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세계대전때에 독일에서 만든 가장 규모가 큰 잠수함은 Xb-Type 씨리즈였다. 이 씨리즈로 1942년과 1943년 사이에 일곱개의 잠수함이 제작되었는데, 1,650톤의 무게를 가진 이 잠수함에는 2,000톤 이상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다. 크기로는 90미터 길이에 9미터의 넓이를 가진 이 초대형의 잠수함은 물위로는 17노트, 잠수해서는 7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다. 디젤엔진이 장착된 이 Xb-Type의 잠수함은 경제속도인 10노트로는 무려 20,000해리 이상을 운행할 수 있어 이러한 잠수함은 군수품의 장거리 운송을 위해 빈번히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두개의 어뢰발사관이 있으며 14개의 어뢰가 실려있다. 갑판위에는 37mm의 대공포가 부착되어 있으며 기관총등이 설치되어 있다. 이와같은 대형 잠수함으로 U-234가 제작된 것은 1943년초였다. 이미 일곱개의 같은 모델의 잠수함중 네개가 영국 군함에 의해 침몰되었고 1944년에는 세개가 파손된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중에서 U-219는 극동 아시아를 운행 했었고, U-233과 U-234는 발틱해안만을 운행 했었다. 보수를 마친 1944년 5월 27일 U-233 잠수함은 북해일대에 기뢰부설을 위해 출항했고, U-234는 특별 임무를 기다리고 독일의 키일 해군기지에 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4년 6월 20일 처음으로 U-234는 보수이후의 시험운행에 나섰다. 약 4주간 이 잠수함은 발틱해안에서 시험운행을 해야했다. 해면으로부터 180미터까지 잠수할 수 있는 것이 이 Xb-Type의 특징이다. 성공적인 시험운행을 마치고 U-234는 8월 18일 단치히(Danzig)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8월 30일 다시 키일의 해군기지로 돌아왔다. 그런데 U-233은 불행히도 기뢰부설 도중 영국과 미국의 노바 스코티아(NOVA SCOTIA) 구축함대에 의해 침몰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Blockade-Running Between Europe and the Far East by Submarine 1942-44, Library of Congress)
해군사령관 되니츠로부터 1945년 1월 15일에 펠러(Johannes Fehler)함장에게는 잠수함 U-234를 가지고 27명의 특수임무를 수행하게 될 승무원들과 함께 일본 동경으로 항해 하라는 명령이 하달 되었다. 승무원들중에는 두명의 일본인 장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U-234에는 젯트엔진(Me262)의 부품과 비밀문서들과 50개이상의 동경으로 보내는 콘테이너들이 이미 실려 있었다. 일본제국 해군장교인 히데오 토모나가는 콘테이너마다 정성을 들여 “U235 日本行”이라고 표시를 했다. 그런데 이 콘테이너에는 우라니움 U235가 들어 있었다. 550킬로그램의 U235는 오늘날의 기술에 의하면 두개의 원자탄을 만들 수 있는 량에 해당된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일본인 장교는 공군대령인 겐조 쇼지였다. (참고문헌: Allison W. Saville, German Submarines in the Far East, New York 1961)
키일의 해군기지에서는 이날 성대한 예식이 행해졌는데 이 자리에는 일본의 대사인 히로시 오시마가 친히 나와서 300년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사무라이 대검”을 펠러함장에게 선물했다. 아무쪼록 무사히 동경에 도착하기를 기원한다면서 오시마 대사는 펠러함장과 독일의 기술자들과 친히 굳은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브링게발트(Bringewald)와 루프(Franz Ruf)는 젯트엔진과 로켓트의 전문가로서 일본에 가서 부품들을 조립하고 일본의 젯트엔진과 로켓트생산에 기술고문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밖에도 공군대령 산드라트(Sandrath), 레이다 전문가 슐리케(Schlicke)박사, V1 로켓트 전문기술자 멘첼(Menzel), 해군대위 헬렌도른(Hellendorn), 레이다통신 담당관 해군소령 히르쉬펠트(Hirschfeld)등이 탑승했다. 한마디로 U-234에는 최첨단의 기술자, 최첨단의 젯트엔진과 V1 로켓트의 부품, 그리고 정밀히 정제된 우라니움 U235등이 독일에서 일본으로 운반되고 있었다. 이미 1943년말에도 이와 유사한 잠수함의 운행이 동경으로 향했었다. 그때에도 젯트엔진의 부품과 기술자들 그리고 큐리슈톡이라 불려진 첵코슬로바키아산 우라니움을 실은 잠수함이 일본을 향해 떠났었다. 그런데 도중 싱가포르에서 영국함대에 의해 공격을 받아 침몰되었다. 이렇게하여 일본에서는 독일로부터의 최첨단기술이전에 벌써 여러차례 실패하고 말았다. 이번의 U-234의 운행은 독일을 위해서나 일본을 위해서나 기필코 성공해야만 했다. U-234에 우라니움이 선적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섯명이었다. 펠러함장, 기관사 에른스트(Ernst), 화물책임자 파프소령, 그리고 두명의 일본인 장교. 그밖에는 이 잠수함에 얼마나 위험한 방사능오염물질이 선적되었는지 그리고 만일에 기뢰와 충돌하든가 아니면 적의 공격을 받아 잠수함이 파손될 경우 모두들 방사능오염으로 인해 크게 피해를 입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키일을 떠난 U-234는 1945년 3월 26일 노르웨이의 크리스챤산드(Kristiansand)에 도착했다. 노르웨이에서 영국과 가장 많이 교전하게 되는 카테가트(Kattegat)지역만 무사히 벗어나게 되면 밤에는 물위로 15노트, 낮에는 잠수하여 7노트, 평균 10노트의 속도로 대서양을 항해 할 수 있다. (참고문헌: Manifest of Cargo for Tokyo on Board of the U-234, Library of Congress).
