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BOOK/도인(道人)

도인(道人) 1 - 3. 관가보

기른장 2025. 3. 1. 19:36

3. 관가보

산시성에 위치한 관가보(關家堡)는 60명의 대가족이 사는 씨족사회의 중심지였다. 관가보는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250만평에 이르는 숲과 농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주위의 풍경과 조화를 이룬 고전적인 중국식 건축물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하나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관가보는 관씨 집안이 무사 계급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씨 집안이 답답하거나 유쾌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무사 집안이면서도 정치가와 학자로 활동했으며, 예술적인 풍취까지 갖추고 있었다. 관가보는 하나의 성역(聖域)이었고 조용한 나무 그늘과 졸졸 흐르는 시냇물, 아름다운 꽂들이 피어나는 장원(莊園)이었다. 그곳에는 나무와 기와, 동과 금 등으로 솜씨 좋게 만든 누각들이 있었고, 우아한 격자무늬 창문이 난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주택들의 내부에는 명품으로 칭찬 받는 가구들과 값비싼 골동품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관씨 일가는 4대가 넘게 이 관가보에서 살아왔다. 고색창연한 관가보의 구조는 대단히 기묘했다. 성은 산기슭을 돌면서 뱀처럼 구불구불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한쪽 벽과, 강철못이 박힌 대문 하나만이 드러난 전략적 이점도 돋보였지만, 도교의 풍수지리학에 따라 설계된 관가보의 구조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 관가보를 세웠던 관씨 집안의 옛 어른이 도사에게 성의 위치와 외형적 모습을 결정해 달라고 요청했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바람과 물과 땅, 그리고 우주의 힘들을 고려하여 위치와 방향이 서로 주고받는 복잡한 영향들을 계산하는 지관(地官)의 조언에 따라 주택을 건축한다. 관씨 집안은 가문과 우주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고심했으며, 기의 흐름을 따름으로써 집안이 번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관가보의 자리를 잡아 둔 도사는 용의 형상을 이루는 산의 가장자리가 가장 이상적인 장소라고 말했었다.
 
그리하여 관씨 집안의 60명의 식구들과 백여 명의 하인들은, 폭포가 개천이 되어 가로질러 흐르고, 하늘을 찌를 듯한 지붕들이 연이어 보이는 요새에서 살게 되었다.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지역은 그 자체가 천연의 요새였으며, 사이훙의 할아버지와 그의 직계 가족들이 그곳에 모여 살았다. 친척들은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서 살았으며, 하인들과 마구간, 강당과 연무실(練武室)은 용의 등과 배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었다. 청기와를 얹은 관가보의 지붕들은 가까이서 보면 용의 비늘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독특한 건축술과 푸른 나무들에 가려 관가보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청나라가 멸망하던 1911년,  할아버지는 정계와 학계, 무림에서 은퇴하여 성벽으로 둘러싸인 관가보에서 생활하였다. 한때 황후의 섭정체제 아래서 문부성 장관을 지냈으며, 사회에서 존경받는 학자이자 무림의 고수였던 할아버지가 이제 고독을 벗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은퇴한 뒤 할아버지는 우아한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평소 시화를 즐기고 도교의 경전 공부를 낙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부유하고 강력한 권력을 가진 귀족 가문의 어른이었기 때문에 세상일과 완전히 떨어질 수가 없었다. 비록 관가보 안에 은둔해 살았지만 할아버지는 언제나 적에게 둘러 싸여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책임질 일들도 많았기 때문에 중국 사회의 혼란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을 수 없었다.
 
관가보는 거의 정기적으로 여러 도적과 적들, 암살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1920년대까지 중국은 아직도 혼란스러운 무법 천지였다. 엄청난 무리의 산적들이 정기적으로 마을과 부유한 농가를 습격했다. 관가보 사람들은 무사들로 구성된 악당들을 싸워 물리쳐야만 했기 때문에 모두들 무술을 익혀야 했다. 그 당시엔 총이 널리 사용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개인적인 재주가 생존을 보장해 주었다.
 
