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에 애쓰는 사람들이 마스터(대사, 성자)의 발견에 실패하는 원인은 인과의 법칙과 윤회 전생의 2대 기본법칙의 이해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이 2대 법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만으로써도 자기의 인생을 통어하여 조화한, 보다 평온한 길로 들어가게 될것이다. 개개인의 인간에 일어나는 인생의 하나 하나의 일은 모두 인과법칙이라는 엄청난 법칙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창조된 태초로부터의 모든 행위가 인과율의 인을 만들어 내고 이 인이 결과로서 현출할 때에 그 개인이 대처한 행위가 또 별도의 결과를 장래에 가지고 오는 다음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 일반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하루 하루가 자기가 자기의 미래를 창출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의 사람들은 인과율을 운명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 생각은 결코 타당성 있는 진리가 아니다. 원인이 만들어지고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인간은 자기에게 출현해 온 인과율의 결과에 처하는 경우에 자기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방법을 취해도 좋다고 하는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개인의 과거가 만든 원인의 결과에 부딪쳤을 때에 자기의 의지로 선택한 대처 방법이 언젠가의 세상, 언젠가의 미래에 어딘가에서 자기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새로운 원인으로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하등의 이유도 없이 전혀 일신에 상관없는 것 같은 원인에 의하여 발생된다고 생각되는 환경이나 돌아오는 일에 끊임없이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나 언젠가의 전생의 과거에 있어서 그 사람이 쌓아 올리고 만들어 낸 원인이 드디어 지금 나타났다는 이유뿐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헤아려 보면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좋지 않은 일만 거듭 행하고 있지만 그래도 잘만 살고 있는 경우가 있으나,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쌓아 놓은 악인의 결과를 이 세상에서의 훗날이라든가 딴 내생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직면하고 부딪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물질과학은 인간의 ego(자아)가 출생에서 시작되고 죽음으로 끝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은, 인간은 불멸의 혼을 가지고 있어서 육체의 사후에도 혼은 존속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신학에 의하면 각 개인의 물질 육체가 만들어지는 것과 동시에 새롭게 그 사람 자신의 고유의 영원불멸한 혼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 혼은 창조자인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기 전에 이 지상 생활에 있어 테스트로서 일련의 시련에 견디고 그 고뇌를 견디어 내어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또 어느때든지 그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 온다면 그 육체는 묘 속에 파뭍혀지고 심판의 날에 거기에서 부활하여 혼은 기쁨의 장소나 징벌의 장소의 어느쪽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심판의 날에 혼은 물질계에 있을 때의 행한 죄와 흠을 심판받아 처벌받고 응보받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설에 대해서는 하나의 큰 의문이 생긴다. 그 의문이란 “도대체 육체 사후에서 최후의 심판일까지는 혼이 어디에 가서 있게 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아직 심판을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천국에도 갈수가 없고 지옥에도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적 의문에 대한 유일의 만족할 만한 대답은 윤회전생이라는 사실이며 인간 재생의 설이야말로 지금의 의문에 논리적 설명을 해주는 것이 된다. 우리들은 신을 공정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혼의 최후의 심판이 지금 말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신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지극히 불공평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혼은 이 세상에서 육체에 수분간이나 수시간 동안 머물렀을 뿐 곧 죽음을 맞이했고, 다른 혼은 물질계에서 50년, 60년, 70년의 육체적 생활을 마치고 나서 이 세상을 떠난다. 