1945년 4월 14일 펠러함장에게는 다음과 같은 명령이 하달 되었다. “U-234! 항해도중 반드시 최고통치자의 명령을 준수하라. 나치본부.” 또 4월 16일에는 다음과 같은 무선통신이 전달되었다. “U-234! 오직 나의 명령에 의해 항해하라. 맡겨진 특수업무에 충실키 위해 항해하라! 해군 사령관 되니츠.“ 그리고는 계속해 용기를 북돋아주는 전문이 도착했다. ”동료들이여! 이번의 업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우리 독일은 이미 승리해 있을 것이다.“ 또 며칠 뒤에는 ”친구들이여! 낙심치 말라! 독일이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그대들을 무사히 항해하게 할 것이다.또 무사히 귀한하게 할것이다“는 전문이 도착했다. 이와같은 지나친 축전으로 인해 펠러함장에게는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망망대해인 대서양을 지나 아프리카를 돌아 희망봉을 경유하여 인도양으로 나오면 이미 항해의 절반은 성공된 셈이다. 싱가포르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되면 거기에서는 일본 잠수함의 호송을 받게 된다. U-234는 안전하게 운행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100미터이하로 잠수하곤 했다. 적의 어떤 잠수함도 이와같은 깊이로 잠수할 수 없기 때문에 구축함에게도 또 적의 잠수함에게도 발견되지 않고 장거리 운행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절대의 보안유지를 위하여 해도(海圖)는 모두 꽃의 이름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또 본부와의 교신에도 반드시 꽃해도로 운항의 위치를 알리고 또 지시를 받는다. 우선 당분간은 ”장미화원(Rosengarten)”으로 향해 U-234는 운행하고 있었다. "장미화원”은 대서양의 약속된 어느 지점을 뜻했다. 그곳에 도착하게 되면 본부로 연락을 하고나서 또 다시 새로운 위치로의 항로를 지시 받게 된다. 통상적인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하여 7월 중순이면 일본 동경만에 도착하게 된다.
1945년 4월 30일 펠러를 위시한 U-234의 승무원들은 히틀러의 죽음에 대한 뉴스에 접하고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되니츠가 히틀러의 후계자로 되었기 때문에 U-234에게로 특명이 곧 내려질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5월 4일 해군본부로부터 모든 독일의 잠수함은 무장을 해제하고 노르웨이의 크리스챤산드로 돌아오라는 내용의 전문을 받았다. 일본장교들은 강력히 일본으로의 항해를 고집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도 일본으로 무사히 항해하는 길만이 난국을 타개하는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일본이 태평양에서 연합군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자연히 유럽의 전세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상황판단아래 펠러는 본부로부터의 전문을 무시하고 계획된 항해를 계속했다. 그런데 펠러함장은 줄곧 미국과 영국의 단파교신을 청취하고 있었다. 그해 5월 8일 독일은 무조건항복에 동의했다고 하는 뉴스와 일본은 독일과의 동맹을 끊고 독자적으로 연합군과의 전쟁을 계속할 것을 선포한다는 뉴스가 청취 되자 승무원 전체의 민주적인 회의가 펠러함장의 주선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인 장교들은 U-234의 일본행을 주장하면서 독일인들의 일본에서의 신분을 절대로 안전하게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펠러함장은 일본으로의 항해는 무의미 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펠러함장은 카나다의 할리팍스 연합군 해군기지로 향하고 항복하는 의견을 말했다. 브링게발트, 루프, 산드라트등은 일본으로의 항해를 고집했고, 또 어떤이는 남태평양으로 가서 모두 해산하자는 의견을 내기도 하여 승무원들간에는 의견들이 분분했다. 그러나 펠러함장의 설득으로 항복키로 결정했다. 일본장교들은 스위스에서 산 시계들을 승무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펠러함장은 일본인들이 하라키리의 방식으로 자결을 기도할지도 몰라 “사무라이 대검”을 철저히 보관하고 있었고 일본인들은 별도로 격리하여 가두었다.(참고문헌: The U-234 War Diary, Library of Congress).