당시에는 권력자들과 가문들 사이의 적대관계가 흔한 일이었으며, 해결이 안 된 문제는 음모로 이어지곤 했다. 할아버지는 은퇴한 몸이었지만, 공직자 생활 당시 백성을 보호하던 청렴결백한 관리였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 부와 권력과 명성을 놓고 두 가문이 경쟁할 때면, 통상적으로 암살을 계획하여 우위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관씨 집안은 약간 특이한 이유 때문에 적대적인 사람들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는 중원 9대 문파로 대표되는 「무림(武林)」이 있었는데, 관씨 가문은 무사집안으로서 무림에서 쟁쟁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무림에는 나름대로 규칙과 예법이 있었는데, 그 규칙들중의 하나는 일 대 일의 대결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무림의 무인들은 단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도 서로 도전하고 싸웠다. 자신이 쓰러뜨린 상대가 많을수록 무인으로서의 위신이 높아졌기 때문에 사이훙의 할아버지 같은 사람은 좋은 목표가 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신체적 모멸보다도 중국 사회의 혼란상을 더 고통스럽게 받아들였다. 경호원들과 하인들이 꽤 있었으나, 할아버지는 항상 무술 훈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적 공격은 그가 간단히 눌러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내부의 사회적 부패, 근대화의 물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내전, 군벌들의 횡포, 그리고 젊은이들의 가치관의 변화 같은 일련의 사회적 · 시대적 문제들은 무시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큰 것이었고, 개인이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일이었다.
 
그는 관가보의 문을 잠가 그 같은 문제들을 잊어버리려고 했지만, 마지막 문제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성벽은 관가보 내부의 젊은 세대에 의해 무너져 가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대립하던 사람은 바로 그의 아들이며 사이훙의 아버지였던 관 완홍이었다.
 
관 완홍은 교양 있는 인품을 갖춘 그의 부친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격렬하고 무모한 성격에다 지나치게 야망이 큰 그는 중국 군부의 장군이었다. 그는 오로지 부귀와 권력과 명성만을 추구했다. 완홍은 시화에 대해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으나 부친이 그토록 열심히 수집하는 전통 시화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근대 중국 사회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질과 잘 맞는 군인이 되었으며, 그것을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믿었다.
 
할아버지 자신은 무인이었으나 완홍이 군대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시 중국인들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무사가 되는 것과 군인이 되는 것이 반드시 같은 일은 아니었다. 무사는 무술적 기예를 완벽하게 닦아 자기 완성을 이루는 데 힘썼을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의 기사처럼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지키는 정의의 옹호자였다. 무사의 유일한 관심은 완전한 무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며 정의를 위해 싸우는 영웅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러나 군인의 길은 그렇지 않았다. 군인은 도덕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학살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군인은 자기와 싸울 만한 상대를 찾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무분별하게 살상하였다. 자기 자신의 숭고한 원칙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지휘자의 수중에서 조종되는 도구일 뿐이다. 할아버지에게 군인이란 용병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권력자의 꼭두각시였고, 삼류 정치인이자 청부살인업자였다.
 
아버지와 아들은 수년 동안 그렇게 싸웠다. 그 긴장감은 갈수록 더욱 심해져 갔고 마침내는 서로 만날 때마다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의 갈등은 관가보 안의 거주지를 재배치하는 물리적 조치까지 가져왔다. 할아버지는 완홍과 그의 가족을 할아버지의 처소와 멀리 떨어진 별채로 쫓아 버렸으며, 군복을 입거나 총을 휴대한 채로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것은 낡음과 새로움, 고전과 현대 사이에 일어난 갈등이었다. 어쨌든 완홍은 아직까지는 부친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가문의 최고 어른이었으므로, 완홍은 부친 앞에 나타날 때는 언제나 전통적인 복장을 갖추었다. 그러나 완홍이 보여 주는 진보적 세계는 소리 없이 중국적 이상들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사이훙은 이 두 사람의 갈등 속에서 자라야 했다. 완홍은 사이훙을 자신의 뜻대로 키우려고 했다. 사이훙의 모친은 미술과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으나, 남편의 뜻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이훙이 학문을 닦기를 원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가 아버지처럼 군대에서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야망을 위해 네 살 때부터 사이훙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부모의 압력은 강력했지만 사이훙은 순종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부모는 사이훙이 고집 세고 다루기 어려운 아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사이훙은 할아버지의 생활방식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을 알고 있었던 할아버지는 사이훙을 눈여겨보았다. 어느 날, 사이훙이 술에 만취한 아버지에게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자 할아버지는 기회를 포착하고 선제권을 잡았다. 가문의 어른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할아버지는 사이훙을 데려다가 자신의 거처에서 살게 하였다. 사이훙은 가끔 부모님에게로 가서 놀다 오기도 했지만, 그때부터 계속해서 할아버지와 같이 살게 되었다. 사이훙이 일곱 살 되던 해부터 할아버지가 그를 키우게 된 것이다.