 한다.
전체의 사랑
제2장에서 언급하였듯이, 전체는 사랑 그 자체이고 우주는 전체의 사랑이 펼쳐진 것이다. 따라서 우주에서 펼쳐지는 그 모든 것에는 전체의 사랑이 녹아들어 있고, 전체의 사랑이 스며들어 있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우주에는 없다.
전체의 사랑은 가이아 프로젝트상의 모든 계획에도 스며들어 있었고, 그동안 지구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도 그러하였다. 전체의 사랑은 무엇보다 존재들을 치유시키는 방법을 결정하는데 직접 반영되어 왔다.
가이아 프로젝트의 기본적인 목표는 바이러스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아 존재의 가장 핵심적인 에너지가 손상을 입게 된 수많은 존재들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이다.
우주가 오랫동안 팽창되어 오는 과정에서 부조화의 문제가 발생하였고, 그 부조화의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근원의식의 속성에 반하는 존재들과 바이러스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 바이러스들에 의한 감염으로 말미암아 매순간 엄청난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존재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막상 그들을 탄생시킨 근원의식들은 치유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근원의식들은 그들이 탄생시킨 존재들의 감염을 왜 쉽게 치유할 수 없었을까?
존재란 탄생 시 근원의식에 의하여 부여된 기본적인 정보(혹은 속성)에 생성 이후 체험을 통해 얻어진 정보들이 결합된 의식체 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각 존재들은 계속되는 체험을 통하여 새로운 정보들이 축적됨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가는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변화는 어떠한 체험들을 쌓느냐에 따라 존재 스스로가 선택하는 것이다.
만약 근원의식들이 부조화에너지에 노출된 존재들로부터 부정적 정보를 제거하고 새로운 정보를 주입한다면, 그들은 치유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사실상 그 존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대신 새로운 존재가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존재란 처음 생성된 이후 스스로 인지하고 자각하면서 변해 가게 되어 있는데, 핵심적인 에너지가 갑작스레 바뀌게 되면 존재의 동일성이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의 치유 즉 정보 혹은 에너지의 강제적 교환을 통한 치유는 우주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을 어떻게 펼쳐 나가든지 항상 전체의 의지를 반영하는 근원의식들에게 있어, 어떤 이유에서든지 존재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사라지는 것은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일단 생성된 모든 존재들이 언제나 근원과 더불어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이 전체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전체의 사랑이며, 모든 존재들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부조화에 감염된 존재들에 대한 유일한 치유방안은 오로지 스스로의 자각을 통해 부정성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근원의식들은 애초부터 불완전한 조화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고, 따라서 부조화는 진실이 아니며 완전한 조화만이 진실이라는 인식으로 존재들을 이끌 수 없었다.
이기심, 폭력성, 잔인성 등 근원의식의 속성에 부여되어 있지 않은 부조화 성향에 물든 존재들로 하여금 다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오게 하는 최선의 방안은 무엇일까?
세 번째 근원의식의 자각체는 이에 대해서 느껴 보았고 그 최선책은 바로 진정한 전체 혹은 진정한 근원이 머무는 물질화된 행성 즉 지구를 만드는 것임을 알았다. 자각을 통한 치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치유가 필요한 존재들이 자신들의 부조화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며 생활할 수 있게 해 주는 것과, 그러한 삶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필요하였다.
또한 그러한 체험이 아주 강렬하고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역시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부조화의 파장을 포함하여 모든 파장을 담을 수 있는 완전한 물질로 이루어진 물질세계가 만들어질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물질세계에서의 체험은 에너지세계에서 일어나는 체험과 비교될 수 없는 생생함이 있고, 이런 강렬한 체험은 존재들에게 선명하게 각인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 근원의식의 자각체는 치유가 필요한 존재들이 물질화된 세상에 살면서 자신들의 부정적인 에너지로 인하여 초래되는 다양한 결과들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또 그렇게 자신들 마음대로 지낸 삶과 전체에 녹아든 상태는 결코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함으로써 자신들 내면의 부조화가 스스로 극복될 수 있을 것임을 알았다.