토모나가와 그의 가족사진
겐죠 쇼지 대령 해군항공대
1945년 5월 13일 할리팍스의 해군기지에서는 “U-234! 무장을 해제하고 현 위치를 밝히라. 그리고 매 4시간마다 항로와 위치를 보고하라!”는 전문이 계속 도착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토모나가와 쇼지 두 일본인 장교는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살했다. “여기의 돈은 가족들에게 우리의 죽음을 알리고 유해를 넘겨주는데 사용하고, 우리는 불명예스럽게 사는 것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다고 유가족들에게 전해달라”는 내용의 유서와 약간의 스위스 프랑을 남겼다. 펠러함장과 독일 승무원들은 일본인들의 유언을 들어주기로 하고 잠수함을 미국 뉴 햄프샤이어주 포츠마우스(Portsmouth)의 수톤(Sutton) 연합해군기지로 향했다. 할리팍스로부터의 전문에는 답변을 하지 않고 펠러함장은 수톤기지에다 항복의사를 전하는 전문을 보냈다. 그는 또 군의관을 불러 일본장교들의 사망여부를 다시 확인하고나서 “사무라이 대검”을 토모나가의 몸에 채우고 일장기를 덮어 정중히 유해를 안치 시키도록 명했다. 이 광경을 묵묵히 바라만 보고있던 슈리케박사는 마리크로필름통을 들고나와 바다로 내어 던졌다. 그리고는 히르쉬펠트소령에게 말했다. “저 필름안에는 내가 개발한 로켓트가 있습니다.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는 신형로켓트 입니다.” (참고문헌: Wolfgang Hirschfeld, Das letzte Boot-Atlantik Farewell, Muenchen 1989).
펠러함장은 기관실에다 엔진을 끄라고 지시하고 승무원들은 모두 조용히 제자리에 위치해 있으라고 했다. U-234의 위치는 정확히 북위 47도 7분, 서위 42도 25분이었다. 수톤기지에서는 “왜 정지하는가?”고 하는 전문을 보냈다. 펠러함장은 “엔진에 고장이 생겼다”고 답했다. 그날은 1945년 5월 14일이었다. 수톤기지로부터 군함이 와서 U-234를 호송하여 5월 16일 포츠마우스의 잠수함 기지에 정박시켰다. 1945년 5월 17일자 포츠마우스 헤랄드지에는 “독일의 대형 잠수함 U-234 1,600톤급 포츠마우스에 정박하다. 세명의 독일인 장군과 두명의 사망한 일본인 장교가 탑승해 있다“고 보도되었다. 1945년 5월 19일 토요일자 포츠마우스 헤럴드 신문에는 비교적 상세한 기사가 실렸다. “U-234에는 비밀문서에 해당하는 설계도와 신형 항공기제작을 위한 젯트엔진과 로켓트의 부품들이 선적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본의 공군에게로 보내려던 것이다. V-타잎의 로켓트와 폭탄장치도 선적되어 있다. 이 모든 물건들과 서류들이 현재 미국의 해군에게 인계되었다.“ 그러나 이 잠수함에 우라니움이 들어 있었다고 보도된 것은 오랜시간이 지나고난 후의 일이었다. 워싱톤에서 이 사실에 접하자 그로브스장군은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에서 일본에다 우라니움을 보내줄 정도이면 일본은 어느 정도로 원자탄을 개발했었는가? U-234가 싣고 온 550킬로그램의 우라니움은 그 즉시로 오크리지로 보내졌다. 이 우라니움도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투하된 원자탄제조에 사용되었다. 그래서 오펜하이머는 비록 미국이 원자탄을 만들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투하했지만 그 내용물은 독일제였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Charlie Gray, Surrender at Sea, Portsmouth New Hampshire 1945).
포츠마우스에서 미해군에 의해 예인되는 U-234
독일의 U-235 핵연료를 가지고 제조한 미국의 원자탄
Little Boy (히로시마에 투하) Fat Man (나가사키에 투하)
출처 : 나치독일의 어제와 오늘 - 金政陽 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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