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느 시대나 지식과 정신 의식을 보다 확대하고 싶다는 큰 소망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리고 만물에 충만히 침투해 있는 신이신 의식과 일체화한다는 궁극 목적을 향하여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진보 발달해 왔다. 이 진보 발달을 언제나 방해하고 있는 최대 원인은 무엇이라고 하든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결여시킨다는 사실이다.
저 위대한 대사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에게는 천국의 신비를 가르쳐 주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안 가르친다. 그 사람들은 보아도 못 보며 들어도 못 듣기 때문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올바른 이해의 결여라고 하는 사실이 언제나 대사(master)와 사람들 간의 장애가 되어 대사가 가르치려고 생각하는 바를 사람들이 못 알아 듣는 것이다.
이 세상 안에는 스승이 약속한 최종 목적에 도달하고 싶다고 바라면서도 그것을 발견하기 위한 참다운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스승 자신이 그것에 관한 하등의 지식도 이해도 안 가지고 있고 또 자기 자신도 한번도 가본 일이 없는 곳에 딴 사람을 인도하려고 하는 점에서도 그 책임의 반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도자는 즉 장님이 장님의 안내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확실한 의식을 가지고 무한한 신에게까지 도달하지 아니한 자가 타인에게 무한계에 관하여 가르쳐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의식적으로 무한에 도달한 선생이라 할지라도 자기 의식의 진동(바이브레이션)을 제자의 의식의 진동(바이브레이션)과 조화시켜(무한한 신이 그 무한성의 하나로서 표현하고 있는) 무한계에까지 제자를 데리고 둘이서 갔다 올때까지는 참으로 제자를 이끌어 주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무한계에 있어서 언어나 문자로써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우리들이 보거나 듣거나 하게 된다. 그 일들을 이해할 수 있는 자는 그 무한계의 레벨까지 자기의식을 고양시킨 자뿐이다. 많은 종교 지도자는 내오(內奧)의 신비에 관한 진실한 이해를 갖지도 못하고 단적으로 매혹적인 언어나 술어를 많이 구사함에 의해서만 무한 신비에 관하여 그럴 듯하게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물질계에도 무한계에도 적용할 수 있는 유일한 법칙은 “어느 차원계, 어느 세계이든지 거기는 그곳에 사는 사람(의식, 혼)에 의하여 한정 받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신으로서 상징화하고 있는 초대의식이 무한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무한성을 갖기 때문에 초물질적인 무한계(스페이스)에 있게 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또 “세계는 거기에 사는 ‘의식’에 의하여 제한 받는다.”는 법칙은 무한성을 가지는 의식에 있어서는 유한계에 하강하여 현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사실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은 또 동시에 유한계에 사는 자는 무한계에까지 고양하지 않는 한 무한계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 스페이스(세계, 장)한정의 법칙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무한성의 영 의식은 3차원 물질계에 하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납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영성화한 의식이 무한계에까지 승화하여 거기서 신의 무한성과 접촉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만 비로소 참 지식(진리)이 얻어지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아데프트adept(성자, 대선생)라고 불려지는 대사들은 첼라chela라고 부르는 직(直)제자에 대해서만 무한 신성 의식의 고급계를 나타내 보여줄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무한성을 이해하는 깨달음에 의하여 인류가 가지는 모든 인생관을 변모(역창)시킬 수 있는 법칙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 전우주, 전혹성, 전위성 등등 모든 것이 법칙에 의하여 질서화되어 있고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우리들 인간도 또한 일정 불변의 법칙에 따르는 길에 의해서만 구도(求道)의 최종점에 도달함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우주의 법칙과 질서의 기초 위에 자기 인생을 구축하는 자는 무질서와 혼돈의 세계에 살고 있는 자보다는 대사와 만날 기회가 굉장히 많은 것이다. 시련과 고뇌에 의해서만이 자기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무질서(Karma)의 원인을 제거할 수가 있는 것이고, 따라서 평온하고 리드미컬한 대우주의 광명의 바이브레이션(진동)이 들어오게 되는 것임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때문에 목적에 대한 부동심을 갖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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