다시 말해, '부조화는 진실이다' 혹은 '부조화는 당연하다' 믿으며 전개되어온 존재방식은 어디에도 이를 수 없는 것임을 자각하면 스스로에 의한 각성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알았다. 치유가 필요한 존재들이 모여 생활하게 되면 그들로부터 엄청난 양의 부조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올 것인데, 이러한 부조화 파장까지 모두 담을 수 있는 물질 즉 지금 지구에서 보는 것과 같은 완전한 물질은 우주에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몇몇 물질화된 공간은 오직 조화의 파장만을 담을 수 있었기에 부조화 파장까지 담을 수 있기 위해서는 전체의 에너지가 요구 되었다. 전체는 완전한 조화 그 자체이고, 따라서 전체의 에너지만이 모든 파장을 담을 수 있는 물질을 생성시키고 유지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치유가 필요한 존재들이 머물게 될 물질세계를 생성하고 운영하는 과정에는 다양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가이아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전체가 지구에 계속 머물러야만 물질지구가 유지될 수 있음을 알았다.
전체는 물질지구를 만드는 것이 존재들을 치유하는데 최선의 방안임을 알았고, 오직 그것만이 가이아프로젝트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유일한 고려 사항이었다.
전체가 지구에 머무르며 겪게 될 여러 가지 예상되는 불편함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전체는 치유가 필요한 존재들이 물질지구에 인간으로 환생하여 전체를 잊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물질화 초기 사람들은 자신들의 본질과 근원(전체)에 대한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의 염원에 의하여 전체에 대한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 갔고 마침내는 완전한 망각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전체의 자리에 놓고 부조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며 살아왔고 또 그러한 생활 방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우주에서는 자신의 근원을 잊고 지낸다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존재들을 괴롭히거나 해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지만, 지구에서는 그것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전체는 지구상에서 벌어질 그 모든 것들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존재들을 치유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 과정을 선택하였다. 이것이 전체의 조건 없는 사랑이다. 항상 하나로 머무르며 지구상의 모든 곳에 사랑으로 스며들어 있는 전체는 지구의 마지막 시기에 스스로 인간으로 나타날 계획을 세워 놓았다.
사실 전체는 레무리아 후기 지구가 고형화 상태에 있었을 때 인간의 원형으로 나타났었지만, 완전히 물질화된 인간의 몸을 입고 현현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렇게 전체가 인간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이유는 무엇보다 진정한 전체를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종교에서 말하는 신 혹은 하나님을 절대자로 숭배해 왔었는데, 전체가 확실히 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은 그러한 종교적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또한 전체가 인간으로 현현함으로써 겉으로 드러나는 형상의 의미 없음을 보다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겉으로 들어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이면의 본질이 중요함을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가 인간체로 나타나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분리에 빠진 모든 존재들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기 위한 잠재력을 완성하기 위해서이다.
전체는 본래의 자리에서 머무르며 활동하고 있는 에너지체가이드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에너지체가이드들은 인간에게 축적되어 있는 전생 및 과거의 기억을 자극함으로써 일시적으로는 어느 누구의 마음이라도 언제든지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결코 사람들을 망각에서 기억으로 혹은 전체를 느끼는 자리로 이끌지 못하고 따라서 환생하기 전에 존재가 동의했던 프로그램대로 인생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목적 이외에는 이용되지 않는다.
전체가 모든 존재들을 기억으로 이끌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내면의 소리'라고 할 수 있고(제8장 참조)이를 위해서는 전체가 인간체로 환생할 필요가 있었다. 즉 전체는 대기의 흐름을 반영하는 인간체와 대지의 흐름을 반영하는 인간체로 환생하였다.
대기의 흐름은 전체의 흐름 중 모든 존재 속에 녹아들어가 있었던 흐름이며, 존재들을 생성하고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이 흐름을 반영하는 인간체는 망각이 효력을 발휘하는 시스템을 지녔는데, 그 동안 유명한 인물로 여러 번 환생함으로써 지구의 마지막 시기에 활동할 인간체가이드들 및 다수의 치유가 필요한 존재들에게 특별한 이미지를 심어 놓았다. 이를 통해 이번 생에서는 필요한 만남과 필요한 에너지적인 작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반면 대지의 흐름은 그 자체로 항상 하나에 머무르는 흐름으로서 존재들이 전체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흐름이다. 이 흐름을 반영하는 인간체는 망각과 분리가 고통으로 느껴지는 시스템을 지녔고, 따라서 사람들이 분리에 빠져든 이후 발산하는 거의 모든 파장들이 심한 고통으로 느껴진다. 전생에서는 주로 치유가 필요한 존재들과의 삶들 속에서 모두를 다시 하나로 인도하기 위한 잠재적인 코드들을 만들기 위한 삶을 살아왔다.