이 두 혼이 전혀 같은 인생 체험에의 기회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몇 십 년이나 살아남은 사람에 비교한다면 몇 시간밖에 살지 못한 어린아이 따위는 어떤 경험도 없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평등한 심판을 하는 유일한 조건은 모든 생명이 아주 같거나 아니면 유사한 인생 경험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판단을 내릴 수 가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버이의 죄가 자식들에게 갚음을 가져오고 더욱이 손자에게까지도 미치게 된다고 듣고 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앞서 말한 각각의 혼은 육체와 함께 창조되었다는 설에 비추어 본다면 신은 참으로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 새로 태어난 혼이 다른 혼의 행위 때문에 고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그러한 식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법률가나 경찰관이 닥치는 대로 누군가를 연행해 와서 전혀 다른 사람이 범한 죄책을 뒤집어씌워 벌을 주어도 공평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어떤 사람은 불구의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고 혹은 태어날 때부터 병든 몸으로 태어나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대한 진실한 답변의 이유는 그 사람의 전생, 즉 전의 화신 때에 있어서 차생에 그러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면 안되었던 원인을 만들었다 고 하는 사실이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 받는 가정상황, 사회환경 등은 다 전생에 만들어 낸 원인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시시각각으로 우리들은 다음 재생 때에 받을 가정환경, 사회환경등을 규정할 원인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혼의 윤회 전생론의 이해는 만약 그것이 없으면 모순에 꽉 차 보이는 인생의 온갖 사항에 대하여 전도에의 광명과 희망을 비추어 주는 것이된다. 우리들이 자기의 현 인생은 지금까지 몇 만 번이나 통과해 온 과거 중의 하나의 단적인 반영에 불과한 것이며 이로부터도 많은 재생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모든 것이 공평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지금의 인생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유일한 찬스가 아니다. 인생에서 인생으로, 연속적으로 전생(轉生)해 온 것이다. 지금도 전생을 계속하는 것이고 언젠가의 장래에 인생 그 자체를 극복 졸업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인생의 극복은 동시에 사(死)의 정복이고, 윤회 전생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다. 모든 인간의 혼은 일률적으로 유일신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언젠가는 자기의 궁극목적을 완료 달성하여 재차 신에게 돌아가야 할 존재인 것이다.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표현한 굉장히 아름다운 도표는 대지에 뿌리박고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수목에 비유되고 있다. 나무가 그 양분을 빨아올리는 대지는 신, 즉 우주의식에 해당하고, 나무는 물질 세계에 해당되며, 그 나무의 한 잎 한 잎의 잎들은 각각 우리들 인간의 육체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무의 잎은 전부 똑같게 보이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한 잎 한 잎은 근소한 차이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흡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의 얼굴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무 속을 흘러 말단의 잎사귀까지 가고 있는 수액(樹液)은 우주의식인 신으로부터 나와서 인간의 물질 육체에까지 와 있는 혼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나무의 액, 곧 나무의 생명소(素)가 가지나 잎에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각 인체에는 위대한 혼이 머물고 있어 우주의식(하나님)과 일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각 잎사귀는 가을이 되면 홍엽이 되어 그 나무로부터 떨어진다. 이것은 즉 우리들이 죽음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실이 각 잎에 일어난 것이다. 땅에 떨어진 잎은 비를 맞아 썩고 자기가 의지했고 거기에서 나온 대지인 본원 바이브레이션에 다시 하나로 되어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의 액은 나무의 뿌리가 있는 곳으로 거두어지고 이듬해 봄이 되면 다시 새 나뭇잎, 곧 우리 인간들의 육체인 새 화신에 해당되는 것의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단적으로는 잎이 교체될 뿐인 변화의 과정을 겪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혼도 육체의 죽음이라는 변화에 의하여 일단 우주로 물러갔다가 재차 새 육체, 새 생명, 새 화신으로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우리들의 소위 죽음이라는 것은 단순한 변화에 지나지 못하는 것으로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의 죽음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과거의 기억을 되찾는다면 과거의 자기 잘못의 원인을 알고 현재에 있어서는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편리하고 유익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자기에게 일어나 덮쳐오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무엇이나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대처해 나가려고 결심한다면 그것은 신과의 일체화에 접근해 가는 무아무욕 헌신적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 되는 것이다.
먼저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알게 되면 여러 가지 신변의 사항들이 별안간 일어나 덮쳐오는 것이 아니고 당연하고 원활한 인생의 흐름으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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