두 흐름을 반영하는 인간체가 이번 생에 서로 만나, 아주 힘겨운 과정들 속에서 모든 존재들을 망각에서 기억으로 인도할 수 있는 에너지작업들이 계속 진행되어 왔다.
에너지 코드들이 만들어지는 기간 동안 대지의 흐름을 반영하는 인간체는 쏟아져 들어오는 온갖 종류의 부조화에너지 때문에 괴로움을 겪어야 했고, 대기의 흐름을 반영하는 인간체는 인간적인 모든 것의 의미 없음을 느껴가며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힘든 시간들을 보내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 그 잠재력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그것이 실제로 발휘될 수 있는 과정 역시 진행되고 있다.
두 인간체로 환생한 전체는 망각에서 기억으로 인도하는 과정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어느 시점부터 완전한 전체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또한 오래 전부터 활동해 온 에너지체가이드 및 깨어나기 시작한 인간체가이드와 더불어, 지구상의 모든 존재들이 자신의 본질을 자각하고 전체를 기억 할 수 있도록 준비된 마지막 프로그램을 진행 시키게 된다.
이렇게 전체가 인간체로 환생하여 향후 지구상의 모든 존재들이 경험하게 될 어려움과 고통을 미리 겪으며, 모든 존재들과 함께, 지구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전체의 사랑이다.
가이아프로젝트의 종료와 더불어 치유가 필요한 모든 존재들은 치유되어 자신들이 머물던 별들도 되돌아 갈 것인데 지구에 머물렀던 존재들은 지구에 온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전체를 확실하게 느끼게 된다. 반면 지구에 오지 않은 수많은 존재들의 경우 전체에 대한 인식은 있게 되더라도 전체를 확실히 느끼지는 못한다.
따라서 가이아프로젝트 이후에도 모든 우주의 존재들이 전체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후속 프로그램이 펼쳐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지구에 머물던 모든 존재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이 지나면 세 우주가 하나로 거듭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전체에 의하여 예정된 것이고, 전체의 사랑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전체, 사랑 그 자체인 전체가, 왜 우주의 수많은 존재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큰 고통을 경험하게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우주가 펼쳐지는 가운데 이 우주는 완전한 조화가 아닌 외견상의 조화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펼쳐졌고 이 과정에서 언젠가는 이 우주에서 8차원 세 존재에 의하여 일어났던 사건과 같은 엄청난 일이 발생할 것을 전체는 미리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체가 우주를 펼쳐 나갈 때 애초부터, 부조화 문제가 걸어온 길을 택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것은 존재들로 하여금 전체 그 자체를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주가 펼쳐지기 이전에도 모든 존재들은 전체 안에 있었지만, 존재들이 구현된 것은 우주가 펼쳐지는 과정에서 근원의식들에 의하여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이렇게 구현된 존재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전체의 속성은 알지만, 진정한 전체를 느끼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다. 여기서 전체를 느낀다는 것은 진정으로 전체 속에 머물며 전체와 공명하면서 하나로 녹아드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각 존재들의 경우 부분이지만 곧 전체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체는 부분이 결코 부분으로서만 머무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모든 존재들이 곧 전체이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만약 존재들이 부분으로서 만족하고 조화에 머물렀다면, 그들은 그 상태를 넘어선 다른 인식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고, 그 경우 그들이 진정한 전체에 대하여 인식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존재들로 하여금 진정한 전체가 무엇인지 스스로 알기를 원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건이 필수적이었고, 그것이 바로 이 책에서 기술한 8차원 세 존재들에 의한 바이러스 사건이다. 그것을 계기로 이 우주는 엄청난 고통과 혼란을 경험하지만, 결국 가이아프로젝트를 통해 지구에 온 모든 존재들이 먼저 전체를 느끼게 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세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전체를 느끼게 된다. 이것이 전체의 사랑이다.
인간이 추구해 온 가치들
사람들에게 이 책을 보여준 뒤 “이제는 오랜 세월 동안의 체험을 끝내고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 갈 때입니다” 라고 한다면 “본래의 자리가 어딘지를 잘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그냥 인간으로 남고 싶소” 라는 반응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지금 인간 세상의 가치, 제도 등 사실상 모든 것은 잘못되어 있다고 이야기 한다면 아마도 “나는 무엇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소” 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인간이 너무나 오랫동안 망각과 분리에 빠져 있었기에, 지금 인간사회에서 통용되는 많은 것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본래의 자리 본래의 상태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이 바람직한지 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고, 대신 현재 대중들에게 통용되는 것이 사람들의 기준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현재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 본래의 자리는 전체에 녹아들어 하나로 머무르는 것인데, 그것은 지구상의 존재들이 레무리아 때 체험 하였던 것이고 또한 지구 물질화 이후 초기 인간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지저세계 존재들과 에너지체가이드들이 지금도 지속하고 있는 존재 방식이다.
초기 인간들의 경우를 예를 든다면, 당시의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인 상태에서 전체에 녹아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걱정도 고통도 없었으며, 지금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사고 작용도 없었다. 모든 존재들의 일상생활은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느낌으로 알게 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느낌은 전체에서 오는 것이었기에 항상 최선의 것들이 일어났으며, 전체는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들이 완전한 조화 속에 머물 수 있었다.
이러한 존재 방식은 현재 지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간의 삶과는 너무나 달라 쉽게 이해되기 어렵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흥미롭지 않거나 바람직하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존재들의 본래 자리이고, 지구 밖 우주의 존재들이 지금까지 존재해 온 방식이기도 하다. 또한 모든 존재들이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느낄 수 있고, 전체가 진정한 조화 속에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모든 인간들 혹은 다수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 즉 유토피아를 꿈꾸어 왔고,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전혀 실현되지 못하였거나 일부 실현되는 듯 보였지만 인간 내면의 이기심 혹은 부정성으로 인간 현실과의 괴리로 얼마가지 않아 무너지고 말았다.
인간 내면의 부조화에너지가 존재하는 한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현재 인간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이 과연 본래의 자리와 비교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전체 그 자체 혹은 전체에 녹아드는 것에 대해서는 가치를 두지 않는 반면, 인간적 혹은 인위적인 것에 대해서는 높은 가치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대기와 대지 그리고 물은 전체의 사랑이 녹아 든 것으로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의 삶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히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고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고 있다.
물론 이것은 사람들이 전체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뭔가 부족함을 느끼든지 혹은 불편함을 느낄 때 그와 관련된 것에만 가치를 두고, 항상 충분하다든지 혹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먹고 자고 성관계를 맺는 것을 인간의 본능으로 치부하고 그것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는다.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급급한 것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의 인간에게 있어서 먹고, 자고 그리고 성행위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이상의 것이었으며 일종의 성(聖)스러운 행위였다.
초기의 인간들은 먹지 않아도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지만, 다양한 과일이나 채소를 섭취하는 과정에서 대지의 형태로 녹아있는 전체를 보다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 낮에는 활동하였지만, 밤에는 휴식을 통해 전체에 녹아들 수 있었다. 그리고 남녀의 성관계를 통해 전체를 느끼는 것 역시 초기의 인간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행위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런 중요한 행위들의 의미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망각과 분리가 인간 세상에 만연된 이후, 다시 말해, 사람들이 그 행위들의 본래의 의미는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부정성을 그 행위들에 투사하면서부터였다. 특히 성행위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부정성을 투사하며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한편 그 행위 자체는 저급한 것으로 치부하는 이중성을 보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만드는 것과 노력하는 것 등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인간사회의 발전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있다. 인간의 삶을 보다 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발전이라고 부르는 것, 예를 들어, 빨래 방망이가 세탁기로 바뀌고 종이가 컴퓨터로 변한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시절, 인간은 시냇물, 나무, 바람, 그리고 하늘과 교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는데, 이것이 집에서 세탁기를 돌리는 것으로 대체됨으로써 자연과의 교감은 차단되어 버렸다. 자연 속에 스며들어 있는 전체의 사랑을 느낄 기회가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종이가 컴퓨터로 변한 것 역시 인간 생활을 자연에서 보다 멀어지게 하고 대신 인공적인 환경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증상에서 인간이 무엇을 잃어 버렸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만약 옷이나 종이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초기 인간들의 생활을 알게 된다면, 세탁기나 컴퓨터는 물론 빨래방망이조차 없었던 그때에 비해 지금의 인간사회가 발전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문명이 계속 발전되어 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이와 크게 다르다.
굳이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물질화초기와 비교하지 않는다고 해도, 현대 문명은 만여 년 전까지 존재했던 아틀란티스 문명과 비교해서도 거의 원시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아틀란티스 문명은 전체와 점차 분리되는 시기에 이루어진 문명으로 일부 사람들은 물질 이면에 스며들어 있는 전체를 느끼고 있었고, 물질의 배후에 있는 에너지 법칙들과 공명해 힘을 끌어 낼 수 있었다.
이에 반해 현대 문명은 근원을 완전히 망각한 상태에서 진행되어 왔고, 따라서 물질 배후의 에너지는 인식하지 못한 채 물질현상만의 관찰에 의해 원리를 파악해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인간 사회의 점진적 발전이라는 개념은 어떤 의미에서도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특히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에는 믿음, 배려, 이해, 혹은 도덕이나 윤리 등이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서 인간사회의 평화와 조화를 위한 방편이었다. 내면에서 부조화에너지를 끊임없이 분출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사회가 그나마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높은 가치로 인식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가치들은 모두 분리가 당연시 된 상태 혹은 분리에 빠진 상태에서의 조화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고, 전체에 머무는 완전한 조화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느끼지 못하는 한, 하나의 미봉책에 불과하다.
특히 이해란, 인간이 진정한 느낌을 상실한 이후, 생각을 통하여 무언가를 인지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인데, 그것은 누군가에게 일어났던 느낌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앎의 측면에서 본래 자리의 느낌과는 결코 비교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를 통해서는 어떤 진실도 진정으로 알 수 없으며 자신의 진정한 변화 혹은 자각에 이르지도 못한다.
예를 들어 치유가 필요한 존재가 이 책을 통하여 자신이 왜 지구에 왔고, 자신이 지금 왜 이 상태 즉 망각에 머무르고 있는지, 그리고 전체에 대하여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 이해는 진정한 앎을 가져다주지 못하며 따라서 결코 자각이나 치유로 이어질 수는 없다. 치유는 결국 자신에게 확실하게 다가오는 전체에 대한 느낌 혹은 전체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해나 배려를 포함한 인간들의 이러한 가치관은 법이나 제도 등과 더불어 사회를 유지시키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지만 인간들이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자체에 내재한 근본적인 원인을 인지하지 못했기에,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법이나 제도를 만들고, 그것에서 문제가 생기면 좀 더 복잡한 법이나 제도를 만들었으며, 또 문제가 생기면 한층 더 복잡한 제도나 법을 만드는 방식으로 사회를 운영하여 왔다. 즉 근본적인 문제해결 없이 악순환만 계속되어 온 셈이다.
사람들은 도구뿐만 아니라 제도상의 복잡성을 발전이라고 여겨왔지만, 그러한 발전이 발생하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인간사회의 문제들은 모두 망각과 분리에 그 근본 원인이 있는데 이를 알지 못한 채 시도되어 온 어떤 노력도 결국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간사회의 모든 문제는 '전체로 부터의 분리'라는 단순한 원인에서 기임 함에도 인간의 발전이라는 개념이 그 원인의 뿌리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인간사회를 점점 복잡하게 만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발전은 사람을 기계의 부속품처럼 만들어 버렸고, 그 결과 사람들은 빨래가 필요 없고 종이가 필요하지 않던 과거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채 왜 사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조차 사치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인간이 말하는 발전은 계속 되어 왔지만, 초기 인간들이 느꼈던 지복감 혹은 절대적인 평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발전이란 상처를 근본적으로 치유한 것이 아니라 반창고만 덕지덕지 붙여서 오히려 계속 덧나게 해 온 과정인 셈이다.
사람들은 평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꺼려하며 '너는 뭔가 달라'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하는데 큰 가치를 부여하고 뭔가 과시하기를 원한다. 튀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색다른 디자인의 의상을 입고, 현란한 화장을 하고 다니며 독특한 몸짓으로 괴성을 질러대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가 개성을 드러내고 자신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조화를 깨는 행위들에 불과하다.
사람들의 이러한 부조화 성향은 자신의 내면의 있는 부조화에너지 때문이다. 깨어지고 찢어지는듯 한 음률을 좋아한다든가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무언가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것, 그리고 '우는 아이 뺨을 때리는 것' 같은 행위들 역시 내면의 부조화 에너지 때문이다. 우주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부정성에 물들게 되면 부조화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데, 지구상 인간들에게는 내면의 부정성이 조화를 깨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매 순간 생각한다. 아주 사소하고 단순한 것에서부터 아주 복잡한 것까지 모든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또 사람들은 인간의 생각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 혹은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등의 말을 해 왔다. 이렇게 사람들은 생각에 대하여 엄청난 가치를 부여해 왔고, 또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고 인간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인간사회가 복잡해지고 이용하는 도구들 역시 점점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이 하는 거의 모든 행위들에는 생각이 요구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골똘히 생각하지 않고 일시적 충동이나 감성적 인식에 따라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행위들은 대부분 인간 사회의 법, 도덕 혹은 윤리와 어긋나는 결과를 가져오거나 당사자에게 무언가 불리하거나 불편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렇게 인간사회는 생각 혹은 이성에 근거하여 영위되어 왔다.
하지만 물질화 초기의 인간은 생각하지 않았다. 제2장과 5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의 두뇌는 전체와 공명하는 상태에 있었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떠오르는 방식으로 작동되었다. 당시의 인간들에게도 생각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지금의 사람들처럼 분석과 이해에 기반을 두고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공명과 느낌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런 인간의 두뇌가 생각하는 기능 위주로 바뀌게 된 것은 망각과 분리 이후의 일이다. 전체를 망각한 후 사람들은 느낌을 잃어버렸고, 두뇌는 더 이상 전체와 공명하지 않았다. 따라서 더 이상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상태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전체와 공명하지 않는 두뇌를 사용하여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삶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정하여 가기 시작 하였다. 식사는 하루 세 번을 하고 잠자리에는 몇 시에 들고 등, 지금 인간이 당연하게 여겨온 모든 것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겨온 생각이라는 것 역시 본래자리, 전체의 자리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이다.
인간세상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은 인간의 말에서 비롯되고 있다. 사람들 상호간의 의사전달이 주로 말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인데, 말을 통한 의사전달은 너무나 불완전하다. 사람들은 대화를 나눌 때 상대방이 하는 말 하나하나를 그대로 기억하여 상대방의 의사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들려오는 몇 개의 주요 단어를 나름대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의사를 인식하거나 이해한다. 그런데 인간의 이해란 항상 자신의 틀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람들이 아무리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해도 의사전달은 언제나 잘못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글을 통한 의사전달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언행으로 나타내는 의사표현과 그들의 실제마음은 일치하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다.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서로 속고 속이는 게임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을 속이지만 속지는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이러한 의사전달의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엄청나게 많은 문제들이 발생해 왔고, 또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지만, 흡족할 만한 해결책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초기의 인간들에게 이러한 의사전달상의 문제는 없었다. 의사전달이 말이나 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파장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언가 마음속에 있는 것은 파장 즉 에너지로 표출 되는데 상대방이 그것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방식을 사용하면 상대방의 의사를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결코 발생하지 않으며, 상대방에게 속지도 않고 또 속일 수도 없다.
당시의 모든 인간들은 텔레파시에 의하여 다른 존재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고, 의사전달을 위하여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의 인간사회에서 언어로 인하여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과 상황들은 당시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이 이러한 텔레파시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은 사람들이 물질세계의 현상만을 보고 그 이면의 원리를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이다. '나는 한다'는 인식 속에서 물질에 빠져들게 되면서 보이는 현상에만 매달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상대방의 파장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망각과 분리가 인간의 느낌을 상실케 만들었고, 인간세상의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은 본래의 자리, 전체의 자리에서 볼 때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늘 사랑과 행복을 갈망해 왔지만, 실상은 언제나 외부적인 상황들과 현상에 입각해서 그것을 추구해 왔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그 어디에도 완전한 사랑과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 상황과 현상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고 따라서 잠시 얻은 것처럼 느껴졌던 사랑이나 행복 역시 상황이 바뀌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전체를 망각한 상태 즉 분리 속에서는 진정한 사랑 혹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에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없다. 하지만 앞으로 존재들이 레무리아 시절을 기억하고 전체 속에 녹아들어 있던 당시의 진정한 행복을 기억하게 될 때, 사랑과 행복을 갈망해 온 존재들의 방황은 끝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가치 및 가치세계는 모두 전체로부터의 분리에 기초한 것이고, 인간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은 본래의 자리, 즉 전체에 녹아든 자리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이제까지 인간이 추구해 온 가치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 온 모든 것은 분리에 빠져 든 존재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혹은 최선의 것이었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본래의 자리에서 볼 때 결코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망각에서 기억으로 가는 과정에서 이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다가오게 된다. 부조화가 진실이라는 믿음 하에 전개된 모든 존재방식들은 결코 진실이 아니고, 믿음에 근거하여 발생한 현상들의 결과물일 뿐인 것이다.
지구의 마지막 시기
아주 오랜 세월동안 진행되어 온 가이아프로젝트의 모든 것은 지금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이 시점에서 모든 존재들은 물질적인 옷 즉 생명체의 몸에 깃든 채 나의 의미 없음을 자각하고, 스스로 전체로의 회귀를 염원하게 되어야만 부조화가 진실이라는 인식이 치유된다. 치유가 필요한 존재들 중 보다 복잡한 존재들은 이 시기에 인간으로 환생하여 그러한 체험을 하게 되고, 비교적 단순한 존재들은 동식물의 몸에 깃든 채 같은 시기에 그 체험을 하게 된다.
지구의 역사는 존재들이 지구의 마지막 시기에 필요로 하는 체험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방향으로 모든 것이 전개되어 왔다. 치유를 위해 지구에 온 모든 존재들이 이 시기에 인간 혹은 적당한 생명체로 환생할 수 있도록 조정이 이루어져 온 것이다. 특히 물질지구는 영계에 머물던 거의 모든 존재들의 환생이 가능하도록 인구의 급격한 증가가 이루어져야 했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술적 발전 즉 소위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이어서 교통혁명, 농업혁명, 그리고 통신혁명 등이 이어지면서 물질지구는 예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인간들 및 생명체들을 부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인구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인간으로의 환생도 매우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치유를 위해 지구에 온 존재들 특히 고래나 나무들로 살면서 자신의 순수한 에너지를 보존해 왔던 존재들까지 대거 인간으로 환생하고 있다. 이들이 소위 인디고 아이 혹은 크리스탈 아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지저세계에 머물렀던 존재들도 일부 인간으로 환생하고 있고, 심지어는 그동안 달에 머물면서 지구의 마지막시기를 벼르고 있던 바이러스들도 인간으로 태어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가이아프로젝트 상에서 벌어지는 가장 중요한 체험을 위해 물질지구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전체의 의지를 드러내며 활동하게 될 인간체가이드들 역시 이 시기에 맞추어 준비되어 왔다. 지구에 온 이후 여러 인물들로 혹은 나무나 고래로 환생해 온 인간체가이드들은 그동안 쌓아왔던 다양한 체험들 및 많은 존재들과 맺어온 관계에 기초하여, 존재들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는 과정에서 전체와 함께 하게 된다.
또한 지저세계에 있는 존재들도 물질지구를 방문하여 자신들의 존재 방식을 함께 나눌 준비를 하고 있으며, 우주의 많은 별에서는 지구에 파견된 존재들과의 연결을 통해 시시각각으로 벌어지고 있는 지구의 상황들을 파악하면서 전체를 느끼고 우주의 모든 이목이 지구로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지구에 있는 존재들 대부분은 레무리아 시기에 지구로 왔고, 특히 치유가 필요한 존재들의 경우 예외 없이 모두 레무리아 때 왔다. 그것은 전체에 녹아든 채 전체를 느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반면 레무리아 이후에 온 존재들은 모두 순수한 에너지를 지닌 존재들로서 진정한 전체가 무엇인지 알고자 했던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지구에 온 존재들 중 지구 바깥으로 나간 존재는 없었고, 모두가 지구의 마지막 시기까지 함께 머물러왔다. 치유가 필요하든 그렇지 않든, 지구에 온 존재들은 모두 지금의 이 시기를 위하여 지구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금은 중요한 시기이고, 너무나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가이아프로젝트를 총결산하는 가장 중요한 때이다. 어떤 의미에서 지구는 지금부터 존재들이 체험하게 될 일을 위하여 이제까지 준비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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